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의 왕과 행복론 1. 첩첩산중인 새로운 현실

그리고 며칠 뒤.
“…”
낯선 아이들밖에 없는 교실에서, 맹호는 자기소개를 하기 위해 멍하니 서있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자꾸만 두근대는 걸까.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는데, 머릿속은 아주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자기소개해야지?”
“아, 아, 안녕하세요. 김맹호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자기 ‘목소리’가 무척 어색하게 들리는 걸 애써 무시하며, 맹호는 그렇게 인사를 끝마쳤다. 좀 더 인상을 펴면 좋을 텐데. 안 그래도 자기 인상이 사람으로 둔갑한 호랑이답게 날선 느낌이기에, 맹호는 다른 아이들이 자기를 괜히 멀리할까봐 마음이 불안해졌다.
이런 겉모습에 목소리까지 낮고 두꺼운 편이니, 이 아이들도 자길 괜히 무서워하는 게 아닐까.
이미 산골에서 학교를 다니며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기에, 맹호는 그런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좀 나아지긴 했지만, 자기가 무척 눈에 띄는 존재감을 가졌단 건 맹호 자신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복을 입으면 고등학생으로 알아보는 사람 자체가 드문 편이고, 몸집도 좋으며 키도 또래 남학생들보다 눈에 띄게 컸다. 게다가 산골에서 만난 모 친구의 말에 따르면 ‘인상 자체가 호랑이 그 자체인’ 날카로우면서도 무거운 인상 역시, 맹호가 눈에 띄기엔 아주 충분했다.
자긴 과연 이 큰 학교에 무사히 적응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묻지만, 맹호한테는 역시 자신이 없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꼬리’를 흔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 무심결에 엉덩이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물론 사람으로 둔갑한 맹호한테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맹호는 산골에서도, 불안할 때면 곧잘 ‘있지도 않은’ 꼬리 쪽으로 몸을 돌리곤 했다. 도시에서도 이 습관이 그대로 드러날 줄이야.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아무도 안 눈치채길 바라며 맹호가 눈앞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어떤 여자애가, 맹호한테서 바로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그 여자애는 마치 못 볼 거라도 본 표정으로 맹호를 보다가, 마치 자기가 무척 큰 실수를 한 것처럼 얼른 고개를 돌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으로 볼 때, 여자애는 맹호가 ‘꼬리’를 확인하려던 걸 눈치챈 게 틀림없었다. 물론 맹호가 어떤 존재일지 알 도리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큰 몸집을 가진 수상쩍은 전학생이 이상한 모습을 보였단 건 분명히 알아챘을 것이다.
어떡하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버릴까.
맹호의 등으론 식은땀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서서, 선생님의 말이 끝나길 기다리는 것밖엔.

나라의 높은 분들한테 들켜 이 도시로 오기 전까지, 맹호는 산골에서 사람으로 둔갑해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사람세상에서 사람 모습으로 지냈던 건 아니다. 사실 맹호가 사람으로 둔갑해서 이렇게 죽 지내게 된 건 고작 한두 해 정도였다.
맹호는 이 세상에 단 한 마리 남은 ‘호랑이의 왕’이었다.
‘호랑이의 왕’이란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온 호랑이의 핏줄 중 하나인데, 재주만 넘으면 자유롭게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는 영물이었다. 옛날만 해도 기운이 강한 동물이라면 거의 대다수가 사람처럼 생각하며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었지만,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제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는 동물들은 까치처럼 머리가 아주 좋지 않은 이상은 매우 드물어졌다. ‘호랑이의 왕’은 그 몇 안 되는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는’ 동물 중 하나였다. 다른 평범한 호랑이들조차, 그러한 힘은 이제 꿈도 꿀 수 없어진 것이다. 어딘가에서 도술이라도 배워오지 않는 이상.
게다가 ‘호랑이의 왕’은 사람으로 둔갑할 수만 있는 게 아니라, 보통 동물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특별한 힘도 쓸 수 있었다. 이런 힘을 쓸 때 ‘호랑이의 왕’의 눈동자는 털색과 같은 금빛으로 바뀌며, 보통 때보다 훨씬 더 강한 기운을 뿜어낸다고 맹호는 아버지한테 들은 적이 있었다. 자연히 ‘호랑이의 왕’은 산에 사는 동물 모두는 물론, 이 땅을 지키는 ‘신’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당연히, 그 핏줄을 잇는 마지막 존재인 맹호한테는 ‘호랑이의 왕’이란 이름에 걸맞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제 이 땅에 살던 호랑이들은 대다수가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아주 기나긴 힘든 세월이 지나, 호랑이들은 사냥당하거나 살 길을 찾아 북으로 넘어가고, 결국 ‘호랑이의 왕’의 피를 타고난 맹호 집안만이 이 땅에 남아있게 되었다. 옛날에는 같은 핏줄을 타고난 ‘형제’도 있었다 전하지만, 지금 이 땅에 ‘호랑이의 왕’의 핏줄을 타고난 존재는 맹호 한 마리밖에 없다.
