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인류 모두 소녀(억지) / 들어가기 전에

그 날도 햇살은 따뜻했다. 이렇게 햇살로 곱게 물든 골목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나른하다 못해 눈이 감겨올 지경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들뜬 목소리가 그런 느낌을 한층 더 부채질하고 있었다.
이게 그, 준용이 ‘이렇게 된’ 뒤 이 골목에서 시간을 보내며 지켜본 풍경이었다. 다른 시간대도 아닌 평일 낮, 이런 식으로 별 볼 것도 없는 골목을 빤히 바라볼 일은 물론 없었으므로, 이 어떻게 보면 평범한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도 지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갑작스럽게 닥친 이런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매일 이런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겨우 몇주일 전까지만 해도 이제 막 40대에 접어들 무렵인 회사원이었던 자기가, 이런 곳에서 참으로 묘한 상황에 놓이고 만 것이다.

요즘 그의 나날은 이랬다.
자기가 얹혀살게 된 집에서 매일 찾아오는 초등학교 고학년~중학생 ‘또래’들의 기상천외한 모습을 구경하는 것. 가끔 자기도 온갖 사건에 말려드는 것. 이 역시 평소라면 절대 없었을 일이었다. 자기가 요즘 여자애들을 너무 모르는 건지, 아니면 여기에 드나드는 얘들이 너무 특이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기 애들 감성엔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본인들은 전혀 그렇게 여기지 않았지만.
이렇게 지낸 지 벌써 반달쯤 지났나.
준용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마치 미적지근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듯한 이 느낌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그저 존재하기만 하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생충이 된 듯한 느낌이라고. 매일같이 회사에 가서 ‘생산성이 있는’ 일을 해오며 그게 자기가 지닌 가치라 여기던 그한테, 지금과 같은 나날은 어쩐지 그런 것만 같았다.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기생충. 하지만 묘한 건, 그게 무척 암울하게만 느껴지진 않았다는 거였다. 대체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는 수수께끼였지만.
그 때였다.
“거기 계셨어요?”
그런 낮은 목소리와 함께, 20대 중반쯤 되는 남성이 준용 곁으로 다가왔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그 남성은 무척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사실 다른 아이들과 대보면, 남성, 아니 이 아이는 준용을 함부로 대하지도, 지나치게 가깝게 대하지도 않았다. 그 아이의 이름은 미아라고 했다. 준용과는 반대로, 여기에 다니는 다른 또래 여자애가 ‘다른 모습’이 된 것이었다. 준용과 비슷하지만 다른, ‘다른 모습’을 지닌 동지라 할 수 있었다. 또래 여자애들 사이에서는 꽤 믿음직한 존재인지, 다들 아무렇지 않게 여기에 모이곤 했다. 준용이 지금 얹혀지내는 이 곳도 미아 명의인 모 빌라 2층이었다.
사실 미아와 만나기 전까지 준용은 이런 꼴이 된 건 자기 하나뿐이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미아를 알게 된 뒤, 준용은 사실 자기가 살아온 세상은 처음부터 이런 게 아니었을까, 란 생각을 진지하게 하게 되었다. 어째서일까. 묘한 느낌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지금껏 당연하게 여겼던 게 사실은 그렇지 않단 걸 깨닫게 되고 마는 것이다. 미아와 이렇게 눈을 마주칠 때마다.
이런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 아이, 미아는 지극히 또래 여자애다웠다. 여러 사정이 있어서 다른 아이들을 돌보거나 앞에 나설 때가 많았지만, 사실 그렇게 간이 큰 아이가 아니란 건 준용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기에, 다른 아이들을 감싸는 역할을 할 때가 많을 뿐이었다. 사실 다른 아이들뿐만 아니라, 지금은 준용도 어쩔 수 없이 미아의 도움을 받을 때가 많았다. 자기보다 나이도 훨씬 어린 아이한테 이런 식으로 도움받는 것도 민망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정말로 어쩔 수 없었다. 사실 갑작스레 이런 모습이 된 반달 전부터, 준용은 가끔 무척 앞날 및 상황이 불안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미아란 존재는 준용의 생각보다 훨씬 힘이 되곤 했다.
“저, 저한테 무슨 볼일…볼일 있으세요?”
준용이 그런 생각에 빠져있자, 미아는 그게 묘했는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그 때가 되어서야 자기가 혼자 멍하니 있었단 걸 알아챈 준용은, 미아한테 아무 것도 아니라고 둘러대고 나서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모든 인류는, 뿌리까지 거슬러올라가면 사실상 모두 소녀가 아닐까, 라고.
허무맹랑한 생각이라 속으로 웃어넘기면서도, 준용은 꼭 그렇지만도 않으리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근거는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자기가 이렇게 보고 겪은 게 근거아닌 근거였다. 만약 자기가 이런 상황에 놓이지 않았다면, 그 역시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라면.
과연 그런 말을 덮어놓고 허무맹랑하다 무시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