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여자애가 사라진 뒤, 맹호는 자기가 어떻게 학교를 나왔는지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든 가방을 들고 학교를 나온 것 자체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까치 역시 오늘은 야자감독이 아니었기에, 맹호랑 같이 가방을 들고는 학교를 나섰다. 유라는 야자를 희망해서인지, 맹호 일행과 같이 학교에 나오지 않고 교실서 책가방을 뒤지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그대로 집에 돌아갈 순 없었다. 결국 맹호는 생각 끝에, 솔이를 먼저 집으로 보내고 까치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내일부터 있을 일에 대비하기 위해, 까치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자연스레 학교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래서, 앞으론 어떻게 해야 하지?”
공원에 들어와서 잠깐 걷고 있으니, 맹호 입에서 자연스레 그런 말이 나오고 있었다. 사실 이건 지금 맹호한테 가장 절실한 문제였다. 일단 ‘도전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지금 맹호한텐 아무 자신도 없었다.
‘호랑이의 왕’에 걸맞은 힘은 전혀 없는 자기한테, 대체 어떤 승산이 남아있단 말인가.
물론, 자기가 한 말을 무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유라를 힘들게 한 것만으로도, 맹호가 도깨비 여자애를 쓰러뜨릴 까닭은 충분했다. 게다가 솔이 역시 자길 믿어주고 있었다. 이렇게 아무 힘도 없는 자기를, 솔이는 누구보다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해준 것이다.
그런 마음을 배신할 용기가, 맹호한테 있을 리 없었다.
“뭘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래. 너 ‘호랑이의 왕’ 아냐. 그 힘만 쓰면 만사해결 아니냐?”
자기가 이렇게 진지한 걸 아는지 모르는지, 까치는 철딱서니없게 서류가방을 흔들거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렇게 말했다. 저 놈도 자기 힘은 잘 봤을 텐데, 왜 그런 말을 쉽게 하는 걸까. 혹시 남일이라서 그렇게 쉽게 말하는 게 아닐까란 생각에, 맹호는 괜히 화가 나는 걸 느꼈다.
“그야 그렇지만, 난 아직 ‘호랑이의 왕’이라고 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고…”
맹호는 그 말과 함께, 자기 오른팔을 다시금 힘껏 들었다가 내리쳤다. 하지만 그 팔이 만들어낸 바람은, 도깨비 여자애가 있었던 아까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맹호한테는 그 때보다도 살짝 약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당연히 이런 힘으로 도깨비 여자애한테 맞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 때, 갑자기 아까 있었던 일이 맹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도깨비 여자애랑 충격적 만남을 가진 뒤, 맹호가 높은 분들한테 자기가 잘 해결하겠다고 하고서 교장실을 나왔을 때 일이었다.
-니 도움같은 거 필요없어. 내 힘으로 동생을 지킬 거니까. 그렇게 알아.
마치 맹호를 쓰러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유라는 강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자기가 그렇게나 믿음직스럽지 못했던가. 물론 절대 그렇지 않다 말할 순 없지만, 맹호는 순간 몸이 굳는 걸 느꼈다. 유라 생각대로, 자기가 믿음직스러운 놈이라 자신있게 말할 용기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 생각을 없는 걸로 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물론 이 모든 게 자기 탓이란 생각도 있다. 자기만 아니었으면 유라는 이렇게 고생할 까닭이 전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아니, 지금은 그 생각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유라가, 어쩐지 너무나도 불안정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자기한테 그만큼 강한 말을 쏘아붙였는데도, 그 때 유라는 조금 건드리기만 해도 금방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걸 누구보다도 똑똑히 느낀 맹호가, 유라 말대로 혼자서 하게 내버려둘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맹호는 어떻게 해서든 도깨비 여자애를 쓰러뜨려야 했다. 그게 자기한테 불가능해보여도, 그리고 도깨비 여자애가 얼마나 무섭게 느껴지더라도.
그런 맹호의 생각을 알았을까, 까치가 아까보다 조금 진지해진 말투로 이런 말을 걸어왔다.
“그럼 유라한테 믿음을 주는 존재가 되면 되잖아. 안 그래?”
“…어?”
까치의 말은 이랬다. 모처럼 유라랑 맹호는 같은 동아리가 아닌가. 그러니까 이 동아리에서 팀워크를 쌓으면 유라 역시 자연스레 맹호한테 마음을 열 것이다. 맹호 역시 어쩐지 괜찮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하나 알 수 없는 게 있었다. 이런 일이 굉장히 민망하단 걸 알지만, 맹호는 조심스레 까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야, 하나 좀 묻자.”
“뭔데?”
“팀워크가 뭐냐?”
“…어? 아, 너 영어는 잘 모르지?”
까치의 말에, 맹호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대는 걸 느꼈다. 호랑이에서 사람으로 둔갑했기 때문에, 맹호는 외국어에 그다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한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듣도보도 못한 바다건너 말은 차원이 달랐다. 왜 그런지는 당연히 자기도 알 길이 없었지만, 어쨌든 맹호는 작년에 학교에서 알지도 못하는 꼬부랑말에 뜻이 있단 걸 아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뒤집힐 지경이었다.
“그래그래. 그런 데선 솔직해야지. 아무튼 연습 좀 잘하잔 말이야. 다른 애들이 어떻게 치는지 좀 보고. 알았냐?”
“나도 알아. 안다고…”
맹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까치한테 대답하면서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맹호한테 사교성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연습을 잘한다 한들, 유라랑 친해질지 어떨지는 맹호 자신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맹호는, 유라랑 친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자기라도 괜찮다면,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게다가 이렇게 죽 ‘자신없다’는 생각만 되풀이하는 것도 질색이었다. 물론 까치는 사람세상에서 자기보다 훨씬 잘난 존재였다. 하지만 자기도 까치한테 뒤지지 않는 믿음직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어쩌면 이번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무척 나쁜 기회가 될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막막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할 수밖에 없겠지. 일단 유라한테서 믿음을 얻자. 그리고 ‘호랑이의 왕’다운 힘을 되찾아, 도깨비 여자애를 쓰러뜨리자.
그렇게 다짐을 마치자, 맹호는 이렇게까지 자기를 도와준 ‘친구’한테 고맙단 마음을 전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장난기는 많지만, 그래도 까치는 항상 맹호를 옆에서 지켜봐준 것이다.
“…고맙다. 이럴 때까지 같이 있어줘서.”
“자식아. 왜 이래. 너답지 않게. 그런 말 들으려고 한 거 아니다. 우리 까치가 의리를 얼마나 지키는데. 너도 은혜갚은 까치 얘기 정돈 알지? 음하하하.”
이 자식, 괜히 부끄러워하긴. 맹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 게 민망해서 애써 고개를 돌렸다. 바로 뒤에 까치가 다른 말을 덧붙이기 전까진.
“그러니까 앞으로 형한테 잘해라. 맛있는 데도 좀 안내해주고. 오케?”
“오케는 무슨 오케야 이 자식아! 그런 말이 참 입에서 잘도 나온다. 넌 여기 뭐하러 왔냐. 엉?!”
결국, 맹호는 자기도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인 영단어에 열이 받은 나머지 무릎으로 친구의 배를 있는 힘껏 갈기게 되었다. 아무튼 이 놈은 바뀐 게 하나도 없단 말이야. 아무리 나이가 더 들게 됐다고 해도 키는 자기랑 비슷한 수준이란 사실에, 맹호는 지금 마음 속 깊이 고마워하고 있었다.
“이, 이렇게 의리있는 친구를 뒀는데 이런 푸대접을 하다니! 야인마, 너 너무한 거 아냐?!”
“뭐가 너무해. 누가 형이냐고. 이 자식아. 솔직히 내가 열 달은 더 먼저 태어났잖아. 여기가 학교냐?!”
“으악, 으아악!! 살려…끄악!!”
그렇게 해서, 맹호는 헛소리를 하는 까치를 공원에서 신나게 두들겨패는 걸로 정신사나운 하루를 끝마쳤다. 아무리 겉모습이 바뀌어도 이 놈은 바뀌질 않는다니까, 란 생각에 크게 한숨을 쉬며.
그런 생각을 하며 아파트까지 다다른 맹호는, 조심스레 문을 열려다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솔이가 있어야 할 집에서, 묘하게 인기척이 안 느껴졌던 것이다.
…설마 뭐가 잘못된 건 아니겠지?
가슴이 두근대는 걸 느끼며 문을 열어젖히자, 맹호는 거실이 텅 비어있단 사실을 꺠달았다. 하지만 이상하다. 분명 불이 켜져있었을 텐데.
현관에 멀뚱하니 선 채, 맹호가 그런 생각을 하고있을 때.
“짠!!”
갑자기 현관 바로 앞에 있는 작은방에서,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걸 보고서야, 맹호는 솔이가 지금 이 순간만을 위해 작은방에서 인기척을 숨기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
정말로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당황도 했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없어서 맹호는 그저 오도카니 선 채 솔이를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솔이가 너무 밝게 등장해서일까, 맹호는 놀랐다기보다 오히려 긴장이 풀린 느낌이었다.
솔이도 그걸 알았는지, 작은방에서 펄쩍 뛰어나온 뒤 맹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며.
“얼레. 맹호 별로 안 놀라네?”
“아니, 놀랐다고 해야 되나, 이건…”
묘하게 실망아닌 실망을 하는 듯한 솔이를 앞에 두고, 맹호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자기가 그렇게 시큰둥한 모습이었나?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놀라는 모습이라도 보일 걸, 하고 생각하던 순간.
“오늘은 내가 맹호보다 더 일찍 왔으니까, 놀래켜주려고…”
“아, 원래는 같이 집에 오니까 그럴 일이 없었지. 그렇게 내가 놀라는 게 보고 싶었어?”
“응. 안 돼?”
“아니, 그, 안 되는 건 아니고…하, 하하하, 푸하하…”
“어, 맹호 이상하다. 내가 한 말 그렇게 우스웠나?”
솔이는 고개를 갸웃댔지만, 그래도 맹호는 갑자기 터진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물론 까닭은 하나밖에 없다. 자길 이렇게까지 생각해주는 솔이가 그저 고마워서였다. 원래 이렇게 눈물이 날 정도로 웃는 건 자기 성격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냥 이렇게 웃고 싶었다.
이런 친구가 자기랑 같이 살아준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맹호는 이 때, 솔이를 정말로 세게 껴안아주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남녀(일단)가 저녁에 그러고 있는 건 좀 민망해서 바로 그만뒀지만.
게다가,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자기 때문에 솔이한테 또 걱정을 끼친 것이다. 그런 일만 없었다면 맹호도 솔이랑 같이 진작 집에 돌아왔을 것이다. 자기가 좀만 더 믿음직했으면 솔이도 마음이 든든했을 텐데. 자기는 항상 솔이한테 도움만 받고.
“맹호, 괜찮나.”
“…응?”
“괜찮나. 맹호. 어디 아파?”
맹호가 그렇게 약해보였는지, 솔이는 고개를 아까보다 더 앞으로 내밀며 주의깊게 여기저길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도시로 와서 솔이가 사투리가 섞인 말투로 얘기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솔이가 이렇게 말꼬리를 내리며 특유의 억양으로 물어볼 땐, 자기를 특히 더더욱 신경쓰고 있단 말이었다. 내가 괜히 어두운 생각으로 솔이를 더 걱정하게 만들었구나. 더 이상 이러면 안 되겠단 생각에, 맹호는 솔이의 머리카락으로 조심스레 손을 갖다댔다.
그리고.
“아냐, 안 아파. 그냥 좀 피곤해서…괜찮아. 정말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 맹호는 솔이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 아이는 항상 자기가 이렇게 어루만져주는 걸 좋아하곤 했다. 어쩌면 이 역시, 자기가 ‘원래부터 사람이 아니니까’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행동일지도 몰랐다.
“에헤헤. 맹호 손 따뜻하다.”
역시나, 솔이는 그런 말과 함께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맹호가 자기 머리카락을 편하게 어루만질 수 있도록 약간 고개를 숙인 채.
“내 손이 뭘. 솔이 니 손이 더 따뜻하지.”
“아냐. 맹호 손이 더 따뜻하다. 진짜로.”
“아무튼, 솔이 너도 은근히 고집이 있다니까…”
그런 말을 하면서도, 맹호는 그저 솔이의 머리를 죽 어루만지는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 눈에서 절대 피눈물이 흐르지 않게 하겠다, 는 결심을 가만히 되풀이하면서.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맹호도 슬슬 고등학교 2학년짜리 솔이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게 민망해질즈음, 어디선가 진동이 느껴졌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건 전화가 온다는 신호인데. 하지만 이건 맹호 게 아니라…
“아, 엄마한테 전화왔다. 맹호야, 잠깐만.”
