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 흩날리는 마카롱 02. 도토리들의 별난 세계

“나 있잖아. 엄청 걱정된다?”
그 날, 여자애, 즉 어제 농협 여자애를 얘기를 주고받던 그 애는 엄청 불안한 표정으로 다른 애한테 말을 걸고 있었다. 참고로 말하는 걸 깜박 잊어버렸지만, 이 여자애는 이현지라고 했다. 사실 승혁 입장에선 이름이고 뭐고 그냥 찌질이라 말해주고 싶었지만, 이번에 알게 된 얘들 중 그 찌질한 얘들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그건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어른이 돼서 화장하는 건 진짜 못할 거 같애. 그러니까 난 결혼도 못 할 거 같거든. 그래서 걱정이야.”
그런 걸 엄청 진지한 표정으로 늘어놓는 현지를 보며, 승혁은 저절로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다시 말하지만 본인은 정말 진지한 표정이었다. 심지어 그걸 옆에서 듣는 다른 여자애의 표정도 진지했다.
왜 난 여기에 있는 거지.
승혁은 결국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몇 번이고 했으며, 아주 질려버린 바로 그 생각을.

딱히 방금 그거 때문은 아니었지만, 승혁은 가볍게 씻을 생각으로 화장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곤 아무 생각도 없이 아래에 있는 수도꼭지를 틀고, 갑자기 날벼락에 가까운 일을 당했다.
“뭐, 뭐야?!”
자기 생각보다 훨씬 더 높은 목소리 때문에 기침을 하면서도, 승혁은 어이없단 표정으로 자기 머리위에 있는 샤워기를 노려봤다. 자기는 틀림없이 아래에 있는 수도꼭지를 쓸 생각으로 물을 틀었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물은 아래가 아니라 저 위에 있는 샤워기에서 뿜어져나온 것이다. 그것도 엄청 세게.
이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나머지, 승혁은 한참동안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갑자기 찬물을 바가지로 뒤집어써서 그런지, 옷은 물론 쓸데없이 긴 머리카락이 보기좋게 젖어있었다. 자기 머리카락이 쓸데없이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걸 애써 무시하며, 승혁은 대체 왜 자기가 이런 부조리한 상황에 말려들었는지 속으로 생각했다.
왜 나만 이런 일을 겪어야 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승혁은 속으로 자꾸만 화가 치밀어오르는 걸 느꼈다. 방금 겪은 물폭탄은 물론, 이렇게 미역에 가까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자기 상황 모두한테.

‘그 날’ 뒤, 승혁 주위는 부조리로 가득했다.
그 부조리, 즉 이상한 걸 세자면 한두 개도 아니었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동그란 과자였다. 마치 돌맹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그만 과자가 바닥에 몇 개쯤 굴러다니고 있었다. 승혁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서 지금껏 몰랐지만, 얘들 말에 따르면 저건 마카롱이라는 서양 과자인 듯했다. 물론 왜 저런 게 땅바닥에 떨어져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마카롱이란 과자는 길바닥에 굴러다니기도 했지만, 가끔 하늘에서 뚝 떨어질 때도 있었다. 아마 바닥에 굴러다니는 것들도 이런 식으로 위에서 떨어진 듯했다. 참으로 색색깔인 마카롱은 물론 색깔에 따라 맛도 다르지만, 아무 생각없이 입에 대면 된장맛이나 까나리맛을 맛보게 될 수도 있었다. 이것 때문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쟤네들 사이에선 이걸 먹은 뒤 그게 먹을만한 건지 어떤지를 겨루는 복불복도 곧잘 이뤄지곤 했다. 물론 승혁하곤 아무 상관없는 얘기였지만.
왜 이런 식으로 하늘에서 서양과자가 뚝 떨어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들 ‘원래 그랬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했다. 심지어 땅바닥에 있는 걸 살살 턴 뒤 그냥 먹는 얘도 몇 명 있었다. 그렇게 땅바닥에 있는 걸 먹어도 몸이 안 상하는 까닭 역시 수수께끼였다. 물론, 대체 왜 멀쩡한 서양과자에서 고추장맛이나 까나리맛이 날 때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승혁이 정신을 차려보니, 세상은 그냥 그렇게 되어있었다. 뭐에 씌인 듯한 말이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승혁이 지금껏 그걸 몰랐을 뿐이지, 다들 ‘눈에 안 보이는’ 마카롱이 갑자기 머리에 뚝 떨어져도 아무렇지 않게 갈길을 가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몇 달 전 자기한테 이런 말을 하면 믿어는 줄까.
방금 머리위에서 떨어진 물만큼이나, 승혁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마카롱이 어이없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을 하고있을 때, 승혁은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단 걸 깨달았다. 아마 방금 겪은 일이 너무 충격이었던 나머지 그걸 그냥 흘려보낸 듯했다.
대체 누구야 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승혁은 대충 물기를 닦은 뒤 밖으로 나가 창문을 봤다. 특히 이럴 때 가장 만나기 싫은 사람 1위가 문 앞에 가만히 서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왜 하고많은 때 중 지금이야?
딱히 그 애가 싫은 건 아니었지만, 승혁은 속으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정말 싫은 건 아니었지만.

