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밤 얼티미티드 47. 다가오는 운명

비상은 이제 아침쯤 되면 누군가한테 전화가 걸려오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물론 그다지 바란 건 아니었지만, 강산과 알고 지낸 뒤론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이 형은 갑작스러울 때, 특히 아침과 밤중에 전화걸길 좋아했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전화를 받자마자 곧장 들려온 건 강산의 시끄러운 목소리였다.
“야, 너 오늘 널널하냐?”
비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강산은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은 말이지, 내가 오늘 공연 연습을 한단 말이야. 후배들하고. 그러니까 그걸 특별히 구경할 수 있는 권리를 네게 주도록 하지.”
“대체 그건 어디에 써먹는 권리야?”
드디어 비상이 자기 말에 대답하자, 강산은 전화기 너머에서 이를 부드득 가는 소리를 냈다. 그리곤 아까보다 더 시끄럽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이런 말을 쏟아부었다.
“씨, 이렇게 좋은 권리가 세상에 어딨어. 아무튼 내가 말하는 데로 한 시까지 나와. 올 때 먹고마실 거도 좀 사오고. 알았냐?!”
그렇게 끊긴 전화를 보자, 비상은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즉, 이 사람은 그냥 물자를 대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듯했다. 참으로 이 형다운 일이었다.
아무튼 이 형도 못말린다니까.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블라인드를 올렸다. 이제 8월에 아주 접어들었단 걸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눈부신 햇살이 블라인드 사이로 비상의 방에 스며들어왔다.

그렇게 해서 해가 하늘높이 솟을 무렵이 되자.
“어디 보자…”
비상은 버스에서 내린 뒤 근처 슈퍼에서 강산이 말한 물자를 사고 나서, 저 위로 끊없이 이어진 언덕길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 같이 강산을 만나줄 사람을 기다리려는 생각에서였다. 일단 (강산한테)자기만 당할 수 없단 생각에 다른 형들한테도 물어봤지만, 생각대로 이렇게 더운 날 오겠다 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한 일이었지만.
하지만 다행히도, 비상은 바로 옆에 있는 정류장에서 낯익은 그 사람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사람과 만난 뒤 기나긴 언덕을 하염없이 올라가고 나서, 비상은 드디어 언덕 위, 즉 강산의 학교에 다다랐다. 대체 강산이 어디로 오라는 건지 알 수 없었으므로, 비상은 자기 짐을 같이 온 연장자한테 맡긴 뒤 강산한테 전화를 걸었다.
물론 전화를 받은 강산은 항상 그렇듯 퉁명스런 말투였다.
“뭐, 왔다고? 그럼 일로 와라. 여기가 어디냐면…”
단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대학에서 자기 말만 가지고 어디에 있는지 찾아오라는 이 형한테 기가 막힌 나머지,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그렇게 비상이 그 곳(즉 강산이 오라고 한 곳)에 다다르자, 강산은 곧바로 얼굴이 무척 일그러졌다. 마치 비상이 자기한테 사기라도 친 것같은 표정이었다.
얼굴이 있는 대로 일그러진 강산은, 곧장 비상한테 다가가서는 다짜고짜 멱살을 잡았다. 그리곤 비상이 데려온 ‘그 연장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렇게 따져댔다.
“야 신발. 쟨 온다고 안 그랬잖아!!”
“저 형이 여길 한 번도 안 왔다고?”
“쟤, 쟬 왜 데려와! 내가 쪽팔리게!!”
오히려 어이가 없어진 비상이 이렇게 묻자, 강산은 그런 말과 함께 이를 부드득 갈았다. 강산이 이렇게 윽박지르는 사이, 뒤에서 바로 그 문제의 연장자가 다가와 킬킬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은 바로 붉은 밤의 연장자이자 강산의 친구일 터인 파랑이었다.
“강산이는 내가 여기 오면 자기가 초라하게 보인다고 무지 싫어하더라구. 왜인진 모르겠지만…”
“이 망할 자식아. 그걸 진짜 그대로 말하면 어떡하냐?!”
