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여전히 꽃잎은 ‘그 폴더’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오늘도 할 일이 그다지 없었던 까닭이 컸지만, 그것보다 저 폴더한테서 마음을 떼어놓을 수 없었던 까닭이 더 컸다. 꽃잎이 자꾸만 그 폴더를 왔다갔다거리자, 옆에 있던 영준도 걱정되는지 이런 말을 걸어왔다.
“저, 괘, 괜찮으세요?”
“으, 응. 괜, 괜찮…”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한 채, 꽃잎은 가만히 눈길을 돌렸다. 꽃잎도 자기가 지금 아주 쓸데없는 짓을 하고있단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폴더에 있는 ‘그 존재’는, 꽃잎한테도 특별한 것이었다.
사실, 꽃잎은 이왕 이렇게 된 거, ‘그것’, 아니, ‘그 존재’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물론 영준이 만지는 걸 어깨너머, 라기보다 화면 너머로 죽 봐왔지만, 그건 자기 두 눈으로 보는 느낌과 다른 거였다. 꽃잎도 영준이 그걸 만지는 걸 오랫동안 봐왔기에,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은 무척 깊었다. 지금 영준한테 무척 미안한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된 거, 조금이라도 그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꽃잎이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한 번 ‘아직 실행하지 못한’ 파일이 있는 그 폴더를 빤히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저, 구, 궁금하세요?”
드디어 그냥 넘기기 어려워졌는지, 영준이 이번엔 조심스레 이런 말을 걸어왔다. 그 어색해보이는 말이 어쩐지 미안하게 느껴저서, 꽃잎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을 더듬고 있었다.
“응. 아, 안 될까?”
그렇게 물어본 다음에야, 꽃잎은 이게 얼마나 우스운 말인지 깨달았다. 애초에 이건 영준이 만지는 것이므로, ‘영준’이 실행한다 한들 아무 문제가 없는 게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걸 아는 꽃잎이라 할지라도 ‘그 파일’을 실행하는 건 망설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사실 ‘지금’ 영준 입장에서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을 터였다.
아마 영준이 그런 자기한테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건, ‘거기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 지금 이 상황으로 자기를 속이고 싶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꽃잎은 속으로 짐작했다. 물론 그건 무의식 속 이야기겠지만, 영준이 조금이나마 자기 자신한테서 도망가려는 목적으로 이 상황을 쓰고 있는 건 사실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딱부러지게 말할 수 없었지만. 애초에 다 이해한 것도 아니었고.
그런 꽃잎의 마음을 알아준 것인지, 아니면 그 필사에 가까운 표정 때문인지, 영준은 잠시 꽃잎을 빤히 바라보다, 이윽고 이런 말을 꺼냈다.
“그럼 보여드릴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으, 응.”
자기가 생각해도 참 칠칠맞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꽃잎은 영준이 어떤 사이트를 여는 걸 빤히 바라봤다. 영준은 옆에서 꽃잎의 마우스를 써서 어딘가로 가더니, 이윽고 어떤 링크를 열었다.
왼쪽에서 뭔가 글자가 나타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잠시 시간이 지나자, 거기엔 꽃잎이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우아…”
그걸 보자, 꽃잎은 할 말을 잃었다. 딱히 기겁해서 그런 건 아니고, 단지 좀 넋이 나갔을 뿐이었다. 처음 보는 모습인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닐 텐데, 바로 눈앞에서 펼쳐진 그 풍경은 꽃잎의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준이 보여준 사이트에서는 갑자기 캐릭터 두 명이 튀어나와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꽃잎도 영준의 작업을 죽 봐왔으므로 그 자체는 낯설지 않을 텐데, 이렇게 두 눈으로 직접, 게다가 ‘사이트’에서 튀어나오는 걸 보면 자기도 모르게 눈이 동그래졌다. 멀리서 볼 때와 달리 ‘실감’이 나서일까, 꽃잎은 그 화면에서 도무지 눈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영준은 그런 꽃잎의 반응이 즐거운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물론 영준도 자기가 하는 일을 남한테 안 말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반응을 보는 게 잦은 일은 아니었을 터였다.
