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의 왕과 행복론  5. 탄탄대로였으면 하는 새로운 앞날

그렇게 파란만장한 밤이 끝나고 난 며칠 뒤.
맹호는 오늘도 침대에 앉은 채, 방에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걸 가만히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햇살이 다정한 거였던가. 너무나 오랫동안 비만 내렸기에, 맹호는 오랫동안 햇살을 모르고 있었다.
“맹호, 일어났나.”
“아, 응. 솔이도?”
솔이는 여전히 맹호보다 일찍 일어나선, 간단한 아침을 만들어놓고 맹호를 불렀다. 이젠 이런 상황도 익숙해져있었다. 솔이가 해주는 토스트를 먹으면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건, 맹호한테도 무척 기쁜 일이었다. 어쩐지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이젠 비 안 내리는 거지. 유라도 괜찮아졌고. 그지, 맹호야?”
“응. 괜찮을 거야. 아마.”
그런 말과 함께, 맹호는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고작 두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많은 일들은, 맹호가 지금껏 살아왔던 삶조차 크게 바꿔놓았다.
이제 자기가 ‘호랑이의 왕’이란 걸, 의심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맹호는 이제 아버지의 뜻을 알았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맹호 자신이 자기 힘을 믿어 의심치 않으니까.
그러니까, 이젠 여기에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자기 앞날만 생각하면…
“그리고 맹호도 이제 인기 많아졌고. 그지?”
“무, 무무무, 무슨 소리야?!”
솔이의 가벼운 말에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올라서, 맹호는 얼른 고개를 휘휘 저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건 맞는 말이었다. 맹호 역시, 어제 일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댔던 것이다.
상황은 이랬다. 맹호는 어제, 항상 그랬던 것처럼 멍하니 까치의 수업을 듣고 있었다. 오늘도 까치는 오른쪽 칠판에만 글씨를 빼곡하게 쓰는 바람에, 왼쪽 끝에 앉은 맹호 입장에선 필기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거기까진 저번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달라진 건 맹호의 행동이었다. 맹호는 자기도 놀랄 만큼 큰 목소리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채 이렇게 소리를 질러댄 것이다. 물론 무의식 중에 일어난 일이지만.
-이 자식아, 똑바로 못 해?
물론 그 뒤, 맹호가 어떤 일을 겪었을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맹호는 하루아침에 지금보다 훨씬 더 유명해졌고, 까치가 아닌 다른 선생님들한테도 온갖 꾸지람을 다 들었다. 하지만 바뀐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맹호는 같은 반 친구들과, 처음으로 편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도 필기가 개판 오분 전인 까치한테서 반 아이들을 지켜낸 구국의 용사 취급을 받으면서.
어떻게 보면, 이것도 분명 큰 발걸음이라 할 수 있었다. 까치도 싫은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물론 맹호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껄끄러운 한걸음이었지만, 그래도 같은 반 애들과 마음을 튼 건 분명 커다란 소득이었다. 맹호는 옛날부터 죽 그걸 어떻게든 하고 싶었으니까.
-띵동. 띵동.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어, 초인종 울렸다. 누구지?”
갑자기 현관 쪽에서 귀에 익은 초인종소리가 들리자, 솔이가 놀란 듯 그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맹호도 신경쓰였기에, 솔이를 따라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솔이가 현관문을 잠그지 않아서인지, 찾아온 사람이 문을 여는 게 더 빨랐다.
“저, 오늘은 같이 가려고…어?”
“…유, 유라야?!”
갑자기 문을 열고 나타난 유라를 보며, 맹호는 그저 그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다른 사람도 아닌 유라가, 자기 집 현관에 있다니.
“저, 유, 유라야. 우리 집은 어떻게?”
“그, 선생님이 알려주셨는데…아니, 그게 아니라. 저…”
맹호는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지금 이 상황이 보통 문제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지금껏 맹호는 솔이랑 같이 산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또래 남녀가 같은 집에서 둘만 산다는 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더더욱.
그래서일까. 유라는 잠깐 망설이다가, 이윽고.
“미, 미안. 나 먼저 갈게. 안녕!”
“유, 유라야. 그게 아니라, 그!!”
맹호가 변명하든 말든, 유라는 잽싸게 계단을 뛰어내려가버렸다. 엘레베이터를 탈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지, 뛰어내려가는 발걸음이 너무나 급박하게 들렸다.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뒷일을 수습할 생각만 하면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맹호는 유라가 여기까지 와 준 것만으로도 기뻤다. 유라는 지금, 자기들을 ‘친구’로 받아들여준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갈 길은 까마득하지만, 그래도 맹호는 조금이나마 기운이 난 것 같았다. 자기 곁엔, 자길 생각해주는 친구들이 이렇게나 많으니까.

“아, 그, 그런 거였구나.”
그렇게 학교로 간 뒤, 맹호는 땀까지 뻘뻘 흘려가며 유라를 설득했다. 물론 내용은 하나밖에 없었다. 까치 일까지 해서, 이 일에 관한 자초지종을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놓았던 것이다.
“그, 미안. 난 아무 것도 모르고.”
“아냐. 괜찮아. 그럴 수밖에 없는데 뭐.”
마침 너무 일찍 온 탓에, 반에 애들이 하나도 없어서 설명하긴 편했다. 이젠 정말 숨길 게 하나도 없어졌구나. 맹호는 어쩐지, 속 끝까지 시원해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있지, 동생하고는 며칠동안 길게 얘기했어. 걔도 품은 게 많이 있더라. 둘이서 오해한 것도 많이 있었고. 그치만 앞으론 잘 지내기로 했어. 진짜야.”
