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호랑이의 왕과 행복론 1. 첩첩산중인 새로운 현실 (上)

그리고 며칠 뒤.
“…”
낯선 아이들밖에 없는 교실에서, 맹호는 자기소개를 하기 위해 멍하니 서있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자꾸만 두근대는 걸까.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는데, 머릿속은 아주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자기소개해야지?”
“아, 아, 안녕하세요. 김맹호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자기 ‘목소리’가 무척 어색하게 들리는 걸 애써 무시하며, 맹호는 그렇게 인사를 끝마쳤다. 좀 더 인상을 펴면 좋을 텐데. 안 그래도 자기 인상이 사람으로 둔갑한 호랑이답게 날선 느낌이기에, 맹호는 다른 아이들이 자기를 괜히 멀리할까봐 마음이 불안해졌다.
이런 겉모습에 목소리까지 낮고 두꺼운 편이니, 이 아이들도 자길 괜히 무서워하는 게 아닐까.
이미 산골에서 학교를 다니며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기에, 맹호는 그런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좀 나아지긴 했지만, 자기가 무척 눈에 띄는 존재감을 가졌단 건 맹호 자신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복을 입으면 고등학생으로 알아보는 사람 자체가 드문 편이고, 몸집도 좋으며 키도 또래 남학생들보다 눈에 띄게 컸다. 게다가 산골에서 만난 모 친구의 말에 따르면 ‘인상 자체가 호랑이 그 자체인’ 날카로우면서도 무거운 인상 역시, 맹호가 눈에 띄기엔 아주 충분했다.
자긴 과연 이 큰 학교에 무사히 적응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묻지만, 맹호한테는 역시 자신이 없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꼬리’를 흔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 무심결에 엉덩이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물론 사람으로 둔갑한 맹호한테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맹호는 산골에서도, 불안할 때면 곧잘 ‘있지도 않은’ 꼬리 쪽으로 몸을 돌리곤 했다.
어떡하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버릴까.
맹호의 등으론 식은땀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서서, 선생님의 말이 끝나길 기다리는 것밖엔.

나라의 높은 분들한테 들켜 이 도시로 오기 전까지, 맹호는 산골에서 사람으로 둔갑해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사람세상에서 사람 모습으로 지냈던 건 아니다. 사실 맹호가 사람으로 둔갑해서 이렇게 죽 지내게 된 건 고작 한두 해 정도였다.
맹호는 이 세상에 단 한 마리 남은 ‘호랑이의 왕’이었다.
‘호랑이의 왕’이란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온 호랑이의 핏줄 중 하나인데, 재주만 넘으면 자유롭게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는 영물이었다. 옛날만 해도 기운이 강한 동물이라면 거의 대다수가 사람처럼 생각하며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었지만,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제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는 동물들은 까치처럼 머리가 아주 좋지 않은 이상은 매우 드물어졌다. ‘호랑이의 왕’은 그 몇 안 되는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는’ 동물 중 하나였다. 다른 평범한 호랑이들조차, 그러한 힘은 이제 꿈도 꿀 수 없어진 것이다. 어딘가에서 도술이라도 배워오지 않는 이상.
게다가 ‘호랑이의 왕’은 사람으로 둔갑할 수만 있는 게 아니라, 보통 동물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특별한 힘도 쓸 수 있었다. 이런 힘을 쓸 때 ‘호랑이의 왕’의 눈동자는 털색과 같은 금빛으로 바뀌며, 보통 때보다 훨씬 더 강한 기운을 뿜어낸다고 맹호는 아버지한테 들은 적이 있었다. 자연히 ‘호랑이의 왕’은 산에 사는 동물 모두는 물론, 이 땅을 지키는 ‘신’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당연히, 그 핏줄을 잇는 마지막 존재인 맹호한테는 ‘호랑이의 왕’이란 이름에 걸맞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제 이 땅에 살던 호랑이들은 대다수가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아주 기나긴 힘든 세월이 지나, 호랑이들은 사냥당하거나 살 길을 찾아 북으로 넘어가고, 결국 ‘호랑이의 왕’의 피를 타고난 맹호 집안만이 이 땅에 남아있게 되었다. 옛날에는 같은 핏줄을 타고난 ‘형제’도 있었다 전하지만, 지금 이 땅에 ‘호랑이의 왕’의 핏줄을 타고난 존재는 맹호 한 마리밖에 없다.
호랑이의 왕이라는 핏줄은 한 부모당 단 한 마리의 자손한테만 물려줄 수 있는 것이기에, 맹호의 형제들은 보통 호랑이들처럼 살다가 보통 호랑이들처럼 저 세상으로 떠났다. 하지만 ‘호랑이의 왕’인 맹호는 보통 호랑이의 두 배 이상 장수할 수 있었기에, 역시 그런 삶을 산 아버지 곁에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오랫동안 목숨을 이어가는 법. ‘호랑이의 왕’이 가져야 할 긍지. 아버지는 오래 전에 돌아가시고 없지만, 맹호는 아직도 아버지가 가르쳐주셨던 것들을 거의 모두 떠올릴 수 있었다.
비록 ‘호랑이의 왕’으로서의 힘은 그 뒤로 거의 시험해보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워낙 강한 ‘호랑이의 왕’이었기에, 맹호는 차마 그 힘을 시험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를 하늘로 보낸 뒤, 맹호는 혼자 산길을 헤매며 자라왔다. 산줄기에서 산줄기, 골짜기에서 골짜기를 떠돌아다니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자기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호랑이의 왕’의 핏줄을 어떻게 이어갈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살기 위해, 그리고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맹호는 깊은 산 속만을 골라서, 사람으로 둔갑하지 않는 한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호랑이의 왕’의 체질만을 믿으며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언제까지 이런 삶이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가 목숨을 잃은 이 곳을 떠날 수 없어서, 맹호는 몇 년 동안이나 강원도 언저리를 떠나지 못했다. 물론 말이 통하는 존재와 만나지도 못했다. 과연 자기말고 다른 호랑이가 이 땅에 얼마나 남아있는지도 의심스러울 뿐더러, 자기처럼 ‘영물’에 가까운 힘을 지닌 짐승은 더더욱 찾기 힘든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맹호한테, 재작년 말 운명같은 만남이 찾아왔다.