그 말을 듣자, 강산은 곧장 비상의 멱살을 잡던 손을 풀더니 대신 파랑의 목덜미를 부여잡고 마구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한편, 강산의 후배로 보이는 대학생들은 무척 희한한 구경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 선배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여기서도 이렇구나.
사실 짐작하고 있었기에, 비상은 그리 놀랍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왜 오라고 한 거야?”
상황이 좀 진정되자, 비상은 곧장 그렇게 물었다. 강산은 고개를 돌리곤,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이렇게 소리쳤다.
“보면 모르냐? 우리 패 연습이다. 연습!!”
“형이 나보고 오라할 때 그런 말을 했어?”
“시, 시끄러. 이렇게 안 하면 너 안 왔을 거 아냐. 이씨.”
그 말과 함께 강산은 곧장 비상한테서 눈길을 돌렸다. 즉, 이 사람은 자기 일을 가지고 비상한테 오라고 하는 게 민망해서 그냥 아무 말도 안 했던 듯했다.
비상이 그렇게 어이없어할 때, 이번엔 가만히 있던 강산의 후배, 주로 여자애들이 갑자기 이런 말을 쏟아부었다.
“오빠 아는 사람이에요? 친구분이에요?!”
“보, 보면 모르냐?!”
그 말이 화난 마음을 더 부채질했는지, 강산은 그런 말과 함께 후배들한테서도 눈길을 돌렸다. 그 말을 듣자, 여자애들은 마치 인생의 승리자라도 되는 것처럼 강산을 보고 있었다. 강산이 이렇게 믿음직하게 보일 때도 드물 것이므로 평소대로라면 좀 어깨에 힘이 들어갈 텐데, 지금은 그 까닭이 불편해서인지 참으로 묘한 표정이었다.
파랑은 그런 강산이 웃겼는지, ‘오늘 강산이 진짜 웃긴다’라며 배를 쥔 채 웃고 있었다. 물론 그게 강산의 열받는 마음을 부채질했단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강산의 말대로 먹을것 및 마실것도 잔뜩 가지고 갔는데, 정작 강산의 후배(특히 여성진)들은 먹을 것보다 갑자기 온 손님인 비상 및 파랑한테 훨씬 더 관심이 많은 듯했다. 물론 그게 강산의 마음을 더 열받게 하리란 건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럴 땐 어쩔까.
잠시 생각하다, 비상은 그냥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럴 때 저 형한테 뭐라고 한들 아무 소용도 없을 테니까. 무엇보다 강산은 이럴 때 마냥 투덜대기만 할 사람은 아니었다.
비상은 바로 전에 보았던 것이다.
이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더 남을 깊이 보고 있단 걸.

잠시 뒤, 마음이 진정된 강산은 비상 및 파랑한테 자기네들이 무슨 연습을 하는지 말해줬다.
전에 강산이 슬쩍 지나가듯 말한 대로, 강산의 학과엔 학과 안 동아리에 가까운 이런저런 ‘패’가 있었다. 강산이 들어가있는 건 그 중에서도 풍물패, 즉 사물놀이 동아리라고 했다. 그거야 비상도 그늘 아래 동그랗게 둘러앉은 강산의 후배 및 거기에 있는 장구며 북이며 꽹과리같은 악기를 보면 대략 짐작이 갔다.
강산은 그게 그렇게 자랑스러웠는지, ‘이 놈아 어떠냐?’란 눈빛으로 어깨에 힘을 준 채 비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이 사람도 참 어린애같다고 비상은 생각했다. 한편, 파랑도 여기에 온 건 처음이라서인지, ‘장구 진짜 오랜만에 본다’며 신기하단 듯 후배의 악기를 만져보고 있었다. 강산의 후배(여성)는 파랑이 자기 악기를 만지자 살짝 물러나며 얼굴을 붉혔다.
강산은 그게 못마땅했는지, 이런 말과 함께 동그랗게 둘러앉은 후배들 안쪽으로 들어갔다.
“니들 손님왔다고 너무 한눈파는 거 아니냐? 연습할 거다.”
