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세계의 이방인 04. 어리석은 이가 꾸는 꿈

이렇게 해서 정신을 차린 뒤, 꽃잎은 영준의 컴퓨터를 조심스레 만졌다. 꽃잎도 영준을 오랫동안 지켜봤기에, 이럴 때 영준이 뭘 하는지는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영준은 이렇게 시간이 남을 때면 컴퓨터로 ‘그 파일’을 불러와 작업을 하곤 했던 것이다.
꽃잎이 얼른 파일을 열자, 곧바로 영준이 쓴 텍스트가 화면에 나타났다. 꽃잎도 몇 년 동안 죽 봐온, 영준의 ‘작품’이었다. 물론 대다수는 영준이 회사 게임용으로 쓴 텍스트였지만, 그보다는 그것과 상관없이 ‘자기가 하고 싶어서’ 짬짬이 한 작업물이 담긴 파일이 더 눈에 띄었다.
이게 영준 님의 작품이구나.
물론 먼발치에서 오랫동안 지켜보긴 했지만, 이렇게 실제 파일을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미 그 작품이 무슨 내용인지 아는데도, 꽃잎은 잠시동안 멍하니 그 파일을 바라보았다. 이럴 땐 무슨 생각을 하면 좋을까 꽃잎이 망설이고 있을 때, 뒤에서 조금 머뭇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괘, 괜찮으세요?”
“아, 으, 응.”
그러고 보니 지금은 자기가 영준이었단 걸 깨닫고 나서야, 꽃잎은 겨우 그렇게 대답했다. 어쩌면 꽃잎 때문에, 영준은 제 3자 입장에서 자기를 보며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이건 자기 맘대로 하는 생각이긴 했지만, 꽃잎은 영준이 ‘자기’를 그렇게 여기게 하고싶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보면 참 대단하구나.
영준이 써내려간 텍스트를 보면서, 꽃잎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솔직하게 말해서, 꽃잎은 자기 상상을 작품으로 만드는, 즉 어떠한 ‘모양새를 가진 존재’로 만드는 영준을 굉장히 대단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상상할 게 없는 세상에서 나고자란 꽃잎은 도무지 그런 걸 떠올릴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은 꽃잎도 그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서 뭔가 머릿속에 있는 걸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애초에 현실감각이 없는 것에 가깝기에 뭘 떠올린다고 해도 현실감은 그다지 없었다. 하지만, 영준의 작품은 달랐다. 현실에 살고있는 사람이니까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꽃잎과 달리 질감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캐릭터 묘사는 더더욱 그랬다.
왜 같은 사람이 뭘 ‘만들어도’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걸까. 꽃잎도 ‘물건’은 자기 세상에서 어떻게든 만들어낼 수 있지만, 인격을 지닌 무언가는 절대 만들지 못하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이것도 기회니까 한 번 물어보면 어떨까.
잠시 생각하던 꽃잎은, 그동안 영준한테 묻고 싶었던 걸 하나 입에 담았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용기를 다 끌어모아서.
“이런 걸 몇 점이고 곧장 쓰시는 걸 보면 영준 니…이 아니라 아무튼 재능이 있는 거 같다. 그지?”
그걸 들은 영준은 잠시동안 가만히 꽃잎을 쳐다봤다. 자기가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영준은 드디어 입을 떼어놓았다.
“딱히 저한테 재능이 있는가 하면 그런 건 아니에요. 사실 저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있지만, 지금은 안 하려고 해요. 그러니까 이걸 왜 하고 있냐면…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예요. 그, 이, 이상하다 생각하세요?”
그 말을 듣자, 꽃잎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도는 걸 느꼈다. 물론, 오랫동안 영준을 지켜봐온 꽃잎이 그렇게 여길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이 말을 직접 전할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가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꽃잎은 자기도 모르게 영준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아니야. 절대 안 그래. 진짜로.”
“어, 저, 그…”
영준이 어쩐지 민망해하는 모습을 보자, 꽃잎은 지금 자기가 대체 뭘 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대체 자기는 방금 전 뭘 한 걸까. 얼른 손을 떼어놓은 뒤, 꽃잎은 한동안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덥석 잡은 걸 속으로 후회하는 꽃잎이었지만, 지금 그래봤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길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야 조금 마음이 가라앉았단 생각이 들자, 꽃잎은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다. 그러고 보면 꽃잎은 영준한테 말을 걸긴 했지만, ‘영준’을 부른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방금 영준과 한 얘기는 조금 이상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를 잠시 생각해봤지만, 꽃잎은 결국 이것 하나밖에 떠올리지 못했다. 즉, 영준은 자기한테 한 말이 아닐 수도 있는데도 그 말을 ‘자기 자신한테’ 한 말이라 생각해 대답한 것이다. 아마 대답한 영준 자기자신도 조건반사에 가까운 까닭으로 그랬을 뿐이지, 딱히 지금 자기를 ‘이상하다’라 여기진 않을 터였다.
