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다음 날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난 맹호는 깜짝 놀랐다.
“비가…”
맹호의 반응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이면 항상 내리던 비가 갑자기 거세졌으니까.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부슬비 정도였는데, 오늘은 바람까지 동반한 거센 비가 창밖을 마구 두드리고 있었다. 이젠 기다려줄 시간조차 없단 듯이.
“…”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란 걸, 맹호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젠, 정말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이길 수 있든 없든.
이런 생각을 하며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하다가, 맹호는 집에 돌아온 뒤 밤하늘을 쳐다봤다. 그나마 맑았던 밤하늘도, 오늘은 두꺼운 구름으로 뒤덮여있었다. 도깨비 여자애는 작정하고 맹호를 불러낼 생각인 모양이었다. 적어도 4월이 가기 전까진.
하지만 결심한 건 둘째치고, 도깨비 여자애는 맹호한테 두말할 것도 없는 난공불락이 아니었던가.
물론, 맹호는 어떻게 해서든 도깨비 여자애한테 이길 생각이었다. 유라는 물론, 솔이를 위해서라면 더 이상 망설일 게 없었다. 하지만, 아직 한걸음이 더 모자랐다. 누군가 자기 등을 밀어줄 존재가 필요했다.
그럴 때 떠오르는 건, 물론 한 사람뿐이었다.
결국 마음을 굳힌 뒤, 맹호는 핸드폰에서 그 사람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아마 지금 이 시간이라면, 틀림없이 맹호의 말을 들어줄 터였다.
…학교 일은 이제 다 끝났을 테니까.
“맹호냐?”
역시나, 그 사람은 전화를 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빠르게 그런 대답을 들려줬다. 그 가벼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깊은 감정이 담긴 목소리가, 지금 대답하고 있는 사람은 환웅이란 걸 잘 나타내고 있었다.
“아. 네. 일은…”
“없어 인마. 방금 술마시려다 니 전화온 거 보고 막 받은 참이다. 무슨 일인데?”
“아, 네?”
“무슨 일이 있어서 전화했을 거 아냐. 니가 약한 걸 누구한테 보여주고 싶어하는 애냐?”
맹호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환웅은 왜 자기한테 전화를 했는지 곧장 꿰뚫어봤다. 언제나 환웅은 가볍게 보이면서도 남의 속을 곧잘 읽는 구석이 있었다. 이 분한텐 정말 이길 거같지 않다니까. 맹호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사실은…”
그래서 맹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죽 갖고있던, ‘자긴 호랑이의 왕이란 이름에 걸맞는 존재일까’란 고민을.
사실 맹호는, 산골에 있을 때부터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환웅한테로 가곤 했다. 심지어 솔이랑 만나기 훨씬 전부터, 맹호는 죽 그렇게 했다.
자기가 ‘호랑이의 왕’의 핏줄을 타고났단 걸 알게 된 뒤 얼마 안 되어서, 맹호는 사람 모습을 한 누군가를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살아있었던 아버지 말에 따르면, 그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을 다스리는 신에 가까운 자, ‘환웅’인 모양이었다. 물론 맹호는 당시 환웅이 누구인지조차 몰랐지만, 이 뒤 아버지가 가르쳐 준 신화 얘길 들으며 자연스레 자기가 만났던 존재가 무척 대단하단 걸 알게 됐다.
그 뒤로도 환웅은 자주 맹호 일행이 있는 곳으로 찾아왔고, 맹호는 자기의 말로 환웅과 여러 얘길 나눌 수 있었다. 자기가 다른 동물들과 다른 존재였기에 가졌던 불안감이나 무서운 마음도, 환웅은 모두 알아줬고, 마음이 편해지는 여러 이야기들을 그때그때 건네줬다. 맹호가 사람으로 둔갑하는 걸 아버지와 같이 본 자도 환웅이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쩔 줄 모르고 숲을 그저 헤매기만 했을 때도 가끔 나타나서 도와줬던 자도 환웅이었다. 그리고 솔이랑 만난 뒤, 맹호는 환웅과 매우 가까이에서 지낼 수 있게 됐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진 모르겠지만, 환웅은 솔이가 다니게 된 학교에서 국사선생님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맹호를 죽 기다렸던 것처럼.
“아무튼 넌 참 사서 고생이 많다니까. 니가 사람이 아니란 걸 알면 다들 놀라겠다. 아주.”
이번에도 혀를 끌끌 차면서, 환웅은 일단 그 말부터 꺼냈다. 맹호도 그건 잘 알고 있었다. 까치한테 만날 놀림당했던 주된 소재 중 하나였으니까.
“내가 만날 말하잖니. 넌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야. 호랑이의 왕이란 게 무슨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인 줄 아니? 게다가 그걸 빼고도 그래. 호랑이의 왕이고 자시고, 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고. 그래서 내가 만날 말하잖아. 뭐 고민있는 게 있으면 털어놓으라고. 니 힘이 되어주고 싶으니까.”
맹호는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이전부터 맹호는 환웅을 아버지나 다름없이 섬기곤 있었지만, 이 정도로 마음이 넓단 걸 다시금 깨달아서였다. 실제로 만나보면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쯤으로밖에 안 보이는, 어딘지 세상일을 귀찮아하는 모습이 강하게 느껴지는 환웅이지만, 속까지 그런 건 결코 아니었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그 존재가 반만년이 넘는 시간동안 귀찮은 걸 참고 이 세상에 죽 남아있었단 말인가.
“항상 말씀은 고맙지만, 그게 어려워서…”
“그게 무슨 문제니. 중요한 건 자기 존재, 그리고 니 가치를 믿는 거야. 너, ‘행복론’이 뭔지 아냐? 그건 절대 별 게 아니다. 그저 자기가 가진 모든 걸 아끼면 되는 거야. 물론 너한텐 여전히 안 와닿겠지. 근데 그게 진리다. 맹호야.”
“그, 그렇지만 그건 더 어렵잖아요.”
환웅의 말에, 맹호는 드물게도 반론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맹호의 진심이었다.
“저한텐 ‘호랑이의 왕’이란 이름에 안 맞는 약한 데도 많이 있어요. 정말 수없이요. 그런데 그걸 다 아낄 수는 없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
“넌 그렇게 생각한다 그거지?”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선생님도 그, 자기가 가진 게 다 소중하진 않잖아요. 버리고 싶은 것도 있으실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저는…”
맹호는 환웅을 부를 때, 언제부터인가 ‘선생님’이란 말을 쓰고 있었다. 그만큼 환웅은 맹호한테 한층 더 높은 존재였고, 될 수 있는 대로 따르고 싶은 자였다. 물론 환웅이 만사를 귀찮아하는 성격이기에 무조건 따르기만 한 건 결코 아니었지만(오히려 같이 있을 땐 딴죽만 잔뜩 걸곤 했다), 그래도 속으로는 환웅을 무처거 믿고 따랐다.
그런데, 오늘따라 맹호는 자기가 놀랄 만큼 환웅한테 반격하고 있었다. 뭔가 잘못 먹었나, 라고 몇 번이고 의심할 만큼.
하지만 환웅은, 놀랄 만큼 한 치도 망설이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에 맹호랑 농담따먹기하던 투로, 아주 평온하게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다.
“너도 알겠지만, 난 지금 처음에 지니고 있던 힘을 거의 다 잃었다. 그거야 당연하지. 이 땅에 사는 이들은 내 힘이 아니라도 먹고 살 수 있게 됐잖니. 내 힘은 애초부터 이 땅에 사는 이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거야. 그런 내가 반만 년이 흐른 지금, 이렇게 된 건 무척 당연한 일이다.”
