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밤 언리미티드 50. 최고의 천적

그리고 날이 밝아, 비상이 싸우기로 된 날이 되었다.

채비를 마친 비상은, 일이 끝나자 바로 옥상에 다다랐다. 하지만 옥상에서 비상을 기다린 건 전혀 짐작치 못한 풍경이었다.
“뭐지?”
그 희한한 광경을 보며,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을 입에 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옥상 위에선 붉은 밤 팀원들이 모두 바닥에 앉은 채 그릇을 손에 들고 있었던 것이다. 옥상 바닥엔 신문지나 돗자리가 여기저기 깔려있었으며, 이렇게 탁 트인 곳인데도 음식냄새가 여기저기 풍겨왔다.
뭘 먹기라도 하는 건가?
가만히 보니, 그건 자장면 그릇이었다. 그걸 보고서야 비상은 이 상황을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사람들은 여기서 중화요리를 시킨 뒤 다같이 먹고있었던 것이다. 주위엔 자장면은 물론, 탕수육에 군만두까지 눈에 띄었다. 대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누가 먹자고 말이라도 건넨 듯했다.
“넌 거기서 뭐하냐?”
비상이 그렇게 어이없단 생각으로 가만히 서있자, 저 멀리서 누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사실, 비상은 그 사람을 안 봐도 저게 누군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먹을 게 넘치는 데서 저런 말투로 비상을 부르는 건 강산 단 한 명뿐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비상이 그리로 다가가자, 강산은 자기 손에 들린 자장면 그릇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다. 비상이 가까이 왔단 걸 깨닫자, 강산은 먹는 데서 눈길을 돌리곤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먹을 게 있으면 얼른 와서 먹어야지, 넌 참…”
“형은 세상만사가 다 먹을 걸로 보여? 나보고 이걸 먹은 채로 경기를 하란 말이야?”
“아. 맞다. 이것도 다 운동이지. 나 참.”
비상이 한마디 하자, 강산은 이제 깨달았단 듯 다시 자장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가만히 생각하면, 이 자리에 비상이 없는데 벌써부터 음식을 시켜먹은 것도 그런 까닭일 터였다. 물론 비상도 그러한 까닭으로 미리 저녁을 먹은 뒤 옥상에 다다른 참이었다.
이 형은 참 먹을 거 앞에선 생각이 없어진다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신문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자, 아까보다 음식냄새가 더 세게 비상의 코를 간지럽혔다. 비상은 이미 저녁을 먹었기에 별 상관없었지만, 만약 지금 속이 비었다면 견디기 어려울 만큼 짙은 냄새였다. 강산은 대체 뭘 어떻게 시켰는지, 그릇에 산더미만큼 있는 자장면을 아무렇지 않게 비우고 있었다. 자장면 위에 탕수육 소스를 묻힌 군만두가 있는 게 어쩐지 눈에 띄었다.
그렇게 다들 옥상에서 저녁을 먹는 가운데, 비상은 뭔가 이상하단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 옥상엔 붉은 밤 팀원 중 몇 명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 중엔 어제 그리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의영과 승지도 들어가있었다.
승지는 오늘 여기에 안 온 건가.
여기저기서 떠드는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비상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비상아.”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듣고, 비상은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아까 전까지만 없었던 의영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냄새로 볼 때, 아마 아래쪽에서 담배라도 피고 온 듯했다.
“오늘 니가 경기하는 날이지. 누구랑 하는지 아직 말을 못 했는데…”
“누구죠?”
비상은 그렇게 되물으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보통 땐 이럴 때 망설임이 없는 의영이, 오늘따라 유난히 머뭇대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의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드디어 뭔가 마음이라도 먹은 듯 이렇게 입을 뗐다.
“그, 김진혁이란 친구랑 붙는다. 너랑 전에 시비붙은 그 친구라 하던데, 괜찮겠니?”

그렇게 저녁시간이 끝난 뒤였다.
