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아가면서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가 있다면, 그건 ‘자기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일 것이다.
(무명)
그 날 저녁 네 시를 막 지날 무렵, 보통 중학생이라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쯤, 최승혁은 아무 것도 안 깔린 방바닥에 어깨까지 오는 긴 은빛 머리카락을 흐트린 채 쓰러지듯 누워, 이를 악물며 온 힘을 다해 생리통과 싸우고 있었다. 오늘따라 집에 진통제도 뭣도 하나 없었던 탓이었다.
아마 이 대목만 딱 떼어놓는다면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이겠지만, 지금 승혁한테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지금 승혁은 배가 아팠고, 따라서 바닥에 늘어져 있었으며, 그건 다 이 망할 생리통 때문이었다. 약이 없는 건 물론이며, 집엔 승혁을 빼고 아무도 없었다. 안 그래도 힘이 없는 승혁한테, 이렇게 배가 아파 죽을 거 같은데도 약을 사러 일어나야 한다는 건 도무지 내키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기가 지금 ‘이런 일’에 시달려야 한다는 것 자체가 승혁의 마음을 무척 가라앉게 만들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누구 한 명은 올 테니까 어떻게든 참으면 될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승혁은 괜히 분한 마음에 이를 악물었다. 이건 민망하단 것과 아무튼 약한 모습을 보이는 자기가 싫다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앞으로 자기 방에 들어닥칠지도 모르는 애들을 승혁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런 애들과 친해지고 ‘만’ 것 자체가 승혁한테는 가장 쪽팔리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지금 이 상황보다 훨씬 더.
자꾸만 마음이 가라앉아서 그런가, 승혁은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그 때 그 일이 다시 머릿속에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배가 아픈 것만큼이나 이것도 짜증났지만, 이건 정말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자기가 어느 날 갑자기 남들과 다른 무언가가 되다니.
승혁은 정말 그 때 일만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승혁이 이렇게 된 건, 다른 이들이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초등학교 졸업식 뒤부터였다.
졸업식 전, 아니 당일까지만 해도 승혁은 좀 골목대장 기질이 있는,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초등학교 6학년 남자애였을 뿐이었다. 아마 그 때 승혁한테 두 달 뒤쯤 자기는 이런 모습이 되어 억울해하고 있으리라 말하면 뻥까지 말라며 코웃음을 쳤을 터였다. 그만큼 승혁의 세상은 평범 그 자체였으며, 딱히 뭐라 말할 것도 없지만 신나는 일투성이였다. 적어도 졸업식 전날, 그리고 당일 졸업식이 끝날 때까지는 그랬다.
승혁은 아직 그 날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까진 아무 것도 없는 평온한 나날이었지만, 이렇게 된 뒤로는 자꾸만 그 날이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승혁이 지금까지 알고있던 세상이었기에, 그 때 승혁은 자기가 드디어 초등학교를 졸업한다는 걸 빼곤 전혀 특이한 느낌을 받지 못했다. 단지 지금까지와 달리 앞으로는 6년간 다녔던 이 학교에 다시 못 오게 되네. 뭐 생각날 때 오면 되지.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당시 승혁은 자기가 앞으로 중학교에 다니리란 건 알고 있었지만, 중학교에 관해 아는 게 그다지 없었기에 딱히 뭔가 드는 느낌은 없었다.
사실 그 때 승혁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란 생각에 꽤 신나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알 수 없는 뿌듯함 및 중학생이 된다는 어쩐지 어깨가 으쓱해지는 일, 그리고 자기도 이제 ‘어른’에 한발짝 더 다가섰다는 근거없는 자신감 덕분이었다. 물론 중학생이 되면 지금보다 놀 시간이 줄어든단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기가 동생들에게 버젓한 형으로 보일 걸 생각하면 승혁은 무척 마음이 들떴다. 자기가 중학생 형들을 보며 느꼈던 걸, 이젠 승혁보다 나이가 어린 꼬맹이들이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즉 승혁을 보면서.
