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뒷골목 그늘의 프론티어’의 샘플입니다. 본편과 몇몇 달라지는 곳이 있을 수 있습니다.
늦은 오후, 최경태는 자기 방에 누운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옆으로 누워있는 탓인지, 오늘따라 여기에 자기 혼자만 남겨진 듯한 느낌이 경태를 둘러싸고 있다.
왜 불이 꺼진 방은 이렇게나 마음이 편한 걸까.
교복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은 채, 경태는 죽 이불도 깔리지 않은 바닥에 누운 채 저물어가는 햇살을 느끼고 있었다. 벌써 저녁 다섯 시가 되어가려 해서인지, 커튼을 쳤는데도 햇살이 용케 방 안을 조심스레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때보다 어두우면서도 오히려 더 반가운 그 햇살은, 경태의 마음도 편안하게 해주는 것만 같았다. 사실 경태는 이제 낮의 그 밝은 햇살보다, 자기 집처럼 골목길 구석에 가만히 있는 곳과 어울리는 저녁무렵 햇살이 더 마음에 들었다.
물론, 만약 자기가 중학교 1학년, ‘그 일’이 있기 전이었다면 반대로 생각했을 터였다. 자기가 이렇게 바뀌리라 누가 생각했을까. 경태도 그걸 생각하면, 가끔 묘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기는 ‘이런 모습’이었다.
타고난 체질 운운이란 문제 하나 때문에, 자기는 지금 또래들과 달리 치마를 입은 채, 이런 식으로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된 것이다.
경태는 어릴 적, 상당히 개구장이인 애였다. 동네에서는 골목대장으로 통했고, 만날 자기보다 어린애들을 끌고다니며 여기저기 쏘다니곤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자애들한테 장난치며 놀 때도 많았다. 물론 지금 와서는 무척 후회하는 일 중 하나지만.
좀 말썽을 많이 부리는 남자애이긴 했지만, 물론 경태는 결코 나쁜 애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의란 말을 무척 좋아하며, 자기네 동생들을 괴롭히는 놈들이 있으면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서곤 했다. 어느 정도 몸집도 있었고, 무엇보다 패기넘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나쁜 놈들이라 한들 경태하고 함부러 맞서러는 애들은 그다지 많진 않았다.
물론 중학교에 들어서, 경태는 더더욱 어른스런 모습이 되었다. 그 나이 또래 남자애들은 대부분 그렇겠지만, 특히 경태는 갑자기 키가 더 커졌으며, 몸도 더 튼튼해졌다. 자기도 물론 그런 모습을 무척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앞으로도 자기는 더 커지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경태는 자기도 모르는 ‘체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 체질을 경태가 알게 된 건, 자기가 직접 그 체질을 ‘겪게’ 되고 나서였다.
어느 날 경태는, 잠에서 깬 뒤 깜짝 놀랐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운 건 둘째치고, 아무리 생각해도 틀림없이 몸집이 전보다 줄어든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라면 모를까, 몸이 ‘줄어드는’ 건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경태한테는 그랬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결코 이것만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큰 열에 시달린 뒤 겨우 정신을 차린 뒤, 경태는 자기 모습이 크게 바뀌었단 걸 깨달았다. 그건 단지 키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없을 만큼, ‘지금’ 이 모습은 경태가 바라던 게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거울 너머로 멍하니 본 자기 모습은 자기가 그토록 괴롭히던 여자애들과 닮아있었던 것이다. 원래 있어야 할 게 없고, 없어야 할 게 있는 게 특히.
그 때가 되어서야, 경태는 가끔 집에 들어오는 아버지한테 집안 체질에 관한 얘길 듣게 되었다. 지금까진 별 거 아니라 생각해 제대로 듣지도 않은 바로 그 체질을.
자기는 중고등학교 시절 거의 대부분을, ‘이런 모습’으로 지내야 하는 듯했다. 언젠가 돌아갈 수 있다고는 해도, 오랫동안 살아온 이 동네에서 친구들한테 ‘이런’ 모습을 보여야만 하는 것이다. 다른 애들은 자기보다 훌쩍 커지는 상황에, 경태만 혼자 이렇게 ‘작아져’ 있었다. 게다가 인상이나 분위기가 거의 바뀌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더더욱 그 괴로움은 컸다.
앞으로 자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다른 애들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고민을, 경태는 지금 당장 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경태와 같은 체질은 지금 어느 나라에서든 가끔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기껏해야 희귀병이나 알레르기 비슷한 인상을 줄 뿐이었다. 실제로 언젠가 틀림없이 원래대로 돌아가니(물론 그 땐 그 나이에 걸맞게 바뀔 터였다), 괜히 큰 걱정할 일도 없었다. 희귀병에 걸리거나 몸이 좀 안 좋은 애들이 그렇듯, 경태 역시 다른 아이들이 알아서 ‘배려’해 줄 터였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어딜 가나 정보가 나도는 세상에, 멀리 이사한다 한들 좋을 일도 없었다. 오히려 낯선 이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혼자 지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경태는 지금 학교 대신 근처에 있는 다른 학교로 전학가는 길을 골랐다. 이렇게 하면 자기도 어느 정도 친근한 데서 지낼 수 있었고, 잘 아는 애들한테 이런 모습으로 만날 부담 역시 덜 수 있었다.
처음 가는 학교이긴 했지만, 다른 애들은 경태를 그럭저럭 잘 맞아주었다. 어쩌면 눈치챈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물론 희귀병이나 마찬가지인 일이므로 괜히 이상한 걸 묻는 애들은 없었다. 덕택에 경태는 쉽게 이 학교에서도 친구를 만들 수 있었다.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지만.