호랑이의 왕이라는 핏줄은 한 부모당 단 한 마리의 자손한테만 물려줄 수 있는 것이기에, 맹호의 형제들은 보통 호랑이들처럼 살다가 보통 호랑이들처럼 저 세상으로 떠났다. 하지만 ‘호랑이의 왕’인 맹호는 보통 호랑이의 두 배 이상 장수할 수 있었기에, 역시 그런 삶을 산 아버지 곁에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오랫동안 목숨을 이어가는 법. ‘호랑이의 왕’이 가져야 할 긍지. 아버지는 오래 전에 돌아가시고 없지만, 맹호는 아직도 아버지가 가르쳐주셨던 것들을 거의 모두 떠올릴 수 있었다.
비록 ‘호랑이의 왕’으로서의 힘은 그 뒤로 거의 시험해보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워낙 강한 ‘호랑이의 왕’이었기에, 맹호는 차마 그 힘을 시험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를 하늘로 보낸 뒤, 맹호는 혼자 산길을 헤매며 자라왔다. 산줄기에서 산줄기, 골짜기에서 골짜기를 떠돌아다니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자기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호랑이의 왕’의 핏줄을 어떻게 이어갈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살기 위해, 그리고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맹호는 깊은 산 속만을 골라서, 사람으로 둔갑하지 않는 한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호랑이의 왕’의 체질만을 믿으며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언제까지 이런 삶이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가 목숨을 잃은 이 곳을 떠날 수 없어서, 맹호는 몇 년 동안이나 강원도 언저리를 떠나지 못했다. 물론 말이 통하는 존재와 만나지도 못했다. 과연 자기말고 다른 호랑이가 이 땅에 얼마나 남아있는지도 의심스러울 뿐더러, 자기처럼 ‘영물’에 가까운 힘을 지닌 짐승은 더더욱 찾기 힘든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맹호한테, 재작년 말 운명같은 만남이 찾아왔다.
우연히 산길을 걷다가 자기 힘을 되짚어볼 겸 사람으로 둔갑하던 맹호를, 자기가 걷는 길만큼이나 깊은 산골에 살던 중학생 여자애가 보고 만 것이다. 그것도 한숨돌릴 겸 잠깐 사람으로 둔갑했다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
지금 생각하면, 그 중학생 여자애, 솔이한테 자기 정체를 들킨 건 정말 행운이었다. 솔이가 아니었으면 맹호는 자기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뭔지도 알지 못했을 거고, 이렇게 ‘사람 친구’를 사귀는 즐거움도 알지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동물친구, 까치 역시 알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솔이는 호랑이가 사람으로 둔갑한다는 말도 안 되는(물론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지만) 걸 자기 눈으로 직접 봤는데도, 놀라거나 겁먹긴커녕 오히려 맹호를 무척 자연스럽게 받아주었다. 분명 보통 사람인 솔이 눈에 호랑이인 자기자신은 무척 어색한 것투성이였을 테지만, 오히려 솔이는 그걸 무척 재밌다고 여겼다. 맹호는 솔이한테 ‘사람세상’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익혀나갈 수 있었다. 글씨를 쓰는 법도, ‘교과서’를 푸는 방법도, 밥을 먹는 방법도, 맹호는 솔이한테서 자세하게 배워나갔다.
그래서일까. 솔이랑 맹호는 만난 지 몇 달도 안 돼서 무척 친한 사이가 되었다. 산골에서 살아 친구도 많이 없는 솔이한테, 맹호는 여러 모로 좋은 친구였던 모양이었다. 맹호 역시 자기한테 겁내는 모습 하나 안 보이고 자상하게 대해주는 솔이가 좋아서, 긴긴 겨울날을 솔이네 집에서 같이 보내곤 했다. 그리고 이 때, 솔이랑 맹호는 뜻밖의 친구와 만나게 되었다. 우연히 솔이네 집 위를 날고있던 까치가, 맹호의 정체를 눈치채고는 곧장 날아온 뒤 사람으로 둔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친구, 까치는 이 뒤 맹호와 여러 모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맹호 역시 자기말고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는 동물이 또 있었단 데 놀랐지만(까치가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는 경우는 그나마 어느정도 있는 편이었다. 물론 사람이 되고자하는 까치는 무척 드물겠지만), 그래도 자기랑 같은 처지에 놓인 존재가 있단 것 하나만으로 마음이 든든했다. 까치는 맹호처럼 영물은 아니지만, ‘지리산 어디쯤에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는 요술을 가르치는 존재가 있다’는 뜬소문을 듣고 호기심에 다녀갔다가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모양이었다. 그것만으로 ‘호랑이의 왕’만큼 장수할 수 있는 몸이 되었다니. 맹호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무척 신기했지만, 어쩐지 이 친구라면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뒤 솔이가 고등학생이 된 작년 3월, 맹호는 정말 뜻밖의 존재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때 맹호는 솔이가 학교에 가게 된다는 걸 알고 잠시 우울한 상황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맹호는 솔이랑 같이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때 만나게 된 은인 덕분에, 맹호는 솔이랑 같이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꿈같은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부터 죽 맹호를 여러 모로 도와 준 고마운 존재, 환웅이었다. 여기서 환웅이란 옛날부터 전해내려온 그 분을 말한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처럼 이 땅을 다스릴 정도의 힘은 잃은 모양인지, 솔이가 다니게 된 고등학교에서 역사선생님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맹호가 이 땅에 남은 유일한 ‘호랑이의 왕’이었기에, 맹호는 어릴 적부터 환웅과 깊이 알고 지내왔다.