우연히 산길을 걷다가 자기 힘을 되짚어볼 겸 사람으로 둔갑하던 맹호를, 자기가 걷는 길만큼이나 깊은 산골에 살던 중학생 여자애가 보고 만 것이다. 그것도 한숨돌릴 겸 잠깐 사람으로 둔갑했다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
지금 생각하면, 그 중학생 여자애, 솔이한테 자기 정체를 들킨 건 정말 행운이었다. 솔이가 아니었으면 맹호는 자기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뭔지도 알지 못했을 거고, 이렇게 ‘사람 친구’를 사귀는 즐거움도 알지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동물친구, 까치 역시 알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솔이는 호랑이가 사람으로 둔갑한다는 말도 안 되는(물론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지만) 걸 자기 눈으로 직접 봤는데도, 놀라거나 겁먹긴커녕 오히려 맹호를 무척 자연스럽게 받아주었다. 분명 보통 사람인 솔이 눈에 호랑이인 자기자신은 무척 어색한 것투성이였을 테지만, 오히려 솔이는 그걸 무척 재밌다고 여겼다. 맹호는 솔이한테 ‘사람세상’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익혀나갈 수 있었다. 글씨를 쓰는 법도, ‘교과서’를 푸는 방법도, 밥을 먹는 방법도, 맹호는 솔이한테서 자세하게 배워나갔다.
그래서일까. 솔이랑 맹호는 만난 지 몇 달도 안 돼서 무척 친한 사이가 되었다. 산골에서 살아 친구도 많이 없는 솔이한테, 맹호는 여러 모로 좋은 친구였던 모양이었다. 맹호 역시 자기한테 겁내는 모습 하나 안 보이고 자상하게 대해주는 솔이가 좋아서, 긴긴 겨울날을 솔이네 집에서 같이 보내곤 했다. 그리고 이 때, 솔이랑 맹호는 뜻밖의 친구와 만나게 되었다. 우연히 솔이네 집 위를 날고있던 까치가, 맹호의 정체를 눈치채고는 곧장 날아온 뒤 사람으로 둔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친구, 까치는 이 뒤 맹호와 여러 모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맹호 역시 자기말고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는 동물이 또 있었단 데 놀랐지만(까치가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는 경우는 그나마 어느정도 있는 편이었다. 물론 사람이 되고자하는 까치는 무척 드물겠지만), 그래도 자기랑 같은 처지에 놓인 존재가 있단 것 하나만으로 마음이 든든했다. 까치는 맹호처럼 영물은 아니지만, ‘지리산 어디쯤에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는 요술을 가르치는 존재가 있다’는 뜬소문을 듣고 호기심에 다녀갔다가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모양이었다. 그것만으로 ‘호랑이의 왕’만큼 장수할 수 있는 몸이 되었다니. 맹호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무척 신기했지만, 어쩐지 이 친구라면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뒤 솔이가 고등학생이 된 작년 3월, 맹호는 정말 뜻밖의 존재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때 맹호는 솔이가 학교에 가게 된다는 걸 알고 잠시 우울한 상황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맹호는 솔이랑 같이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때 만나게 된 은인 덕분에, 맹호는 솔이랑 같이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꿈같은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부터 죽 맹호를 여러 모로 도와 준 고마운 존재, 환웅이었다. 여기서 환웅이란 옛날부터 전해내려온 그 분을 말한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처럼 이 땅을 다스릴 정도의 힘은 잃은 모양인지, 솔이가 다니게 된 고등학교에서 역사선생님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맹호가 이 땅에 남은 유일한 ‘호랑이의 왕’이었기에, 맹호는 어릴 적부터 환웅과 깊이 알고 지내왔다.
어쨌든 덕택에 맹호는 몇 달 늦게나마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됐고(사람세상에서 자연스레 행동하기 위해 집에서 공부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참고로 까치는 솔이랑 거의 동시에 입학할 수 있게 됐다), 솔이랑 같이 학교에서 즐거운 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학교생활이 항상 즐거웠던 건 아니었지만, 맹호한테는 솔이랑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맹호는 이 시간이 죽 이어지길 몇 번이고 바랐다. 결국 2학년이 되기 일주일 전, 뜬금없이 나타난 나라의 높은 분들한테 들켜 홀로 도시에 오게 됐지만.
…그래도 까치가 만날 자길 놀려대는 소리를 안 들으니 조금 속시원하긴 하네.
맹호는 산골에서 학교를 다닐 때, 항상 자기 옆에 붙어다니던 까치한테 반쯤 놀림당하곤 했다. 물론 놀리는 까닭은 하나밖에 없었다. 까치는 항상 “넌 아무리 봐도 호랑이답지 않다니까. 같은 반 애들이 들음 웃겠다. 니가 호랑이라 그러면. 크하하하”라며 맹호를 괴롭혔던 것이다. 원체 정신이 사납고 촐랑대기 좋아하는 주제에 키는 쓸데없이 커서 눈에 참 잘 띄는 까치는, 학교에서도 다른 애들 생각은 안 하고 맹호를 그렇게 마구 놀려대곤 했다. 저런 놈이 커서 어른이 되면 뭐가 될까. 맹호는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까치를 그렇게 말하는 걸 귀에 딱지가 얹히도록 들은 바 있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 날도 까치는 정신이 나가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도 아닌 학교에 야한 책(물론 정말 위험한 건 아니었지만)을 들고 등교해선 맹호한테 마구 자랑해댔다. 그걸 들은 맹호는 당연히 어이가 없어서, 칭찬해달라는 것처럼 싱글벙글대고있는 까치한테 이런 말을 했다.
-야, 너, 넌 지금이 어떤 시댄데 책을 들고 와?! 그런 건 조용히 텔레비전이나 뭐 그런 데서…
아무리 맹호라 한들, 한 해동안 사람세상에서 지내고 있으면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는 쓸 일이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한테 배운 거나 여기저기 산천을 돌아다니면서 본 걸로, 이 세상에서 텔레비전이란 게 어떤 일을 하는지 정도는 진작 알고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컴퓨터나 뭐 그런 걸로 그렇고그런 걸 볼 수 있단 사실도, 맹호는(까치 덕분에)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까치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 갑자기 맹호한테 이렇게 마구 물어대기 시작했다.
-어유. 그럼 우리 맹호도 본 적이 있구나? 컴퓨터로 그…
-아냐! 대, 대체 무슨 소리야?!
물론 맹호는 까치한테 그런 걸 들었을 뿐이지, 실제로 그렇게 하진 않았다. 그야 관심이 없었다면 정말로 거짓말을 한 게 되겠지만, 그래도 맹호는 자기랑 다른 ‘종족’한테 그런 마음을 품는 건 좋지 않다고 스스로를 타일렀을 터였다.