그렇게 가운데로 앉은 뒤, 강산은 자기 악기로 보이는 꽹과리를 손에 쥐었다. 강산은 그 쇠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는지,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채를 쥐곤 팔을 휘둘러 사방으로 소리가 퍼지게 했다. 쇠 특유의 시원하면서도 커다란 소리가 마치 학교 전체에 퍼지기라도 할 것처럼 저 멀리까지 울러퍼졌다.
하지만 강산의 바람과는 거꾸로, 패원들(적어도 여성진은)은 파랑과 비상한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강산도 이를 눈치챘는지 주먹을 쥔 채 부르르 떨고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비상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강산이 지금 ‘내가 그래서 저 자식은 안 데려왔는데. 이런 젠장…’이라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파랑은 그런 강산을 모르는지 모르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지, 자기한테 말을 걸어오는 강산의 후배들과 반갑게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 후배들이 신나게 파랑과 얘기하는 걸 보며, 강산은 이를 부드득 갈고 있었다.
하지만 대충 볼 때, 강산은 진심으로 화내는 거같진 않았다. 비상이 볼 때, 아무튼 파랑이 자기보다 눈에 띄니까 질투가 난 것 같았다. 이런 말을 하면 강산은 화내겠지만, 참으로 저 형다운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연습을 하는 동안 강산은 묘하게 불안정한 느낌이었다.
물론 비상은 이런 풍물패 연습을 그다지 많이 봐온 게 아니지만, 지금 강산이 괜히 다른 데 신경쓰고 있단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강산의 눈빛이 자꾸만 연주를 하는 패원들이 아니라 조금 멀찍이서 그걸 보는 파랑 및 비상한테 갔던 것이다. 강산 자신도 그걸 잘 알고 있는지, (아마)평소보다 더 몸짓이 커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이런 식으로 불안정한 건 강산뿐만이 아니었다. 몇몇 패원, 특히 여성진이 비상 및 파랑을 의식하고 있단 게 여기서도 느껴지고 있었다. 파랑의 사람됨을 볼 때 그 까닭은 대충 짐작이 가지만, 비상의 영향도 없진 않은 듯했다. 자기가 말하는 것도 그렇긴 하지만.
그런 상황이 더더욱 화를 부추겼는지, 강산은 거의 신들린 것처럼 쇠를 마구 두드려댔다. 물론 박자는 잘 맞추고 있었지만, 솔직히 비상이 봐도 좀 걱정될 만큼 격하긴 했다. 물론 이대로 아무 일도 없을 리는 없기 때문에, 강산은 신나게 연주하다가 갑자기 박자를 크게 엇나가고 말았다. 쇠는 풍물에서 모든 악기를 이끄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인지, 강산이 틀리자 곧바로 악기의 흐름 자체가 딱 멈췄다.
그렇게 당사자가 자기 때문이란 걸 깨닫고 민망한 표정을 짓자, 다른 패원들이 마치 놀라우리만치 무표정한 생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강산을 가만히 쳐다봤다. 비록 부풀진 않았지만, 강산은 민망했는지 이런 말과 함께 얼른 고개를 휙휙 저어댔다.
“왜, 왜 그래 진짜!!”
그걸 보며, 비상은 저 형한테도 민망하다는 마음은 있었단 사실에 조금 놀랐다. 파랑은 대체 이게 뭐 그렇게 재밌는지, ‘가, 강산이 진짜 웃긴다’라며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저 형도 저 형이지만, 이 형도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비상은 생각했다. 물론 그건 자기가 할 말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해서 세 시쯤 되었을 때.
비상과 파랑, 그리고 강산은 참으로 늦은 점심을 근처 편의점에서 산 뒤 입에 대기 시작했다. 뒤에 들은 이야기였지만, 강산은 점심도 안 먹은 채 연습에 푹 빠졌던 듯했다. 그 점도 참으로 이 사람다웠다.
아무튼 비상 및 파랑이 자기가 사온 점심에 입을 대기가 무섭게, 강산은 곧바로 이런 말과 함께 으스댔다.
“봐라. 내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겠지?”
이 말에 어이가 없어진 비상이 무심코 소리를 내서 웃자, 강산은 무척 열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곧장 이런 말과 함께 비상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이 자식이. 내 말 들었어 안 들었어?!”
