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밤, 시간이 열두 시에 가까워질 무렵.
세진은 홍준, 그러니까 미아와 같이 미아네 집 빌라 옥상에 올라와있었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도 되는 걸까.
모처럼 새해가 다가오려고 하는데, 지금 이 순간은 너무나도 평범하게 느껴졌다. 특별한 느낌은 이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게 더 좋은 걸지도 몰랐다. 세진과 미아는 늘 이런 식이었으니까.
딱히 뭘 말하려고 같이 올라온 건 아니었다. 그냥 만날 하던 대로, 둘이 같이 있고싶어서 이런 데에 올라와있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뭘 짜낼 것도 없었다. 이렇게 둘이 같이 있으면, 같이 있기만 하면 그냥 편했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편한 사이란 걸, 세진은 미아 덕분에 이제야 깨달았다.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동안, 세진은 혼자 생각에 빠졌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 요즘 일, 그리고 앞으로 있을 일에 관해서.
작년 이맘때 일을 떠올리자, 세진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작년 이맘때, 크리스마스 다음 날 세진은 이 아이와 만났다. 물론 다른 친구들과도.
벌써 1년이구나.
자기도 모르게 세진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길고도 짧은 시간이었다. 마치 거짓말과 같은 1년이 세진의 등에 펼쳐져 있었다. 정말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때만큼이나 오늘 날씨도 추웠다. 영하로 내려간 데다가 한밤중이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어쩌면 그건 미아와 친구들이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새해구나.
새삼스럽게 세진은 혼자 그런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렇게 세진이 혼자 가만히 있을 때, 갑자기 옆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있잖아. 나 하나만을 위해서 살고 싶어.”
그 말을 듣고 세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어디까지나 세진의 생각이었지만, 어쩐지 미아라면 절대 하지 못할 것만 같았던 말이었다. 항상 남을 생각하는 아이. 자기가 이런 상황인데도 결국 남을 먼저 생각하고 마는 이가 바로 미아라고 세진은 여겨왔던 것이다.
그런 미아가, 이렇게 진지한 눈빛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사실 미아가 정말 저 말대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 수 있을지 어떨지는 세진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미아가 그렇게 말한 것 자체가 놀라웠다.
“있지. 나 전에 이런 말 들었다. 나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닌데, 그, 뭐였더라…”
세진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미아는 혼자서 그런 걸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여전히 기억이 어렴풋한 듯, 미아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그, 다른 사람한테서 주어진 이미지를, 자기 스스로 벗어던지려 할 때에야, 음, 그…진짜 자기자신이 될 수 있다. 대략 그런 말이었나?”
“아…”
무척 또렷하지 않은 말이긴 했지만, 세진은 그 말을 듣고 미아가 하려는 게 무슨 말인지 알아챘다. 사실 대충 들어도 그렇게 쉬운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적이 중위권쯤인 세진이라 한들, 그게 뭘 말하려는 거인지는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아직 세진한테는 무슨 뜻인지 얼른 알아듣기 쉽지 않은 말. 하지만 어쩐지, ‘와닿는’ 건 틀림없이 있는 말.
미아는 자기가 한 말이 묘하게 민망했는지, 세진한테서 고개를 돌린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진이 맨 처음 미아답지 않은 말이라 생각했던 것처럼, 미아 역시 ‘자기답지 않은’ 말이라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세진은, 그 말이야말로 미아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란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게 누구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누군가한테 지금 이 모습을 떠맡긴’ 건 틀림없는 미아였으니까.
처음엔 세진도 얼른 받아들이지 못한 미아의 모습.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아니라 부모님한테 덮어씌워진 성인남성의 모습.
미아가 그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세진은 지난 1년 동안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은 자기와 동갑인 그냥 여자애일 뿐인데, 다른 사람도 아닌 부모님한테 떠맡긴 모습 때문에 온갖 고생을 사서 하는 걸 바로 옆에서 지켜봤으니까.
그런 미아가 언젠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세진은 생각했다.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미아가 말한 대로 ‘진짜 자기자신’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그 조용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세진아. 미아야!!”