그런데, 저 놈은 그 때 대체 무슨 소리를 해댔단 말인가. 게다가 그걸로 끝난 게 아니라, 며칠 동안 그 얘길 끝까지 우려먹었다. ‘오늘 우리 맹호, 밤새 잠도 안 자고…’란 식으로. 당연히 맹호는 머리가 지끈지끈대는 걸 참으며, 그런 말이 나올 때마다 까치를 흠씬 두들겨주곤 했다. 이거 말고도 참 별의별 일이 다 있었지만, 맹호는 그 때마다 나름대로 맞는 말인 까치의 말에 대답해주는 대신 이런 식으로 두들겨패는 걸 좋아했다.
물론, 이젠 다시 겪고 싶어도 못 겪을 일이지만.
이젠 다른 까닭으로 어깨까지 축 늘어뜨린 채, 맹호는 점심을 혼자 먹은 뒤 몸을 일으켜 미리 연락받은 교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젠 지나간 옛일에 자꾸 마음이 가는 걸 억지로 꾹 누르면서.

“그래서, 저희…라고 해야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떻게 대해드리면 좋을지 알 수가 없으니…”
“아, 네, 그러시겠죠. 물론 저도…”
잠시 뒤, 맹호는 다른 곳도 아닌 교장실에서 높은 분들과 같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말할 이야기는 뻔하다. 맹호가 여기에 왜 있는가. 그리고 앞으로 여기서 어떤 삶을 보내게 될 것인가였다.
어쨌든 자기만큼 당황하는 높은 분들과 얘기해보니, 관계자들도 자기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굉장히 당황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솔이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달랐을 뿐이지, 오히려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나오는 게 훨씬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천만다행히도, 맹호한테는 환웅이 있었다.
물론 환웅은 이제 날씨를 주관하는 것처럼 커다란 힘을 갖고있진 않지만, 대신 ‘맹호를 도와줄 만큼 작은’ 힘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환웅은 까치한테 연락을 받자마자 곧장 자기 힘으로 한국민속협회 비슷한 가짜 단체를 만들어서, 높은 분들께 대충 상황설명을 꾸며냈다. 이 호랑이는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는 마지막 짐승이니 소중히 다뤄야 한다고. 만약 소중히 대하지 않으면 이대로 영영 씨가 마르고 만다고. 사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긴 했지만, 환웅은 맹호를 위해서 ‘호랑이의 왕’과 같은 몇몇 얘기는 아주 자연스럽게 빼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덕분에, 맹호는 나라의 도움으로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도시에서 학교생활을 보내게 된 것이다. 만약 환웅이 없음 어땠을까. 맹호는 그 생각만 해도 침이 마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데서 혼자 학교생활을 보내야 한다니, 이렇게 힘든 일이 또 있을까.
그 생각을 하자, 맹호는 다시 가슴이 콱 막히는 걸 느꼈다. 높은 분들은 맹호가 자기들 눈에 띄는 곳에 있어줬으면 해서인지, 학교 근처에 아파트를 하나 마련해놓고 거기에서 지내달라고 맹호한테 부탁했다. 맹호도 그 마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점은, 환웅이 ‘지금 힘으로는’ 더 이상 끼어들 수 없는 곳이었다.
“일단 들켰는데 어쩌겠니. 넋이 빠져있던 네 잘못도 크다. 어차피 네 아버지도 ‘호랑이의 왕’은 사람세상에 녹아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니.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는 존재라면, ‘왜 자기가 이런 존재인 건가’란 생각은 한 번 해야 한다고. 이번 기회에 혼자 잘 생각해봐라. 어쩌면 네가 호랑이랑 사람을 잇는 존재가 될 수도 있지 않겠어?”
환웅이 이렇게 말했던 걸, 맹호는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맹호한텐 이만큼도 자신이 없었다. 과연 자기가 뭘 할 수 있을까. 자긴 ‘호랑이의 왕’이란 이름에도 한참 모자란 존재인데.
하지만 그래도 시간은 흘러간다.
맹호 역시, 자기가 놓인 현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 일주일동안, 맹호는 어떻게 해서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애썼다. 물론 그게 쉽게 될 리는 없었다. 맹호한테는 아직도 사람세상이 너무나 아득하게 느껴졌고, 특히 ‘도시’는 더더욱 그랬다. 그나마 어색하지 않게 행동하고 있는 것같긴 했지만, 그래도 이걸로는 한참 모자랐다.
이런 마음은 높은 분들이 생활비를 대주는 ‘자기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맹호한테 이 아파트는, 여전히 남과 같은 존재였다. 매일 수업이 끝나고 학교 바로 옆에 있는 집에 돌아오면, 맹호는 마치 마음 속까지 텅 빈것같은 느낌을 받았다. 옛날엔 ‘집’에 오면 솔이랑 같이 있을 수 있었는데. 그전까진 솔이네 집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기에, 맹호는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외로움이 북받쳐오르는 걸 똑똑히 느꼈다. 지금이라도 어딘가에서 ‘맹호는 밥 안 먹나?’하면서 나올 거 같단 생각이 들 정도로, 솔이랑 맹호는 무척 가깝게 지냈던 것이다.
게다가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맹호는 전학온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도 여러 모로 ‘주목받는’ 존재였다.
사실 이 역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몸집이 있는데다가 얼굴도 딱딱하고 운동신경도 좋은데, 어딘지 모르게 다른 또래들과 행동이 다른 맹호는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특히 체육시간엔 그게 심했다. 맹호는 원래 호랑이이기에 당연히 몸놀림이 날쌔고 유연했는데, 그게 지금 몸집과 상당히 안 어울리기 때문에 관심을 갖지 말라는 게 더 이상한 말이었다.
그나마 남한테 피해라도 안 입히는 게 다행이지.
매일 학교 복도를 걸을 때마다, 맹호는 항상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 생각이라도 해야 솔이한테 미안하단 생각을 떨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걸음걸이가 남들과 다르게 시원시원해서인지, 이렇게 복도를 걷기만 해도 맹호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아이들을 모른 척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맹호는 예전부터 죽 남들과 자기가 조금 다르단 게 굉장히 부끄러웠다.
…이런 모습이니까 여자애들하고도 제대로 못 지내잖아.
이 생각을 할 때면, 맹호는 항상 전학온 첫날에 본 여자애를 떠올리곤 했다. 전학온 지 이제 일주일이 다 되어가지만, 맹호는 여전히 그 여자애와 데면데면한 상황이었다. 사실 그 여자애가 아니더라도 맹호는 이성이 마냥 낯설기만 했다. 이럴 때 솔이가 있으면 좋은데. 이성이지만 맹호가 편히 대할 수 있었던 솔이는,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고마운 존재였다.
