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비상은 여러 생각을 하며 오늘 경기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딱히 자기가 하는 날도 아니었지만, 강산이 오늘 한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 자체는 이제와서 딱히 특이한 일도 아니었지만, 비상은 어쩐지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걸 느꼈다. 물론 큰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신경쓰이는 건 틀림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비상은 항상 오던 옥상에 발을 들여놓았다. 연장자 몇 명이 미리 와있었는지, 비상을 알아보고 ‘어, 비상이냐?’라며 손을 흔들어댔다. 한편, 오늘의 주인공인 강산은 아직 안 온 듯했다. 강산이 보이거나 안 보이거나 연장자들이 아무렇지 않게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비상은 다시 한 번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놀이를 좋아하는 강산이 자기가 하는 날인데도 여기에 일찍 와있지 않단 말인가.
연장자들은 여전히 아무 상관없어하는 눈치였지만, 비상은 그게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비상이 그런 생각을 할 동안에도 연장자들은 자기들끼리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대충 들어보면, 어제 있었던 일이 주된 이야깃거리인 것 같았다.
“아무튼 어젠 참 큰일이 있었다니까.”
이야기를 다 끝냈는지, 별밤이 이런 말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제 그 자리에 없었던 파랑은 그 얘기가 그렇게 재밌었는지, 눈을 반짝이며 별밤한테 이렇게 묻고 있었다.
“어제 그렇게 재밌었어?”
“그럼, 재밌었지. 나라 씨랑 다시 만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 만큼.”
“그럼 잎새야, 그렇게 무서웠어?”
“말도 마라. 이래서 사람은 미행같은 걸 하면 안 돼요. 예를 들자면…”
그렇게 갑자기 끼어들어 먼산을 보던 잎새는 어제 일을 이렇게 예로 들었다. 그 말에 따르면, 패널티의 영향으로 몸집이 현만큼 줄어든 나라가 강산을 바라보며 ‘월월! 월월월!!’하며 짖는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이없긴 했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걸 듣던 별밤은 숨이 넘어가라 웃으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강산이가 나라 씨를 보면서 ‘멍멍! 멍멍멍!!’하는 것도 같이 집어넣어야지.”
“크하하하. 맞다맞다.”
별밤의 말에 잎새는 손뼉까지 쳐가며 무척 좋아했다. 잎새는 아직도 어제 있었던 그 감동을 잊지 못하는 듯했다. 저 말이 엉뚱한가 아닌가는 둘째치더라도, 이쯤이면 어제 없었던 사람한텐 딱 들어맞는 예시일 것 같았다.
그 때, 옥상 입구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의 주인공인 강산이었다.
“니들 뭐하냐?”
고개를 돌려보니, 강산은 웬 편의점 봉투를 오른손에 쥐고 있었다. 연장자들 쪽으로 다가오던 강산은 걸어오다 말고 그 봉투 안에 있던 걸 슬쩍 꺼냈다. 가만히 보니, 그건 종이에 싸인 치킨이었다. 아마 강산이 편의점에서 사온 밤참인 듯했다.
그걸 빤히 보던 잎새는, 갑자기 엉뚱한 말을 입에 담았다.
“그 치킨은 당신 건가요?”
비상이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잎새는 마치 영어듣기평가에라도 나올 듯한 말투였다. 강산도 이 놈이 무슨 소리야?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멍하니 잎새를 보더니, 이윽고 자기가 들고있던 치킨을 얼른 등 뒤로 숨겼다.
“네. 이건 내 치킨이니까 건들지 마. 이 자식아!”
“안 뺏어먹는대도. 이 놈아.”
잎새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강산은 그 말을 안 믿는지 그대로 저만치 사라져버렸다. 물론 그건 전혀 이상한 모습이 아니었다. 아마 이런 상황이라면 강산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저렇게 했을 터였다.
그렇게 건들건들대며 걸어가는 강산을 보면서, 잎새는 별밤한테 이렇게 물었다.
“저 놈 저녁 안 먹었나?”
“그건 모르지. 니가 불편했던 거야 틀림없지만.”
“근데 전 이렇게 늦은 밤에 기름기있는 음식먹는 사람 보면 신기하더라구요. 별밤이 형.”
“야 군청아. 넌 여기 왜 있냐?!”
갑작스레 군청의 목소리가 들리자, 잎새는 마치 헛것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 쪽을 바라봤다. 오늘도 이런 식으로 시간이 지나가는 가운데, 드디어 강산이 경기를 할 때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파란 밤이라구요?”
잠시 뒤, 비상은 다른 이들도 모인 가운데 의영한테서 오늘 강산이 누구와 맞붙는지를 들을 수 있었다. 의영은 그래, 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웬만한 상대는 다 아는 의영도 모를 정도면 그다지 세진 않은 듯했다.
