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이 지금까지 지내온 건, 참으로 ‘평범한’ 나날이었다.
비록 그 평범한 나날이 ‘현실세계’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꽃잎이 나고자란 이 세계엔 아침이란 개념이 없었다.
꽃잎이 잠에서 깨어나는 건, 항상 ‘현실세계’ 시간이 아침일 때였다. 자기가 있는 세상에서 시간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꽃잎이 규칙바르게 살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리 ‘현실세계에 맞게’ 맞춰둔 시간에 알람이 울리면, 꽃잎은 눈을 뜬 뒤 아무것도 없는 자기 세계를 빤히 바라보았다.
꽃잎이 사는 이 세계는, ‘현실’과 다른 곳이었다.
여기엔 아무 것도 없었다. 부풀린 말은 결코 아니었다. 정말로 이 세상엔 ‘아무것도 없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있는 거라곤 한없이 텅빈 공간. 새하얀 세상. 아무튼 아무것도 없는 세상. 단지 그것뿐이었다. 꽃잎이 뭐라도 만들지 않는 이상, 여기서 ‘볼’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따라서 꽃잎의 생활은 항상, ‘여기가 아닌’ 현실에 휘둘리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는 건 똑같았다. 이 공간과 ‘현실’을 이어 저 너머가 보이도록 한 뒤, 자기가 지켜봐야 할 사람을 잠들기 전까지 죽 살피는 게 꽃잎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영준이었다.
꽃잎이 10년 넘게 알고지냈다 하는 것도, 사실은 이렇게 ‘자기만’ 혼자 그렇게 여기는 것뿐이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하면, 꽃잎은 현실세계에 사는 이들과도 조금 모습이 달랐다.
다르다고 한들 인간에 가까운 모습이긴 했지만(그리고 꽃잎 역시 자기를 인간이라 믿고 싶었지만), 그래도 묘하게 ‘튀는’ 데가 있었다. 먼저 머리카락이 은빛이었다. 대체 왜인지는 꽃잎도 알 수 없었지만, 자기가 태어났을 때부터 죽 이런 머리카락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키도 작은 편이었다. 대략 148cm쯤 될까. 만약 꽃잎이 보통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고등학교 1학년쯤은 되었겠지만, 그 나이 또래와 대보면 작은 건 틀림없었다. 아마 현실세계에 사는 사람이 꽃잎을 본다면 중학교 1학년쯤으로 짐작하지 않을까. 어쩌면 더 어리게 볼지도 모르지만.
꽃잎도 왜 자기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꽃잎은 갓 태어난 뒤부터 죽 이런 모습이었는데, 그동안 딱히 키가 자라지도, 뭐가 달라지지도 않았다. 현실세계에 사는 이들은 모두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엔 염색한 사람도 있었지만, 적어도 꽃잎이 언제나 보고 있는 현실, 대한민국에 은빛 머리카락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 자기만 혼자 이렇게 다른 걸까.
가만히 생각하면, 꽃잎이 다른 이들과 별난 건 태어난 세상이나 겉모습뿐만이 아니었다.
꽃잎이 왜 태어난 뒤부터 죽 이런 일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왜 자기는 이런 세상에 태어났는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꽃잎이 볼 때, 그건 사람이라는 존재가 숨을 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기가 사람인지 어떤지는 둘째치더라도(비슷하리란 생각은 들었지만), 하루종일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 터인 세상을 가만히 바라보는 게 크게 이상하진 않았다. 그냥 만날 이렇게 살아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꽃잎이 이 사람, 영준을 죽 지켜본 데엔 까닭이 있었다. 그건(영준이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참으로 쓸데없는 참견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꽃잎은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건 둘째치고, 꽃잎은 그런 식으로 영준의 나날을 하루종일 보고있는 것이 일이었다. 사실 일이라 한들 ‘그것밖에 할 일이 없다’에 가까우므로, 꽃잎은 현실세계에서 보면 백수, 아니 백조에 가까운 존재일지도 몰랐다. 꽃잎 자신도 자기가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단 걸로 고민할 때가 가끔 있었다. 물론 저 세계와 아무 상관없는 꽃잎은 그런 고민을 할 것도 없었지만.
나는 왜 이렇게 현실세계와 떨어져있을까.
하지만 꽃잎은, 요즘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나날이 부쩍 늘어났다. 그건 고민이라기보다 궁금증에 가까웠다. 자기가 왜 여기에 있는지, 왜 ‘현실’은 자기와 상관없는 존재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눈을 뜨고나서 하는 일이 ‘자기와 상관없는’ 현실세계를 보는 일뿐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사실 꽃잎도 ‘아무하고도’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는 건 아니었다. 꽃잎한텐 단 한 사람, 아는 존재가 있었다. ‘사람’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세계에 있는 사람만큼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란 건 틀림없었다.