조금이라도 사람과 떨어져 혼자 있었으면 좋겠는데. 자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에서.
산골에서는 항상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할 수 있었던 일조차, 도시에서는 자기 멋대로 할 수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어쩐지 마음이 침울해진 맹호는, 그저 이불만 뒤집어쓴 채 바닥에 누워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 때까지, 맹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기가 오랜 시간을 보낸 산골에서, 고마운 손님들이 찾아올 채비를 하고 있었단 사실을.

그리고 그 선물은, 맹호가 이 도시로 전학온 지 일주일을 막 넘긴 월요일에 갑자기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전 한솔이라 그래요. 앞으로 잘 지냈음 좋겠어요.”
갑자기 교탁 앞에 선 맹호의 오랜 친구 솔이는, 그런 말과 함께 생글생글 웃어보였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었기에, 맹호는 그야말로 벙쪄있을 수밖에 없었다.
키가 또래보다 훨씬 작은 편인 솔이는, 이렇게 낯선 곳에 던져져서 무서웠을 텐데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가만히 서있었다. 머리 뒤에 매달린 작은 말총머리가, 항상 그렇듯 솔이의 어려보이는 겉모습을 더 돋보이게 해주는 것 같았다. 도시라서 그런지 특유의 억양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지만, 맹호는 솔이가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도시에서 지냈기에 표준말도 어느 정도 자연스레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 모습을 지난 일주일 동안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혼자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솔이가 자기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어, 매…우아. 맹호다! 잘 있었어?”
“으, 응?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얼떨결에 대답하다가, 맹호는 몸이 딱딱하게 굳는 걸 느꼈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자기랑 솔이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일주일 전에 자기를 이상하게 봤던 여자애도.
“…”
맹호는 그 때, 자기가 앞으로 전보다 더 유명해질 거란 사실을 곧장 느꼈다. 물론 솔이 때문이라면 그것도 고맙게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설마 나 때문에 따라온 거야?”
잠시 뒤, 쉬는시간이 되어서.
이미 나온 거나 마찬가지인 답을, 맹호는 조심스레 입에 담았다. 사실 솔이가 도시까지 올 정도라면 그 까닭은 하나밖에 없다. 그러지 않는다면, 솔이가 굳이 ‘자기가 무서워하는’ 도시에 제발로 올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응. 엄마랑 아빠도 허락해줬어. 그러니까 여기 죽 다녀도 돼.”
맹호도 죽 여기 다닐 거잖아. 란 말을 덧붙이며, 솔이가 뭐가 좋은지 맹호 옆에서 생글생글 웃었다. 지금은 점심시간. 지금껏 혼자가 아니면 아직 익숙지 않은 같은 반 애들하고 밥을 먹었던 맹호도, 일주일이 지난 지금 처음으로 ‘친한 친구’랑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나도 산골에 죽 있음 좋지만, 평생 거기서만 살 수는 없잖아. 그리고 맹호도 있구. 그지?”
이런 앳된 표정으론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똑똑한 목소리로, 솔이는 그렇게 말을 끝맺었다. 아무튼 자긴 솔이한테 못 배긴다니까. 맹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항상 그랬던 것처럼 솔이의 머리를 살살 어루만졌다.
“그리고 환웅 선생님도 맹호 보고 싶다더라. 그리고 태영이도. 맹호도 보고 싶지. 그지?”
“뭐, 그야 그렇지만…”
말꼬리를 흐리며, 맹호는 학교 급식같은 것만으로도 눈을 반짝일 수 있는 솔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맹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솔이한테 이 ‘도시’가 어떤 존재인지를. 그리고 솔이가, 왜 ‘그런데도’ 아까처럼 이야기했는지 역시.
이런 아이가 자기 곁에 있어준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 일일까. 맹호는 다시 한 번, 하늘 위에 있는 그 분한테 고맙단 마음을 전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어떠셔? 나도 여기 와선 연락 못 드렸는데.”
“응. 무지 잘 계셔. 아까도 말했잖아. 얼마나 맹호를 걱정하시던지, 나한테도 몇 번이고 신신당부하셨는 걸. 분명 낯선 도시에서 혼자 당황하고 있을 거라고.”
“그, 그렇게나 내가 못미더웠나?”
“그건 아닐 거야. 그치만 선생님은 맹호를 무지 아끼잖아. 그지?”
솔이가 다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맹호의 어깨를 두드려주자, 맹호는 무척 민망하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 분한테는 거스를 수 없다니까. 정말로 어릴 때부터 알고지낸 사이인데도, 환웅은 여전히 맹호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이다. 지금 자기가 여기에서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조차도.
“아, 그런데 하나 빼먹은 거 있다. 나 오늘부터 맹호네 집에서 같이 잘 건데, 괜찮지?”
“어, 물론…자, 잠깐만. 솔이야, 뭐라고?!”
그렇게 멍하니 있던 차에 갑자기 이런 말까지 나오자, 맹호의 눈은 자연스레 동그래졌다. 아니, 그렇게 이상한 일은 결코 아닐 터였다. 애초에 솔이한테 정체를 들킨 뒤부터, 맹호가 밤늦게까지 솔이네 집에서 지내는 건 매우 흔한 일이었던 것이다. 물론 대부분은 한밤중에 원래 모습으로 숲속에 돌아가곤 했지만, 솔이네 집에서 솔이랑 다정하게 얘기를 하며 하룻밤을 보낼 때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걸 매일매일, 그것도 도망칠 곳 하나없는 아파트에서 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응, 왜? 난 맹호랑 같이 사는 거 좋은데. 맹호한테 맛있는 것도 많이 해줄 수 있고, 그지?”
솔이는 참 해맑은 표정으로, 벌써부터 두근댄다는 듯 어깨를 살짝 들썩였다. 그,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까. 그런 말을 해줄 수도 없어서, 맹호는 혼자 조용히 머리를 싸맸다.
앞으로 어떤 나날이 자길 기다리고 있을까.
모처럼 솔이가 자기랑 같이 있어주는데도, 맹호는 그런 생각에 저절로 앞이 깜깜해졌다.

“우아, 맹호는 여기서 지내는 거야?”
그리고 방과후, 드디어 맹호네 집에 다다르자.
