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호랑이의 왕과 행복론 1. 첩첩산중인 새로운 현실 (下)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맹호는 혼자 생각에 잠겼다.
며칠 동안 있었던 일과, 자기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모르는 길을 혼자 걷는다는 건 맹호한테 언제나 무서운 일이었다. 그게 커다란 건물들이 죽 늘어선 도시라면 더더욱 그랬다. 이런 건 텔레비전 너머에서나 있는 줄 알았다. 적어도 자기가 사는 세상과는 아무 상관없다 믿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맹호는 바로 그 ‘아무 상관없다 믿던 세상’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뀌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주위 관계조차 까치 덕분에 바뀌고 말았다. 자기는 아직 어른도 무엇도 아닌데, 까치 그 나쁜 놈이 맹호보다 먼저 어른이 되었다. 물론 맹호한텐 아무 말도 없이였다. 여전히 맹호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지 모르고 있었다.
앞으로 맹호는 어떻게 될 것인가란 것 역시 문제였다. 살던 곳이 갑자기 낯선 도시로 바뀌면서, 맹호는 자기가 어쩌면 좋을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지금까진 솔이만 신경쓰면 됐는데, 이젠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을 마주쳐야 했다. 자기가 ‘호랑이의 왕’이란 걸 아는 낯선 이들과 어떤 식으로 지낼지 생각해야만 했다.
정말 앞으로 어떡하지. 맹호가 그런 생각과 함께 무심코 자기도 모르는 골목길로 깊이 들어섰을 때였다.

“아니, 이건 또 누구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맹호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을 곳에, 어떤 여자애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아이는 어둠만큼이나 짙은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기르고 있었다. 맹호보다 두 배는 더 몸집이 작은데, 그 아이는 마치 무지막지한 거인처럼 느껴졌다. 자기 속이라도 꿰뚫어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은 맹호가 가진 그것보다 훨씬 더 무섭게만 보였다.
그 아이, 마치 어느 학교의 교복처럼 보이는 검정 치마와 흰색 블라우스를 입은 그 아이는, 아주 흥미진진하단 표정으로 맹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이 세상에 도깨비가 있다면 이런 아이일까. 그 아이를 앞에 둔 채, 맹호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는 호랑이가 온다고 했던가? 너지, 그지?”
다짜고짜 여자애가 이렇게 하는 말에, 맹호는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맹호의 머릿속에 있는 건 이 여자애가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자기 정체를 꿰뚫어봐서 무섭다는 마음이 아니었다. 맹호는 지금, 태어나서 처음 보는 그 ‘뭐라 말할 수 없는 존재’에 뭐라 할 말을 잃고 있었다.
대체 이건 어떤 존재일까.
맹호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도, 그 아이는 씩 웃으며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내가 니 마음을 모를 줄 알아? 지금도 혼자 고민하고 있지. 그지?”
그 말에 맹호는 더 할 말을 잃었다. 그 여자애의 말이 참말이라서였다. 누군가 걸어오는 걸 보는 것만으로 마음을 알아맞출 수 있을까.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맹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이 아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게 틀림없다. 이 아이는 도무지 같은 존재라 여길 수 없었다. 아니, 맹호는 호랑이고 저 아이는 일단 사람일 테니 원래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맹호가 하고싶은 말은, 이 아이는 ‘같은 세상에서 지내는 존재’같지 않다, 는 것이었다.
마치 뭐에라도 홀린 것처럼, 맹호는 그 아이한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맹호는 도무지 이 아이한테 이길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힘으로도, 그리고 물론 마음으로도, 저 아이는 맹호보다 까마득히 위에 있었다.
“그렇게 몸집이 큰데 마음은 여리단 말이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마. 네가 그런 존재란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거든. 그치만 이대로 내버려두면 너희 둘은 평생 그대로겠지. 그러니까 내가 조금 도와줄게. 어떻게 하냐면…”
여자애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면서도, 맹호는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자기처럼 20대 후반으로까지 보일 때도 있는 덩치큰 남자가 고작 저 조그만 여자애한테 휘둘리다니, 다른 이들이 보면 웃겠지만, 맹호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자긴 저 애한테 이길 수 없으니까.
“그래. 이런 건 어떨까?”