그런 목소리와 함께, 만날 떠들썩한 나머지 세 명이 옥상으로 올라왔다. 맨 먼저 둘한테 다가온 건 물론 시간이었다. 시간은 어디 갔나 한참 찾았다는 듯, 얼른 이리로 달려오더니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둘이서 뭐했어? 이제 좀만 있음 새핸데, 무슨 얘기했어?”
“응? 어. 그랬어.”
“둘만 비밀얘기하고 그런 거야?”
“으, 응…”
“시간이는 같이 껴주면 엄청 크게 얘기하고 그러니까.”
“나도 만날 크게 말하는 건 아닌데.”
시간이 멋쩍어하는 사이, 이제 남아있던 봄이 및 백설도 둘한테 가까이 다가왔다. 백설은 만날 그랬듯, 자긴 여기 따라오고 싶지 않았지만 봄이랑 시간이가 같이 왔으니까, 대략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봄이는 방금 전까지 자고 있었는지, 눈을 부비며 미아 쪽으로 다가가 등을 슬며시 감싸안았다.
“어, 봄이 혼자 너무해. 나도 그러려고 그랬는데.”
“그럼 가위바위보할래?”
“니들은 애냐? 만날 그러게.”
백설이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이제 봄이와 시간은 누가 미아의 등에 올라탈까를 두고 가위바위보를 하기 시작했다. 한편, 백설은 그러거나 말거나 여긴 내 거라는 듯 미아의 등에 찰싹 붙어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어부지리였다. 바로 옆에 있는 봄이와 시간은 그걸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자기를 두고 이런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미아는 그저 쑥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산다는 말을 하고 있었는데, 벌써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어떻게 보면 미아다웠다.
이 아이는 결국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진 못하겠구나.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세진은 어쩐지 마음이 놓이는 걸 느꼈다. 미아가 정말 자기 자신만 보고 살게 된다면 세진만 홀로 남겨진 듯한 느낌이 들 것 같아서였다.
이런 말을 하면 미아는 괜히 신경쓰고 그러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세진은 괜히 미아한테 미안해지는 걸 느꼈다. 미아가 어떻게 사느냐는 세진과 아무 상관없어야 하는 일이니까.
만약 미아가 없다면, 다른 친구들이 없다면 자기는 혼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괜히 마음이 약해져서, 세진은 얼른 그런 마음을 떨쳐내려 애썼다.
그 때였다.
“아, 이제 좀만 있음 새해다.”
시간이 가지고 있던 핸드폰을 보여주며 그런 말을 꺼냈다. 시간이 대체 얼마나 흘렀던 걸까. 벌써 시계는 11시 59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아. 이제 20초도 안 남았어.”
시간과 가위바위보에 빠져있던 봄이도 자기 시계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솔직히 말하자면, 방금 전까지 봄이는 자기가 대체 왜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원래 그런 성격이긴 하지만.
“니들이 싸우니까 내년인 줄 모를 뻔했잖아. 진짜.”
“우리 안 싸웠는데. 그지?”
“응. 아무튼 새해 오기 전에 얼른 세자. 지금 몇 초야?”
백설이 그렇게 핀잔을 줘도, 봄이와 시간은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중요한 걸 놓칠 뻔했다는 듯, 얼른 손가락을 꼽으며 남은 한 해를 세어나가기 시작했다.
“8, 7, 6…’
그렇게 손가락으로 꼽을 때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마치 별똥별이라도 되는 것처럼.
5, 4, 3, 2,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렇게 다른 아이들이 외치는 사이, 어느덧 새로운 해가 시작되어 있었다.
마치 다음 날이 찾아온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만 세진과 다른 아이들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일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올해도 작년처럼 아무 일 없이, 그리고 파란만장하게 지낼 수 있을까.
다른 애들이 서로 껴안고 난리일 때, 세진은 마치 자기 혼자만 여기에 있는 것처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세진과 아이들을 빼곤 아무도 없는, 이 드넓은 옥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