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준과 이야기를 마친 뒤, 꽃잎은 그 방에 홀로 남겨졌다. 지금까지 화면 너머로만 보던 풍경을 직접 겪는다는 건 여전히 꿈인 것처럼 느껴졌다.
영준 님은 제대로 잠이 들었을까.
자기도 잠이 들 것 같지 않은데, 꽃잎은 남의 걱정을 먼저 하고 말았다. 아까 전처럼, 꽃잎은 여전히 지금 영준의 사고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단 걸 꽃잎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게 신경쓰이는 건 어절 수 없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여기는 영준이 작업용으로 쓰는 개인 방이었다.
영준의 집은 방 세 개로 이뤄져 있는데, 가장 큰 방이 안방, 그리고 남은 방이 두 딸의 방 및 이 곳이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일 맏딸은 아직 유치원도 못 갈 나이인 동생과 같은 방을 쓰고있었던 것이다.
꽃잎은 화면 너머로 몇 번이고 이 곳을 지켜봤다. 이젠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자기가 여기에 ‘존재’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지금껏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나같은 존재가 이런 곳에 있어도 될까.
지금은 일단 ‘현실’에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을 텐데도, 꽃잎은 그런 생각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무리 지금은 ‘현실’과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있다 한들, 꽃잎은 결국 ‘다른 이와 다른’,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자기가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존재인지, 꽃잎은 이미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모습이라면 그래도 현실하고 조금 가까워졌다 할 수 있을까.
아무도 없단 걸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꽃잎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근처 거울 앞에 섰다. 아까는 ‘실수로’ 보고 만 것이었지만, 지금은 꽃잎이 큰 마음을 먹고 ‘스스로’ 보는 것이었다.
조금 마음이 가라앉은 채로 보는 ‘자기 모습’은, 한편으론 어색하고, 또 한편으론 그다지 바뀌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크게 바뀌어놓고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쩐지 꽃잎은 그렇게 느꼈다. 그래도 영준하고 같은 나이로 안 보이는 느낌만은 여전히 똑같았지만.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현실에서 산 적이 한 번도 없는 자기한테 그런 느낌이 안 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입장이 바뀌었다 한들, 그런 걸 감출 수는 없는 것이다.
영준을 대신할 수 있는 지금이라면, 나도 현실에 녹아들 수 있을까.
자기도 아직 잘 안 믿기는 이야기였지만, 꽃잎의 지금 모습은 영준과 ‘입장을 바꾼’ 힘으로 얻은 것이었다. 꽃잎 입장에선 도무지 믿기지 않는 힘을 멋대로 휘두른 것만 같은 느낌이었지만, 아무튼 그 힘을 쓴 건 사실이었다. 지금 머리카락이 짧고 검은 것도, 이렇게 키가 큰 것도, 자기답지 않게 몸이 조금 튼튼하게 느껴지는 것도, 다 그러한 까닭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조금만 더 믿음직한 모습이라도 좋을 텐데.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 자기 모습을 보며, 꽃잎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방금 전 영준을 보면서도 생각했지만, 이렇게 입장을 바꾼다 한들, 살아온 시간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이런 모습을 하고있다 한들, 꽃잎은 여전히 ‘비현실’에 가까운 존재인 것이다. 아마 내일 밖으로 나간다 한들, 그건 전혀 바뀌지 않을 것 같았다.
왜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걸까.
꽃잎은 다시 한 번,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젠 이런 생각이 질릴 만도 한데, 오늘처럼 자기도 믿을 수 없는 일을 겪으면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 수밖에 없었다.
자기는 왜 이런 방식을 써야 ‘현실’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걸까.
물론, 지금 그런 생각을 해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 되었는데, ‘왜 난 이런 존재일까’라고 생각해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을 터였다. 게다가 이건 이미 몇 번을 더 고민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다시 고민해봐야 헛수고일 뿐이었다.
꽃잎은 언젠가 한 번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만약 ‘자기가 현실세계의 사람과 같은 ‘평범한’ 모습이 되면 조금이나마 저 세상과 가까워지지 않을까’라고.
하지만 이렇게 되고 나니, 그게 얼마나 헛된 생각인지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자기가 아무리 현실사람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할지라도, 결국 꽃잎은 이렇게 ‘남들과 다른’ 존재일 뿐이었다. 알맹이가 이렇게 다른데, 겨우 겉만 달라졌다고 해서 뭐가 크게 바뀔 리 없었다. 현실세게와 조금이나마 더 가까워지려면 현실에서 겪은 경험이 있어야 하는데, 꽃잎한테 그런 건 이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자기는 무슨 수를 써도 현실과 가까워질 수 없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꽃잎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기어올라오는 걸 느꼈다. 나는 이대로 죽 불완전한 존재로 남는 걸까. 이번 일로 얼마나 경험을 쌓는다 한들, 어쩐지 꽃잎은 ‘현실에 녹아들지 못할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게 처음 놓인 ‘현실’이란 환경에 끙끙 앓는 꽃잎이었지만, 그래도 딱 하나, 정말 고맙게 여기는 대목이 있었다. 그건, 비록 이런 식으로 그렇게 된 건 정말 미안했지만, 자기가 영준과 ‘직접’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꽃잎한테 지금 상황은, 화면 너머로만 보던 텔레비전 속 출연자와 직접 만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영준이 이런 사실을 알 리는 없었다. 이건 그저 꽃잎’한테만’ 기쁜 상황이었다.
나만 혼자 이렇게 기쁜 일이 일어나도 괜찮은 걸까.
비록 그 과정은 전혀 바람직하지 못했지만, 꽃잎은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달래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준한테 미안한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