솔이도 그걸 깨달았는지, ‘자기한테’ 온 진동을 확인하려고 조심스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빼냈다. 그리고는 갑자기 얼굴이 확 밝아지더니, 얼른 핸드폰을 귀 쪽으로 갖다댔다.
“아, 엄마다. 나 무지 잘있는데…”
맹호는 잠깐 소파에 걸터앉아, 솔이가 두 주만에 부모님과 얘기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용건이 빨리 끝났는지, 갑자기 솔이는 맹호 쪽으로 다가와선 자기 핸드폰을 내밀었다.
“아, 네. 여보세요?”
당황하면서도 전화를 받자, 그 너머엔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항상 듣던 솔이 어머님 목소리가 있었다. 솔이 부모님도 홀로 딸을 보낸 뒤 무척 걱정했지만, 그래도 솔이가 적응하는 데 시간을 주려고 두 주씩이나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오랫동안 버티고 계셨던 거구나. 맹호는 부모님들의 마음이 얼마나 애탔을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솔이는.
“전에도 말했지만, 솔이 좀 잘 부탁할게. 그 애는…”
“네, 알아요. 너무 걱정마세요.”
너무나 당연한 말이기에, 맹호는 망설임 하나없이 곧장 입을 떼어놓을 수 있었다. 정말로, 맹호는 솔이 부모님이 어떤 마음일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맹호는 사람도 아닌 ‘맹수’한테 기꺼이 딸을 맡긴 솔이 부모님이 그저 고맙기만 했다.
사실, 솔이네 부모님은 맹호랑 처음 만났을 때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솔이가 자고 있을 때, 부모님들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모두 맹호한테 자세히 털어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맹호는, 그 말을 듣고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사람과 다른 맹호라 할지라도, 그게 결코 보통 일이 아니란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맹호는 마음 속 깊이 다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기라도 힘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솔이를 돕겠다고.
물론, 그 생각은 지금도 전혀 바뀌지 않았다.
맹호는 그 때 일을 다시금 떠올리며, 솔이 부모님께 간단히 인사를 드린 뒤 전화를 끊었다. 내일 있을 일을 생각해서, 지금이라도 마음편히 쉬고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솔이랑 학교로 가며, 맹호는 도깨비 여자애가 절대 헛소리를 한 게 아니란 걸 두 눈으로 똑똑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이상하다. 텔레비전에선 오늘도 맑겠다고 했는데…”
맹호는 그저 그 말만을 되풀이하며, 솔이랑 같이 사이좋게 고개를 갸웃대는 수밖에 없었다. 분명 어제는 무척 맑은 날이었고, 흐릴 거란 말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머리 위에 있는 하늘은 매우 짙은 먹구름으로 뒤덮여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도깨비 여자애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어유, 뭘 다들 그러고 있어. 어차피 맹호 니가 잘해줄 텐데. ‘호랑이의 왕’ 아니냐. 그지?”
우연히 아파트를 나올 때 만나 같이 학교로 ‘출근’하던 까치가, 별 일도 아니란 듯 귀를 후비적대고 있었다. 이 자식은 자기가 지금 어른이란 걸 잊어버렸다. 사실 까치도 실제 살아온 해를 따지면 ‘어른’이 맞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 행동거지는 어른과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게다가, 저 말을 들으면 맹호는 마음 한구석이 많이 불편해지는 걸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는 전혀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다. 물론 ‘호랑이의 왕’의 피를 이어받은 건 사실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처럼 ‘진짜’ 호랑이의 왕의 힘을 다룰 수 있는 것같진 않았다. 남은 자기 앞길 생각하기에도 바쁜데, 왜 이렇게 저 자식은 태연한 걸까. 맹호는 그런 까치가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묘하게 질투심이 들기도 했다.
…까치가 저 너머에 있는 비둘기떼한테 갑자기 뛰어갈 때까지는.
“요놈. 저 아버님의 원수!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받아라. 이얍!!
“이 자식아. 선생님씩이나 되는 놈이 여기서 쪽팔리게 비둘기랑 싸우냐?!”
이렇게 넥타이를 휘날리며 비둘기떼를 보내버리는 까치를 보며, 맹호는 어쩌면 자기가 쟤보단 낫겠단 생각에 조금 마음이 놓이는 걸 느꼈다. 정말로, 저 까치란 놈은 바뀐 게 하나도 없다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교실로 들어가자, 맹호는 자기가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더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 산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맹호 눈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 사람은 물론, 두말할 것도 없이 유라였다.
유라를 생각하면, 맹호는 교실에 들어가는 것조차 망설여질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만 아니었다면 유라는 어제처럼 괴로워할 까닭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맹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해를 돌려받아야 했다. 그나마 그렇게 하는 게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가보긴 했지만, 유라는 역시나 자기하곤 눈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자리도 근처인 편이니 왔단 건 잘 알 테지만, 그래도 유라는 자기한테 아는 척 하나 해주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 생각과 함께, 맹호는 조심스레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드디어 첫 동아리 연습시간이 찾아왔다.
맹호는 손이 떨리는 것만 같았지만, 그래도 교실바닥에 주저앉은 다음 조심스레 자기 악기인 북을 오른편에 두고, 끈을 왼손으로 잡고서 편이 자기 쪽으로 오게 했다. 마치 북이 심장박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악기를 만질 때면 항상 망설여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심하게 긴장하진 않았다.
전통음악동아리에 들어 사물놀이를 하게 된 뒤부터, 맹호는 북치는 게 죽 좋았다. 소리도 듬직했고, 무엇보다 칠 때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너무 깊은 생각을 안 해도 직감으로 칠 수 있는 북은, 깊게 생각하는 것보다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맹호한테는 매우 알맞았다. 특히 사람으로 둔갑한 뒤엔 여러 모로 생각하면서 살 수밖에 없었기에, 맹호는 북을 칠 때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어 마음이 시원했다.
물론, 1년 전이나 지금이나 잘 치는 건 결코 아니었다. 맹호 자신도 그건 매우 잘 알았지만, 그래도 소질이 아주 없는 건 아니라서, 이젠 다른 악기들의 연주에 어느 정도 맞춰나갈 수 있었다. 자기가 서툴단 걸 알면서도, 맹호는 이렇게 다른 이들과 음악을 하는 게 좋았다. 자기가 이렇게 흥을 즐길 수 있단 걸, 맹호는 사물놀이를 시작하면서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솔이도 악기가 있는 선반에서 장구를 꺼낸 뒤, 생글생글 웃으며 맹호 옆에 자리잡았다. 한 해 동안 사물놀이를 같이 했기에, 맹호는 솔이가 장구를 무척 잘 친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솔이가 그저 팔만 가볍게 휘둘렀을 뿐인데, 장구는 가벼우면서도 신나는, 장구 특유의 구성진 가락을 들려줬던 것이다. 사실 맹호도 한 번 연주하려 해 본 적이 있지만, 결국 제대로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물러나야 했다. 사람으로 둔갑한 뒤엔 아주 오른손잡이가 되어버린 맹호한테, 양손을 써야 하는 장구를 제대로 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맹호는 솔이가 부러웠다. 항상 다른 이를 생각해주고, 장구를 잘 치고, 맹호를 챙겨주는 솔이가 대단하기만 했다. 오늘도 또 실수할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맹호는 어떻게 해서든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쓰곤 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맹호 왼쪽에 가만히 누가 앉는 게 느껴졌다. 자기 악기인 장구를 조심스레 놓은 채.
“…”
그게 누구인지는 더 물을 것도 없었다. 유라는 장구끈을 조인 뒤, 조심스레 장구채를 쥐고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다. 물론, 유라는 맹호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각오는 했지만 묘하게 어색한데. 맹호가 혼자 그렇게 생각할 때, 까치가 앞문으로 들어오더니 웃옷을 걸어놓고 나서 교탁에 얹어진 쇠를 손에 들었다. 자기도 맹호 일행과 같이 연주할 작정인 것이다.
“저기, 선생님. 담당교사가 그래도 돼요?”
“야이. 치고 싶음 치는 거지, 그딴 법이 어딨냐? 어차피 사람도 없잖니. 안 그래?”
오히려 까치는 맹호가 그런 말을 한 게 서운했는지, 고개까지 휙휙 저어가며 반박했다. 그렇게 자기네들이랑 연주하고 싶었나. 물론 지금 사람이 없는 건 사실이니, 까치가 상쇠를 맡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 진심어린 모습을 보며, 맹호는 까치가 정말로 ‘쇠를 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린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산골에서 사물놀이를 할 때도 까치는 항상 쇠를 맡았던 것이다. 맹호는 까치가 쇠를 칠 때마다 얼마나 신나했는지를 지금껏 똑똑히 기억하고 싶었다. 아무리 겉모습이 바뀌었다 할지라도, 그런 쓸데없는 까닭 때문에 쇠치는 걸 포기한다는 건 까치한테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맹호 역시 까치랑 같이 사물놀이를 하고 싶었다. 도시로 온 뒤, 맹호는 죽 이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솔이도 있고, 호흡을 제대로 맞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유라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 망설일 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이젠 즐기기만 하면 된다. 이번에야말로 잘 될 테니까. 반드시.
“자, 그럼 다 모인 거지?”
넷밖에 없으니 알아보기도 쉬울 텐데, 까치는 굳이 교탁 앞에 주저앉은 뒤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올리며 그렇게 물었다. 원래 사물놀이엔 징도 들어가지만, 연습할 땐 다루는 것도 치는 것도 번거롭기에 빼놓는 게 보통이었다. 대개 공연하기 일주일 전에 연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맹호를 시작으로 해서 셋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자, 까치는 눈빛을 바꾸고는, 조심스레 쇠를 들어올렸다. 사물놀이 전에 있던 풍물에서도, 쇠를 치는 사람은 상쇠라 해서 높이 쳤다고 한다. 이걸 다시 말하자면, 까치는 이 풍물패의 중심이자, 사물놀이 전체의 가락을 맡는 존재였다.
“뭐, 다들 호남우도는 알고 있지? 우리 1학년 땐 그거 했는데. 아, 물론 얘들하고 같이 했을 때 말이야. 유라 너는…”
“예. 저도 괜찮아요.”
까치의 말에, 유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라가 알고 있다면, 앞으로 연주할 곡을 모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애초에 쉬운 편에 들어가는 가락이긴 하지만.
“자, 간다. 그럼…”
그 말과 함께, 까치는 채를 쇠가 있는 데까지 들어올리고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마치 오랜 침묵을 깨려는 것처럼, 어깨를 살짝 벌리고 꽹과리 쪽으로 채가 들린 팔을 기세넘치게 갖다댔다.
째래래래랭. 째래래랭.
맹호가 한 해 전만 해도 지겹도록 듣던 ‘연습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까치 손에 들린 꽹과리에서 시원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결국, 아쉽게도 소리가 딱딱 맞아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솔이가 밝게 웃으면서 분위기를 주도했는데도, 역시나 어딘가 엇나가는 소리가 자꾸만 들렸던 것이다. 물론, 그 까닭을 만든 가장 큰 원인은 맹호였다. 호랑이가 사람으로 둔갑했으니 그야 팔힘은 좋은 편이지만, 박자를 맞추거나 섬세한 연주를 할 때면 항상 어딘가 무척 어색했던 것이다. 게다가 자잘한 실수 역시 많은 편이었다. 오히려 북보다 어려운 편인 장구를 맡은 솔이랑 유라는 무척 깨끗하게 잘 연주했는데도.
그나마 이번엔 솔이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적극 유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으며, 까치 역시 분위기를 풀려고 여러 모로 애써서 괜찮게 나온 편이었다. 특히 솔이는 여전히 가락을 즐기고 있었고, 무엇보다 언제나 다른 아이들을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연주할 때도 맹호랑 눈을 마주칠 때면 항상 생긋 웃어줬던 것이다. 아마 유라랑 마주쳤을 때도, 웃진 못했을망정 분위기를 편하게 만드려고 노력은 했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일까, 유라도 솔이한테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튼 모양이었다. 조금씩이나마, 솔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게 맹호 눈에도 잘 보였다. 물론 자기 쪽으론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 지금이라도 맹호는 마음이 갈갈이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
“저, 저기…”
그런 생각이 들자, 맹호는 자기도 모르게 종이컵에 이온음료를 따른 뒤 유라한테 건네고 있었다. 까치는 뭘 좀 갖고오겠다고 나갔기에, 지금 여기에 있는 건 맹호랑 솔이, 그리고 유라밖에 없었다.
