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과연 누군가를 ‘구제’할 수는 있는 것일까.
만약 될 수 있다고 한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을 구제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박형식한테, 이러한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자기가 뒷골목에서 동네 건달들한테 마구잡이로 두들겨맞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나쁜 놈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두들겨패는 거야?
속으로 이를 부드득 가는 형식이었지만, 사실 가만히 생각하면 잘못한 건 자기였다. 아무리 날이 어둡다 해도 그렇지, 인적이 없는 뒷골목에 자기가 스스로 들어가서 저들과 만나고 만 것이다. 그나마 여기까지라면 조금 나았다. 괜히 저 나쁜 놈들의 시비에 말려들었다가 말대꾸 좀 잘못했다고 이 지경이 되고 말았으니까.
대체 왜 난 이런 식으로 매나 벌고 다니는 거지?
이제 20대 중반씩이나 된 어엿한 남자였지만, 지금 형식은 건달들한테 발이나 팔로 미친 듯이 두들겨맞는 한낱 샌드백이었다. 자기도 이게 이상한 일이란 건 알지만, 도무지 그러한 까닭을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건 어릴 적부터 죽 그랬다. 이상하게 형식은 중학교 때부터 괜히 힘센 애들하고 말대꾸를 하거나, 이렇게 후미진 데에 제발로 들어가선 걸레조각만큼 너덜너덜하게 두들겨맞는 일이 흔했다.
하지만 그래도, 형식은 이 놈들의 말을 그냥 넘겨들을 수 없었다. 자기가 저 놈들한테 당해낼 수 없을 만큼 허약한 편이란 건 알지만, 저 말을 그냥 넘기면 자기가 부정당하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서든 험한 말 한두 마디 정도는 되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그 결과물은 지금과 같지만.
“어유, 이 자식 맷집도 센데? 자주 맞았나 보지?”
“이 자식들이 입만 살아선. 어차피 하류인생 주제에…”
“뭐라고?!”
“으, 으악! 그만 때려, 이 망할 자식들아. 그만 하라고!”
그렇게 형식은 또 질 게 뻔한 말싸움을 하고선 불량배들한테 비오는 날 먼지털듯 맞고 있었다. 대체 왜 자긴 이런 삶을 사는 걸까. 형식도 이젠 자기 자신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형식은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뭐, 뭐야?!”
갑자기 불량배들이 자기 배를 찌르던 다리를 멈추고, 이상하단 표정으로 골목 저편을 바라봤다. 갑자기 배를 푹푹 찌르던 무릎이 사라지자, 형식도 눈이 동그래져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던 골목에, 너무나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거기엔 틀림없이 사람이 있었다. 언뜻 보기에 그리 위험하지도 않은, 긴 머리를 늘어뜨린 젊은 여성이었다. 범상치 않은 기운이라곤 했지만, 형식이 보기에도 무섭진 않은 느낌이었다. 그보다는, 뭔가 ‘자기네들과 아주 다른 느낌’이 강했다.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을뿐더러, 앞으로도 보지 못했을 이상한 느낌이.
그 여성은 검은 머리카락을 지니곤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새하얀’ 느낌을 주었다. 어쩌면 그 여성이 현대 대한민국에선 절대 생각지도 못할 ‘흰색 저고리’를 가지런히 입고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이리로 천천히 다가오는 그 여성이, 자기 생각과 달리 너무나 앳된 느낌이라서인지도 몰랐다.
얼굴생김새를 보면 분명 자기랑 나이가 비슷하거나 어릴 텐데, 왜 이렇게 무시할 수 없는 느낌인 걸까.
형식은 어쩐지, 그 여성이 자기보다 훨씬 오랜 인생경험을 쌓은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앳되면서도 다정하게 느껴지는 표정이,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이 여성은 누구일까. 형식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 낯선 ‘여성’이 신경쓰이는 걸 느꼈다.
사실, 여성은 흰색 저고리를 입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현실과 엇나간 느낌이었다. 대체 어디에서 나타난 건지 알 수 없는 느낌이 그러한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하지만 형식은, 저 옷만큼 여성한테 어울리는 차림도 없으리란 생각을 강하게 했다. 어쩐지 이 여성한텐 이 옷밖에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대체 이건 어떻게 되어먹은 상황이야?
자기도 모르게 여성한테 깊이 빠져있던 형식은,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닫곤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꼈다. 하지만 하나 틀림없는 건, 여성이 지금 자기네들 쪽으로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이런 장정들이 네다섯 명 있는데도, 변변한 무기 하나 손에 들지 않은 채.
이 사실 하나 때문에, 형식은 여성이 점차 무섭게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건 자길 패고 있던 건달들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저 낯선 여자는 대체 뭐란 말인가.
자길 패던 건달들의 흔들리는 눈빛에서, 형식은 쉽게 그걸 알아챌 수 있었다.
“야, 가, 가자. 이런 데 얽매이면…”
자기 생각이 맞았는지, 건달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는 게눈감추듯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고작 무기 하나 들지 않은 젊은 여성한테, 몸도 건장한 젊은 남자들이 겁에 질려 도망친 것이다.
저 놈들, 저럴 거면서 날 두들겨팼단 말이야?
형식은 이제 어이가 없어져서, 여성을 빼고 아무도 없어진 골목에 혼자 주저앉아있었다. 일어설 기운도 없을 뿐더러, 저 여자한테 벗어날 수 있을 것같지도 않아서였다.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그렇게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는데, 갑자기 여성이 형식 쪽으로 천천히 다가와, 가만히 고개를 숙여 자길 쳐다봤다.
설마 날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겠지?
일단 그렇게 생각했지만, 형식은 가슴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어쩐지 뭔가 무서웠던 것이다. 이 여자는 틀림없이 보통 이들과 달랐다. 그건 겉모습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까닭이기도 했다.
