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한테로 다가오는 정체불명의 여자애를, 맹호는 빤히 쳐다봤다. 지금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어 온몸이 근질댔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란 건 맹호도 잘 알고 있었다.
여자애는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으며, 언뜻 보기엔 고등학교 2~3학년쯤으로 느껴졌다. 교복에 가까운 흰 블라우스에 검은 치마를 입고 있었지만, 아마 저건 교복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입었을’ 뿐인 것 같다고 맹호는 생각했다. 그만큼, 그 여자애는 ‘다른 저 나잇대 여자애들과 다른’ 느낌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네가 내 친구를 구해줬다는 그 애 맞니?”
여자애는 차분한 말투로, 맹호한테 말을 걸었다. 저 나잇대 아이라곤 믿기 힘들 만큼, 무게가 있으면서도 깔끔한 목소리였다. 여자애라곤 솔이밖에 모른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 맹호는, 그 목소리에 순간 가슴이 덜컹이는 걸 느꼈다. 여자애가 지닌 특유의 ‘기운’에 압도당한 것이다.
맹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애는 천천히 맹호 쪽으로 다가왔다. 그에 따라, 여자애의 표정이 어둠에 익숙하지 않은 맹호 눈에도 또렷해질 만큼 잘 보였다.
여자애는 무척 단정하면서도 묘한 인력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맹호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또렷해서일까, 맹호는 그 여자애와 제대로 눈을 마주볼 수 없었다. 물론 원래 자기를 드러내는 걸 민망해하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지금’ 자기 모습을 들키는 게 부끄러워서였다.
하지만 이 여자애는 이미 자기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런 애한테 이제 와서 이런 걸 숨기는 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애한테 얘기는 들었어. 아무튼 일이 참 묘하게 됐다니까. 너도 갑자기 놀랐지?”
여전히 맹호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뭐라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서였다. 그 남자는 물론, 이 여자애도 언뜻 보기에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그 남자나 이 여자애 역시, 맹호처럼 ‘보통 이들이 쓸 수 없는’ 힘을 쓸 수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래. 그럴 거야. 그러니까 말해줄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여자애의 말에, 맹호는 귀를 기울였다. 자기도 이 상황에 관해 자세히 알고 싶었으니까.
여자애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엔 뭐라 증명할 수 없는 신비한 힘(흔히 영력이라 일컫는)이 있다고 한다. 물론 그건 맹호 역시 알고 있는 거였다. 보통 호랑이가 아닌 존재, 즉 ‘호랑이의 왕’인 맹호는 당연히 그러한 힘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으니까. 아버지와 대보면 그리 자랑할 만한 힘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여러 조건에 맞춰 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이와 이러한 사람한테 뒤에 가서 건네받은 이로 나뉘는데, 여자애는 물론 전자였다. 제대로 말하자면 ‘중학교쯤 되면서 자기 힘을 자각하게 된’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여자애는 자기 스스로 힘을 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처음부터 힘을 지닌 이는, 자기가 볼 때 힘을 쓰기 알맞다 생각하는 다른 이한테 힘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여자애의 말에 따르면, 이걸 자기들끼리 ‘힘을 전하는 이’라 일컫는다고 했다. 물론 도시에 막 올라온 맹호한테는 무척 낯선 이야기였다.
참고로 그 남자 역시 ‘힘을 전하는 이’인데, 남한테 힘을 자주 전하는 여자애와 달리, 남자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는 듯했다. 왜인지는 여자애 역시 물어보지 않은 듯했지만.
“원래 그 사람은 자기 멋대로 살거든. 아마 그래서 네 모습을 그렇게 바꿨을 거야. 어쩐지 산 속에 살던 호랑이일 거 같은데, 맞니?”
이 말에 놀라면서도, 맹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자기 원래 모습을 이렇게 잘 알아맞추는 걸까. ‘힘을 전하는 이’에 관해 잘 모르는 맹호는 그저 놀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나만큼 힘이 강하거든. 그래서 영물이라 한들 이런 식으로 바꿀 수 있었을 거야. 내가 돌려놓긴 좀 어려울 거 같네. 이런 건 저지른 사람이 해야 효과가 좋거든. 만약 네 마음이 안정된다면 스스로 되돌려놓는 게 가장 좋겠지만…”
그 말을 듣자, 맹호는 원래대로 빨리 돌아가는 건 일단 포기하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도 자기를 못미덥다 생각하던 맹호였기에, 그럴 수 있으리란 실감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네. 만약 너한테 ‘자기는 절대 안 진다’는 자신감이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바뀌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지?”
이 말에, 맹호는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그 결과물이 지금 자기 모습이란 걸 누구보다 알고 있어서였다. 그것도 이렇게 ‘자신이 있는’ 여자애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튼 그 힘 말인데, 네가 쓰는 거랑 비슷해. 그 힘으로 싸울 수도 있긴 하지만, ‘보통 이들’한테 영향을 줄 순 없어. 그러니까 피해를 입히진 못한단 말이지. 어디까지나 그 힘은 우리 사이에서만 듣는 거야. 물론 모습을 숨기거나 뭐 그럴 땐 다른 이들한테도 영향을 미치지만 말이야. 이건 알지?”
