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밤 언리미티드 49. 자기애에 얽힌 희망과 절망

그 날 연구소에서 일하며, 비상은 어제 일을 잠시 돌아봤다.
사실 어젯밤에 비상이 한 거라곤 그저 연습뿐이었다. ‘그 뒤’로, 비상은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오랫동안 ‘놀이’를 연습했던 것이다.
오랜만에 하는 놀이는 신선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이 놀이가 ‘자기가 바라서 하고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연습하는 동안, 비상은 자연스럽게 두 달 전을 떠올렸다. 이 ‘놀이’를 하게 된 두 달 전 천사와의 만남을. 그 날, 비상은 자기가 스스로 이 놀이를 하겠다 다짐한 것이다.
그걸 새삼스럽게 다시 깨달으며, 비상은 연습을 이어나갔다. 연습이 끝날 즈음엔 지금 쓰는 무기를 점검하며, 만약 모자란 게 있으면 나중에 강화하기로 마음먹었다. 비상이 경기하는 날은 내일이었다. 지금 당장 급한 마음을 먹지 않아도 괜찮을 터였다.
오늘은 가만히 붉은 밤의 경기나 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비상은 하던 일을 이어나갔다.

일이 모두 끝난 뒤, 비상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옥상에 다다랐을 때였다.
“형. 내가 오늘 무슨 꿈 꿨는지 말해 줄까?”
비상이 문을 열려 할 때, 갑자기 저 너머에서 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들은 목소리로 볼 때, 같이 얘기하는 사람은 잎새인 듯했다. 만약 비상의 생각이 맞다면, 도진이 이럴 때 반말을 하는 건 꽤 드문 일이었다.
“말해 봐라.”
그 말과 함께, 잎새는 얼굴을 구긴 채 도진한데서 눈길을 돌렸다. 지금 비상한테 보이는 건 잎새의 등뿐이므로, 이건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었다. 그 말을 듣자, 도진은 이런 말과 함께 마치 죽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역시 비상의 짐작이었지만.
“나도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팀이 지는 꿈을 꿨던 것 같더라. 나 어떡하냐. 이제?”
그 말을 듣자, 잎새는 잠시 생각하다 넌지시 이런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너는 위험한 존재인가 보다. 알아서 땅 파고 들어가는 건 어때?”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냐?”
도진은 무척 실망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나다를까, 정말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둘은 비상이 짐작했던 대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얘기하는 거야?”
비상이 어이없단 말투로 그렇게 묻자, 잎새는 이제야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리곤 고개를 저으며 이런 말을 꺼냈다.
“무슨 얘기야. 우리 망했단 얘기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물론 잎새 성격을 볼 때 그냥 하는 말이리라 비상은 짐작했다. 물론 기분은 정말 잡쳤을지도 모르지만.
“어, 언제 오셨어요?!”
한편, 도진은 이제야 알아챘는지 기겁하며 등을 곧게 폈다. 그러고 보니 원래 이런 놈이었지, 라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요즘 이야기지만, 특히 연장자 형들은 비상을 봐도 등을 펴는 일이 줄어들었기에 반쯤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체는 비상과 친하게 지내는 이들이 대개 그러하므로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그, 그냥 꿈이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시고…”
아무튼 잎새가 저 멀리 사라지는 가운데, 도진은 대체 뭘 그렇게 당황했는지 혼자 허둥지둥 난리도 아니었다. 그걸 보던 비상은 우스워져서 이런 말과 함께 도진의 어깨를 한 대 툭 쳤다.
“넌 무슨 개꿈 하나에 그렇게 당황하고 그러냐.”
“제가 그럴 깜냥이라서…”
그 말과 함께 도진이 뒷통수를 긁을 때, 비상의 눈에 짐작하지 못한 사람이 들어왔다. 슬슬 붉은 밤 팀원들이 모이기 시작한 옥상 구석에, 승지와 의영이 서로 마주보고 서있었던 것이다.
둘은 꽤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렇게 ‘가까운’ 자리에 있는 건 비상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비상이 보기에, 아마 지금은 승지가 의영한테 뭔가 말하려 하는 것 같았다. 어제 일로 뭔가 마음먹기라도 한 듯, 승지는 망설이면서도 어떻게든 의영한테 말을 걸려는 모습이었다.
