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의 왕과 행복론  3. 심기일전으로 보내는 나날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세상은 다음날이 되어있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다시피한 맹호는,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바깥을 쳐다봤다. 자기 눈이 잘못되기라도 한 걸까. 하늘이 두꺼운 구름으로 덮인 건 이전과 같지만, 뭔가 크게 달라진 게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마치 하늘에서 부슬비가 내리는 것같은 느낌이.
자기 생각에 정신이 확 들자, 맹호는 당장 몸을 일으켜 창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자기 앞에 펼쳐진 풍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오늘도 대체로 맑은 가운데, 유독 경기 남부, 특히 수원에서만 죽 흐린 날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은 가벼운 부슬비가 내릴 전망이며…
거실에서 들리는 텔레비전 소리가, 안 그래도 어지러운 맹호의 마음을 더 휘저어놓고 있었다. 자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맹호는 한동안 가만히 그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렇게 어지러운 맹호를 내버려둔 채, 시간은 오늘도 가만히 흘러간다.
“자, 그러니까 여기서 뭐가 중요한가 하면, 어디 보자, 이쯤…그래그래, 이게 특히 중요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임기응변으로 수업할 때가 상당히 눈에 띄는 까치의 목소리를 들으며, 맹호는 교과서에 집중하는 대신 딴짓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빈 노트에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깨작깨작 쓰고 있는 짓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마음이 어지러워서 그런지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그저 자기가 수업하고 한 걸음씩 멀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도깨비 여자애고 뭐고 자기가 더 버틸 수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만 하면 맹호는 다시 우울해졌지만, 그렇다고 이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어제 일도 그렇지만, 이걸 포기하면 자기가 ‘호랑이의 왕’이라 당당하게 말할 수 없어서였다. 안 그래도 이 이름에 자신이 없는데, 그런 꼴까지 보였다간 지금 여기에 없는 아버지한테 고개를 들 수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맹호는 어제 분명히 스스로 다짐했을 터였다. 아직 아무 것도 포기할 수 없다고. 자기는 유라한테 다가가고 말겠다고.
그런 생각까지 다다랐으면, 결론은 나온 거나 마찬가지다. 맹호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답답하더라도 조금만 더 용기를 내는 거였다. 아무리 상황이 급하다 하더라도, 하나씩 처리하면 분명 이뤄낼 수 있을 터였다. 유라랑 친해지는 것도, 연주를 잘 하는 것도, 그리고 ‘호랑이의 왕’의 힘을 키우는 것도, 자기 나름의 발걸음으로 나아가다 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아직 아무 것도 끝난 건 아니니까.
“그건 그렇고…”
그런 생각으로 다시 수업을 들으려다, 맹호는 어쩐지 열받는 걸 하나 깨달았다. 까치가 항상 자기가 있는 데랑 반대쪽 칠판만 쓰고 있단 사실이었다. 저렇게 구석만 쓰면 누가 읽으라는 거야. 물론 까치는 모든 게 대충대충이니 칠판을 쓸 때도 별 생각을 안 하고 있을 게 뻔했지만, 안 그래도 제멋대로인 글씨체가 저쪽 너머에 있으면 시력에 자신이 없는 맹호한테는 필기할 도리가 없었다.
이럴 때 평소 하던 것처럼 ‘이 자식아, 똑바로 못 해?’라고 멱살이라도 잡을 수 있으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 맹호는 순간 그런 생각을 했지만, 지금 까치랑 자기 관계를 생각하면 도무지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어젠 까치한테 고개륻 들 수 없을 만큼 큰 도움을 받지 않았던가. 정 멱살이 잡고 싶으면, 조금 시간이 지난 뒤 둘만 있을 때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
그 때, 누군가 자길 보고 있는 것만 같아 맹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너머엔, 분명 유라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수업을 듣고 있었다.
맞다. 오늘도 연습이 있지.
대체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맹호는 자기가 정말 중요한 거 하나를 잊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당장 수업이 끝난 뒤, 맹호는 유라랑 다시 얼굴을 마주쳐야 하는 것이다.

정말로 괜찮을까. 또 어제처럼 큰일이 벌어지진 않을까.
수업이 끝난 뒤 교실로 발걸음을 옮기며, 맹호는 혼자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굳게 마음먹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바로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유라를 보는 건 무서웠다. 그렇지만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오늘 유라랑 만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단 건 잘 알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동아리 교실 문을 열자.
“…”
달랑 유라 한 명밖에 없는 교실을 보며, 맹호는 뭐라하면 좋을지 잠깐 망설였다. 아무리 맹호라 할지라도, 이런 상황까지 상정하진 못해서였다. 단 둘만 남게 되다니. 오늘 까치는 안 오는 건가? 아니, 솔이는 어디 갔지? 설마 둘이서만 연습하는 건 아닐 테고.
란 생각을 혼자 하던 맹호한테, 아주 퉁명스러운 말이 귀에 들어왔다.
“선생님은 오늘 못 오신대. 솔이도 오늘은 다른 일이 생겼다고…”
“다른 일?”
솔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순간 그렇게 생각했지만, 맹호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분명 솔이한테도 혼자 쉬고 싶은 날은 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맹호는 유라하고 단둘이 연습해야 한단 말이 아닌가.
결국 맹호는, 각오를 굳힌 뒤 북이 있는 선반으로 걸어갔다.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어색한 시간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물론, 맹호는 연습하면서 몇 번이고 도망치고 싶었다.
지금도 당장 도망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을 만큼, 맹호는 어색한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물론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이라도 연습하지 않으면 안 그래도 떨어진 실력이 더 떨어질 게 뻔하고, 무엇보다 유라랑 가까워질 수 없어서였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자기 심장이 지금이라도 확 터질 것 같았다. 연습을 하곤 있었지만, 대체 자기가 뭘 하는지 실감조차 나지 않았다. 유라 쪽으로 제대로 고개를 돌린 적은 없지만, 아마 자기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오늘따라 이상할 정도로 소리가 안 맞고 있는데, 유라가 단 한 마디도 입을 열고 있지 않은 것이다.
안 되겠다. 일단 마음이라도 좀 돌린 뒤 생각해야지.
결국 맹호는 연주가 끝난 뒤, 쉬는 시간이 되자 잠깐 복도로 나갔다. 그 뒤, 한 손에 매점에서 사 온 이온음료를 들고 돌아왔다.
“…?”
유라는 자길 이상하단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지금 맹호한테 그런 건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맹호는 될 수 있는 대로 유라랑 눈을 안 마주치려 애쓰며, 종이컵에 음료수를 따른 뒤 조심스레 내밀었다. 지금, 혹시 자기 손이 떨리고 있는 건 아닐까. 또 꼬리가 튀어나온 건 아닐까. 괜히 겁이 나서, 맹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 때.
“…”
어쩐지 맹호 손에서, 음료수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깜짝 놀란 맹호가 고개를 들자, 거기엔 우물쭈물하면서도 음료수를 손에 쥔 유라가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잘 한 걸까. 그런 생각에 겁을 먹으면서도, 차마 맹호가 말을 걸지 못하고 있을 때.
“…고마워.”
“응? 으, 응…”
유라는 그 말만 남긴 채, 아무 말도 없이 자기가 따른 음료수를 가만히 마셨다. 맹호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어서, 갑자기 뺨을 늘려보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렸다.
이번에야말로, 자기가 ‘잘 한’게 맞을까? 이제 조금 마음을 놔도 되는 걸까? 마음속에선 온갖 생각이 떠돌고 있었지만, 어쨌든 유라가 자기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건 틀림없었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유라를 기쁘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자, 맹호는 조금 마음이 뿌듯해졌다.
이 뒤 연습이 조금이나마 편해진 건 음료수 덕분일까. 맹호한테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유라랑 거리가 가까워진 것만은 무척 기뻤다.

그 날 저녁, 맹호는 솔이랑 같이 소파에 앉아있었다. 소파 위에 다리를 모으고 주저앉은 뒤, 무릎에 담요를 덮은 채였다. 맹호의 짐작대로 솔이는 어딘가 몸이 안 좋았는지, 맹호가 오자마자 담요를 꺼내든 뒤 ‘같이 있자’고 먼저 말을 건넨 것이다.
“그렇게 피곤했어?”
“응. 도시는 자꾸 긴장되니까…”
그렇게 말하며, 솔이는 드물게도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맹호는 그 모습만 보고도, 솔이가 요즘들어 얼마나 피곤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산골에서도 다른 아이들과 지내는 걸 가끔 피곤해하던 솔이다. 하물며 안 좋은 추억도 있는 도시에서 얼마나 더 지쳤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나는 있지, 아직도 도시가 좀 무섭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그치만 언젠가는 마주칠 일이었잖아. 그러니까 한 번 자기 힘으로 나아가볼래.”
“…그래.”
몇 번이고 말을 끊으면서도 기어코 자기 생각을 입에 담은 솔이를 보며, 맹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끝내는 게 아쉬워서, 맹호는 조심스레 솔이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조심스레 솔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기 마음속 생각을 털어놓았다. 지금껏 제대로 털어놓은 적이 한 번도 없는, 맹호의 솔직한 마음을.
“솔직히 말해서 나도 많이 불안하고 그래. 내가 도시에서 잘 해나갈 수 있을까…하고. 실제로도 그렇잖아. 그래도 괜찮을 거야. 솔이 너도 같이 있어주고. 그지?”
“응. 맹호랑 같이 있으니까 괜찮아.”
솔이가 해주는 말에, 맹호는 마음속 깊은 곳까지 따뜻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 바로 이런 말이 맹호는 듣고싶었던 것이다. 이렇게 약한 자기라도, 누군가 든든하게 받쳐주길 바라고 있었다. 이렇게,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서 웃고 있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래도, 까치 앞에선 이렇게 솔직해질 수 없겠지. 저절로 마음이 편해진 가운데, 맹호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까치는 자기한테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다. 하지만 그런 친구 앞에서도, 할 수 없는 말은 있었다. 맹호의 정체를 맨 처음 알아챈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솔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솔이가 처음으로 마음읕 터놓을 수 있었던 존재 역시, 바로 맹호였다.
그렇기에, 솔이랑 맹호는 다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특별한 관계였다. 맹호도 물론이었지만, 솔이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다른 사람들한텐 하지 못하는 이야기도, 솔이는 맹호 앞에서라면 편하게 입에 담곤 했다. 언젠가 솔이가 ‘맹호랑 있음 다른 애들한테 못 말할 것도 다 말할 수 있을 거 같다’라고 말했던 걸, 맹호는 아직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맹호도 까치보다 솔이한테 해줄 수 있는 일이 조금 더 있을 터였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 서로 마음을 터놓고 편하게 있는 것쯤은.
그 때.
“에헤헤. 맹호 볼 늘리니까 귀엽다.”
“으, 응?”