“그래. 아름아. 저 자가 틀림없는 거 같지?”
분명 자기와 아름이라 불린 이 여자만 있을 뿐인데, 어딘가 가까운 곳에서 이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굵은 것도 무거운 것도 아니었지만 묘하게 관록이 느껴지는, ‘보통 이라 생각되지 않는’ 남성의 목소리였다.
“네. 여기가 맞는 것 같습니다.”
아름이라 불린 여성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한 번 형식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곤 아주 천천히, 새하얀 손을 자기한테 가만히 내밀었다. 마치 그걸 잡으라는 듯이.
뭐, 일단 문제는 없겠지?
그런 생각으로, 형식은 가만히 그 따뜻한 손을 잡았다. 흰 손과 달리, 참으로 현실감이 느껴지는 따스한 손이었다. 그 손을 잡고 일어나며, 형식은 자기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 손을 제대로 잡았단 걸 알아챘다. 지금껏 너무나 자기를 내버려가며 살았기에, 여자 손을 잡을 날이 오리란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금 아름이란 여자의 눈을 쳐다봤을 때였다.
-뭐, 뭐, 뭐야?!
형식은 방금, 너무나 말도 안 되는 걸 ‘확신’하고 말았다. 이 여자가 자기 모습뿐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마저 보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건 자기 마음을 읽었다는 것처럼 ‘가벼운’ 게 결코 아니었다. 여자가 본 건, 자기 마음 겉부분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자가 본 건, 틀림없이 자기 마음 가장 깊은 곳,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어둠이었다.
형식조차 잊어버린 어릴 적 일을, 여자는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이다. 보통 상황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다 코웃음쳤겠지만, 어째서인지 지금 형식은 그걸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형식의 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자기도 잊고 만 어릴 적 어둠을, 대체 왜 저 여자가 ‘알아채고’ 만 것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일 리 없는데.
이 여자 앞에서 센 척해봐야 아무 소용없단 생각에, 형식은 사시나무 떨듯 몸이 마구 뒤흔들리는 걸 느꼈다. 자기가 남한테 ‘가장 말하기 싫은’ 비밀을 들켰단 생각만으로도, 형식은 지금 당장 여기서 뛰쳐나가고 싶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자기한테 그럴 기운이 있을 리 없었다.
“…도련님.”
그 여자는, 자기 겉모습만큼이나 오래된 말투로 형식을 가만히 불렀다. 그 눈빛만 봐도, 형식은 지금 당장 고개를 돌리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는 틀림없이,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이다.
그 때, 여자, 아름이 천천히 입을 뗐다. 그 모습만큼이나 침착하면서도 다정한, 묘하기 이를데없는 목소리였다.
“제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요. 그런 마음에.”
형식은 그 말을 듣자, 눈물마저 왈칵 쏟아질 것 같단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 여자는 틀림없이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이다. 거짓말을 해도, 모른 척해도, 여자 앞에선 아무 소용없을 터였다. 이 여자는 정말 자기 깊은 곳을 꿰뚫어본 것이니까.
이미 형식 자신은, 그 때 일을 제대로 떠올리지도 못할 지경인데.
그런데도 이렇게 죽을 만큼 괴로운 건 어떻게 된 까닭일까.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정말로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어져 안달이 난 형식을 앞에 두고, 여자, 아름은 천천히 자기를 소개했다. 사실 형식은 이제 이 여자와 그만 거리를 두고 싶었지만, 그건 자기가 정할 일이 아니었다.
“저는 아름이라 하며, 이 곳이 아닌 ‘대한국’에서 전기수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 도련님은 잘 모르시리라 생각되옵니다만…”
“…뭐라구요?”
물론, 형식은 그 말대로 저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도 아닌 대한국은 뭐고, 전기수는 또 뭐란 말인가. 잠깐, 그나마 전기수는 들은 바 있었다. 옛날에 고등학생이었을 즈음, ‘이야기꾼’이란 식으로 얼핏 들었을 뿐이지만.
아름은 형식의 표정을 보면서도, 천천히 자기 소개를 이어나갔다. 마치 그게 자기 사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혹시 괜찮으시다면, 소녀와 같이 대한국으로 가지 않겠사옵니까. 저는 대한국에서 다른 이들을 ‘구제’하는 일을 하려 합니다. 만약, 도련님만 괜찮으시다면…”
“…구제?”
형식은 가면 갈수록, 아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단 생각을 했다. 일단 대체 뭘 구제한단 말인가. 그 대한국이란 데는 또 뭐고.
하지만, 형식은 자기가 이 말을 거절할 수 없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자기 주도권을 쥔 건, 틀림없이 눈 앞에 있는 이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걸’ 들켰는데, 어떻게 자기가 저 말을 거절할 수 있을까.
형식은 이상하리만치, 저 말을 거절할 용기가 나지 않는 걸 느꼈다. 만약 평소라면 그렇지도 않았겠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게다가, 여기서 지내봤자 아까 그 건달만도 못한 하류인생일 뿐이었다.
지금 자기 생사가 저 여자한테 달려있는 건 틀림없으니, 한 번쯤 ‘골목으로 빠진다’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뭐, 맘대로 하시든가.”
“정말이옵니까? 고맙습니다. 도련님. 저는…”
“나, 나한테 뭘 고를 권리가 있긴 있어? 딱히 좋아서 그러는 게 아냐. 어차피 어쩔 수가 없으니까…”
결국 형식은, 아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치 뭐에라도 홀린 것처럼. 운명을 거절하지도 못한 채.
대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조차 알 수 없기에, 형식은 이 묘한 여자, 아름을 따라 대한국인가 뭔가 하는 곳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자기는 그런 식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으니까.
(예고편/1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