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꽃잎은 지금껏 속으로만 바라던 바로 그 ‘현실’에 있었다.
“오늘은 왜 이렇게 늦었어? 기다렸는데.”
지금 꽃잎이 서있는 곳엔, 역시 아주 ‘잘 알고’ 있는 여성이 있었다. 나이는 30대 초중반쯤 될까. 좋은 엄마처럼 느껴지는, 소녀처럼 보일 만큼 밝은 인상을 지닌 사람이었다. 사실 성격도 겉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꽃잎은 지금껏 오래 그걸 ‘봐왔기’ 때문에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꽃잎은, ‘안방’에 가만히 서있었다.
아무리 항상 보던 곳이라 한들, 이렇게 ‘현실’에 있으면 꽃잎은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한 느낌이 꽃잎을 아주 감싸고 있었다. 아무리 현실세계의 존재가 아니라 한들, 꽃잎도 가끔은 꿈을 꾸곤 했다. 너무나 민망한 꿈이라서 남한테 말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틀림없이 ‘현실’, 즉 꿈이 아닌 진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너무나 얼떨떨한 마음에 다리가 엉켜서인지, 꽃잎은 자기도 모르게 화장대 쪽에 손을 딛고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된 채, 꽃잎은 무심코 거울을 빤히 바라봤다.
거기 비친 모습을 보자, 꽃잎은 마치 자기 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는 걸 느꼈다.
지금껏 어떻게 해서든 의식하지 않으려 한 ‘지금 자기 모습’을 두 눈으로 똑바로 보게 되고 말아서였다.
지금 꽃잎은, 아까 전 쓴 ‘그 방법’ 때문에 원래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실은 부끄럽고 민망해서, 꽃잎은 이렇게 된 뒤로 정말 거울을 보고싶지 않았다. 될 수 있는 대로 모른 척하고 싶었다. 어차피 목소리가 들리니 싫어도 ‘다른 모습’을 느낄 수밖에 없었지만.
거울에 비친 건, 어딘지 모르게 나약하게 느껴지는, 마치 꽃잎의 원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성인남성이었다.
이걸 과연 어른이라 할 수 있을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꽃잎은 거울을 보고 나서 가장 먼저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 꽃잎은 어른이라 하면 좀 더 믿음직스럽고 멋있는 존재를 상상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봐온 사람이 영준이라서 그럴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자기를 대체 누가 ‘믿음직스러운’ 어른이라 생각할까.
꽃잎이 현실을 내다볼 때 그다지 많은 사람들을 만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자기같은 사람이 어딘가 어설프게 보이리란 건 틀림없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된 까닭을 말하자면 길었지만, 모든 건 꽃잎이 방금 그 상황을 어떻게든 하기 위해 쓴 힘 때문이었다. 결국 꽃잎은 어떻게 하면 영준이 의식을 되찾을지, 그리고 ‘자기와 눈이 마주친’ 문제를 어떻게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일단 영준과 같은 나이일 것이므로 다른 사람 눈에 이상하게 비치진 않겠지만, 꽃잎은 묘하게 지금 자기 모습이 불만스러웠다. 같은 나이라 해도 영준은 저렇게 멋있는 느낌인데, 왜 자기는 이렇게 어수룩하게 보일까, 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현실경험이라곤 이만큼도 없는 꽃잎이므로 그렇게 느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런 모습이라면 30대는 커녕 20대 초중반이라 해도 이상하진 않을 것 같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영준만큼이나 꽃잎이 오랫동안 봐온 사람이었다.
이 사람, 이슬기는 바로 영준의 아내였던 것이다. 꽃잎은 영준을 오랫동안 봐왔기에, 슬기는 물론, 영준의 딸 두 명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꽃잎한테, 영준의 가족과 직접 만날 수 있단 건 오래 전부터 혼자 꿈꿔왔던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이뤄지길 바랐던 건 결코 아니었지만.
꽃잎이 그렇게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그 여성, 슬기는 조금 걱정된다는 듯 이런 말을 걸어왔다.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 또 늦게 잤어?”
“어? 그, 그게…”
“좋아하는 거 하려면 건강도 같이 생각해야지. 또 그 여자애 만드느라 늦는 거야? 오늘은 좀 일찍 자. 나도 걱정되니까.”
“으, 응.”
너무나 자기를 ‘오늘 저녁까지 있었던 진짜 영준’처럼 대하는 그 사람을 보면서, 꽃잎은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마치 큰 죄라도 지은 듯한, 아니, 사기라도 친 듯한 느낌이 꽃잎을 감싸고 있었다.
지금 자기가 하고있는 짓은 얼마나 심한 일인가.
어쩔 수 없었단 건 알지만, 꽃잎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슬기가 있는 안방을 나와 작업실에 들어간 꽃잎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꽃잎 앞엔, 누군가가 가만히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신기하리만치 꽃잎과 분위기가 닮아있었다.