자기 뺨이 마구 늘어나고 있는 느낌에, 맹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 즉 솔이를 멍하니 쳐다봤다. 하지만 솔이는 맹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맹호 뺭을 늘리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었다. 마치 그게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일인 것처럼.
“어, 어기, 소리…솔이야…”
뺨이 늘려진 채 제대로 말이 안 나오는 걸 알면서도, 맹호는 어떻게 해서든 솔이한테 말을 걸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솔이는 그게 더 재밌었는지, 말랑말랑하지도 않은 맹호의 뺨을 만지작대며 놀고 있었다. 갑자기 이게 웬일일까. 물론 솔이는 자기한테 이런 식으로 장난을 걸 때도 많긴 하지만…
그런데 솔이가 꺼낸 말은, 맹호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거였다.
“맹호가 너무 딱딱한 표정해서 늘려보고 싶었다. 안 되나.”
“아, 안 되긴 무슨. 안 되긴…”
맹호는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솔이가 왜 자기 뺨을 그렇게 늘렸는지 알고 있기에 묘하게 민망해지는 걸 느꼈다. 솔이는 항상 자기를 생각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맹호는 항상 자기가 혼자 이 세상에 뚝 떨어진 게 아닐까란 생각에 불안했지만, 이걸 알고 있었다면 아마 이전보단 훨씬 마음이 편했을 터였다.
정말, 이 친구 앞에 서면 왜 이렇게 미안하고 고마워지는 걸까. 맹호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아직도 자길 보고 생긋 웃어주는 솔이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었다.

그 날 밤, 맹호는 까치랑 다시 거실에 모여있었다. 지금은 솔이가 깊이 잠들었기에, 까치랑 진지한 이야기도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야자 감독을 하고 와서인지, 까치는 묘하게 피곤해보이는 모습으로 맹호네 집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있었다. 오늘은 어제랑 달리, 맹호가 거실 한가운데에 선 채 팔짱낀 모습으로 까치를 보는 중이었다. 와이셔츠 차림이든 어쨌든 일단은 양복을 입은 27살인 까치랑 흰 티에 추리닝바지를 입고 있는 19~21세 가량의(물론 교복을 입고 있으면 대개 고등학생으로 알아주긴 하지만) 맹호가 이런 식으로 한 곳에 모여있는 건, 어떻게 보면 참 우스운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사람으로 둔갑했을 때’ 이야기지, 실제로는 별 나이차도 없을뿐더러 맹호가 연상이었지만.
일단 얘기를 나눌 생각으로 까치한테도 잠깐 들르라 말했지만, 막상 마주보고 나니, 맹호는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말하고 싶은 건 한가득인데, 대체 무슨 말을 꺼내면 좋단 말인가. 맹호가 그렇게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갑자기 까치가 입을 열었다.
“너, 저번에 그거 기억하냐? ‘호랑이도 제말은~’이라고 내가 그랬던 거.”
“아…그거?”
그 말에, 맹호는 이제 아득해진 옛일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까맣게 잊어버렸던 일이, 까치 말 덕분에 다시 맹호 머릿속에서 되살아나려 하는 중이었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는 거야. 맹호는 그걸 잊어버리려고 얼른 고개를 휙휙 휘둘렀다.
“그 때 내가 뭐라 그랬게? 뭐, 뻔하지. ‘맹호 널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이거야. 니가 없을 때 답해야 마음편하지 않겠니.”
“그래서?”
“뭐, 유라가 그러더라. 그냥 말없고 잘 모르는 애, 딱 이 정도로만 말이야. 그치만 말이지, 유라는 널 싫어하진 않았어. 그거야 니가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 하지만 관심이 아주 없지도 않았다 이거야.”
“…”
혼자서 조마조마하게 대답을 기다리던 맹호는, 까치의 그 말에 조금 마음이 놓이면서도 복잡한 느낌이었다. 자긴 이 대답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한참 생각하다, 맹호는 지금껏 혼자 고민하던 말을 입에 담기로 했다. 어차피 까치한테는 이미 한 번 했던 이야기였다.
“야. 까치야. 넌 사람하고 호랑이가 서로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냐? 사람하고 다른 동물이라고 생각해도 되고.”
“너도 참 끈질기다. 이미 한 말을 하고 또 하고…혹시 만날 까먹는 거 아냐?”
“시끄러. 그래도 대답해 봐. 그렇게 돼서 뭐가 달라졌어?”
맹호는 반달 전쯤, 까치랑 이 얘길 한 번 나눈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땐 결론이 안 나서, 둘 다 ‘일단 그만하자’란 식으로 이야기가 끝났다. 그리고 지금, 맹호는 이 얘길 다시 꺼냈다. 여전히 제대로 된 답을 마련하지도 않은 채, 그저 그 얘기가 듣고 싶단 생각 하나만으로.
그리고, 까치는 여전히 전과 다른 게 없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내 생각은 똑같애. 서로 다른 존재가 쉽게 상대방을 받아들일 리가 없잖니? 당연히 어렵지. 그리고 전엔 아마 사귄다더라, 뭐 그런 얘기도 했던 거 같은데…거기까지 가면 진짜 어려울 걸. 물론 감성차이를 무시할 수도 없지만, 그것보다 더 큰 벽도 있잖아. ‘존재 자체가 다르다’는 거. 그 벽은 생각보다 무지 높거든.”
맹호는 그 말에, 여전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까치는 그런 맹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런 말로 자기 얘기를 끝마쳤다.
“어쨌든 지금 우리는 사람하고 비슷한 감정을 지닐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잖니. 보통 동물들은 이러지 못해요. 사람으로 둔갑해야 깊이 알 수 있지. 그러니까 우릴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하고는 좀 낫지 않을까 이거야. 그런 가능성까지 없는 걸로 칠 순 없지. 암. 그렇고말고.”
맹호가 그 말에 가만히 있자, 까치도 아무 말없이 베란다 쪽을 쳐다보기만 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침묵이, 까치와 맹호의 마음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아, 그리고 말인데.”
“응?”
그런 침묵 속에서, 맹호는 조심스레 까치한테 말을 걸었다. 일단 이 문제는 둘째치더라도, 묻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어서였다. 그리고 이건, 반년 전까지만 해도 절대로 궁금해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물으려는 건 바로.
“너, 그런 모습이 됐으니까 이제 두 번 다시 솔이하고 동갑이 될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나랑 같은 고등학생 모습으로…”
“야, 뻥은 작작 까야지. 니가 고등학생이라고? 교복으로 퉁치고 있는 마당에 무슨 헛소리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이 자식이. 맞아볼래?”
“아, 아뇨. 계속하죠. 뭔 얘길하다가 이렇게 됐더라?”
맹호는 이를 부드득 갈다가, 갑자기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다. 자기가 다른 것도 아닌 ‘도시로 오면서 바뀐 겉모습 및 지위’에 관해 물었는데, 까치는 생각보다 훨씬 더 덤덤했던 것이다. 마치 옛날에 모든 걸 받아들였단 투였다. 하지만 까치는 맹호가 어리둥절해하는 것도 금방 알아챘는지, 고개를 휙휙 젓고는, 그다지 짓지 않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그딴 건 말이지, 친구. 어떻게 해서든 여기 와야겠단 생각하고 대보면 별 것도 아니야.”
“너…”
“너도 솔이도 도시에서 지내기 힘들 텐데, 그런 데서 아무 사정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도와달라고 하는 것보다 내가 돌봐주는 게 낫지 않겠니. 솔이라면 모를까, 내가 니들하고 이렇게 같이 있으려면 이런 방법밖에 없었고. 솔직히 까고 말해서, 널 아는 동갑내기가 둘이나 같은 학교로 전학오면 무슨 소문이 돌겠니. 그나마 선생님이라서 망정이지.”
“너, 너도 참…”
맹호는 지금, 자기가 평생 까치한테 따라갈 수 없으리란 사실을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깊은 생각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단 걸, 지금까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곤 있지만, 까치는 그런 결심을 하기까지 얼마나 깊이 생각했을까. 오직 자기랑 솔이만을 위해, 까치는 ‘사람세상에서 동등하게 있을 수 있는’ 자유를 포기했다. 물론, 그건 솔이랑 맹호는 물론 까치 자신에게도 기쁜 일이긴 했지만.
하지만, 그래도 바깥에서 예전처럼 맹호나 솔이한테 편하게 대할 수 없었던 건 힘들지 않았을까. 아무리 까치가 괜찮은 척해도, 맹호는 그런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셋이서 같이 도시에 있을 수 있단 건 좋은 일이지만, 이젠 더 이상 까치랑 편하게 교실에서 떠들고 놀 수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까치는, 항상 그런 순간을 무척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이 자식을 좀 편하게 해주는 게 좋지 않을까.
“고생했어. 인마. 어쨌든 우린 친구 아니냐. 그지?”
맹호는 그 말과 함께, ‘항상 하던 것처럼’ 까치의 등을 툭툭 쳤다. 학교에서는 이제 못 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집에서는 편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럼. 친구지. 이런 모습이 뭐가 중요하니. 중요한 건 우리 자신이다. 안 그러냐?”
그리고 까치 역시 그걸 보고 뭔가 느낀 듯, 자리에서 일어나 맹호의 고개를 팔뚝으로 조였다. 그런 모습이 참으로 까치답다고, 맹호는 목이 조여지는 걸 느끼며 가만히 생각했다.
가만히 생각하면, 까치의 말은 다 맞았다. 사람들한테 얼마나 다른 모습으로 보이든, 결국 둘은 둘도없는 친구가 아닌가. 그 생각을 하면 맹호는 지금 당장이라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자길 생각해주는 친구가 있단 게,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물론, 까치는 지금껏 맹호한테는 애증의 대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자기한테 없는 걸 다 가진 부러운 존재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유일하게 ‘자기랑 비슷한’ 존재라서였다. 물론 솔이도 좋은 친구지만, 까치는 맹호처럼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다’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렇기에 맹호 입장에선, 같은 ‘사람이 아닌 동물’ 입장에서 편하게 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저 친구를 미워할 일은 앞으로도 절대 없겠지. 맹호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깊게 했다. 물론, 가벼운 질투라면 좀 할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다음 날, 비록 연습은 없었지만, 맹호는 굉장히 답답한 느낌이었다. 물론 여전히 내리고 있는 부슬비도 신경쓰였지만, 자기가 아직까지도 ‘도시에서의’ 학교생활에 익숙치 않단 걸 똑똑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맹호는 여러 모로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고, 게다가 요즘엔 솔이까지 전학오는 바람에(맹호한테는 기쁜 일이었지만) 다른 아이들이 말을 거는 것도 잦아졌다. 하지만 산골에서도 그랬듯이, 맹호는 솔이가 아닌 ‘사람’하곤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잘 알 수 없었다. 솔이처럼 천진난만하면서도 뭐든지 받아주는 사람이 많을 리 없었기에, 맹호는 다른 아이들과 얘기할 땐 항상 조심스러운 편이었다.