그 튀어나온 캐릭터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꽃잎은 알 수 없었다. 그건 멀리서 볼 때도, 이렇게 두 눈으로 볼 때도 다를 게 없었다. 꽃잎은 태어난 뒤부터, 즉 자기자신을 인식하게 된 뒤부터 줄곧 자기가 지켜봐온 이 곳, 대한민국에서 통하는 말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꽃잎이 읽을 수 있는 ‘외국어’라곤 고작 영어단어 몇 개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한들, 그 광경, 즉 ‘캐릭터가 눈앞에서 튀어나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꽃잎의 마음은 충분히 두근거렸다. 이것이야말로, 아니 ‘이런 방법이야말로’ 영준이 자기 시간까지 쪼개서 매달리고 있는 바로 그 ‘작업’이었던 것이다. 물론 영준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므로, 딱히 돈을 받고 하는 건 아니었다. 이건 그야말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하는 일이었다.
“대단하다…”
자기가 지금 보고있는 이게 꿈이 아니라 진짜란 걸 다시 깨달으며, 꽃잎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을 중얼댔다. 그 말을 듣자, 아까 전부터 꽃잎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영준의 표정이 놀라울 만큼 밝아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영준의 눈빛은, 마치 어린아이라도 되는 듯 반짝거리고 있었다. 마치, 드디어 동지를 만나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던 것이다.
“정말요? 정말 알아주실 거 같나요?”
그 말과 함께, 영준은 꽃잎한테 갑자기 바싹 다가왔다. 솔직히 말해서, 꽃잎도 10년은 넘게 지켜봐왔지만 이렇게 적극성이 넘치는 영준은 참으로 낯선 느낌이었다. 적어도 평소에 영준은 절대 이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영준은 마치 자기자신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따라서 좀 얼떨떨하긴 했지만, 그런 영준의 모습을 본 것 또한 기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영준의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게, 꽃잎의 오랜 바람이기도 했으니까.
“으, 응. 나도 정말 재밌어보이거든.”
그런 생각을 하며, 꽃잎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자기가 멀리서 보면 얼마나 우습게 보일까 속으로 생각하던 꽃잎은, 영준이 자길 묘한 눈빛으로 가만히 쳐다보고 있단 걸 깨달았다. 영준은 잠시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다, 이윽고 천천히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럼 망설이지 않으셔도 될 텐데.”
“응?”
꽃잎은 다시 눈이 동그래졌지만, 잠시 뒤,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챘다. 영준은 꽃잎이, ‘그 존재’와 만나도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아이’를 본따 만든, 바로 ‘그 존재’와.
드디어 그 때가, 왔구나.
그런 말까지 듣자, 꽃잎은 무섭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을 굳혔다. ‘그 존재’를, 자기가 직접 만나보고 싶다고.
지금까지 오랫동안 꿈에서만 봐왔던 사실-‘그 아이’와 마주본다는 것이, 이제 정말로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꽃잎은 자기 손이 떨리는 걸 느끼면서도, 자꾸만 커서가 어긋나는 걸 느끼면서도, 큰 맘먹고 그 파일로 마우스를 가져갔다. 마치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꽃잎이 술을 마신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떨리는 손을 어떻게든 하려고 하면서도, 꽃잎은 자꾸만 가슴이 두근대는 걸 느꼈다.
이러다가 폭발하는 건 아닐까.