솔이는 그런 말과 함께, 부엌이며 큰방과 작은 방 두 개, 그리고 거실과 화장실로 이뤄진 맹호네 집을 여기저기 있는대로 돌아다녔다. 그렇게 내가 사는 데가 신기했나. 맹호는 묘하게 낯간지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그런 솔이를 그냥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응, 솔이 너도 여기서 살게 된다며? 그러니까 짐을…”
“아, 맞다. 나 맹호한테 보여줄 거 있다. 짜잔~.”
“…호랑이 옷?”
솔이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단 것처럼, 자기 가방에서 노란색 옷을 꺼내선 맹호한테 보여줬다. 영문을 모르는 맹호가 여전히 멍하니 있자,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는지, 솔이는 ‘잠깐만!’이란 말과 함께 자기 방에 들어가더니, 이윽고 ‘그 옷’을 입은 채 맹호 앞에 나타나 빙글빙글 돌았다. 마치 이 옷을 꼼꼼히 봐달란 것처럼.
…정말 호랑이 옷이긴 한데.
맹호는 멍하니 그 옷을 보며, 혼자 감탄하고 있었다. 흰색 배에 검은 줄무늬, 그리고 호랑이 얼굴이 그려진 모자까지 분명 ‘호랑이 옷’이라서였다. 당연히 머리 위엔 작은 귀가 달려있는데, 솔이가 그걸 쓴 채 생글생글 웃고 있으면 굉장히 앙증맞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이 입으면 어떨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솔이한테는 아주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하지만, 맹호는 궁금한 게 있었다.
“그런데 이거, 대체 어디서 가지고 온 거야?”
“응? 맹호 보여주려고 샀다. 인터넷에서 보니까 무지 귀여워서. 이거 사느라 무지무지 고생했는데 받아보니까 너무 좋더라. 어때. 괜찮나.”
“으, 응. 그…”
이럴 땐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까. 맹호는 혼자서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사실 지금 이 옷을 입은 솔이가 매우 잘 어울린단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입고 있는 게 다른 것도 아닌 호랑이 옷이었기에, 맹호는 대체 이걸 어떻게 칭찬하면 좋을지 몰라 머리를 썩힐 수밖에 없었다.
마음만 같아선 가만히 안아주곤 싶은데, 그러기엔 너무 어색할 테고…
맹호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있는데, 오히려 솔이가 맹호 쪽으로 와서는 가만히 몸을 갖다댔다. 그리곤 맹호의 가슴이 두근대거나 말거나, 이런 말과 함께 머리를 배 쪽에 비볐다.
“맹호 좋아하는 거 다 안다. 에헤헤. 맹호는 부끄러워하니까 그러지, 그지?”
“으, 으, 응…”
맹호는 뭐라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서, 일단 고개를 얼른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집에서 돌아왔는데도 아직까지 교복차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호랑이옷을 입은 솔이랑 이러고 있으니, 굉장히 묘한 느낌이 지금 당장이라도 맹호를 덮칠 것 같았다.
“이, 일단 옷 갈아입을게. 기다려!”
그래서 맹호는 조심스레 솔이랑 거리를 둔 뒤,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갈아입으면서도 자꾸 가슴이 두근댔지만, 그건 애써 모른 척했다.
“우아, 맹호는 여기서도 우리 집이랑 똑같은 옷입는다. 옷 더 갖다줄 거 그랬나?”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맹호가 거실로 나오자, 솔이가 그걸 알아채곤 재밌단 표정으로 맹호 바로 앞에까지 다가왔다. ‘옷’이라는 것에 별 신경을 안 쓰기에, 항상 편한 추리닝을 골라입던 맹호를 솔이는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그러니까 여긴 너무 가깝대도.
그렇게 말하려던 맹호는, 솔이의 티없는 눈동자를 보자 그런 말을 목구멍으로 꿀꺽 삼켰다. 이 아이는 정말 순수한 생각으로 맹호랑 한지붕 밑에 사는 걸 반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아이한테 잠시나마 묘한 생각을 품었다니. 맹호는 여러 모로 솔이한테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솔이는 자길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걸까.
솔직히 말하자면, 맹호는 그게 반갑기도 했고, 한편으론 아쉽기도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호랑이가 사람과 이어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맹호 역시 그건 잘 알았지만, 솔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조금 궁금했다.
“그런데 솔이야. 정말 괜찮겠어? 나도 일단 그, 그런데…”
차마 자기가 수컷이니까, 라고까진 말할 수 없어서, 맹호는 얼른 말끝을 흐렸다. 이걸로도 자기가 하려는 말은 충분히 전해지리라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솔이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오히려 고개를 가로저으며, 전혀 망설임없는 말투로 이렇게 대답했다.
“아냐, 난 무지 괜찮아. 아빠랑 엄마한테도 허락받았는 걸. 맹호랑 같이 있으면 맘이 놓인다고. 맹호는 내가 무지무지 아끼는 동물친구니까. 그지?”
“아, 그래. 그렇구나…”
그 말을 듣자, 드디어 맹호는 솔이가 자기를 어떻게 여기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솔이는 자기를 ‘이성’이라 제대로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 역시 무척 자연스러운 얘기였다. 솔이는 사람으로 둔갑했을 때뿐만 아니라, ‘원래 모습’일 때도 자기랑 오랫동안 가까이 있었으니까.
…왜 이렇게 살짝 마음이 아쉬운 걸까.
호랑이와 사람이 맺어질 수 있단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겁나는데, 맹호는 어쩐지 솔이의 그런 마음이 자기 가슴을 콕콕 찌르는 걸 느꼈다.

그런 마음을 품으면서도, 맹호는 솔이와 오랜만에 정말 즐거운 한 주를 보냈다. 자길 알아주는 친구가 이렇게 옆에 있기만 해도 힘이 된다는 걸, 맹호는 일주일 동안에 쌓은 경험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솔이도 맹호가 있어서인지, 적어도 맹호가 보낸 일주일보다는 훨씬 더 빨리 이 낯선 곳에 적응해갔다. 맹호도 뭔가 거들 수 있는 게 있다면 거들고 싶었지만, 오히려 맹호는 잘 모르는 게 많아서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맹호라 한들, 한 가지 자랑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했다.
“우아, 맹호야. 이게 뭐야?”
솔이가 전학오고 처음으로 맞는 목요일에, 맹호가 주머니에서 ‘그걸’ 꺼내자 솔이는 토끼눈을 하고 그걸 빤히 쳐다봤다. 솔이도 산골에서 오래 살았으니까 이건 잘 모르겠지. 조금 의기양양한 기분으로, 맹호는 가만히 그게 뭔지 말해줬다.
“몇 달 전에 나온 최신 스마트폰이야. 텔레비전에서 봤지?”