“그럼 강산이가 이기겠네 뭐.”
거기까지 듣자마자, 잎새는 그런 말과 함께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다른 연장자들도 비슷한 생각인지, 다시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당사자인 강산 역시 그렇게 여기는지, 먹다 만 치킨을 다시 입에 대고 있었다.
하지만 비상은 정말로 그럴까, 란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넘길 수 있을까, 란 생각이 잠깐 들었던 것이다. 강산은 여전히 긴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표정으로 하품을 하며 무기를 만지고 있었다. 마치 자기가 이기는 건 내일 아침이 찾아오는 것만큼 당연하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저만치에서 마지막 채비를 하는 강산을 가만히 바라보다, 비상은 묘하게 좋지 않은 느낌을 다시 한 번 받았다. 이대로 보고 있어도 물론 상관은 없지만, 비상은 어쩐지 여기에 있는 게 좋지 않겠단 생각을 했다. 대체 왜 그런 느낌이 드는 걸까. 그냥 가만히 보고 있으면 될 텐데, 비상은 자꾸 어딘지 몸이 근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애초에 요즘 강산이 놀이를 연습하거나 뭘 진지하게 한 적이 있었던가. 요즘 강산을 보면 비상은 그것도 장담할 수 없단 생각이 들었다. 어제 강산이 한, 자기는 놀이를 좋아한다는 말은 물론 비상도 들은 바 있었다. 하지만 자기가 그 말을 몸으로 옮긴 건, 비상의 짐작으론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적어도 요즘엔.
자기 생각이 항상 맞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틀리기만 한 적도 없었을 텐데.
결국, 비상은 직감에 몸을 맡긴 채 그대로 그 자리를 떴다. 마침 다들 자기들 이야기에 흠뻑 빠진 덕택에 자리를 뜨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지금껏 놀이를 일부러 안 본 적은 없다시피하지만, 가끔 이런 식으로 거리를 두는 것도 이상하진 않을 터였다. 딱히 깊은 까닭은 없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비상은 건물 사이를 건너뛰었다. 어디든 좋으니 혼자 있을 만한 곳을 찾기 위해서.
이게 자기다운 짓이긴 한가.
한참을 뛰어다닌 끝에 사람이 드문 골목 위 옥상에 자리잡고 나서,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자기가 할 말은 아니지만, 오늘 비상은 묘하게 자기답지 않았다. 그럼 뭐가 비상다운가하면 그 역시 알 수 없었지만, 비상은 붉은 밤 팀을 떠나온 뒤부터 지금껏 죽 그런 생각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비상은 자기 자신한테 있어 중요한 상황에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성격이었다. 하물며 다른 사람에 관한 상황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비상도 그걸 전혀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 이 순간까지는 그랬다.
대체 자기는 왜 이런 짓을 한 걸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비상은 쓴웃음이 나오는 걸 느꼈다. 비상은 직감에 따를 때도 꽤 있었기 때문에, 지금 자기가 하고있는 짓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얼른 알 수 없는 짓인 것도 틀림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라면 안 했을 짓이 아닌가.
비상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뭐지?”
그런 말과 함께, 비상은 품속에서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화면을 보니 잎새가 메시지를 보내온 듯했다.
그 메시지를 본 뒤, 비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강산이 졌다 야.
비상의 핸드폰엔 지금 그런 말이 떠있었던 것이다.
잠시 뒤, 비상은 자기가 있었던 곳, 즉 붉은 밤 팀이 모인 옥상으로 다시 돌아갔다. 몇 번이고 어둠과 빛을 뛰어넘으며, 비상은 아까 본 메시지를 속으로 곱씹었다.
잎새의 메시지엔 강산이 졌단 말뿐만 아니라, 오늘은 의영이 밥을 사기로 했다는 말도 같이 적혀있었다. 의영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 말 뒤로, 잎새는 이런 말을 보내왔다.
-저 술고래자식 달래줄 사람이 많진 않잖냐. 비상이 너도 얼른 와라.
그 말을 되새기는 사이에 비상은 다시 붉은 밤의 옥상에 다다라있었다. 언뜻 보기엔 아까와 다름없어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묘하게 상황이 어지럽게 느껴지는 가운데, 비상은 드디어 구석에 주저앉아있는 강산을 찾을 수 있었다. 강산은 고개를 숙인 채 주저앉아있었지만, 저 모습으로 볼 때 표정은 안 봐도 뻔했다. 강산은 구석에 쪼그라앉은 채, 땅에 구멍이라도 파고 싶단 듯이 그냥 가만히 있었다.