거기에 걸맞게 자기가 요즘 꽤 자라고 있다는 것도 승혁을 들뜨게 하는 까닭 중 하나였다. 원래 승혁은 그렇게 키가 큰 편이 아니었지만, 요즘엔 밥을 많이 먹어서인지 키가 전보다 훨씬 더 커져있었다. 이렇게 키가 커지다 보면 언젠가는 자기가 항상 우러러보던 다른 고등학생 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껏 항상 키가 커지기를 바라고 또 바랐던 승혁한테, 요즘 이런 일은 참으로 기쁘기 짝이 없었다.
승혁한테 그 고등학생 형들은 그야말로 넘을 수 없는 벽같은 존재였다. 몸집도 있고 키도 큰 형들을 보면서, 승혁은 속으로 몇 번이고 그걸 부러워했는지 몰랐다. 자기도 언젠가는 저런 형들처럼 돼서 아무도 깔보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싶단 생각을 승혁은 하루에도 몇 백번씩 하고 또 했다. 그렇게 몸집이 커지길 바란 승혁이었지만, 자기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그 꿈이 가까이 다가올 줄은 생각지도 하지 못했다.
요즘 승혁은 밥을 먹는 게 무척 즐거웠다. 자는 것도, 친구들과 노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게 키를 크게 만들고 몸집을 불리는 거라면 몇 번이라도 되풀이하고 싶을 만큼 하루하루가 신났다. 그 누구도 자길 우습게 보는 사람이 없는 세상. 승혁이 어릴 적부터 오랫동안 속으로 바라왔던 거였다.
그 꿈은 아마 이뤄질 터였다. 승혁이 아무렇지 않게 졸업한 뒤, 아무렇지 않게 중학교에 들어갔다면 그랬을 터였다.
하지만 승혁은 졸업식이 끝난 뒤, 자기 바람과 상관없이 길을 잘못 들어서고 말았다.
만약 그 자식과 마주치지 않았다면, 만약 자기가 다른 길로 돌아갔더라면, 승혁은 틀림없이 지금과 달리 아주 신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승혁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때 일을 떠올리려면, 먼저 바로 전에 있었던 아무 상관없는 일을 같이 떠올려야 했다.
그 날, 승혁은 졸업식이 끝난 뒤 친구들과 같이 집에 돌아가고 있었다. 졸업식이란 특별한 날이었지만, 승혁은 어쩐지 집으로 돌아가는 이 느낌이 평소와 다를 바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건 승혁의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누가 이사를 가서 헤어질 일도 전혀 없었고, 같이 다니는 친구들 중 다른 중학교에 가는 애들도 없었다.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 없는, 참으로 평온한 순간이었다. 적어도 그 때 승혁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승혁은 골목길에 같은 반이었던 여자애가 있단 걸 알아챘다. 이 역시 별 거 아닌 일이었다. 같은 반 애들하고 가끔 길가다 만나는 건 정말로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때, 승혁과 친구들은 무척 들떠있었다. 아무리 같이 다니는 애들이 그다지 안 바뀐다고 해도, 아무튼 승혁 일행은 오늘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다. 이쯤은 좀 들떠도 그다지 이상하진 않을 터였다. 게다가 승혁과 그 친구들은 원래부터 저 나이 또래답게 장난끼가 넘쳐흘렀다.
게다가 저기 있는 그 여자애가 교실에서 만날 투닥대며 싸우기도 하는 같은 반 친구라면 더더욱 그랬다.
“너 어디 가냐?”
승혁 바로 옆에 있던 친구가 교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신난 목소리로 그 여자애한테 말을 걸었다. 그 아이는 갑작스런 목소리에 놀랐는지, 승혁 일행을 돌아보고는 뭔가 했네, 란 표정을 지었다.
“그걸 니들이 알아서 뭐하게?”
“우리가 언제 그런 거 따지고…아 맞다. 너 그거 진짜냐?”
“뭐가?”
승혁의 다른 친구가 이런 말을 꺼내자, 여자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 승혁도 걔가 그 말을 꺼내기 전까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쟤하고는 같은 반 친구라서 말싸움도 자주하고 얘기도 몇 번 했지만,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너 요즘 아침에 최상민이랑 같이 다닌다매. 둘이 사귀지. 그지?”