어쨌든 덕택에 맹호는 몇 달 늦게나마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됐고(사람세상에서 자연스레 행동하기 위해 집에서 공부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참고로 까치는 솔이랑 거의 동시에 입학할 수 있게 됐다), 솔이랑 같이 학교에서 즐거운 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학교생활이 항상 즐거웠던 건 아니었지만, 맹호한테는 솔이랑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맹호는 이 시간이 죽 이어지길 몇 번이고 바랐다. 결국 2학년이 되기 일주일 전, 뜬금없이 나타난 나라의 높은 분들한테 들켜 홀로 도시에 오게 됐지만.
…그래도 까치가 만날 자길 놀려대는 소리를 안 들으니 조금 속시원하긴 하네.
맹호는 산골에서 학교를 다닐 때, 항상 자기 옆에 붙어다니던 까치한테 반쯤 놀림당하곤 했다. 물론 놀리는 까닭은 하나밖에 없었다. 까치는 항상 “넌 아무리 봐도 호랑이답지 않다니까. 같은 반 애들이 들음 웃겠다. 니가 호랑이라 그러면. 크하하하”라며 맹호를 괴롭혔던 것이다. 원체 정신이 사납고 촐랑대기 좋아하는 주제에 키는 쓸데없이 커서 눈에 참 잘 띄는 까치는, 학교에서도 다른 애들 생각은 안 하고 맹호를 그렇게 마구 놀려대곤 했다. 저런 놈이 커서 어른이 되면 뭐가 될까. 맹호는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까치를 그렇게 말하는 걸 귀에 딱지가 얹히도록 들은 바 있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 날도 까치는 정신이 나가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도 아닌 학교에 야한 책(물론 정말 위험한 건 아니었지만)을 들고 등교해선 맹호한테 마구 자랑해댔다. 그걸 들은 맹호는 당연히 어이가 없어서, 칭찬해달라는 것처럼 싱글벙글대고있는 까치한테 이런 말을 했다.
-야, 너, 넌 지금이 어떤 시댄데 책을 들고 와?! 그런 건 조용히 텔레비전이나 뭐 그런 데서…
아무리 맹호라 한들, 한 해동안 사람세상에서 지내고 있으면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는 쓸 일이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한테 배운 거나 여기저기 산천을 돌아다니면서 본 걸로, 이 세상에서 텔레비전이란 게 어떤 일을 하는지 정도는 진작 알고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컴퓨터나 뭐 그런 걸로 그렇고그런 걸 볼 수 있단 사실도, 맹호는(까치 덕분에)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까치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 갑자기 맹호한테 이렇게 마구 물어대기 시작했다.
-어유. 그럼 우리 맹호도 본 적이 있구나? 컴퓨터로 그…
-아냐! 대, 대체 무슨 소리야?!
물론 맹호는 까치한테 그런 걸 들었을 뿐이지, 실제로 그렇게 하진 않았다. 그야 관심이 없었다면 정말로 거짓말을 한 게 되겠지만, 그래도 맹호는 자기랑 다른 ‘종족’한테 그런 마음을 품는 건 좋지 않다고 스스로를 타일렀을 터였다.
그런데, 저 놈은 그 때 대체 무슨 소리를 해댔단 말인가. 게다가 그걸로 끝난 게 아니라, 며칠 동안 그 얘길 끝까지 우려먹었다. ‘오늘 우리 맹호, 밤새 잠도 안 자고…’란 식으로. 당연히 맹호는 머리가 지끈지끈대는 걸 참으며, 그런 말이 나올 때마다 까치를 흠씬 두들겨주곤 했다. 이거 말고도 참 별의별 일이 다 있었지만, 맹호는 그 때마다 나름대로 맞는 말인 까치의 말에 대답해주는 대신 이런 식으로 두들겨패는 걸 좋아했다.