“우아, 정말? 신기하다. 아빠 옛날 핸드폰밖에 못 만져봤는데…”
솔이랑 같이 다니던 학교는 워낙 외진 곳에 있었기에, 도시보다 ‘최신 핸드폰’을 갖고있는 아이들이 훨씬 적었다. 그나마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는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최신 핸드폰을 들고다니는 경우는 정말로 드물다시피했다. 적어도 맹호가 봤을 땐 그랬다.
그리고 솔이는 특히나 핸드폰과 인연이 없었다. 여러 사정이 있어서 부모님이 사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아버지 핸드폰을 만질 기회는 있었지만, 워낙 옛날 기종이라서 그다지 재미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솔이는 다른 아이들 핸드폰을 만질 일도 그다지 없었기에, 이렇게 가까이에서 최신기종을 보는 건 분명 처음일 터였다.
그런데.
“그런데 맹호야. 여기에 있는 이상한 기호는 뭐야? 응…어, 와이파이? 위를 이렇게 하니까 이런 말 나왔는데, 이건 또 뭐지?”
“그, 글쎄. 그게 뭐더라? 나도 잘…”
맹호는 이런 말과 함께, 식은땀을 흘리며 핸드폰 및 솔이한테서 고개를 돌렸다. 당연한 얘기지만, 맹호도 솔이만큼이나 신문물은 잘 몰랐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호랑이라서 ‘기계’가 뭔지 전혀 모르고 자라왔는데, 그렇게 어려운 외국말을 맹호가 잘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 스마트폰 역시 나라의 높은 분들한테 처음 받은 거였고, 오히려 여기에 온 지 2주일이 다 되어가는데도 핸드폰 하나 제대로 만지지 못하는 건 다름아닌 맹호 자신이었다.
게다가 이런 일은 핸드폰만 가지고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솔이 너, 이거 알아? 여기엔 무지 큰 역도 있다. 백화점이란 데도 있는데…”
그 다음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맹호는 자기가 살게 된 이 도시를 솔이한테 자랑하고 싶어졌다.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맹호랑 솔이가 살던 산골엔 그렇게 큰 역이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화점이란 데로 가려면 버스를 타고 한참 가야만 했다.
“우아, 진짜? 대단하다. 나도 가고 싶은데…그런데 어떻게 가지?”
하지만 솔이가 궁금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걸 보자, 맹호는 한 방 맞은 느낌이 들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직 맹호는 이 도시의 지리를 잘 몰랐던 것이다. 애초에 ‘도시’라는 공간 자체에 적응하는 데만 해도 너무나 벅차서, 멀리까지 나간다는 건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에이. 거봐. 맹호도 못 갔으면서. 우리 나중에 꼭 같이 가자. 알았지?”
그렇게 솔이가 자기 팔에 달라붙는 걸 느끼며, 맹호는 민망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마음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아무튼 자긴 뭘 자랑하면 안 된다니까. 얕은 지식만으로 솔이한테 잘난 체한 게 괜히 부끄러워져서, 맹호는 노을이 지는 반대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 때, 솔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떼어놓았다.
“아, 맞다. 맹호한테 진작 말해야 됐는데 까먹었네. 태영이 있잖아. 조만간 일로 온다 그랬어. 맹호한테 전해달라던데, 어때, 기분 무지 좋지?”
“응? 그거야…잠깐, 누가 온다고? 까치?!”
맹호의 질문에, 솔이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건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자기네들하고 직접 관계는 없는 까치까지 이리로 오게 된다니.
대체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맹호는 다시 한 번 머리를 쥐어싸매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맹호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결국 일은 터지고 말았다.
맹호와 절친한 사이가 된 바로 그 까치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주 월요일 맹호네 학교로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맹호랑 같이 고등학교에 다니던 모습이 아니라, 다른 누구도 아닌 맹호의 ‘선생님’으로서.
“이야. 안녕하세요 다들. 깜짝 놀라셨죠?”
월요일 국사시간, 마치 만우절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앞문으로 들어온 사람을 보고, 맹호는 순간 몸을 움찔댔다. 대체 왜 ‘저 자식’이 이 시간에 당당히 자기 교실로 들어온단 말인가. 그것도 키가 커지고 양복까지 갖춰입은 채.
“어유. 다들 무지 당황들 하시네. 진정해도 돼요. 난 그저 여기 늦게 전근온 선생님일 뿐이니까. 오늘부터 여기서 가르칠 강태영이라 하고, 또…”
“저, 저게 뭐하는 짓…?”
맹호는 이제, 진짜로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말도 안 됐다.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한 달 전만 해도 학교에서 교복을 입고 같이 떠들던 자기 친구가, 겨우 몇주일 사이에 어른이 되어 학교 선생님으로 찾아오다니. 그것도 만날 촐랑대기만 해서 맹호가 생각하는 ‘어른’과는 너무나도 달랐던 놈이.
게다가 저 까치의 모습은, 자기 생각보다 훨씬 더 ‘학생이었던’ 모습 그대로였다. 굳이 말하자면 키가 좀 더 크고 몸집이 조금 더 좋아진 정도였다. 시원시원하게 짧게 깎은 머리도, 장난기가 숨어있지만 어느 정도 진지한 표정도, 그리고 무엇보다 더 묘하게 밝고 명랑한 느낌은 맹호가 기억하는 그 까치였다. 단지 원래 입던 교복 대신, 어느 정도 단정한 양복을 입고있을 뿐인 것이다. 물론 얼굴이 좀 더 어른스러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같은 학교에 다닌 애들이라면 ‘알아보는’ 게 무리는 아닐 게 틀림없었다.
“마,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혼자 중얼거려보지만, 반 애들이 들썩이든가 말든가 교과서를 펴고는 태연하게 수업을 하려는 까치의 모습은 결코 헛것이 아니었다. 대체 왜 이런 식으로 돌아왔단 말인가.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돌아와야 할 정도로 자기가 믿음직스럽지 못했던가.
생각 끝에 머리가 지끈지끈대자, 맹호는 익숙한 목소리가 수업을 ‘하려는’ 걸 무시한 채 교과서에만 눈길을 주었다. 얼른 이 현실을 잊어버리기 위해. 그리고 마음속에서 기어나오는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을 구겨넣어버리기 위해.

사실, 까치가 지금 하고 있는 저 모습 자체는 결코 이상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맹호랑 까치가 지금까지 고등학생인 ‘척’을 하고있는 게 훨씬 더 이상했다.