이건 꽃잎 입장에서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 자기 자신을 ‘자기라 여기지 못하는’ 영준 입장에서 보면 묘한 일이었다. 이걸 논리정연하게 말하는 건 힘들겠지만, ‘어쩐지 그런 거 같다’라 받아들이면 그나마 조금 알 것 같았다.
영준은 지금 어떤 식으로 사고하고 있는 걸까. 꽃잎은 점점 더 그게 궁금해졌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마우스로 폴더를 이것저것 보던 꽃잎은(이렇게 직접 영준의 컴퓨터 폴더를 만질 일이 있으리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에, 꽃잎은 무척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문득 뭔가 프로그램처럼 보이는 걸 찾아냈다. 잠시동안 이게 뭐지?라 생각하던 꽃잎이었지만, 뒤이어 이게 뭔지 떠올렸다.
그건 꽃잎이 요즘 특히 자주 보곤 하던, 영준이 지금 가장 힘을 쏟는 작업물이었다.
꽃잎이 알기로 이건 직업과 상관없는 것이었기에(즉, 누군가한테 돈을 받고 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일에 저렇게 매번 힘을 쏟는 영준이 신기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꽃잎도 영준의 이 작업을 무척 좋아했다. 한 번 직접 ‘만지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그걸’ 직접 볼 수 있단 생각에 잠시 망설이는 꽃잎이었지만, 뒤에 있는 진짜 영준을 생각하면 어쩐지 가볍게 그 파일을 실행하는 게 망설여졌다. 영준도 꽃잎이 뭘 하려는지 알아챈 듯, 등 뒤에서 이런 말을 건넸다.
“그거 저도 정말 좋아해요. 그, 만드는 입장에선 좀 민망할 때도 있지만…”
꽃잎은 영준이 이걸 작업하는 모습을, 정말로 몇 번이고 봐왔다. 물론 영준이 그걸 알 리는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다른 누군가한테 자기 작품이 보이고 있다’는 건 알아챘을지도 몰랐다. 영준의 작품엔 항상 숨기지 못하는 무언가가 녹아있었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꽃잎은 이해할 수 있었다.
꽃잎이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영준은 마치 자기 자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니터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 눈빛 역시, 꽃잎이 자주 봤던 것이었다.
“남한테 보이니까 좀 민망하긴 하네요. 현실감도 좀 떨어질지 모르고. 그렇지만…”
꽃잎은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그러고 싶었다. 영준과 이렇게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순간을, 꽃잎은 퍽 오래 전부터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사람에 따라 어떤 걸 더 현실에 가깝게 여길지는 다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요. 다른 영화나 드라마보다, 이게 더 마음에 와닿는 이들이 있을 수 있어요. 그게 누구인지 보이는 건 아니지만, 전 그걸 위해 상상을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꽃잎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영준을 죽 지켜본 건 괜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걸 눈앞의 영준이 몰라준다 할지라도.
영준이 이 상상, 즉 작품에 쏟아부은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영준이 10년 가까이 거기에 매달렸단 걸, 꽃잎은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한가지를 그렇게 오랫동안 여기고 있을 수 있는 걸까. 꽃잎이라면 절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 꽃잎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참으로 자기 중심에 가까운 생각이었지만, 영준을 뒤에서 보며 가끔 꽃잎이 하던 생각이기도 했다.
그것 하나를 10년이 가깝게 붙들고 있는 건 정말로 쉬운 일일까. 어떤 무언가를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
한 번 물어봐도 될까.
결국 꽃잎은, 이렇게 된 거 하나만 더 묻기로 했다. 영준이라면 대답해주지 않을까, 란 생각을 하면서.
“그치만 아무리 애착이 깊다고 해도, 그, 너무 오래된 걸 죽 다루는 것보단 그때그때 새로운 걸 하는 게 더 낫지 않나…않을까?”
또 존대를 쓰려 했단 걸 깨닫자, 꽃잎은 괜히 민망해지는 걸 느꼈다. 멀리서 영준을 볼 때면 항상 ‘님’을 붙여서 불렀기 때문인지, 이것만은 잘 고쳐질 것같지 않았다.
영준은 그 말을 들은 뒤,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이윽고, 천천히 이렇게 입을 뗐다.
“말씀하신 대로 오래된 걸 죽 고집하는 것보단 새로운 걸 하는 게 더 나아요. 여러 모로요. 만약 그게 안 되는 사람이라면…그 사람은 정말 어지간한 바보겠죠. 아마.”
그렇게 말하는 영준의 모습에서, 꽃잎은 눈을 뗄 수 없었다. 모습이 조금 크게 바뀌었는데도, 그 표정은 틀림없이 영준 그 자체였다. 자기가 한 말이 멋쩍었는지 얼른 눈길을 돌리는 영준을 보며, 꽃잎은 속으로 생각했다.
영준 님은 아직까지도 그런 걸 마음 속 깊은 곳에 품고 있구나,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