“…”
하지만 유라는 고개만 돌릴 뿐, 맹호가 따라준 음료수를 마시려 하지 않았다. 언뜻 봐도 많이 피곤해보이는데. 맹호는 걱정됐지만, 더 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 다들 기뻐하시게. 저기 근처 빵집에서 도넛을…뭐야, 다들 왜 그래?”
이렇게 어색한 상황에 깜짝 놀랐는지, 흰 봉투랑 같이 돌아온 까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곧 얼굴이 확 풀리더니, ‘이거나 먹고 기운이나 내자’는 말과 함께 봉투 안에 있는 걸 종이그릇 위에 꺼내놓았다.
그런데, 거기에 있었던 건.
“고, 곶감 아냐?!”
종이그릇 위엔, 동그랗게 생겼으며 설탕이 묻은 무언가가 가득 올려져 있었다. 그게 무엇과 닮았는지를 깨닫자, 맹호는 곧장 기겁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다른 누군가가 보면 웃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맹호한테는 무척 중요한 문제였다. 맹호는 다른 무엇보다도 저 ‘곶감’이라는 게 가장 무서웠던 것이다.
“야야, 거기 맹호. 이게 그렇게 곶감처럼 보이든?”
“그야 당연하…잠깐, 그럼 아니야…예요?”
자길 보며 지금이라도 눈물이라도 흘릴 만큼 웃고 있는 까치를 보며, 맹호는 그저 벙찔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분명 ‘도넛’이라고 말했지. 잘은 모르겠지만, 전에 솔이랑 같이 빵집이란 데 가서도 한 번 본 적이 있었던 기억이. 아니, 그 때도 분명 지금처럼 기겁을…
“…?”
그런 생각을 하며 돌린 고개 너머엔, 유라가 아주 이상하단 표정으로 맹호를 쏘아보고 있었다. 사실 유라의 반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동그랗게 생긴 도넛이 곶감일까 봐 무서워서 뒤로 슬금슬금 피하진 않으니까.
“아이고. 아무튼 넌 달라진 게 없어요. 누가 호랑이처럼 안 생겼달까봐 곶감까지…”
“시끄러워요. 이…이 선생님아…”
결국 맹호는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어져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런 말만 내던진 채 교실바닥에 주저앉는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자기 조상들은 곶감에 한이 맺힌 나머지 후손들한테 그 마음을 그대로 전한 걸까, 란 생각에 혼자 억울해하면서.
그렇게 연습 뒤 집으로 돌아가며, 맹호는 교실에서 까치랑 단둘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유라랑 솔이가 교실을 나간 뒤, 맹호는 까치랑 같이 동아리용 교실을 치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라는 동생하고 어떻게 된 거지? 설마 도깨비 여자애가 벌써부터 움직이진…
맹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까치한테 이렇게 묻고 있었다. 차마 그렇게까지 어색한 사이인 자기가 유라한테 직접 물을 수는 없어서였다. 맹호도 ‘그 때’ 뒤로 죽 그게 신경쓰였지만, 오늘 본 유라는 맹호가 깜짝 놀랄 만큼 담담한 모습이었다.
까치는 한숨을 푹 쉰 뒤, 유라한테 얘기를 들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곤 교실에 들어올 때 벗어놨던 웃옷을 대충 걸치며 입을 뗐다.
“그냥 평소대로였대. 유라가 동생하고 원래 잘 얘길 안 나누나 보더라고. 딱 지금 너랑 유라만큼 어색하다 생각하면 돼. 일단 유라가 걱정은 돼서 말은 걸려고 했는데, 거의 무시했나 보더라. 애 성격도 유라보단 훨씬 더 차가우면서 또래보단 성숙한 편이라 그러고…아무튼 괜찮다고 여겨야지 뭐.”
맹호는 잠깐 그 말을 생각하다가, 지금 중요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란 걸 떠올렸다. 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유라랑 사이좋아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거만큼 중요한 게 아직 남아있었던 것이다. 맹호는 아직 ‘호랑이의 왕’다운 힘을 전혀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조금이나마 시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결국 맹호는 집으로 돌아가다가, 학교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발걸음을 틀었다. 어제 본 대로 공원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몰래 연습하면 들키진 않을 것 같았다. 맹호 자신도 사람이 없는 곳에서 오랫만에 한가롭게 지내보고 싶었다. 지금은 산골처럼 ‘사람이 만든 문물이 없는’ 자연을 찾기 쉽지 않으니, 그거랑 조금 비슷한 공원으로라도 마음을 달래고 싶어서였다. 게다가 밤엔 낮과 다르게 구름도 없이 맑았기에, 잠깐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그런 생각에 공원에 들어와 연습을 해 봤지만, 역시나 성과는 오늘 한 악기연습만큼 없었다. 혹시 자기한테도 도깨비 여자애처럼 도구가 필요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해봤지만, 그건 어쩐지 아닌 거 같았다. 아버지는 지금껏 맹호한테 ‘도구’에 관해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즉, 맹호의 아버지는 맨손으로도 충분히 ‘호랑이의 왕’의 힘을 다룰 수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금 맹호가 다룰 수 있는 힘은, 아무리 봐도 도깨비 여자애는커녕, 자연한테도 턱없이 모자란 힘이었다. 몇 번이고 힘을 고쳐써봤지만, 자기가 만들어낼 수 있는 건 고작 등골을 조금 서늘하게 하는 산들바람이었던 것이다. 여름이라면 모를까, 3월 하순인 지금은 별다른 쓸모도 없는 힘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도꺠비 여자애를 쓰러뜨릴 수 없겠단 생각에 맹호는 우울해졌지만, 이건 자기가 뒤떨어졌기 때문이니 누굴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막바지 추위로 얼어붙은 공원에 홀로 서있을 때였다.
“…?”
“어, 어, 그…”
맹호는 뒤에서 나는 인기척으로, 유라가 집에 가다가 공원에 가만히 서있는 자길 알아챘단 사실을 깨달았다. 유라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맹호는 속으로 기겁했지만, 그렇다고 민망하게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맹호는 자길 보는 눈빛으로 유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맹호는 지금 웃옷을 벗은 채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추운 3월 날씨에 겉옷도 벗은 채 긴팔셔츠 차림으로 밖에 나와있다니. 유라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맹호는 자기가 왜 이러고 있는지를 유라한테 설명할 수 없었다. 물론 연습 건도 문제지만, 자기 체질을 유라한테 말해버리면 더 이상한 눈빛을 받을 게 틀림없었다. 원래 호랑이라서, 사람으로 둔갑한 맹호는 ‘보통 사람’보단 추위를 덜 탔던 것이다. 게다가 사람으로 둔갑했을 때부터, 가죽이나 털로 된 웃옷은 그다지 입고 싶지 않았다. 대개 겨울에 입는 그런 웃옷은, 자기랑 동류인 육식동물로 만들어진 게 태반이어서였다.
“아, 그, 내가 마음 좀 정리하려고, 원래 추위는 잘 안 타니까, 그래서 겉옷도, 그…”
그래서 맹호는, 모든 걸 감춘 채 그저 아무렇게나 둘러대는 수밖에 없었다. 아마 유라의 마음엔 전혀 와닿지 않겠지만.
“…”
그리고 짐작대로, 유라는 더더욱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맹호 반대편으로 쏜살같이 사라져버렸다. 아마 당황한 맹호의 말투가 쐐기를 단단히 박은 모양이었다. 이래서야 어떻게 친해질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다 자기 잘못인 것 같아, 맹호는 그저 땅바닥에 쓰러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다, 다리가…”
정말 자기 마음처럼 다리가 풀리는 걸 어떻게든 참으며, 맹호는 일단 연습을 중단하고 집에 가기로 했다. 정말 자기 힘으로는 도깨비 여자애를 물리칠 수 없을까, 란 생각에 안타까워하며.
낮에 해가 자취를 감춘 지 사흘째.
맹호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창가로 다가가 하늘을 쳐다봤다. 역시나, 오늘도 해는 떠오르지 않았다. 두꺼운 구름만이 하늘을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 어쩔 도리는 없는 걸까.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걸 느끼며, 맹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연습을 잘 해서 유라한테 믿음을 얻는 것과 ‘호랑이의 왕’의 힘을 강하게 하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게 잘 되고 있으면, 지금 맹호가 교무실에서 까치 뒤치다꺼리나 하며 이렇게 풀죽어있을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유라하곤 어떻게 되어가는데?”
“잘 될 리가 있겠냐?!”
다른 선생님들이 자기 일에 바빠서 아무도 여기에 관심을 안 가진단 걸 확인한 뒤, 맹호는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대꾸하며 스태플러 쪽으로 손을 갖다댔다. 이 망할 까치는 심심하면 자길 교무실로 불러서 서류를 스태플러로 찍는 중노동을 시키는 것이다. 다른 애들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그건 일단 둘째치고,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봐라. 왜 자꾸 수업시간에 날 불러서 발표시키는데. 이건 또 뭐고?”
“왜긴 왜니. 끔찍이 아끼니까지. 당연한 거 아니니?”
“그럼 시키지 말든가.”
“그러니까 시키는 거야. 너도 알겠지만, 원래 이런 건 아끼는 애들한테 시키는 거거든. 나도 작년에 많이 했고.”
“이 자식은 여기서도 헛소리를…”
그 말에 열이 받는 걸 느끼며, 맹호는 다시 스태플러로 서류를 찍는 귀찮은 일에 몰두했다. 사회에서 봤을 땐 자기가 더 힘이 세다고 이딴 거나 시키다니. 안 그래도 연습이나 유라나 다 꼬이고 있는 와중이었기에, 맹호는 정말로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니가 지금 그러고 있다 해서 나보다 더 위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나도…”
“그래, 알아. 니 원래모습 봤을 땐 나도 사람모습인데 머리털 서는 줄 알았으니까. 그치만 어쩌겠냐. 이렇게 됐는데. 잘 될 거야. 아마.”
“그걸 실실 쪼개면서 말하냐?!”
거기까지 말하다가, 맹호는 자기가 자꾸 투덜대기만 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지금 이 상황이 열받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투덜대기만 해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결국 한숨을 푹 쉰 채, 맹호는 일단 이걸 다 끝내야겠단 생각에 서류뭉치를 자기 쪽으로 끌어다놨다. 다음엔 고기라도 한 턱 쏘라고 해야겠단 생각을 마음 속 구석에 담은 채.
결국 그런 마음 그대로 집에 돌아온 뒤, 맹호는 자기 방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이렇게 혼자서 가만히 있는 시간은, 맹호한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다.
호랑이라는 동물의 특성상, 맹호는 대개 이렇게 혼자서 가만히 지내는 걸 무척 좋아했다. 물론 솔이랑 같이 있는 시간은 무척 즐거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맹호는 이렇게나마 혼자 편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산골에서도 그랬지만, 도시에서는 정말로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물이라도 마시려고 방문을 연 순간.
“…”
“맹호야?”
맹호는 몸이 돌이 된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 걸 느꼈다. 아니, 이 순간만은 적응하려고 해도 도무지 그렇게 되질 않았다.
왜냐면, 눈앞에 있는 건.
“아, 맞다. 방금 씻고 나왔지. 미안. 나 방에 들어갈게. 에헤헤.”
“으, 응…”
맹호는 그 말과 함께, 자기가 방금 보고있었던 게 뭔지를 다시금 떠올렸다. 방금 씻고 나온 솔이가 샤워용 가운만 걸친 채 밖에 나오다 맹호랑 마주친 것이다. 물론 중요한 데가 막 보이고 그러진 않았지만, 그래도 맹호 입장에선 당연히 가슴이 쿵쾅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솔이랑 만난 뒤, 맹호는 지금과 비슷한 일을 몇 번 겪은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사실 지금보다 더 익숙치 않았기에, 맹호도 솔이도 서로 민망해했던 건 아직까지도 기억에 또렷했다. 그나마 지금은 솔이도 익숙해져서 이 정도로 끝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맹호랑 솔이도 이젠 정말로 마음을 텄단 걸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건 그렇지만, 둘이서만 살 때 이런 일이 일어나니까 좀 민망하네. 맹호는 얼른 방금까지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려고, 부엌에 가서 차가운 물 한 잔을 들이마셨다.
그 뒤 솔이랑 같이 거실에 상을 편 채 공부하며, 맹호는 진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자기가 얼마나 사람들의 공부에 약한지 다시금 깨달아서였다. 특히 영어는 정말로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근데 신기하다. 맹호는 고사성어같은 거 한자로 되어있어도 무지 잘 읽잖아. 근데 왜 영어는 어려워해?”