맹호랑 까치는, 둘 다 차이는 있지만 솔이보다 훨씬 더 나이를 많이 먹은 상태였다. 물론 ‘호랑이의 왕’을 기준으로 하면 아직 젊은 편이지만, 그래도 보통 호랑이들과 대보면 원로 소리를 들을 정도로는 오래 살았다. 이건 까치도 마찬가지라서, 적어도 ‘고등학생’으로 있는 게 자연스런 나이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까치가 하고있는 ‘어른’ 모습이 둘한테는 더 잘 어울릴 터였다.
그럼 왜 이 모습을 하고있는가 하니, 동물은 ‘자기가 가장 자연스럽다 생각하는’ 사람 모습으로까지만 둔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아무리 사람 나이로는 어엿한 성인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 모습으로 둔갑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맹호 역시 이 말을 환웅한테 전해들었는데,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는 모습만큼 ‘자기인식’에 달린 것도 없단 말은 지금까지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는 그 모습으로 둔갑해도 된다’고 너무나 당연히 여겨야만 ‘자기가 바라는 나잇대’로 둔갑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그 아래 나잇대로 둔갑할 순 있었지만, 일단 한 번 그 위의 나잇대로 둔갑했다면 절대 아래 나잇대로 돌아갈 수 없다. 당연히 어느 정도 젊은 상태로 둔갑하는 게 만약을 대비할 땐 편했기에, 맹호 역시 솔이랑 만나기 전엔 그렇게 하고 있었다. 솔이랑 만났을 땐 이 모습이었고, 그 뒤로는 죽 그대로지만.
어쨌든, 지금 맹호한테 나이가 훨씬 많이 든 사람으로 둔갑하라고 해도 맹호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자기한테 가장 잘 맞는 모습은 바로 이 고등학생이라는 자각이 있었으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사람과 다른 동물들의 나이감각엔 큰 차이가 있다. 아무리 맹호가 호랑이 입장에선 어른이라 할지라도, 사람 입장에선 고등학생 정도의 정신상태에 더 가까웠다. 맹호 자신도 그걸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애초에 ‘고등학생’ 말고 다른 선택지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지금, 까치는 자기와 다른 나잇대인 ‘어른’이 되었다. 이렇게 자연스레 수업하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전처럼 까불대는 느낌이 남아있는데도 훨씬 더 믿음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겨우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까치는 맹호처럼 고등학생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까치가 저 모습으로 둔갑한 건, ‘자기는 이 모습이라도 괜찮다’는 확신이 있단 뜻이었다. 맹호한텐 전혀 그런 게 없는데.
나보다 저 까치가 훨씬 더 어른스럽기라도 하단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맹호는 정말로 우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살아온 연수로만 따지면 맹호는 까치보다 조금 더 일찍 태어난 편이었다. 그런데, ‘호랑이의 왕’도 아닌 까치가 자기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니. 대체 자기는 뭘까. 이런 자기가 ‘호랑이의 왕’이란 이름에 걸맞은 걸까.
겨우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자기처럼 이 책상에서 수업을 들었던 까치가 ‘오래 전부터 죽 이래온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레 수업을 진행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며, 맹호는 강한 자괴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혹시 쟨 정말 ‘어른’이 아닐까, 란 생각을 애써 숨기고 또 숨기며.
“우아. 태영…아니 까치 정말 대단하다. 그지?”
쉬는 시간이 되자, 솔이는 드물게도 까치를 이름이 아니라 맹호처럼 종족 이름으로 불렀다. 아무리 모든 걸 잘 받아들이는 솔이라 할지라도, 까치의 저 ‘성장’은 남들한테 들킬 게 아니란 건 알아준 모양이었다.
“아, 그, 그래…”
“응. 수업도 무지 잘하잖아. 맹호랑 만나려고 일부러 커줬나 봐. 우아…”
“…”
그저 순수하게 ‘까치가 자랐다’는 사실만으로 입을 크게 벌리는 솔이를 보며, 맹호는 할 말을 잃었다. 이럴 땐 뭐라 대답해줘야 할까. 차마 자기가 까치 때문에 부끄러웠단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치만 다행이다. 또 셋이서 있을 수 있잖아. 맹호도 좋지, 그지?”
“어? 아, 어…”
그래서 맹호는 솔이의 질문에 그런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솔이는 까치가 온 게 그렇게 좋은 걸까. 거야 자기처럼 모자란 놈보단 낫겠지만.
그런 식으로 마음을 진정시켜봤지만, 효과는 그다지 없었다. 오히려 저 잘나디 잘난 ‘일개 까치’ 친구한테, ‘호랑이의 왕’이 품으면 우스울 뿐인 질투심만 더 느껴질 뿐이었다.

“이야. 정말 오랜만에 만났네. 그지, 친구?”
“오랜만같은 소리하네. 이 까치자식아. 여기가 어디라고…아.”
그리고 점심시간, 맹호는 두말하지 않고 ‘친구’가 있는 교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볼일은 하나밖에 없다. 생뚱맞은 방법으로 찾아온 까치한테 매운 맛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보여주면 좋을지는 맹호도 잘 모르겠지만.
“어디긴. 교무실이지. 어때. 이러고 있으면 나도 좀 멋있어보이지 않냐, 응?”
“헛소리하네. 대체 누가 이렇게 오라고…”
“넌 산골에 있으나 여깄으나 바뀐 게 하나도 없다니까. 아무튼 애가 성질이 급해요.”
“뭐, 뭐라고?!”
고등학생이 되나 선생님이 되나 참으로 바뀐 게 없는 시끄러운 웃음소리를 들으며, 맹호는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왜 내가 저 자식한테 이딴 소리를 듣고 앉아있어야 하는 거지? 속으론 부글부글 끓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갓 전학온 학생이 교무실에서 일을 저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까치의 말이 그다지 틀린 것도 아니었다. 맹호 역시, 그 말을 들으면서 정곡을 찔린 느낌이었던 것이다.
“…”
그렇기에 맹호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그저 바닥만 보는 수밖에 없었다. 왜 내가 겨우 까치한테 이런 굴욕을 당해야 하는 거지, 란 생각을 있는 힘껏 구겨넣으면서.
“아무튼 그런 걸 생각해서 내가 온 거지. 혹시 했는데 운좋게도 국사선생님이 급하게 학교를 그만두게 됐잖니. 그래서 내가 그 분께 속성교육 좀 받고 이리로 왔다 이거야. 호랑이 옆엔 까치가 있어야지. 안 그래?”