그 때, 여자애는 마치 자기가 무척 큰 선물이라도 주는 것처럼 아주 즐겁게 이런 말을 꺼냈다. 물론 그 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맹호도 몰랐다. 저 아이의 속을 맹호가 짐작할 수 있을 것같지도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맹호는 어쩐지 자꾸만 눈이 감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런 걸까. 눈앞에 있는 여자애는 뭔가 기대라도 하는 듯 맹호를 보며 씩 웃고 있었다. 설마 저 아이 때문일까. 사실 그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저 애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단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정말 ‘뭐든’ 할 수 있는 걸까.
대체 저 아이는 어떤 존재일까. 까지 생각하고 나서, 맹호는 자기가 땅바닥에 털썩 쓰러지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 뒤, 맹호는 정신을 잃었다.
앞으로 자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까맣게 모른 채.

 

그로부터 맹호가 정신을 차린 건, 시간이 조금 지난 뒤였다.
“어…”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며, 맹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정신을 잃은 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맹호도 알 수 없었지만, 뭄이 지끈대는 걸 보면 한 시간은 넘게 여기에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몸을 일으키려 할 때, 맹호는 뭔가 이상하단 걸 깨달았다.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게 하루아침에 바뀐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산골 깊은 곳에서 도시로 나온 지 한 달 남짓이니 그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 때와 느낌이 달랐다.
맹호는 마치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처럼, 전보다 더 으리으리해진 것 같은 도시를 빤히 쳐다봤다. 맨 처음 도시에 왔을 때도 뭐든 다 크게 보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했다. 이제 저녁이 되어 날이 어둑어둑해졌는데도, 맹호 눈에 비치는 세상은 아까보다 훨씬 더 컸다.
뭔가 이상한데. 대체 뭐가 일어난 거지?
머릿속을 물음표가 가득 채운 가운데, 맹호는 일단 몸을 일으키기로 했다. 아까 잠이 들 때 엉덩방아라도 찧었는지, 자꾸만 그 쪽이 간질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천천히 몸을 일으킨 뒤, 맹호는 아까보다 더 큰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세상이 커진 것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자기 몸에 항상 흐르던 ‘기운’이 없었다.
맹호는 원래 호랑이가 사람으로 둔갑한 존재이므로, 아무리 사람 모습을 하고있다 한들 몸 전체에 흐르는 ‘기운’이란 게 있었다. 그 기운은 맹호가 호랑이로 나고 자랐으며, ‘호랑이의 왕’이 될 자격이 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보통 사람이 몸에 피가 흐르는 걸 전혀 이상하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맹호도 그러한 ‘기운’이 자기 몸에 흐르는 걸 너무나 당연한 일로 믿고 살았다.
그런데 지금, 마치 죽은 것처럼 그 기운은 싹 사라지고 말았다. 가만히 있으면 조금 느낄 수 있었지만, 지금껏 거세게 흐르던 것과 대보면 너무나 약했다. 마치 자기가 ‘사람으로 둔갑한 호랑이’가 아니라 다른 존재가 된 듯한 느낌. 잠깐, 다른 존재?
거기까지 생각한 맹호는, ‘이상한 느낌’이 한두가지가 아니란 걸 비로소 깨달았다. 자기 팔은 원래 이렇게 가늘지 않을 터였다. 머리카락도 평소와 다른 느낌인 게, 마치 더벅머리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손도 발도 어쩐지 평소보다 훨씬 작은 것만 같았다.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아무튼 모든 게 이상했다.
그러던 맹호는, 갑자기 바로 옆에 뭔가 비치고 있단 걸 깨달았다. 그 곳엔 조그만 가게가 있었는데, 가로등 불빛 덕분에 유리벽 너머로 뭐가 비치고 있는지 또렷이 드러났다. 그걸 잠시 보던 맹호는, 이윽고 저기에 비친 게 누구인지 깨달았다.
그 유리벽 너머로 흐릿하게 비친, ‘조그만 여자애’는, 잘못 보고있는 게 아니라면, 맹호 자신인 게 틀림없었다.