“그래서, 준비는 됐냐?”
비상이 나설 채비를 하고있을 때, 등 뒤에서 강산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굳이 대답할 것까진 없다는 생각에, 비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대략 정리되자, 비상은 자기 자리에 가만히 자리잡았다. 지금 비상의 눈앞에 있는 건 오랜만에 보는 탁 트인 하늘, 단지 그것뿐이었다. 물론 한 손에는 비상의 무기인 물총이 들려있었다. 어젯밤, 비상은 오늘 일을 생각하며 무기가 괜찮은지 몇 번이고 확인한 바 있었다.
그리고 비상 너머, 저 쪽에 있는 옥상엔 오늘 상대인 금빛 밤의 연소자가 자리잡고 있었다.
비상이 그 연소자, 진혁을 모를 리는 없었다. 오늘 자기와 붙으리라 짐작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진혁은 비상과 인연 아닌 인연이 여럿 있었다. 멀리 있기 때문에 잘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언뜻 보기에 진혁의 자세는 참으로 자신만만해 보였다. 솔직하게 말해서, 비상은 대체 어떤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저런 모습을 보이는지가 조금 궁금해졌다.
물론, 비상도 그다지 긴장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아마 멀리에서 보면 긴장하지 않는 건 둘 다 똑같아보일 터였다. 하지만 비상이 차가운 쪽이라 하면, 진혁은 틀림없이 뜨거운 쪽이었다. 이렇게 떨어져 있지만, 그것만은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현실에서라면 인연이 없을 둘이었지만, 또다른 현실, 즉 지금은 바라지 않게 이런 식으로 또 인연이 생겼다. 그게 참 묘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비상은 묘하게 운명도 느끼고 있었다. 대체 왜 저 인물을 그렇게 느끼는지는 비상도 뭐라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 느낌은 틀림없었다. 사실 누가 되더라도 그렇게 동요할 생각은 없었지만,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다른 금빛 밤 팀원들과 느낌이 달랐다.
둘은 잠시 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진혁의 눈길이 느껴지는 건 아니었지만, 비상은 그렇다 여기고 있었다. 적어도 비상은 그럴 생각이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이제야 기다렸던 것이 다가왔단 게 똑똑히 느껴졌다.
그리고.
“시작!”
놀이가 시작되었다.

맨 처음, 비상은 미리 생각해둔 대로 자기의 빠른 속도를 살려서 바로 물총을 퍼붓기 시작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경기에서 이기려면 자기 특기를 살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 여겨서였다. 하지만 비상의 생각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진혁은 마치 그걸 짐작하기라도 한 듯이, 자기 품에서 뭔가를 빼내더니 비상 쪽으로 휙 던졌다.
저건 뭐지?
그 ‘던진 것’을 보며,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맨 처음엔 무기라 생각했지만, 가만히 보면 그게 아니었다. 자세히 보면, 그건 무기라기보다 방패에 가까웠다. 성인 남성만한 몸집을 지닌 커다란 방패가, 비상과 진혁 사이를 막고 있었다.
비상은 그러거나 말거나 총을 쐈지만, 방패는 마치 커다란 생물체라도 되는 듯 몸을 꾸역꾸역 움직여가며 그 물을 ‘빨아들였다’. 비상이 한 강화, 즉 물을 총알처럼 만들어 쏘는 강화로 관통력이 높아졌을 텐데도, 그 생물은 그런 건 모르겠단 듯 물을 꿀꺽꿀꺽 잘도 마셔댔다.
저건 무슨 해파리라도 되는 건가.
마치 밤하늘에 뜬 보석처럼 반짝대는 그 묘한 물체를 보며,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딱히 그 방패에 촉수가 달려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 흐늘흐늘대는 모습이나, 말랑대는 느낌으로 그렇게 짐작했을 뿐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비상의 공격이 쉽게 먹히지 않는다는 게 밝혀졌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일단 상황을 봐야겠단 생각에, 비상은 근처 옥상에 자리잡은 뒤 진혁을 가만히 살폈다. 진혁은 마치 그걸 짐작이라도 한 듯, 전혀 놀랍지 않단 눈빛으로 비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였다.