“그랬구나.”
“그러고 보니까 말인데, 동생이 도깨비 여자애랑 처음 만났을 때, 좀 이상하단 생각은 했나 봐. 걔가 많이 현실주의자거든. 근데 재밌는 게, 걔가 빙빙 돌려서 내 얘길 꺼내는데, 어쩐지 느낌이 왔대. 나도 지금까지 몰랐는데, 걔가 그러더라구. 자긴 현실주의자가 맞긴 한데, 그래도 어쩐지 느낌이 오면 그렇게 한다고. 오랫동안 혼자 지낸 시간이 많았으니까, 그런 식으로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러더라. 나도 참 이상하지. 항상 집에서 만나는 동생인데, 그런 거 하나 모르고…”
“아냐, 그럴 수도 있지. 별 건 아니잖아.”
고작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지만, 맹호는 그래도 마음이 놓였다. 이렇게 유라가 행복해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벅차올랐기 때문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게 궁금한 나머지, 오늘이야말로 어떻게 해서든 자기가 물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젠 정말,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다 네 덕분이야. 니가 없었음 이런 일도 없었는 걸 뭐.  그러고 보니 그 높은 분들이라는 사람들하곤…”
“아냐, 난 아무 것도 안 했어. 그 분들하게도 전에 얘기했고. 이번 일은 고맙고, 앞으로도 잘 지내보자던데.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어…”
게다가 이렇게 유라가 고맙단 말까지 꺼내자, 맹호는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괜히 고개만 숙이고 있는데, 갑자기 유라의 손이 맹호 앞에 놓인 게 느껴졌다.
“있지. 앞으로도 재밌게 연주했음 좋겠어. 이젠 다들 익숙하니까. 그러니까…”
“응. 나도 그래.”
맹호 역시 바라던 바였기에, 가만히 유라 손을 잡은 뒤 가볍게 흔들었다. 이런 날이 정말 올 줄 생각이나 할 수 있었던가. 유라가, 자기한테 이런 말을 해주다니.
이렇게 고마운 마음을 누구한테 전하면 좋을까.
맹호는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뿌듯한 마음에 사로잡힌 채, 조회시간이 오는 걸 기다렸다. 마치 꿈 속을 헤매는 거 같은 느낌이었지만, 맹호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은, 틀림없는 현실이란 걸.
그리고 조회시간이 되자, 어김없이 까치가 나타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까치는 반은 묘하고, 반은 흥미진진하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놈은 대체 왜 저러는 거지?
맹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앞문을 열고 나타난 건.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전학온…”
말도 안 될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등장한, 교복을 갖춰입은 도깨비 여자애였다.
“자, 자, 자자자잠깐. 이건 대체?”
차마 큰소리는 내지 못하던 맹호가 목소리까지 떨면서 유라 쪽을 봤지만, 유라 역시 말도 안 된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맹호 생각엔, 몸 자체가 뻣뻣하게 굳은 거 같았다.
대체 이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하늘은 여전히, 맹호한테 시련을 내려주길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뭐, 이렇게 될 줄 알았잖아. 안 그래?”
“되긴 누가 알아?!”
방과후 사물놀이패 교실에서, 맹호는 까치한테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대체 왜 쟤가 전학을 오고있단 말인가.
“자, 자기 입으로 난 여기랑 안 어울린다더니, 이번엔 지가 직접 알아서…”
“뭐, 걔도 니가 신기한 거지. 안 그러냐? 그 때도 그랬잖아. 니가 재밌어서 좀 더 지켜보고 싶다고.”
“그래도 그렇지. 너, 너무 갑작스런 거 아냐? 절차는 어떻게 밟은 거야? 게다가…”
“살다보면 다 그런 거야. 이젠 즐기자고. 너도 호랑이의 왕이라 인정했으니까.”
“뭐가 살다보면 그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이 세상은 대체…”
맹호는 여전히, 식은땀만 뻘뻘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앞으론 대체 어떤 나날들이 자길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다른 아이들하고의 관계는.
“어, 다들 여깄었네?”
그러던 와중, 솔이가 사물놀이패 교실로 들어와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맹호가 당황하고 있는데, 솔이는 오히려 기분이 엄청 좋은 모양이었다.
“소, 솔이야. 너는…”
“나는 이렇게 유라랑 친구들하고 같이 연주하니까 좋은데. 맹호는 왜 그러나.”
“으, 응? 나는, 그…”
솔이의 말에, 맹호는 뭐라 대답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사실, 그건 무척 당연한 이야기였다. 솔이 말대로, 친구들과 즐겁게 연주하는 게 맹호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자긴 지금까지 뭘 망설이고 있던 걸까. 여기엔 유라가 있고, 솔이가 있고, 까치도 있는데.
“응. 그러게.”
맹호는 이제, 마음을 가다듬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그게 당연한 이야기였다. 언제고 맹호는,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악기를 연주하며 지내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맹호와 친구들은 악기를 가져온 뒤, 까치의 상쇠소리에 맞춰서 오늘도 연습을 시작했다. 다른 때보다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연주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앞문이 열리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맹호는 그게 누구인지 무척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 사람은, 다름아닌.
“어머, 여기가 니들 연습하는 데야?”
맹호는 더 이상 대답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대신 때마침 상쇠 연주를 잠깐 멈춘 까치를 따라, 가만히 잡고있던 채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거기에 있던 도깨비 여자애를 보며, 이런 말을 꺼냈다.
“너도 사물놀이 한 번 안 할래? 이거 연주하고 있음, 무지 행복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