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이상한 기적 – 04/11월 30일의 혼란

그 날로부터 며칠쯤 지나, 이제 11월도 거의 끝나갈 때쯤.
강산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묘한 느낌으로, 몇 달 전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강산은 그 때로 돌아간 것처럼 생생하게 모든 걸 느꼈다. 물론 그 땐 형이 원래 모습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퍽 아득하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강산은 집을 나와 자취하고 있었기 때문에(여러 문제로 다시 집에 돌아왔지만), 형과 만날 일이 드물었다. 형은 부모님 바람에 따라 집에서 지냈고, 당연히 강산과 만날 일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가끔 강산이 반찬을 얻으러 집에 올 땐 형을 만나는 일도 있었다. 그리 잦은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강산은 그런 걸 피하려고 일부러 형이 없을 거 같을 때를 골라 집에 가곤 했다.
하지만, 그 날은 하필이면 재수가 단단히 옴붙었던 듯했다.
“…뭐야, 있잖아?”
냉장고를 뒤지던 강산은, 형이 있는 방 쪽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고 몸이 굳는 걸 느꼈다. 하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 도망갈 길이라도 있었다. 조심스레 반찬을 챙긴 뒤 현관으로 가려던 때, 바로 등뒤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형을 보고 아는 척도 안 하냐? 도둑놈처럼 뭐야, 이게.”
“누, 누, 누가 도둑놈이야?!”
순간 무척 찔리는 걸 느꼈지만, 강산은 모른 척 그렇게 소리쳤다. 사실 도둑놈이란 말을 듣는 것도 전혀 즐겁지 않았지만, 아무튼 저 형한테서 도망칠 수 있다면 뭘 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
“너, 요즘 뭐하고 지내냐?”
“잘 먹고 잘 산다. 왜?”
갑자기 형이 이렇게 뜬금없는 말을 해오는 바람에, 강산은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사실 몇 달만에 본 것이니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지만, 강산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저 형과 엮여서 정신건강에 좋을 일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은 킬킬대더니, 이런 말과 함께 강산의 바로 옆을 지나갔다.
“잘 좀 하고 지내라. 니가 어떻게 지내는지 안 봐도 뻔하다.”
“뭐, 뭐가 뻔해…그런 말이나 싸지르고 지금 나가는 거야?!”
아무렇지 않게 자기보다 먼저 현관을 지나가는 형을 보고, 강산은 결국 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쯤되자, 강산은 정말 머리로 피가 올라오는 걸 느꼈다. 대체 저 형이란 작자는 뭔데 자기한테 이런 식으로 대하는지 알 수 없어져서였다.
하지만, 강산은 차마 저 ‘쓸데없이 세보이는’ 형한테 대항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저 형이 자기보다 훨씬 잘났단 건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솔직히 강산이 저 형보다 못한 건 틀림없지 않은가. 체력은 물론, 정신을 따져봐도 형은 자기보다 한 수 위였다. 그러니 강산은 저 형한테 뭐라 말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도 강산의 성격상, 이런 굴욕을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니까,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이런 젠장, 이런 망할, 으, 으아악!”
결국 이런 소리와 함께, 강산은 분노로 침대 위에서 뒹굴대다 멋있게 떨어지는 걸로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를 부드득 갈며 몸을 일으킨 뒤, 강산은 오늘 재수 옴붙었단 걸 확신했다.
게다가 가만히 생각하면, 오늘은 틀림없이 일요일이 아닌가.
아마 하늘은 강산한테 대놓고 크게 화내라고 일요일 아침부터 이런 선물을 주신 게 틀림없었다.

