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벽

그건 모든 이들이 잠든 한밤중에 있었던 일이었다.
마치 뭔가에 홀린 표정으로, 어떤 성인남성이 옥상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건물 밖에서 담배를 물고 있었는데, 갑자기 표정이 확 바뀐 듯한 모습이었다.
그 건물은 1층이 가게였지만, 2층 뒤부터는 보통 가정집으로 되어있었다. 처음 오는 것이 틀림없는 그 건물을 거침없이 누비던 남자는, 이윽고 옥상으로 가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마치 자기보고 들어오란 듯, 문이 활짝 열려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드디어 마음을 먹었는지 발을 문 너머로 들여놓았다. 그리고 거기에 비친 풍경은, 남자가 방금 우연히 곁눈으로 본 그 모습이었다.

어떤 여자애가, 남자를 못 본 체한 채 난간에 기대 컵라면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자기도 왜 여기까지 올라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우연히 그 여자애를 본 뒤, 어떻게 해서든 여기로 올라와야겠다 마음먹었을 뿐이었다.
자긴 대체 뭐가 하고 싶었던 걸까.
남자가 혼자 멋쩍어하는 와중에도, 여자애는 그저 혼자 컵라면만 먹으며 앞을 가만히 보고있을 뿐이었다. 저 여자애는 뭘 보는 거지. 묘하게 민망해지는 걸 느끼며, 남자는 그런 생각에 잠겼다. 잠시 동안 둘이 있는 곳에선, 아득히 먼 곳에서 들리는 듯한 도시의 소리, 그리고 여자애가 컵라면을 먹는 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더 이상 이 침묵아닌 침묵을 참을 수 없어진 남자가, 드디어 용기를 내서 뭔가 말이라도 붙여보러던 때에.
“왜 그렇게 멀뚱하게 있어요?”
여자애가 이 쪽으론 고개도 안 돌린 채, 여전히 라면을 먹으며 남자한테 말을 걸었다. 긴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있는,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여자애였다. 아마 키나 몸집 역시(좀 멀찍이 떨어져서 잘 안 보이지만) 또래와 비슷할 터였다. 멀리서 본 느낌으로는 묘하게 무뚝뚝한 느낌이었다. 얼굴생김새 역시, 어딘지 모르게 그런 느낌을 주고 있었다. 옷차림도 보통 여자애들과 다르게, 검정 티셔츠에 회색 바지를 입고있을 뿐이었다. 그런 옷차림으로 컵라면을 먹고 있단 게 우습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아, 아니, 그, 미안, 나는 그냥…”
솔직히 말해서 대답할 말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남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끌려서 여기까지 왔다, 는 정신나간 말을 입에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하지만 자기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남자의 마음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자기가 저 아이한테 얼마나 어이없는 존재처럼 느껴질까.
남자는 고개를 들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그냥 사라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자애도 남자가 불쌍하게 느껴졌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라면을 먹으며 다시 입을 뗐다.
“괜찮아요. 이상한 짓만 안 하면.”
“고. 고마워. 그런 건 절대 안 할게.”
자기가 생각해도 얼빠진 말을 하며, 남자는 조심스레 여자애한테서 살짝 떨어진 난간에 자리잡았다. 이렇게 된 이상, 자기도 이런 식으로 밖을 보고 싶어서였다. 지금까지 알고 지낸 적도 없는 집 옥상에서 처음 보는 여자애와 단둘. 이 묘한 상황이 남자를 감싼 채 놓아주지 않았다.
“너, 넌 그 라면이 맛있니?”
“뭐, 대충 그렇죠.”
여자애는 여전히 라면을 먹으며,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대충 대답했다. 옆에 있는 남자한텐 이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태도였다. 남자는 이 상황이 무척 묘했다. 애초에 여기에 올라왔단 사실 자체가 묘하긴 했지만.
“이 시간까지 안 자고 여기에 있는 거니?”
“네. 이상해요?”
“아니, 여자애가 이 시간까지 안 자면 위험할지도 모르고…”
남자는 그런 말을 하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긴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단 말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저 애 마음이지. 아무리 뭔가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렇지, 왜 이런 말을.
그 때였다.
“그것 때문에 걱정해주는 거예요?”
여자애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훨씬 딱딱해졌다. 마치 뭔가가 무척 걸리적거린다는 듯한 말투였다.
“응? 뭐가. 아까 그 말이? 그건 그냥 걱정돼서…”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요?”
“그, 그것뿐만은 아니고, 넌 아직 어리잖니. 그러니까…”
여자애는 그 말을 듣자,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않은 채 라면 국물을 입에 댔다. 라면 특유의 냄새가 남자한테까지 다다랐지만, 남자는 지금 그걸 느낄 기분이 아니었다.
