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월 1일의 기적 (본편 없는 번외편) – 01. 12월 25일/비현실의 시작 1

12월 24일 밤 열한 시 삼십 분. 크리스마스 이브.
특별한 날답지 않게 조용하기 이를 데 없는 골목을, 어떤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걸어가고 있었다.
“이런 젠장. 이브부터 운이 꼬여서는…”
남학생은 이를 부드득 갈며, 어두운 골목을 한 걸음씩 나아갔다. 사실, 남학생, 김성진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방금 골목에 몰려있던 불량배들과 한판 저지른 참이었으니까.
안 그래도 다른 이와 엮이는 걸 무척 싫어하는 성진한테, 이런 일은 정말 귀찮기 이를데없는 거였다. 다행히도 몇 명 되지 않았기에 힘으로 물리칠 수 있었지만, 더 많았다면 생각하는 것조차 싫었다.
원래부터 조금 헝클어진 머리를 박박 긁으며, 성진은 열받은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봤다. 이브라곤 하지만 눈도 뭣도 없었다. 아무리 크리스마스에 아무 생각없이 지내는 성진이라 한들, 이 무미건조한 이브는 지긋지긋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실, 성진은 크리스마스는 물론, 연말에도 아무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남의 삶에 큰 관심을 지니지 않는 성격이기에, 이런 날조차 무덤덤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그 불량배들만 없었으면 오늘도 얌전히 넘길 생각이었다. 원래부터 죽 그래왔으니까.
어차피 이 세상에 비현실적인 일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성진한테 있어서 현실이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뜻했다. 산타할아버지든 뭐든, 이 세상엔 없는 것이다. 자기 눈에 안 보이는 걸 어떻게 ‘있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성진은 유난히 시끄럽게 느껴지는 골목길을 혼자 걸었다. 이렇게 혼자 다니는 데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외로움을 느끼는 성격도 아니었기에, 성진한테는 이런 느낌이 딱 맞았다.
다른 이들과 영원히 관계를 안 맺고 살아갈 순 없을까.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성진은 쓴웃음이 나오는 걸 느꼈다. 될 수 있는 대로 방해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죽 그렇게 해 왔지만, 여전히 성진은 다른 이들과 엮이는 게 번거로울 뿐이었다.
그런 마음을 떨치려고, 무심코 고개를 가볍게 저었을 때였다.
“…뭐야?”
머리 위에서 휘익, 하는 소리가 들린 탓에, 성진은 무심코 사람도 없는 골목 위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거기엔 ‘말도 안 되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본 것’만을 현실로 믿는다 생각한 성진조차, 여기엔 눈이 동그래질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서, 어쩐지 투명하게 느껴지는 ‘여자애’가 떨어지고 있었다.
여자애는 어깨까지 닿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하늘에 휘날린 채 이리로 곧장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서 확신할 순 없지만, 묘하게 감정을 알기 힘든 표정이었다. 물론 성진도 그런 경향은 있지만, 어쩐지 쟨 자기보다 더 감정표현이 약한 것 같았다.
게다가 신기한 것으로서, 성진은 저 여자애가 ‘헛것’인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대체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성진은 자기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아이만 현실에서 ‘어긋난’ 느낌이 자꾸 들었다.
물론, 지금 중요한 건 당연히 그게 아니었다.
“저, 저, 저거?!”
그런 생각을 하다, 성진은 떨어지는 여자애한테 밀려 사이좋게 같이 넘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사람이 위에서 떨어졌으니, 당연히 성진의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혀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되어, 성진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앞으로 자기한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걱정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멍하니.

잠시 뒤, 성진은 멍하니 눈을 떠 주위를 살폈다. 일단 핸드폰을 보니,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은 듯했다. 사람이 드문 골목이라서인지, 주위에 누가 몰려있지도 않았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다른 데에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입었던 교복이 묘하게 헐렁한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뭐야?”
멀뚱하게 혼자 중얼대던 성진은, 자기 목소리가 틀림없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원래 자기 목소리는, 이렇게 자기 생각보다 높진 않았을 터였다. 적어도 방금 전까진 틀림없이 그랬다.
그래서, 이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으, 아야야…”
성진이 이렇게 멍한 느낌일 때, 눈앞에 있던 ‘아까 그 여자애’가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몸집이나 생김새는,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전 가로등 불빛 너머로 비치던 것과 크게 달랐다.
무엇보다, 자기가 본 건 틀림없이 몸집이 조금 작은 듯한 여자애였던 것이다. 눈앞에 있는 건 아무리 봐도 자기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남학생’이었다. 교복을 입은 것도 아닐 뿐더러, 옷차림도 자기랑 달리 딱 맞는 청바지 및 긴팔 옷이었지만.
…잠깐, 쟨 춥지도 않나?
그러고 보니, 아까 떨어지던 여자애 역시 바지에 긴팔옷만 입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코트같은 건 전혀 두르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뭐야, 이건?
누가 이 상황을 좀 설명해주지 않을까, 란 생각에, 성진은 혼자 가만히 주위를 둘러봤다. 물론, 이제 이브에서 크리스마스로 넘어가는 시점에 그런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다들 있을 거면 집에 있었지, 이렇게 추운 날 어두운 골목을 싸돌아다니진 않을 터였다.