“…”
맹호도 그 사실을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원래 환웅은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였기에, 보통 사람들은 생각도 못 하는 힘을 자유자재로 썼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환웅이 쓸 수 있는 힘은 그것과 대볼 때 많이 초라했다. 물론 맹호 때 그랬던 것처럼 ‘사회 정보를 조작해서 사람들을 착각시키는’ 정도라면 아직 쓸 수 있지만, 말 그대로 모든 걸 책임졌던 옛날을 생각하면 우스운 힘이었다.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정보 좀 만져서 그나마 널 안전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것밖에 없지. 하지만 난 지금 내 처지에 불만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다. 물론 이 땅에 사는 이들의 삶까지 바꿀 힘은 이젠 없어. 그건 틀림없지. 하지만 그런 게 무슨 상관이니. 그렇게 오랫동안 다스리고 싶었던 이 땅에, 이렇게나마 죽 있을 수 있는데.”
“선생님…”
맹호는 이제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환웅의 진심이, 전화 너머 여기까지 똑똑히 느껴졌던 것이다. 환웅은 예전부터 죽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얼마나 초라해보이든간에, 자기가 사랑하는 땅에 반만 년이 넘게 남아있을 수 있단 것 자체가 무엇보다 큰 기적이며 행복이라고.
얼마나 우습게 보여도, 얼마나 만만하게 보여도 환웅은 반만 년이 넘는 삶을 살아온 존재인 것이다. 물론 모습이나 상황은 주위가 의심하는 걸 막기 위해 죽 바뀌었겠지만, 그래도 환웅은 이 세상에 분명 죽 살아있었다. 이젠 아무도 자길 필요로 하지 않든 어쨌든, ‘이 땅에 있고 싶다’는 바람만을 위해 죽.
역시 환웅은 자기랑은 댈 수도 없을 만큼 고귀한 존재구나. 맹호는 다시금, 그러한 사실을 몸으로 똑똑히 깨달았다. 자기가 환웅을 따라가기엔 아직 한참 멀었단 사실도 같이.
“뭐, 이렇게 말해도 못 알아들으면 어쩔 수 없지. 그래서, 용건은 끝이냐?”
“아, 네, 그럼…”
결국 맹호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채, 얼떨결에 전화를 끊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묘한 느낌이었지만, 이제와서 어쩔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체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어쨌든 환웅이 격려를 해준 건 분명하단 생각으로, 맹호는 그 묘한 마음을 떨쳐버렸다. 물론,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며칠 뒤인 일요일, 여전히 큰비가 내리고 있는데도 맹호랑 친구들은 다같이 밖에 나와있었다. 도깨비 여자애랑 싸울 날을 대비해서, 같이 긴장도 풀 겸 놀자는 취지였다.
맹호랑 솔이도 오랜만에 시끌벅적한 도심에 나와서 많이 긴장하고 있었다. 물론 이 곳, 남문은 전에 산에 갈 때도 지나갔던 곳이지만, 그냥 지나다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죽 있는 건 여러모로 다른 느낌이었다. 게다가 혼자가 아닌, 같은 동아리 친구들이랑 같이 있는 거라면 더더욱.
이렇게 멀리까지 나와서 사복을 입고있는 건 드문 일이었기에, 맹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몸을 움칫하고 있었다. 옷이라고 해도 청바지에 흰 티셔츠, 그리고 얇은 재킷을 입었을 뿐이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 눈이 신경쓰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솔이 역시 청바지에 긴 잠바를 입고 있었지만, 어쩐지 솔이는 이러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올 만큼 다정해보였다.
까치도 오늘은 그 질려하던 양복 대신, 면바지에 긴 재킷이라는 나름대로 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지금 까치가 맹호 일행과 다른 나이라는 게 너무나도 똑똑히 느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친구처럼 편하게 보이는 사이였는데, 지금은 정말 어른과 아이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맹호도 사복을 입으면 대개 성인으로 알아보긴 하지만, 그래도 사회에서 알아보는 나이가 이렇게 달라진 건 묘하게 아쉬웠다.
저 놈은 아침에 옷 고를 때도 이 모습에 맞는 걸 새로 골라야한다고 엄청 귀찮아했지. 어쨌든 지금은 편해보여서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맹호는 유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동안 유라 쪽에서 눈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유라가 입은 옷은 긴 검은색 치마에 흰색 재킷이라는, 수수하다면 수수한 옷차림이었다. 어떻게 보면 주목받는 걸 맹호만큼이나 꺼릴 것같은 유라다운 옷차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맹호는 자꾸만 유라 쪽으로 고개가 돌아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어쩐지 그게 너무 좋아서, 죽 보고싶었던 것이다.
“어유, 우리 친구는 뭘 보고 계시나?”
“까, 깜짝아!!”
뒤에서 다가온 까치가 갑자기 그러는 바람에, 맹호는 정말로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다. 저 놈은 분명 자기가 뭘 봤는지까지 다 알아챘겠지.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도 장난기는 그대로라니까. 머릿속에선 그런 생각이 쏜살같이 흐르고 있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맹호는 한숨을 쉰 뒤, 어쨌든 유라가 자길 눈치챈 상황에서 더 보고 있을 수도 없었기에 마음을 가다듬고 솔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라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기가 본 거 갖고 또 오해는 안 했으면 좋겠는데. 일단 그렇게 생각해보긴 했지만, 유라가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는지는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그냥 포기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이야, 역시 큰 도시는 다르다니까. 사람도 무진장 많아요. 다들 신나지. 그지?”
“…댁은 남들 표정도 안 보슈?”
남의 생각도 모른 채 여전히 밝은 까치한테 그렇게 대꾸한 뒤, 맹호는 다시 한 번 자기들이 서있는 데를 돌아봤다. 이렇게까지 여러 건물들이 뒤섞여있는 활기넘치는 곳인데, 그 주위를 보기만 해도 아득해지는 높은 돌벽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버스며 차들로 뒤섞인 큰길 한가운데엔, 맹호 역시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커다란 성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분명 여기가 남문이라 했었지. 전에 지나칠 때 솔이한테 들은 말에 따르면, 여기가 이 도시의 ‘시내’인 모양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도심과 전통적인 모습은 서로 어울리지 않다 생각했는데, 오히려 지금 이 광경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이런 도시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텔레비전으로 보던 도시는 맹호조차 기죽을 만큼 드높은 건물로 뒤덮여있어서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는데, 이 곳은 오히려 우스울만치 마음이 편해지는 게 느껴졌다.
…도시도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
여기로 온 지 이제 두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 와서야, 맹호는 그런 생각을 멍하니 했다. 좀 더 일찍 왔으면 좋았을 텐데, 란 후회와 함께. 이렇게까지 비가 거세게 내리면, 이 신기한 거리를 마음껏 돌아다닐 수도 없지 않은가.
“뭐, 비가 이렇게 오는 건 좀 그렇지만, 암튼 모처럼 시내에 나왔으니 실컷 놀자고. 일단 햄버거를 먹은 다음에, 노래방에 갔다가,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면서 군것질 좀 하고, 그 다음엔 아이스크림이라도…”
“아니, 그러니까 넌 여기 먹으러 왔냐고. 장난해, 지금?!”
“아, 그렇지. 저기 소나무 있네. 우산쓰고 찍는 건 좀 그렇긴 하지만, 이왕 온 거 기념사진이나 한 방…”
“야!!”
