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정태는 무척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밤중에 기껏 탄산음료인 콜라 하나 마시겠다고, 자기 음료수를 그 열받는 여자애한테 ‘부탁’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정태는 달빛이 들어오는 자기 방 창가 근처에서 누운 채, 혼자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열받는 마음이 도무지 가라앉을 거 같지 않았다. 어쩐지 지금 이 순간이 무척 분해서, 오늘은 일단 몸조심해야한다는 생각도 날아갈 지경이었다.
-뭐, 형은 못 가죠? 바로 근처니까 잠깐 갔다오면 되는데.
근처 편의점까지 좀 다녀오라고 협박하자, 그 여자애, 하나는 마치 사람 놀리기라도 하는 듯 열받는 목소리로 이런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일단 자기 마음을 가장 잘 알 텐데도, 그따위 말을 막 던져댄 것이다.
사실 까짓거, 정태가 다녀오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일단 편의점 자체가 멀리 떨어진 건 아니어서였다. 한 오분쯤이면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겁없는 정태라 한들, 밖에 ‘누가’ 있을지도 모를 한밤에 이런 모습으로 나갈 순 없었다. 만약 나갔다가 골치아파지면, 그 땐 자기도 어쩔 수 없었으니까.
왜 하필 이런 날 밤에 콜라가 먹고싶은 거야?
그런 블만도 있었지만, 정태는 방금 나간 그 애, 하나한테 더 화가 났다. 그 말투는 자기를 아주 얕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지금 자기 배가 찢어질 만큼 아프거나 말거나, 걔한텐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다. 사실, 그 얜 직접 겪은 일도 많지 않았다.
옛날에 내가 쟤한테 뭘 잘못했나?
자기 골목대장 시절을 유일하게 아는 여자애다 보니, 정태는 가끔 하나가 무섭곤 했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자기와 같은 환경에 놓인 애 역시 하나였다. 안 그래도 드문 집안내력을 지닌 애가 이렇게 가까운 데 있단 건, 그것도 어릴 적 알고지낸 적이 있단 건 어떻게 보면 기적이었다. 하나 걔가 자꾸 자기랑 맞먹으려드는 것만 빼면.
지금 쟤 눈에, 자긴 엄청 만만하게 보이겠지.
자기가 동네오빠로도 느껴지지 않을 걸 생각하면, 정태는 괜히 억울해질 때도 있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자긴 항상 부조리했다. 다른 애들이 느낄 필요조차 없는 괴로움과, 정태는 항상 맞서싸워야 하는 것이다. 믿음직한 데라곤 이만큼도 없는 약해빠진 아빠 때문에.
하필 그 때, 정태는 다시 아랫배가 아파오는 걸 느꼈다. 이것도 다 아빠 탓이었다. 하나 그 기집애 탓이었다. 저 둘만 없었으면, 자기는.
“형, 자요?”
그 말에 순간 깜짝 놀란 정태는, 얼른 자는 척하려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벌써 달은 자기가 모르는 사이 하늘 높이 떠있었다. 이런 밤중에도 골목을 지나는 차 불빛이 잠시 방을 환하게 만들었다.
이런 마음을 들켰다간, 자긴 민망해서 고개도 못 들 게 틀림없다.
대체 이럴 거면 왜 콜라를 사오라 한 건지 자기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정태는 눈을 꽉 감았다. 쟤한테 또 놀림받지 않으려고.
자기들이 자유롭게 있을 수 있는 곳은 바로 이 골목.
자기들이 뼈를 묻을 곳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곳도, 틀림없이 이 골목길뿐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