의영도 그걸 알고 있는지, 말을 하라고 조르진 않은 채 승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승지가 떨고 있단 건 조금 떨어진 여기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또렷했다. 남이 끼어들면 지금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분위기 속에서, 승지가 드디어 비상한테(조금 멀리까지) 들릴 만큼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오, 오빠.”
아마 이럴 일은 별로 없었겠지만, 그게 승지가 집에서 의영을 부르는 말이리라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의영이 저 멀리서 침을 꿀꺽 삼키는 게 여기까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물론, 승지는 의영을 똑바로 보고 있지 않았다. 몸은 어떻게든 돌렸지만, 고개는 죽 숙인 채였다. 의영은 지금 승지를 바라보고 있지만, 아마 그건 ‘승지가 지금 자기를 안 보고 있으니까’ 그럴 수 있는 것이리라 비상은 짐작했다. 의영 역시 어쩔 줄 모르는 듯, 무척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잠시 가만히 있다가, 드디어 의영이 입을 떼어놓았다.
“무슨 일…”
“이제 놀이 시작합니다!”
마치 노리기라도 한 듯한 그 목소리를 듣고, 둘은 갑자기 시간이라도 멎은 듯 움칫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둘 다 현실을 깨달은 듯했다.
그 때, 이번엔 다른 목소리와 함께 지금껏 없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이다. 아직은 시작 안 한 거지?”
그 사람, 의지의 익숙한 목소리에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돌린 붉은 밤 팀원들은, 다들 벼락이라도 맞은 듯 딱딱하게 멈춰섰다. 비상도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서야 까닭을 알아챘다. 오늘 의지는, 평소보다 좀 더 ‘매력있게’ 보였던 것이다.
물론 비상이 보기에 평소 의지도 충분히 매력있는 여성이었다. 어깨까지 오는 머리를 아래로 내린 뒤, 검정을 바탕에 두면서도 핑크로 포인트를 준 평소 옷도 무척 매력있었다. 하지만 오늘 의지는 그 평소 모습과 조금 달랐다. 크게 바뀐 건 아니었지만, 그야말로 이미지를 살짝 바꾼 모습이었다.
오늘 나타난 의지는, 지금껏 내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위로 동그랗게 묶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경단이 머리 위에 얹힌 것 같았지만, 어쩐지 그러한 의지는 꽤 귀엽단 느낌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의지는 평소와 달리, 핑크를 전면에 내세운 반팔을 입고 있었다. 그 기장이 긴 분홍색 옷 및 청바지가, 의지의 어린 모습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남성진들은 너나할 것 없이, 돌덩이라도 된 듯 의지를 빤히 쳐다본 채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천하의 강산도 ‘누, 누나…’라 중얼거린 채 아주 돌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
“이제 왔어?”
남성진들이 죄다 이런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의영은 이런 상황에서도 연장자다운(혹은 형다운) 모습을 보이며 의지한테 말을 걸었다. 연소자는 물론 연장자 남성진들도 딱딱하게 굳어있을 때의 일이었다.
“응. 근데 다들 왜 이렇게 굳어있고 그래?”
의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오다가, 주위를 돌라보며 이상하다는 듯 그렇게 물었다. 이걸 보자 남성진들은 얼른 의지한테서 눈길을 돌렸다. 현은 희한하다는 표정으로 그런 남성진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비상이 봐도 이건 무척 희한한 광경이었다.

아무튼, 오늘은 붉은 밤 연소자와 금빛 밤 연소자의 대결이 있는 날이었다. 비상은 물론 다른 연장자들도 잘 모르는 상대와의 대결이라서인지, 분위기는 무척 널널했다. 심지어 강산은 하품까지 곧잘 할 정도였다. 그게 하도 어이가 없어서, 강산의 하품이 다섯 번째에 이르자 비상은 이렇게 딴죽을 걸었다.
“졸리면 그냥 가서 자지 그래?”
“시꺼, 이 놈아.”
이걸 보면, 적어도 오늘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이렇게 주위를 가만히 보는 비상의 입장에선 참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게 어리석은 생각이었단 걸 깨닫는 덴 그리 긴 시간이 들지 않았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비상은 물론 다른 이들도 입을 벌릴 만큼 어이없는 상황이 생겼던 것이다.
“뭐야, 저 놈?”