“무슨 말인가 했더니…”
승혁의 친구가 신나서 그런 말을 하자, 여자애는 정말 덜떨어진 애를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승혁한테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이걸로 쟤를 놀려먹을 수 있단 게 즐거울 뿐이었다. 그건 승혁의 친구들 역시 똑같은 마음일 터였다.
“어. 쟤 진짜 사귀나 봐. 진짜 웃긴다. 그 키도 조그만 놈이랑 쟤랑 사귄대.”
“진짜? 엄청 안 어울린다. 왜 둘이 같이 다닌대?”
“나도 모르지. 쟤한테 물어봐.”
“근데 니들 중학교 올라가도 사귈 거냐? 걔 공부도 진짜 못하는데.”
승혁 일행이 그렇게 놀려대는 중에도, 여자애는 얼굴이 달아오른 채 자기네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승혁 일행 중 그런 걸 신경쓰는 애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쟤를 놀려먹을 수만 있다면 뭐가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없었던 것이다. 물론 승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승혁은 아무렇지 않게 앞에 나선 뒤 항상 하던 대로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억울하면 당당하게 말하면 되지 뭘 아무 것도 안 말하고 그러냐? 나라면 말하겠다. 우리한테 들킨 게 그렇게 쪽팔렸냐?”
여자애는 그 말을 듣고, 마치 몸이 딱딱하게 굳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 승혁도 그걸 보고 좀 심했나 생각했지만, 이내 그런 생각은 사라지고 말았다. 원래부터 승혁은 같은 반 애들과 이런 식으로 대해왔던 것이다. 이런 건 하나도 심한 말이 아니었다. 자기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이런 걸 갖다가 미안하다 말할 건 전혀 없었다. 승혁의 친구들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하지만 여자애는 잠시 그렇게 있다가, 얼굴이 아까보다 훨씬 달아오른 채 저만치 먼 곳으로 뛰어가버렸다. 승혁은 물론, 다른 애들도 이상하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딱히 심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쟤가 먼저 도망갔기 때문이었다.
“근데 쟤 왜 도망간 거야?”
그렇게 서로한테 물어보긴 했지만, 승혁 일행은 결국 쟤가 왜 도망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이렇게 되자, 승혁 일행은 다시 가던 길을 가다 서로 헤어졌다. 바로 옆이 자기네들 집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역시 항상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승혁한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건 바로 그 다음이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승혁이 고개를 돌려 집으로 들어가려 할 때, 갑자기 저만치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깐 참 재밌었다. 친구. 그지?
갑작스런 ‘느낌’에 깜짝 놀라, 승혁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날도 저물지 않았는데, 주위는 마치 죽은 듯이 조용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지만, 저만치에 있는 ‘누군가’한테서 승혁은 눈을 뗄 수 없었다.
대체 저건 누구인가.
그 누군가란 존재는 아마 사람이란 걸 빼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젊은지 늙었는지, 도대체 어느나라 사람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물론 승혁이 느낀 건 틀림없이 우리말이었지만, 저 사람이 진짜 우리나라 사람인지는 자신있게 말할 수 없었다. 이렇게 알 수도 없을 뿐더러 멀리 떨어져있는 존재인데, 승혁은 어쩐지 저 사람이 절대 이길 수 없는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저렇게 멀리 있는데 왜 자길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걸까. 승혁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까 그 애가 화냈던 까닭만큼이나, 지금 이 상황도 왜 이렇게 됐는지 정말 수수께끼였다.
승혁이 그런 생각을 하고있을 때, 저만치에 있던 누군가는 마치 웃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승혁이 그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건 아니었다. 그저 방금 걸려온 말처럼,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 누군가는 바로 뒤, 이런 말과 함께 ‘뭔가’를 승혁한테로 내던졌다. 방금 느낀 웃음이나 말처럼, 이 역시 모양새를 갖추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승혁은 뭔가 자기한테 날아오는 걸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저만치에 있던 누군가가 건넨 말도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무척 궁금해지는데. 친구.
승혁은 그 말 역시 얼른 와닿지 않았다. 적어도 그 때까지는 그랬다. 그러니까 승혁이 곧바로 쓰러져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는.
그 뒤에 있었던 일은, 솔직히 말해서 두 달쯤 지난 지금도 승혁이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투성이였다.