“글쎄…”
아마 호랑이라서 그렇지 않을까, 란 생각과 함께, 맹호는 다시금 머리를 긁적였다. 환웅 말에 따르면, 사람으로 둔갑한 동물은 까치처럼 도시에서 오래 지내지 않은 이상 외국어엔 많이 약한 모양이었다. 즉, 맹호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 말은 우리말과 이 땅에서 널리 쓰인 한자말 정도란 것이다.
생각해 보면, 까치는 맹호, 아니 다른 사람들과 대봐도 놀라울 정도로 영어를 잘 아는 편이었다. 물론 다른 과목 성적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일주일 속성교육으로 국사선생님도 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까치가 머리좋은 걸로 이름났어도 말이지. 맹호는 정말로 까치가 부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그치만 내가 알려줄게. 여긴 이렇게 보면 돼. 자…”
게다가 가만히 생각하면, 솔이도 까치보단 못해도 맹호보단 훨씬 성적이 나은 편이었다. 이렇게 ‘같이 공부’하곤 있지만, 사실 맹호는 작년에도 거의 솔이한테 배우다시피했던 것이다. 다행이도 솔이가 가르쳐주는 걸 무척 좋아해서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맹호는 괜히 귀찮게 하고있단 생각에 미안해졌다.
“아. 오늘 거 다 끝났다. 그럼 저기서 과자나 먹을까?”
자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항상 밝은 솔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맹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베란다 난간에 걸터앉은 채, 바닥에 있는 봉투과자를 하나 손에 쥐었다. 산골에선 솔이네 집 마루에 걸터앉곤 했는데. 눈앞에 보이는 게 자연이 아닌 도시인 게 아까웠지만, 그래도 솔이랑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맹호한테는 충분히 기쁜 일이었다.
“우리 맹호, 적응 잘 하나.”
“글쎄…”
아까랑 똑같은 대답을 하는 게 괜히 미안해서, 맹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산골에서는 마루에 둘이 나란히 걸터앉아 지금 생각하는 걸 숨김없이 털어놓곤 했는데, 이 베란다는 그것조차 하기 힘들 만큼 너무 갑갑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솔이는 생긋 웃으며.
“괜찮아. 맹호니까 잘될 거야. 그지?”
라고, 맹호의 등을 탁탁 두드려줬다. 그 작은 손의 힘을 느끼며, 맹호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민망한 듯 웃어보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여전히 흐린 날씨를 애써 모른척한 채 연습을 하러 교실로 찾아온 맹호는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다. 먼저 와있던 유라랑 까치, 그리고 솔이가 뭔가 말하다 자길 보자마자 입을 딱 다문 것이다.
“아무튼 신기하기도 하지. 호랑이도 제말하면…으, 으아악!”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예요. 만약 헛소리라면….아.”
태연하게 쓸데없는 말을 줄줄 읊던 까치의 목을 조이다가, 맹호는 유라랑 솔이가 자길 빤히 보고 있단 걸 깨달았다. 이런 광경을 많이 봐서 오히려 흥미진진해하는 솔이라면 모를까, 유라한테는 오해사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너, 넌 선생님한테 무슨…”
“이 놈도 선생님한테 예의가 없…알았대도. 알았대도!”
결국 유라의 말에 더 이상 목을 조이지 못한 채, 맹호는 까치를 잡아두던 팔을 풀게 되었다. 까치는 숨이 막혔는지 잠깐 켁켁댔지만, 사실 유라만 아니었으면 맹호는 몇 분은 더 그렇게 하고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대체 까치는 다른 애들한테 무슨 말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어차피 까치니까 절대 말해주진 않겠지만, 맹호는 자꾸만 뒤가 켕기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근처엔 중학교가 있었던가?”
연습이 끝난 뒤, 까치랑 맹호, 그리고 솔이는 구름낀 하늘 아래서 다같이 집에 돌아가고 있었다. 오늘은 잠깐 밖에 볼일이 있단 까닭으로 유라도 같이 걷는 중이었다.
맹호도 요즘들어 알게 된 거지만, 이 학교 바로 옆엔 중학교가 붙어있었다. 물론 공립학교이니 같은 재단같은 건 결코 아니지만, 그래도 축제 때는 저 쪽 중학교 복도에서 맹호네 고등학교 운동장 쪽으로 얼굴을 내미는 몇몇 장난꾸러기 친구들 덕분에 골치가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물론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맹호네 학교에도 저 학교 졸업생들이 그럭저럭 있는 편이다. 학교평준화인가 뭔가하는 것때문에 그렇게까지 많은 건 아니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그 중학교 교문을 지나치려 했을 때였다.
“…”
마치 유라가 뭔가 보면 안 될 걸 본 것처럼, 갑자기 걸음을 딱 멈췄다. 그에 따라 맹호 일행도, 마치 뭐에 홀린 것처럼 걸음을 멈추고 유라가 보고 있는 걸 바라봤다.
거기엔 저번 뒤로 모습을 보이지 않은 도깨비 여자애, 그리고 언뜻 봤을 땐 차가운 성격일 거 같은 긴 생머리를 지닌 어떤 이름모를 여자애가 있었다. 하지만 유라의 저 굳은 표정으로 봐서, 그게 누군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저 여자애가, 바로 유라의 여동생인 것이다. 게다가 도깨비 여자애랑 저렇게 서서 길게 얘길 나누는 걸 보면, 그 짧은 시간동안 어느 정도 마음을 튼 모양이었다.
“마, 말도 안 돼. 그 앤 나만큼 친구도 많이 없는데. 모르는 사람 대하는 것도, 벼, 별로 안 좋아하고…”
“상대가 도깨비 여자애잖아. 어떻게 꼬셨을지 누가 알겠니. 그렇지?”
“하, 하지만 이상해요. 제, 제 동생은 제가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현실주의자란 말이에요. 분명 이런 거 안 믿으려고 할 거예요. 쟨 아무리 봐도 이상한데, 왜, 왜…”
“그건 모르지,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친구도 없다면서. 답답한 집에서 혼자 외롭지 않았을까? 그 틈을 파고들면…”
“그래도…”
이제 유라는 몸까지 가늘게 떨면서, 도깨비 여자애를 있는 힘껏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유라 여동생과 얘기하던 도깨비 여자애가, 갑자기 맹호 일행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게 느껴졌다.
그 뒤, 도깨비 여자애는 아무렇지도 않게 유라 여동생이랑 같이 사라졌다. 유라는 그 둘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맹호는 뭐라 말하면 좋을지 몰라, 그저 가만히 있는 수밖에 없었다. 자기 힘이 약하단 것도 원망스러웠지만, 그 역시 모른 척했다.
“그래서, 솔이는 자냐?”
저녁을 먹고 한참 시간이 지난 뒤, 맹호는 자기 집에 찾아온 까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어줬다. 집에 돌아갈 때 ‘오늘은 들렀다 간다’고, 맹호한테만 넌지시 말을 건넸던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둘은 자연스레 베란다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사실 이 도심에서 둘만 얘길 나눌 수 있는 곳은 그 정도밖에 없었다.
“어유. 여기서 보니까 도시가 또 다르네. 그건 그렇고, 학교생활은 좀 어떠디?”
“넌 물어볼 게 그거밖에 없냐?”
이제 맹호는 까치가 저렇게 묻는 데 단단히 질렸기에, 그런 말로 대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질문에 매우 자신이 없었던 까닭도 컸다.
“넌 여기와서 잔뜩 기가 죽었다. 우리 없음 어쩔 뻔했냐. 에구. 불쌍한 놈.”
그래서, 까치의 이러한 말에 맹호는 더 이상 대답할 수 없었다. 까치도 자기가 너무 놀려댔나 여겼는지, 맹호의 등을 탁탁 치면서 위로했다.
“괜찮아. 인마. 넌 작년에도 똑같았어. 몸집은 큰데 묘하게 얼빵하고, 그런 주제에 엄청 소시민같고.”
“죽을래?”
“아, 아니, 그럴 생각은 결코…아, 맞다. 솔이는 어떠냐?”
마치 이 이야깃거리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다는 듯, 까치는 황급히 그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아무튼 괜히 겁먹어선. 맹호는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그 말에 대답하기로 했다. 자기도 까치랑 솔이 얘기가 하고싶었던 것이다.
“뭘 어때. 잘 있지.”
“솔이도 참 딱하단 말이야. 어릴 때부터 그런 일을 겪고. 난 여기 오기 전부터 죽 걱정되더라. 솔이가 도시에서 잘 하고 있나.”
까치는 그렇게 말하며, 눈길을 도심의 밤하늘로 돌렸다. 까치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면 나름대로 ‘진지할’ 때란 걸, 맹호는 한 해 동안 보아온 걸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왜 이 정도로 까치가 진지한 모습을 보이는가 역시, 맹호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
솔이가 도시 말투를 어느 정도 쓰는 걸 보면 알겠지만, 원래 솔이는 이 곳만큼 큰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안 좋은 일 때문에, 솔이네 가족은 마치 야반도주라도 하는 것처럼 쫓기듯 산골로 이사를 가게 됐다. 솔이네 아버지가 사업 일로 큰 빚을 져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단 말을, 맹호는 솔이네 아버지한테서 한 해 전에 전해들었다.
그 뒤로 솔이는 부모님이랑 같이, 죽 산골 깊은 데서 자랐다. 하지만 이런 데로 도망친 걸 어떻게 알았는지, 빚쟁이들이 그 산골까지 협박하러 찾아온 적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 때문인지 어떤지, 솔이는 지금도 낯선 사람을 무서워하는 데가 있었다. 원래 밝은 성격인지라 학교에서도 그럭저럭 적응은 하는 모습이지만, 솔이가 같은 반 남자애들을 특히 겁낸다는 걸 맹호는 잘 알았다. 사실 같은 반 여자애들하고도 조금 데면데면한 모습이지만.
물론 솔이는 산골에서도 비슷한 상황이었기에, 중학교 3학년이 된 그 때에도 친구는 정말로 없었다. 하지만 그런 솔이한테, 정말이지 ‘딱맞는’ 친구가 나타났다. 그게 맹호였다.
자길 알아주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기에, 솔이는 맹호를 누구보다도 매우 아꼈다. 물론, 그건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맹호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런 사정을 몰랐어도 맹호는 솔이를 무척 아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마음은 까치도 똑같았다.
하지만, 솔이가 ‘자기네들하고만’ 친하게 지내도 될까.
요즘 솔이가 유라랑 조금씩 마음을 트는 것 같아, 맹호는 속으로 마음을 놓고 있었다. 솔이는 자기랑 달리 정말로 사람이라서였다. 언제까지고 사람이 아닌 자기하고만 친구처럼 지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건 맹호뿐만이 아니라, 까치도 무척 신경쓰고 있던 점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둘이 친해지려면 자기가 방해되는 것 같았다. 이럴 때 뭔가 해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맹호는 사교성이 떨어지는 자기자신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너, 그 때 맺은 협정 기억하냐?”
“아, 신사협정?”
맹호의 말로 떠올렸는지, 까치가 개구장이처럼 킥킥 웃었다. 한 해 전, 까치랑 맹호는 솔이 몰래 그런 협정을 맺은 것이다. 물론 ‘신사’란 말은 까치가 생각해놓은 거였다. 맹호는 까치랑 이런 협정만 맺을 수 있다면 이름은 별 상관없었다.
물론, 그 내용은 정해져있었다.
절대로 솔이를 힘들게 하지 않으며, 항상 도와주겠다는 것. 그 약속은, 한 해가 지난 지금도 전혀 바뀌지 않고 맹호 안에 있었다.
“솔이는 우리가 같이 지켜주는 거다. 어디에 있든간에. 알았지?”
“암.”
까치의 대답을 듣고, 맹호는 다시 마음이 놓이는 걸 느꼈다. 물론 맹호는 까치를 무척 믿지만, 그래도 이런 대답을 직접 듣게 된 게 좋았던 것이다.
그렇게 까치는 ‘잘 자라’는 말을 끝으로 맹호네 집을 나섰다. 맹호는 베란다에 가만히 서서, 자기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다시금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날씨가 여전히 흐린 가운데, 오랜만에 다시 모인 연습시간에.
“맹호 너, 몸이 안 좋다?”
까치가 모처럼 걱정해주는데도, 맹호의 목에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까치는 지금 자기가 다섯 번째 실수한 걸 걱정해주는 것이라서였다. 이젠 사람으로 둔갑한 자기 몸에서 동물귀나 꼬리가 튀어나온 것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게다가 유라는 항상 그렇듯, 자길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가문의 원수라도 보는 것처럼.
그거야 맘에 안 드는 애가 자기 동생관계까지 망쳐버리면 열받을 만도 하지. 그렇지만.