붉은 밤 쪽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도 무척 당연한 이야기였다. 지금 저 금빛 밤 연소자가 이깟 경기는 가치도 없다는 듯 설렁설렁 경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기려고 애를 써도 모자랄 판에, 자기가 이기든 지든 모르겠단 식으로 경기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이 놀이’에서는.
사실, 이렇게 말했지만 저 금빛 밤 연소자가 아무 것도 안 하고 멀뚱하니 서있던 건 아니었다. 쉽게 말해서 저 연소자는, 대충 피하기만 하고, 공격은 하나도 안 하고 있었다. 마치 이런 데 쓸데없이 체력을 쓰는 것도 아깝다는 모습이었다. 일단 허리에 자기 무기로 보이는 호스를 매곤 있었지만, 그걸 쓰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이 탓인지, 멀리서도 붉은 밤 연소자가 짜증을 내는 게 또렷하게 느껴졌다.
“저 자식을 그냥 확…”
마치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설렁설렁 경기를 하고 있는 금빛 밤 연소자를 보며, 옆에 있던 강산도 이를 부드득 갈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설렁설렁 ‘안 질 만큼만’ 움직이는 금빛 밤 연소자를 보면, 비상도 왜 저 놈이 저러는 걸까 궁금해졌다.
그런 생각을 한 순간, 붉은 밤 연소자가 그렇게 거세던 공격을 그만두었다. 그 대신, 연소자는 자리에 멈춰선 채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냐. 이 인간아?”
그 말을 듣자, 금빛 밤 연소자는 코웃음을 쳤다. 이제야 자기가 바라던 움직임이 나왔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 코웃음이 하도 짜증나서인지, 붉은 밤 연장자들도 ‘쟤 뭐냐?’란 눈빛으로 그 연소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멀찍이 있는 붉은 밤 연소자들은 아주 무시한 채, 금빛 밤 연소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연한 거 아니냐? 내가 왜 너같은 잡어랑 싸워야 돼?”
“뭐?”
이 말엔 당사자인 붉은 밤 연소자는 물론, 다른 연장자들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심지어 저 멀리 금빛 밤에서도 술렁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뭐라고, 이 자식아?!”
“뭘 놀라고 그러냐? 자기도 알 텐데. 내가 굳이 너같은 놈 하나 상대하는 데 힘을 빼야겠냐? 너같은 놈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 여유롭게 족치면 돼. 너같은 놈 시간 안에 끝장내는 게 어려울 거 같냐? 누워서 떡먹기다. 이 놈아.”
“저, 저 놈을 그냥 확…”
금빛 밤 연소자가 의기양양하게 그런 말을 하자, 역시 비상 곁에 있었던 잎새가 몸을 일으켰다. 지금 당장이라도 잎새가 저 너머로 넘어가려 하자, 그 옆에 있던 강산이 팔을 꽉 붙잡았다.
“좀 두고 보자고. 벌써 우리가 화내면 안 되지.”
“어우 정말. 내가 더 짜증난다. 진짜.”
결국 넘어가는 건 그만두기로 했는지, 잎새는 그런 말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붉은 밤 연소자는 무척 모욕당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잎새가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붉은 밤 연소자는 드디어 더 참을 수 없어졌는지, 옥상에 침을 탁 뱉었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이 개자식아. 내가 어린애처럼 보였냐? 똑바로 안 해?!”
그 말을 듣자, 상대방인 금빛 밤 연소자 역시 눈빛이 달라졌다. 그리곤 붉은 밤 연소자를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이런 말을 꺼냈다.
“그래. 그럼 똑바로 해 봐?”
“뭐?”
하지만 붉은 밤 연소자가 놀랄 틈도 없이, 무자비한 물줄기가 붉은 밤 연소자한테 쏟아부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한데 모아놓고 쏘기라도 하는 듯한, 물에 빠진 것도 아닌데 질식할 것만 같은 엄청난 물줄기였다. 어두운 밤하늘에 무지개라도 뜰 기세로 한꺼번에 퍼져나가는 물을 보며, 여기저기서 기겁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놀이라 해도, 이건 사람한테 함부로 쏴선 안 될 양이었다.
그 물의 기세가 얼마나 격했던지, 순식간에 붉은 밤 연소자는 옥상 너머로 밀려나가, 누가 봐도 또렷하게 알 수 있을 만큼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기절한 거 아니냐?’란 목소리마저 들려올 만큼 크게 쓰러진 연소자를 보고, 붉은 밤은 크게 동요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의 주범인 금빛 밤 연소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는 모습이었다.