물론, 이젠 다시 겪고 싶어도 못 겪을 일이지만.
이젠 다른 까닭으로 어깨까지 축 늘어뜨린 채, 맹호는 점심을 혼자 먹은 뒤 몸을 일으켜 미리 연락받은 교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젠 지나간 옛일에 자꾸 마음이 가는 걸 억지로 꾹 누르면서.

“그래서, 저희…라고 해야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떻게 대해드리면 좋을지 알 수가 없으니…”
“아, 네, 그러시겠죠. 물론 저도…”
잠시 뒤, 맹호는 다른 곳도 아닌 교장실에서 높은 분들과 같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말할 이야기는 뻔하다. 맹호가 여기에 왜 있는가. 그리고 앞으로 여기서 어떤 삶을 보내게 될 것인가였다.
어쨌든 자기만큼 당황하는 높은 분들과 얘기해보니, 관계자들도 자기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굉장히 당황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솔이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달랐을 뿐이지, 오히려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나오는 게 훨씬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천만다행히도, 맹호한테는 환웅이 있었다.
물론 환웅은 이제 날씨를 주관하는 것처럼 커다란 힘을 갖고있진 않지만, 대신 ‘맹호를 도와줄 만큼 작은’ 힘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환웅은 까치한테 연락을 받자마자 곧장 자기 힘으로 한국민속협회 비슷한 가짜 단체를 만들어서, 높은 분들께 대충 상황설명을 꾸며냈다. 이 호랑이는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는 마지막 짐승이니 소중히 다뤄야 한다고. 만약 소중히 대하지 않으면 이대로 영영 씨가 마르고 만다고. 사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긴 했지만, 환웅은 맹호를 위해서 ‘호랑이의 왕’과 같은 몇몇 얘기는 아주 자연스럽게 빼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덕분에, 맹호는 나라의 도움으로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도시에서 학교생활을 보내게 된 것이다. 만약 환웅이 없음 어땠을까. 맹호는 그 생각만 해도 침이 마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데서 혼자 학교생활을 보내야 한다니, 이렇게 힘든 일이 또 있을까.
그 생각을 하자, 맹호는 다시 가슴이 콱 막히는 걸 느꼈다. 높은 분들은 맹호가 자기들 눈에 띄는 곳에 있어줬으면 해서인지, 학교 근처에 아파트를 하나 마련해놓고 거기에서 지내달라고 맹호한테 부탁했다. 맹호도 그 마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점은, 환웅이 ‘지금 힘으로는’ 더 이상 끼어들 수 없는 곳이었다.
“일단 들켰는데 어쩌겠니. 넋이 빠져있던 네 잘못도 크다. 어차피 네 아버지도 ‘호랑이의 왕’은 사람세상에 녹아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니.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는 존재라면, ‘왜 자기가 이런 존재인 건가’란 생각은 한 번 해야 한다고. 이번 기회에 혼자 잘 생각해봐라. 어쩌면 네가 호랑이랑 사람을 잇는 존재가 될 수도 있지 않겠어?”
환웅이 이렇게 말했던 걸, 맹호는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맹호한텐 이만큼도 자신이 없었다. 과연 자기가 뭘 할 수 있을까. 자긴 ‘호랑이의 왕’이란 이름에도 한참 모자란 존재인데.
하지만 그래도 시간은 흘러간다.
맹호 역시, 자기가 놓인 현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 일주일동안, 맹호는 어떻게 해서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애썼다. 물론 그게 쉽게 될 리는 없었다. 맹호한테는 아직도 사람세상이 너무나 아득하게 느껴졌고, 특히 ‘도시’는 더더욱 그랬다. 그나마 어색하지 않게 행동하고 있는 것같긴 했지만, 그래도 이걸로는 한참 모자랐다.
이런 마음은 높은 분들이 생활비를 대주는 ‘자기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맹호한테 이 아파트는, 여전히 남과 같은 존재였다. 매일 수업이 끝나고 학교 바로 옆에 있는 집에 돌아오면, 맹호는 마치 마음 속까지 텅 빈것같은 느낌을 받았다. 옛날엔 ‘집’에 오면 솔이랑 같이 있을 수 있었는데. 그전까진 솔이네 집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기에, 맹호는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외로움이 북받쳐오르는 걸 똑똑히 느꼈다. 지금이라도 어딘가에서 ‘맹호는 밥 안 먹나?’하면서 나올 거 같단 생각이 들 정도로, 솔이랑 맹호는 무척 가깝게 지냈던 것이다.
게다가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맹호는 전학온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도 여러 모로 ‘주목받는’ 존재였다.