“우아, 맹호가 화낸다!”
여기까지 와서도 먹을 것 타령밖에 안 하는 까치한테 맹호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솔이는 그것조차 즐거운지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이, 이럴 땐 안 그래줘도 되는데. 원래 소리지르는 걸 그다지 안 좋아하는 맹호였기에, 지금 이런 상황은 그다지 바람직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바로 옆에는.
“…”
유라는 어떻게 끼어들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기색이 아주 또렷한 표정으로, 맹호 및 친구들과 몇 발짝 거리를 둔 채 가만히 서있었다. 그러고 보니 방금 까치한테 반말을 했지. 물론 사정을 아는 솔이는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자기 정체조차 모르는 유라한테는 상황이 달랐다.
어떡하지. 지금 유라는 분명 소외감을 느낀 게 틀림없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메워야 한단 말인가. 그걸 메우기 위해선, 어떻게 해서든 정체를 밝혀야만 하는데.
“그, 유라야. 그…”
“미, 미안! 나는 그, 선생님하고 알고 지냈다고 하니까, 내가 모르는 일도 있겠다 싶어서, 그…”
유라는 오히려 자기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이, 잔뜩 얼굴을 붉힌 채 어쩔 줄 몰랐다. 그리고 그게, 맹호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맹호한테 유라를 당황하게 하려는 생각은 이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아냐. 내가 미안하지. 아무래도 쟤…가 아니라 선생님하고 솔이랑 나는 오랫동안 알고 지냈으니까. 유라 니가 끼기 어려워하는 것도 당연해. 그렇지만 일부러 그러는 건 절대 아니니까…”
“으, 응. 알아.”
그 말에 맹호는 마음을 쓸어내렸지만, 그것만으론 아직 부족했다. 그래서 맹호는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굉장히 어색하면서도, 그 어떤 때보다도 진지한 마음으로.
“그러니까 같이 가자. 옆에서 있음 안 어색할 거야. 그지?”
“으, 응. 고마워. 난…”
여전히 목소리가 떨리는 유라한테, 맹호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유라도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조심스레 옆으로 다가온 뒤, 맹호의 손을 잡았다.
이건 맹호조차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유라가, 밖에서 자기 손을 잡아주고 있는 것이다.
“그, 그…”
맹호는 그런 말을 꺼내려다, 이내 꿀꺽 삼켰다. 어쨌든 지금 유라는 전보다 훨씬 편해보이지 않은가. 그럼 된 것이다. 신경쓸 일은 아무 것도 없을 터였다.
그래서 맹호는, 그 뒤로 유라한테 손을 잡힌 채 시내를 걸어다녔다. 왜 이렇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까. 자기도 그 까닭을 알지 못한 채, 맹호는 꿈을 꾸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런 게 구름 위를 걸어다니는 느낌이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맹호는 지금 유라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무척이나 궁금해하는 자기 자신을 깨달았다. 어쩌면 자기 혼자 들뜬 건지도 모른다, 는 생각과 함께.
결국, 그 날 외출은 그야말로 혼돈의 절정으로 끝났다.
사실 인원들 중 까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늘 사태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까치랑 같이 어딜 나가서 일이 잘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걸 각오하고 나온 맹호한테조차, 오늘은 머리가 핑글핑글 돌 지경이었다.
까치는 이렇게 비가 심하게 오는 날에, 그야말로 혼돈의 절정을 아낌없이 보여줬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패스트푸드점은 물론, 남들이 보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별 상관도 없는 걸 시끄럽게 떠들었다. 아마 이런 놈이 선생님을 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실제로 한 달쯤 전만 해도 맹호랑 같은 학년이었고.
특히 노래방에선 얼마나 시끄럽던지, 맹호가 둘의 사회적 관계를 잠깐 잊고 주먹을 날리고 있을 정도였다. 덕분에 주위에 있던 솔이나 유라는 여러 모로 우스우면서도 이상한 대화를 잔뜩 들을 수 있었다.
“왜, 왜 이래. 너 패륜아야?! 감히 다른 사람도 아닌 선생님을 패고 있어?!”
“아니, 선생님이 선생님다운 모습을 보여야 제대로 대접할 거 아니에요. 이 망할 자식아!!”
물론 다른 애들한테 마이크도 하나 안 넘긴 채 하루동일 자기 노래만 불러제끼는(그것도 음정이 묘하게 엇나간 목소리로) 걸 보면 누구라도 이렇게 말했겠지만, 그래도 맹호는 그 생각만 하면 머리가 지끈대는 것만 같았다. 이걸로 유라가 또 자길 이상하게 안 봤으면 좋겠는데. 이제 와서 엎질러진 물이라 생각하면서도, 맹호는 까치를 두들겨팼던 걸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아이고, 어떤 자식이 선생님을 막 두들겨패요. 말세로세…”
“죽을래…아니, 진짜 한 번 죽을래요?!”
“그냥 존대 빼고 반말을 해! 그딴 말에 무슨 존대니! 아, 아야…”
“서, 선생님!!’
까치가 갑자기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시늉을 하자, 솔이랑 유라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 쪽으로 뛰어갔다. 왜 이럴 땐 자기가 잘못한 것 같을까. 까치가 자기랑 동급생이었던 시절에도 이런 상황이 자주 있었던 걸 떠올리며, 맹호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가뜩이나 오늘은 여러 모로 어지러웠는데.
물론 유라 일도 그랬지만, 맹호한테는 앞으로 닥친 큰일이 있었다. 지금도 거센 비가 이 시내를 뒤덮고 있는 것이다. 이 비를 막기 위해선 어떻게 해서든 도깨비 여자애를 물리쳐야 했다. 그리고, 유라를 위해서도.
맹호도 오늘, 잠깐 들른 화장실에서 몰래 힘을 써 본 바 있었다. 물론 사람이 없는 건 확인한 다음이었다. 써 본 결과, 화장실에 돌풍이 스쳐지나간 것만 같은 느낌이 맹호의 몸을 강타했다. 이번에야말로, 맹호는 도깨비 여자애한테 이길 자격을 얻은 것이다.
그런 생각과 함께 다른 아이들과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맹호는 마음을 바로잡을 수 없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유라한테 조금이나마 말을 걸고 싶었지만, 아까 일 때문에 자꾸만 마음이 망설여졌다.
그러던 와중에도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 드디어 맹호 일행이 지내는 아파트단지까지 다다랐다. 이왕 하는 거 유라네 집까지 바래다주잔 이야기가 나와서, 결국 맹호는 난생 처음 가는 유라네 집 근처로 발을 내디디고 있었다. 물론 아파트단지인 이 동네 특성상 유라네 집도 아파트였지만, 그래도 맹호는 자꾸만 자기 다리가 떨리는 걸 느꼈다.
여전히 비가 거센 가운데, 유라네 집으로 가는 길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러 모로 마음이 불안해진 맹호는, 여전히 바로 옆을 묘한 표정으로 걷는 유라한테 ‘괜찮아. 다 잘 될 거야’란 말을 걸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라도 해서 마음을 달래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은 갑작스레 일어났다. 갑자기 아파트에서, 유라의 여동생이 휙 뛰쳐나온 것이다. 마치 큰 다짐이라도 한 것처럼.
“너, 갑자기…”
“또 잔소리하려는 거지? 아무튼 내 생각은 이만큼도 안 한다니까. 내가 누굴 만나든 무슨 상관인데? 그 정도 참아줬음 될 걸 가지고.”