비상은 진혁이 다시 한 번, 품에서 뭔가 꺼내들었단 걸 알아챘다. 이번엔 아까 그것보다 좀 더 크고 두꺼운 덩어리였다. 저런 걸 용케 품에서 꺼내들었다는 생각과 함께, 비상은 주의를 기울이며 그 무기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저 덩어리는, 아까 그 방패처럼 반짝이는 무지개빛을 내고 있었다.
진혁은 그런 데엔 아무 관심이 없단 듯, 그 덩어리에서 뭘 떼어내더니 가볍게 뭉쳤다. 그걸 보고서야, 비상은 진혁이 쓰는 저 무기가 뭔지 알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찰흙이었다.
물론 ‘놀이’에 쓰이는 찰흙이니만큼 보통 물건은 아니었다. 게다가 비상의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저건 강화되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마 보석처럼 반짝대는 저 빛깔도 강화로 만들어낸 것이리라. 그저 찰흙일 뿐인데 저렇게 말랑말랑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마 강화거나 원래 가지고 있는 특징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마 아까 그 방패는, 진혁이 미리 뜯어둔 덩어리를 던진 것인 듯했다.
이게 유전자조작이란 건가.
비상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진혁은 드디어 다 뭉쳐진 덩어리를 한손에 들었다. 그리곤 비상 쪽으로 몸을 돌려, 마치 야구공이라도 던지는 듯 팔을 크게 휘둘러 그 작은 덩어리를 던졌다.
그러자,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저건…”
그런 말을 입에 담으며, 비상은 그 ‘화살’을 빤히 쳐다봤다. 이번엔 화살이었다. 아까 전 방패처럼 바뀌었던 그 덩어리는, 이번엔 뾰족한 화살이 되어 비상 쪽으로 곧장 날아왔다. 고작 찰흙으로 만들어진 게 저렇게 빨리 날아올 수가 있나. 솔직하게 말해서, 비상은 스스로 무척 놀라고 있었다.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긴 자기 현실이 너무나 가볍게 무너진 듯한 느낌이었다. 이 놀이를 한 지 두 달은 가볍게 지났는데, 이렇게 놀랄 일이 아직 남아있을 줄은 몰랐다.
물론 그대로 화살을 맞을 수는 없으므로, 비상은 아래쪽으로 몸을 던졌다. 몸을 던질 때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자기가 공중에 떠있단 걸 느낀 순간, 비상은 뭔가 이상하단 걸 깨달았다. 물론 그건 이러다 자기가 땅바닥에 떨어지지 않을까, 같은 걱정이 아니었다. 자기가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비상은 자기 몸이 너무 ‘가벼워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바닥에 다다르자, 비상은 바로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비상의 몸집은 방금 전보다 조금 더 줄어들어 있었던 것이다. 대체 언제 사라졌는지, 쓰고 있던 안경도 눈에 띄지 않았다.
비상이 그렇게 잠시 다른 걸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어?”
비상이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진혁의 화살이 높은 곳에서 가속도가 붙은 채 무척 빠르게 쏟아부어졌다. 게다가 비상의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저건 하나가 아니라 세 발, 다섯 발, 아홉 발은 되어보이는 숫자였다.
비상은 제대로 피하지도 못한 채, 그 화살 중 특히 날렵하게 날아온 몇 개를 정통으로 맞고 말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 화살은 결코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보통 화살처럼 ‘그걸로 끝나는’ 것도 결코 아니었다.