붉은 밤 연소자는 아까 정신없이 금빛 밤을 쫓아다녀 힘이 바닥난 것에 제대로 쐐기를 박혔는지, 시간이 지나도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붉은 밤이 여러 모로 침통한 분위기인 가운데, 결국 저 멀리에서 ‘그만!’이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비겁하긴 하지만, 힘으로 졌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건 이 뒤부터였다. 결과를 받아들여야 할 금빛 밤 연소자가 갑자기 붉은 밤 연소자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이러리라 마음먹은 듯한 발걸음이었다. 자기가 졌으면 모를까, 누가 봐도 이긴 상황에서 왜 저런 모습을 보이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뭐냐?’란 말이 붉은 밤에서 오가는 가운데, 드디어 일은 터졌다.
“그것 참 잘됐다. 샘통이네. 샘통.”
금빛 밤 연소자는 그렇게 말한 듯, 망설임 하나 없이 쓰러진 붉은 밤 연소자를 발로 세게 찼다. 물론 아직 붉은 밤 연소자는 일어나지도 않았으며, 사실대로 말하자면 의식이 또렷한 것같지도 않았다. 어쩌면 이미 의식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갑작스런 일에 주위에선 당황하는 기색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강산도 어이가 없었는지, ‘저 놈 뭐야?’란 말과 함께 아까보다 훨씬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름도 알 수 없는 금빛 밤 연소자는 그딴 거 모르겠다는 모습이었다. 그걸 보던 비상은, 다른 데로 눈길을 돌리다 문득 누군가의 모습을 찾아냈다.
거기엔 비상이 이미 알고 있는 금빛 밤 연소자의 모습이 있었다. 그 사람은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저 아래를 즐겁단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사람이 누구였더라, 란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얼른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몇 번이고 들려오는 ‘그만!’이라는 소리를 마치 무시라도 하는 것처럼, 금빛 밤 연소자는 여전히 공격, 즉 폭력을 퍼부어댔다. 이건 비상이 봐도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이미 연장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자기가 뭘 보는지 모르겠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너무나 참신한 이 상황에 뭐라 할 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금빛 밤 연소자는 무척 신나게 붉은 밤 연소자를 발로 차면서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이게 멋도 모르고 나한테 까분 벌이다. 너같은 놈이 감히 날 무시해? 난 말이야, 너같은 놈이 그따위로 굴 만큼 만만한 존재가 아니거든. 이제 실감이 나냐? 응?”
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강산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아까보다 더 분해하는 모습이었다. 강산이 지금 당장이라도 저 너머로 뛰쳐나가려던 순간, 누군가 강산의 어깨를 뒤에서 붙잡았다.
그 사람은 바로 의영이었다.
“아니, 형!”
“내가 간다. 주장인 내가 책임져야지.”
이 말을 듣자, 강산은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영은 그걸 보자, 곧바로 저 너머로 뛰어가 금빛 밤 연소자한테로 달려갔다. 갑자기 찾아온 제 3자를 보자, 붉은 밤 연소자를 발로 차던 금빛 밤 연소자 역시 고개를 들어 그 쪽을 돌아봤다.
그리고 의영을 알아챈 그 연소자는, 갑자기 아까와 눈빛이 달라졌다. 마치 무척 바람직한 걸 보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그래. 나한텐 이 정도는 있어야지.”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냐?”
의영은 그 연소자를 노려보며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연소자는 거기에 겁먹은 모습 하나 없이(겁을 먹을만한 몸집으로도 보이지 않았지만) 태연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뭘 잘난 척하고 그래? 내가 댁 생각을 모를 거 같아?”
“뭐라고?”
“댁이 그 미친 개라매? 한 번 만나보고 싶었거든.”
“…그래서?”
연소자가 낄낄대며 이렇게 말하자, 의영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그렇게 되물었다. 이 말을 듣자, 연소자는 마치 비웃는 것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 연소자는 의영이 전혀 무섭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인지, 연소자의 말은 끊길 줄을 몰랐다.
“이름이 미친 개란다. 미친 개. 대체 얼마나 지랄을 떨었으면 그런 말을 듣냐? 불쌍해서 눈물이 나오네, 진짜.”
이 말에 의영이 이를 가는 게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였지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소자는 말을 이어갔다.