비상은 물론, 다른 이들도 저런 강산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일 터였다. 강산을 생각해서인지, 붉은 밤 팀원은 강산한테 아무 말도 안 걸고 있었다. 그러한 마음씀씀이 자체는 무척 좋은 일이었지만, 덕택에 지금 강산은 무척 외따로 떨어져있는 것처럼 보였다.
주위에서 들리는 말에 따르면 오늘 강산은 어딘가 좀 이상했다는 듯했다. 샌드백이라고 할까. 나사가 풀린 느낌이라고나 할까. 비상은 놀이를 할 때 강산을 안 봐서 잘 알 수 없었지만, 듣기로는 그런 모습이었다고 했다.
물론 그런 모습을 비상이 쉽게 떠올릴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이건 비상뿐 아니라 누구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하지만 비상은 놀이를 하기 전 강산의 모습을 아직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때 모습을 생각하면, 주위에서 들려오는 말도 이상하진 않았다.
그 때, 드디어 강산이 입을 뗐다. 비상이 여기에 다다른 지 5분쯤 지난 뒤의 일이었다.
“아 신발. 진짜 나 같은 놈은 정신이 나갔어. 경기 감도 잃어버려놓고선 혼자 신나라 놀고 있었으니…진짜…”
그 목소리 역시, 강산을 알고 있던 사람이라면 믿기지 않을 만큼 힘이 죽 빠져있었다. 사실 지금 강산은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평소 강산과 대보면 패기부터 아주 달랐다.
그런 강산이 걱정되었는지, 이번엔 도진이 조심스레 다가가 이런 말을 걸었다. 주위에서 하는 말을 들어보니, 도진은 공부하는 것도 까먹고 강산의 놀이를 지켜봤던 듯했다.
“형도 기운 좀 차리세요. 제 눈에 형은 여전히…”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뒤에도 강산은 한숨을 한 번 크게 쉬었다. 그리곤 여전히 힘이 없는 목소리로 이런 말을 내뱉었다.
“그게 아니니까 지금 이러고 있는 거잖아. 나는 항상 놀 때 최선을 다해서 놀려고 했는데, 이번엔 그게 안 됐어. 진짜 거짓말 빼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고. 이건 내가 지금까지 실력도 안 되는데 상대방 비웃고 있었다는 뜻이잖아. 그딴 건 자기 잘난 줄 아는 바보나 하고 있는 짓이라고. 아, 젠장. 자꾸 욕 나와서 미치겠네. 어우…”
강산은 그 말과 함께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강산이 그렇게 자랑하는 무기인 쌍절봉 역시 옆에 축 늘어진 듯 굴러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이걸 보면 이번엔 정말 마음이 단단히 가라앉은 듯했다. 주위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고 다시 강산을 가만히 내버려두고 있었다.
결국 그렇게 가만히 있던 강산은, 잠시 뒤 옆에서 파랑이 말을 걸자 뭐라 중얼댄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말도 그렇지만, 비상이 볼 때 지금 강산은 거의 살아있는 시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일어선 것까진 좋았지만 술마신 것처럼 비틀대는 바람에, 결국 연소자 몇 명이 옆에서 부축할 수밖에 없었다.
“저 놈이 저럴 수도 있구나…”
그걸 멀찍이서 보던 잎새는 그런 말과 함께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다들 앉았지?”
잠시 뒤, 고깃집에 다다른 뒤 자리를 잡고나서 의영은 주위를 둘러보며 이렇게 물었다. 전에도 온 바 있는 고깃집이었지만, 다들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곳에 와서 가장 좋아해야 할 사람은 강산인데, 그 강산은 축 처진 채 뭐라 말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의영은 아까 전부터 지금까지 강산한테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다만 지금처럼, 강산 바로 맞은편에 가만히 자리잡았을 뿐이었다. 사실 그 자리는 다들 아무 말도 없이 비워놓던 곳이었다. 따로 뭘 약속한 건 아니지만, 다들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 뒤, 의영은 드디어 자기 눈앞에서 고개를 숙인 강산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곤 바로 옆에 있던 소주병을 연 뒤, 강산한테 가까이 가져다댔다. 강산이 소주잔을 내밀자, 의영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거기에 술을 가득 따랐다. 그렇게 잔이 다 차자, 강산은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걸 바로 비워버렸다.
그다지 술자리에 자주 가지 않는 비상이었지만, 지금 이 자리가 무척 무겁단 것만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이라면 뭐라도 말을 걸려 하겠지만, 의영은 그런 내색은 전혀 안 보인 채 그저 강산 앞에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보면 묘하게 신기한 관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비상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다들 이런 분위기에 휩쓸린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였다.