“…”
그렇게 그 애를 집에 들여놓은 뒤, 승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애도 어색해하는 건지 어떤지, 승혁의 방 구석에 앉은 뒤 다른 데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대해야 되는 거지.
그 옆에 가만히 앉은 뒤, 승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딱히 승혁도 어색하게 대하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이 여자애하곤 어색할 까닭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 1년이나 죽 같은 반이었으니까. 하지만 참으로 이상하게, 바로 그러한 점이 둘의 어색함을 더더욱 부추기고 있었다.
이런 어색한 순간이 승혁은 진저리날 만큼 싫었다.
처음부터 이런 순간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터였다. 아니, 그 여자애, 유지민도 승혁이 알고 지내는 다른 친구들과 가족처럼 자기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면’ 될 터였다. 왜 다른 사람들은 다 이상하리만치 ‘이렇게 바뀐 자기’를 넘기는데 얘만 알아챘단 말인가. 도토리를 빼고는 ‘유일하게’ 자기한테 있던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게 얘, 지민이란 것도 승혁의 민망함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아무리 싫어도 몇 달 전쯤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했다.
이미 말한 대로, 그 일 뒤로 승혁이 이런 모습인 걸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정말로 없었다. 뭐라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딱히 서류상 뭐가 바뀐 것도 아닌데 다들 ‘아무렇지 않게’ 승혁을 대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다른 이들이 가지고 있던 최승혁이란 사람의 인식이 바뀐 건 결코 아니었지만, 뭔가 다들 중요한 걸 빼먹고 있는 듯했다. 마치 길을 가는 사람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마카롱을 모른 척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 이상한 상황 속에서도, 딱 한 사람 예외가 있었다. 승혁이 그 날 그렇게 놀려댔던 같은 반 여자애, 지민이 그랬다.
승혁은 아직도 ‘그 날’ 뒤 처음 만났을 때 지민의 표정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그리 쉽게 잊어버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것만은 정말 떠올리고 싶지 않았기에(가끔 꿈에도 나올 만큼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승혁은 속으로 고개를 몇 번이고 휘휘 내저었다.
아무튼 이 뒤 어쩌다보니, 지민은 일주일에 한 번꼴로 승혁의 집에 찾아오곤 했다. 같은 반이었을 때 서로 집도 모르던 걸 생각하면 무시무시할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해도 이상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승혁과 지민의 마음 속 거리는 오히려 전보다 훨씬 더 멀어져있었다. 적어도 승혁은 매번 그렇게 느꼈다.
이걸 오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막진 못했지만, 그럴 때마다 같은 방에 나란히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참으로 어색한 일이었다. 당사자인 승혁도 대체 왜 이런 상황이 되어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기가 지금 당한 일보다도, 지금 이 어색한 순간이 훨씬 더 부조리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승혁은 지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 하려면 뭐라도 해야 할 텐데, 결국 승혁은 오늘도 무엇 하나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앉아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뒤, 승혁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집을 나서는 지민을 배웅했다. 이런 뒤엔 꼭 밀려오는 묘한 마음을 어떻게든 하려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이번엔 전혀 반갑지 않은 사람이 승혁의 집을 찾아왔다.
“어, 현지 여기 없어?”
그 사람은 바로 어제 현지와 얘기하고 있던 바로 그 농협 여자애, 신아영이었다. 이름은 신아영이었지만 갖고 있는 계좌는 농협인 그 얘였다. 왜 신협이 아니라 농협이지. 승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괜히 이런 걸 입밖에 냈다간 쟤가 또 삐질 거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앞서 말한 대로 아영은 승혁한테 반가운 사람이 아니었기에 보통 때라면 어떻게 해서든 못본 척하겠지만, 지금은 아까 그 어색함 때문에 쟤가 있단 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만큼 아까 어색한 느낌은 짙었던 것이다. 물론 그걸 입에 담을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없어. 그냥 가.”
“그래?”
그 말과는 달리, 아영은 아무렇지 않게 승혁의 집에 발을 들여놓고는 바닥에 뒹굴었다. 아직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 도토리 여자애들은 승혁의 집을 무슨 아지트나 모텔이라 여기는 듯했다. 대체 여긴 누구 집이었더라. 그냥 여자애들도 잘 모르겠지만, 이 여자애들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승혁이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아영은 바닥에 구른 채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그러면서 여전히 거실을 뒹굴대며 이런 말을 꺼냈다.
“얘들하고 같이 탕수육 먹고싶은데. 여기서.”
“그러셔?”
그런 말을 하며 승혁은 속으로 이를 부드득 갈았다. 남의 속도 모르고 저런 말을 하는 아영이 열받아서였다. 저런 식으로 같이 모여 중화요리를 먹을 때마다 승혁은 ‘찍먹 속에 있는 부먹’이라는 소외감을 맛봐야 했다. 모습이 이렇게 바뀌어있는 것도 억울한데, 자기 혼자 외톨이가 된 느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걸 쟤들이 신경쓸 리가 없지만.
“넌 먹을 거밖에 안 떠오르냐?”
“갑자기 왜 그래? 탕수육 맛있는데. 탕수육.”
승혁이 핀잔을 주거나 말거나, 아영은 여전히 거실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자기가 원래 모습이라도 저러고 있었을까. 이 민망한 모습을 보면서 승혁은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탕수육이 뭐 대단하다고 그러는데?”
이 말을 듣자, 아영은 믿기 어려운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곤 승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신기하단 듯 이런 말을 했다.
“근데 어느 정도 산다는 최저조건이 있잖아, 라면먹을 때 김치랑 같이 먹는 거하고 한 달에 한 번 탕수육 시켜먹는 거 아냐?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마카롱 아이스크림 먹는 거.”
“뭐?”
이 진지한 표정을 보며, 승혁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물론 그건 그 말에 감명받아서가 아니라, 그 말이 무척 어이없어서였다. 승혁이 요즘 들은 말 중, 아마 그 말이 가장 이상하기 짝이 없을 터였다. 최저조건이 실제로 어떤지는 둘쨰치더라도, 저런 걸 최저조건이라 여기고 있는 이 여자애의 생각은 대체 뭐란 말인가. 승혁이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참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이게 뭐 이상해?”
“…됐다 야.”
좀 제대로 된 걸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은 승혁이었지만, 여기서 만난 여자애들한테 그런 말을 해봐야 아무 소용없단 건 이미 알고 있으므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라면에 왜 계란넣는 걸 까먹느냐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튼 이것도 그만두기로 했다.
도토리란 얘들 중엔 말이 통하는 얘가 어떻게 한 명도 없냐.
그런 생각을 하며, 승혁은 속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도 그랬지만, 참 나이와 걸맞지 않은 한숨이었다.