유라의 말에 이렇게 대꾸하는 유라 여동생을 보고, 맹호는 이 애가 지금 도깨비 여자애랑 만나러 가는 길이란 걸 곧장 알아챘다. 그래서인지, 유라 여동생은 표정이 매우 굳어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불만을 크게 털어놓을 것처럼.
“난 몰라. 이젠 언니를 보는 것만으로도 지긋지긋해. 이젠 참을만큼 참았으니까, 나도 언니처럼 밖에 나돌아다닐 거야. 걔랑 만날 약속도 잡았고.”
“너, 너, 지금 무슨 소릴…?!”
유라가 입을 딱 벌리든 말든, 여동생은 가차없었다. 여동생은 유라를 한 번 노려본 뒤, 이 말만 남긴 채 저 너머로 뛰어가버렸다.
“이젠 나 혼자 집에 갇혀있을 순 없잖아. 나도 이젠 질릴 대로 질렸다고. 알았어?”
맹호가 어쩔 줄 모르고 망설이는 사이, 갑자기 하늘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안 그래도 비가 내리던 하늘이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어느새 천둥번개까지 닥치고 만 것이다.
그리고 맹호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도깨비 여자애는, 오늘이야말로 맹호랑 결판을 짓길 바라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결국 그 날 밤, 맹호 일행은 전혀 예기치않게 유라 여동생을 찾아다니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복잡한 아파트단지를 여기저기 쑤셔봐도, 유라 여동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안 그래도 어두운 밤에 천둥번개까지 더해지니, 앞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이쯤되자, 맹호는 정말 각오하는 수밖에 없었다. 도꺠비 여자애는 정말 맹호를 오늘 때려눕히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이다. 즉, 도깨비 여자애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유라 여동생도 찾아낼 수 없었다. 아니, 만약 찾는다 한들, 아마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만 잔뜩 하다가 정신을 차리니, 맹호 일행은 엉뚱하게도 아주 높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공중에 떠있는 건 결코 아니었다. 주위를 뒤덮은 밝은 불빛들한테 비춰진 주위 모습이 그걸 매우 잘 알려주고 있었다.
맹호 일행이 있는 건, 아파트단지 근처에 있는 대형마트 옥상이었다. 맹호는 대형마트란 게 뭔지 여전히 잘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간간이 텔레비전에서 본 적은 있었다. 분명 솔이랑 같이 장을 볼 때도 여기로 왔을 터였다.
그런데, 대체 여기에 왜 맹호 일행이 있단 말인가.
그렇게 얼떨떨해하는 맹호 일행의 눈앞에, 마치 처음부터 기다리고 있었단 듯 여자애가 천천히 나타났다. 여자애를 비추는 불빛은 약했지만, 그래도 맹호는 눈앞에 있는 게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저 여자애라면, 맹호 일행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도 불가능하진 않겠지.
그 사람, 도깨비 여자애는 표정을 알아볼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온 뒤, 맹호를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맹호 역시,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싸울 때’가 됐단 걸 잘 알고 있었다.
도깨비 여자애도 맹호의 마음을 읽었는지, 손에 쥐고있던 부채를 가만히 들어올렸다. 그리고 이 말과 함께, 부채를 든 팔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싸우자. 호랑이의 왕.”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싸움이 시작되었다.
도깨비 여자애는, 전과 다름없이 너무나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거기에 맹호는 잠깐 겁을 집어먹었지만, 이내 자기 옆에 있는 친구들을 보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번을 놓치면, 정말 끝장이다.
맹호의 머릿속을, 이러한 생각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저기에 있는 친구들은 자기를 누구보다도 믿고있지 않은가. 그 친구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오늘만은 도깨비 여자애한테 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맹호는 팔을 한 번 크게 내리쳤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공격하기 위해서. 그리고…
“에잇!”
그런 말과 함께 팔이 공기를 가르자, 지금까진 생각도 못한 큰바람이 도깨비 여자애한테로 곧잘 날아갔다. 맹호 자신도 자기 힘에 놀라 입이 벌어진 가운데, 도깨비 여자애가 바람에 밀려 옥상 저편으로 밀려났다. 맹호의 바람이 도깨비 여자애한테 맞은 건 분명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 이렇게 나오셨다?”
도깨비 여자애도 지금껏 맹호의 힘을 같잖게 봐서인지, 처음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이, 맹호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자기도 드디어 저 여자애한테 한 방 먹일만한 힘까지 다다른 것이다. 이렇게 기쁜 순간은 없었다.
하지만, 도깨비 여자애는 그다지 풀죽은 기색이 아니었다.
“…고작 호랑이의 왕이 이 정도로 기뻐한다고? 내가 그런 걸 그냥 내버려둘 거 같아?”
이상하게도, 도깨비 여자애는 ‘자기가 공격받았다’가 아니라, ‘맹호가 자길 공격한 걸 보고 좋아한다’는 게 특히 더 밉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대체 왜 그러지? 맹호가 그렇게 생각하기도 전에, 도깨비 여자애는 천천히 이 쪽으로 다가오더니, 맹호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 눈빛은, 분명 아까랑은 아주 딴판이었다. 마치 오늘 널 꼭 쓰러뜨리겠다는 듯, 도깨비 여자애는 맹호를 강하게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뭘 좀 오해하는 모양인데, 난 그딴 걸 바라려고 너랑 싸우잔 게 아냐. 각잡고 안 하면 나도 이번엔 안 봐준다? 오케이?”
“그, 글쎄, 난 무슨 말인지…으악!!”
맹호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지금까진 생각지도 못한 거센 바람이 이리로 날아왔다. 도깨비 여자애가, 정말로 온힘을 다해 맹호 쪽으로 부채를 휘둘렀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천둥번개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도깨비 여자애의 이번 바람은 정말로 비바람 못지않았다. 맹호는 맨 처음 도깨비 여자애랑 만났을 때처럼, 옥상 끝으로 몸이 날아간 걸 느꼈다. 지금 도깨비 여자애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길 쓰러뜨릴 속셈인 모양이었다.
“무슨 말이냐고? 한 번 생각해보시지. 내 바람이라도 실컷 맞으면서. 그럼 잘 알 거 아니겠니.”
“아니, 허, 그게, 헉, 아니라…”
도깨비 여자애가 말이 끝날 때마다 자기 팔을 힘있게 내리치면, 맹호 쪽으로 비바람보다 훨씬 더 강한 무언가가 사정없이 밀려들어왔다. 대체 저런 힘을 어떻게 숨긴 거지. 맹호는 어떻게 해서든 일어나려 했지만, 그 때마다 바람에 맞아 몸이 자꾸 비틀거렸다. 이래서는 공격은커녕, 자세를 잡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이겨야 하는데.
마음은 그걸 알고 있는데도, 몸은 자기 맘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일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바람한테 사정없이 밀려나고 있었다. 이러다가 자기 몸이 공중에 붕 뜨는 건 아닐까. 겁에 질려 팔을 휘두르려 했지만, 강한 바람은 그것조차 봐주지 않았다.
…이대로 밀리고 마는 걸까.
맹호가 그런 생각에 빠진 걸 알아챘는지, 도깨비 여자애는 점점 더 강한 압박을 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맹호를 아까보다 훨씬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내가 전에도 말했지. 넌 이 세상에 안 어울린다고. 지금 니 모습이 ‘호랑이의 왕’이랑 걸맞기나 하니? 내가 볼 때, 넌 그런 말 들을 자격도 없는데 뭐. 나한테도 이렇게 당하잖아. 내가 밤의 세상에서 가장 센 것도 아닌데.”