“하긴. 너도 중고딩 땐 자기가 잘난 줄 알았겠지. 자기 그릇도 모르고 말이야. 자기가 못났단 걸 현실에서 느끼니까 기분이 어떠냐? 참 더럽지. 그지?”
이제 상황은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잎새는 언제 뛰어가도 문제없도록 자세를 바로잡는 중이었다. 여기까지 오자, 의영도 슬슬 화가 났는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자식이, 보자보자하니까 아주 기어오르는구만 그래?”
“그걸 지금 알았냐?”
“야, 저 놈 술이라도 한잔 한 거 아니냐?”
이걸 듣던 강산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단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강산한테 이런 말을 들을 정도라면 저 놈도 말기나 마찬가지였다.
“세상사 참 허무하지? 지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으니까. 어유. 그러고 보니 남은 건 미친 개라는 욕밖에 없네? 지금 모습보면 대충 성질도 짐작간다. 평소엔 가만히 있다가 자기 성질 구겨지면 미친 듯이 날뛰었겠지…”
“그런 식으로 사람 도발하는 까닭이 뭐지?”
“댁이 전에 한 번 날뛴 걸 봤거든. 그걸 보고 확신했지. 댁도 나랑 비슷한 놈이구나라고. 물론 지금은 자기 분수를 깨달은 것같긴 하지만…”
그렇게 둘의 말이 이어질 동안, 잎새는 다시 한 번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아까와 달리, 강산이 말린다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저 너머로 가야겠다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자세를 바로잡다 말고, 잎새는 비상, 그리고 곁에 있던 도진한테만 들릴 만큼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가봐야될 거 같다.”
“지금?”
“이제 곧 지옥이 펼쳐질 거 같아서. 아무래도 기다리고 있는 게 나을 거 같더라.”
도진의 말에, 잎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무척 부풀린 말처럼 보였지만, 여기서 의영을 보고 있는 비상은 그다지 그렇게 여겨지지 않았다. 어쩌면 잎새는 지금 이 상황을 가장 잘 나타낸 말을 고른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의영은, 이제 정말 화가 난 것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이 새끼가. 뚫린 게 입이라고 그딴 식으로 지껄이는 거냐?”
하지만 당사자인 연소자는, 이제야 자기가 보고싶은 게 나왔다는 듯 흐뭇하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젠 비상도 저 놈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그래. 그렇게 나오셔야지.”
“그래. 나는 둘째치자. 하지만 지금 이게 사람이 할 짓이냐? 걜 그렇게 다루면 니가 잘나보이기라도 하든?”
이제 의영은 주먹까지 쥐며 그렇게 외쳤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연소자는 아까와 같은 말투로 이렇게 대답했다.
“뭐, 이런 걸 안 해도 나는 충분히 잘나지만…”
그리고, 그 금빛 밤 연소자는 아무렇지 않게, 자기 옆에 있던 붉은 밤 연소자의 머리를 발로 밟았다. 이걸 보자 비상을 뺀 거의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붉은 밤 쪽에서 누가 ‘진정하세요 형!!’이라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의영이 그걸 들은 것같진 않았다.
그렇게 의영이 이를 갈고 있을 때, 그 연소자는 아무렇지 않게 쐐기를 박았다.
“아직도 그 변변찮은 본모습을 안 보여준다 이거지? 이야. 너무 아쉬운데. 미친 개가 발악하는 모습을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아무리 늙어빠진 개라고 한들 미쳐 날뛸 때가 가장 재밌으니까…”
연소자가 여기까지 말하자, 의영은 마치 뭐라도 끊긴 듯 자세를 바꿨다. 그리고 지금까지 중 가장 낮은 목소리로, 곧장 이렇게 외치곤 연소자한테 덤벼들었다.
“이 시발새끼. 그래서 니가 한 짓이 잘났다 이거냐?!”
그렇게 달려간 의영은, 상대방의 대답을 듣기 전 달려가 그대로 연소자를 패대기치고 말았다. 그리곤 무자비할 만큼 심하게, 발로 연소자를 몇 번이고 밟았다. 사실 저 연소자가 한 짓을 생각하면 너무하다 할 건 없었지만, 의영의 지금 모습은 아까 연소자와 차원이 다를 만큼 격했다. 마치 정말로 이 놈을 죽여버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단 듯한 모습이었다. 전에 하늘이 ‘이 놀이를 하는 동안 몸에 상처는 안 날 것이다’ 비슷한 말을 했던 기억은 있지만, 그것과 이건 아주 다른 이야기였다.