하지만 도시에 온 지 이제 한 달이 되어가는데도, 맹호는 아직 도시를 잘 몰랐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산골에서도 사람들을 대하는 건 어려웠지만, 그래도 자연으로 뒤덮인 곳이었기에 마음은 편했다. 지금처럼 학교 바로 옆에 높은 아파트가 있지도 않았고, 수많은 차들이 운동장 바로 너머를 빠르게 달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학교에서 움직이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부자연스럽단 생각이 들어서 견딜 수 없었다. 모처럼 유라한테 믿음을 주는 존재가 되어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는데, 이래서야 오히려 얼빠진 느낌만 더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맹호는 학교에서 여러모로 가장 눈에 띄는 존재였다. 여전히 체육시간엔 같은 반 애들의 눈길을 한몸에 받았고, 말을 할 때도, 복도를 지나다닐 때도, 맹호를 곁눈으로 살짝 보는 아이들은 여전히 어느 정도 있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더 묵직한 인상인 맹호는, 결국 어딜 가나 이런 눈길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다른 아이들 눈엔, 맹호가 아직도 다가가기 어렵고 무서운 느낌으로 비춰질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과 함께 항상 그렇듯 자기한테 눈길이 모이는 복도를 지나다니다가, 맹호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유라가, 방금 자기 옆을 살짝 스치고 지나간 게 또렷하게 느껴졌다.
고작 그것뿐인데도, 맹호는 자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이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제 그런 일이 있긴 했지만, 맹호랑 유라의 관계는 아직도 알 수 없는 거였다. 게다가 까치한테 어제 그런 말까지 들었기에, 맹호는 점점 더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유라는 정말로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맹호는 겨우 발걸음을 다시 떼어놓았지만, 여전히 발은 납처럼 무겁기만 했다. 그런 맹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라의 발걸음은 자꾸만 자기랑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 날 저녁, 집에 돌아오자마자 맹호는 창고로 쓰고 있는 큰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까닭은 하나밖에 없었다. 산골에서 하던 것처럼, ‘편하게’ 혼자 있고 싶어서였다.
마침 솔이도 아직 집에 없었기에, 혼자 있기엔 아주 좋은 순간이었다. 자기 방에서 갖고온 요를 깔고 배게를 둔 뒤, 맹호는 얼른 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이러고 있으면 침대에 누워있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편했다. 애초에 침대를 처음 ‘겪은’ 것도 도시에서였기에, 맹호한테는 당연히 바닥에 누워있는 게 더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앞으로 자기는 어떻게 되는 걸까.
도시에 처음 왔을 때와는 다른 까닭으로, 맹호는 다시 그런 생각에 잠겼다. 솔이랑 까치가 있는 지금, 맹호는 처음 혼자 도시를 겪을 때보다 훨씬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그 대신, 새로운 문제도 생겼다. 유라와의 관계, 그리고 ‘호랑이의 왕’이 되기에 턱없이 모자란 자기 자신이었다.
사실 ‘원래는 사람이 아닌’ 맹호한테, 자기 정체를 숨겨야만 하는 유라와의 관계는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아무리 친해지고 싶다 해도, 차마 자기 정체까지 까발릴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걸 밝히지 않으면, 분명 유라한테 자기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이상한 애일 뿐이다. 맹호도 자기 행동이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단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자, 맹호는 자기 몸이 저절로 우그러드는 걸 느꼈다. 아마 다른 사람 눈에서 보면, 맹호는 마치 엄마 뱃속의 태아같은 모습을 하고있을 게 분명했다. 사람도 아닌 자기가 이런 모습이라니. 맹호는 조금 민망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혼자니까 상관없었다. 이렇게라도 마음이 편해지면 그걸로 충분했다.
게다가,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호랑이의 왕’이란 말에 모자란 자기자신도, 유라 관계만큼이나 무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원래부터 맹호는 자기가 그 말에 걸맞지 않다 생각했지만, 이렇게 자기가 한없이 약하게 느껴지는 도시에 와서야, 그 말이 얼마나 ‘묵직한’ 건지 깨달은 것만 같았다. 아무튼 자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쩌면 정말 이대로.
“…?”
그 때, 맹호는 ‘뭔가 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껏 죽 눈을 감고 있어서일까, 맹호는 굉장히 중요한 걸 죽 까먹고 있었단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자기 자신에 관해 너무 깊이 생각해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대체 왜, 솔이가 자기 품에 안겨있는 것까지 까먹고 만 걸까.
“소, 솔이야. 말도 없이…”
그런 말을 하다가, 맹호는 산골에서도 솔이랑 항상 이런 식으로 지냈던 걸 떠올렸다. 가만히 생각하면, 솔이랑 맹호는 이렇게 가깝게 지내는 일이 참으로 흔했다. 맹호도 만약 여기가 산골이었다면, 지금처럼 이상하게 민망한 느낌이 강하게 들진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왜 도시에서 이렇게 하고 있으면 자꾸만 민망해지는 걸까. 만날 이러진 않았지만, 어쨌든 드문 일도 아니었는데.
“에헤헤. 맹호 혼자 누워있는 거 보니까 이러고 싶어졌다. 깜짝 놀랐나.”
“으, 응. 놀랐는데 괜찮아. 어…진짜로.”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맹호는 벌렁대는 가슴을 진정할 수 없었다. 물론 솔이는 절친한 친구지만, 그 전에 종족이야 어쨌든 남녀사이인 것도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몇 번이고 말했듯 이건 결코 처음있는 일이 아니었다. 솔이는 맹호를 누구보다 믿고있는 것이다. 그래, ‘종족이 다르지만 믿음직한 친구’로서.
그런 감정을, 어떻게 남녀관계에 함부로 댈 수 있을까.
맹호는 솔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부모님이 도시에서 큰 빚을 져 부랴부랴 시골로 이사온 바람에, 솔이는 어릴 적부터 제대로 된 친구를 사귈 기회가 없었다. 산골짜기에 있는 불안한 집에서 항상 외롭게 지내던 솔이한텐, 당연히 누군가 같이 놀아줄 친구가 무척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가장 걸맞은 존재가, 바로 맹호 자신이었다.
지금 솔이한테 누구보다 가장 필요한 존재는, 자기처럼 사람이 아니면서도 든든한 존재일 터였다. 아무 말 필요없이 그냥 감싸안아줄 수 있는 존재. 그리고 모든 응석을 가만히 받아줄 수 있는 존재.
맹호는 더 이상 묘한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미안해져서, 그저 눈을 감은 채 자기 품에 파고들어오는 솔이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밤이 깊어갈 때까지 죽.

그렇게 다음 날이 된 뒤, 약한 빗줄기가 창가를 두드리는 사물놀이 동아리용 교실에서.
“…”
맹호는 항상 그러던 것처럼, 연습을 하기 위해 북을 가까이 가져다댄 채 교실바닥에 주저앉아있었다. 실수하면 어쩌지, 란 생각에 손가락이 떨리는 게 느껴졌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번에야말로, 맹호는 연주를 성공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처럼 그저께 음료수를 마셔준 유라한테 예의가 아니었다.
그래서 맹호는 정신을 집중한 채, 까치가 들고 있는 쇠를 똑바로 쳐다봤다. 항상 그렇듯, 까치는 조심스레 잡고 있는 채를 쇠 위에서 돌린 뒤, 이윽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장단이 시작된단 걸 알렸다. 맹호도 연주가 시작되자, 까치의 쇠에 따라 약하게 북을 쳤다. 맨 처음엔 작던 소리는 쇳소리에 따라 점차 커졌고, 그에 따라 가락도 점점 흥이 나기 시작했다. 맹호 역시 그런 가락에 조심스레 몸을 맡기며, 마치 꿈결같은 느낌으로 채를 내리치고 있었다.
그 때였다.
맹호가 솔이 말고, ‘다른 누군가’의 눈길을 느끼기 시작한 건.
“…?”
고개를 돌린 맹호는,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유라가 처음으로, 자기한테 고개를 돌린 채 소리를 맞추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유라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맹호랑 눈도 마주치려 하고 있었다. 이건 같이 연습하기 시작한 뒤로 분명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걸 느끼자, 맹호는 얼굴이 빨개지기 전에 중요한 걸 하나 깨달았다. 가만히 생각하면, 지금껏 맹호도 유라 쪽으로 고개를 제대로 돌리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유라가 치는 장구랑 자기 소리를 맞춰야겠단 생각은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까치가 치는 상쇠도, 맹호는 분명 제대로 듣지 못했다. 맹호는 여럿이서 연주하고 있다 생각했지만, 실은 오직 자기 자신과만 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유라도 마찬가지였다면, 지금껏 왜 연주가 죽 틀렸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가만히 생각하면 이건 자기 잘못 아닌가. 맹호는 고개를 들 수 없어졌지만, 그렇다고 연주를 그만둘 순 없었다. 그래서 맹호는, 다시 고개를 들어 ‘지금껏 못 봤던’ 다른 아이들의 연주를 보려 애썼다.
그렇게 새로운 마음으로 연주를 하며, 맹호는 묘하게 유라가 민망해하는 것같단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자기랑 같은 생각을 한 게 아닐까. 처음으로 공통점아닌 공통점을 찾은 것같아서, 맹호는 묘하게 기뻐졌다. 물론 이런 걸로 좋아하면 유라한테 많이 미안하지만.
이것 때문일까. 맹호는 이상하리만치 소리가 딱딱 맞는 것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금껏 흐트러져있던 소리가, 하나로 뭉쳐져 신명나게 떠도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사물놀이가 이렇게 즐거운 것이었던가. 맹호는 어쩐지, 이 소리가 너무나도 정겨우면서도 다정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맹호가 나고 자란 산골 냄새가, 이 소리에서 너무나 강하게 풍겨왔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제 소리가 안 맞는 문제는 더 이상 없지 않을까.
절정으로 다가가는 연주를 온몸으로 느끼며, 맹호는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 맹호 진짜 기분좋아보인다. 그지?”
연습이 끝난 뒤, 솔이는 곧장 쪼르르 맹호 쪽으로 다가와서는 빠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다 순간 아차싶었는지 혀를 살짝 내밀었다. 방금 솔이는 ‘학교에선 선생님’ 입장인 까치한테 반말을 하려들었던 것이다. 까치도 그런 솔이가 우스웠는지, 그냥 머리를 살살 쓰다듬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맹호는 그런 솔이를 다정한 눈으로 쳐다보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하게 민망해지는 걸 느꼈다. 원래 감정을 그렇게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자기가 믿는) 맹호가, 그렇게까지 기분좋아보인단 말을 듣는 건 드문 일이라서였다. 한 번도 안 틀리고 연주하는 게 이렇게 기분좋은 일이었구나. 아직까지 묘하게 남은 들뜬 기분을 가만히 맛보면서, 맹호는 자기가 방금 치고 있었던 북을 연신 만지작댔다.