아무튼 한참 뒤 어두워진 골목에서 눈을 뜨고 나서, 승혁은 뭔가 아주 크게 바뀌었단 걸 똑똑히 느꼈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자기 모습 자체가 원래와 크게 달라졌던 것이다.
그 모습은 다시 떠올리기 싫었으므로 얼른 넘기자면, 아무튼 승혁은 살면서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모습이 바뀌었는데도, 가족들은 승혁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뿐인가,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승혁을 남긴 채 조금 떨어진 곳으로 얼른 이사하고 말았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되려는 아이를 혼자 두고 다른 데로 떠난다니, 승혁한텐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걸 ‘이상하다’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자기가 그렇게 된 다음부터, 땅바닥에 뭐가 떨어져있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색을 가진 동그란 과자였는데, 승혁은 처음 보는 거였다. 다른 사람들은 이게 전혀 안 보이는 건지, 아무렇지 않게 그걸 넘어가며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런 지 며칠 지난 뒤, 이번엔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이 승혁 앞에 나타났다.
그 말에 따르면, 승혁은 ‘도토리’라 일컬어지는, 다른 이들과 ‘다른’ 존재가 된 듯했다.
여기까지 다시 떠올리자, 승혁은 배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지끈대는 느낌이 들어 얼른 생각을 다른 데로 돌렸다. 솔직히 이렇게 되었는데도 승혁은 전혀 이 상황을 알 수 없었을뿐더러, 이런 생각은 두 번 다시 하고싶지 않았다.
조금 뒤면, 자기랑 같은 처지라 하는 그 도토리란 애들이 여기로 모일 터였다. 그 날 뒤, 승혁의 집엔 그런 별난 여자애들이 가끔 몰려오게 되었다. 물론 원래대로였다면 승혁이 눈길조차 안 줬을 유치한 애들이었다. 떠들기만 잘 하고, 가끔 울고, 가끔 잘난 척하는 꼬맹이들 천지였다. 쪽팔려서 같이 여기 있기조차 싫을 만큼.
그럴 때마다 승혁은 마치 전혀 모르는 친척집에 혼자 남겨진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얘들하고는 평생 친해질 일이 없겠구나. 얘들하고 자긴 완전 남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근데 있잖아.”
그 때 밖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승혁은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가만히 생각하면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까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원래 중학교는 이 시간에 곧잘 끝나곤 했던 것이다.
아무튼 쟤들한테 들키기 싫었기에, 승혁은 창가에서 몸을 좀 떨어뜨린 채 바깥을 가만히 쳐다봤다. 여자애 두 명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명은 승혁네 집에 자주 놀러오는 유치한 여자애 중 한 명이었으며, 다른 한 명은 자기 또래인 것같긴 하지만 아무튼 승혁이 모르는 애였다.
“진짜 사줄 수 있는 거지? 뻥 아니지?”
“치. 내가 이런 걸로 뻥칠 거 같아? 사람 말을 믿어야지. 사람 말을.”
“저번엔 못 사왔으면서…”
“만날 그랬던 것도 아니잖아.”
짐작대로 참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저 둘을 보며, 승혁은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그냥 여자애들이 하는 얘기도 재미없긴 했지만, 특히 요즘 알게 된 저 도토리인지 뭔지하는 애들 말은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어쩐지 듣기만 해도 괜히 닭살이 돋을 거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저런 말이 아니더라도, 그냥 밥을 먹을 때 투정부리는 목소리, 그리고 자기들끼리 노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승혁은 뭐가 올라오려는 걸 어떻게든 참곤 했다.
물론 승혁의 마음을 모른 채, 창문 넘어 얘들은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 그리고 걔들 꼭 혼내줘. 이건 진짜 할 수 있지?”
“그럼. 내가 이런 거 한두번 한 것도 아니고.”
“그치만 전처럼 또…”
“알았대도. 언니가 다 해줄게. 언니가.”