“오늘 강산이는 특히 더 웃기는 거 같다. 크하하하.”
이게 대체 뭐가 재미있는지, 파랑은 그걸 보면서 또 배를 잡고 있었다. 참고로 지금은 쉬는 시간이지만, 여전히 여성진들은 슬쩍 비상 일행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비상도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을 줄은 몰랐기에, 지금 이 상황이 참 묘하게 느껴졌다.
그런 식으로 시간이 흘러갈 때였다.
“근데 강산이 조금 멋있어보이긴 하더라. 후배들도 잘 따르고.”
아까 놀린 게 미안해서인지, 아니면 그냥 진심인지 파랑은 그런 말을 꺼냈다. 이 말을 듣자,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강산은 좀 멋쩍단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러냐?”
“그건 그렇고, 형은 후배들한테도 그렇게 막 대해? 나 참, 그런 건 연장자들하고 많이 했으면 됐지…”
“신발! 내가 얼마나 여린 감수성을 갖고있는지 아냐?! 변기 막혀서 물 올라오는 것만 봐도 질겁을 하는 사람이야, 내가!!”
비상이 고개를 저으며 한 말에, 강산은 무척 화가 났는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그 말을 듣자, 비상은 더더욱 이 사람한테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그건 겁이 많다고 해야하는 거 아닌가?”
“시, 시꺼. 아무튼 무서우면 무서운 거야.”
뒤에 하는 말을 들으면, 강산은 따로 나와산 지 1년 남짓해서 아직도 못하는 게 산더미만큼 많은 듯했다. 형광등 가는 일같은 것도 형이 다 해서(그리고 자기가 하려고 하면 부모님이 항상 형보다 못한다는 말을 해서) 자긴 손도 안 대게 됐단 말도 덧붙였다. 즉, 이 사람은 혼자 형광등도 제대로 못 가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걸 듣는 비상은 그저 기가 찰 노릇이었다. 파랑은 아무렇지도 않게 배꼽이 빠져라 웃고 있었지만.
“뭐, 파랑이같은 놈하고 대보면 나야 고삐풀린 말이지. 이런 젠장.”
강산도 그 대목은 포기했는지, 결국 그런 식으로 투덜대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더 웃긴 마음을 부채질했는지, 파랑은 이제 웃다가 지쳐 계단에 몸을 기댄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치만 나도 강산이처럼 막나갈 때가 없진 않았는데.”
“그러고보니 파랑이 너한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매?”
이 말에, 강산은 뭔가 짚이는 게 있단 표정으로 파랑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전에 비상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좀 지난 일이긴 했지만.
“아, 그거?”
파랑도 대략 짐작이 가서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대답했다. 비상이 뭘 잘못본 게 아니라면, 지금 파랑은 묘하게 정겨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파랑은 그 뒤로 잠시동안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입을 떼어놓았다. 마치 오래 전 일을 오랜만에 떠올리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니까 이런 적이 있었어. 비상이한텐 전에 안 말했던가? 나랑 부모님 사이가 그다지 안 좋았단 거.”
“처음 듣는데요.”
“그래?”
그 뒤로, 파랑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말에 따르면, 고등학생 때 파랑은 집에 있는 게 불편할 만큼 가족(참고로 파랑은 외동아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했다. 비상이 듣기로, 파랑의 이야기는 아들을 자기 멋대로 다루고 싶어하는 부모님 및 그게 버거운 아들이라는 어디서 많이 본 구도였다.
파랑은 그게 피곤한 나머지, 어느 날 밤중에 그대로 집을 나왔다고 했다. 물론 맨손은 아니었지만, 가지고 있는 거라곤 어느 정도 돈이 들어간 지갑밖에 없었단 말도 덧붙였다. 이 때 잠시 망설이던 파랑은, 이렇게 된 거 될 수 있는 대로 집과 아주 떨어진 곳에 가보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그리고 버스도 끊긴 그 시간에 택시를 잡아 역으로 간 뒤, KTX를 타고 부산으로 훌쩍 떠났다고 했다.
“이 놈 완전 독종 아니냐?”