그런 것치곤 묘하게 사람이 없는 거 같은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직접 겪으며, 성진은 속이 썩어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더 큰 문제로, 앞에서 자길 멀뚱하게 쳐다보고 있는 이 사내자식이 있었다. 아까 그 여자애랑 어떤 사이인지는 알 바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눈빛이 비슷했던 것이다. 물론 귀염성으로 보면 그 여자애가 그리워질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가만히 내버려두기 불안해지는 모습인 건 틀림없었다.
이건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상황이야.
자기가 골치아프거나 말거나, 그 사내자식(그 여자애일지도 모르지만)은 멀뚱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자길 쳐다보고 있었다. 앞으로 자기가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일단 망설이는 것 같았지만, 성진 입장에서는 이것만으로도 기가 찰 일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상황은 수습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성진은 목소리를 무시한 채, 될 수 있는 대로 진지하게 눈앞에 있는 사내자식한테 말을 걸었다. 따지는 건 일단 나중에 하고 상황을 알기 위해서였다. 이런 상황에 열받아서인지, 사실상 따지는 거나 마찬가지인 말투가 되긴 했지만.
하지만 자기가 말한 뒤에도, 사내자식은 묘하게 머뭇대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 몇십 초쯤 되는 시간이, 성진한테는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느껴졌다.
“그, 미안해요.”
“야, 넌 이런 상황에 그런 말이 나오디?”
이제 성진은 정말로 복장이 터질 지경이 되었다. 대체 왜 자기가 크리스마스에 이러고 앉아있단 말인가. 그거야 집에 가도 잘 생각밖에 없긴 했지만.
“서, 설마 죽 이런 꼴이 되는 건 아니지. 어?”
이제 성질이 급해진 성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이 멀뚱한 사내자식의 멱살을 쥐고 있었다. 만약 진짜 그 여자애였다면 좀 미안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성진한테 그걸 파악할 정신머리는 없었다.
하지만 생전 처음 볼 자기한테 멱살이 잡힌 상황에서도, 사내자식은 침착했다. 오히려 숨이 막혀 콜록대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자기한테 대답을 하려 노력하는 게 보였다.
“그, 미, 미안해요. 이건 다 제 잘못…실수니까 어떻게든 할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언제?”
“이, 일단 이걸 좀…”
성진이 겨우 쥐던 멱살을 떼어놓자, 사내자식은 가쁜 숨을 몰아쉬곤 빨개진 얼굴로 천천히 입을 뗐다. 그 서투른 말투로, 성진은 이 애가 자기보다 훨씬 말한 적이 없단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아까 떨어질 거 같아서, 어떻게 하려고 했는데 실수해서…왜 잘못됐는지 알아봐야 하니까 시간이 걸리겠지만, 아마 올해 안엔…”
“…올해?!”
“그만큼 시간이 없으면…미안해요. 제 탓이니까…”
“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
성진은 열받다 못해 다시 멱살을 잡으려다, 방금 이 사내자식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까’ 떨어질 것 같아서라니, 그럼 자기가 그 여자애랑 같은 인물이란 뜻이잖아.
젠장, 멱살도 못 잡겠네. 이게 뭐야?
이 압도적인 비현실 앞에서, 성진은 어쩔 줄 몰랐다. 그럼 쟨 대체 왜 이런 모습이 됐단 말인가. 이것도 자기 탓인가?
“아, 저, 전 한 해쯤 전부터 죽 이런 모습이었으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정말로.”
“…죽 이런 모습이었다니, 그럼 내가 방금 본 그건 뭐야?!”
“그건 아마 힘을 잘못 써서…아마도…투영? 원래 모습이 비친 게 아닐까…”
“그, 그딴 게 어딨어?!”
이런 한밤중에, 성진은 그런 식으로 화풀이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지금 이 상황은 자기한테 믿기 힘든 거라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냥 집에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자기가 바랄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너네 집. 비었냐?”
사내자식, 이 아니라 그 여자애는 느릿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 갈 곳이 하나밖에 없다니 장난하나.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성진은 속으로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럼 원래대로 돌려놓을 때까지, 올해동안 신세 좀 지자. 너도 책임은 져야지. 그지?”
여자애는 잠깐 가만히 있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렇게 행동이 굼뜬 거야?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다, 성진은 순간 까닭을 깨달았다.
일단 남녀가 같이 지내는 것이니, 저 여자애 입장에선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성진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지만.
성진은 죽 이대로 지낼 생각이 이만큼도 없어서 그렇게 마음먹은 것뿐이지, 결코 엉뚱한 생각을 품은 건 아니었다. 절대 같이 지내려고 이러는 게 아니었단 말이다. 안 그래도 다른 이랑 지내는 것만은 무조건 피하고 싶었는데, 자기가 그런 생각을 할 리 없었다.
이건 그냥 어쩔 수 없어서 그러는 거야. 망할. 진짜라니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성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추운 크리스마스를 이런 길바닥에서 오래 보낼 생각은 이만큼도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