그 ‘언니’라는 말을 듣던 승혁은, 속으로 웃음이 터져나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언니고 뭐고, 저 둘이 동갑이란 건 틀림없는 사실이라서였다. 솔직히 저 자칭 ‘언니’라 하는 여자애는 반대편에 있는 애보다 몇 달은 더 늦게 태어난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언니냐. 만약 저 자리에 자기가 있었다면 당장 끼어들었겠지만, 승혁은 일단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럼 언니한테 맡긴 거다. 알았지?”
“응. 꼭 해줘야 돼?”
그러거나 말거나, 저 둘은 아무렇지 않게 그런 얘길 주고받고 있었다. 이건 내가 이상한 걸까, 아니면 쟤들이 이상한 걸까. 승혁은 여전히 이걸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사는 세상이 다르단 건 틀림없다 생각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일은 다 잘 되었는지, 자칭 언니는 인사한 뒤 여자애한테서 등을 돌렸다.
그 때, 이번엔 이런 말이 들려왔다.
“아 맞다. 언니가 이걸 깜박했네.”
그런 말과 함께 자칭 언니는 멋있는 척을 하며 아까 그 여자애를 뒤돌아봤다. 그리곤 마치 자기가 영화 속에 나오는 비밀요원이라도 되는 듯한 말투로,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어깨에 힘을 주며 이런 말을 꺼냈다.
“보수는 농협으로. 알았지?”
그 말을 듣자, 승혁은 더 이상 터져나오는 자기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승혁이 끅끅대기도 전에, 대체 어디서 숨어있었는지 갑자기 나타난 여자애들이 있었다.
“방금 들었냐? 농협이래 농협. 진짜 웃긴다.”
“저거 영화에 나오는 무슨무슨 은행갖다가 쓴 거야? 근데 왜 농협이야?”
“나 맨 처음 들은 다음에 무지 웃겼다. 막 구수한 느낌 들어. 무슨 누룽지같애.”
“우와. 니들 거깄었어?”
여자애는 갑자기 튀어나온 자기 친구들이 전혀 놀랍지 않았는지,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 한편, 자칭 언니는 그 말이 안 들렸는지 뒤도 안 돌아보고 그대로 사라졌다.
저 모습을 보아하니, 다른 애들은 구석에서 저 둘의 얘길 엿듣고 있었던 듯했다. 그 역시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쟤들은 별의별 걸 다 엿듣기 좋아했던 것이다. 물론 쟤들 역시 방금 그 여자애와 자칭 언니만큼 유치하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자기도 쟤들을 엿보고 있단 생각이 들자, 승혁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무 생각도 없이 고개를 돌리자, 우연히 저 너머에 있던 거울과 승혁의 눈이 맞았다.
그걸 보자, 승혁은 순간 열이 받는 걸 느꼈다. 지금껏 어떻게 해서든 피하려고 했던 모습을, 자기가 스스로 보게 된 꼴이 되어서였다.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그 날 눈을 뜬 뒤, 집에 가서 봤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겨우 몇 달 전만 해도 170을 가볍게 넘길 만큼 커졌던 키가, 지금은 원래대로 돌아온 걸 넘어서 160에 가깝게 줄어있었다. 더불어 몸집은 물론, 팔뚝 굵기도, 손도 발도 원래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차라리 갑자기 마구 크기 전 자기 모습으로 돌려놨다면 모를까, 그 때보다도 모든 게 줄어든 걸 보면 화가 치밀어오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고작’ 그런 게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승혁은 졸업식 때의 승혁도 아니었지만, 갑자기 무럭무럭 자라기 전의 승혁하고도 달랐다. 먼저 머리카락이 길었다. 다른 여자애들만큼 긴 머리카락은, 검은색도 아닌 은빛을 띄고 있었다. 이건 웃을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기 얼굴 생김새를 보면 더더욱 상황은 좋지 않았다. 조금 느낌이 다르다곤 해도, 얼굴 하나만은 원래 승혁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머리카락은 은빛에 몸집은 작은 편이고, 힘도 여자애들한테 질 만큼 전보다 더 약해졌다. 그렇게 되고 싶었던 ‘멋있는’ 존재는 전혀 되지 못했으며, 은빛 머리카락과 묘하게 안 맞는 자기 특유의 딱딱한 얼굴생김새는 자기가 더 민망해질 정도였다. 자기는 이런 존재가 되고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저 다른 형들만큼이나 멋있어지면 그걸로 좋았을 뿐이었다.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거울 너머에 있는 은발이 안 어울리는 흰살에 각진 표정을 지닌 ‘여자애’도 승혁과 같은 생각인지, 있는 대로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이 일이 자꾸만 머릿속에 남는 바람에, 그 뒤 승혁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집에 돌아와선 자기 옆에서 떠드는 애들을 가만히 보고있었을 뿐이었다.