자기가 뭘 잘못했을까.
“미, 미안. 난 그저 네가 아직 한참 클 나이니까 걱정됐거든.”
“한창 클 나이요?”
여자애는 점점 더 표정이 딱딱하게 바뀌었다. 남자는 이제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거야 자기 말이 기분나쁘게 들렸을 가능성은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면, 남자도 이 상황을 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너무 오해하지 마. 이상한 뜻은 절대 아니니까. 하지만 아직 어리니까 얼른 자는 게 성장기엔 좋지 않을까? 네 땐 그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저기, 지금 내가 그 쪽하고 동등한 존재라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죠. 그죠?”
“아, 아냐. 난 그저…”
남자는 어쩐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만약 그렇다 할지라도, 그건 이 애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여자애가 어떤 사정을 지니고 있는지, 남자는 알 수 없었다. 혹시 자기가 하는 이런 행동도 상처가 되는 게 아닐까. 남자는 여기에 있는 게 점점 더 민망해지는 걸 느꼈다.
“그럼 왜 남의 일에 이래라저래라 난리예요? 그냥 내버려두면 될 것이지.”
“미안. 내가 잘못했어. 아까 했던 말은 그냥.”
“그렇게 보여서 말한 거죠. 그죠?”
남자는 더 이상 변명을 늘어놓을 수 없었다. 사실, 이 아이의 말이 맞았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나이도 어린 여자애라고 이 아이의 마음가짐을 부정했던 것이다.
“…미안.”
“괜찮아요. 흔한 일인데 뭐.”
그 뒤로, 여자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남자가 건물 위에서 쳐다본 것처럼, 혼자 남은 라면을 먹고, 국물을 마시고, 먼발치에 있는 반짝이는 도시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쯤되자, 남자는 스스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자긴 도대체 왜 이 ‘무척 특별한 건 아닌’ 여자애한테 이끌려 처음 보는 여기까지 다다랐을까, 라고.
딱히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무척 피곤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우연히 쳐다보게 된 여자애가 너무나 묘한 느낌이라서, 자기도 모르게 여기에 다다라있었다.
생각해 보면, 여자애가 너그러워서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자길 겁냈으면 지금 당장 큰소리를 질러도 모자람이 없는 것이다. 그런 상황인데, 자긴 대체 무슨 짓을.
너는 그럼, 지금 무슨 생각을 하니?
그런 말을 꺼내려다, 남자는 망설여지는 걸 느꼈다. 자기가 이 애한테 뭔가 말할 자격이 있는 걸까. 자기 멋대로 올라와서 그런 말이나 하고, 이제 와서.
결국 남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마음을 굳힌 뒤 여자애한테서 몸을 돌렸다. 여기서 발을 뗼 생각인 것이다. 더 있고 싶은 마음 자체는 남아있었지만, 이 이상 묘한 느낌으로 여기에 있어도 여자애한테 좋진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럴 뜻이 아니었어. 미안하다. 그럼…”
마지막까지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단 생각을 어떻게든 지우고,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옥상을 나왔다. 생각하면 할수록, 자기가 오늘 한 행동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거였다. 자긴 지금까지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그것도 아무 것도 모르는 여자애를 앞에 두고.
그렇게 건물에서 나온 뒤, 마음이라도 가라앉힐 생각으로 다시 담배를 손에 쥐었을 때였다.
“…어?”
뒤이어 건물에서 나오는 ‘낯선 이’를 보며, 남자는 순간 입을 딱 벌렸다. 그건 아까 여자애와의 일을 떠올려서가 아니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온 건, 틀림없이 20대 초반의 성인남성이었다.
혹시 자기 몰래 안에 들어간 사람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같진 않았다. 사람 인기척은 전혀 느끼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남자는 방금 밖으로 나온 참이었지만, 가정집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동안 누가 그럭저럭 잘 차려입은 옷차림으로 밖에 나올 수 있단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더할 나위없이 ‘또렷한’ 증거가 있었다.
남자가 방금 전까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 남성의 옷은 방금 전까지 여자애가 입고 있던 옷과 너무나 많이 비슷했던 것이다. 직접 두 눈으로 보고있는 남자조차 믿기 어려울 만큼.
검정 티셔츠와 회색 바지. 게다가 아무리 봐도 무늬까지 똑같은 옷차림.
“어, 어떻게…”
남자가 놀라거나 말거나, 남성은 아무렇지 않게 골목을 걸어다니더니, 이윽고 큰길 쪽으로 사라져버렸다. 이것조차 자기 착각일까. 자기를 지나칠 때, 남성이 자길 살짝 흘겨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대체 자기가 지금 보고있는 건 무엇일까.
아무런 답도 찾아내지 못한 채,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남성 쪽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여자애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