그런 말을 늘어놓은 농협도 사라진 뒤, 드디어 혼자 있을 수 있겠구나, 라 승혁이 마음을 놓았을 때였다.
“저건 뭐야?”
거실바닥에 굴러다니는 종잇조각을 보며, 승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 중얼대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걸 집자, 거기엔 생각지도 못한 말이 성격을 알기 어려운 손글씨로 적혀있었다.
-오늘 저녁, 옆골목 공사하는 건물 옥상으로 올 것.
그 종잇조각이 자기한테 온 건지 어떤지는 둘째치고, 승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해보고 싶어져서였다. 그렇게 머리를 굴린 끝에, 승혁은 아마 이건 ‘특기’가 무척 뛰어나거나 신주(神呪)를 다룰 수 있는 도토리가 한 짓이리라 짐작했다.
그 ‘신주’란 말을 오랜만에 떠올리자, 승혁은 머리가 어질거리는 걸 느꼈다. 자기가 이렇게 된 것도 다 그 ‘신에 가까운 힘’인 신주 탓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길 이렇게 만든 존재가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 신주는 물론 ‘특기’도 아직 정하지 못한 승혁이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애초에 신주를 쓸 수 있는 도토리 자체가 드물다는 건 승혁도 이제 잘 알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그래서 이 사람은 누구지.
그것만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기에, 승혁은 잠시 그 쪽지를 손에 쥔 채 가만히 서있었다. 그러던 도중 바깥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목소리가, 승혁이 더 이상 혼자 가만히 있을 수 없단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있잖아.”
잠시 뒤, 그렇게 조용하던 승혁의 집안은 시끄럽게 이를 데없는 시장통으로 바뀌어있었다. 이 시끄러운 분위기에 견디지 못한 승혁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려 할 때, 등 뒤에서 아까 전 들었던 목소리가 아까 전에 들었던 말을 다른 여자애한테 하고 있었다.
쟨 또 저 얘기냐.
승혁이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방에 들어가려 할 때, 다른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와는 달리, 나름대로 자기 딴엔 신경쓴 듯한 맞장구였다.
하지만 그 맞장구를 듣던 승혁은, 가면 갈수록 자기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걸 느꼈다. 오늘 들은 그 어떤 말보다도 이 말이 가장 어이없어서였다.
그 이름도 안 떠오르는 여자애는 현지의 말에 고개를 무척 끄덕여주며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럼 나랑 같이 살자. 우리끼리 죽 지내는 거야. 그치만 그러면 다른 사람들 눈길이 무지 안 좋겠지? 우린 집안일도 못하니까 설거지도 엄청 밀릴 거고. 쓰레기도 산더미만큼 나올 텐데…우리 잘 지낼 수 있을까…”
쟤들은 대체 뭐야?
더 이상 여기 있었다간 속으로 죽 투덜대기만 할 거 같아서, 승혁은 얼른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꽉 닫았다. 쟤들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