사실 이 역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몸집이 있는데다가 얼굴도 딱딱하고 운동신경도 좋은데, 어딘지 모르게 다른 또래들과 행동이 다른 맹호는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특히 체육시간엔 그게 심했다. 맹호는 원래 호랑이이기에 당연히 몸놀림이 날쌔고 유연했는데, 그게 지금 몸집과 상당히 안 어울리기 때문에 관심을 갖지 말라는 게 더 이상한 말이었다.
그나마 남한테 피해라도 안 입히는 게 다행이지.
매일 학교 복도를 걸을 때마다, 맹호는 항상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 생각이라도 해야 솔이한테 미안하단 생각을 떨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걸음걸이가 남들과 다르게 시원시원해서인지, 이렇게 복도를 걷기만 해도 맹호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아이들을 모른 척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맹호는 예전부터 죽 남들과 자기가 조금 다르단 게 굉장히 부끄러웠다.
…이런 모습이니까 여자애들하고도 제대로 못 지내잖아.
이 생각을 할 때면, 맹호는 항상 전학온 첫날에 본 여자애를 떠올리곤 했다. 전학온 지 이제 일주일이 다 되어가지만, 맹호는 여전히 그 여자애와 데면데면한 상황이었다. 사실 그 여자애가 아니더라도 맹호는 이성이 마냥 낯설기만 했다. 이럴 때 솔이가 있으면 좋은데. 이성이지만 맹호가 편히 대할 수 있었던 솔이는,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고마운 존재였다.
조금이라도 사람과 떨어져 혼자 있었으면 좋겠는데. 자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에서.
산골에서는 항상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할 수 있었던 일조차, 도시에서는 자기 멋대로 할 수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어쩐지 마음이 침울해진 맹호는, 그저 이불만 뒤집어쓴 채 바닥에 누워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 때까지, 맹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기가 오랜 시간을 보낸 산골에서, 고마운 손님들이 찾아올 채비를 하고 있었단 사실을.

그리고 그 선물은, 맹호가 이 도시로 전학온 지 일주일을 막 넘긴 월요일에 갑자기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전 한솔이라 그래요. 앞으로 잘 지냈음 좋겠어요.”
갑자기 교탁 앞에 선 맹호의 오랜 친구 솔이는, 그런 말과 함께 생글생글 웃어보였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었기에, 맹호는 그야말로 벙쪄있을 수밖에 없었다.
키가 또래보다 훨씬 작은 편인 솔이는, 이렇게 낯선 곳에 던져져서 무서웠을 텐데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가만히 서있었다. 머리 뒤에 매달린 작은 말총머리가, 항상 그렇듯 솔이의 어려보이는 겉모습을 더 돋보이게 해주는 것 같았다. 도시라서 그런지 특유의 억양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지만, 맹호는 솔이가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도시에서 지냈기에 표준말도 어느 정도 자연스레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 모습을 지난 일주일 동안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혼자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솔이가 자기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어, 매…우아. 맹호다! 잘 있었어?”
“으, 응?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얼떨결에 대답하다가, 맹호는 몸이 딱딱하게 굳는 걸 느꼈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자기랑 솔이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일주일 전에 자기를 이상하게 봤던 여자애도.
“…”
맹호는 그 때, 자기가 앞으로 전보다 더 유명해질 거란 사실을 곧장 느꼈다. 물론 솔이 때문이라면 그것도 고맙게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설마 나 때문에 따라온 거야?”
잠시 뒤, 쉬는시간이 되어서.
이미 나온 거나 마찬가지인 답을, 맹호는 조심스레 입에 담았다. 사실 솔이가 도시까지 올 정도라면 그 까닭은 하나밖에 없다. 그러지 않는다면, 솔이가 굳이 ‘자기가 무서워하는’ 도시에 제발로 올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응. 엄마랑 아빠도 허락해줬어. 그러니까 여기 죽 다녀도 돼.”
맹호도 죽 여기 다닐 거잖아. 란 말을 덧붙이며, 솔이가 뭐가 좋은지 맹호 옆에서 생글생글 웃었다. 지금은 점심시간. 지금껏 혼자가 아니면 아직 익숙지 않은 같은 반 애들하고 밥을 먹었던 맹호도, 일주일이 지난 지금 처음으로 ‘친한 친구’랑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나도 산골에 죽 있음 좋지만, 평생 거기서만 살 수는 없잖아. 그리고 맹호도 있구. 그지?”
이런 앳된 표정으론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똑똑한 목소리로, 솔이는 그렇게 말을 끝맺었다. 아무튼 자긴 솔이한테 못 배긴다니까. 맹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항상 그랬던 것처럼 솔이의 머리를 살살 어루만졌다.
“그리고 환웅 선생님도 맹호 보고 싶다더라. 그리고 태영이도. 맹호도 보고 싶지. 그지?”