“그, 그건…”
힘없는 목소리로 반론하려 했지만, 당연히 입이 제대로 움직일 리 없었다. 맹호 역시, 마음 한구석에선 아직까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밤에 사는 존재들도, 나까지 해서 이 세상에서 제대로 지내는 애들은 몇 안 돼. 다들 겉돈다고. 그만큼 힘든 일이야. 이 정신머리로 니가 버텨낼 수 있을 거 같니?”
도꺠비 여자애는 그런 자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더 세게 맹호를 짓누르려 하고있었다. 마치 날카로운 화살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말 하나하나가 맹호의 가슴을 푹푹 찔러왔다.
물론 자기가 ‘호랑이의 왕’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단 건,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 맹호의 아버지가 하늘로 간 바로 그 때쯤부터.
하지만, 맹호는 어떻게 해서든 그걸 부정하려 했다. 만약 그 말이 맞다면, 맹호는 살아있을 까닭이 어디에도 없어서였다. ‘호랑이의 왕’이란 이름을 더럽히며 사느니, 차라리 얼른 자기가 사라져버리는 게 나았다. 그래서 맹호는, 자기가 ‘호랑이의 왕’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단 걸 애써 무시하며 살려 애썼다.
하지만, 이렇게 퍼붓는 빗속에선 그것조차 맘대로 되지 않았다. 만약 자기가 ‘호랑이의 왕’이라 할 수 없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냥 사람 세상에서 지내도 아무 문제가 없지 않을까. 하지만 어쨌든 ‘사람’이 아닌 맹호가, 과연 이 세상에서 피해 안 주고 잘 지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정신이 없던 맹호는, 도깨비 여자애가 자기한테 강한 바람을 내던졌단 사실도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날카롭게 품속으로 파고든 바람은 맹호의 정곡을 제대로 푹 찔렀다. 어떻게 대처할 생각도 못한 채, 맹호의 다리가 옥상바닥에 맥없이 쓰러졌다.
이젠 끝났다. 더 이상 나한텐 아무 힘도 없어.
맹호의 눈앞이 새까맣게 바뀔 때쯤, 저쪽 너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지금껏 누구보다 가까운 데서 자길 봐온, 같은 처지의 친구가 하고 있는 말이 틀림없었다.
“야! 맹호야! 아직 포기하면 안 돼! 넌 할 수 있다고!!”
이젠 그런 말에조차 지친 맹호의 귀에, 그 친구, 까치의 목소리가 다시 닿았다. 마치 이것만은 꼭 들어야한다는 것처럼.
“니가 호랑이의 왕이란 걸 절대 잊으면 안 돼! 알았지?”
그 말을 들은 순간, 맹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모습이 있었다. 너무나 아득한 옛일이라서, 이미 맹호 자신도 잊어버린 지 오래였던 모습이었다.
지금 맹호의 눈앞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의 풍경이 펼쳐져있었다. 지금까진 떠올리는 것조차 힘들어서, 애써 모른 척하던 기억이었다.
맹호의 아버지는, 추운 겨울날 험한 산속에서 얼어붙은 채 하늘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 때 원래 모습이었던 맹호는, 좀처럼 아버지 곁을 떠나지 못한 채 그저 흐느끼고만 있었다. 물론 몸은 그러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마음으로는 그랬다.
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인데도, 놀랄 만큼 평온한 모습이었다. 보내드리는 입장인 아들은 이렇게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은 마음인데, 오히려 당사자인 아버지는 그런 맹호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 눈빛마저 점점 약해질즈음, 맹호 아버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맹호한테만 들리는 목소리로, 나지막히 이런 말을 남겼다.
-네가 ‘호랑이의 왕’이란 사실을 잊지 말거라.
그게 맹호가 들은,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 맹호는 이 때, 마치 뒷통수를 누군가 갈긴 것만 같은 충격을 받았다. 자기가 지금껏, 얼마나 큰 착각을 했는지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맹호는 지금껏, 아버지의 말이 ‘넌 꼭 호랑이의 왕다워야 한다’는 뜻이라 믿고 있었다. 아버지는 자기가 호랑이의 왕다운 힘을 지니지 않으면, 살 가치조차 없는 존재라 말했다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든 맹호 입장에서 되돌아보면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아버지는 맹호한테 강한 부담감을 안겨주려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맹호의 아버지는 예전부터 맹호가 ‘호랑이의 왕’이란 이름을 버겁게 여기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그런 말을 남긴 것이다.
-네 존재를 자랑스럽게 여겨라. 너를 소중히 해라.
맹호 아버지가 전하고 싶었던 건, 지금껏 맹호를 옭아매던 것과 아주 다른 거였다. 그저 예전에 환웅이 말했던 대로, ‘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라’란 말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맹호는 아버지의 말을 원래 뜻과 정반대로 알아듣고 말았다. 죽 ‘아버지보다 떨어지는 존재’란 생각에, 그 말이 사실은 어떤 뜻인지조차 짐작하지 못하고 살았다.
즉, 맹호는 고작 자기 착각에 빠진 채 쓸데없는 걱정만 하면서 오랜 시간을 지내왔던 것이다. 이렇게 부끄러운 일이 어디있단 말인가. 그 수많은 고민들이 다 한낱 헛생각이었다니.
결국 자기자신한테 놀아난 꼴이 되자, 맹호는 무척 허탈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분명 그게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상, 꼭 신경써줘야 하는 존재가 있지 않은가. 도깨비 여자애랑 싸우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존재’가.
그런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보면, 맹호 눈앞엔 누구보다도 낯이 익은 존재가 있었다. 맹호가 이 존재를 몰라볼 리 없다. 그도 그럴 것이.
“…”
저 너머에 있는 건, 틀림없이 어릴 적 자기 모습이었으니까.
어릴 적 자기자신은, 맹호 자신이 봐도 너무나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갈 데가 없는 맹호는 정처없이 남들한테 안 보이게 한 채 깊은 산골을 떠돌고 있었다. 그 긴 시간동안, 얼마나 외로운 마음을 눌러참고 있었는지는 맹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자기가 직접 겪은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맹호는 눈앞에 있는 자기자신이 남같지 않았다. 아니, 사실 남도 아니었다. 옛날 자기도, 지금 자기도, 맹호는 그 누구보다 잘 아니까.
맹호는 잠깐 망설였지만, 지금 자기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거란 걸 알고 있었기에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뒤, 당연히 원래 모습인 ‘오래 전’ 자기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렇게 다가간 뒤, 맹호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물론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도 있었지만, 다른 까닭이 더 컸다.
자기가 봐도, 옛날 맹호는 너무나 강한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명색이 호랑이인데도, 어릴 적 맹호는 지금보다 훨씬 작아보였다. 그 크기는 물론, 가지고 있는 마음조차도.
자긴 이렇게 무거운 짐을 이고 오랜 세월을 보내왔단 말인가. 이렇게 강한 열등감에 압박감을 가지고, 그 긴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단 말인가.
“…”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맹호는 웅크리고 누운 자기자신 옆에 가만히 주저앉아있었다. 그리고, 마치 뭐에라도 홀린 듯 자기를 다정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그 때, 맹호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자기는 오래 전부터, 누군가 이런 식으로 대해주는 걸 죽 바라고 있었단 사실을.
“왜 이런 사실을 이렇게 늦게…”
혼자 그런 말을 중얼거리면서도, 맹호는 ‘자기’를 쓰다듬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냥, 오랫동안 죽 그러고 싶었다.