“너…”
하고 싶은 말이 몇십 개고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는데도, 맹호는 고작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물론 여기서 ‘그 분’이란 환웅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환웅이라면 짧은 시간동안 교사 면허 하나 까치한테 만들어주는 건 어렵지도 않았겠지. ‘그 정도 힘’이라면 아직도 문제없는 분이니까. 자기보다 몇 배는 더 머리가 잘 돌아가는 까치이니, 원래 성적이 좋았던 국사를 가르치는 것 정도는 누워서 떡먹는 것보다 훨씬 쉬울 것이다. 대체 왜 멀쩡하던 국사선생님이 갑자기 관뒀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살다보면 그런 일도 없진 않겠지.
하지만 지금 맹호한텐 그것보다 더 신경쓰이는 게 있었다. 그래, 까치가 맨 마지막에 했던 그 말 말이다.
“무슨 헛소리야. 그, 호랑이 옆엔 항상 까치라니…”
“야, 맹호 너 이러기냐? 옛날 그림에 얼마나 많니. 까치호랑이 그림.”
“아니, 그, 그건 저기 다른 나라에서 표범이었던 게 호랑이가 된 거고…”
그런 식으로 변명아닌 변명을 해보지만, 맹호도 이 말이 씨알도 안 먹히리란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매번 까치한테 이런 식으로 도움받는 자기가 민망해서 해 본 말일 뿐이었다. 맹호가 처음 사람세상으로 나왔을 때, 이미 사람세상을 오랫동안 봐온 까치한테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그 때도 고개를 들 수 없었는데, 지금 또 이렇게 나오면 맹호 입장에선 까치를 바로볼 면목이 없었다.
그리고 역시나, 까치는 킬킬대며 이 말과 함께 맹호 머리를 살짝 쥐어박았다.
“어쨌든 우리나라선 호랑이야. 인마. 암튼 여기서도 잘 지내자. 입장은 좀 바뀌었지만.”
“아, 그래…”
그렇게 갈굼아닌 갈굼을 당하며, 맹호는 복잡한 마음을 애써 무시하려 했다. 어쨌든 셋이서 같이 있을 수 있게 된 건 좋은 일이다. 어차피 겉모습 차이는 까치랑 호랑이한텐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고.
그래, 여기까진 그래도 괜찮았다.
하지만 이 뒤, 솔이랑 같이 집에 돌아가서 알게 된 현실은…

“니, 니, 니가 왜 여깄어. 엉?!”
비어있던 아파트 아래층에서 이삿짐이랑 같이 나타난 까치였다.
“왜긴 왜야. 이거 너무 서운한데. 그래도 친구한테.”
“너, 너 이 자식. 제정신이야? 왜 여기까지 쫓아와선…”
맹호는 순간 눈앞이 까맣게 된 나머지, 다짜고짜 까치한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이 안 된다. 아무리 우연의 일치라 해도 그렇지. 바로 아래층에 빈 집이 났고, 거기에 까치가 새로 이사오게 되다니. 이게 말이 된단 말인가.
“넌 환웅 선생님을 너무 무시한다니까. 그 정도 우연은 아직 만들 수 있어요. 그 분도.”
“…농담이지. 지금 장난치는 거 맞지, 그지?!”
그렇게 반박하려고 했지만, 어쨌든 이미 일어난 사실을 뒤집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 일을 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모처럼 솔이랑 둘이서 오붓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물론 까치 역시 솔이네 집엔 자주 드나들고 있었다. 셋은 무척 친했고, 솔이네 집이 워낙 산 깊은 곳에 자리잡았기에 날이 너무 어두워지면 자고가는 일은 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근처에서 산 적은 없었다. 그것도 맹호랑 솔이가 둘이서만 살 때엔 절대.
“우아. 그럼 태영이도 바로 아래서 사는 거야? 진짜로?!”
“그럼. 솔이도 좋지? 맹호 쟤야 좀 꺼릴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솔이는 이런 상황이 무척 기뻤는지, 까치랑 전처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맹호는 하늘이 갑자기 무너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긴 하지만, 맹호 역시 까치가 싫단 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절친한 친구가 근처에서 지내게 되었으니 반가워할 일이었다. 단지 솔이랑 같이 지내는 시간을 뺏기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지금껏 솔이네 집에서 지냈을 땐 그다지 들지 않았던 생각이, 신기하게도 바로 지금 맹호를 마구 감싸돌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저 놈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맹호는 머리로 까치한테 도무지 당해낼 수 없단 걸 잘 알고있었던 것이다. 산골에 있을 때 좋은 핸드폰을 가지지 못했던 것도 가만히 생각하면 다 저 놈 때문이었다. 자기 앞에서 깐족대는 까치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맹호가 한 대 먹이려고 했을 때, 실수로 핸드폰을 던진 탓에 그 큼직한 기기가 두동강났던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맹호는 이를 갈면서 꽉 쥐고있던 주먹을 어떻게든 풀었다. 또다시 그런 짓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너, 자주 오기만 해봐. 가만 안 둔다.”
“예이예이. 가끔 오지요. 가끔.”
“아무튼 이 자식도 참…
결국 맹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엄포를 단단히 놓는 것뿐이었다. 물론 까치는 자기 말을 절대 안 들을 테지만.

그리고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까치, 즉 지금 맹호의 역사선생님을 하고 있는 존재는 무서울 정도로 도시에 매끄럽게 적응했다. 맹호는 도시에 와서 일주일도 넘게 시행착오가 이어졌는데도, 까치는 일주일은 커녕 며칠도 안 돼서 자연스레 이 곳에 녹아든 것이다. 마치 오래 전부터 여기 있었던 것처럼.
사실, 가만히 생각하면 이건 무척 자연스러운 이야기였다. 까치는 맹호랑 달리 도심 위도 자주 날아다녔기에 ‘바깥세상’ 역시 어색하지 않았으며, 맹호보다 기억력도 훨씬 좋고 사교성도 무척 뛰어났다. 그런 까치가 맹호처럼 도시생활에 당황해할 까닭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이건 처음부터 맹호한테 엄청 불리한 상황이었다.
…원래 모습으로 치면 분명 자기가 더 대단할 텐데.
아무렇지도 않게 ‘어른’처럼 행동하는 까치를 보며, 맹호는 속이 답답한 걸 참을 수가 없었다. 분명 한 달 전만 해도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만날 시끄럽게 구는 놈이었을 텐데. 왜 이렇게 양복이 잘 어울린단 말인가. 왜 수업은 저렇게 잘 하고. 왜, 왜 저 자식은…

 

(下에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