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세계의 이방인 5. 잊을 수 없는 그 사람

꽃잎은 생각보다 빨리 집에 돌아왔단 생각에, 멍한 표정으로 영준의 방에 가만히 서있었다.
오늘은 정말로 일이 없어서 그런지, 아직 막 저녁이 될 무렵인데도 꽃잎은 영준의 집에 돌아와있었다. 항상 멀리서만 볼 때는 영준이 밤늦게까지 일하고 있어서 그런 걸까, 꽃잎은 묘하게 마음이 개운치 않은 걸 느꼈다. 이렇게 일찍 집에 돌아왔으니 좀 신나도 좋을 텐데, 참으로 모호하기 이를 데 없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있을 때, 꽃잎은 더 중요한 걸 깨달았다. 자기가 영준의 방에 이렇게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현실인 것이다. 퇴근이 이른 건 현실감이 없을지 몰라도, 꽃잎이 지금 여기, 항상 멀리서 보던 영준의 방에 있는 건 묘하게 진짜같은 느낌이 들었다.
난 지금 정말 ‘현실’ 속에 있는 거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꽃잎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어?”
꽃잎은 무심코 보게 된 작은 탁자 위에, 뭔가 ‘옛날에 본 것’이 놓인 걸 알아챘다. 꽃잎도 잘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아마 꽤 오래 전에 봤던 것인 듯했다. 영준이 작업할 때 가끔 그 테이블을 가만히 보곤 했단 걸, 꽃잎은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엔, 사진이 있었다.
오른편이 반쯤 찢어진 사진이, 액자 속에 가만히 들어가있었다. 거기엔 어린 날, 대략 중학생쯤 되는 영준의 모습이 찍혀있었다. 꽃잎이 영준을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던 무렵 봤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물론, 영준이 자기 중학생 무렵 사진을 굳이 액자에까지 넣어서 곁에 둘 리는 없었다. 이 사진이 여기에 있는 까닭은 따로 있었다. 그건, 지금은 찢겨져나가 없는 ‘그 아이’가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10년은 훨씬 전 일이었지만, 영준은 아직도 그 사실을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 꽃잎조차도 그걸 똑똑히 알 수 있을 만큼.
그 사진을 보자, 꽃잎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비록 영준은 모르고 있겠지만, ‘그 때 일’은 꽃잎한테도 무척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세상에 나온 지 오래되지 않았던 꽃잎은, 바로 그 광경을 보고 영준을 죽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액자에 원래 있어야 할 ‘그 아이’는, 꽃잎한테도 무척 소중한 사람이었다.
사실, 꽃잎은 더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아마 영준이 알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만큼, 꽃잎은 ‘그 때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잘 안다 한들, 꽃잎은 먼발치에서 이걸 지켜본 ‘제 3자’일 뿐이었다. 그런 자기가 이런 식으로 영준과 직접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다지 좋은 기적이라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 생각을 하자, 꽃잎은 다시 마음이 메여오는 걸 느꼈다.

꽃잎이 그런 생각에 빠진 채 거실로 나왔을 때였다.
“응?”
자기 아래에 누가 있는 것 같아서, 꽃잎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 ‘누군가’가 매우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꽃잎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게 바로 눈에 들어왔다.
그 뚱하면서도 묘하게 귀여운 얼굴 생김새를 보자, 꽃잎은 그게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이 조그만, 이제 초등학교에 막 들어간 듯한 모습을 지닌 아이는 영준의 막내딸, 노을이었다. 언니인 단비와는 성격도 느낌도 전혀 달랐지만, 이 둘이 자매사이인 건 틀림없었다.
이렇게 눈앞에서 보니까 더 앙증맞게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꽃잎이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노을은 마치 친구한테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자기 내복을 위로 올렸다. 볼살만큼이나 말랑말랑해보이는 조그만 배가 한눈에 들여다보였다.
말랑말랑.
어쩐지 만지고 싶어질 만큼 부드러운 배와 살짝 튀어나온 배꼽을 보며, 꽃잎은 귀엽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꽃잎의 몸집도 노을과 거의 비슷할 텐데, 이상하게 이렇게 눈앞에서 보는 노을은 특히 더 그렇게 느껴졌다. 어쩌면 노을의 배가 살짝 볼록 튀어나온 게 자꾸만 눈에 띄어서일지도 몰랐다.
“귀엽다.”
결국 꽃잎은 그런 말과 함께 노을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고 있었다. 멀리서 노을을 지켜본 지 오래되었기에, 그 ‘배를 내미는’ 모습이 친근감을 나타낸다는 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노을이 자기를 뭐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꽃잎은 그런 마음이 고맙기만 했다. 마치 그게 큰 상이라도 되는 듯, 노을은 눈을 감으며 꽃잎이 쓰다듬는 걸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노을만은 자기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그 모습을 보며, 꽃잎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그건 그저 짐작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뭐라 말할 수 없는 친근한 모습이, 꽃잎한테 절로 그런 생각이 들도록 만들었다. 어쩌면 그건 노을이 직감에 강한 어린아이라서 그런 건지도 몰랐다.
사실은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모르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꽃잎은 노을의 머리에서 손을 떼어놓지 못했다. 이렇게나마 직접 노을과 만날 수 있다는 이 사실이, 그저 기쁘기만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