맹호는 아직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까치한테 괜찮다고 겨우 고개를 저어준 다음, 맹호는 채를 다시 고쳐잡았다. 까치도 마음을 놓았는지, 자기 쇠를 집어들며 신나는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자, 그럼 가자고. 예이!”
“까…선생님 오늘 되게 기분좋은가봐. 그지?”
솔이의 말에, 맹호는 이제 민망한 마음이 들어서 대답할 수 없었다. 만약 자기가 이렇게 실수만 안 했다면, 맹호는 당장 까치를 쇠로 한 대 때렸을 것이다. 설령 사회적 관계가 선생님과 제자라 할지라도.
저 놈은 쇠로 헤비메탈인가 뭔가하는 거라도 연주할 생각인가. 그러고 보면, 아까부터 까치가 친 쇠는 이상하리만치 빠르고 격했다.
“뭐 어때. 난 원래 기분이 좋으면 이러잖아. 가끔 미치는 거야. 암.”
“…가끔?”
맹호가 그렇게 되물어도, 까치는 그저 ‘우헤헤’란 표정만 짓고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아파진 머리를 한손으로 쥐고 있는데, 옆에서 유라가 ‘얘들은 대체 뭘하는 거지?’란 눈으로 자기네들을 보고 있었다. 분명 유라 눈엔 모든 게 이상하겠지. 세 사람의 관계도, 그리고 하고있는 짓이나 말도, 모든 것이 수수께끼일 것이다.
맹호 역시,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네들이 이렇게 ‘사람처럼’ 놀고 즐길 수 있는 건, 모두 자기들 조상들이 내려준 기적이나 마찬가지인 거라고.
“어, 바로 집에 안 간다고?”
그렇게 연습이 끝난 뒤, 맹호가 자기 생각을 말하자 까치는 드물게도 깜짝 놀랐다. 방금 맹호는 ‘힘을 단련하려고 공원에 좀 남아있겠다’고 전했던 것이다.
“그래, 산책도 하고, 혼자 마음도 돌리려고 그런다. 아마 솔인 집에 혼자 남아있을 거야. 기다리겠다고 했거든.”
“그렇다 이거지…”
방금 듣기로, 까치는 회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자식, 어른인 척 하긴. 맹호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선생님’인 까치한테 회식이 이상한 일은 결코 아니었다. 일단 혹시 몰라서, 맹호는 까치한테 될 수 있으면 집에 얼른 돌아가달라 전했다. 이번엔 조금 오래 밖에 있을 생각이어서였다.
“뭐, 그러지. 별 것도 아니니까.”
까치의 말에 마음이 놓이면서도, 맹호는 아직 까치한테 드는 질투심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저 놈은 당당히 술을 마실 수 있단 말이지. 사실 살아온 해로 따지면 맹호는 당연히 술을 입에 댈 수 있었지만, 이 모습으로 그게 될 리가 없었다.
왜 이런 생각을 하면 자긴 까치한테 진 느낌이 드는 걸까. 한숨을 쉬면서도, 맹호는 애써 그 생각을 무시하려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단 생각 자체가, 맹호한테는 무척 부끄러운 일이라서였다.
그래서 공원에 다다른 뒤엔 오직 연습만을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나, 연습은 맹호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모처럼 사람도 한 명 없는데, 이래서야 도깨비 여자애한테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마음이 갑갑해서 산책만 한 시간 넘게 한 뒤, 맹호는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지금쯤 솔이는 자길 기다리며 저녁도 먹지 않고있을 것이다. 얼른 가야겠단 생각에 발걸음을 빨리 한 순간.
공원 바로 옆 문방구 옥상에, 어디서 많이 본 여자애 한 명이 앉아있었다.
밤눈이 밝은 맹호는, 그게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표정으로 자길 빤히 쳐다보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 아이, 도깨비 여자애는 아주 재밌단 표정으로 맹호를 바로 위에서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것도 옥상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앉은 채.
“뭐, 뭐야?!”
맹호는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당황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만약 도깨비 여자애가 잘못 움직이면 어떻게 될지 상상할 수 없어서였다.
그런데 잠깐, 이렇게 사람들이 오가는 길가에서 옥상 난간에 앉으면 너무 눈에 띄지 않나? 그런 생각에 맹호가 혼자 가만히 있자, 도깨비 여자애가 그 마음을 알아챈 듯 킬킬 웃으며 고개를 한층 더 맹호 쪽으로 숙였다.
“밤에 사는 존재는 필요에 따라서 남의 인식에 안 들어오게 할 수도 있거든. 내 힘은 특히 더 세고. 이왕하는 거 너도 지금은 그렇게 해줬어. 좋지?”
이제 맹호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대체 도시의 밤은 산골보다 뭐 그렇게 잘난 걸까. 맹호는 도깨비 여자애한테 뒤지지 않을 만큼 보통 존재가 아닌데도, 지금껏 그런 말을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유. 벌써 겁을 먹으셔선. 날 못 쓰러뜨리면 해도 안 돌아올 텐데?”
“지, 지금은 내가 여기 적응을 잘 못했으니까…”
여전히 여유만만한 도깨비 여자애한테, 맹호는 그저 그렇게 둘러대는 게 고작이었다. 물론 도깨비 여자애 말이 맞단 건 자기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걸 이 애 앞에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건 어쩐지 무척 하면 안 될 짓 같았다.
그래서, 맹호는 있는 힘껏 말을 돌렸다.
“오, 오늘은 부채가…그러고 보니 왜 그 부채야?”
“그게 쓰기 편하니까 그렇지. 싸서 구하기 쉽거든.”
“아, 그래…”
맹호는 몸집에 안 맞게 약한 대답을 하면서, 이제 자기가 이 자신만만한 여자애를 조금 부러워한단 걸 깨달았다. 물론 이걸 드러낼 생각은 이만큼도 없었다. 그건 무척 민망한 짓이었기 때문이다. 방금 거보다 훨씬 더.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도깨비 여자애가.
“근데 너도 참 이상하다. 굳이 사람세상을 고집할 필요가 있니? 넌 우리세상하고 더 잘 맞는데.”
굉장히 맹호를 흔들어놓는 말을,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놓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맹호는 잠깐 혼자 우뚝 서서 고민했다. 사실 이렇게 도깨비 여자애가 불을 질러놓긴 했지만, 맹호 역시 솔이랑 만난 뒤로, 아니 그 전부터 죽 비슷한 생각을 해온 터였다. 어쩌면 도깨비 여자애가 궁금해하는 것보다, 맹호 자신이 훨씬 더 그 문제를 깊이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맹호는 이 애 앞에 자기 생각을 또렷이 밝힐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이게 솔이랑 한 해 동안 있으면서 내린, ‘자기가 믿어 의심치않는’ 결심이라서였다.
“일단, 난 오래 전부터 이어진 ‘호랑이의 왕’의 마지막 남은 핏줄이야. 그런 존재가 사람세상을 무시하고 살 수 없단 건 너도 잘 알잖아.”
“그래서?”
“그러니까 난 이미 다짐했어. 날 보통 사람처럼 아껴주는 친구 곁에 죽 있기로. 너도 봤겠지만, 솔인 정말 좋은 애야. 내 생각을 가장 잘 알아주고…”
도깨비 여자애는 이상하단 표정 반, 그리고 우습단 표정 반으로 맹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애한텐 자기 말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맹호는 어쩐지, 나름대로 굳게 다짐했던 자기 마음이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아 괜히 마음이 불안해졌다.
이윽고, 도깨비 여자애는 입을 열어 대답하길.
“넌 절대 그 세상과 어울릴 수 없어. 잘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
“…그럼 이러고 있겠냐?”
참으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그 말에, 맹호는 자기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반박하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껏 이 길로 지나다닌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걸 보면 도깨비 여자애 말이 맞을 테니 걱정할 건 없겠지만, 맹호한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걸 어떻게 잘라말할 수 있단 거야. 니가 뭘 안다고…”
“그거야 니 존재 자체가 거기랑 안 맞으니 그렇지. 당연한 거 아냐? ‘밤에 사는 존재’들 대다수가 사람세상에 살면서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데, 니가 그걸 이루겠다고?”
맹호는 그 말에, 입을 딱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자기도 뭔가 켕기는 게 있어서였다. 도깨비 여자애도 맹호의 그런 마음을 잘 아는지, 난간에서 가만히 일어선 다음, 이 말만 남긴 채 뒤돌았다.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호랑이 친구.”
그리고, 여자애는 사라졌다.
현실이라고 믿을 수 없는 그 모습보다, 맹호는 도깨비 여자애가 남긴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도는 걸 느꼈다. 마치 자기 머릿속을 샅샅이 들여다본 것처럼, 자기 불안한 마음을 제대로 꿰뚫어본 그 말을.
하지만 잠깐, 맹호는 도깨비 여자애한테 하나 더 해야할 말이 있을 터였다.
“유, 유라 여동생한테 뭘 할 생각이야, 너. 그건 말하고 가!”
“설마 내가 걔를 이용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젠 목소리만이, 아무도 없는 옥상에서 크게 들려왔다. 하지만 여자애 목소리는 맹호 생각보다 훨씬 더 태연하고, 훨씬 더 당당했다.
“걔랑 알게된 건 정말 우연이야. 내가 걜 그렇게 찌르면 분명 반응이 나올거라 생각했거든. 그 애도 찔리는 게 있었을 거 아냐. 그지?”
“너…”
“농담이 아니라, 난 그냥 걔 동생한테 관심이 있는 거고, 이건 진짜야. 걔 화내게 하려고 이러는 게 아니라. 그리고 난 너도 화내려고 할 생각은 전혀 없어. 난 말이지, 그냥 너랑 놀고싶은 거거든. 친구.”
“그거의 어디가…”
그렇게 말하려다, 맹호는 어쩌면, 이 여자애가 진심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란 생각이 들었다. 저 여자애는 ‘밤에 사는 존재’가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저 말투는 자길 갖고놀려고 하는 게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면, 어떤 가치관을 가지든 전혀 이상할 게 없지 않은가.
“도깨비…”
자기도 모르는 사이 다시 혼잣말을 하자, 이젠 도깨비 여자애가 다시 잠깐 맹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마치 무지 우스운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밤중에 시끄럽게 킬킬대고 웃었다.
“내, 내가 도깨비라고? 으하하하. 그건 또 참신하네. 응?”
맹호는 이제, 그저 얼이 빠진 표정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깨비 여자애는 퍽이나 그게 웃겼던지, 마지막으로 맹호를 똑바로 쳐다봤다. 마치 그 모습 자체가 너무나 흥미진진하단 것처럼.
“뭐, 그럼 그렇다 치지. 설마 내가 어수룩하단 생각으로 그런 말한 건 아니지? 밤중에 웃고 간다. 그럼 안녕.”
“야, 너, 날 무슨…”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도깨비 여자애가 자취를 감췄는지, 거리엔 갑자기 사람들이 한두 명씩 보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뭘 해도 소용없단 생각이 들자, 맹호는 여자애 찾는 걸 그만뒀다.
그 여자앤, 자기 생각이 아무 소용없는 거나 다름없다 그랬지. 사실 그럴지도 모른다. 자기처럼 가치도 없는 놈이 사람세상에 있어도 도움되는 건 하나도 없고, 만약 솔이한테 방해만 된다면 차라리 원래 있는 세상, 즉 깊은 산골로 가는 게 더 나으니까.
하지만, 맹호는 그래도 솔이 곁에 있고 싶었다. 까치랑 사람세상에서 지내고 싶었다. 유라하고도 좀 더 친해져보고 싶었다.
뭐라 할 수 없는 묘한 마음으로, 맹호는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 여자애가 한 말을 잊으려 노력하며. 하지만 물론, 그 말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 오자, 솔이가 거실 소파 위에서 잠이 든 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어쩐지, 맹호 눈엔 솔이 안색이 좀 안 좋게 보였다.
…익숙치도 않은 도시에서 학교생활을 하는 게, 솔이한텐 역시 많이 버거웠나.
자기 탓이란 생각에, 맹호는 괜히 가슴이 아려오는 걸 느꼈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아홉 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이 시간이면 까치도 빨리 올 수 있었을 텐데. 자기랑 한 약속은 잊어버렸단 말인가.
“어, 맹호 너 지금 있었네. 솔직히 좀 걱정했는데…야야, 왜 그런 눈으로 보냐?”
그 때, 맹호 눈에 현관으로 들어오는 키 큰 청년이 보였다. 그 청년, 까치는 아주 놀랐단 표정으로 맹호를 보고는, 이내 히죽 웃어보였다. 까치하고는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졌는데도, 맹호는 여기까지 풍기는 술냄새를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저 자식, 까치는 결국 자기 말을 전혀 안 들어준 것이다.