얼굴 생김새나 사람 자체는 틀림없이 다른데도, 꽃잎은 마치 거울을 마주보는 듯한 민망함을 느꼈다. 사실 꽃잎은 이렇게 자기를 ‘남의 눈’으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눈으로 ‘자기에 가까운 누군가’를 본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얼굴이 빨개지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현실’과 아주 딴판인 모습이었다.
꽃잎이 자기 세상에서 항상 입고 있던 그 옷, 부드러운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드레스라 한들 조금 레이스가 붙은 흰색 원피스라 하는 게 더 맞겠지만, 아무튼 보통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과 견주면 지나치게 눈에 띄는 건 틀림없었다.
그 사람은 키조차 꽃잎과 비슷했다. 아니, 어쩌면 아주 똑같을지도 몰랐다. 지금 꽃잎과 대보면 머리 하나, 아니 둘쯤은 더 작아 보였다. 그 차이를 느낄 떄마다, 꽃잎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민망함이 속에서 밀려올라오는 걸 느꼈다.
굳이 키뿐만이 아니었다. 허리까지 닿을 만한, 은빛을 지닌 긴 머리카락. 10대 전반쯤으로밖에 안 보이는 겉모습. 이렇게 보면 눈앞의 이 사람은 정말 꽃잎과 판박이였다. 어디까지나 분위기가 그렇단 말이지만, 민망해서 지금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을 만큼은 비슷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슷한 것은 분위기였기에, 그 사람은 꽃잎과 틀림없이 ‘다른 존재’였다.
겉으로 보기엔 꽃잎만큼이나 나약한 존재처럼 느껴졌지만, 사실 그 사람은 적어도 꽃잎보단 훨씬 더 팔다리가 튼튼했다. 라고 한들 딱히 팔다리가 굵은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꽃잎보다 운동신경이 좋으리란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다른 세상’에 사는 꽃잎은 달릴 일도 뛸 일도 없었기에 운동신경이라곤 바닥을 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꽃잎보다, 아니 저 나이 또래보다는 몇 배나 더 달리고 뛰는 걸 잘할 것만 같았다.
그 사람의 얼굴생김새는, 언뜻 보기에 꽃잎과 비슷했지만 틀림없이 달랐다. 아니,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잘 아는 꽃잎은 그렇게 잘라말할 수 있었다.
앞서 말한 대로 좀 나약하다고 할까, ‘어린’ 인상을 지닌 꽃잎과 달리, 이 사람은 몸집만 작을 뿐 의지가 뚜렷한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다. 몸집은 초등학교 고학년에 가까웠지만, 마치 30년을 넘게 산 어른같은 묘한 느낌이 그 사람한텐 있었다. 그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꽃잎은 그걸 받아들이는 게 어려웠다.
이 모든 건 다 자기 때문인데도.
자기가 ‘그런 힘’을 썼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된 건데도.
그 사람의 눈을, 꽃잎은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꽃잎은 이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현실세계라곤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눈빛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눈빛은, 정말로 ‘현실세계’를 겪은 적이 없는 자기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사람의 눈빛 속엔, ‘현실’이 있었다. 좀 더 제대로 말하자면, 세상살이를 어느 정도 거친 사람의 눈빛이었다. 바로 그 눈빛이 꽃잎은 민망하게 느껴졌다. 그 눈빛을 가진 사람과, 그 사람이 지금 놓인 상황 및 모습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 눈빛이, 이 사람이 사실은 누구인지를 무엇보다 잘 말해주고 있었다.
자기와는 아주 딴판인, 하지만 지금은 자기와 비슷한 ‘것처럼 보이는’ 그 사람을.
그 때, 그 사람이 꽃잎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아마 꽃잎이 자기를 빤히 쳐다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마음에 걸렸던 듯했다. 꽃잎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 사람은 천천히 입을 뗐다.
“저, 어디 아프세요?”
“네? 그, 그게 아니라…”
거기까지 말하다, 꽃잎은 자기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무심코 이 사람한테 존대말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꽃잎이 이 사람한테 존대를 하는 건 무척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힘으로 ‘상황’이 바뀐 지금, 그렇게 말하는 건 무척 어색한 일이었다. 사실 꽃잎은 이 사람과 이렇게 마주보고 얘기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당연한 일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거기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 사람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꽃잎은 아직 그걸 잘 알 수 없었다. 아마 자기가 쓴 ‘힘’은 제대로 효과를 드러냈으리라 여겼지만, 그게 이 사람의 사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꽃잎이 짐작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지금 꽃잎을 걱정하고 있다는 건 틀림없었다. 이게 다 자기가 한 일 때문이란 생각과 함께, 그것 때문에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꽃잎은 속으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람을 오래 봐온 입장에서, 꽃잎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뒤늦게 꺠달았지만, 그 사람의 목소리는 ‘원래’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굳이 말하자면 꽃잎이 항상 듣던 것보다는 조금 높았지만, 그래도 어쩐지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다정한 목소리란 건 그대로였다.