“뭐, 그야 그렇지만…”
말꼬리를 흐리며, 맹호는 학교 급식같은 것만으로도 눈을 반짝일 수 있는 솔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맹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솔이한테 이 ‘도시’가 어떤 존재인지를. 그리고 솔이가, 왜 ‘그런데도’ 아까처럼 이야기했는지 역시.
이런 아이가 자기 곁에 있어준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 일일까. 맹호는 다시 한 번, 하늘 위에 있는 그 분한테 고맙단 마음을 전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어떠셔? 나도 여기 와선 연락 못 드렸는데.”
“응. 무지 잘 계셔. 아까도 말했잖아. 얼마나 맹호를 걱정하시던지, 나한테도 몇 번이고 신신당부하셨는 걸. 분명 낯선 도시에서 혼자 당황하고 있을 거라고.”
“그, 그렇게나 내가 못미더웠나?”
“그건 아닐 거야. 그치만 선생님은 맹호를 무지 아끼잖아. 그지?”
솔이가 다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맹호의 어깨를 두드려주자, 맹호는 무척 민망하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 분한테는 거스를 수 없다니까. 정말로 어릴 때부터 알고지낸 사이인데도, 환웅은 여전히 맹호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이다. 지금 자기가 여기에서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조차도.
“아, 그런데 하나 빼먹은 거 있다. 나 오늘부터 맹호네 집에서 같이 잘 건데, 괜찮지?”
“어, 물론…자, 잠깐만. 솔이야, 뭐라고?!”
그렇게 멍하니 있던 차에 갑자기 이런 말까지 나오자, 맹호의 눈은 자연스레 동그래졌다. 아니, 그렇게 이상한 일은 결코 아닐 터였다. 애초에 솔이한테 정체를 들킨 뒤부터, 맹호가 밤늦게까지 솔이네 집에서 지내는 건 매우 흔한 일이었던 것이다. 물론 대부분은 한밤중에 원래 모습으로 숲속에 돌아가곤 했지만, 솔이네 집에서 솔이랑 다정하게 얘기를 하며 하룻밤을 보낼 때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걸 매일매일, 그것도 도망칠 곳 하나없는 아파트에서 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응, 왜? 난 맹호랑 같이 사는 거 좋은데. 맹호한테 맛있는 것도 많이 해줄 수 있고, 그지?”
솔이는 참 해맑은 표정으로, 벌써부터 두근댄다는 듯 어깨를 살짝 들썩였다. 그,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까. 그런 말을 해줄 수도 없어서, 맹호는 혼자 조용히 머리를 싸맸다.
앞으로 어떤 나날이 자길 기다리고 있을까.
모처럼 솔이가 자기랑 같이 있어주는데도, 맹호는 그런 생각에 저절로 앞이 깜깜해졌다.

“우아, 맹호는 여기서 지내는 거야?”
그리고 방과후, 드디어 맹호네 집에 다다르자.
솔이는 그런 말과 함께, 부엌이며 큰방과 작은 방 두 개, 그리고 거실과 화장실로 이뤄진 맹호네 집을 여기저기 있는대로 돌아다녔다. 그렇게 내가 사는 데가 신기했나. 맹호는 묘하게 낯간지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그런 솔이를 그냥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응, 솔이 너도 여기서 살게 된다며? 그러니까 짐을…”
“아, 맞다. 나 맹호한테 보여줄 거 있다. 짜잔~.”
“…호랑이 옷?”
솔이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단 것처럼, 자기 가방에서 노란색 옷을 꺼내선 맹호한테 보여줬다. 영문을 모르는 맹호가 여전히 멍하니 있자,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는지, 솔이는 ‘잠깐만!’이란 말과 함께 자기 방에 들어가더니, 이윽고 ‘그 옷’을 입은 채 맹호 앞에 나타나 빙글빙글 돌았다. 마치 이 옷을 꼼꼼히 봐달란 것처럼.
…정말 호랑이 옷이긴 한데.
맹호는 멍하니 그 옷을 보며, 혼자 감탄하고 있었다. 흰색 배에 검은 줄무늬, 그리고 호랑이 얼굴이 그려진 모자까지 분명 ‘호랑이 옷’이라서였다. 당연히 머리 위엔 작은 귀가 달려있는데, 솔이가 그걸 쓴 채 생글생글 웃고 있으면 굉장히 앙증맞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이 입으면 어떨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솔이한테는 아주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하지만, 맹호는 궁금한 게 있었다.
“그런데 이거, 대체 어디서 가지고 온 거야?”
“응? 맹호 보여주려고 샀다. 인터넷에서 보니까 무지 귀여워서. 이거 사느라 무지무지 고생했는데 받아보니까 너무 좋더라. 어때. 괜찮나.”