비상이 맞은 화살은, 그 자리에서 마치 젤리처럼 끈적끈적하게 녹아내렸다. 그렇게 녹아내린 화살, 아니 젤리에 가까운 찰흙은 비상이 입고있는 옷에 달라붙은 뒤 쉽게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거기까지는 그냥 넘어갈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비상의 옷이, 젤리가 달라붙은 데에 따라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 옷이 젤리와 함께 녹아내리는 걸 보자, 비상은 자기 일인데도 민망하기보단 헛웃음이 저절로 나오는 걸 느꼈다. 사실 이 놀이엔 지금까지 여러 무기가 있었다. 개중엔 암모니아처럼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오늘 찰흙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솔직히, 비상도 여기까지 생각하진 않았다.
맨 처음엔 멀리 떨어져있어서 잘 안 보였던 듯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젤리가 온몸을 감싸게 되면서 먼 곳, 즉 붉은 밤 쪽에서도 상황을 알게 된 듯했다. 비상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주위가 술렁이는 가운데, 저 너머에서는 이윽고 이런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야, 이 변태자식아!!”
비록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만 들어도 비상은 누구인지 금방 알 것 같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비상은 지금 자기 꼬락서니보다 강산의 저 목소리가 더 민망하게 느껴졌다. 비상은 이제 몸을 움찔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물론 옷이 녹아내려 지극히 민망한 상황에 가깝다는 까닭도 있었지만, 사실은 녹아내린 젤리가 마치 밧줄과 비슷한 노릇을 하는 바람에 정말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팔목도 젤리로 감싸진 탓에, 비상은 총을 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물론 이 총이 진혁한테 그다지 쓸모가 없다는 건 아까 전 방패로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지는 건가.
비상이 어이없어할 때, 눈앞에 누군가가 내려서는 게 느껴졌다. 그 쪽으로 고개가 돌아가진 않았지만, 굳이 보지 않아도 비상은 그게 누구인지 잘 알 수 있었다.
물론, 그 사람은 바로 비상이 오늘 싸운 상대, 진혁이었다.
사실 지금, 비상은 진혁을 그다지 보고싶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비상이 좋지 않은 꼴로 지게 되니 당연한 이야기이긴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비상은 진혁의 눈에 비치는 자기자신을 떠올리는 게 더 꺼려졌다. 그 까닭을 굳이 말로 할 건 없겠지만, 그런 광경을 떠올리는 건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비상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진혁은 천천히 비상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진혁은 비상의 모습에 관심이 있다기보다, 비상이 ‘이런 꼴을 보이고 있다’는 것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얼굴이 보이는 건 아니었으므로 비상의 짐작일 뿐이었지만.
그렇게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을까,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진혁은 입을 뗐다.
“이야. 드디어 이런 광경을 보게 되는구만. 댁이 나한테 무릎을 꿇는 순간 말이야. 뭐, 그런 자세를 하고있는 건 아니지만 그건 둘째치고.”
비상은 맨 처음, 진혁과 만난 그 날을 떠올렸다. 사실 그 때, 비상은 이 인물과 이렇게 복잡한 인연이 있게 될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진혁의 목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비상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진혁은 비상보다 훨씬 전부터 ‘이렇게 될 날’을 기다려온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댁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안 묻기로 하지. 나도 그렇게 심한 놈은 아니거든. 하지만 오늘 이긴 사람이니 할 말은 하도록 하지. 그래야 이긴 즐거움이란 게 있을 테니까.”
지금 진혁이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지 비상은 알 수 없었다. 자기와 이만큼 다른 사람의 생각을 비상이 알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렇다면 진혁은 어떨까. 비상처럼 짐작하지 못하고 있을까, 아니면.
“일단 이건 말해야지. 꼴좋다. 이 자식아.”
바로 위에서, 진혁은 마치 좋은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한 말투로 그런 말을 입에 담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비상이 적어도 진혁한테는 절대로 듣고싶지 않았던 말이었다.