“이 자식이 진짜…”
“야, 야, 갑자기 덤비지 마! 으, 으아, 으아악!!”
이제 눈앞에 아무 것도 안 보이게 된 맹호가 자기한테 덤벼들자, 까치는 죽기살기로 마구 도망치려들었다. 하지만 보기보다 몸놀림이 날쌘 맹호가 그딴 수작에 넘어갈 리 없었다. 맹호는 곧바로 까치의 양어깨를 잡은 뒤, 마치 잡아죽이기라도 할 것같은 눈빛으로 까치를 세게 노려봤다. 마치 주위에서 무시무시한 효과음이 들리기라도 할 것처럼.
“내가 말했지. 회식에서 좀 일찍 와달라고. 넌 그렇게 술이 맛있든? 어른노릇 참 즐겁다. 그지?”
“야, 모, 목소리 좀 깔지 마. 너 화나면 진짜 무서운 거 알지? 잘못했어. 친구. 이렇게 모습이 달라져도 우린 당연히 친구…”
“그런 놈이 솔이 하나 못 챙겨주고 있어? 니가 그러고도 협정을 맺은 친구냐, 엉?!”
“으, 으앙. 잘못했어 친구! 한 번만 봐줘! 형이 조퇴증 쏠게. 이렇게 빈다. 응?”
“이 자식이 선생님 좀 한다고 어디서 뇌물을…죽을래, 살래. 엉?”
“사, 살려주세요. 으아앙!!”
맹호가 마구 으름장을 놓자, 까치는 이제 반쯤 울기까지 하면서 애걸복걸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건 아주 당연한 말이었다. 비록 ‘몸으로 따지면’ 어른인 까치가 맹호보단 조금 키가 컸지만, 맹호 역시 호랑이가 사람으로 둔갑한 것답게 성인 남성과 별 다름없는 몸집을 자랑하는 데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호랑이의 왕’의 기운을 지닌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맹호는 지금 까치를 봐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번에 봐주면, 이 술 좋아하고 먹을 거 좋아하는 친구는 분명 또 같은 잘못을 저지를 게 뻔해서였다. 이건 까치는 물론, 솔이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이라도 이걸 바로잡아줄 수 있는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맹호는.
“각오는 됐겠지?”
“아뇨, 전혀…끄아아아악!! 어깨 조르지 마! 어깨! 까, 까치 죽는다고! 살려 줘!!”
결국, 맹호는 그 날 밤 마음놓고 까치한테 따끔한 맛을 보여줬다. 자기 분이 풀릴 때까지. 그리고 까치가 마음을 바로잡을 때까지.
그런데 자기네는 대체 한밤중에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그것도 사람 모습으로.
분명 원래 모습이면 웃기다 못해 어이가 없을 거란 생각을 되풀이하며, 맹호는 자기 눈앞에 있는 웬수를 철저하게 혼내줬다.
다음 날.
맹호는 어제 일을 꿈같이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하늘이 있는 데로 다가갔다. 역시나, 오늘도 구름만 두텁게 덮여있을 뿐, 해는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가면 갈수록 구름이 더 두꺼워지는 거같단 말이야.
베란다에서 멀뚱하게 서있던 맹호는,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곤 정신을 차렸다. 일단 밖으로 나가야지. 그런 생각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면서도 겨우 방 밖으로 나오자.
“…”
거실 베란다 너머에, ‘보이면 안 될 것’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맹호가 조심스레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거기엔…
‘어디서 많이 본’ 까치가, 맹호네 집 계란다 난간에 자랑스럽게 앉아있었다. 마치 자기가 엄청난 자랑거리라도 되는 듯 매우 당당한 모습으로.
“저 자식이 진짜…”
그게 누구인지 아주 잘 아는 맹호는, 결코 저 나쁜 놈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었다. 사냥감이라도 찾은 것처럼 당장 조심스레 그 쪽으로 다가가, 한 번에 낚아채…려 했는데.
“으함. 잘 잤…어, 맹호야?”
참으로 절묘한 때에, 막 잠에서 깬 솔이가 잠옷바람으로 거실에 나오고 있었다. 기회는 이 때다 싶었는지, 까치는 곧장 맹호 손을 떠나 솔이가 있는 거실 쪽으로 휙 날아왔다. 이쯤되면, 이 까치가 누구인지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지금 맹호 학교에서 어울리지도 않게 선생님을 하고 있는 그 까치밖에 없었다.
“저, 저 자식이…?”
까치는 거실로 날아들어오자마자, 깃을 곧게 펴곤 으스대며 바닥을 가만히 걸어다니고 있었다. 저 자식, 점잖은 척하긴. 맹호는 속이 뒤집어지는 줄 알았지만, 솔이 앞에서 저 놈을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솔이는 무정하게도 맹호의 생각을 전혀 알아주지 못했다.
“에헤헤. 까치다. 잘 잤어?”
솔이는 반가운 친구를 만났단 게 그렇게 좋은지, 그런 까치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맹호는 이제 자기 이가 으드득 갈리는 걸 느꼈다. 맘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저 까치를 어떻게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결국, 맹호는 더 이상 참지 못한 채.
“이 자식. 작작 안 해?”
“매, 매, 맹호야?!”
맹호는 마치 거실바닥을 구르는 것처럼 미끄러진 뒤, 거기에 있던 까치를 덮치려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까치 쪽이 빨랐다. 까치는 맹호를 보자마자 곧바로 재주를 넘은 뒤, 사람으로 둔갑하고 만 것이다. 동물이 사람으로 둔갑할 땐 굉장히 흔히 쓰는 방법이었다. 일개 새인 까치가 재주를 넘는 건 좀 웃기지만.
그리고, 지금 까치는, 당연히 옷을 입고 있을 리가…
“야, 이 개…까치자식아, 당장 옷 안 입어?!”
“이봐. 친구. 옷을 갖다줘야지. 까치가 사람 옷을 물고 다닐 수는 없잖니.”
“그걸 말이라고 해?!”
차마 미성년자인 솔이한테 굉장히 자극적인 장면을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이제 맹호는 솔이한테 달려들어 두 눈을 가려주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런 일이 자주있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까치라고 해도, 솔이가 자기 앞에 있을 때 둔갑하는 미친 짓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엄살은. 원래 서로 벗고다녔던 사인데…”
“그게 솔이 앞에서였냐고. 이 망할 놈아. 빨리 갈아입어. 얼른!”
남의 집에서 이게 무슨 헛소리야. 예의도 갖추지 않는 까치한테 맹호는 온갖 말을 다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 뒤로, 까치는 염치도 없이 맹호네 집에서 밥을 얻어먹은 다음, 땅바닥에 대자로 누워 출근할 생각도 않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배짱이 좋아도 유분수지. 맹호는 학교 갈 준비를 하면서, 저 놈이 있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대는 것 같았다. 대체 왜 이런 놈이 자기보다 더 잘났을까. 머리도 좋고, 사교성도 좋고, 남 생각도 잘하고, 까치는 정말로 맹호한테 없는 건 다 갖고 있었다.
이런 생각이나 하다니, 자기한텐 정말 ‘호랑이의 왕’이 될 자격이 없는 걸까.
아침부터 괜한 생각만 한단 생각에, 맹호는 얼른 자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튼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일이야, 란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 채.
“에이, 아깝다. 이번엔 좀 잘 맞나 싶었는데…”
수업이 끝난 뒤, 맹호는 동아리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다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좀 괜찮다 싶더니 결국 도로아미타불이 된 것이다. 까치까지 이렇게 면박을 주자, 맹호는 이제 유라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겁났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유라가 솔이랑 뭔가 얘기하기 시작했단 거였다.
어쨌든 자긴 유라한테 미움받을 운명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여전히 구름으로 덮인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근데 여기 계시는 여선생님 한 분이 참 내 스타일이더라. 어떻게 좀 안 될까?”
“불난 집에 그렇게 부채질이 하고 싶…으세요?”
이 분위기 파악도 못하는 망할 까치한테, 맹호는 결국 손을 대고 말았다. 진실이야 어쨌든 선생님한테 손을 대서일까, 유라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맹호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맹호는 지금, 어떻게 해서든 이 사람 속터지게 하는 놈한테 복수를 안 하면 마음이 시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내, 내가 열심히 작업거는데 인사도 안 한다고! 너까지 이러기야?!”
“그렇게 여자를 밝히고 싶으면 니…댁이 알아서 하든가! 그게 동아리 시간에 할 말이예요. 이 선생님아?”
“하, 학교가 무너지고 사회가…학생이 선생님을 패다니. 흑흑,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시끄러워요, 이 자식아!!”
오히려 울고 싶은 건 여기있는 맹호인데, 까치는 처량할 정도로 불쌍한 척을 하며 남을 열받게 하고 있었다. 자기 속이 지금 얼마나 타는지 저 놈은 모르는 걸까. 지금 자기가 얼마나 진심인데.
하지만, 아무리 맹호라고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애, 유라 앞에서 더 이상 패륜에 가까운 짓을 할 수는 없었다.
“…”
맹호는 이제, 자기가 유라랑 얼마나 친해질 수 있을까가 신경쓰여서 견딜 수 없었다. 아니, 이제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무서웠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른 채, 맹호는 멍하니 연습을 끝맺고 나서 공원에 들어섰다. 물론 ‘호랑이의 왕’의 힘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물론, 오늘도 성과는 전혀 없었다.
대체 언제쯤이면 실력이 늘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집에 돌아가려는 순간, 갑자기 맹호는 자기 팔을 누가 잡는 걸 느꼈다.
깜짝 놀란 맹호가 뒤돌았을 땐, 이미 늦었다.
맹호의 듬직한 몸은 마치 ‘거짓말처럼’ 공중에 붕 떠오르고 만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맹호 머릿속에 딱 한 명뿐이었다.
“너…?”
“그래그래. 나지 누구겠니. 니가 우리 세상에 걸맞는 존재란 걸 보여주려고.”
“뭐?”
맹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어느덧 땅은 자기랑 너무 멀리 떨어져있었다. 도깨비 여자애는 그런 맹호가 아주 재밌다는 듯, 연신 웃음기를 얼굴에 띄우며 자길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손에 부채가 안 들려있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다, 맹호는 지금 자기가 공중에 떠있단 걸 깨달았다. 잠깐, 그럼 누구한테 들키는 게 아닐까? 누가 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자기네가 있는 데를 보면, 아니, 그렇게 하지 않아도 지나다니던 헬리콥터가…
“너, 설마 우리가 들킬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자기 마음을 빤히 읽은 것만 같은 도깨비 여자애의 말에, 맹호는 그저 식은땀만 흘릴 뿐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호랑이의 왕’이 일개 사람 여자애한테 이렇게까지 휘둘리다니. 맹호는 매우 민망했지만, 그걸 드러내면 더욱 굴욕이 들 것만 같아서 애써 아닌 척했다.
하지만 정말 이 순간을 믿을 수가 없는데. 맹호는 여전히 자기가 어안이벙벙해있단 걸 깨달았다. 발 아래에 자기가 디디고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니. 어디까지나 ‘호랑이’인 맹호한테, ‘자기가 이렇게 하늘을 난다’는 건 사람을 배우자로 맞는 것보다 훨씬 더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지면 어쩌지. 속으론 그렇게 겁도 났지만, 어쩐지 도깨비 여자애가 꽉 잡아주고 있는 손만 있다면 떨어지진 않을 것 같았다. 도깨비 여자애도 아무렇지 않아하는 모습이고.
“어때. 멋있지? 여기가 우리 ‘밤의 세상’이라고. 반했지, 매력있지. 안 그러냐?”
도깨비 여자애는 자기가 사는 세상이 그렇게 자랑스러운지, 맹호랑 자기 주위를 둘러싼 ‘어둠’을 보며 등을 곧게 펴고 맹호를 쳐다봤다. 물론, 거기엔 맹호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기랑 도깨비 여자애를 둘러싼 풍경은, 그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라서였다.
맹호는 지금, 도깨비 여자애한테 붙잡힌 채 학교 옥상이 바로 발 아래에 보이는 곳에 와있었다. 높이는 바로 옆에 있는 맹호네 아파트 11층쯤 될까. 이젠 몸이 익숙해진 건지 어떤지, 처음처럼 떨어질 것만 같아서 무섭진 않았다. 자기 집도 11층에 있었기에, 맹호는 괜히 솔이한테 들키는 게 아닐까 겁이 났다. 도깨비 여자애한테 그럴 리가 있냐고 놀림까지 받았는데.