“어유. 우리 맹호 또 아닌 척하네. 넌 오랫동안 보고있으면 안 드러내려고 해도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아요. 이 솔직한 분아.”
“뭐라…뭐라구요?!”
하지만 그걸 알아챈 까치가 이런 말을 내던지는 바람에, 맹호는 결국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자긴 남들한테 어떻게 보이기에 이런 말이 나온단 말인가. 맹호는 무척 민망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이런 자기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는 평생 까치랑 솔이한테 이길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억지로 이길 생각은 없지만.
그리고, 그런 맹호 일행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존재가 있었다. 유라는 자기 악기인 장구를 가만히 잡은 채, 아주 친근하게 얘길 나누는 맹호랑 까치, 그리고 솔이를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마치 자기가 끼면 안 되는 데라도 온 듯한 표정으로. 맹호 일행과 거리를 둔 채 조용히.
맹호는 이제야, 자기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 깨달았다. 맹호랑 솔이, 그리고 까치는 당연히 알고 지내는 사이다. 하지만 도시에서 처음 만난 유라는 자기네들이 어떤 사이인지 알 리가 없다. 하물며 까치가 나이를 먹어서 여기로 맹호 일행을 쫓아 전학왔다던가, 사실 맹호랑 까치는 사람이 아니라던가하는 일은 짐작할 도리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유라를 이야기에 끼워주는 배려는 했어야 맞았다. 유라는 어떤 아이인가. 그 ‘여동생’은 누구인가. 그런 것도 이젠 물어봤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유라 네 얘길 못 들었네. 여동생은 괜찮니? 전보다 더 심해지거나 그러진…”
“아뇨. 일단 괜찮은 거 같아요. 사이는, 그다지…원래도 안 좋았고…”
까치가 항상 그렇듯 가벼운 말투로 이렇게 물어오자, 유라는 굉장히 어쩌면 좋을지 몰라하는 모습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이걸 볼 때, 유라는 여동생과의 사이에 그리 자신이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건 맹호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동생을 만날 집에 혼자 뒀으니까, 걔도 나보다 더 강해보지만 무척 외로웠을 텐데. 그, 그 애는 혼자 불안한 집에서…”
“아, 아냐. 유라 잘못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지, 소, 솔이야?”
“응. 맹호 말이 맞아. 유라 잘못은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기운내자. 알았지?”
유라는 무척 망설이긴 했지만, 솔이가 웃는 걸 보고 마음이 풀렸는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라한텐 이런 식으로 말을 걸면 되는 걸까. 사실상 처음으로 걸어본 말에 맹호는 조금 두근거렸지만, 아무튼 잘 된 것 같으니 괜찮은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만약 자기 힘이 충분했으면, 처음부터 유라가 이런 마음을 먹을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쓰라렸지만, 그래도 유라랑 조금 가까워진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연습도 훨씬 나아졌으며, 자기 힘도 조금은 더 강해졋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맹호는 다시금 스스로를 달래고 또 달랬다. 유라가 솔이한테 ‘같이 소리 안 맞춰볼래?’라고 조심스레 말을 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날 밤, 까치는 또다시 맹호네 집을 찾아왔다. 이번엔 솔이도 깨어있었기에, 모처럼 초대 3인방이 느긋하게 저녁을 보낼 수 있는 기회였다.
산골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셋이서 같이 있을 수 있는 일은 아주 흔했다. 수업이 끝나면 셋 다 솔이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잡담을 하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고, 저녁까지 먹은 뒤 까치가 돌아가면(물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상태 얘기지만) 맹호는 솔이랑 공부를 하든 책을 같이 읽든 둘만의 시간을 보내다 숲 속, 혹은 솔이네 집에서 잠이 들곤 했다. 작년 한 해 동안, 맹호는 죽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젠 그렇게 지내지 않는 게 훨씬 더 어색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 도시에 있어보면 그런 시간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소중했다. 오히려 지금껏 지내왔던 1년이, 마치 10년이나 되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제 까치도 ‘이런 모습’이 되었으니, 1년 전으론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셋은 ‘바뀐 게 없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시간을 내서 같이 있는 것쯤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맹호한테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것만 있으면, 다른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근데 태영이는 수업하면 진짜 멋있어보인다. 왜 그러지?”
“그거야 당연하지. 솔이야. 내가 잘생겨서 그런 거잖니. 너무 뻔하다 야.”
“무슨 헛소리야. 대체?!”
지금 셋은 나란히 소파에 앉은 채(참고로 솔이가 가운데에 앉은 채, 왼쪽에 맹호, 그리고 오른쪽에 까치가 둘러앉은 상황이었다) 항상 하던 것처럼 텔레비전 앞에서 별 쓸데없는 얘길 나누는 중이었다. 맹호랑 솔이, 그리고 까치는 산골에서도 뭔가 떠오르는 게 있으면 아무렇게나 얘기하곤 했다. 주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 많이 나왔지만, 갑자기 나타난 벌레나 변화무쌍한 날씨, 그리고 어쩐지 맛있는 그 날 저녁식사(물론 솔이 부모님이 해주시는 거였다)까지 참으로 폭넓은 이야깃거리가 많이 다뤄졌다.
맹호 일행은, 그렇게 하루하루를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지내왔던 것이다.
“으함. 피곤해 돌아가시겠다. 땅바닥에나 누워야지. 보일러 틀었냐?”
“넌 우리 집 난방비라도 대신 내줄 생각이야?!”
맹호가 혀를 차거나 말거나, 다 큰 어른인 까치는 한 해 전에 그랬던 것처럼 소파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오더니, 거실 땅바닥에 헐렁하게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했다. 아무튼 저 놈은 참 제멋대로라니까. 이젠 정말로 솔이랑 동갑이었단 게 믿기지 않는 어른인데도, 하는 짓은 그 때나 지금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그게 까치답긴 했지만.
“짜샤. 형님 좀 쉬게 해라. 학교에서 수업하는 게 왜 이렇게 피곤한지 모르겠다니까. 니들하고 같이 있으려고 내가 고생이 많다.”
“우아. 태영이 진짜 대단하다. 내가 어깨 주물러줄까?”
“아냐. 됐어. 아직 젊은데 뭔 소리니. 맹호 등이나 두들겨 줘.”
“아, 아니. 난…”
“진짜? 그럼 해야지. 맹호야. 일로 등 좀…”
“아, 아니, 그러니까 됐대도! 지금은 나보다 쟤가 더 늙었잖아!! 암튼 니들도 진짜…”
자기 얼굴이 빨개지는 걸 느끼면서도, 맹호는 괜히 이 친구들이 무척 고마워서 견딜 수 없었다. 자기한테 이렇게 좋은 친구들이 있단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도시에서도 다시 이런 순간을 누릴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맹호한테는 이미 기적이었다.
“어유. 갑자기 웬 동물원이냐. 솔이야, 채널 돌려도 되지?”
“응. 까치 동물원 안 좋아하지?”
“뭐, 아무래도 그렇지. 우리가 이런 모습을 하곤 있지만 저깄는 친구들하고 맘이 더 잘 맞잖냐. 그지, 맹호야?”
갑자기 들려온 친구의 말에, 맹호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맹호 자신도, ‘자기랑 비슷한 존재’가 갇혀있는 동물원은 매우 가까이하기 꺼려져서였다. 아무리 사람으로 둔갑했다 한들, 어쨌든 사람과 다른 동물은 쉽게 어울릴 수 없다. 맹호는 ‘동물원’이란 게 있단 걸 알게 된 뒤부터, 죽 그런 생각을 해왔던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까치가 뜬금없는 말과 함께 맹호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근데 니들, 진짜 연애감정같은 거 없냐? 뭐, 사귀고 안 그래?”
“뭐, 뭐가…무슨 소리야?!”
맹호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자기가 생각해도 아주 크게 손사래를 쳤다. 그런 말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솔이랑 자기가 그렇고 그렇다니, 대체 무슨 헛소리를.
“뭘 오버하고 그래. 같이 있으면 그렇고 그런 느낌도 들 거 아냐. 아냐?”
“아, 아니고뭐고. 뜬금없이 뭔 헛소리를…”
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맹호도 아주 부정할 순 없었다. 저번에 있었던 일도 그렇고, 맹호가 솔이한테 ‘아주 그런 감정을 안 품는 건’ 결코 아니라서였다. 물론 솔이랑은 앞으로도 친한 친구로 있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맹호도 짐작할 수 없었다.
물론, 지금 이 생각을 까치한테 곧이곧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 여기엔 솔이도 같이 있는 것이다.
“너, 넌 동물하고 사람 사이에 뭘 묻는 거야? 아무튼 만날 이상한 소리나 하고.”
“다 동물인데 뭘 그래, 넌 사람으로 둔갑한 곰이었던가 멧돼지였던가가 처녀한테 연정을 품었단 말도 못 들었냐. 게다가 너, 저번엔…”
“그, 그만! 더 말하기만 해 봐. 아주…”
거기까지 말하다가, 맹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까치가 하는 말이 틀리진 않아서였다. 아무튼 저 놈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열받을 만큼 잘 기억한다니까. 생각같아선 목이라도 조여주고 싶었지만, 지금 맹호한테 그럴 기운은 없었다.
하지만, 솔이는 그런 맹호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한 모양이었다.
“어, 왜? 맹호 왜 그러는 거나.”
“응? 그, 그게, 그…”
이쯤되자, 맹호는 민망한 나머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었다. 대체 이게 웬 난리란 말인가. 가만히 생각하면 이 모든 까닭은 까치한테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 놈을 어떻게든 하면 분풀이 정도는…
“자, 잠깐만! 솔이야. 내가 말해줄게. 그러니까 무슨 말인가 하면, 솔이가 맹호를 수컷으로 보고있느냐 어떠냐가 궁금해서…”
“아~. 그런 거였나.”
“소, 솔이야. 지금까지 뭘로 알았던 거야, 그럼?”
아예 처음부터 ‘그렇고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던 모양인 솔이를 보자, 맹호는 지금껏 자기가 했던 모든 일들이 무척 민망해졌다. 그럼 자긴 괜히 소란만 피운 꼴이 아닌가. 이걸 보면 솔이는 분명 자길 ‘그런 눈’으로 본 적이 없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자기 혼자 잿물만 켜고 있었다니, 민망해서 고개나 들 수 있을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치만 맹호는 ‘남자’ 친구잖아. 그러니까 잘 알아. 그래도 친구고. 그지, 맹호야?”
“으, 응? 으, 응…”
솔이는 그 말과 함께, 맹호의 팔을 살며시 끌어안으며 웃어줬다. 맹호는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서, 그저 어색한 대답을 돌려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자긴 조금 희망을 가져도 된단 말일까? 몇 번이고 생각해봤지만, 맹호 입장에선 또렷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튼 솔이는 자길 이성으로는 생각한단 말이리라 믿고 싶었지만, 그래도 ‘친구’인 건 분명했다. 그리고 맹호 역시, 지금 솔이는 분명히 친구라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도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체 자긴 솔이랑 뭘 어떻게 하고싶은 걸까. 좀 더 ‘이성답게’ 대했음 좋겠다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지금까지 만들어온 관계도 맹호는 무척 아끼고 있었다. 그럼 대체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자긴 정말로 솔이한테 어떤 ‘감정’을 느끼는 걸까? 하지만 어쩐지, 유라한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적이.