“으, 응. 그…”
이럴 땐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까. 맹호는 혼자서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사실 지금 이 옷을 입은 솔이가 매우 잘 어울린단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입고 있는 게 다른 것도 아닌 호랑이 옷이었기에, 맹호는 대체 이걸 어떻게 칭찬하면 좋을지 몰라 머리를 썩힐 수밖에 없었다.
마음만 같아선 가만히 안아주곤 싶은데, 그러기엔 너무 어색할 테고…
맹호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있는데, 오히려 솔이가 맹호 쪽으로 와서는 가만히 몸을 갖다댔다. 그리곤 맹호의 가슴이 두근대거나 말거나, 이런 말과 함께 머리를 배 쪽에 비볐다.
“맹호 좋아하는 거 다 안다. 에헤헤. 맹호는 부끄러워하니까 그러지, 그지?”
“으, 으, 응…”
맹호는 뭐라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서, 일단 고개를 얼른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집에서 돌아왔는데도 아직까지 교복차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호랑이옷을 입은 솔이랑 이러고 있으니, 굉장히 묘한 느낌이 지금 당장이라도 맹호를 덮칠 것 같았다.
“이, 일단 옷 갈아입을게. 기다려!”
그래서 맹호는 조심스레 솔이랑 거리를 둔 뒤,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갈아입으면서도 자꾸 가슴이 두근댔지만, 그건 애써 모른 척했다.
“우아, 맹호는 여기서도 우리 집이랑 똑같은 옷입는다. 옷 더 갖다줄 거 그랬나?”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맹호가 거실로 나오자, 솔이가 그걸 알아채곤 재밌단 표정으로 맹호 바로 앞에까지 다가왔다. ‘옷’이라는 것에 별 신경을 안 쓰기에, 항상 편한 추리닝을 골라입던 맹호를 솔이는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그러니까 여긴 너무 가깝대도.
그렇게 말하려던 맹호는, 솔이의 티없는 눈동자를 보자 그런 말을 목구멍으로 꿀꺽 삼켰다. 이 아이는 정말 순수한 생각으로 맹호랑 한지붕 밑에 사는 걸 반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아이한테 잠시나마 묘한 생각을 품었다니. 맹호는 여러 모로 솔이한테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솔이는 자길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걸까.
솔직히 말하자면, 맹호는 그게 반갑기도 했고, 한편으론 아쉽기도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호랑이가 사람과 이어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맹호 역시 그건 잘 알았지만, 솔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조금 궁금했다.
“그런데 솔이야. 정말 괜찮겠어? 나도 일단 그, 그런데…”
차마 자기가 수컷이니까, 라고까진 말할 수 없어서, 맹호는 얼른 말끝을 흐렸다. 이걸로도 자기가 하려는 말은 충분히 전해지리라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솔이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오히려 고개를 가로저으며, 전혀 망설임없는 말투로 이렇게 대답했다.
“아냐, 난 무지 괜찮아. 아빠랑 엄마한테도 허락받았는 걸. 맹호랑 같이 있으면 맘이 놓인다고. 맹호는 내가 무지무지 아끼는 동물친구니까. 그지?”
“아, 그래. 그렇구나…”
그 말을 듣자, 드디어 맹호는 솔이가 자기를 어떻게 여기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솔이는 자기를 ‘이성’이라 제대로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 역시 무척 자연스러운 얘기였다. 솔이는 사람으로 둔갑했을 때뿐만 아니라, ‘원래 모습’일 때도 자기랑 오랫동안 가까이 있었으니까.
…왜 이렇게 살짝 마음이 아쉬운 걸까.
호랑이와 사람이 맺어질 수 있단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겁나는데, 맹호는 어쩐지 솔이의 그런 마음이 자기 가슴을 콕콕 찌르는 걸 느꼈다.

그런 마음을 품으면서도, 맹호는 솔이와 오랜만에 정말 즐거운 한 주를 보냈다. 자길 알아주는 친구가 이렇게 옆에 있기만 해도 힘이 된다는 걸, 맹호는 일주일 동안에 쌓은 경험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솔이도 맹호가 있어서인지, 적어도 맹호가 보낸 일주일보다는 훨씬 더 빨리 이 낯선 곳에 적응해갔다. 맹호도 뭔가 거들 수 있는 게 있다면 거들고 싶었지만, 오히려 맹호는 잘 모르는 게 많아서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맹호라 한들, 한 가지 자랑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했다.
“우아, 맹호야. 이게 뭐야?”
솔이가 전학오고 처음으로 맞는 목요일에, 맹호가 주머니에서 ‘그걸’ 꺼내자 솔이는 토끼눈을 하고 그걸 빤히 쳐다봤다. 솔이도 산골에서 오래 살았으니까 이건 잘 모르겠지. 조금 의기양양한 기분으로, 맹호는 가만히 그게 뭔지 말해줬다.