주위를 둘러싼 건, 어둠을 빛내는 수많은 빛들이었다. 맹호도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몇 번이고 도심의 밤을 봤지만, 그게 이렇게까지 대단하단 생각이 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분명히 어두운 밤인데, 어디를 둘러봐도 맹호의 눈앞엔 빛이 기다리고 있었다. 뒤를 돌아봐도, 바로 옆을 봐도, 360도를 빙빙 돌아도, 거기엔 빛이 있었고, 사람이 있었고, 낮보다도 활발한 도시의 밤이 있었다.
도심이, 아니 사람세상이 이렇게나 아득하고 넓은 곳이었던가. 맹호는 숨이 막히는 걸 느끼며, 자기가 보고 있는 모든 모습들을 마음의 새겼다. 지금껏 도심은 그저 무서운 곳일 뿐이었는데, 맹호는 처음으로 이 곳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도깨비 여자애는 정말 ‘자기 세상’을 좋아하는구나.
맹호는 이 압도적인 풍경을 보면서, 도깨비 여자애가 왜 그렇게 자신만만한지 조금 알 거 같았다. 이런 곳에서 죽 나고 자랐으면, 저렇게 자신만만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자기는 이 넓은 세상과 대보면 얼마나 볼품없단 말인가. 하지만 물론, 이렇게 불안한 마음도 도깨비 여자애 앞에선 밝힐 수 없었다. 자꾸만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나머지 정신이 사납단 것도, 괜히 약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같아서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맹호는 시치미를 떼고 일부러 강한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도깨비 여자애가 이런 걸 보여주는 건, 분명
자기를 주눅들게 하려는 거라 여겨서였다.
“니가 왜 이런 모습을 나한테 보이는진 모르겠지만, 난 어떻게 해서든 널 쓰러뜨릴 거야. 내가 여기 어울리느냐 안 어울리느냐같은 건 몰라.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할 생각이니까 신경쓰지 말고…”
“어, 이 밤이 어때서?”
“니가 해를 없앴잖아. 설마 까먹은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러니까. 어차피 평생 없앨 것도 아니고, 그런 게 뭐가 어때서?”
“…”
도깨비 여자애가 짓는 저 이상하단 표정을 보고, 맹호는 자기가 이 여자애를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이 여자애, 아니, ‘밤에 사는 존재’는 보통 사람과 무척 다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여자앤 맹호를 괴롭히려 여기에 데리고 온 게 아니라, 정말로 이 ‘밤’이라는 존재를 사랑하고 있었다. 분명 맹호한테는 밤의 세상이 더 맞다고 말했던 것도, 자길 괴롭히려 했던 게 아닌 게 틀림없었다.
이 여자애는, 정말로 진지하게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맹호는 머리가 아파졌지만, 그래도 자기 생각만은 결코 포기하기 싫었다. 이건 자기가 정한 것이라서였다. 아무리 도깨비 여자애가 뭐라고 해도, 이것만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뭐, 너한테도 생각이 있겠지. 여기서 내려주면 되나? 잘 가라. 다음엔 한 번 붙자고. 오케이?”
그렇게 처음 도깨비 여자애한테 잡혔던 공원 근처까지 다가오자, 맹호는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맹호는, 자기 발이 땅에 닿아있는데도 도저히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주 일요일이 되어, 이제 3월도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을 때.
여전히 구름으로 덮인 하늘 아래서, 맹호는 솔이랑 같이 아파트단지 밖으로 나와있었다. 모처럼 막 4월이 된 참이니, 주변에 꽃핀 거나 보러가자는 솔이의 말이 계기였다. 맹호는 도시에 꽃이 필 수 있는지 어떤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솔이가 보러가자고 하니 따라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솔이 말대로, 4월 초가 되자 아파트 담벼락에서도 개나리나 진달래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런 곳에도 꽃이 핀다는 게 맹호한테는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예쁜 꽃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건 무척 기뻤다. 이렇게 흐린 날씨 속에서 꽃들이 곱게 필 수 있단 건, 맹호한테도 무척 고마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꽃을 구경하다 보니, 맹호랑 솔이는 배가 고프단 걸 느끼고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이가 얼마나 들떠있었던지, 점심을 먹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어디로 갈까 잠깐 망설이는 맹호한테, 솔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학교 건너편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맹호야, 우리 편의점 가자. 어때?”
맹호는 잠깐 생각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편의점에 다다르자, 솔이는 먼저 신기하다는 듯 입을 딱 벌렸다. 마치 지금껏 본 적도 없는 곳에 와본 것처럼.
“우아, 맹호야. 편의점에 먹을 거 무지 많다. 그지?”
“…응.”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별 것도 아니리라 생각하겠지만, 맹호가 제대로 ‘편의점’이란 데를 알게 된 건 도시에 온 뒤였다. 산골엔 당연히 편의점도 없다시피하기에, 당시 맹호가 이런 곳에 발을 들여놓을 기회는 별로 없었던 것이다. 일단 텔레비전 같은 데서 몇 번 봐 존재는 알았지만, ‘그러니까 거기가 뭐하는 데’인지는 맹호도 당시엔 잘 몰랐다. 물론 그건 솔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지금 솔이는 편의점이 별천지라도 되는 것처럼 마구 흥분하고 있었다. 얼마나 편의점이 신기했는지, 눈을 마구 반짝이며 맹호한테 연신 손가락으로 물건 이것저것을 가리키고 있을 정도였다.
“우아, 맹호야. 이거 봐. 편의점에서 치킨도 판다. 신기한 과자도 무지 많아!”
“응, 그, 그렇지?”
불과 몇 주일 전까지만 해도 솔이랑 비슷한 생각을 한 맹호였기에(물론 솔이처럼 방방 뛰진 않았지만), 그 마음은 결코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대체 이 많은 물건을 누가 다 사가는 걸까. 호기심에 편의점으로 들어선 맹호는, 맨 처음 그런 생각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때 맹호는 도시에서 보내는 삶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편의점에 와서도 괜히 마음만 약해질 뿐이었다. 도시엔 이렇게 자기가 모르는 게 많단 말인가. 과연 자긴 여기서 잘 해나갈 수 있을까. 사방이 모르는 것투성이란 사실은 물론 신기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불안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처럼 편의점에 갔는데도, 맹호는 결국 산골 구멍가게에서도 자주 본 음료수 몇 개나 사간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낯선 곳도 지금처럼 솔이랑 같이 있으면 모든 게 달랐다.
“맹호는 저런 음식 좋아할 거 같다, 그지?”
솔이는 자기가 좋아할 음식 생각밖에 없는지, 아까부터 자꾸 그런 얘기만 건네고 있었다. 물론 맹호도 기름기가 흐르는 편의점 음식이 싫진 않았다. 물론 지금까진 도심에 적응하느라 그럴 생각조차 안 들었지만, 이렇게 마음이 편해지면 ‘원래 먹던 것처럼’ 영양가있는 고기를 입에 대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맹호 곁엔 솔이가 있었다.
“그런 것보단 그, 직접 만든 음식이 먹고 싶은데. 솔이가 해준 거나…”
거기까지 말하다가, 맹호는 살짝 말끝을 흐렸다. 이걸 끝까지 말하는 건 자기도 좀 민망해서였다. 솔이가 해준 음식은, 산골에서도 맹호가 자주 먹곤 했던 거였다. 솔이는 이래뵈도 가정요리 대다수를 할 줄 알았기에, 맹호한테도 자기가 손수 만든 요리를 자주 먹였던 것이다.
그러자, 솔이는 갑자기 눈을 반짝이더니 맹호 쪽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무심코 맹호가 한발짝 뒤로 물러설 만큼.
“그럼 해 볼까?”
“…응?”
이 말에, 맹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솔이를 내려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해보겠다니, 대체 뭘? 설마, 맹호 말대로…
그리고, 맹호의 생각은 정말로 이뤄졌다.
“맹호야, 방에 있나.”
항상 그렇듯, 집에 온 뒤 맹호는 혼자 자기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사람과 만나는 걸 꺼리는 호랑이답게, 맹호한테도 어느 정도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론, 솔이가 부르면 얘기는 달랐다. 맹호는 몸을 조심스레 일으킨 뒤, 솔이가 부르는 부엌 쪽으로 크게 목소리를 냈다.
“응, 왜?”
“점심먹어라. 내가 오늘 맛있는 거 했다. 진짜로.”
그런 말을 들으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맹호가 아주 몸을 일으킨 뒤, 방문을 열고 부엌으로 나가자.
“기다렸나?”
솔이가 문지방을 넘는 맹호를 바라보며, 마치 반가운 손님이라도 온 듯 생긋 웃고 있었다. 그리고, 솔이 바로 옆에 있는 식탁 위엔.
“…솔이야, 이렇게 많이 해도 돼?”
“응, 뭐가?”
“아니, 그, 그치만, 이건 좀…이건 그, 전에 들었던…”
맹호는 머릿속으로 ‘지금 이 상황’에 가장 맞는 말을 몇 번이고 생각하다가, 이윽고 전에 까치한테 들은 말을 떠올렸다. 자긴 텔레비전으로 본 게 고작이지만, 아마 분명 그건…
…뷔페라고 했던가.
직접 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지금 솔이가 식탁 위에 차린 ‘잔치’는 그야말로 그 뷔페란 거랑 판박이였다.
물론 그 식탁에 번지르르한 고기요리는 그다지 없었지만, 그래도 맹호가 좋아하는 반찬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있었다. 물엿을 곱게 바른 고구마맛탕이나 맛있어보이는 동그랑땡, 금방이라도 군침이 흐를 것 같은 호박전이나 바삭바삭한 고구마튀김. 물론 전혀 화려한 음식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맹호는 정말로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이렇게 사람으로 둔갑하기 전까지, 맹호는 자기가 고기 말고 다른 걸 이렇게 좋아하게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지만.
여기 있는 음식들은, 솔이가 맹호한테 항상 만들어주곤 했던 것들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맨 처음 솔이랑 만난 뒤에도, 맹호는 이거랑 아주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것도 훨씬 더 우스운 상황에서.
-호랑아. 거기 잠깐만 앉아있어 봐.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알았지?
맹호랑 처음 만났을 때, 솔이는 대뜸 이런 말과 함께 맹호를 자기네 집 식탁에 앉혔다. 그리고는 마치 먹다가 죽기라도 하란 것처럼, 무시무시한 양의 음식들을 하나씩 내놓기 시작했다.
-저, 저기, 이게 대체 뭐…?
맹호는 더듬더듬대며 그렇게 물었지만, 솔이는 배시시 웃기만 할 뿐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음식을 내놓으면서 남을 골탕먹이는 걸 좋아하기라도 하는 걸까. ‘사람’을 잘 몰랐던 맹호는, 그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솔이는 맹호 생각보다 훨씬 더 다정한 아이였다. 김치부터 시작해서 볶음밥에 핫케이크까지. 솔이는 맹호가 알 수도 없는 온갖 희한한 음식을 하나씩 천천히 내놓으며, 맹호가 그걸 먹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며 웃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도 맛보는 것처럼.
-근데, 맹호는 어떤 게 맛있어?
그리고 그 때, 맹호는 대체 왜 솔이가 이렇게 많은 음식을 냉장고에서 재료를 뒤지면서까지 해주는지를 깨달았다. 솔이는 그저, 맹호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 많은 음식을 해주면, 대충 맹호의 입맛이 어떤지는 쉽게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그걸 알자, 맹호는 솔이가 무척 고마워졌다. 그래서 그 많은 음식들을 열 그릇 넘게 먹어치워도, 더 이상 힘들진 않았다. 물론 이 뒤 소화불량이 되어서 억지로 소화제를 꿀꺽하긴 했지만, 그래도 맹호는 지금까지, 그 날 있었던 일을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 까치한텐 ‘소, 솔이가 그렇게 해줬다고? 무슨 식성 테스트니…근데 솔이답긴 하다. 푸하하’란 식으로 놀림받았지만.
“맹호야, 맹호야?”
그렇게 옛생각에 빠져있던 맹호는, 솔이의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그 옛날이 있었기에, 지금처럼 솔이랑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솔이는, 놀랄 만큼 한 해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으, 응?”
맹호가 더듬으면서도 그런 말과 함께 솔이를 보자, 솔이는 고개를 저으면서 생긋 웃었다. 아마도 솔이는, 그냥 맹호가 대답해주는 게 좋았던 모양이었다.
“내가 이거 먹는 걸, 그렇게 보고 싶었어?”
맹호는 항상, 솔이가 그렇게 자길 생각해주는 게 고마우면서도 낯간지럽곤 했다. 솔이한테 자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맹호한테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응, 안 돼?”