“어유. 우리 맹호는 또 생각에 빠졌어요. 엄청 고민된다 이거지. 솔이가 좋냐, 아니면 유라가…”
“조용히 안 해?!”
결국, 맹호는 자기 마음을 정확히 맞춘 까치한테 방석을 내던지는 걸로 고민을 끝마쳤다. 일단 그런 건 다음에 생각하자, 고 속으로 다짐하며.

다음 주 월요일, 연습이 없어 집에 돌아가려고 우산을 챙기던 맹호는, 뒤에서 누가 자길 보고있단 걸 느꼈다. 얼른 돌아보니, 거기에 있는 건 지금껏 생각도 못 한 인물이었다.
그 사람, 유라는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맹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지금껏 맹호가 봐왔던 모습 중, 가장 진지한 얼굴로.
“…할 말 있는데.”
그 말 뒤 유라는, 마치 큰 다짐이라도 하는 듯 숨을 가다듬었다.
“그, 연습하는 교실로 안 올래?”

맹호는 유라를 따라 교실로 가면서, 어쩐지 앞으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알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날씨가 이 모양이 된 뒤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던 것이다. 유라가 집에 있을 때마다 어떤 느낌일지를 생각해보면, 이제 슬슬 ‘그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 천천히 말할게. 별로 하고싶은 얘기도 아니거든.”
연습용 교실바닥에 주저앉은 다음, 유라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역시나, 맹호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여전히 구름이 두껍게 뒤덮인 하늘과 약하게 내리는 부슬비가, 지금 유라의 마음을 대신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너무 늦었지? 나도 그건 잘 아는데…”
“아냐. 괜찮아. 그런 건 그, 말하는 게 힘들 거 아냐.”
그런 말과 함께, 맹호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앞으로 있을 이야기가 어떤 내용인지 알고 있는 이상, 흐트러진 자세로 듣고 싶진 않아서였다. 유라는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오랫동안 속으로 앓고 있었을까. 이미 오래 전에 가족들을 모두 하늘로 보낸 맹호였지만, 그래도 ‘집안’이 걸린 문제가 사람에 따라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유라는 잠깐 가만히 있다가, 드디어 입을 떼어놓았다.
“우리 집은 있잖아, 중학교 뒤부터 죽 분위기가 안 좋았어. 그, 부모님 사이도 안 좋았고, 집안에 빚도 좀 있고…”
역시나, 맹호는 그런 생각과 함께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여동생을 둘러싼 사정만 들어도, 유라네 집 분위기가 어떤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집안에 있음 당연히 집에 있는 것만으로도 피곤하잖아. 그래서 나도 중학교에 가서부턴 될 수 있는 대로 밖에서 지냈어. 쉬는 날이면 만날 도서관에 있고, 아니면 밖에 돌아다니고. 내가 밖에만 있으니까 동생은 집에 있을 수밖에 없잖아. 걔도 정말 많이 힘들었을 거야. 원래 그런 걸 참는 성격도 아니고.”
“…그러게.”
유라의 말에, 맹호는 그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유라가 하는 말은 다 맞는 말이었다. 맹호도 대충, 유라네 집이 어떤 곳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껏 죽 그래왔던 거야. 고등학생이 된 다음엔 야자에 참여하고, 독서실에 가고…바뀐 게 하나도 없어. 동생하고는 가면 갈수록 얘기도 한 번 못 하고. 그 애가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에 놓이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데. 게다가 난 언니노릇하기 무지 부족한 애고. 걔가 얼마나 나한테 열받았을지 짐작도 안 가. 그러니까 지금껏 얘기도 하나 제대로 못 나누는 거겠지 뭐.”
“…”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지만, 유라는 지금 당장이라도 울고 싶어 견딜 수 없단 표정이었다. 아마 지금까지도 죽 이런 말을 하는 건 꺼리고 싶었을 것이다. 이제야 이런 사실을 누군가한테 털어놓는 게, 힘들기도 하고 괴롭기도 했을 터였다.
하지만, 유라는 지금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자신, 즉 맹호한테 모든 걸 털어놓고 있었다.
“걔도 엄청 힘들었을 텐데, 내가 일부러 모른 척했거든. 근데 지금, 어쩐지 그 벌을 받는단 느낌이 들더라. 언니가 되어가지고 동생 마음도 몰라주고…이젠 동생이 왜 날 꺼리는지 알겠지? 걔가 날 좋아할 리 없잖아. 만날 밖에만 있고, 자기 생각만 하고, 자기랑 말도 안 하고, 언니답지도 않고…”
“아냐. 괜찮아. 그…유라 니가 얼마나 힘들었을진 알겠거든.”
맹호는 그 말과 함께, 자기가 하고싶은 말을 가만히 되짚어봤다. 물론 맹호는 유라가 아니기에, 지금 어떤 식으로 대답해도 큰 도움은 안 될 거란 사실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맹호는 유라한테 뭔가 말하고 싶었다. 비록 유라는 자기 정체를 모르지만, 그래도 유라 얘길 들었으면 자기 얘길 하는 게 도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맹호는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너무 자책하지 마. 나도 비슷하니까. 뭐라고 해야 하나…우리 가족도 옛날에 다 돌아가시고 없거든. 부모님이랑 형제자매들도.”
“…그래?”
맹호가 솔이 말고 처음으로 사람한테 이런 마음을 털어놓자, 유라는 놀란 듯 맹호를 쳐다봤다. 하지만 이미 결심이 선 맹호는, 천천히 자기가 살아온 길을 털어놓았다. 물론 가장 중요한 자기 정체는 쏙 빼놓은 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한테 기대를 많이 하셨거든. 가문의 대를 이을 존재라 해야 하나…그런데 보면 알겠지만, 그, 난 그렇게 대단한 놈이 아니잖아. 그래서 혼자 얼마나 고민했는지 몰라. 자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뭐 그런 걸.”
“…”
“그럴 때 솔이를 보면 많이 부럽지. 자기 속내 잘 드러내고, 나보다 몇 배는 더 믿음직하고…저번에 유라 니가 그랬지. 내가 어떤 놈인지 모르겠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거야. 나도 내가 믿음직하단 생각은 별로 안 해 봤거든. 하지만…”
거기서 말을 끊고, 맹호는 유라를 가만히 쳐다봤다. 어쩐지, 지금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앞으로는 조금 더 용기를 내려고. 아버지 기대에 걸맞는 놈도 되고 싶고, 다른 애들이 믿어주는 거에도 보답하고 싶거든. 유라 너도, 힘들 거란 건 알아. 나도 그렇고. 그래도 우리, 같이 잘해보자. 괜찮을 거야. 정말로.”
맹호는 그 말과 함께, 속으로 까치를 떠올렸다. 지금껏 까치는 맹호랑 가장 친한 친구였고, 그와 함께 가장 강한 맞수였으며, 삶의 동반자가 될 게 분명한 존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까치는 ‘사람세상에서 살 땐’ 자기보다 훨씬 더 뛰어난 놈이었다. 맹호 자신도 지금껏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맹호는 자기 길을 똑바로 걷고 싶었다. 까치는 물론 대단한 놈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죽어있을 수만은 없다. 자기도 ‘호랑이의 왕’에 걸맞는 존재가 되어야지. 맹호는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혼자 이렇게 다짐했던 것이다.
그래서 맹호는 유라를 위해,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런 자기 사정이라도 유라한테 도움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물론 이건 그저 자기가 걸어온 길일 뿐이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힘든 길을 걸어온 건, 절대 유라뿐만이 아니니까.
그런 마음을 알아준 걸까, 유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이제 잘 알 거 같아. 넌 그냥 말이 없는 애였던 거구나. 나랑 비슷하네. 그런 줄도 모르고.”
“아냐. 니 눈엔 그, 이상하게 보였을 거란 거 잘 아니까.”
맹호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사실, 지금도 맹호는 유라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만약 자기 ‘정체’를 알게 된다면 유라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혹시나 자기가 원래 모습을 보여주기라도 한다면.
“그 때 내가 너무 심하게 말했지. 그 동안 죽 미안하단 말도 못했고. 난 그 때 정말 니가 알 수 없어서, 그, 이상한 힘도 썼고…너한테도 사정은 있을 텐데.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나 봐.”
“아냐. 괜찮대도. 그러니까…”
유라가 갑자기 사과해오는 바람에, 맹호는 어쩐지 고개를 들 수 없어졌다. 이젠 괜찮은 걸까? 만약 유라하고 오해를 풀 수만 있다면, 맹호는 뭐든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호랑이의 왕’이라는 자기 정체성조차도. 물론 이걸 준다고 뭔가 바뀌진 않겠지만.
“그러니까, 그…”
그 말을 끝으로, 유라는 맹호한테 손을 내밀었다. 이게 뭐지? 잠깐 생각하다가, 맹호는 그게 ‘악수하자’는 뜻이란 걸 알아챘다.
“으, 응. 앞으로 잘 지내자. 유라야.”
결국 맹호는 여전히 달아오른 얼굴을 모른 척하며, 유라의 손을 꽉 잡았다. 솔이말고 다른 여자애 손을 잡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자애들은 다 손이 이렇게 따뜻한 걸까.
이성에 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맹호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가만히 했다.

그 다음날, 연습이 끝난 뒤 맹호 일행은 패스트푸드점에서 잠깐 뭐라도 먹고 가기로 했다. 때마침 토요일이었고, 다들 오랜만에 연습에 빠져있던 나머지 많이 피곤해했기 때문이다. 맹호도 패스트푸드인가 뭔가하는 걸 텔레비전에서 보거나 학교에서 단체로 사먹은 기억밖에 없었기에, 이렇게 가게에 가는 건 사실상 처음이었다.
“어유, 이 비는 언제 그치는지 원.”
가게로 들어온 다음 우산을 접으며, 까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지. 그나마 부슬비라서 다행이긴 했지만, 맹호는 이걸 깨달을 때마다 저절로 자기가 부끄러워지곤 했다.
어쨌든 일단 자리를 잡은 뒤, 맹호 일행은 주문한 음식을 가지고 와서 맛있게 먹고 있었다. 맹호 자신은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 올 일이 별로 없었기에, 묘하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마치 바늘방석에라도 앉은 것같은 느낌이 들어서, 음식도 어쩐지 잘 안 넘어가는 것 같았다.
역시 자긴 도시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단 생각과 함께, 맹호가 가만히 햄버거를 입에 넣고 있을 때.
