뒷골목 프론티어 – 프롤로그

 

그 날 밤, 최정태는 자기 집 초록색 대문 앞에 앉은 채 고개를 숙여 울고 있었다.
자기가 갑자기 이렇게 되고 만 현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눈물을 그칠래야 그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기 집 대문 앞에서 얼굴을 묻은 채 우는 정태는, 어제까지의 모습을 가지지 않았다. 틀림없이 어제까지였다면, 정태는 그 나이 또래, 즉 중학교 1학년 남학생답게 몸집도 커졌고 머리카락도 짧으며 아직 중학생 티가 묻어나는 조금 거친 얼굴생김새를 하고있을 터였다. 초등학교 때 골목대장으로 동네를 누빈 아이답게, 정태는 상당히 투박하면서도 의지가 세고 고집도 있는 느낌을 주는 남자애였다. 물론 어릴 적부터 정태는 그게 자기 모습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히려 그렇지 않다면 크게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게, 지금 정태가 이러고 있는 가장 큰 까닭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에 눈이 동그래진 정태한테, 아버지란 사람은 항상 그렇듯 나약한 모습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아버지 역시 자기 나이와 비슷한 시점에, ‘그런 모습’이 된 바 있다는 말이었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자기가 정태만할 때에, 누군가한테 이런 일을 ‘당했다’고 했다. 즉, 아버지가 그런 일을 당한 것 때문에 자기도 이런 모습이 되고 만 것이었다.

지금 정태의 모습은, 그 ‘어제까지의’ 모습과 크게 달랐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이 머리카락이, 어제 자기한테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오늘 ‘이렇게 된’ 뒤, 정태는 다른 누군가를 만날 수가 없었다. 애초에 밖에 나가지도 못했다. 갑작스레 자기 모습이 ‘이렇게’ 크게 바뀐 탓이었다.
이런 모습을 어떻게 친구들한테 보인단 말인가.
하루아침에 모습은 물론,나이까지 껑충 뛰어버린 자기를.

정태도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 날 잠에서 깨니 정태는 ‘원래’ 모습과 달라져 있었다. 아무런 예고없이 찾아온, 절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 정태가 친구들한테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건 다 이것 때문이었다.
지금 멀리서 본 자기는, 절대 열네 살 중학교 남학생으로 보이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사실, 정태는 지금 정말로 중학교 남학생은 아니었다.
아마 지금 다른 이들 눈에, 정태는 대학생 전후쯤 되는 여성일 따름이었다. 물론 이런 상황을 정태가 바랐을 리 없었다. 자기도 전혀 몰랐던 까닭으로, 정태는 지금 이런 모습이 되어있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바뀐 모습에, 정태가 하루아침에 적응할 리 없었다. 이 모든 일은 바로 오늘 아침에 일어난 것이다. 오히려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제발 부탁이니 꿈이었으면, 하고 몇 번을 바랐지만, 어깨로 느껴지는 이 머리카락은 절대 꿈이 아니었다.
중학교에 들어오면서부터 부쩍 커져, 정태의 자랑이기도 한 키 역시 묘하게 줄어있었는데, 이게 정태를 좌절하게 만드는 까닭 중 하나였다. 물론 이렇게 주저앉아있는 지금은 별 의미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정태는 자꾸만 그게 신경쓰여서 견딜 수 없었다. 주저앉아있어도 느낄 수 있는 무릎 쪽 감각과, 남한테 말할 수도 없는 아래쪽 감각은 그러한 느낌을 돋우고 있었다.
앞으로 자기는 어떻게 되는 걸까. 왜 자긴 이런 신세가 될 운명이어야만 했는가.
그런 무서운 마음을 애써 무시한 채, 정태는 여전히 무릎에 머리를 묻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순간이 얼른 끝나기를 빌고 또 빌면서.

시간은 한밤중이라, 골목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태는 숨을 죽여 가만가만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이의 인기척은 물론, 고양이 우는 소리, 개짖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 아무도 없는 느낌이, 정태의 외로움을 더 부추기고 있었다.

아직 중학교에 막 들어온 골목대장 남학생 정태한테, 이런 상황은 무척 힘들고, 괴롭고, 무엇보다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자기도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그런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아직 중학생밖에 안 된 정태가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도, 달빛은 항상 정태를 비추고 있었다. 그 빛은 가로등보다 한없이 먼 데 있었지만, 어쩐지 정태한테는 그게 가장 가깝게 느껴졌다. 어쩌면 자기랑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단 개, 그런 느낌이 드는 까닭일지도 몰랐다. 솔직히, 정태는 지금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홀로 남겨진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 친한 친구들과도, 앞으론 어떻게 ‘친하게’ 대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아무도 없는 곳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태가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탁.

그 소리와 함께, 정태는 자기 머리에 손이 놓이는 걸 느꼈다. 그 손은 원래 자기가 가졌을 법한, 아니, 그것보다 훨씬 두껍고 묵직한 거였다.

누군가 자기 바로 앞에서, 머리를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틀림없이 낯선 이란 걸 알면서도, 정태는 어쩐지 무섭지 않단 걸 깨달았다. 정태는 원래 자기가 누군가한테 우습게 보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만약 또래가 이런 짓을 했다 치면, 정태는 결코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머리 위에 놓이는 손이 전혀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틀림없이 낯선 사람일 텐데, 어쩐지 자꾸만 마음이 편했던 것이다. 차마 고개는 들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정태는 자기가 이 순간을 받아들이고 있단 걸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들었는데, 남의 마음을 무지 잘 알아보는 사람이 세상에 있대.

정태는 초등학생 시절, 우연히 친구가 한 말을 떠올렸다. 그 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알이, 어쩐지 무척 실감나는 듯해서였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딨어. 만약 자기가 지금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다면, 아마 정태는 지금도 그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생전 처음 보는 게 틀림없는 사람이 자기 머리를 쓰다듬는데도, 정태는 신기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아무런 확신도 없었지만, 정태는 자기가, 지금 저 사람을 틀림없이 믿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그 까닭은 자기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정태 생각으로는 그랬다. 틀림없이 눈앞에 있는 건 자기보다 훨씬 나이도 많고, 훨씬 어른스러운 형일 거라 생각하며.

-그런데 누구세요?

그런 말을 할 용기도 내지 못한 채, 정태는 그저 가만히 그 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대체 왜인지는 여전히 정태도 알 수 없었다. 평소 자기라면 절대 이러지 않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저 이러고 싶었다. 어쩐지 이러고 있으면, 복잡하게 엉켰던 마음조차 천천히 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문득, 정태는 이런 생각을 했다,
자기도 이렇게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존재가 되면 좋겠다, 란 생각을.

물론, 지금 정태한테 그럴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불안해서, 하루라도 빨리 이런 상황을 어떻게든 하고싶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정태는 그런 존재가 되어보고 싶었다. 어릴 적, 그리고 어떻게 보면 지금도, 또래 친구들을 이끌고 골목대장 노릇을 하던 것과 같은 마음으로.
언젠가 자기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정태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 누군지 알지도 못하지만 뿌리치고 싶지도 않은 손을 가만히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 날로, 정태가 지금까지 쌓아온 ‘그나마 평범한’ 운명은 아주 멀리 사라져버렸다.
정태는 더 이상, 그런 ‘평범한’ 삶을 살 수 없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