“다들 뭐해? 먹어야지. 언제까지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을 거야? 내일이랑 모레도 놀이가 있잖아. 계속 괴로워하고 있는 것도 몸에 해롭지 않겠어?”
의영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다들 이제 정신을 차린 듯 하나둘씩 수저를 손에 들기 시작했다. 이제야 음식을 시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가운데, 비상이 앉은 테이블에서도 드디어 가벼운 이야기가 오갔다. 그걸 가만히 보던 비상은, 저 쪽에 멀찍이 앉은 승지가 의영한테서 고개를 아주 돌리고 있었단 걸 알아챘다. 물론 승지 역시 방금 의영이 한 말과 행동은 봤을 터였다.
그 때, 다들 어쩔 줄 모를 때도 가장 편한 모습이었던 의지가 아직도 가만히 강산 앞에 앉은 의영을 보며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오늘따라 의영이가 무지 믿음직스러워 보인다. 그지?”
“누나도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해지는 걸요 뭘.”
“야, 너 뭐냐?!”
의지의 말에 여기에 없을 터인 누군가가 대답하자, 그런 말을 내지른 잎새를 비롯해 테이블에 앉은 모든 이들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끼어든 대한이 민망하단 듯 뒷통수를 긁적이고 있었다. 의지는 다 알고 있었는지, ‘에이~.’라 말하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
저런 모습도 참 의지답다는 생각을 하며, 비상은 가볍게 이런 말을 던졌다.
“갑자기 여긴 왜 온 거지?”
“그럼 제가 여기있는 게 이상한 거 같잖아요. 형도 참.”
대한은 찔리기라도 하는지, 그런 말과 함께 손을 내저었다. 그 대한의 말에 따르면, 자기도 강산이 하는 걸 가까이에서 지켜봤는데, 어쩐지 보는 자기가 더 울분이 터지더라는 것이었다. 전에 강산과 엉뚱하게 한 판 붙은 격이 된 친구지만, 그 땐 그랬던 게 전혀 안 떠오르고 그냥 뭔가 화가 나더라고 했다. 강산이 혼자 주저앉아있을 때 대한도 뭐라 소리치고 싶었지만, 지금 자기가 그러는 것도 이상하니까 어떻게든 참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거기까지 듣던 잎새는 킬킬대며 이런 말을 꺼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데. 이 놈.”
“어유. 형까지 이러시면…”
대한이 그렇게 복잡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드디어 아까 주문한 음식이 비상 일행의 테이블에 놓였다. 대한도 자기 자리로 돌아가야겠다 생각했는지, 이런 말과 함께 저 너머로 사라졌다.
“강산이 형한테 제가 이런 말했다고 하지 마세요. 진짜.”
“나중에 말해야지. 크하하.”
물론 잎새는 당연하다는 듯 옆에 앉은 별밤한테 그렇게 속닥댔다. 저렇게 말하고있긴 하지만, 비상은 잎새가 정말 강산한테 이걸 말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 형은 원래 저런 모습인 것이다. 대한의 마음을 잎새도 모를 리 없었다.
한편, 저 너머 연소자 쪽으로 넘어간 대한은 거기서 또 뭐라 시끄럽게 얘길 나누고 있었다. 대체 저기서 무슨 얘길 나누는 건지, 여기 있을 때하곤 댈 수도 없을 만큼 목소리를 높이는 게 들렸다. 자리 자체는 멀리 떨어져있어서 무슨 이야기인진 짐작할 수 없었지만.
그 때였다.
“다들 뭐하고 있었어?”
갑자기 그런 목소리와 함께, 이번엔 파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손에 들린 병들로 볼 때 잠시 술이라도 가지러가다 여기에 들른 듯했다. 잎새는 이 때다 싶었는지, 항상 하던 대로 장난스럽게 이런 대답을 했다.
“뭐, 대한이의 헛소리를 듣고 있었지.”
“아깝네. 나도 있을 걸.”
그 말과 함께, 파랑은 방금 전까지 대한이 있던 틈새에 자리잡았다. 아마 바로 근처에 강산이 있어서 잠시 들르고 싶었던 듯했다.
그렇게 잠시동안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별밤이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을 꺼냈다.
“사실은 방금 전까지 쟤 얘길 하고 있었거든.”
“그랬구나.”
별밤이 눈짓으로 가리킨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강산이었다. 파랑도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늘어져있는 강산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상이 지금 보고있는 게 맞다면, 지금 강산은 그 좋아하는 술도 손에 안 대고 있었다. 강산 앞에 앉은 의영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걸 보고 이때다 싶었는지, 잎새는 파랑을 보며 이런 말을 던졌다.
“근데 파랑이 넌 강산이랑 자주 붙어다니잖냐. 뭐 짐작가는 거 없냐?”