얘들하고 같이 지낸 지는 이제 대략 두 날 남짓이었지만, 승혁은 아직도 얘들을 뭐라 생각하면 좋을지 잘 알 수 없었다. 솔직히 얘들도 귀여운 데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하는 짓이나 말이 특이해서 그렇지, 가만히 보면 그럭저럭 귀여운 구석도 있긴 있었다. 그게 사귀고 싶은 느낌인지 어떤지는 둘째치더라도.
하지만 승혁 눈에, 쟤들은 귀엽고 뭐고를 다 떠나서 그저 찌질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유치한 건 물론이며, 바보천치에 멍텅구리이기까지 했다. 만날 떼만 쓰고, 약한 척이나 하고, 잘하는 것도 하나 없었다. 물론 얘들에 따라 이건 좋고 나쁘고가 달랐다. 하지만 승혁의 눈엔 대충 비슷하게 느껴졌다.
대한민국 평균 이하 여중생 및 여초딩 일동.
쟤들이 어떻게 생각하든간에, 승혁의 눈엔 항상 그렇게 보였다.
아마 자긴 평생 쟤들하고 친하게 지낼 수 없으리라 승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승혁 자신이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쟤들하고 친해진다는 생각만 해도 몸이 부들부들 떨릴 것만 같았다. 저런 유치한 얘들하고 어울리느나 차라리 혼자 있는 게 훨씬 나았다. 비록 지금은 그럴 수 없다 해도.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닌가.
자기가 저 이상한 얘들, ‘다른 사람과 다른 존재’인 도토리라니.
“근데 승혁이 너 뭐 살 거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 뭐. 어…”
그렇게 날이 저물 무렵.
승혁은 그 유치한 애들과 함께 골목에 나와있었다. 이 시간이면 얘들끼리 모여 같이 장을 보고올 때가 많았던 것이다. 물론 승혁이 바란 바는 아니었다. 그저 같이 안 따라가면 시끄러우니까 이러는 것뿐이었다.
아무튼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승혁은 그러고보니 배가 아팠단 걸 깨달았다. 그 때 있던 일이 워낙 기억에 남아서 아픈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렇게 기억을 되살리니,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아랫배가 쑤씨는 듯 아픈 게 느껴졌다. 이대로 내버려뒀음 까먹었을지도 모르는데. 승혁은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렇게 승혁 일행이 길을 가고있을 때였다.
저만치에서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조그만 애들이 지나가는 게 승혁의 눈에 들어왔다. 여자애들은 초등학생답게 큰 목소리로 자기들끼리 신나게 떠들며 지나가고 있었다. 고작 몇 살 아래쯤일 뿐인데, 승혁의 눈엔 무척 어린애들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지난 두 달동안 있었던 일이 너무 컸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 때, 갑자기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전 자칭 언니랑 얘기를 주고받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그 애는 고개를 슥슥 저으면서, 이런 말과 함께 한숨을 푹 쉬었다.
“어휴. 우리도 저럴 때가 있었지.”
“그러게.”
이 말을 듣자, 승혁은 순간 정말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건 어쩔 수가 없었다. 쟤는 당연하다 치더라도, 거기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다른 애들도 저 너머 어린애들만큼 몸집이 작았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 너머에 있는 얘들보다 더 작은 여자애도 있었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쟤들하고 얘들 중 누가 더 나이가 많은지 전혀 짐작하지 못할 터였다. 아니면 승혁이 있는 데를 ‘더 어리다’라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니들이 할 말이냐.
그런 말이라도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승혁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자기가 말해서 될 일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얘들은 원래 이랬다.
언젠가 자기도 얘들을 이해할 때가 올까.
그 애들과 같은 무리 속에 섞인 채, 승혁은 혼자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