“솔직히 난 니가 왜 이걸 하겠다고 나섰는지 모르겠다. 뭐, 너라고 꼭 알 거란 보장도 없지만 말이지. 너도 이거 하면서 좋은 꼴만 보일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사람이 언제까지나 그럴 수 없잖냐. 너도 알겠지만.”
진혁은 마치 다 알기라도 한다는 듯,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니가 만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것 때문일지도 모르지. 결국 너도 혼자 잘난 척하고 싶었던 거 아냐? 멋있는 척이라 바꿔말해도 되겠지 뭐. 같은 말이니까. 자기는 다른 사람들하고 다른 척하면 참 편하지 않냐? 폼나기도 하고. 솔직히 나라도 그럴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난 너처럼 그럴만한 뭘 타고난 건 아니지만.”
거기까지 말한 뒤, 진혁은 잠깐 말을 끊었다. 자기가 비상한테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게 무척 즐겁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비상은 저 진혁이란 사람과 자주 만난 적은 없지만 지금이 가장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만큼, 지금 진혁은 들떠있었다. 사실, 지금 진혁한텐 비상이 아무튼 심한 꼴이라는 게 중요하지, 그 심한 꼴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점에서 이 놀이는 참 좋단 말이야. 공평하기 짝이 없어. 너같은 놈도 이런 꼴이 될 수 있단 말이니까. 멋있는 척만 할 수 없단 말이지. 아주 좋아. 그런 건.”
그런 말을, 비상은 어느 옥상 바닥에 거의 누워있다시피 한 채 똑똑히 듣고 있었다. 사실 그게 아니라면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비상은 이 젤리(에 가까운 찰흙) 때문에 몸을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으니까.
“솔직히 나도 지금 니 마음은 안다. 남한테 못난 꼴 보이고 싶은 놈이 세상에 어딨냐? 다 잘난 모습만 보이고 싶어하지. 근데 말이야, 사람이 살면서 평생 그럴 수 있을 거 같냐? 뭐, 남한테 어떻게 보이느냐만 생각하면서 살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넌 그러고 싶니?”
지치지도 않는지, 진혁은 또 이런 말을 걸어왔다. 그런 말을 듣고 있을 때, 비상은 뭔가 깨달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비상은 지금껏 지내면서 죽 뭔가 마음속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 ‘걸리는 것’이 뭔지, 비상은 바로 지금 또렷하게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중요한 걸 이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진혁으로 알게 되는 게 어떻게 보면 우습기 짝이 없었지만, 비상은 한편으로 속이 시원해지는 걸 느꼈다. 지금 이 상황이 굴욕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렇게 해야만 보일 수 있는 것도 있다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비상의 삶을 모두 되돌아봐도 틀림없이 가장 밑바닥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비상은 틀림없이 뭔가를 느꼈다. 자기한테 빠져있던 바로 그 ‘무언가’를.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기억하냐? 니가 나한테 참견했던 그 날 말이지. 니가 그 때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그 때 난 바로 알았다. 너하고는 언제 한 번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물론 어떻게 해서든 이기고 말겠단 생각도 했지. 너한테 질 순 없잖냐.”
진혁의 말에, 비상은 그 때 일을 다시 한 번 돌아봤다. 그 때 일은 이제 꽤 옛날처럼 느껴졌지만, 그걸 생각하면 비상은 저절로이런 마음이 들었다.
이 놈이야말로, 비상한테는 ‘최고의 천적’이라고.
자기가 지금껏 지니고 있던 깊은 곳을 알아챌 수 있는 저 놈이야말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비상의 천적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혁은 다른 이들이라면 가볍게 누를 수도 있겠지만, 비상한테는 꼭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야말로 비상을 위해서 있는, 넘어서야 할 최고의 천적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게 비상이 생각에 빠져있을 때도, 진혁의 목소리는 이어서 들려왔다.