그 말에 파랑은 잠시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더니 방금 전보다 목소리를 낮추고선 천천히 이런 말을 꺼냈다.
“강산이는 지는 걸 싫어하거든.”
“뭐?”
“솔직히 강산이가 지는 거 좋아할 거 같진 않잖아. 그지?”
잎새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파랑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 말엔 다들 공감하는지,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파랑은 그걸 보며 다시 입을 뗐다.
“그러니까 강산이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 걸 싫어한단 말이야. 자기한테 충실하지 않으면 그걸 죄라 여기거든.”
“그건 또 뭔 소리냐?”
“그러니까 강산이는, 자기가 이거다싶은 거엔 깊이 빠져야하는 성격이야. 좋아하는 거에 자기가 깊이 안 빠지는 거 무지 싫어하거든. 술 엄청 마시는 것도 그것 때문이라 그러더라구. 그렇게 안 마시면 술을 마신 거같지 않대.”
그 말을 듣던 잎새는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파랑을 보며 반쯤 얼빠진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그럼 그 자식이 너랑 어울리는 것도 성격이 달라서 그런 거냐?”
“그런가?”
파랑이 그렇게 킬킬대자, 잎새도 ‘나 참’이라며 같이 킬킬댔다. 가만히 생각하면 저 둘은 성격이 아주 다른데(물론 비상과 강산도 무척 다르지만)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라 볼 수 있었다.
그 말을 가만히 듣던 별밤이 파랑한테 고개를 돌리며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술을 마신 거같지 않단 건 무슨 말이야?”
파랑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조금 뜸을 들인 뒤, 이윽고 이렇게 대답했다.
“강산이는 술을 무지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제대로 안 마시면 술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여기나 봐. 그래서 한 번 마시면 제대로 마시고 싶다 그러더라구. 자기보고 주당이라 그러는 것도 그것 때문일 거야.”
“강산이 쟤도 참 독한 놈이구나. 나 참.”
이 말에 질렸는지, 별밤은 그런 말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게 그렇게 재밌었는지, 파랑은 다시 한 번 킬킬대며 옆에 있던 안주를 집어먹었다.
“강산이는 술을 진짜 좋아하거든. 형이 잘하는 건 웬만해서 강산이가 잘 안 하려 그러는데, 형도 좋아하는 것 중 거의 유일하게 자기도 좋아하는 거라 그러더라구.”
파랑은 강산과 어울리며 같이 술을 마실 때가 많은데, 그 때마다 술에 관한 집착이 유별나서 물어보니 그렇게 대답하더라고 했다. 강산과 자주 어울리는 파랑이니, 그 말은 무척 믿을 만했다.
그 말을 뒤로 파랑이 떠나가자, 자리는 다시 조용해졌다. 잎새도 파랑이 한 말에 놀랐는지, 한참 뒤에야 이런 말과 함께 자기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강산이 저 놈 보기보다 더 무식했구나. 어유.”
사실 잎새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대개 그렇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사실 여기에 있는 붉은 밤 팀원 중, 아마 파랑이 가장 강산을 자세히 알고있을 터였다. 비상은 그다지 자주 보지 못한 느낌이 들었지만, 저 둘이 붙어다니는 건 무척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파랑이라면 강산의 이런저런 모습을 알고 있어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시간이 지나가고 있을 때, 잎새가 저 너머를 보더니 다시 한 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까보다 훨씬 더 놀란 표정이었다.
“파랑이 저 놈은 강산이한테 옮았나 봐. 오늘 술병을 끝까지 비울 기세인데?”
다들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소주병이 너덜대는 것처럼 보일 만큼 술잔을 마구 다루는 파랑이 눈에 들어왔다. 비상은 파랑에 관해 자세히 알진 못하지만, 저렇게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라는 인상은 없었다. 물론 이렇게 말해도 원래 강산만큼 막 마시는 건 아니고, 그저 평소보다 더 심하게 술잔을 입에 대는 정도였지만.
“요즘 들어 매번 같이 있는데 뭘. 원래 파랑이도 주당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럼 주당끼리 뭉친 건가? 이거 참 재앙인데.”
별밤이 이렇게 거들자, 잎새는 킬킬대며 다시 술잔을 들었다. 저 낄낄대는 모습을 보면, 그래도 잎새는 강산한테 파랑이 있단 사실에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인 듯했다. 평소 낄낄대던 것과 묘하게 느낌이 달랐던 것이다.
잎새는 여전히 아무 말도 안 한 채 축 늘어져있는 강산을 흘낏 보다가, 비상을 보며 이런 말을 던졌다.