언젠가 꽃잎이 이런 말을 입에 담자, 그 사람, 하늘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아직 모를 수도 있을 거야.
아직 꽃잎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좀 더 자라면(꽃잎은 ‘자라는’ 것조차 현실세계 이들과는 다른 듯했지만) 알 수 있을지도 몰라, 라 생각해볼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어쩐다.
여전히 의식을 잃은 영준을 눈앞에 둔 채, 꽃잎은 여전히 생각에 잠겼다. 사실 이 모든 건 꽃잎 탓이었다. 꽃잎의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한 영준한테 문제가 있을 리는 없었으니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정말 별 일은 없었다. 꽃잎이 천 번을 넘게 되풀이한 하루와 다름없는 시간이 흘러갔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현실세계에서 말하는 ‘저녁’이 되었다. 영준은 드물게도, 옥상에 선 채 밖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그 표정엔 걱정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어디까지나 꽃잎의 생각일 뿐이었지만, 오랫동안 봐와서인지 영준의 표정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사실 영준이 이런 표정을 짓는 건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가끔 영준은 여기로 올라온 뒤, 이런 표정을 지은 채 저 먼 곳을 바라보곤 했던 것이다. 뭔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걸 떠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꽃잎은 그저, ‘만날 그랬던 것처럼’ 그걸 가만히 보고있었을 뿐이었다. 10년을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죽 그렇게 해온 것처럼.
하지만,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꽃잎은 그저 영준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현실세계에 사는 이가 자기를 알아채지 못한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오늘도 다른 날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터였다.
하지만 영준이 마치 뭔가 떠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뒤로 돌릴 때, 꽃잎은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영준과 눈이 마주쳤다.
아무리 이제 어두워질 무렵이라 한들, 꽃잎은 그게 틀림없단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난 이대로 죽는 게 아닐까.
마치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그 짧은 시간 동안, 꽃잎은 그렇게 생각했다. 눈을 깜박일 수조차 없었다. 지금 자기가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조차 얼른 와닿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지금 꽃잎이 겪는 일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다른 누군가한테 말하는 건 어려웠다. 굳이 말하자면, 그저 지나가는 고양이를 빤히 보고 있었는데 ‘뭘 봐 인마’란 말을 들은 것만큼 큰 충격이었다. 물론 영준은 고양이도 아닐뿐더러, 저런 말을 할 사람도 아니었지만.
마치 자기를 둘러싼 모든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꽃잎은 다리가 떨려 제대로 서지 못할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영준도 마치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자기’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현실세계에서 보일 리가 없는 자기 눈을, 영준이 틀림없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영준이 갑자기, 꽃잎도 알 수 없는 까닭으로 정신을 잃은 건.
그렇게 해서, 꽃잎은 지금 의식을 잃은 영준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냥 내버려뒀다간 현실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단 생각에, 꽃잎은 영준을 자기가 사는 이 세상으로 데리고 왔다. 어차피 두 세계 사이는 멀고 가깝고가 없어서, 데리고 오는 데엔 그다지 문제가 없었다. 문제인 건 이 다음부터였다.
이런 일은 정말로 처음이었다. 현실세계의 사람이 자기를 ‘본’ 것도 처음이었지만, 갑자기 의식을 잃은 것도 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제 어쩐다.
꽃잎은 지금, 정말 큰 죄를 지은 듯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다. 영준은 지금껏 전혀 몰랐겠지만, 꽃잎은 10년을 훌쩍 넘길 동안 죽 영준을 지켜봤다. 영준이 왜 ‘그런 일’을 하고 있는지,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꽃잎은 자기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한테 도움은 못 줄 망정, 대체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꽃잎은 아주 오래 전부터, 영준과 직접 만나보고 싶다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를 ‘보지도 못하는’ 현실세계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한다니, 헛된 생각도 이만한 게 없었지만 그래도 그러고 싶었다.
아주 잠깐만이라도 괜찮으니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 지금껏 자기가 봤던 것들을 조금이나마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자기’란 존재가 있단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물론 절대로 그런 일은 없겠지만. 오히려 남의 개인사를 함부로 보고있는 것이니 평생 모르는 게 훨씬 낫겠지만.
하지만 지금, 꽃잎은 영준한테 평생 미움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어쩐다, 어떻게 한다.
꽃잎의 머릿속은 여전히 폭포라도 되는 듯 격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지금 누군가한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꽃잎한텐 그런 존재도 없었다. 어쩐다. 어쩐다. 이대로 가단 큰일날 텐데. 어쩐다. 어쩐다. 어쩌지. 정말로 어쩌면.
거기까지 생각하다, 꽃잎한테 뭔가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
적어도 이 방법을 쓴다면, 영준한테 큰일은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꽃잎은 마음속으로 ‘그 일’을 일으켰다.
제발 모든 게 잘 되기를, 이라 속으로 몇 번이고 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