“진짜 진정하세요. 형!!”
그 뒤에 일어난 일은, 두말할 것도 없는 아수라장이었다. 상황 판단이 빠른 비상조차 이 상황을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의영은 이제 아무 것도 눈에 안 들어온다는 모습으로, 연소자의 멱살을 쥐고는 바닥에 세게 쳤다. 의영은 전에 자기가 말한 대로,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그야말로 아무도 말리지 못할 것만 같을 만큼(물론, 이미 붉은 밤 팀원 대다수는 의영을 어떻게든 말리기 위해 저 쪽에 가 있었다).
물론 금빛 밤도 가만히 있진 않았는데, 아예 해원이 저 너머로 가서 어떻게든 의영을 말리고 있었다. 몇몇은 이 상황에 마음이 따라가지 못했는지,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상이 보기에, 그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비상은, 아까 그 금빛 밤 연소자가 아직 저 쪽에 서있단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비상은 드디어 저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예전에 비상과 한바탕 말다툼했던 사람, 진혁이 틀림없었다.
그 사람, 진혁은 무척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의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마치 아주 좋은 볼거리를 보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방금 의영한테 시비를 건 그 놈은 치기어리다고 쳐도, 저기 있는 진혁은 정말로, 면상을 한 대 갈겨주고 싶은 모습이었다.
그 차이는 대체 뭘까.
비상이 그런 생각을 할 때에도,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격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젠 금빛 밤은 물론, 파란 밤 쪽 사람들까지 와서 의영을 어떻게든 떼어놓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도진은 무척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비상을 보며 이런 말을 걸어왔다.
“형, 이거 혹시 저 때문 아니에요?”
“너도 참 바보같구나. 나 참.”
“그, 그치만 그…”
도진은 그런 말과 함께, 눈길을 의영한테서 돌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던 중에도 여전히 붉은 밤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아까 전 그 나른하던 분위기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 비상은 우연히 승지를 보게 되었다. 승지는 마치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계단을 뛰어내려가고 있었다.
비상이 어제 들은 말을 생각하면 그 모습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오늘 승지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했을지는 비상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오늘같은 날, 저런 모습은 절대 보고싶지 않았을 터였다. 비록 의영이 일부러 이렇게 하고 있는 게 아니라 할지라도.
그걸 보자, 비상은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끊었으며, 다시 할 생각도 없었던 바로 그 담배를.

잠시 뒤.
“면목 없다.”
그런 말과 함께, 의영은 고개를 숙였다. 그 역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까 일어났던 그 참사는, 의영이 아예 그 연소자를 바닥에 엎어놓고 정신없이 주먹으로 두들겨 팰 만큼 상황이 정점을 찍은 뒤에야 어느 정도 가라앉았던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붉은 밤은 침통한 분위기였으며,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진 건 물론, 이런 일까지 일어났으니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비상은, 여전히 승지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승지는 그 뒤로 저멀리 모습을 감췄을지도 몰랐다.
한편, 의영은 여전히 고개를 전혀 들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는 가운데, 강산이 한발짝 앞으로 나서서 이렇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 형 마음 다 이해해.”
이미 한 번 의영한테 술을 받은 바 있는 강산은, 아마 지금 의영의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있을 터였다. 의영은 크게 한숨을 쉰 뒤, 무척 무거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오늘은 다들 수고했다. 변변찮은 형이라서 미안하다.”
그 말과 함께, 의영은 그 자리에서 등을 돌렸다. 그 등에 말로 다할 수 없는 무게가 실려있단 걸, 비상은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여전히 붉은 밤에선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비상이 가만히 있을 때, 갑자기 옆에서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파랑이었다.
“비상이 넌 지금 기분이 어때. 가라앉고 그래?”
“글쎄요.”
“다 잘 될 거야. 지금 당장은 그렇게 안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 말을 남긴 채, 파랑은 자리를 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상은 저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정말 그럴 것 같다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강산이 들으면 ‘니가 말하지 마. 이 자식아’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겠지만.
그래서, 난 어떻게 할까.