“비상이 넌 안 봐서 모를 텐데, 강산이 저 놈 오늘은 진짜 이상했어. 상대가 파란 밤에서 그렇게 센 사람도 아닌데 말이야. 완전 넋이 나가있었다니까. 저 놈 원랜 절대 그런 놈 아니잖냐. 알지?”
“그렇지.”
“어쩌면 강산이 쟤도 이미 알고있을 거야. 파랑이 말대로 그런 데 민감하면 두말할 것도 없고. 솔직히 난 저 놈한테 그런 구석이 있단 거 전혀 몰랐다. 파랑이는 진짜 강산이랑 자주 붙어다니나 봐.”
잎새의 말에, 별밤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상은 그걸 가만히 보다가, 잎새가 따라준 술을 가만히 입에 댔다. 술맛은 딱히 신경쓰지 않는 비상이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보통 때보다 조금 더 쓴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비상이 술잔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비상아. 잠깐 괜찮겠냐?”
그런 말과 함께 누군가 비상의 어깨를 툭툭 쳤다. 뒤를 돌아보니, 거기엔 언제 여기에 왔는지 붉은 밤의 주장인 의영이 가만히 서있었다. 아까 전만 해도 강산 앞에 앉아있지 않았던가. 자기한테 무슨 볼일이지, 란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자리에서 일어난 비상은, 그대로 의영을 따라 근처 건물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 채.
그렇게 옥상에 올라온 둘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을 꺼내는 게 더 불편한 분위기였기에, 비상은 한동안 아무 말도 꺼내지 않고 가만히 먼 곳만 바라보았다. 의영도 같은 생각인지, 이런 침묵이 몇 분 넘게 이어졌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서일까, 비상은 아까 전 의영이 강산한테 술을 부어주던 걸 떠올렸다.
잠시 그런 식으로 시간이 지나가다, 이윽고 의영이 천천히 입을 뗐다. 꽤 가까이 있었는데도, 의영한테선 술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다.
“비상아. 그냥 하고싶은 말이 있는데 들어줄래?”
“그러세요.”
비상이 그렇게 대답하자, 의영은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뜸을 들이다, 의영은 드디어 입을 뗐다.
“이런 말하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만, 난 네 멘토는 되지 못할 거 같다.”
정말로 뜬금없는 말이긴 하지만, 비상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의영은 잠시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지? 뜬금없는 것도 작작 해야 되는데. 그런데 오늘 강산이 일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더라.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누구를 돌봐주고 이끌어줄 만한 사람이 지금은 무척 어렵단 걸.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도, 자기가 되는 것도 말이야.”
비상은 잠시 그 말을 생각해봤다. 사실 비상은 의영을 의지할 만한 좋은 형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건 다른 연장자들도 비슷한 생각일 터였다. 의영보다 연상인 의지를 빼고.
비상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의영은 말을 이어나갔다.
“솔직히 요즘 안 힘든 사람이 어딨냐. 다들 힘들다고 말하지. 내가 이래서 힘들다고 말하면 다른 사람들도 ‘나도 힘들다’라 말하는 세상이잖냐. 남을 돕는 것도 그렇고, 누구 힘들단 말 들어주고 이끌어줄 여유 자체가 없는 거야. 어떻게 보면 나도 그렇다.”
의영은 말을 너무 많이 했다 여겼는지,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벌써 날짜가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었다. 그리 높은 옥상은 아니었지만, 여기저기서 모여드는 불빛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나도 너희들이 힘들면 도와주고 싶고 이것저것 얘기해주고 싶은데, 솔직히 내 앞길 챙기는 것도 벅차더라. 나도 알아. 내가 그럴 그릇이 못된단 건. 하지만 너희들보단 오래 살았으니 조금은 그렇게 하고 싶은데…나한테 그럴 힘이 없단 걸 많이 느낀다.”
비상은 여전히 그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의영은 그런 비상한테 마음이 놓였는지, 아까보다 훨씬 더 편한 목소리로 하던 말을 이어갔다.
“살면 살수록 나 챙기기도 버겁단 생각을 많이 한다. 남 생각할 여유가 정말 없더라. 이건 사람에 따라 다를지도 모르지만, 사람한텐 꼭 풀어야 하는 숙제 비슷한 게 있는 거 같아. 자기 자신이라는 숙제 말이지. 학교에서는 사람한테 이런 숙제가 있단 것도 전혀 안 알려주더라. 물론 급한 사람하고 안 급한 사람이 따로 있겠지만, 난 급한 사람이었나 보다.”
여기까지 말한 뒤, 의영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상도 아무 말 없이 그저 먼 곳만을 가만히 바라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의영이 혼잣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지막하게 입을 뗐다.