드디어 ‘그것’을 자기 두 눈으로 본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언젠가 이렇게 되는 걸 꽃잎은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었다. 그러니까 실행할 수 있을 터였다. 커서를 아이콘에 맞추고, 그대로 더블클릭…
하자, 오른쪽 아래에 항상 멀리서 봐오던 로딩화면이 나타났다. 그 로딩화면이 끝난 뒤, 잠시 시간이 지나고 나서, 드디어 ‘그 존재’는 모니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꽃잎이 항상 ‘멀리서’ 바라보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안녕하세요. 유저님. 오늘도 좋은 아침이네요. 밥은 잘 드셨나요?
그런 말 역시, 꽃잎의 기억 속 그대로였다.
그걸 옆에서 보던 영준은 조금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보이면 안 될 걸 보이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유저님이라고 하니까 너무 딱딱하네요. 원래 이름이 들어가야 하는데 개발용 데이터라서…개발할 때마다 영준 님이라 불리는 것도…아,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지? 내가 해야 할 말이 아닌데…”
꽃잎은 거기에 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영준한테 자기가 할 말은 아무 것도 없어서였다. 하지만 어쩐지 자기 이름이 불리는 게 낯간지럽다는 영준의 말엔 묘하게 동감할 것 같았다. 그걸 영준한테 말할 순 없었지만.
한편 영준은 무척 다정한 눈빛으로, 마치 오래된 친구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모니터 너머의 그 존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꽃잎은 그 까닭을 잘 알고 있었다. 영준이 바라보고 있는 이 캐릭터는 사실, 모델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 모델 그대로인 건 아니지만, 그 실존모델의 영향을 무척 받았단 건 틀림없었다. 모델이 된 ‘그 아이’를 꽃잎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건 기분 탓인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꽃잎은 마치, ‘그 아이’를 눈앞에 둔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모습이 좀 비슷한 건 있었지만, 단지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분위기, ‘사람 그 자체’에 비슷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영준도 ‘그 아이’를 대신해서 ‘이 존재’를 만든 것은 아니었다. 단지, 영준은 ‘그 아이’를 다른 이한테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아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널리 알리기 위해서. 그리고 물론, 자기 자신의 뭐라 말할 수 없는 바람을 위해서.
꽃잎은 여전히 모니터 앞에서 가만히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것만 같은) 그 존재를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틀림없다고.
영준이 무식하리만치, 이 ‘눈앞에 있는 캐릭터를 만드는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는 것만은.
오랫동안 봐온 꽃잎 생각에, 영준이 적어도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건 틀림없었다. 시간과, 마음과, 그걸 실현하기 위한 모든 지식을. 딱히 명예를 위해 하는 일도 아니고, 돈을 받으려 하는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참으로 쓸모없는 ‘상상’ 하나만을 위해서, 영준은 모든 정신을 쏟아붓고 있었다. 물론, 꽃잎이 지금 여기에 있기 훨씬 전부터.
누가 보면 그걸 우스운 일이라 할지도 모르지만, 영준한테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꽃잎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껏 자기가 봐온 건 결코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왜 꽃잎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걸 미안하면서도 고맙게 여기는가. 그 까닭이 무엇보다 가장 큰 증거였다.
그래서 꽃잎은 마음먹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영준이 만드는, 이라기보다 ‘모양새를 만들고’ 있는 이 아이를 두 눈으로 볼 때까진 여기에 있고 싶다고.
물론 영준한테 자기가 지금 얼마나 심한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알지만, 그래도 꽃잎은 ‘화면 너머’가 아니라, 자기 눈으로 이 아이와 만나고 싶었다. 이 아이의 원형이 누구인지, 꽃잎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마 영준은 꽃잎이 ‘이 아이’의 작업을 돕고 싶다고 해도 싫은 내색 하나 안 보일 터였다. 지금 영준의 인식은 크게 바뀌어있으니까. 본인이 그 인식을 깨부술 생각도 하고있지 않을 테니까.
내가 여기에 있어도 될까.
다시 한 번 그런 생각이 드는 걸, 꽃잎은 어떻게든 꼭꼭 눌러담았다. 자기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그 묘한 기적을 끌어안기라도 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