“…”
패스트푸드점 구석에서, 맹호 일행은 ‘어디서 많이 본’ 인물을 찾아냈다. 그 인물은 물론 도깨비 여자애, 딱 한 명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도깨비 여자애 앞에서 같이 햄버거를 먹고있는 긴 생머리 여자애 역시, 맹호 일행이 아주 잘 알고 있는 아이였다.
그 애는 바로, 요즘 모습이 안 보이던 유라 여동생이었다.
“…엄청 친해진 거 같은데?”
가면 갈수록 얼굴이 창백해지는 유라를 생각해서인지, 까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까치 말대로, 유라 여동생과 도깨비 여자애는 묘하게 사이가 좋아진 모습이었다. 지금도 아주 편하게 얘길 나누며, 둘이서 맛있게 햄버거를 먹고 있었던 것이다. 유라 여동생도 별달리 거리를 두지 않는지, 굉장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도깨비 여자애 쪽 감자튀김을 하나 집어먹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껏 쌓인 감정을 도깨비 여자애한테 다 털어놓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걸 가만 내버려둬야 하나.
맹호는 잠깐 생각하다가, 결국 마음을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걔네들이 있는 데로 가려고 했는데.
“…너 말이야.”
맹호보다 먼저, 유라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 빠른 발걸음으로 그 쪽에 다다라있었다. 게다가 자기 여동생한테 말을 거는 목소리가, 지금까지 들어본 적도 없을 만큼 낮게 가라앉아있었다.
“왜 내 동생이랑 같이있는 거야. 누가 그래도 된대? 나는…”
“아니, 이 언니는 자기 동생한테 억하심정이라도 있나.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데?”
그 때, 유라 여동생이 대놓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깜짝 놀란듯한 유라를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소리질렀다.
“이젠 아주 가지가지한다. 이런 데 오래 있기도 싫네. 야, 우리도 가자. 괜히 기분만 잡쳐선.”
그 뒤, 유라 여동생은 도깨비 여자애의 손목을 잡은 채 그대로 자리를 떴다. 심지어 먹다 남긴 음식까지 그대로 내버려둔 채.
유라는, 단지 어처구니가 없단 표정으로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맹호는 물론, 아무도 유라한테 함부로 말을 걸지 못했다.
“…”
하지만 맹호는 이 광경을 보면 볼수록,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물론 지금, 자기한텐 힘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걸 그냥 내버려둘 순 없었다. 이걸 그냥 볼 수밖에 없다면, 그건 너무나도 억울할 일이란 생각이 맹호의 머리를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맹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건물 밖으로 뛰어나가 도깨비 여자애를 찾고있었다. 마침 도깨비 여자애는 유라랑 막 헤어진 뒤, 뒤를 돌아 어딘가로 가려던 참이었다.
물론, 맹호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에잇!”
도깨비 여자애가 방심한 틈을 타, 맹호는 얼른 그 뒷모습한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도깨비 여자애도 그냥 앉아서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대체 어디서 빼낸 걸까. 도깨비 여자애는 이젠 낯이 익은 부채를 홱 빼들고는, 맹호한테 크게 휘둘러댔다.
자, 잠깐만, 이러다간 누가 보…아, 맞다. 도깨비 여자애한텐 ‘들키지 않는’ 힘이 있었지.
맹호는 그렇게 생각하다, 미처 피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땅바닥에 크게 엉덩방아를 찧은 맹호가 반격해보려 했지만, 이미 도깨비 여자애는 안전한 데로 피한 뒤였다.
대체 왜 도깨비 여자애가 팔 한 번 휘두른 데에 자긴 이렇게 속절없이 당하기만 하는 걸까.
맹호는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이래서야 싸움이 되질 않는 것이다. 적어도 도깨비 여자애는, ‘힘’으로는 맹호한테 한수 위였다.
“어유. 깜짝 놀랐다야. 그건 그렇고…”
도깨비 여자애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는 척하다가, 마치 뭔가 재밌는 거라도 떠올랐단 표정으로 맹호를 봤다. 그리고 이 말을 남긴 뒤,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근데 정말 너 호랑이의 왕 맞아? 어째 좀 아닌 거 같다. 안 그래?”
그 말에, 맹호는 도깨비 여자애를 뒤쫓을 생각 자체가 아주 사라져버렸다. 그저 자기 머리위에 있는 하늘만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이 뒤 며칠동안, 맹호는 오로지 ‘호랑이의 왕’의 힘을 키우는 데에만 온힘을 쏟았다.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도 관심을 두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 안 하면, 절대 도깨비 여자애를 쓰러뜨릴 수 없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물론 지금까지도 도깨비 여자애를 쓰러뜨리려고 연습했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하고는 마음가짐 자체가 달랐다. 전엔 ‘과연 자기가 잘 할 수 있을까’란 불안감도 있었고, ‘결국 안 되는 건 아닐까’란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 맹호는, 어떻게 해서든 도깨비 여자애를 쓰러뜨리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었다. 얼른 도깨비 여자애를 물리친 뒤, 유라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긴 정말로 호랑이의 왕’이라는 믿음을 갖고 싶었다. 도깨비 여자애가 뭐라하든, 자긴 분명 ‘호랑이의 왕’이니까.
그래서일까, 요즘 맹호는 어쩐지 자기 힘이 조금 강해진 것같단 느낌이 들었다. 전엔 산들바람보다도 못했던 자기 힘이, 요즘엔 또렷하게 느낄 수 있을 만큼 큰바람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어쩌면, 자기 힘으로도 도깨비 여자애를 쓰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자신감과 함께, 맹호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북받쳐오르는 기쁨을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자기 실력이 조금씩 늘고 있단 사실 그 자체가 무척 즐거웠던 것이다.
괜찮아. 나라도 할 수 있어.
맹호는 스스로한테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연습에 온 힘을 쏟았다. 자기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하기 위해. 그리고…

한편, 동아리에서 하는 사물놀이, 그러니까 호남우도 연주도 전과 댈 수 없을만큼 잘 이뤄지고 있었다. 특히 소리가 맞게 됐단 사실이 가장 컸다. 이젠 다들 안 맞는 소리에 신경쓰지 않고, 순수하게 ‘연주하는 즐거움’에 마음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맹호도 자기가 짐꾼이 아니라, ‘연주를 달아오르게 하는 존재’가 된 게 무척 기뻤다. 애초에 맹호는 사물놀이란 걸 알게 된 뒤부터 그 박력에 죽 끌려왔던 것이다. 자기가 그 신나는 연주의 일원이 된 것만으로도, 맹호한테는 이미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정말로’ 맹호가 연주를 즐겁게 만들고 있었다.
까치가 시끄럽게 치는 쇳소리를 시작으로 해서, 다른 악기들과 소리를 맞춰가며 때로는 세게, 또 때로는 약하게 눈앞에 있는 북을 두드린다. 변화무쌍한 상쇠의 연주에 지칠 때도 있지만, 그래도 흥겨운 소리가 맹호의 마음을 북돋아주고 있었다. 때로는 장구가 중심이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상쇠가, 그 다음엔 맹호가 치는 북이 가락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느려졌다 빨라졌다하는 가락에 맞춰서 채를 자유롭게 놀려가며 연주하다 보면, 맹호는 어쩐지 어깨가 저절로 들썩이는 것 같았다. 그토록 바라던 ‘신명나는 연주’가, 지금 여기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맹호는 지금, 어쩐지 하늘이라도 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가락을 자유롭게 따라다닐 수 있단 게 이렇게 기쁜 일이란 걸 너무나 오랜만에 깨달았던 것이다.
솔이랑 눈을 맞추자, 맹호가 더 민망해질 정도로 환한 웃음이 돌아왔다. 용기를 내어 유라하고도 눈을 맞추자, 조금 민망해하면서도 분명 자기한테 눈빛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맹호는 이 순간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마구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정말로 이건 현실인 걸까. 하지만 이 소리도, 이 들뜬 느낌도, 다른 아이들의 모습도, 분명 생시였다. 결코 꿈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자꾸만 두근대는 마음이, 이건 진짜란 걸 맹호한테 말해주고 있었다.
쇳소리는 가면 갈수록 절정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맹호의 마음도 그 빠른 가락에 따라, 점점 더 들뜨는 게 느껴졌다. 맹호 자신이 어떻게 하려하지 않아도, 손이 저절로 가락에 맞춰 빠르게 움직였다. 두들길 때마다 몇 번이고 들리는 묵직한 북소리가, 마치 맹호의 심장소리라도 되는 것처럼 마음속에 울려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마지막이 되자, 쇳소리는 시끄러울 정도로 격하게 울러퍼졌다. 맹호도 그에 따라, 손이 아파올 정도로 북을 세게 두드렸다. 물론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맹호한테는, 온몸을 헤집고 다니는 가락만이 신경쓰일 뿐이었다.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빠른 소리가 맹호를 잡고는 도무지 놓아주질 않았다.
그렇게 소리에 한껏 취한 채, 셋, 둘, 하나…
“끝났다!!”
다섯 박자로 끝나는 시원하면서도 후련한 쇳소리와 함께, 솔이가 들뜬 목소리로 몸을 일으키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솔이뿐만이 아니었다. 까치도 오랜만에 무척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야. 이런 게 바로 풍물이지. 속끝까지 시원하네 아주. 맹호 너도 오늘 잘 치더라. 그지?”
“뭐, 그, 그렇기도…”
“아무튼 이 놈은 칭찬하면 민망해한다니까. 몸집에 안 맞아요. 이런 데는.”
“조, 조용히 안 해…요?!”
고개를 들지 못하면서도, 맹호는 어떻게 해서든 반론을 펼치려했다. 하지만 맹호도 자기가 저 놈을 이길 수 있을 리 없단 건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까치는 지금까지 거짓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떄문이다.
“아, 맞다. 맹호도 장구 한 번 안 쳐볼래?”
“엉?”
그 때, 솔이가 갑작스레 그런 말을 하면서 자기 장구를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맹호는 북 말고 다른 악기를 만져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상쇠는 까치가 치는 것만 봐도 충분히 어려울 것 같았고, 장구는 손놀림이 복잡한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맹호도, 가끔은 북 말고 다른 악기를 만져보고 싶단 생각을 품곤 했다. 다른 아이들이 치고있는 걸 보면, 자기도 어쩐지 연주해보고 싶은 생각이 나곤 했던 것이다. 특히 장구는 타악기인데도 ‘가락을 연주하는’ 느낌이 무척 재밌었다. 물론 좀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한 번 만져보고 싶었던 건 사실이었다.
결국 정신을 차려보니, 맹호는 무릎 바로 앞에 장구를 둔 채, 양손에 각각 장구채를 쥐고 있었다. 장구가 이렇게 큰 악기였던가. 바로 눈앞에서 보면, 장구는 북보다 더 큼직하게 느껴졌다.