“난 말이지, 자기를 만족시킨 다음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멘토 자격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자기를 대충 다루면서 남을 도우려는 사람은 안 돼. 결국 언젠간 자기자신과 마주보게 되거든.”
그리곤 이번에야말로 비상을 돌아보며, 확신에 찬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 생각엔 의지 누나가 그런 거 같다.”
그 뒤, 의영은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하고싶은 말을 다 털어놓기라도 했단 표정이었다. 잠시 생각하다, 비상은 입을 뗐다.
“담배 피우고 싶으세요?”
“비상이 니가 먼저 그런 말하게 해서 미안하다.”
자기 속내라도 들킨 듯한 표정으로, 의영은 쑥쓰럽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이걸 보면 의영은 지금 몹시 피곤한 듯했다.
“형도 피곤하신데 오늘은 쉬시죠.”
“나도 내려가는 게 낫겠는데. 비상이 넌 여기 죽 있어. 괜히 불러서 미안했다.”
정말로 미안하단 표정을 지으며, 의영은 비상한테서 등을 돌렸다. 비상은 그 등을 가만히 보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의영이 여기 있고자 하면 비상이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의영은 이런 식으로 남을 배려할 때가 여러 번 있었던 것이다.
그 뒤, 비상은 혼자 생각에 잠겼다. 뭔가 깊이 생각한 건 아니지만, 오늘 있었던 일을 속으로 몇 번이고 되돌아봤다. 강산이 졌다는 것 자체는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닌데, 어쩐지 비상은 거기에 관해 생각하고 싶었다. 자기도 뭘 생각하고 싶은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아까 비상이 들은 말에 따르면, 의영은 자기가 맏형 노릇을 하는 데 맞지 않는 사람이라 여기는 듯했다. 물론 그 누구도 의영한테 맏형 노릇을 떠넘기려 하진 않았다. 다만 의영이, 자기 스스로 멘토, 즉 ‘맏형’이 되고 싶다 여기고 있었던 듯했다.
그렇게 비상이 혼자 옥상에 서서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뭐지?”
갑자기 울린 핸드폰을 손에 쥐며 비상은 혼잣말을 했다. 화면을 보니, 이번엔 강산의 전화였다. 비상이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받자, 대뜸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밖에 있냐?”
“그런데 왜?”
“어디냐? 그냥 같이 좀 있자.”
그 말을 듣자, 비상은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그걸 말하려고 전화했단 말인가. 이 점은 참 바뀌질 않는다니까, 란 생각과 함께, 비상은 자기가 있는 곳을 알려줬다.
그 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기다렸냐?”
참으로 빨리 강산이 옥상 문을 열고 나타났다. 강산은 아까보단 낫지만 그래도 좋진 않아보이는 표정이었다. 일단 물어는 봐야겠단 생각에, 비상은 가볍게 이런 말을 건넸다.
“또 무리하는 거 아냐?”
“시꺼.”
그렇게 말하면서도, 강산은 비상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걸 볼 때, 적어도 저런 말을 할 만큼은 기운이 남아있는 듯했다. 전에 강산은 술에 취해 여러 모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지만, 지금은 생각보다 훨씬 멀쩡해보였다. 그런 생각도 들어서 비상은 다시 말을 건넸다.
“지금은 멀쩡한가 보지?”
“그 때만큼 많이 안 마셨어. 이 자식아.”
강산이 그렇게 투덜대는 걸 듣고, 비상은 아까 기억을 되살려봤다. 그러고 보니 비상은 자세히 보지 않았지만, 오늘 강산은 생각보다 그리 마시지 않은 듯했다. 비상이 보기에, 적어도 취한 느낌은 아니었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강산은, 다짜고짜 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이 놀이만은 대충 하기 싫었다.”
강산의 말에 비상은 먼 곳을 보며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강산도 마음이 놓였는지, 천천히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좋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건 절대 형이 안 할 거니까 그랬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강산은 비상 옆으로 다가와 밤중인데도 시끄러운 아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보고 있는 데는 아래였지만, 강산은 비상만큼이나 먼 데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솔직히 형도 하는 걸 내가 해서 무슨 재미가 있겠냐. 다 형이 잘하는데. 운동이고 공부고 솔직히 어릴 때부터 형한텐 못 이기겠다 생각했거든. 그러니까 형이 안 하는 데서는 자기한테 충실하자. 그런 생각을 했어.”
그 말과 함께, 강산은 다시 비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술마신 사람치고는 무척 침착한 말이었으며, 강산치고는 특히 더더욱 침착한 말이었다.