“아냐, 안 되긴 무슨. 당연히 되지. 그…”
거기까지 다다르자, 맹호는 목이 먹먹해서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만약 자기가 지금 원래 모습이라 하더라도, 흐느껴 울고싶을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매, 맹호 울어? 우는 거야? 내가 나쁜 짓했어? 아님…”
“응. 무지 고마워서 그래. 난 그냥…”
“괜찮아. 내가 여깄는데 뭘. 내가 닦아줄까? 안 도와줘도 돼?”
“아냐. 괜찮아. 정말로.”
자기 옆에서 누가 이렇게 있어준단 게 그냥 고마워서, 맹호는 고개만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도시로 와서 죽 힘들었던 게, 한순간에 다 씻겨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저 이 순간이 죽 이어지기를. 맹호는 지금 이 순간, 그런 기적을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 이 세상에 기적이란 없는 법이다.
“맹호야~~! 솔이야~~! 어, 다들 뭐 해?”
이 너무나도 태연한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돌아보니, 다 큰 어른이 마치 고등학교 남학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몸을 들썩이며 맹호네 집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저 자식은 왜 이럴 때만 오는 거야? 맹호는 지금 당장이라도 화를 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지만, 모처럼 맛있는 걸 만들어준 솔이 앞에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뭐, 뭐야. 맹호 너 오늘따라 왜 이렇게 뚱해. 내가 그렇게 싫…아, 솔이가?”
마치 이제야 알아챘다는 듯, 분위기 파악도 못하던 까치는 ‘다 알았다’는 눈빛을 반찬 쪽으로 돌렸다. 그리곤 씩 웃고, 멋대로 맹호네 집 부엌 선반을 마구 뒤진 뒤 플라스틱 통 몇 개랑 집게를 갖고왔다. 갈 땐 가더라도, 챙길 건 챙기고 가겠단 모습이었다.
“이야, 모처럼 솔이가 해준 반찬 먹네. 형이 자취하면서부터는 먹을 게 없어서 얼마나 우울한지 몰라요. 이젠 라면도 질리…”
“이 자식아. 누가 형이야, 엉?!”
애초에 산골에 있었을 때도 환웅이 마련해준 집에서 혼자 산 주제에 무슨 헛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맹호는 참던 화를 까치한테 내뿜는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 파악을 했으면 얼른 물러날 것이지. 솔직히 말해서, 맹호는 모처럼 맞은 최고의 순간을 망치고 도망가려는 까치가 굉장히 얄미웠다.
“예이예이. 죄송하네요. 둘이서 좋은 시간 보내셔. 그럼.”
“나중엔 국물도 없어. 이 자식아.”
“어유. 우리 맹호가 언제부터 형한테 줄 만큼 요리를 잘 하게 됐더라?”
“그러니까 누가 형이냐고. 이 까치자식아!!”
결국 소리란 소리는 다 지른 다음이 되어야 까치가 떠나자, 맹호는 더 이상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하지만 솔이는 그런 맹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맹호의 손을 식탁의자로 잡아끌 뿐이었다.
그렇게 맹호는 드디어 맛있는 반찬을 입에 넣게 됐지만, 여전히 고개는 들 수 없었다. 솔이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맹호가 자기 반찬을 하나씩 집어먹을 때마다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마치 맹호가 먹는 걸 보기만 해도 즐겁다는 것처럼.
그런 솔이가 맹호는 무척 고마웠지만, 한편으론 괜히 미안해지기도 했다. 자기가 이런 사랑을 받기에 마땅한 존재인지 어떤지가 불안해져서였다. 지금까지도 죽 ‘호랑이의 왕’으로서의 힘을 연습했지만, 역시나 맹호한테는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자기는 정말 ‘호랑이의 왕’이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존재일까.
어제 도깨비 여자애랑 만났을 때 일도 떠올라서, 맹호는 점점 더 고개를 들 수 없어졌다. 그저 무력한 자기자신을 숨긴 채, 솔이가 해준 맛있는 반찬을 입에 넣을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여전히 어두운 하늘이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가운데, 맹호는 높은 분들과 다시 교장실에서 만남을 갖고 있었다. 물론 나눈 이야기는 뻔했다. 날씨가 계속 이 모양인데, 그 ‘도깨비 여자애인가 뭔가’를 때려눕힐 채비는 잘 되어있냐는 거였다. 물론 맹호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그저 ‘어떻게든 해보고 있다’밖에 없었다.
“그래도 될 수 있으면 좀 빨리…”
높은 분들의 말에, 맹호는 더 이상 대답할 수 없었다. 차마 ‘자기는 ‘호랑이의 왕’이란 말을 듣기 부족한 존재니까 그 말대로 못 할지도 모른다’고 있는 그대로 말할 수는 없어서였다. 결국 자기가 모자라지만 않았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높은 분들은 맹호가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해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결국, 맹호는 대충 고개를 끄덕인 뒤 그 지옥같은 곳에서 빠져나왔다. 마음은 물론 납처럼 무거웠지만, 지금은 애써 모른 척했다.
그렇게 어두운 마음으로 동아리용 교실에 들어왔지만, 물론 연습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오늘은 유달리 자잘한 실수조차 많이 나오고 있었기에, 맹호는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
오늘로 여덟 번째 실수를 한 뒤, 맹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유라한테로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을 본 순간, 맹호는 심장이 얼어붙는 줄 알았다.
유라가 자기한테 건네는 눈빛이, 너무나도 차갑고 경멸스러운 것이라서였다.
물론 지금까지도, 유라는 자기한테 데면데면했다.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맹호가 가장 잘 알고있던 거였다. 하지만 오늘은 완전히 달랐다. 유라는 오늘, 자기를 ‘한심한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진 ‘다가가기 힘든’ 정도였는데, 오늘은 그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그런 눈빛에 밀려서일까, 맹호는 자기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심한 실수를 자꾸만 되풀이했다. 지금까지도 실수는 많이 했지만, 이렇게 한 번에 연속으로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쩌지. 몸이 떨린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민망해서 견딜 수 없다. 그냥 도망가버릴까. 오늘 자긴 왜 이러지.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대체, 대체.
그 때.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유라의 목소리가, 마치 날카로운 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맹호 가슴을 푹 찔렀다. 그것도 아주 깊게, 뺄 수조차 없을 만큼.
맹호는 자기 몸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는 걸 느끼고 있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더라.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나. 어쩌면 좋지, 어쩌면.
“어유. 우리 맹호가 좀 긴장했네. 좀 쉬었다 하자고. 그러니까 유라 너도…”
“너 할 맘 없지. 그지? 지금 장난해? 뭐하는 짓이야?!”
까치가 상황을 알아채고 어떻게든 도와주려 했지만, 유라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맹호는 자기 눈앞이 새까매졌단 걸 알아챘다. 몸에서 흘러나온 식은땀이, 아직 4월인데도 마치 여름이라도 되는 것처럼 등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유라는.
“넌 대체 뭐하는 애인지 모르겠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대체 무슨 생각하면서 사는 거야? 대답해 보란 말이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채, 맹호를 노려보며 크게 소리쳤다. 마치 맹호한테 똑바로 들으란 것처럼. 아까보다 훨씬 더 증오로 가득한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
“…”
맹호는 더 이상 뭔가 말할 용기조차 잃은 채, 그저 꼴사납게 교실 바닥에 주저앉아있기만 했다. 유라가 한 말이 다 맞다고 생각해서였다. 보통 사람 입장에서, ‘사람으로 둔갑한’ 존재인 맹호가 어색하게 보이는 건 매우 당연한 이야기였다. 게다가 자기가 ‘호랑이의 왕’인지 어떤지 자신이 없어서 얼빠진 모습도 가끔 보이는 맹호이니, 유라 입장에선 못마땅하게 보일 수밖에 없을 터였다.
게다가, 자기는 ‘보통 사람’과 다른 힘을 쓸 수 있고, 유라의 동생을 위험에 빠지게 했다. 그런 유라가, 자길 대체 어떤 존재라 생각해야 좋을까. 만약 맹호가 유라랑 같은 입장이었다면, 자기는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맹호는 그 생각만 해도, 온몸에 전율이 이는 걸 느꼈다.
그대로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맹호가 죽 교실바닥에 주저앉아 있자.
“맹호야. 일어나자. 응?”
마치 자기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솔이가 맹호한테 손을 내밀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맹호는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꼈다.
지금 자긴 여기서 뭘 하고있단 말인가. 꼴사납지도 않은가. 일단 일어나자, 일어나서, 다음에.
풀썩.
“매, 맹호야?!”
오랫동안 주저앉아있어서인지, 맹호는 솔이 손을 잡고 일어나려다 다리가 풀리는 걸 느꼈다. 간신히 다시 일어나긴 했지만, 물론 유라를 볼 자신은 없었다.
왜 자기는 이렇게 얼빵하기만 할까. 유라 여동생도 도깨비 여자애랑 친하게 지내는 마당에, 자기는 유라한테 믿음감은 주지 못할망정…
결국, 연습은 계속할 수 없었다. 맹호 자신도 거기서 버틸 만한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집까지 다다른 걸까. 어쨌든 집에 오자, 맹호는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은 괜찮냐?”
맹호를 생각해서인지 솔이가 잠깐 밖에 나간 사이, 학교에서 퇴근한 까치가 맹호를 살피러 왔다. 맹호는 드물게도, 그 말에 솔직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웬만해서 까치한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하는 맹호가, 지금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렇겠지. 너도 알잖아. 유라가 물론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란 거하고…”
‘그래. 무지 잘 알지. 내가 얼마나 얼빵한지 너도 잘 알잖아. 그지?”
까치의 말에 뭔가 억한 느낌이 든 나머지, 맹호는 자기 비참한 마음을 까치한테 다 털어놓고 있었다. 물론, 까치한테는 아무 잘못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맹호는, 이렇게 하지 않고선 도무지 버텨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친구, 진정하래도. 맹호 너는…”
“넌 참 좋겠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사근사근하게 대할 수 있고. 속도 알기 편하고. 지금처럼 사람세상에 있을 땐 나보다 니가 더 낫네. 안 그러냐?”
결국, 맹호는 여기까지 한 번에 말한 뒤 곧바로 자기가 한 짓을 후회했다. 물론, 이미 한 말은 주워담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맹호는 지금, 자기가 까치한테 한 말이 정말로 지저분하다 생각했다.
이건 질투밖에 안 된다. 까치가 자기보다 잘나서, 자기보다 많은 걸 가져서 자기가 열받았을 뿐이다. 까치는 자기보다 머리도 좋고 사교성도 좋으니까. 게다가, 까치는 무엇보다도 ‘호랑이의 왕’이 아니었다. ‘호랑이의 왕’이란 말에 걸맞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는 압박감한테서 까치는 자유로운 것이다. 맹호는 어떤 짓을 하더라도 그 말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까치한테는 벗어날 굴레조차 없었다.
게다가, 까치는 ‘사람세상’으로 볼 때 지금 자기보다 훨씬 더 높은 존재였다. 그런 까치랑 같이 있으면, 맹호는 어쩔 수 없이 자기랑 저 명랑한 놈을 대볼 수밖에 없었다. 자기는 왜 저 놈보다 못하단 말인가. 이제 맹호는 모든 걸 포기하고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호랑이’랑 ‘까치’라는 또렷한 차이가 있는데, 왜 자꾸만 자기는 이렇게 못나보이기만.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였다.
“으이구. 이 놈아. 그걸 아직도 모르겠니.”
까치는 그 말과 함께, 맹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리곤 마치 자기만 알고있었던 비밀이라도 털어놓는 듯, 묵직하면서도 깊은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이런 말을 꺼내놓았다.
“이걸 꼭 내가 말로 해야겠냐. 이런 상황이 아니면 일개 까치가 어떻게 천하의 ‘호랑이의 왕’한테 개기겠니. 바보야.”
그 말에, 맹호는 더 이상 대답할 수 없었다. 자기가 그렇게 엉뚱한 데 화풀이를 했는데도, 까치는 화내는 기색 하나 없이 맹호를 위로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이런 말을 하면서.
이렇게까지 까치가 자기 나름대로 ‘부족한 자기’를 신경써주고 있었단 사실을 알자, 맹호는 점점 더 고개를 들 수 없어졌다. 물론 민망한 것도 있었지만, 눈에서 나오는 뜨거운 걸 어떻게 해서든 숨기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이런 꼴사나운 모습까지 보이고 있는데, 눈물까지 흘리고 있단 걸 들킬 순 없었던 것이다. 물론 까치는 눈치채는 게 빠르니까 이런 것도 다 알아채고 말겠지만.
맹호는 아직, 아무 것도 포기할 순 없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그래도, 유라한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맹호는 다시금 굳게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