아무튼 이렇게 된 이상, 강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걸어나왔다. 거실로 나오니, 아직 은솔이 이부자리 위에서 자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잘 자니 다행이네 뭐.
다행히도 지금은 햇살이 거실로 들어오고 있었기에, 은솔이 어떻게 자는지가 환히 들여다보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리 지금은 같은 나이(29세)라 한들, 형보다 좀 모자라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다. 일단 겉으로 봐서는 나이값에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렇게 어린애처럼 잘 수 있는 건 신기하기 이를데없는 일이었다.
어쩐지 애 원래 모습을 조금 알 거 같은데.
새근새근 자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며, 강산은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애는 잠버릇도 없는지, 정말 조용히 쿨쿨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 지나치게 잘 자는 모습도, 어쩐지 겉모습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더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하면 그 말이 맞기도 했고.
그 때, 갑자기 은솔이 눈을 뜨곤 강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아, 어?!”
“그래. 자, 잘 잤냐?”
눈이 동그래지는 은솔을 보며, 강산은 어색하기 이를데없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사실 자기도 그냥 보러 온 것 뿐이지만, 그래도 어쩐지 이 상황이 너무나 민망하게 느껴졌다.
“아, 네, 아니, 응. 일찍 일어났…났네.”
“그러게다. 나도 깜짝 놀랐지 뭐야. 이렇게 일찍부터 눈이 뜨이다니…”
강산이 그렇게 말하는 동안, 은솔은 자기 머리를 잠깐 만지작대더니, 이윽고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사실 중학교 2학년 여자애 입장에선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침에 눈을 깨니 자기 띠동갑만한 오빠가 바로 눈앞에 서 있었으니까.
하지만, 강산은 뭔가 좀 중요한 걸 하나 더 잊고 있었다.
“아, 그, 저…”
은솔이 갑자기 몸을 웅크리는 걸 보고, 강산은 순간 깜짝 놀랐다. 왜 그런지 영문을 알 수 없어서였다. 하지만 잠시 뒤, 강산은 얼른 자기 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대충 이게 어떻게 된 건지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바보같은 놈, 그런 거 하나 제대로 안 생각해주고 뭐하는 거야, 이게?
강산은 살면서 자길 그렇게 두들겨패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자긴 정말 눈치가 없었던 것이다. 띠동갑 오빠가 이거 하나 몰라줘서 어떡한단 말인가. 자긴 다 알고 있는데.
앞으론 내가 먼저 일어나든가 늦잠을 자든가 해야지, 원.
그런 생각으로, 강산은 침대에 누운 채 핸드폰을 꺼냈다. 오늘이야말로 만나야 할 그 후배와 연락하기 위해.

하지만 잠시 뒤, 강산은 머리를 싸맨 채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 자식, 내가 그렇게 싫은가?”
강산이 연락하려던 그 후배는 오늘도 간신히 연락이 되자, ‘오늘도 바빠. 미안’이란 말과 함께 전화를 끊고 말았다. 물론 강산은 어제도 그저께도 죽 후배 동생인 비상과 연락을 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돌려주면, 강산도 더 이상 연락을 할 도리가 없었다.
이 망할 놈. 넌 대체 언제 연락이 되는데?
결국 메시지 100통이라도 내던지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던 강산은, 대충 이런 말을 문자 10개에 나눠적어 보내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물론 동생놈 비상은 이런 말조차 웃어넘길 터였다. 그 놈도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주제에 쓸데없이 배포가 크니까.
자기가 생각해도 이건 너무 유치한데.
그런 생각에 투덜대며, 결국 강산은 형한테 연락을 넣기로 했다. 이 사람이라도 만나고 싶어 몸이 근질댔던 것이다. 사실 강산이 며칠 동안 죽 끙끙대는 것도 다 이 사람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몇십 분 뒤.
“…그래. 잘 지냈어?”
강산은 바로 옆에서 자길 ‘올려다보는’ 형한테 그렇게 말을 걸었다. 형은 며칠 전과 다른 게 하나도 없었다. 저 쓸데없는 당당한 눈빛도 물론 그대로였다.
“형 때문에 요즘 잠을 못 잔다고. 이게 무슨 꼴이야?”
“넌 그러니까 여자친구가 없지. 이 자식아.”
“아 진짜, 이 사람을 그냥 확…”
강산은 다시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는 걸 느꼈지만, 어떻게든 참으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래봤자 치사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기 떄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이 화는 풀고 싶었다.
“…잠깐 담배 좀 피운다. 괜찮지?”
강산은 그 말과 함께, 주머니에서 담뱃곽을 꺼냈다. 항상 하던 대로 한 대 피울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형 앞에서 피울 생각은 없었다. 좀 미안하긴 하지만, 잠시 자리를 비울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길 보고 있던 형이 갑자기 이상한 짓을 시작했다. 가방에서 빼빼로를 꺼내더니 한 개비 입에 물고 있는 것이다. 마치 담배라도 피우는 것처럼.
“지금 뭐하는 짓이야, 이 사람아?”
“나도 심심한데 웃긴 척이나 해야지. 니가 피우는 걸 그냥 앉아서 기다릴 순 없잖아. 안 그래?”
그러고 보니 이 사람도 담배 피우지?
강산은 이제야 중요하다면 중요한 사실 하나를 다시 깨달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라도 피우고 싶을까. 자기가 이렇게 만들어놓고선.
이런 식으로 담배를 끊게 되면 기분이 좋긴 할까.
“이번 기회에 좀 끊지?”
“그럼 넌 되겠냐?”
그런 생각으로 던진 질문에 형이 이런 식으로 대답하자, 강산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얼른 담배갑을 쥔 뒤 공원 뒤쪽으로 사라지는 동안에도, 형은 아무렇지 않게 빼빼로를 입으로만 우물우물 먹고 있었다.
이런 망할. 아무튼 저 형한텐 이길 수가 없다니까.
속으로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강산은 담배갑에서 천천히 담배를 빼냈다. 지금껏 있었던 일들을 다시금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