맹호는 다시금, 아버지가 했던 말을 되돌아봤다. 아버지는 자기가 ‘호랑이의 왕’이 되기 부끄럽지 않은 존재라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맹호는 더 이상 부끄러워할 게 없었다.
자긴 절대 부끄러운 존재도 뭣도 아니었다. 그저,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하는 소중한 존재일 뿐이었다. 다른 존재들은 벌써 눈치챈 걸, 맹호 혼자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알아챘으면, 더 이상 자기 자신하고만 있을 필요는 없었다.
“…”
맹호가 자기 자신한테서 눈을 뗀 뒤 ‘현실’로 고개를 돌리면, 아까랑 전혀 달라진 게 없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져있었다. 도깨비 여자애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맹호 눈앞에 버티고 섰으며, 다른 아이들은 저만치에서 그런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강한 빗줄기가, 마치 정신차리라듯이 맹호의 몸을 거세게 내리쳤다. 시간은, 여전히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맹호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지극히 자기가 쓰는 게 당연한, ‘호랑이의 왕’의 힘을 마음껏 쓰는 거였다.
“어머, 자신이 있나 보네? 다 포기한 줄 알았는데.”
도깨비 여자애는 그런 말을 해왔지만, 지금 맹호한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맹호는 정신을 집중하고, 자기가 가진 ‘힘’을 조심스레 가다듬었다. 이제 자기가 호랑이의 왕이란 걸 당연하게 여기는 맹호한테, ‘진짜 힘’같은 건 이만큼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맹호는 마음놓고 자기 힘을 쓸 수 있었다. 자기가 쓰는 힘이, 곧 ‘호랑이의 왕’의 힘이니까.
“너…?”
맹호는 조심스럽게 팔을 들며, 도깨비 여자애한테로 몸을 돌렸다. 도깨비 여자애가 긴장한 모습으로 자길 보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자기 힘을 믿고있는 맹호한테, 이제 망설일 건 하나도 없었다.
“너, 눈빛이…”
도깨비 여자애가 그런 말을 꺼냈지만, 맹호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때, 맹호는 아버지가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호랑이의 왕’의 힘을 보여줄 때면, 항상 눈동자가 금빛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사람 모습일 때나 원래 모습일 때나, 호랑이의 왕의 힘을 쓰면 꼭 그렇게 되곤 했다.
혹시, 도깨비 여자애는 자기 눈동자가 그렇게 바뀐 걸 본 걸까.
결국 ‘호랑이의 왕’의 힘은 자기가 그럴 자격이 있단 걸 받아들여야 비로소 발휘되는 거란 게, 이번 일로 똑똑히 증명된 셈이었다.
그리고 도깨비 여자애도, 그대로 당황하기만 하진 않았다.
“뭐, 잘은 모르겠는데, 암튼 싸울 맛은 난 거지? 그게 더 보기 좋네. 자, 가자고.”
도깨비 여자애는 그 말과 함께, 이렇게 거센 빗속에서도 허리를 곧게 펴고 눈빛을 바꿨다. 마치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린 것 같았다. 맹호도 이젠 꺼릴 게 하나도 없었다. 맹호는 당당하게, 자기가 쓰는 게 당연한 이 힘을 마음껏 쓸 생각이었다.
그래서 맹호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팔을 든 뒤 도깨비 여자애 쪽으로 힘껏 내리쳤다. 아무런 긴장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랬더니.
“으악!”
도깨비 여자애는 맹호가 당했던 거랑은 댈 수도 없을 만큼, 한 번에 옥상 끝자락으로 날아가더니 시원하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바람이 얼마나 세던지, 여기에 있는 맹호조차도 자기가 만들어낸 ‘기운’을 똑똑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때, 맹호는 다시금 깨달았다. 자기 힘은, 결코 약한 게 아니었다. 지금까진 자기가 ‘약하다’고 믿고 있었기에 그렇게 되었을 뿐, 자기가 ‘호랑이의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여기면 알아서 원래 힘이 발휘되는 것이었다.
맹호는 원래부터, 충분히 ‘호랑이의 왕’이었다. 단지 자기가 그럴 리 없다 생각했기에, 지금껏 이렇게나 고민을 껴안고 지내게 되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분명, 하늘로 가기 전 맹호한테 그걸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이란 사실을. 그리고 환웅이 말했던 ‘행복론’도, 분명 이런 말인 게 틀림없었다. 맹호는 이제야. 환웅의 깊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아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앞으론 어떻게 될까. 맹호가 조심스레 아직 엉덩방아를 찧은 채인 도깨비 여자애를 쳐다보고 있을 때.
“으하하하핫!”
갑자기 도깨비 여자애가,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시원하게 웃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맹호도 도저히 알 수 없었기에, 벙찐 표정으로 도깨비 여자애를 쳐다봤다.
그러자, 도깨비 여자애는 여전히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말투로.
“이게 진짜 ‘호랑이의 왕’의 힘이었단 말이지? 어유, 시원해라. 오늘 아주 잘 알았네. 진작 이렇게 하지 그랬어. 그럼 먼저 포기했지.”
“…어?”
맹호는 점점 더 벙찐 느낌이었지만, 아무튼 도깨비 여자애가 자기 힘에 감탄했단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자기 힘이 대단했단 말인가. 맹호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도깨비 여자애는 이번 일로 기분이 아주 잘 풀린 모양이었다.
“이렇게 비바람이 부는데 더 이상 같이 놀다간 죽겠지. 공중에서 싸운다고 해도 내가 밀리지 않을까? 너 정도면 한 방에 다 날릴 거 같은데 뭐.”
“그, 그렇게까지 충격받았어?”
“뭐, 충격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아무튼 좋은 깨달음이었다 이거야. 어차피 나같은 존재가 니 생각에 뭐라하는 것도 그렇고, 이 세상에서 지내고 싶음 맘대로 해. 나도 너한테 엄청 관심이 생겼으니까. 가까이에서 지켜봐야지. 내가 질릴 때까지.”
“무, 무슨 소릴…”
“아무튼 니가 이겼어. 호랑이의 왕. 잘 싸워줘서 고맙다. 정신이 확 드네, 아주.”
도깨비 여자애는 그 말과 함께, 맹호 앞으로 성큼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맹호는 얼떨결에 손을 내밀어 악수했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은 잘 알 수 없었다.
자긴 정말 ‘이긴’ 걸까.
이젠 정말, 마음을 놓아도 되는 걸까.
“어유. 얘가 안 믿네. 괜찮대도. 이젠 맘놔도…”
도깨비 여자애는 그런 말과 함께, 맹호를 세게 껴안았다. 그 따뜻한 기운을 느끼고서야, 맹호는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란 걸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자긴, 결국 도깨비 여자애한테 이긴 것이다.
‘호랑이의 왕’의 힘을 너무나 당연하게 써서, 쓰러뜨러야 할 상대를 물리친 것이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은 갑작스레 찾아왔다.
“자, 잠깐만. 저기있는 건 뭐야?”
“…뭔데?”
드물게도 까치가 당황하는 말투로 그렇게 말하는 게 들리자, 맹호는 아무 생각없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까치가 있는 쪽엔, 뭐라 말할 수 없는 새까만 ‘존재’들이 맹호 일행이 있는 할인마트 옥상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5층짜리 건물 옥상 위로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그 새까만 무언가는, 마치 맹호 일행을 하늘로 끌고 갈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그런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맹호 입장에선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젠 다 끝나지 않았던가. 그런 생각으로 도깨비 여자애를 보자.