거기까지 듣자, 강산도 질렸는지 그런 말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사실 지금 강산이 보이는 모습도 그리 이상한 건 아니었다. 당시 파랑은 고작 고등학생이었던 것이다. 수도권에 사는 고등학생이 밤중에 그런 생각에 다다랐단 건 대단하다 말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새벽쯤 부산에 다다른 파랑은(참고로 당시 부산에 간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고 함) 그 알지 못하는 땅에 내려서 일단 바닷가로 발걸음을 옮겼다고 했다. 딱히 깊이 뭘 생각하지 않았단 말도 덧붙였다.
그렇게 바닷가로 다다른 파랑은, 그 자리에서 주위 사람들 신경은 전혀 쓰지 않은 채(가만히 생각하면 새벽이므로 사람이 그리 많진 않았겠지만, 주위에 있는 가정집들은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난 자유다!!’라 크게 소리쳤다고 했다. 지금 파랑의 아무렇지 않은 웃음으론 생각지도 못할 만큼 크고 우렁차게 외친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말까지 듣자, 강산은 이제 아주 어이없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나 참. 이 놈이 그랬대요. 이 놈이.”
사실 비상도 파랑이 말한 게 얼른 머릿속에 들어오진 않았다. 파랑도 그러리라 생각했는지, 어이없어하는 강산을 보며 다시 킬킬댔다.
“아무튼 그 땐 정말 속시원했는데 말이야.”
그런 말과 함께, 파랑은 당시를 떠올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 파랑이 짓는 표정을 보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속이 시원했단 건 잘 알 수 있었다. 잠시 가만히 있다가, 파랑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 때 말이지. 사실은 이런 생각도 했어. 이런 한밤중에 여기까지 올 수 있을 만큼 나는 행복한 존재구나, 뭐 그런 걸. 솔직히 반나절동안 반대편에 가있으려면 돈도 그렇고 이것저것 필요한 게 있잖아. 부모님과 앞으로 어떻게 될진 그 때 알 수 없었지만, 그런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더라구. 그래서 이렇게 마음먹었어. 나는 이런 식으로 나올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거다. 물론 내가 못하는 걸 남들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이렇게 다른 이들하고 힘을 모아서 지내고 싶다. 뭐 그런 걸 말이야.”
그 말을 듣자, 비상은 파랑이 묘하게 다시 보이는 걸 느꼈다. 이 생각에 동의하느냐 아니냐는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파랑이 거기까지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형한테 미안한 말이긴 하지만. 사람과 만나다 보면 이럴 때도 가끔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니까 이 놈이 참 독종이래도.”
그 말이 그렇게 재밌었는지, 강산은 파랑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다시 킬킬댔다. 마치 맨 처음 비상과 만났을 때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자기 일도 아닌 남의 일이 뭐 그렇게 즐거운지, 강산은 여느 때보다 훨씬 더 크게 웃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강산이 전에 했던 말은 진심이리라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자기보다 잘난 친구한테 질투한다 한들, 강산은 진심으로 파랑을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아마 비상도 그런 식으로 여기고 있을 터였다.
사실 정말 대단한 건 이 형이 아닐까.
그런 강산을 보며, 비상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서 저녁해가 질 무렵, 드디어 연습이 모두 끝났다. 비상도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갑자기 아까 파랑과 신나게 얘기하던 후배들이 이리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가까이 다가오자, 그 후배들은 비상한테 뭔가 먹을 걸 조금씩 건넸다. 주위를 둘러보니, 파랑 역시 그 후배들한테 먹을 걸 받고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눈을 반짝이며 자기를 보고 있는 강산의 후배들을 보며, 비상은 이렇게 물었다.
“이건 뭐지?”
“그냥 보내드리는 것도 그래서요. 저…”
비상의 말에, 맨 앞에 있던 후배(여성)가 좀 쑥스럽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 이걸 멀리서 지켜보는 강산의 표정은 참으로 보기좋게 일그러져 있었다. 사실 집에 돌아갈 즈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란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터였다.