만약 저 너머에 있는 게 맹호 자신이 아니라면, 마치 헛것이라도 본 것처럼 넋이 빠져나간 표정을 ‘저 아이’도 짓고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맹호는 잠시동안, 그 ‘자기라 짐작되는’ 아이의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사실, 그 아이가 맹호와 아주 딴판인가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솔이만큼이나 몸집은 작았지만, 묘하게 남아있는 분위기나 조금 세상물정에 어두울 듯한 ‘묘하게 얼빠진’ 느낌, 무엇보다 원래와 달리 머리색깔이 호랑이를 떠올리게 하는 금빛을 띈 갈색이란 게 맹호와 비슷했다. 각진 인상이나 딱딱한 표정 역시 원래 맹호와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입고있는 옷은 대체 언제 바뀐 건지, 원래 입던 교복이 아니라 흰색 티에 청바지였다. 몸집은 꽤 줄어들었지만, 어쩐지 맹호는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자기가 저 너머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거울, 아니 유리벽을 빤히 보던 맹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 아. 조금만 냈을 뿐인데, 맹호는 자기가 받은 이 느낌이 맞다는 걸 알아챘다. 평소와 댈 수도 없을 만큼 목소리가 ‘높았다’. 원래 맹호가 지닌 낮은 목소리보단 훨씬 더 높은 목소리였다. 물론 솔이와 대보면 아직 낮을지도 모르지만, 맹호는 이게 자기 목에서 나는 소리란 게 믿기지 않아 한동안 자꾸만 목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지금 겪고 있는 이 일은 사실일까.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는 호랑이인 주제에, 맹호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게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아까 전까지 여자애와 만났던 것도, 지금 여기에 있는 자기도, 모두 ‘정말’ 일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지금 맹호가 여기에 있단 건 사실이었다.
이 묵직한 어둠도, 차가운 바람도, 여기에 서있다는 느낌도, 그리고 맹호 자신이 살아있다는 느낌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맹호는 잠시 어떻게 할지 몰라 가만히 서있었다. 뭔가 해야 할 것 같은데, 뭘 하면 좋을지 얼른 알 수 없었다. 뭔가 더 확인할 게 있는 거 같은데, 그걸 ‘떠올리는’ 게 무서웠다. 마치 이 커다란 도시에 맹호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것만 같았다.
그 때, 맹호는 드디어 자기가 지금 얼른 해봐야 하는 걸 떠올렸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호랑이의 왕인 맹호가 꼭 점검해야 하는 일이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단 걸 확인한 뒤, 맹호는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곤 눈을 질끈 감은 뒤, 항상 하던 것처럼 재주를 넘었다.
그렇게 다시 땅에 발을 디딘 뒤, 맹호는 아까 전부터 죽 들던 묘한 느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재주를 넘었는데도, 지금 맹호는 사람 모습 그대로였다.
산골에서 남몰래 지낼 땐 항상 재주를 넘어 ‘원래’ 모습, 즉 호랑이의 모습이 되곤 했던 맹호한테 지금 이 일은 몸집이 줄어든 것보다 훨씬 더 충격이었다.
그 애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맹호를 ‘이렇게’ 만든 걸까.
지금까지 살면서 겪지 못한 가장 큰 두려움이 지금 맹호를 덮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니, 맹호는 마치 뭐에 홀린 것처럼 솔이와 같이 사는 아파트단지 안에 들어서있었다.
대체 왜일까. 그건 맹호도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아무 근거도 없는데, 잠시 뒤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여자애와 만난 뒤 그런 느낌도 잘못된 게 아니란 생각이 들어, 맹호는 지금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앞으로 어쩌지.
평소보다 훨씬 더 으리으리한 아파트단지를 쳐다보며 맹호가 어쩔 줄 모를 때였다.
“길 잃어버렸어?”
마치 맹호를 살피기라도 하는 낯익은 얼굴을 보고, 맹호는 펄쩍 뛰려던 걸 간신히 참았다. 그 말을 걸어온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솔이였다. 왜 솔이가 지금 이 시간에 여기에 있나 생각하다, 맹호는 자기가 이렇게 어두워질 때까지 아무 말도 없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단 걸 떠올렸다.
하지만 남과 얘기하는 걸 겁내는 솔이가 ‘남’인 맹호한테 말을 건 까닭은 뭘까.
이건 어디까지나 맹호의 느낌이었지만, 지금 맹호는 솔이한테 ‘남’일 터였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맹호도 무척 슬펐지만, 아무리 자길 아는 사람이 여기에 있다한들 이 사람이 맹호라 믿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물론 몸집이나 이것저것 바뀐 것도 있겠지만, 지금 맹호는 가장 중요한 게 아주 달라져있었다. 맹호가 호랑이란 것도 안 믿을 사람들이, 그렇게나 ‘큰’게 바뀐 맹호를 알아챌 수 있을 리 없었다.