“일났네…”
도깨비 여자애 역시, 허를 찔린 듯한 목소리와 함께 저 너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을 짐작할 수조차 없는 맹호랑 달리, 그래도 어쩐지 감은 잡힌 듯한 표정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언질을 할 걸 그랬네. 근데 너 정도면…아마도…”
“…뭐야?”
난생 처음으로 도깨비 여자애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자, 맹호는 이제 답답해서 속이 핑글핑글 돌 것 같았다. 도깨비 여자애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지금까진 들을 수 없었던 빠른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밤의 세상은 어두운 감정들로 만들어진 거라고. 그리고 니가 방금, 제대로 ‘호랑이의 왕’의 힘을 썼으니까…”
“잠깐, 그런데 니가 몰랐단 말이야?”
“이렇게 많이 올 줄은 몰랐지. 애초에 니만한 힘 없음 쟤들 볼 일도 없어. 나도 몇 번 본 게 단데 뭐. 온다고 해도 니 힘으로 분명 어떻게 될 거라 믿었고…”
“서, 설명이 너무 늦은 거 아냐?!”
맹호가 어두운 밤에 그렇게 외쳐본들, 이미 때는 너무 늦었다. 그 새까만 존재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잘못하다간 공중에 뜬 파도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걸 쓸고도 남을 만큼 몰려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막는 방법은 없어?”
“그거야 있지. 니 힘을 쓰면 되잖아. 근데 이번엔 너무 많다. 일단 나도 돕긴 돕겠는데…”
도깨비 여자애는 이 말과 함께, 갖고 있던 부채를 세게 휘둘렀다. 하지만 그 묵직하리만치 깊은 어둠한테는, 그야말로 산들바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렇게 큰 비가 내리고 있는 와중에도, 저 어둠들은 약한 모습 하나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 진짜 죽는 거 아냐?”
드물게도 까치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지만, 맹호 귀엔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저 새까만 물체들은 보기만 해도 치가 떨릴 정도로 흉악했다. 제아무리 저승사자라 해도, 이렇게까지 보기만 해도 겁이 나진 않을 터였다. 사람이 품는 어두운 감정은 이렇게나 묵직한 것이었던가. 이렇게나, 대하기 어려운 것이었던가.
“호랑이의 왕이란 힘이, 이렇게 대단한 거였어?”
“당연하지. 절대적인 힘 아니니. 아무튼 얼른 처리하자. 안 그래도 비까지 오는데, 저 이상 온다 생각하면…”
맹호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아까보다 훨씬 더 세게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 바람조차 짙은 어둠한텐 무용지물이었다. 너무나 강한 감정이기에, 맹호가 일으키는 힘조차 제대로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호랑이의 왕’의 힘이 있는데도, 안 되는 게 있단 말인가.
맹호의 마음은, 저만치에서 자기들을 보고 있는 친구들한테로 옮아갔다. 분명 솔이도 내색은 안 하지만 겁내고 있겠지. 유라는 말할 것도 없을 터였다. 게다가 저 새까만 것들이 여기로 다다르면, 더 심각한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사람 힘으로는 결국 한계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맹호는 순간, 그런 생각을 한 뒤 깊은 생각에 빠졌다. 물론, 마음같아선 지금 당장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저 징그러운 어둠을 물리치고 싶었다. 게다가 저 놈들을 없애지 않으면, 맹호 일행은 영영 평온한 삶을 되찾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엔 자기 본모습을 모르는 아이가 한 명 있었다. 게다가 그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유라였다.
아무리 자기가 호랑이의 왕인 건 당연하다 여기게 된 맹호라 할지라도, 유라가 자기를 피하는 것만은 무서웠다. 그나마 지금처럼 사이가 좋아졌는데, 다시 어색한 사이가 되는 건 많이 겁났던 것이다. 어쩌면 저 어둠들도, 사람 모습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혹시 잘만 하면.
“야, 맹호야! 그냥 돌아가, 돌아가라고!!”
멀리서 까치가 재촉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맹호는 좀처럼 마음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얼른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으로 팔을 휘둘러보지만, 여전히 그 어두운 것들은 흐트러지는 모습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마치 자기들이 밤인 것처럼. 천둥번개조차 자기 자신인 것처럼.
그 때, 저 멀리에서 비명이 들렸다.
그리고 그 비명의 주인은, 다름아닌.
“유라야!!”
맹호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새까만 존재들이 유라 쪽으로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왜 하필이면 저 쪽을 먼저 고른 걸까. 맹호는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걸 느꼈다.
이젠 더 이상 고민할 시간조차 없구나.
그런 생각이 끝나자마자, 맹호는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리고 앞으로 몸을 숙인 뒤, 곧장.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에서 가볍게 재주를 넘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어?”
그런 유라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맹호의 몸은 이런 빗속인데도 너무나 가벼웠다. 그렇게 시원하게 재주를 넘은 뒤, 맹호는 자기 몸이 바뀌고 있단 걸 깨달았다.
아니, ‘바뀐다’는 말은 조금 잘못되었다. 누가 뭐라 한들, ‘지금부터 바뀌는 모습’이 맹호의 원래 모습이었으니까.
맹호는 자기 몸이, ‘사람’보다 훨씬 더 큼직해지고 있단 걸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손톱과 발톱이 누군가를 쓰러뜨릴 수 있을만큼 날카로워졌다.
안 그래도 날카로웠던 눈이 좀 더 밝아져서, 이젠 이렇게 큰 비가 내리는 어두운 밤마저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자세와 굵직해진 팔다리가, 지금 맹호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단 사실을 잘 알려주고 있었다.
원래 모습으로 이러고 있으니까 어쩐지 어색한데.
아까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느껴지는 거센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원래대로 돌아온’ 맹호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건 너무나 오랜만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복잡한 도시에서 원래 모습을 하고있는 건 거의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저 새까만 것들을 어떻게 안 하면,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맹호는 자세를 가다듬고, 그 어둠들한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무 망설임도 없이, 옥상을 넘어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호랑이의 왕’이라면, 이렇게 공중에 뜨거나 남들 눈에 안 보이게 할 수 있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맹호는 이 정도로도 부족하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자기 몸이 허공을 가르고 있단 걸 몸으로 느끼면서, 맹호는 그 새까만 어둠들한테로 달려간 뒤, 그 추악한 것들을 하나하나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물론 다른 존재들이었다면 닿기만 해도 아주 위험하겠지만, ‘지금’ 맹호한테는 그럴 일이 없었다. 호랑이는 예로부터 나쁜 기운을 멀리하는 힘을 지니고 태어나는 존재였다. 하물며 ‘호랑이의 왕’의 힘을 마음껏 쓰고 있는 맹호한테, 지금 적수가 될 만한 존재가 있을 리 없다.
그렇게 맹호가 건물 주위를 돌며 어둠을 먹고 있으니, 남은 어둠들은 뭔가 낌새를 챈 듯 걸음아 나살려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놈들은 혹시, 자기가 누군지도 몰랐던 게 아닐까. 사람 모습일 땐 그저 강한 힘을 내뿜는 존재였을 뿐이니, 판단할 능력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저 어둠들이 이 상황을 짐작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따지고 보면 어둠은 그저 강한 힘에 이끌려온 ‘감정’일 뿐이니까.
그건 그렇고, 이렇게 ‘야생’에 가까운 짓을 해본 게 몇 년만일까.