“쟤들 진짜, 아까 전부터 갑자기 편의점에 달려들어서 뭘 자꾸 사더니…”
한편, 파랑은 강산이 그렇게 중얼대거나 말거나 ‘뭘 이런 걸 다’란 말과 함께 그걸 모두 받고 있었다. 저 말투로 볼 때, 파랑은 그 선물이 정말 고마웠던 듯했다. 비상도 안 받는 건 실례란 생각에 일단 받자, 이 후배들은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물어왔다.
“근데 저, 다음에 또 와주실 수 있어요?”
물론 이 질문을 받은 건 비상뿐만이 아니었다. 파랑이 ‘강산이가 바라면…’이라 대답하자, 후배들은 곧바로 강산한테 고개를 돌리더니 이렇게 졸라댔다.
“오빠. 오빠 친구분들 다음에 또 불러와요. 알았죠?”
“내, 내가 이러니까 비상이 하나로 끝내려 그랬는데…”
이 말과 함께 강산이 이마를 짚자,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왜 강산이 파랑을 그렇게 안 부르려 했는지 이젠 똑똑히 알 것 같아서였다. 강산도 강산이지만, 비상 역시 요즘 대학생들을 너무 만만하게 본 건지도 몰랐다.
아무튼 이렇게 연습이 마무리되어, 비상은 파랑 및 ‘내가 오늘 뭘 잘못했나…’라 중얼대는 강산과 함께 언덕을 내려갔다. 강산은 집으로 가기 위해, 비상 및 파랑은 오늘 경기가 있는 옥상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탈 생각이었던 것이다. 오늘 있었던 일이 그렇게 인상에 남았는지, 강산은 정류장에 다다라서도 자꾸만 고개를 저으며 비슷한 말을 중얼대고 있었다.
이렇게 버스에 타자, 비상은 문득 아까 강산의 실수가 떠올랐다. 옆에 있는 강산이 심심하단 표정으로 창밖을 보는 게 눈에 들어오자, 비상은 가볍게 말을 걸었다.
“혹시 형 이런 캐릭터 알아?”
“뭔데, 또?”
“형이 아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아까처럼 실수하면 부풀어오르는 무표정 동물 캐릭턴데…”
이 말을 듣자, 강산은 곧바로 눈을 부라렸다. 그리곤 어이없단 표정을 지으며,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이 놈은 이제 별밤이가 옮았나?”
사실 그 말에 더 김이 샌 건 비상이었다. 저 형이라면 별의별 게임은 다 해봤을 줄 알았던 것이다. 비상도 어쩌다가 알게 돼서 잠시 했던 것뿐이긴 하지만. 강산의 말대로 별밤이라면 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저 형도 안 해본 게임이 있구나.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강산한테서 고개를 돌렸다.

그 뒤, 옥상에 다다른 비상은 평소처럼 연장자들과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런 식으로 시간이 흐르고 나서 경기가 시작될 즈음, 강산이 아무렇지 않게 등에 큰 걸 멘 채 옥상에 나타났다. 비상은 그게 뭔지 대충 감이 잡혔지만, 다른 연장자들은 영문을 알 수 없단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강산아. 대체 그건 뭐냐?”
“내가 왜 지금껏 이거 갖고오는 걸 까먹었나 몰라. 나 참.”
잎새가 그렇게 말하거나 말거나, 강산은 이 말과 함께 짊어지고 있던 걸 바닥에 내려놓았다. 비상의 짐작대로, 그 짐 안에 들어가있는 건 커다란 장구였다. 물론 아까 연습할 때 쓰던 그 장구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연장자들은 갑작스런 장구에서 도무지 눈을 떼지 못했다.
“야, 이, 이건 또 뭐냐?!”
“넌 다 큰 놈이 이것도 몰라서 쓰겠냐? 나 참.”
잎새가 여전히 당황하고 있는데도, 강산은 무척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아마 이 사람은 여기서 어떻게든 장구를 한 번 쳐야 속이 시원해질 듯했다.
별밤은 그게 재밌었는지, 자리를 잡고 앉은 강산을 보며 이렇게 놀려댔다.
“강산이 니가 이런 걸 칠 수 있단 말이야?”
“시꺼, 이 놈들아.”