“‘나는 말이야. 그런 게 무지 좋거든. 이런 놀이보다 말이야. 물론 이 놀이도 아주 좋지만 그건 둘째치고, 누군가가 본성을 드러내는 그 순간이 아주 좋아서 견딜 수가 없단 말이지. 어제 너네 주장이 그랬던 것처럼 말야. 잘난 척하던 놈들이 맨살을 드러내는 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아냐? 아주 볼만하다. 그거.”
이 말을 듣고 붉은 밤 팀원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비상은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진혁은 어제 그 금빛 밤 연소자가 한 것만큼이나 입을 함부로 놀리고 있었다. 하지만 비상은, 저 놈은 어제 그 연소자처럼 치기로 그런 말을 했다 잘라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말을 하면 같은 팀에선 그리 동의하지 않겠지만, 이건 비상의 직감에서 온 것이었다. 정말로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랬을 뿐인 어제 연소자와 대볼 때, 진혁은 뼛속까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런 말을 입에 담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가지고 있는 축의 굵기 자체가 무척 달랐다.
그런 생각을 하며, 비상은 패배를 맛보고 있었다. 무기를 전혀 쓸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발버둥치는 것도 아주 소용없는 짓은 아니겠지만, 비상한테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진 것은 진 것이었다. 비상한테는 그게 모든 것이었다. 참으로 꼴사나운 패배이긴 하지만, 이 역시 여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비상의 책임이었다. 아직 비상한테는 기회가 한 번 더 남아있었다. 오늘 반성할 대목은 제대로 되돌아본 다음, 그걸 다음에 살리면 될 일이었다.
저 진혁이란 사람과 다시 한 번 맞서싸울 수 있을지 어떨지가, 굳이 말하자면 비상한테는 아쉬운 대목이었다. 아쉽다고 말하긴 했지만, ‘마음에 무척 걸린다’고 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몰랐다.
다시 한 번 맞붙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비상이 그렇게, 자기와는 묘하게 안 맞을지도 모르는 생각에 빠졌을 때였다.
“그만!”
드디어,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상은 지금, 틀림없이 진혁한테 ‘완벽히 진’ 것이다.

그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바로 비상 앞에 나타난 건 다름아닌 강산이었다. 강산은 마치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그 목소리과 끝나는 것과 함께 비상한테로 잽싸게 달려왔다. 여전히 젤리에 묶여있던 탓에 비상은 그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저 형이 지금껏 죽 참느라 온몸이 근질거렸다는 건 똑똑히 알 수 있었다.
한편, 진혁은 무척 만족했는지 당당한 모습으로 그 자리를 떴다. 이 역시 비상한테 제대로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여기서 볼 수 있었던 모습만으로도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덴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거야 그렇겠지,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강산은 가까이 오자마자 곧장 비상의 어깨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남이 보거나 말거나, 비상을 비친 듯이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런 강산은 비상도 처음 보는 것만 같았다.
“너 괜찮냐? 진짜 괜찮아?!”
사실 비상도 어이가 없었지만, 짐작컨대, 어이가 없는 건 다른 붉은 밤 팀원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강산이 온 뒤로 다른 팀원들이 올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강산이 민망한 나머지, 다들 멀찍이서 바라보거나 조금 뒤에 오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강산과 비상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누가 보면 안겨있다고 말해도 믿으리라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형은 술이라도 마셨어? 뭐 그렇게…”
비상이 항상 그렇듯 입을 떼자, 이제 강산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비상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놈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란 표정이었다.
그렇게 있다가, 드디어 강산은 다시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여전히 방금 비상이 한 말이 믿기지 않는지, 그야말로 눈을 동그랗게 뜬 채였다.
“야 이 자식아. 지금 니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물론 비상이 지금 자기 꼴을 볼 수 있을 리 없었지만, 강산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대략 알 수 있었다. 어느덧 주위에서도 다른 붉은 밤 팀원들이 하나둘씩 모여 먼발치에서 비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강산의 힘 덕택에 상당히 젤리로 된 밧줄이 끊기긴 했지만, 여전히 움직이는 게 어려운 비상은 단지 그렇게 짐작할 뿐이었다.