일단 장구에 달린 줄을 무릎으로 눌러 악기가 움직이지 않도록 한 뒤, 맹호는 조심스레 솔이가 했던 것처럼 채를 잡고 가볍게 쳐봤다. 물론, 태어나서 장구를 처음 잡는 맹호가 제대로 연주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더군다나 오른손잡이인 맹호는 아무리 애를 써봐도 왼손으로 연주하는 게 어려웠다. 장구가 이렇게 어려운 거였구나. 자기가 직접 만져보니, 그런 사실이 마음 속 깊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는 건 더 민망해서, 어떻게 해서든 연주를 해보려고 애쓸 때.
“그, 이렇게 해 봐.”
“…응?”
맹호의 손 위에, 자기보다 더 작으면서 따뜻함이 느껴지는 다른 손이 얹어졌다. 그리고 그 목소리로, 맹호는 그게 누구인지 알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자기 등뒤에, 유라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도 조심스레 자기 손을 잡은 채, 장구를 어떻게 치는지 가르쳐주려 하는 것이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잖아. 맹호는 어떻게 해서든 그런 생각을 하려 애썼지만, 자기 손 위에 있는 이 따뜻한 느낌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맹호는 어쩐지, 자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같단 느낌을 받았다. 유라랑 이런 사이가 되다니, 이건 정말로 말도 안 되잖아. 그래도 이건 분명 현실인데. 어떻게 해야 하지, 어쩌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하지만 유라는 그런 맹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 손으로 맹호한테 채를 쥐게 하고는 가만히 장구를 두드리고 있었다. 맹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온몸의 힘을 빼고는, 유라의 손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유라는 맹호가 채를 쥐고 있는 걸 바로잡아주기도 하고, 어떻게 치는지 직접 치면서 알려주기도 했다. 유라한테 온몸을 맡기고 있으니, 맹호도 어쩐지 어떻게 장구를 치면 되는지 알 것같단 느낌이 들었다.
“이야. 그래도 이런 날이 올줄은 꿈에도 몰랐네. 우리도 한 번 대회같은 데 나가면 어때. 괜찮지, 응?”
“그, 글쎄요?”
자기 멋대로 좋아하는 까치한테 대충 대답하며, 맹호는 지금 이 현실을 다시 곱씹어봤다.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유라가 자기한테 악기를 가르쳐주고, 자기가 연주하면서 한 번도 틀리지 않다니.
지금이라면, 이 친구들하고 같이 다른 데서도 즐겁게 연주할 수 있지 않을까.
자기 실력이 아직 한참 모자라단 건 알고 있었지만, 맹호는 한 번 꼭 그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지금 당장 그럴 수는 없겠지만.
“우아, 유라랑 맹호랑 무지 잘 어울린다. 맹호도 좋지, 그지?”
“응? 어, 뭐, 그, 그런가?”
갑자기 솔이가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말해오자, 맹호는 뭐라 대답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솔이한테 이런 모습을 보이면 괜히 묘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솔이는 ‘그런 마음’이 털끝만큼도 없는지, 그저 유라랑 친하게 지내는 맹호를 마음속 깊이 기뻐해주고 있었다.
“저, 그런데 둘은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전학오기 전부터 그런 사이가…?”
“아, 맞다. 유라 넌 모르…”
맹호는 그렇게 대답하려다, 무심코 말을 꿀꺽 삼켰다. 당연히 유라한테 자기들 이야길 사실대로 털어놓을 순 없어서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뭐라 대답해야 좋단 말인가. 맹호가 혼자 고민하는데, 갑자기 솔이가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뗐다.
“나는 맹호가 북치는 모습이 너무 좋더라. 맹호가 북치는 게 무지 멋있어서 자꾸 해달라고 조르고 그랬다. 맹호가 즐거우면 나도 즐겁고.”
“소, 솔이야. 그 말이…”
“아, 그렇구나. 그래서…”
“…응?”
맹호는 유라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깜짝 놀랐지만, 이내 어떻게 된 건지 알아챘다. 솔이는 일부러 지금 맹호한테 이런 말을 건넨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유라도 자연스럽게 알아서 생각해줄 테니까. 진실을 지금 말하지 못하는 건 무척 미안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부럽다. 그렇게 친하게 지낼 수 있다니. 난 그런 친구가, 그…”
게다가 유라가 이런 식으로 말꼬리를 흐리자, 맹호는 자연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유라를 보면, 교실에서도 혼자 있는 느낌이 강했던 것이다. 이걸 깊게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맹호는 어떻게 해서든 이야깃거리를 다른 데로 돌리려고 머리를 굴렸다.
“아, 마, 맞다. 그러고 보니 여동생은…?”
그러고 보니 저번 일이 떠올라서, 맹호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그 뒤로 유라랑 여동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워낙 상황이 험악하다 보니, 맹호 입장에선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으, 응. 아직 그다지…”
“그, 이런 말은 무척 가볍겠지만, 우리가 있단 걸 잊지 마.”
“…응?”
유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 말은 맹호가 전부터 꼭 하고싶었던 말이었다. 물론 좀 민망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말을 도로 집어넣을 생각은 없었다.
“물론 동생 때문에 힘들겠지만, 그래도 유라 넌 혼자가 아냐. 우리도 같이 있어. 나도 어떻게 해서든 걔랑 싸울 거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이젠 아니까.”
유라는 그 말과 함께, 처음으로 맹호를 보며 웃었다. 그 말, 그리고 그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맹호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느꼈다.
정말로 이번엔 꿈이 아닐까. 자기가 뭘 잘못먹은 건 아닐까.
몇 번이고 생각했지만, 분명 ‘이것도’ 현실이었다. 유라가 드디어 자길 이해해준 것이다. 물론 정체를 밝힌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순간이 찾아온 것만으로 맹호는 충분히 기뻤다.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른 적이 지금까지 살면서 얼마나 있었을까. 그런 생각과 함께, 맹호는 속으로 다짐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입을 열어, 그 다짐을 유라한테 털어놓았다.
“내가 다시 약속할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여자애를 내가 쓰러뜨리겠다고. 정말이야.”
유라는 그런 맹호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지만, 맹호는 그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곧장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맹호는, 다시금 자기한테 이렇게 일러줄 수 있었다.
유라도 이렇게 믿고 있잖아. 앞으론 어떻게 해서든 도깨비 여자애를 물리쳐야 한다. 알았냐?
그런 맹호 일행이 있는 교실 창가엔, 여전히 부슬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마치 맹호의 그런 마음을 시험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리고 다음 날, 평소처럼 연습을 하던 도중에.
“유, 유라야?!”
어제처럼 좋은 분위기였는데, 갑자기 유라가 연습하다 말고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웠기에, 맹호는 물론 천하의 까치조차 당황함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왜, 왜 그래? 괜찮아? 무슨 일이 있으면…”
“나, 나 있지. 자꾸만 걱정돼.”
유라는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힘없는 소리로 간신히 말을 이었다. 이렇게까지 약한 유라는, 맹호도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요즘엔 동생이 나만 보면 등을 돌린단 말이야. 같은 곳에 있으려하지도 않아. 적어도 전엔 같이 있기라도 했는데. 나한텐 어떻게 할 힘도 없고…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 난 정말…”
“…”
맹호는 잠시동안,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를 몇 번이고 망설였다. 지금 유라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지 알기에, 가벼운 말조차 걸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럴 떈 어쩌면 좋을까. 유라만큼이나, 맹호 역시 그런 생각을 하는 게 괴로웠다.
하지만 이럴 때도, 솔이는 여전히 상냥했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우리가 있잖아.”
솔이는 유라한테로 다가간 뒤, 조심스레 안아주며 그런 말을 건넸다. 자기가 모든 걸 받아줘도 된다는 듯, 한없이 다정한 모습이었다.
맹호 역시, 솔이가 이럴 때 얼마나 강해지는지는 무척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누군가가 힘들어할 때마다, 솔이는 맹호조차 깜짝 놀랄 만큼 힘있는 모습을 보이곤 했던 것이다. 특히 자기가 마음을 튼 존재라면 더더욱.
그리고 유라는 솔이한테 안긴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마치 모든 걸 씻어내리려는 것처럼. 시간마저 잊은 채 오랫동안.

그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 있지. 유라가 정말 좋아. 나랑 비슷한 데도 많으니까. 그, 속에 이것저것 많이 숨기고 있는 거.”
맹호랑 우산을 쓴 채 나란히 걷고 있다가, 솔이가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솔이가 이런 식으로 마음을 털어놓는 건, 그다지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항상 솔이는 잘 모르는 아이를 대하기 어려워했던 것이다.
하지만, 맹호는 지금 솔이 마음을 잘 알 것 같았다. 솔이 역시, 자기 속내를 남한테 잘 털어놓지 못하는 것이다. 유라와 성격은 다를지 모르지만, 품고 있는 사정은 비슷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맹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빗방울이 떨어지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그렇구나.”
“그러니까 맹호가 유라를 도와주면 좋겠어. 그치만 맹호는 할 수 있지? 맹호가 얼마나 센데.”
“그래. 저번에도 말했잖아.”
맹호는 어떤 변명도 하고 싶지 않았다. 솔이가 어떤 마음일지 무척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솔이의 마음은 맹호의 마음이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든, 도깨비 여자애를 쓰러뜨리고야 말겠다.
솔이를 가만히 다독이며, 맹호는 속으로 또다시 그런 생각을 했다.

그 뒤 여느때처럼 사람이 없는 공원에서 연습에 빠져있던 맹호는, 뭔가 자기가 달라졌단 걸 느꼈다. 전보다 훨씬 센 바람이, 주위에 있는 나무들마저 술렁이게 했던 것이다.
이게 정말 자기 힘이란 말인가.
맹호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꼈다. 지금껏 맹호는 도깨비 여자애를 꼭 쓰러뜨리겠다고 다짐한 것까진 좋았지만, 자기 실력이 거기 따라가지 못한다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쩌면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꿈이, 바짝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좋았어. 이대로만 가면 돼.
그런 생각에만 마음을 집중한 채, 맹호는 연습으로 다시 돌아갔다. 이번만은 꼭 이기고야 말겠어. 유라랑 솔이 몫까지. 란 생각과 함께.

모레 뒤, 연습이 끝나고 나서 유라는 멍한 표정으로 교실 바닥에 주저앉아있었다. 당연히 신경쓰일 수밖에 없어서, 맹호는 조심스레 유라 쪽으로 다가갔다. 창가를 두들기는 빗소리가, 가뜩이나 긴장한 맹호를 더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유라야. 왜…”
“그, 어제 그 애랑 만났어. 우리 동생하고 요즘 자주 다니는 애.”
물론 맹호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도깨비 여자애밖에 없었다. 유라는 반은 풀죽고 반은 정신을 잃은 표정으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걔가 그러더라. 그 앤 언니란 말만 들어도 인상을 찌푸리더라고. 그런 니가 어떻게 언니노릇을 할 자격이 있냐고. 그래. 없지. 나도 알아. 걘 겉으론 혼자서도 잘 해왔고. 그치만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보고 어쩌라고. 난 그저…”
“그래, 알아.”