맹호는 고개를 천천히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맹호도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부터 죽 그 힘을 단련해왔던 것이다. 여자애 말에 따르면, 어디까지나 이건 ‘힘을 전하는 이’ 이야기이며, ‘힘을 받은 이’는 이것보다 조금 약한 힘을 쓸 수 있다는 듯했다. 물론 단련을 한다면 상황에 따라서 좀 더 기량이 올라갈 수 있겠지만, 그리 쉽게 이뤄지진 않는다고 했다.
여자애의 말에 따르면, ‘힘을 전하는 이’가 되기 위해선 몇가지 타고난 조건이 있어야 하는 듯했다. 다른 조건도 중요하지만, 특히 가장 크게 작용하는 건 ‘자기 의지’라는 게 여자애의 이야기였다. 즉, ‘다른 이들과 다른 길을 걷고 싶다’거나, ‘다른 이한테 인정받지 못해도 좋으니 큰일이 하고 싶다’처럼 보통 이들이 잘 가지지 않는 바람을 ‘진심으로’ 가지면 그렇게 될 때가 많다는 거였다. 물론 다른 조건 역시 무척 중요하지만.
물론, 여자애가 ‘힘을 전하는 이’가 된 것 역시 그러한 까닭이었다. 그렇기에 이 아이는, 맹호보다 훨씬 더 ‘기운’이 강한 것이었다.
“그, 그치만.”
“응?”
맹호는 무심코 물어보려 하다가, 순간 말을 멈췄다. 자기 목소리가 여전히 날카롭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걸 극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었다.
“그, 난 시골에서 왔는데, 그런 사람 못 봤는데…”
“아, 아무래도 그렇지. 사람 손으로 전하는 힘이다 보니 공동체는 도시에 많거든. 산골엔 별로 없을 거야.”
“아, 그, 그래?”
여자애의 말에 일리가 있었기에, 맹호는 얼빠진 대답만 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제 그 남자와 여자애의 정체도 알았으니, 궁금증은 얼추 풀린 셈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맹호한테는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그건, 앞으로 맹호가 대체 어떡하면 좋냐는 거였다.
“그러고 보니, 산골에서 막 전학왔다고 했던가? 당분간 못 돌아간다면 사람세상에서 지내긴 어려울 텐데…”
맹호도 그 생각만 하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사실 그렇다 한들, 큰 문제는 없었다. 환웅한테 부탁하면 뭐든 수를 써줄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한소리는 들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맹호는 스승님이 어느 정도 상황을 이해해주시리라 여기고 있었다. 환웅과는 퍽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라서였다.
문제는 사실 그게 아니라, 솔이와의 관계였다.
“아, 같이 지내는 애가 있다고? 그 앤 네 정체를 알고있을 텐데.”
“아니, 그게 아니라, 좀 다른 문제가…”
맹호는 그 생각만 하면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다. 솔이를 떠올리는 것조차 무섭게 느껴졌다. 전보다 좀 나아지긴 했지만, 솔이한테는 여전히 어느 정도 대인공포증이 있었던 것이다.
솔이는 어릴 적, 빚쟁이들한테 쫓겨 부모님과 함께 산골로 이사간 적이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솔이는 낯선 이를 경계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친구도 많지 않았다. 그런 옛일이 있던 것치곤 밝고 잘 자란 아이지만, 그래도 아직 ‘다른 이와 조금 거리를 두는’ 건 바뀌지 않았다. 맹호가 솔이와 쉽게 친해질 수 있었던 것도, 자기가 사람이 아니라는 역설적인 까닭에서였다.
그런 아이가, 과연 ‘낯설게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자기를 받아줄 수 있을 것인가.
맹호는 솔이가 자길 ‘남’처럼 바라보는 것만은 절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걸 상상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맹호는 가슴을 누군가 칼로 쿡쿡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솔이가 맹호한테 어느 정도 의존하는 경향이 있듯, 맹호 역시 솔이한테 많은 걸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 아이한테 버림받는다는 건, 자기 모든 걸 버림받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기에, 맹호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솔이 역시 자기가 보통내기가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을 친구라 받아들일 만큼 대인공포증이 사라진 것도 아니라서였다.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그럼 좀 힘들겠네. 어디 보자, 좋은 수가…”
여자애는 혼자 골똘히 생각하다가, 갑자기 손바닥을 탁 쳤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맹호는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확 들었다.
“그래, 너도 우리 연맹에 들면 어떨까? 그럼 살 곳은 문제없잖아. 야간소녀연맹.”
“…어?”
난생 처음 듣는 말에, 맹호는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고 보니 아까 여자애가 ‘공동체’란 말을 쓴 적이 있었다. 즉, 여기서 ‘힘을 지닌 이’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있을 때도 많을 터였다.