다들 눈치를 살피며 자리를 뜨는 가운데, 비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딱히 까닭은 없었지만, 비상은 오늘 그대로 집에 돌아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나둘씩 팀원들이 자리를 뜰 때마다 텅 비어가는 옥상을 보며, 비상은 잠시 혼자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혼자 생각에 빠졌던 비상이 정신을 차리자, 주위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한 명 남아있는 사람이 있었지만, 비상조차 그 기척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존재감이 없었다.
그 사람은 바로, 오늘 참으로 여러 일이 있었던 의영이었다.
“비상이 너도 남아있었구나.”
그 말 뒤, 둘은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떨어진 거리도 아닌데, 비상은 의영한테 가까이 다가가는 게 묘하게 망설여졌다. 지금은 이렇게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비상이 그렇게 생각하던 때, 드디어 의영이 입을 떼어놓았다. 평소보다 무척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나는 말이지,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난 놈인 줄 알았다.”
비상은 그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의영은 지금 하고싶은 말이 무척 많을 터였다. 그걸 비상이 재촉할 까닭은 전혀 없었다. 비상이 아무 말도 않자, 의영은 무척 우스운 말이라도 한 듯 피식 웃었다.
“웃기지? 대체 자기를 뭘로 알고, 뭐 그런 생각에. 근데 난 정말 그랬다. 연소자 애들 나이 떈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 누구나 다 그렇다고 하면 웃고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당사자가 아니라면 말이야.”
비상은 이 대목에서, 대략 의영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챘다. 비상이 그러거나 말거나, 의영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 때 자기를 생각하면 쓴웃음이 절로 나오지. 한 나라를 이끄는 것조차 거뜬하다고 여겼을 정도니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나고, 가장 똑똑하고, 가장 판단력이 좋은 놈인 줄 알았다. 내 생각은 항상 맞고, 틀리는 일은 절대 없을 줄 알았지. 웃기겠지만 진짜야. 물론 그런 근거는 이만큼도 없었지만, 그냥 내가 그렇게 느꼈거든. 나는 이쯤은 되는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이쯤은 가볍게 할 수 있다고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뒤, 의영은 잠시 말을 끊었다. 비상은 여전히 그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뭐, 물론 말도 안 되는 거였지. 머리가 술에 취한 거야. 그런 생각에서 깨어난 건 회사에 다니면서다. 자기가 모자라단 걸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환경에, 잦은 실수에…그런 걸 겪다 보니 어느샌가 깨닫게 되더라. 아, 난 이렇게 모자란 놈이었구나. 라고.”
그 말과 함께, 의영은 고개를 저었다. 비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영 너머에 있는 어둠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때 받은 충격은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난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저 변변찮은 회사원이었으니까. 뒤늦게 자기 분수를 깨달으니 그렇게 마음이 텅 빌 수가 없더라. 어릴 적부터 아무렇지 않게 영화 속 주인공과 난 똑같은 존재라 생각해왔는데, 사실은 그게 나 혼자만 가지고 있던 착각인 걸 알았을 때 그 충격이란…물론 웃긴 얘기지만 말이지.”
의영은 오늘, 유난히 말이 많아진 것 같았다. 아마 오늘 생각한 게 많기 때문이리라.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딱히 의영의 말을 자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까, 내가 참 보잘것없는 존재처럼 느껴지더라.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게 대체 뭘까, 뭐 그런 생각에 말이지. 그렇게 잘난 척해놓고서,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해놓고서 이룬 건 하나도 없더라. 앞으로도 내가 뭘 이룰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여러 번 해봤는데,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니까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절로 나오더라. 평소엔 얌전히 있다가 비뚤어지기만 잘하는 놈이 대체 무슨 깡으로 그랬을까, 그런 생각에.”
쓴웃음을 지으면서, 의영은 그렇게 말했다. 지금 의영이 누구보다 진심이라는 건 비상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의영의 말을 그대로 들어주는 것이라 비상은 여겼다.
“아까 그 놈이 했던 말 들었지? 그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몰라. 우리 밤 친구만 해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했을 거고, 그 놈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 그 놈한테 그런 식으로 굴욕을 당한 우리 밤 친구의 마음이 어땠을까? 이렇게까지 자존심이 갈기갈기 찢긴 적이 있기나 할까? 생각해보면 난 그 놈을 욕할 자격도 없어. 내가 저 놈 나이일 때, 아직 아무 것도 모를 때, 난 술에 취한 거나 마찬가지였고, 저 놈처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아마 승지도 그런 생각일 거야. 나랑 눈도 마주치기 싫어할 걸.”