더 이상 뭐라 말할 수가 없어서, 맹호는 유라한테 다가가려 했다. 어깨라도 껴안아주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자기가 그런 짓을 한다면 유라는 화내지 않을까.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어 머뭇대던 찰나, 유라의 어깨가 더 심하게 흔들렸다.
“나, 난 앞으로 동생하고 어떻게 지내야 되지? 가만히 생각하면 그 앤 나 때문에 삐딱해진 거잖아. 아직 많이 놀고싶을 나인데.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할까. 정말 모르겠어. 난…”
“응. 괜찮아. 계속 말해도 돼.”
“그…이렇게 아무 힘도 없는 내가 싫어. 앞으로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뭘 해야 잘했단 말을 들을까. 지금 난 도무지…”
“괜찮아. 나도 비슷한 생각 많이 했거든.”
맹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유라의 어깨를 감싸안고 있었다. 이런 걸 남들이 보면 뭐라고 할까. 잠깐 그런 생각도 했지만, 그것보단 유라를 달래주는 게 훨씬 더 중요했다.
유라가 싫어하면 어쩌지.
속으론 그런 걱정도 했지만, 다행히도 유라는 맹호 품에서 가만히 있었다. 아마 이대로 죽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도 괜찮을 거야. 난 그렇게 믿어. 나도 같이 있잖아. 그러니까 기운내자. 응?”
맹호는 이렇게 누군가를 달래는 게 난생 처음이라서, 어쩌면 좋을지 잘 알 수 없었다. 이런 일은 솔이가 적격이지, 자기는 아무래도 좀 안 맞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서툴게나마, 맹호는 조심스레 유라를 어루달랬다. 물론 솔이보단 좀 떨어지겠지만, 자기한텐 솔이도 할 수 없는 일이 분명 있을 터였다.
이렇게 어깨를 감싸안아주는 것도, 몸집이 큰 맹호한테 맞는 일이니까.
유라는 맹호가 자기 어깨를 감싸안아주는 게 편했는지, 한동안 거기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맹호의 어깨가 살짝 젖어있는 것도 까닭 중 하나일지 몰랐다.
유라도 자기가 울먹이는 걸 들키는 건 힘들겠지.
그런 생각에, 맹호는 죽 유라의 어깨를 감싸안은 채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창밖을 두들기는 부슬비가, 둘한테 시간이 오래 지났단 걸 알려줄 때까지.

그래서, 앞으론 어떻게 해야 하지.
이미 결심을 내렸을 텐데, 맹호는 집에 가는 길에 그것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유라의 말을 들은 이상, 도깨비 여자애한테선 반드시 이겨야 했다. 하지만, 자기가 ‘반드시’ 이길 수 있단 보장은 어디에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맹호는 아직 자기 힘을 믿기 힘들었다. 물론 요즘 차츰 좋아지곤 있지만, 도깨비 여자애 앞에서 안정적으로 쓸 수 있는지 어떤지는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이겨야겠단 생각은 있지만, ‘꼭 이길’ 자신은 자기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런 자기가 ‘호랑이의 왕’이란 이름을 달 자격이 있는지조차, 이젠 모호한 느낌이었다.
이럴 때 맹호가 항상 하던 일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결국 마음을 굳힌 맹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먼저 기다리고 있던 솔이한테 이런 말을 건넸다.
“솔이야. 같이 산에 안 갈래? 지금 무지 견디기 힘들거든.”

솔이는 아무 말도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맹호를 따라와줬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맹호는 솔이의 이런 마음이 무척 고마웠다.
이미 날도 저문 시간에, 맹호랑 솔이는 집 밖으로 나와 88번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화성행궁에서 내려, 산에 올라갈 수 있는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도심 한복판에서 알지도 못하는 길을 따라걷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지만, 그래도 앞으로 갈 곳을 생각하면 기운이  절로 나는 것 같았다.
여러 모로 도시가 낯선 맹호였지만, 그래도 핸드폰에 나온 지도를 보면 어떻게든 길을 찾을 수는 있었다. 당연히 처음 가보는 곳이었지만, 맹호는 바로 근처에서 ‘자연의 냄새’가 난단 걸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맹호는 지금, ‘사람’이 없는 곳이 무엇보다도 필요했다. 물론 도시에 살고 있는 지금, 그건 무척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나마’ 사람이 없는 곳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마련할 수 있었다.
그래. 바로 지금처럼.
“우아, 맹호야. 저거 봐. 예쁘다…”
“…그러게.”
그렇게 산 높은 곳으로 올라온 맹호랑 솔이 눈앞엔, 별빛들의 잔치가 펼쳐져있었다. 도깨비 여자애하고도 한 번 본 모습이었지만, 산 속에서 보는 건 그 때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맹호는 산골에서 죽 지냈기에, 산 속에서 볼 수 있는 경치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단 사실을 처음 알았다. 물론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산골풍경도 아름다웠지만,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산은 그 경치가 아주 달랐다.
자기가 살던 도시는 바로 위에서 내려다봐도, 그리고 이렇게 멀찍이서 내려다봐도 아름다운 구석이 무척 많았던 것이다.
어째서인지, 맹호한테는 그 사실이 무척 새롭게 느껴졌다. 저렇게 먼 곳에 사람이 이렇게나 많이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저 속에 원래는 맹호 일행도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다. 대체 이 도시는 얼마나 넓은 걸까. 얼마나 많은 존재들이 살고있는 걸까. 자긴 얼마나 작은 존재일까. 자기는.
거기까지 생각하자, 맹호는 모든 감정들이 와르르 풀려나오는 걸 느꼈다. 때마침 사람도 없는 상황이라서, 더 참을 것도 뭣도 없었다. 이젠 더 이상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지내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까지 약한 마음이 자기 본모습이란 말인가.
맹호는 그 생각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론 그런 자신이 마냥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과연 이런 놈이 ‘호랑이의 왕’이라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오늘따라 그런 생각이, 맹호의 심장을 푹 찌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맹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졌다. 부끄러울 건 없었다. 지금 이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매, 맹호야?”
“그, 미안. 잠깐만 이렇게…”
맹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렇게 도심에서 지내던 게 힘들었나. 맹호는 스스로 놀랐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일어날 힘은 없었다. 몸은 물론, 마음까지도.
그래서, 이번만이라도 좋으니 엄살이라도 부리고 싶었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도 모르니, 여기서라도 조금 마음이 편해졌으면 했다.
“솔이야. 난 왜 이렇게 모자랄까. 왜 난 ‘호랑이의 왕’인데도 힘을 제대로 못 쓰지? 내가 못나서 그런가. 아니면…”
“아냐. 맹호는 엄청 대단한 애야.”
“그래도…”
그런 말을 목에서 꺼내려다, 맹호는 깜짝 놀란 나머지 말하던 걸 멈췄다. 솔이가 자길 확 끌어안은 것이다. 마치 자기가 맹호의 눈물을 멈춰주기라도 하겠단 것처럼, 솔이는 맹호의 고개를 감싸안은 채 품에 안겨왔다. 맹호처럼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은 채.
맹호는 무심결에, 자기 고개를 솔이 품에 갖다대고 있었다. 자기가 이렇게 지쳐있었단 말인가. 맹호는 놀랐지만, 지금은 정신을 차릴 기운조차 없었다.
자기보다 훨씬 나중에 태어난 친구한테 이런 식으로 위로받다니. 하다못해 지금 당장이라도 고개를 드는 게 염치있는 짓일 텐데, 맹호는 그러지도 못했다.
“그러니까 괜찮아. 맹호는 사람이 아니잖아. 그런데 사람 세상에서 지내려면 힘들 수밖에 없잖아. 알아. 무지 당연한 거야.”
“솔이야. 미안. 만날 내가 약한 말하는 것만 받아주고, 나는, 그…”
한심하게도, 눈물이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이제 맹호는 날이 어둡든 말든 더 이상 고개를 들 수 없어졌다. 지금 고개를 들면, 자기가 울고 있단 게 가로등 불빛에 비춰보이지 않는가. 천하의 ‘호랑이의 왕’이, 이렇게까지 추한 모습을 보일 수는.
“아냐. 나도 만날 맹호한테 고마운 걸. 맹호는 내가 힘들어해도 받아주잖아. 나도 받아줄 수 있어.”
물론, 맹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항상 고맙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솔이는 정말로 생명의 은인이었다. 맹호의 약한 마음도 구해주는, 조그만 몸집에선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넓은 마음을 지닌 아이. 이 아이가 항상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웃기를, 맹호는 속으로 얼마나 바라왔던가.
“그, 그렇지만, 내가 더 살아온 해는 많잖아. 따지고 보면 내가 솔이보다 더 어른…일 텐데, 만날 도움만 받잖아. 그게 미안해서…”
맹호는 자기가 살짝 울먹이고 있단 걸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솔이보다 훨씬 더 큰 어깨가 살짝 떨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런 자기도 솔이는 받아줄까. 이렇게 약해서 부스러질 것만 같은 마음도, 솔이는 알아줄 수 있을까.
하지만, 솔이는 맹호 생각보다 훨씬 더 마음이 깊은 아이였다.
“괜찮아. 우린 친구잖아. 맹호랑 나는 친구 맞지, 그지?”
“…응.”
“그러니까 나이는 아무 상관없는 거야. 맹호도 살아있는 존재니까 힘든 건 당연하잖아. 그럴 땐 내가 힘이 되고 싶어. 나는 맹호를 무지 좋아하니까.”
맹호는 이 아이 앞에서 자꾸만 약한 말만 했던 자기가 부끄러워졌다. 솔이한테 맹호의 진짜 나이나 겉모습같은 건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솔이한테 맹호는, 누구보다도 소중한 친구였다. 그거면 됐던 것이다.
맹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솔이는 물론, 까치도, 유라도, 그리고 산골에 있는 환웅도, 모두 맹호를 마음 속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호랑이의 왕’이란 짐은 무척 버거웠지만, 그 짐을 나눠질 수 있는 친구들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니까, 맹호는 도깨비 여자애한테 맞설 수 있을 게 틀림없었다. ‘호랑이의 왕’이란 이름에 자기가 걸맞단 증거도, 친구들과 함께라면 보여줄 수 있을 터였다.
여기에 있는 맹호의 친구들은, 맹호가 ‘밤의 세상’이 아니라 ‘사람들의 세상’에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해주고 있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도깨비 여자애한테 맞서자. 그리고 유라를 웃게 만들자. 솔이를 마음놓게 하자. 그리고,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맹호는 잠시동안 민망한 마음을 잊은 채 누구보다도 따뜻한 솔이의 품에 안겨있었다. 하늘에 뜬 달이, 그런 맹호랑 솔이를 다정하게 지켜주는 것만 같았다.
마치 꼭 바라던 바를 이뤄라, 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맹호가 이렇게, 진심어린 마음으로 굳게 마음먹은 걸 알아보기라도 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