산골에서 지낼 때부터 학교에 다니느라 자연을 대할 일이 별로 없었던 맹호는, 지금 이 순간이 묘하게 신선했다. 하지만 맹호는 원래 야생에서 자랐으며, 야생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존재였다. 거꾸로 말하자면, 지금 이 모습이 사실은 맹호의 본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야생에서 지낼 때처럼 거침없이 어둠을 먹어치우면서, 맹호는 아직 자기한테 이런 모습이 남아있단 게 신기하면서도 기쁘다 생각했다.
어쨌든 그나마 남아있던 어둠들도 모두 먹어치우자, 맹호는 드디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원래 있던 옥상으로 돌아가자, 도깨비 여자애가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맹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무척 대단한 거라도 본 것처럼.
일단 옥상에 발을 내디딘 뒤, 맹호는 조심스레 재주를 넘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원래 모습으로 재주를 넘는 게 웃긴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이 모습 그대로 여기에 있을 순 없었다. 맹호는, 사람 세상에선 될 수 있는 대로 자연스럽게 있고 싶었던 것이다.
시원하게 재주를 넘고 나자, 맹호는 자기가 사람으로 바뀌고 있단 걸 느꼈다. 털이 사라져 옥상에서 부는 차가운 바람이 맨살을 쿡쿡 찔렀으며, 네 발로 딛고 서 있던 땅도 두 발만으로 딛을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정신이 들자, 맹호는 눈앞에 도깨비 여자애가 있단 걸 깨달았다. 도꺠비 여자애는 여전히 눈을 반짝인 채, 맹호한테 곧장 이런 말을 건넸다.
“이야, 너 너무 멋지더라. 내가 이래서 ‘호랑이의 왕’하고 붙으려 그랬다니까. 근데 처음부터 내가 덤빌 상대는 아니었네. 내가 졌다.”
“그, 그렇게 민망하게까진 안 해도…”
“뭐가 민망한데? 방금 무지 멋있었잖아. 그 ‘호랑이의 왕’이랑 이만큼 싸운 것만으로도 난 무지 즐거웠는데 뭐. 고맙다.”
그 말과 함께, 도깨비 여자애는 맹호한테 오른손을 내밀었다. 얼떨떨해하면서도, 맹호 역시 손을 내민 뒤 세게 흔들었다. 이젠 정말로 괜찮겠지, 란 생각에 마음을 놓으려는 순간.
“…”
맹호는 그 때, 중요한 걸 두 개나 깨달았다. 하나는 지금 자기가 분명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알몸이란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저…”
유라가, 지금 자기 모습을 ‘똑똑히’ 지켜봤을 거란 사실이었다.
맹호는 정신이 멍해져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지금 당장 들어가고 싶었다. 일단 어떻게 해서든 주위에 있는 젖은 바지를 입긴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대체 유라한테 이걸 어떻게 변명해야 한단 말인가. 자기 정체조차 모르는 아이 앞에서, 자긴 대체 무슨 짓을.
맹호는 이미, ‘자기가 남들과 다른 존재’란 사실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기에 이런 상황이 오는 걸 혼자 겁내고 있었다. 물론, 이제 맹호는 자기 자신을 부끄럽다고 여기진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맹호는 보통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게다가 자기 정체를 알고 있는 건 이 세상에서 솔이네 가족하고 까치, 그리고 환웅 및 높은 분들밖에 없었다.
거절당하면 어쩌지.
그 생각을 하자, 맹호는 등에 소름이 이는 걸 느꼈다. 지금껏 어둠을 먹느라 그런 생각을 전혀 못 했는데, 갑작스레 이런 고난에 부닥치게 된 것이다. 어쩌면 좋지. 맹호한테는 아무런 뾰족한 생각도 나지 않았다. 뭐라고 변명한다. 이제 어떻게 하지. 어쩌면.
그 때였다.
“…유라야?”
맹호는 그 때, 등뒤에서 누가 자기를 꼭 껴안고 있단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맹호는 어쩐지 무척 잘 알 것 같았다.
그 아이, 유라는 지금 맹호를 분명히 받아준 것이다. 그것도 맹호가 전혀 상상도 못 한 방법으로.
“그, 유라야. 나, 난…”
맹호는 어떻게든 말을 이으려 했지만, 도저히 말이 더 나오지 않았다. 너무나 심장이 두근대는 나머지, 잘못하다간 정말로 터져버릴 거 같았다. 게다가 상반신은 여전히 알몸이었기 때문에, 유라가 끌어안는 따뜻한 느낌이 정말 온몸으로 전해져왔다.
그런데, 이럴 땐 고개를 돌려야 하는 걸까. 그런 식으로 맹호가 망설이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유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미안. 내가 나쁜 짓했지? 이런 줄은, 그, 진짜 몰라서…”
이쯤되니, 맹호는 정말로 참을 수 없어졌다. 그래서 여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유라가 있을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랬더니, 거기에 펼쳐진 풍경은.
“…어, 어?”
맹호는 지금, 전혀 믿기지 않는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었다. 보름달이 떠있는데도 이렇게 어두운 밤에, 눈부시리만치 선명한 밤무지개가 떠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거셌던 천둥번개도, 이젠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새로운 내일을 안내해주는 것처럼, 무지개는 저 너머에서 그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환한 밤의 불빛조차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물론 무지개 쪽에 가만히 서있었던 건.
“무지 예쁘다. 그지?”
분명, 틀림없는 유라의 모습이었다.
맹호가 이 꿈만 같은 현실에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데, 갑자기 아랫쪽에서 쿵쾅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지? 이런 한밤중에 소리가 들리는 까닭을 알 수 없어서, 맹호가 멍해있을 때.
“언니,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듣고, 맹호는 드디어 발소리의 정체를 알아챘다. 그 사람은 분명 유라의 여동생임이 틀림없었다. 아마 도깨비 여자애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방법을 마련했을 터였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맹호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 딱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유라 여동생은, 모든 걸 알고 있단 사실이었다.
“그, 언니, 다 듣고 있었어. 그 애가 만난 다음 말해주더라. 여기서 기다리라던데…살다보니 참 별일이 다 있네. 그지?”
유라는 아무 말도 않은 채, 여동생 쪽으로 다가간 뒤 가만히 껴안아줬다. 유라 여동생 역시, 웬일로 얌전히 유라 품속에 있었다. 마치 둘 사이에 있는 묵은 감정을 씻어내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제 정말, 모든 게 끝난 걸까.
너무나 많은 감정이 북받쳐올라서인지, 맹호는 어쩌면 좋을지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했다. 지금이 맹호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라고. 그리고…
“아, 그러고 보니 무지개가 뜨면 호랑이가 장가를 간다고…”
“야, 조용히 안 해?!”
이젠 숨길 것도 뭣도 없었으므로, 맹호는 까치한테 얼른 화를 냈다. 대체 왜 갑자기 저 놈은 이런 말을 꺼내는 걸까. 자긴 아직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는데.
“그, 그러니까 그 말은, 그…”
“아니야, 유라야. 오해라니까. 정말로!”
솔이가 고개를 갸웃대는 와중에, 유라는 그 뜻을 알아챘는지 자꾸만 말을 더듬었다. 대체 왜 일이 이렇게 되는 걸까. 맹호는 진땀을 빼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변명을 하려 애썼다. 맹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으니까. 아직 이런 이야긴 자기한테 너무 일렀던 것이다. 어차피 지금 이 땅에 자기랑 관계를 맺을 이성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어쨌든,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한 건 분명했다.
지금 맹호는, 두말할 것도 없이 ‘행복’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