그 말을 무시한 채, 강산은 멋대로 아까 후배들이 연주하던 가락을 치기 시작했다. 쇠를 치기 전엔 장구를 쳤는지 어떤지, 강산의 가락은 생각보다 훨씬 물흐르는 듯 지나갔다. 잎새도 이 점은 놀라웠는지, ‘오. 제법 하는데?’란 말과 함께 강산 곁으로 다가왔다.
그 때였다.
“야, 방금 뭐냐?!”
사물놀이를 안 하는 사람도 쉽게 알 수 있을 만큼 소리가 엉망진창이 되자, 잎새는 다가오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가만히 멈춰섰다. 강산은 그게 그렇게 민망했는지, 얼른 연장자들한테서 눈길을 돌렸다. 이제야 상황을 알아챈 연장자들, 특히 잎새와 별밤은 ‘그럼 그렇지’라 배꼽을 잡고 낄낄대기 시작했다.
그 때, 강산한텐 더더욱 반갑지 않은 사람이 옥상에 나타났다. 바로 파랑이었다.
“강산이 오늘 진짜 신났나 보다. 그지?”
“시, 시꺼. 그냥 하는 거야.”
그 말과 함께, 강산은 파랑한테서도 고개를 돌렸다. 이걸 보면 지금 강산은 꽤 민망한 듯했다. 어쩌면 파랑이 자기 마음을 너무 잘 알아맞추니 당황한 것일지도 몰랐다.
이것도 참 저 형답다니까.
그러면서도 채는 끝내 안 놓으려 하는 강산을 보며,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오늘도 경기가 이어지던 중, 비상은 자기한테 뭔가 연락이 왔단 걸 깨달았다. 핸드폰이 살짝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보니, 연락한 건 다름아닌 의영이었다.
-미안하지만 오늘도 전에 있던 그 옥상에 다시 와줄래?
비상은 그걸 보자,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다시 핸드폰을 품에 집어넣었다. 생각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비상은 당연히 그렇게 할 생각이었으니까.

잠시 뒤, 비상은 의영이 전화로 말한 모 건물 옥상에 발을 들여놓았다. 의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비상이 옥상에 들어서자마자 이런 말을 건넸다.
“비상이 너 왔구나.”
비상 역시 아무 말 없이 의영 곁에 다가온 뒤,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잡았다. 잠시동안 둘은, 전부터 항상 그랬던 것처럼 먼 곳만 바라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뜸을 들이다, 의영은 드디어 입을 떼어놓았다.
“오늘 부른 건 별 거 아니고, 비상이 네가 알아둬야 할 게 있어서.”
“뭐죠?”
비상이 묻자, 의영은 잠시동안 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곤 뭔가 마음먹은 것처럼, 이번엔 비상을 돌아보며 이런 말을 꺼냈다.
“비상이 니 다음 경기, 모레 있을 거 같다. 아니면 그 다음 날이거나.”
“아직 제대로 정해지진 않았나 보네요.”
“조금 불안요소가 생겼거든. 어쩌면 내가 나갈지도 모른다. 만약 모레가 아니더라도 비상이 넌 그 다음 날쯤 될 거 같긴 하지만…”
의영은 그렇게 말꼬리를 흐린 뒤, 다시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에 혜은과 했던 그 뭐라 말할 수 없는 경기를 떠올리며, 비상은 오랜만에 자기한테 차례가 돌아왔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가만히 생각하면, 조금 늦었다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갑자기 이런 말해서 놀랐지? 나도 오늘 알게 된 거라서. 비상이 너한텐 가장 빨리 이런 걸 전해주고 싶은데…”
“아뇨. 괜찮아요.”
비상이 이렇게 대답하자, 의영은 이제야 좀 마음이 놓이는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잠시 그렇게 가만히 있다, 의영은 천천히 다시 입을 뗐다.
“특히 비상이 너한텐 미안한 데가 많다. 핸디캡 건도 그렇고…할 수 있다면 내가 대신 짊어지고 싶은데.”
그 말을 들은 비상은 잠시 가만히 생각했다. 그리곤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입에 담았다. 고개를 돌려 가만히 의영을 본 채.