강산은 여전히 어이가 없을 만큼, 비상을 세게 끌어안은 채 놓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상은 이 형한테 보이는 게 지금 자기가 ‘이런 꼴’이란 게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형은, 그냥 비상이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가 열받은 것이다.
아마 비상이 실제로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꼴이 강산한테 민망하게 보이는지 어떤지는 중요하지도 않으리라.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 젤리로 된 밧줄도 어느 정도 풀리자, 비상은 드디어 고개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시험삼아 조금 고개를 돌리다, 비상은 저만치에서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등을 돌리는 걸 알아챘다. 아마 방금 전까지 비상의 꼴을 보다가 슬그머니 모습을 감추려 하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의 얼굴은 잘 보지 못했지만, 비상은 어쩐지 저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바로 세림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일 뒤로 퍽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이런 상황에서 아주 태평하기 그지없었지만, 비상은 그걸 깨닫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비상도 남한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걸 좋아하진 않았지만, 이미 보인 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세림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비상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 이내 거둬들였다. 그런 걸 알아봤자 자기한테 도움이 되는 건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남들의 눈에 지금 비상이 어떻게 보이는가, 같은 것처럼.

조금 긴 시간이 지난 뒤, 비상은 옷을 갈아입은 채 해원과 같이 다른 건물 옥상에 앉아있었다. 이제 뒤처리도 모두 끝났기에, 놀이 참가자들은 거의 모두 집으로 돌아간 상황이었다.
참고로 이 옷은, 상황이 정리된 뒤 누가 준 것이었다. 그렇다 한들 아까 젤리 때문에 어쩐지 불편해서, 비상은 가벼운 천을 하나 더 덧입고 있었다. 될 수 있는 대로 얼른 집에 가서 씻는 게 좋겠지만,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해원이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좀 불편하긴 하지만, 해원의 이야기를 비상이 거절할 까닭도 없었다.
당연하다고나 할까, 해원은 아주 죽을 상을 하고 있었다. 또 금빛 밤에서 문제가 일어난 거나 마찬가지이니 저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남의 일이긴 하지만. 사실 ‘남의 일’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대체 내가 뭐라 말하면 좋을지…”
“됐다. 니가 무슨 잘못이니.”
이젠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해원을 보며, 비상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지금 가장 웃긴 건 해원도 뭣도 아닌 ‘이런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하는’ 비상이었다. 적어도 비상은 그런 자기자신이 지금 꽤 우습다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 나보다 형이니까 좀 그렇지만, 내가 얘기는 해볼 테니까…”
“걔가 니 말을 듣겠냐. 너도 참.”
물론, 해원은 그 금빛 밤 주장치고는 꽤 통솔력이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진혁한텐 애초에 그 ‘설득’이 아무 소용없으리라 비상은 속으로 짐작했다. 다른 금빛 밤 팀원도 물론 달래기 어렵겠지만, 진혁은 애초에 달랠 수 있을지 어떨지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해봐야지. 그건 그렇고 의영이 형은…”
해원의 그 말을 듣자, 비상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해원은 주장이니만큼 같은 입장인 의영과 얘기할 일도 많았을 터였다. 어쩌면 붉은 밤 팀원들과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어디 한 번 물어볼까.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비상은 가볍게 그런 말을 건네봤다. 물론 해원도 처음엔 이걸 말해도 될까 고민하는 듯한 눈치였다.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란 건 알고 있기에, 비상도 더 조르지 않고 상황을 지켜봤다.
잠시 생각하던 해원은, 가만히 있다가 드디어 입을 떼어놓았다. 5분은 가볍게 지났을 것만 같은 침묵 끝의 일이었다. 얼마나 고민 끝에 입을 떼어놨을지, 비상은 그것만으로도 대략 짐작이 갈 것 같았다.