경태는 여전히, 학교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친구를 잃는다는 게 무서웠던 것이다. 가끔 옛 친구들과 만날 때도, 전과 다름없이 대하려 애를 썼다. 아무 생각도 없이, 일부러 밝은 척, 그리고 다른 애들과 비슷하게.
하지만, 실제 경태는 전과 달리, 너무나 진지한 성격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또래들과 다른 환경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다른 또래들처럼 ‘나이에 맞게 자라나던’ 모습에서 갑자기 이렇게 몸집이 줄어든 사실 때문에, 경태는 혼자 가만히 생각하는 게 더 편해졌던 것이다. 떠들썩한 곳보단 조용한 게 더 편해졌고, 다른 애들과 어울리는 것보단 닫힌 곳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게 더 기분좋았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지금, 경태는 혼자 이 골목 구석에 있는 집 옥상에 올라가서 시간을 보내는 게 좋았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가까이서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편하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시시각각 바뀌는 세상을 보면서 혼자 생각하는 것도 좋았다. 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구석에 있는 집은, 경태한테 요새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너무나 편한 보금자리와 같았다.
언젠가 자기가 원래대로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
경태는 가끔, 그런 생각을 진지하게 하곤 했다.
그 때, 눈앞에서 문이 열렸다. 경태가 고개를 들어 거길 보니, 이런 상황에서 가장 만나기 민망한 여자애가 자길 바라보고 있었다.
“…하, 하나야?!”
차마 이제와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경태는 얼른 고개를 다른 데로 돌리려 했다. 하지만 방바닥에 옆으로 누워있는 이 상황에서, 고개를 돌리는 게 쉬울 리 없었다.
그 아이, 유하나는 경태가 중학교 3학년 말에 우연히 알게 된 여자애였다. 당시 여기로 막 이사온 하나가 지리를 잘 몰라 알려준 게 계기가 된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거기서 그만이었겠지만, 하나는 달랐다. 경태도 어쩌다 보니 전화를 받고 만나는 사이가 되었으며, 지금도 학교는 다르지만 여전히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이제 ‘가깝게 지내는’ 정도가 아니었다.
얼마 전부터, 하나는 갑자기 경태가 사는 이 집에서 같이 지내게 되었다. 부모님이 먼 곳으로 출장을 간 탓에, 머물 곳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는 이왕이면 경태가 있는 이 집에서 같이 지내길 바랐고, 거기에 따라 얼마 전부터 여기서 같이 살게 되었다. 사실 학교가 다르기에 자주 만날 일이 많진 않았던 둘이기에, 경태는 자길 이만큼 믿는 하나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나는 자기가 생각해도 참 ‘천사’에 가까운 애였는데, 애가 너무 착하다는 것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항상 웃는 모습을 보일 뿐더러, 당황하는 일도 없고, 무엇보다 남이 어려워하면 앞장서서 도와주고 싶어했다.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우려 항상 비닐봉지를 들고 다닐뿐더러, 다른 아이들이 안 좋은 말을 해도 놀라우리만치 빙빙 돌려가며 잘 피해나가곤 했다. 경태라면 지금 당장 주먹을 날려도 모자랄 상황이라 한들, 하나는 항상 웃음기를 빼지 않고 분위기를 편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정말 이런 애가 나랑 동갑이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분위기만 보면 누나에 가까운 하나를 보며, 경태는 항상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 여전히 경태는 자기가 이런 애랑 어느 정도 가깝게 지낸단 것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만약 원래 모습이었다면, 이런 애랑 가까워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하나가 다정한 애라 한들, 낯선 남자애하곤 당연히 거리를 뒀을 테니까.
아직 경태는, 하나한테 자기가 누구인지 제대로 말한 적이 없었다. 사실 말할 필요도 없었다. 괜히 어색해지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지내는 게 더 편했던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언젠가는 자기도 ‘원래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데. 자기도 그러고 싶고.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경태는 만날 이런 데 누워있더라. 어디, 나도 한 번…”
“으, 으, 으응?!”
경태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하나는 가만히 자기 뒤에 눕더니, 이윽고 감싸안은 채 등에 머리를 푹 집어넣고 있었다.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나는 항상 갑작스레 짐작치 못하던 행동을 하곤 하는데, 그게 또 이뤄지고 만 것이다.
대체 이건 무슨 뜻일까.
자기 배 쪽에 놓인 두 손이며 등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느낌을 맛보며, 경태는 혼자 고민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가장 큰 단점은, 정말로 ‘누구하고나’ 이렇게 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남자애들과 이렇게 하진 않지만, 동성이라면 어느 정도 친해도 달라붙을 때가 많다는 거였다. 심지어 같이 지내는 다른 애랑도 이렇게 하니, 이것만으론 하나가 경태를 어떻게 보는지 알 길이 없었다.
여자애들은 원래 이런 식으로 서로 달라붙어 지내는 건가. 얘가 자길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고민하지도 않고.
경태는 아직도 하나가 자길 어떻게 보는지 알 수 없었다. 자기를 친구로 보는지, 아니면 소중한 사람이라 여기는지, 그냥 친근하게 대하는 또래들 중 하나인지조차 몰랐다. 가끔 하나가 다니는 학교로 갈 때 모습을 보면, 이 애가 여러 친구들과 자기만큼 다정하게 지낸다는 건 잘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이런 생각조차, 하나가 보면 우습게 여길지도 몰랐다.
이런 마음 그대로, 올해도 흘려보내고 마는 걸까.
복잡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경태는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이런 생각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도록. 더 이상 아무 고민도 하지 않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