그 말투로 볼 때, 지금 강산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자기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고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그런 일을 겪은 뒤, 강산은 누군가한테 이런 식으로 자기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잠시동안 둘은 아무 말도 없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 높지 않은 건물 옥상이었지만, 주위에 높은 건물이 그다지 없었기에 먼 곳도 어느 정도 내다볼 수 있었다. 강산도 오늘 하고싶은 말이 많겠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이(그리고 강산치고는 드물게) 멀리 있는 풍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쩌면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라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깊은 밤으로 접어들 때쯤, 강산은 다시 입을 뗐다.
“이왕하는 거 이런 말도 좀 들어주면 안 되냐?”
“그럼 해 봐. 들어주게.”
“난 말이야. 뭘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게 세상에서 가장 싫다.”
비상이 대답하자 강산은 바로 이런 말을 꺼냈다. 그리곤 다시 생각에 잠기다가,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형이 뭐든 나보다 더 잘하니까 열받았던 건 사실이야. 지금도 절대 못 이기겠단 생각을 하고. 그치만 그렇다고 평생 형을 원망하며 사는 건 진저리가 날 만큼 싫더라. 그런 식으로 살라면 비상이 넌 견딜 수 있겠냐? 옛날부터 죽 생각했는데 난 못 그러겠다.”
강산은 여전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껏 강산한테선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사실 비상은 이강산이란 사람을 안 지 고작 몇 달 조금 되었을 뿐이었다.
“형보다 잘하는 게 많든 적든 무슨 상관이냐. 그런 것 때문에 이강산이란 놈이 썩어빠지는 게 더 문제지. 적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거, 이것만은 잘하고 싶은 덴 온힘을 다하고 싶다는 게 내 생각이다. 형도 그렇고 다른 사람 일은 다른 사람 문제지만, 이강산이란 사람의 문제는 내 문제거든. 다른 거랑은 차원이 달라. 중요도가 다르다고.”
사실 비상도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강산이란 사람은, 이런 식으로 자기 마음을 정리할 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강산은 비상이 생각하던 사람과는 조금 달랐다. 물론 지금까지 봐온 강산도 틀린 건 아니었지만, 그게 모든 것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난 자기를 대충 다루는 게 싫어. 자기한테 충실하지 않다고 해야 되나, 아무튼 그런 게 싫더라. 자기가 좋아하는 거 하나 제대로 못한다는 건 자길 대충 다룬단 말이잖아. 적어도 자기한테 그러면 안 되지. 바보같은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난 그렇게 안 하면 내가 나를 봐줄 수 없다.”
거기까지 말한 뒤, 강산은 잠깐 말을 멈췄다. 지금 먼 곳에 눈길을 두는 강산을 보니, 비상은 이 사람이 내가 아는 그 이강산이란 게 묘하게 믿기지 않았다. 강산 자신도 이렇게 진지해진 건 무척 오랜만일 터였다. 오늘 그런 일이 있었기에, 비로소 마주치지 못했던 자기 자신과 마주보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강산은 이제 마음을 정리했는지, 한숨을 크게 한 번 쉰 뒤 입을 열었다. 비상의 착각일까. 강산은 지금 무척 속이 시원해졌단 표정이었다.
“솔직히 비상이 너도 나보다 훨씬 엘리트지만 천재까진 아니잖냐.”
“그래서?”
“형도 그렇고 비상이 너도 그렇고, 솔직히 사람이 무지 좋잖냐. 괜히 속으로 열등감같은 거 가져서 그렇게 좋은 사람들 멀리하기 싫다. 자기가 열등감 있다고 나보다 잘난 놈 무시하면 대체 무슨 재미냐? 너처럼 좋은 놈은 좋은 놈이라고 말하는 게 나한테도 좋은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강산이란 인간은 대충 살면 안 되지.”
비상은 그 말을 들으며, 아까 의영과 나눈 얘기를 떠올렸다. 그 때 의영한테 받은 느낌과 지금 강산한테 받는 느낌은 참으로 비슷했다. 강산 및 의영은 그런 말을 하면 손을 내젓겠지만, 적어도 비상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두 형이라면 몰라도, 난 틀림없이 맏형 노릇은 못 하겠구나.
오래 전부터 그렇게 생각한 것처럼, 비상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는 의영 및 강산보다 더 ‘엘리트’에 가까운 길을 걸어왔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삶에 도움이 되는 건 자기보다 의영과 강산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비상은 원래 자기를 조금 떨어진 데서 바라보는 버릇이 있었다. 자기를 깔아내리지도 않았지만, 칭찬할 데가 없다면 딱히 자랑도 하지 않았다.
그 두 사람이라면 몰라도, 자기는 언제까지고 ‘멘토’는 될 수 없을 것이다.
강산이 자리를 비운 뒤에도, 비상은 한동안 죽 그 옥상에 남아있었다. 그 역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윤비상이란 사람은 원래 그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