“뭐, 나도 술마시다 겨우 들은 얘기긴 하지만…”
해원의 말에 따르면 이랬다. 의영은 중고등학생 시절, ‘대개’ 내성적인 학생이었다고 했다. 여기서 ‘대개’라 말한 건, 의영이 상황에 따라선 그 말대로 미친 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의 의영은 비상이 첫날 술자리에서 봤던 것처럼, 존재감이 없는, 평범하다 못해 소극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인물이었다고 했다. 대개 의영은 이렇게 지냈기 때문에, 물론 같은 반인 애들도 의영을 그 정도라고만 여겼다. 의영이 정말로 화나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어느 시점부터, 의영은 정말로 화가 솟구치면 앞뒤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실 의영도 왜 그렇게 되는지는 딱 부러지게 말하지 못한 듯했다. 여러 사정이 있는 것 같단 느낌은 들지만, 아무튼 화가 절정에 다다르면 자기도 모르게 미쳐 날뛰고 있더라고 했다. 그야말로 여러 사람이 모여 뜯어말려도 모자랄 만큼이었단 말도 덧붙였다.
의영은 순해보여서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뿐, 몸집도 힘도 퍽 있는 편이기 때문에 한 번 맛이 가면 말리기도 힘들었다. 지금도 좀 추레하게 보여서 그렇지, 힘이나 몸집 자체는 그럭저럭 있는 편이었다.
이런 성질은 대학에서도 이어지다가, 그나마 의영이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잠잠해졌다고 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잠잠해졌다’일 뿐, 동기들과 같은 자리에 모이면 상황에 따라 또 일어나기도 했다는 듯했다. 그 말만으로도 의영이 그럭저럭 가파른 길을 걸어왔으리란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밖에서 그랬다면, 집에서도 틀림없이 그런 모습을 보였을 터였다. 승지가 의영과 거리를 둔 것도 그러한 까닭이리라 비상은 짐작했다.
“형 말을 들으면 집안에 무슨 문제라도 있던 거 같은데, 거기까진 못 들어서…”
그렇게 말꼬리를 흐리며, 해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걸 만난 지 오래되지 않은 해원한테 말하지는 않았으리라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 까닭을 비상이 함부로 짐작할 수는 없지만, 아마 뭔가 까닭이 있을 터였다. 의영이 그걸 자기 입으로 말할 일이 있을지는 비상도 알 수 없었지만.
“근데 참 대단하다.”
그렇게 의영의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해원은 이제 비상을 슬쩍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체 뭐가 그렇단 거지, 란 생각을 하다가, 비상은 지금 자기 모습이 어떤지를 떠올렸다. 해원은 지금, 마치 자긴 절대 못 할 거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이 어이없게 느껴진 비상은, 이런 말과 함께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도 이쯤이면 됐다고 생각해서였다.
“내가 볼 땐 저런 놈들을 끌고가야 하는 니가 더 대단하다. 인마.”
“그, 그런가…”
해원도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혼자서 그렇게 중얼댔다. 지금까지 그 놈들을 주장으로서 어떻게든 해야했던 해원의 마음은, 이제와서 더 더 짐작할 것도 없었다. 자기가 이렇게 여기는 것도 좀 그렇지만, 이런 모습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일지 모르겠다고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해원은 꼭 그렇지도 않은 듯, 비상을 바라보며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근데 형도 참 대단하다. 지금 그런데도 어쩐지 멋있어 보이네.”
나 참.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비상은 해원한테서 등을 돌렸다. 이제 날짜가 바뀔 시간이었다.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지어도 될 터였다.

원래 8월 밤이 이렇게 무더운 거였던가.
오늘따라 자기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조차 너무나 묵직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비상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 바람이 어쩐지 자기 마음을 대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자,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해서, 오늘 나는 패배자라 이건가.
참으로 우습기 이를 데 없는 패배는, 비상의 마음을 여러 모로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