그렇기에, 그 사람은 꽃잎이 지금까지 봐온 영준과 ‘같은 사람’이란 걸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저, 몸이 안 좋아보이는데…”
그 사람, 즉 영준은 무척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꽃잎을 쳐다봤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지금 눈앞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이건 혹시 꿈이 아닐까.
자기가 이렇게 만들어놓은 주제에, 꽃잎은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이 모든 건 다 자기가 한 일인데 왜 딴청이나 피우는 걸까. 자기가 똑바로 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아, 죄송해요.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서 당황스러우시죠? 저도 그럴 생각은 아니지만, 그렇게 된 거니까…잠시만 곁에 있으면 안 될까요?”
이쯤되자, 꽃잎은 지금 당장이라도 화끈대는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저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만약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영준이 아닌 다른 누군가였다면, 꽃잎은 정말 그랬을 터였다. 애초에 사람과 제대로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긴 했지만.
그리고 영준은, 여전히 꽃잎을 쳐다본 채로 당연하단 듯 이런 말을 건네오고 말았다. 꽃잎이 지금껏 가장 듣기 무서워하던 ‘그 말’을.
“..영준 님.”
꽃잎은 그 말을 들은 순간, 자기가 얼마나 낯뜨거운 짓을 했는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아무리 처음부터 알고있었다 한들, 그 ‘짓’을 눈앞에서 본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꽃잎이 대체 무슨 짓을 했냐면, 대략 이런 거였다.
영준이 왜 꽃잎을 보고 의식을 잃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꽃잎은 ‘현실세계 속 사람’과 마주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뭔가 큰일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냥 기절했다 여길 수도 있지만, 꽃잎이 여기서 영준을 죽 살핀 지 현실세계 시간으로 반나절이 넘었는데도 영준은 의식을 되찾지 않았다.
절대로 손을 대선 안 되는 ‘관계자’한테 손을 대고 말았다.
꽃잎은 몇 번이고 고민하다가, 결국 아주 오래 전, 하늘한테 들은 어떤 방법을 쓰기로 했다. 물론 임시방편이란 건 두말할 것도 없었지만, 지금은 그 임시방편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 임시방편이 바로, ‘영준과 입장을 바꾼다’는 어이없을 만큼 엉망진창인 방법이었다.
물론 꽃잎은 하늘한테서 ‘이건 비상시에만 써야 한다’는 말을 들은 바 있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풀지 못할 만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그 때에만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이다. 그만큼 이 방법은 터무니없이 거칠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꽃잎은 더 이상 어쩔 도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입장을 바꾼다는 건 어떤 것인가.
꽃잎은 어디까지나 이 방법을 쓸 줄 아는 것일 뿐, 이 방법이 대체 어떤 논리로 이뤄지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자기가 이 세상에서 숨을 쉬고 살 수 있는 것처럼 ‘아무튼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길 뿐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 방법을 쓴 꽃잎조차도 이 ‘엉뚱한’ 상황엔 따라갈 수 없었다. 자기가 이렇게 만들어놓고선, 그저 멍하니 눈만 동그랗게 뜰 뿐이었다.
물론 이걸 자기가 ‘믿기’ 위해서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게 훨씬 편했다. ‘자기’라는 존재한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지금 꽃잎이 쓴 힘은 참으로 도망가기 좋은 곳이 될 터였다.
꽃잎은 그게 뭔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게 뭔지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지금 이 현실세계에서, 꽃잎과 영준의 입장은 틀림없이 ‘뒤바뀌어’ 있었다.
실제로는 특이한 힘을 쓸 수 있는 것도, ‘현실세계에 섞인 이방인’인 것도 여전히 꽃잎이었지만, 적어도 영준의 머릿속에서, 현실세계의 이방인은 바로 영준 자기자신이었다. 즉, 지금 영준은 자기가 ‘현실세계 속 존재가 아니다’라 철썩같이 믿고있는 것이다. 왜 그렇게 믿느냐, 모순이 없느냐란 말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지금 영준의 눈에 ‘영준’이란 자기 눈앞에 비친 꽃잎을 말하는 것이었으며, 심지어 꽃잎과 같은 ‘이상세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영준은 자기를 ‘꽃잎과 같은 존재’라 믿고있는 것이다. 그건 물론 정신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건 이 뒤부터였다.
이 입장이 바뀐다는 건, 물론 모습, 즉 육체 자체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꽃잎은, 속으로 그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되고 만 걸까.
꽃잎은 정말로, 이럴 땐 어쩌면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