비상은 그 말을 듣고, 의영이 오늘 일로 자기 옛일을 돌아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의영 입장에선 죽 모른 척해왔던 자기 깊은 곳이 푹 찔린 듯한 느낌이었을지도 몰랐다. 어린 시절의 떠올리고 싶지 않은 역사를 억지로 떠올린 듯한, 대략 그런 느낌.
그렇게 자기 말을 하고 있는데도, 의영의 말투는 무척 침착했다. 마치 남의 이야기라도 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걸 듣던 비상은 잘 알 수 있었다. 지금 의영은 자기 이야기를, 될 수 있는 대로 감정을 억눌러서 말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걸.
잠시 뒤, 의영은 입을 다시 뗐다.
“어쩌면 말이지, 사람이란 자기 나름대로 남하고는 다르단 걸 안 보여주면 못 사는 존재인 거 같다.”
그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의영은 눈길을 먼 곳에 두고 있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뭔가를 찾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든, 아무튼 자기는 이런 식으로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거 같다. 꼴사나울지도 모르지. 그야말로 ‘자기 멋대로’니까. 지금 여기 있는 누구처럼 말이야.”
그 말과 함께, 의영은 난간에 몸을 기댔다. 지금껏 의영은 죽 곧게 선 채 비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말이야. 어쩌면 이 놀이를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도, 다 비슷한 생각 아닐까 한다. 다들 조금이나마 남하고 다르게 보이고 싶었던 거야. 아마도.”
비상은 그 말에 뭐라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아직도 철이 들긴 커녕 이런 놀이에 끌리는 사람들. 조금이나마 남들과 다르단 느낌을 받고 싶어서 여기에 두근댄 사람들…물론 그런 사람은 나만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적어도 내가 바란 건 그런 게 아니었나, 하고. 영화 속 주인공들이 으레 그런 것처럼 말이야.”
그렇게 길게 말하고 있는데도, 의영은 그다지 지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아까 전보다 훨씬 더 기운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지금 의영의 머릿속에선 뭐가 펼쳐지고 있을까. 대체 어느 시절의 자기를 떠올리는 걸까.
“그 놈이 아니면 여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면 이것저것 풀리는 게 많아. 우리 밤 친구도 비슷한 생각이었다면, 여기서 저 놈한테 그런 수모를 당하는 게 절망이었겠지. 모처럼 자기가 다른 존재가 되었다 믿었는데, 그런 놈한테 자존심을 짓밟혔으니까. 그 놈도 자기한테 이런 기회가 찾아온 건 자기가 잘나서 그런 거라 믿고 있을 거고. 물론 나를 빠뜨릴 순 없지. 난 대체 어느 쪽일까? 자기가 조금이나마 다른 이들과 다르단 걸 기뻐하는 쪽? 아님 결국 난 이거밖에 안 되는 놈이라고 절망하는 쪽? 솔직히 나도 모르겠다. 비상이 너보단 오래 살았을 텐데, 웃기지?”
그렇게 말을 마무리지은 뒤, 의영은 비상한테서 눈길을 떼고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모든 걸 저 너머에 놓고온 듯한 표정이었다.
비상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런 둘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저 멀리에서 흐릿하게 사람들이 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들을 때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겠지만, 비상은 지금, 그다지 아무 생각도 하고싶지 않았다.
그런 비상한테, 갑자기 하나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물에 비친 자신에게 반했었단 건 절망이기도 하지만, 또한 희망이기도 한 것이다.
왜 자기가 그런 말을 떠올렸는지 비상은 알 수 없었다. 누가 한 말인지도, 아니, 누가 한 말이긴 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비상은 그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그건 어째서 절망인가. 그리고 왜 희망이기도 한가.
결국 의영의 말도, 뿌리를 파고들어가면 그것과 관련이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비상은, 자기가 죽 생각했어야 했던 것, 즉 지금껏 잊어버리고 있었던 걸 뒤늦게 깨달았다. 물론 의영의 문제도 중요했지만, 이 문제도 그것 못지않게 중요했다.
비상 자신의 경기가 바로 다음 날 있다는 사실.
지금껏 가장 먼저 생각해야 했던 건, 바로 이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