물론 솔이나 까치는 맹호가 사실 어떤 존재인지 잘 아는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맹호의 비밀을 아는 친구들이라 한들, 맹호가 어떤 모습을 하더라도 알아챌 만큼 상상력이 풍부하진 않았다. 이런 걸 잘 알아맞추는 까치라 한들, 맹호가 지금 이런 상황에 놓였단 것까지 짐작하진 못할 터였다.
하지만 솔이라면 어떨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맹호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걸 느꼈다. 솔이와 맹호는 1년 가까이 알고 지내왔다. 솔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맹호는 솔이를 가장 소중한 친구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솔이가 ‘어떤 모습이라 한들’ 맹호를 알아볼 수 있는지는 맹호도 얼른 짐작할 수 없었다. 솔이는 맹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솔이는 맹호만큼, 자기를 소중한 친구라 생각하고 있을까.
“왜 그래?”
맹호가 어쩔 줄 모르는 사이, 솔이는 무척 이상하단 표정으로 맹호를 빤히 쳐다봤다. 설마 솔이는 지금 모든 걸 꿰뚫어본 게 아닐까. 맹호는 가슴이 자꾸만 펄쩍펄쩍 뛰는 걸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솔이는 이내 묘하단 표정을 짓곤, 맹호를 보며 조심스레 웃어보였다.
“아. 여기 처음 이사왔구나. 그지? 나도 혼자야. 아, 난 친구가 있지만…”
지금 맹호가 사실대로 말하면 솔이는 이해해줄지도 몰랐다. 하지만 무조건 그러리라고 장담할 순 없었다. 맹호는 솔이가 그 말을 못 믿고, 마치 이상한 사람을 보는 것처럼 자기를 바라보리라 생각하면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쩌면 좋을까. 지금 맹호한텐 딱히 뾰족한 도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 때였다.
“아. 낯선 사람하고 말하는 거 무섭지? 사실 나도 그런데, 어쩐지 그냥 내버려두기가 그래서…나는 솔이라고 해. 앞으로 만나면 인사하고 그러자. 나도 조금 무섭지만 괜찮을 거야.”
그런 말과 함께, 솔이는 맹호를 보며 활짝 웃어보였다.
그 웃는 모습이 너무나 눈부셔서, 맹호는 자기가 사실 누구인지 솔이한테 말할 생각마저 싹 잊어버리고 말았다.

솔이와 헤어진 뒤, 맹호는 바로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들어가고 싶어도 발걸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보다, 지금 집으로 들어간다는 생각을 하면 벌이라도 받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솔이를 우습게 보는 것 같았다.

솔이한테 죄를 짓고 말았다.
아무리 그걸 솔이가 모르고 있다 한들, 맹호한테는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이 잊는다 한들 맹호 자신이 절대 잊을 것같지 않았다. 아니, 죽을 때까지 기억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누군가는 그저 한 번 거짓말을 한 것이라 여길지도 모르지만, 맹호한테 지금 이건 두말할 것도 없이 죄였다.
다른 사람이 맹호가 한 짓을 봐준다 한들, 과연 맹호 자신이 맹호를 ‘봐줄’ 수 있을까.
지금 맹호는 그럴 자신이 전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솔이였다. 그냥 거짓말을 하는 것도 마음이 찔리는데, 절대로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 친구한테까지 이런 짓을 하고 말았다. 물론 맹호가 바라는 일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맹호는 솔이를 속였고, 그래서 아파트단지 구석에 주저앉은 채 고개도 못 들고 있었다.
앞으로 솔이를 무슨 낯짝으로 보면 좋을까.
사실, 지금 맹호는 솔이를 제대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자긴 솔이를 속이고 만 것이다. 하지만 맹호는 솔이 곁에 있고 싶었다. 이렇게 솔이를 속인다 할지라도, 조금이라도 솔이를 더 알 수 있단 게 좋았고, 솔이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다는 게 기뻤다.
이런 생각을 해봐야 거짓말은 거짓말일 뿐인데.
거기까지 생각하다, 맹호는 자기가 원래대로 돌아가있단 걸 깨달았다. 또, 자기 눈에 눈물이 고여있단 것도 알아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맹호는 울고 있었다. 지금껏 이런 식으로 운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은 흘러넘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솔이한테 뭐라 미안하다 말하면 되지.
몇 번이고 눈물로 어깨를 들썩이며, 맹호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기처럼 덩치도 큰 놈이 이런 식으로 울다니 얼마나 꼴불견일까, 라는 생각을 될 수 있는 대로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