“아, 별 건 아냐. 내가 마음맞는 애들하고 같이 만든 연맹인데, 조그만 공동체같은 거라 생각해도 돼. 괜찮은 기지가 있어서 거기서 먹고자고하거든. 당연히 치안걱정은 안 해도 돼. 우리 힘으로 어떻게든 되니까.”
“…그 애들이란 게 다 여자애들이라고?”
“그렇지. 다들 힘을 갖고 있어. ‘힘을 전하는 이’는 나뿐이지만. 다들 남자면역은 없는데, 그런 모습이면 큰 문제는 없겠네. 어차피 너도 도시에 있는 ‘힘을 지닌 이’들은 잘 모르지? 이번 기회에 친해지면 좋을 거야. 너도 사람 모습으로 뭔가 하고싶을 거 아냐.”
“그, 그치만…”
“너도 나름대로 자신감을 가지고 싶어서 여기로 온 거 아냐?”
“마, 맞지만…”
비슷한 말을 되풀이하며, 맹호는 어쩔 줄 몰랐다. 여자애의 말은 맞지만, 어쩌면 좋을지 망설여져서였다. 맹호는 솔이만큼은 아니라 할지라도 낯가림을 하는 성격이기에, 처음 보는 아이들만 있는 곳에서 죽 지내는 게 껄끄러웠다. 게다가 ‘힘을 지닌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낯선 환경 역시, 맹호가 크게 고민하게 만드는 데 한몫했다.
“괜찮아. 여기서 있는 일에 적응하다 보면 솔이란 애한테 정체를 밝힐 용기도 날 거야. 환웅이란 분도 도와준다매. 내 말대로 하는 게 어떄?”
“그래도, 그, 여자애들이 있는 데서 지내는 건…”
“지금 니 모습에 그런 게 무슨 문제니?”
맹호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직 밝은 곳에서 본 적은 없지만, 그 말이 모든 걸 뜻하는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하지만 여자애 말이 틀리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 맹호한텐 고를 수 있는 길이 많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혼자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우, 우아악!”
“뭐야. 핸드폰 하나 진동하는 거 가지고 너무 놀라는 거 아냐?”
여자애의 말에 다시 얼굴이 빨개진 채, 맹호는 갖고 있던 스마트폰을 조심스레 꺼냈다. 물론 전화한 사람이 누군지는 안 봐도 뻔했다.
“솔이다…”
그리고 왜 전화했는지 역시,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맹호가 밤 아홉 시가 넘도록 집에 안 돌아오는 걸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말은 안 하지만, 솔이 역시 맹호가 잘 있나 걱정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낯선 곳을 불안해하는 건 솔이 역시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맹호는 지금 전화를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었다. 지금 전화를 받으면, 솔이는 틀림없이 이상하게 여길 터였다. 듣도보도 못한 목소리가 전화를 받고 있으니까.
이제 맹호는 얼른 골라야만 했다. 솔이가 낯설어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느냐. 아니면 같이 도시로 올라온 친구한테 연락해서 사정을 설명한 뒤 연맹에 드느냐.
-우리 맹호, 걱정 많이 하고 있나.
맹호는 아침에 들었던 솔이의 말을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제대로 된 친구가 없다시피했던 솔이한테, 맹호는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 솔이를 죽 걱정하게 하느니, 차라리 친구한테 부탁해서 사정 설명이라도 하는 게 훨씬 나은 일이었다. 물론 이 모습으로 진실을 말해줄 수도 있겠지만, 맹호를 이렇게 바꾼 남자가 솔이를 괜히 건드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한때 대인기피증이 있었으며 지금도 낯선 이를 불안해하는 솔이가 ‘낯선 이’가 된 자기 말을 얼마나 믿어줄지도 알 수 없었다.
맹호는 솔이의 낯가림이 퍽 심하다는 걸 잘 알기에,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맹호는 조금이나마 자기를 듬직하게 여기고 싶었다. 자기한테 자신이 없으면, 언제까지고 솔이한테 정체를 드러낼 수도 없고, 원래대로 돌아가지도 못하니까.
그렇다면, 지금 고를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그 연맹이란 데엔, 그냥 들어가면 되는 거야?”
“그럼. 들어갈 채비가 됐어?”
“…어. 앞으로 잘 부탁해.”
결국 맹호는 그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이게 지금 맹호가 고를 수 있는 최선이라서였다. 낯선 이를 무서워하는 솔이의 마음을 잘 알기에, 맹호는 이 모습으로 솔이와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이런 모습을 드러내는 게 무서웠던 까닭도 있었다.
솔이 앞에선 항상 믿음직한 모습만 보이고 싶었으니까.
맹호는 그런 생각에 한숨을 쉬며, 지금쯤 집에 있을 ‘친구’한테 메시지를 보냈다. 아마 그 친구라면 환웅한테 연락하는 것 역시 문제없을 터였다.
앞으로 자긴 어떻게 될까.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맹호는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