“진심이세요?”
그 말을 듣자, 의영은 이제야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챈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얼른 이런 말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미안. 나도 그럴 용기는 없다. 너한텐 참 미안한 소리만 하는구나.”
“아뇨.”
그 말을 듣자, 의영은 다시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곤 옛날 일을 돌아보기라도 하는 듯한 말투로, 천천히 이런 말을 꺼내놓았다.
“그것도 그렇고, 난 비상이 니가 참 대단하게 보이더라. 나이가 주는 것만이라면 또 모를까…”
비상도 그 말엔 뭐라 할 말이 없었기에, 의영을 따라 먼 곳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의영과 같이 있으면 이렇게 먼 곳만 가만히 바라봐도 된다는 점이 참 편하게 느껴졌다.
“나도 남한테 민망한 모습 보일 용기는 없거든. 참 모자란 형이지?”
그런 말과 함께 의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의지 누나 앞에서 좀 보인 적이 있긴 하지만, 비상이 너만한 용기는 없다’란 말도 덧붙였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의영이 이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참 모르겠단 말이야. 대체 하늘은 왜 이런 핸드캡을 만들어둔 걸까? 그것만은 내가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 없겠더라. 이런 걸 만든 무슨 까닭이라도 있나?”
사실 그건 비상도 알 수 없었다. ‘글쎄요’란 말과 함께 고개를 젓자, 의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뭐, 하늘이 하는 생각을 내가 짐작할 수는 없지만…설마 그런 패널티를 넣으면 나같은 사람이 미안해지니까 놀이를 진지하게 할 수 있다, 뭐 그런 건가? 그건 그거대로 희한한데.”
말하지는 않았지만, 비상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 이런 상황에 생각하는 것도 희한한 얘기였지만, 의영은 오늘도 여전히 흰 티였다.

그렇게 의영과 얘기가 끝난 뒤, 비상이 집 가까이 다다랐을 때였다.
“뭐지?”
소리없이 그렇게 중얼댄 뒤, 비상은 어둠이 깔린 집앞을 가만히 쳐다봤다. 누군가 낯선 사람이 거기 가만히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틀림없이 본 적이 있었다.
그 사람, 아니 그 여성은 다름아닌 혜은이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지, 란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그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 저…”
비상이 가까이 다가가자, 혜은은 그런 말과 함께 고개를 숙인 채 얼른 뭔가를 비상한테 내밀었다. 그걸 받아들자, 혜은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이, 이거 드리러 왔어요!! 벼, 별 건 아니지만…”
비상이 받아든 건 밤중에도 환히 빛나는 은빛 상자였다. 자세히 보니 그건 초콜릿 케이크인 듯했다. 대체 왜 이걸 가지고 왔는지는 둘째치고, 비상은 이렇게 물었다.
“케이크 말인가요?”
“네? 아…그, 그게 아니라!!”
그 말을 듣자, 혜은은 눈이 동그랗게 바뀌더니 얼른 다른 꾸러미를 비상한테 건넸다. 가로등에 비치는 글자로 보니, 상자 안에 있는 건 마로 만든 음료인 듯했다.
비상이 그 상자를 받아들자, 혜은은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을 만큼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몇 번이고 숙였다. 마치 민망한 걸 들키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워, 원래 드리려고 했던 건 이거고, 아까 그건 제가 간식으로 먹으려고…물론 이런 밤중에 먹겠단 말은 아니지만…”
혜은이 얼마나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던지, 비상은 이대로 먼지가 되어 사라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튼 이런 걸 밤중에 가져다준 게 고마워서, 비상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런 늦은 시간에 고맙습니다. 무거우셨을 텐데요.”
“아, 네, 조, 조금…그, 그럼 이만 갈게요!!”
그 말과 함께, 혜은은 마치 게눈감추듯 저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멀리서 보면 조금 우습게 보일 만큼 허겁지겁 달려가는 혜은을 보며, 비상은 한동안 가만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런데 왜 마로 된 음료를 주신 거지.
혜은이 보이지 않을 무렵 문득 비상은 그런 생각을 했지만, 지금와선 너무 늦은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그 날 밤도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