“몇 달 전에 나온 최신 스마트폰이야. 텔레비전에서 봤지?”
“우아, 정말? 신기하다. 아빠 옛날 핸드폰밖에 못 만져봤는데…”
솔이랑 같이 다니던 학교는 워낙 외진 곳에 있었기에, 도시보다 ‘최신 핸드폰’을 갖고있는 아이들이 훨씬 적었다. 그나마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는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최신 핸드폰을 들고다니는 경우는 정말로 드물다시피했다. 적어도 맹호가 봤을 땐 그랬다.
그리고 솔이는 특히나 핸드폰과 인연이 없었다. 여러 사정이 있어서 부모님이 사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아버지 핸드폰을 만질 기회는 있었지만, 워낙 옛날 기종이라서 그다지 재미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솔이는 다른 아이들 핸드폰을 만질 일도 그다지 없었기에, 이렇게 가까이에서 최신기종을 보는 건 분명 처음일 터였다.
그런데.
“그런데 맹호야. 여기에 있는 이상한 기호는 뭐야? 응…어, 와이파이? 위를 이렇게 하니까 이런 말 나왔는데, 이건 또 뭐지?”
“그, 글쎄. 그게 뭐더라? 나도 잘…”
맹호는 이런 말과 함께, 식은땀을 흘리며 핸드폰 및 솔이한테서 고개를 돌렸다. 당연한 얘기지만, 맹호도 솔이만큼이나 신문물은 잘 몰랐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호랑이라서 ‘기계’가 뭔지 전혀 모르고 자라왔는데, 그렇게 어려운 외국말을 맹호가 잘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 스마트폰 역시 나라의 높은 분들한테 처음 받은 거였고, 오히려 여기에 온 지 2주일이 다 되어가는데도 핸드폰 하나 제대로 만지지 못하는 건 다름아닌 맹호 자신이었다.
게다가 이런 일은 핸드폰만 가지고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솔이 너, 이거 알아? 여기엔 무지 큰 역도 있다. 백화점이란 데도 있는데…”
그 다음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맹호는 자기가 살게 된 이 도시를 솔이한테 자랑하고 싶어졌다.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맹호랑 솔이가 살던 산골엔 그렇게 큰 역이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화점이란 데로 가려면 버스를 타고 한참 가야만 했다.
“우아, 진짜? 대단하다. 나도 가고 싶은데…그런데 어떻게 가지?”
하지만 솔이가 궁금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걸 보자, 맹호는 한 방 맞은 느낌이 들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직 맹호는 이 도시의 지리를 잘 몰랐던 것이다. 애초에 ‘도시’라는 공간 자체에 적응하는 데만 해도 너무나 벅차서, 멀리까지 나간다는 건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에이. 거봐. 맹호도 못 갔으면서. 우리 나중에 꼭 같이 가자. 알았지?”
그렇게 솔이가 자기 팔에 달라붙는 걸 느끼며, 맹호는 민망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마음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아무튼 자긴 뭘 자랑하면 안 된다니까. 얕은 지식만으로 솔이한테 잘난 체한 게 괜히 부끄러워져서, 맹호는 노을이 지는 반대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 때, 솔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떼어놓았다.
“아, 맞다. 맹호한테 진작 말해야 됐는데 까먹었네. 태영이 있잖아. 조만간 일로 온다 그랬어. 맹호한테 전해달라던데, 어때, 기분 무지 좋지?”
“응? 그거야…잠깐, 누가 온다고? 까치?!”
맹호의 질문에, 솔이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건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자기네들하고 직접 관계는 없는 까치까지 이리로 오게 된다니.
대체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맹호는 다시 한 번 머리를 쥐어싸매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맹호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결국 일은 터지고 말았다.
맹호와 절친한 사이가 된 바로 그 까치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주 월요일 맹호네 학교로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맹호랑 같이 고등학교에 다니던 모습이 아니라, 다른 누구도 아닌 맹호의 ‘선생님’으로서.
“이야. 안녕하세요 다들. 깜짝 놀라셨죠?”
월요일 국사시간, 마치 만우절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앞문으로 들어온 사람을 보고, 맹호는 순간 몸을 움찔댔다. 대체 왜 ‘저 자식’이 이 시간에 당당히 자기 교실로 들어온단 말인가. 그것도 키가 커지고 양복까지 갖춰입은 채.
“어유. 다들 무지 당황들 하시네. 진정해도 돼요. 난 그저 여기 늦게 전근온 선생님일 뿐이니까. 오늘부터 여기서 가르칠 강태영이라 하고, 또…”
“저, 저게 뭐하는 짓…?”
맹호는 이제, 진짜로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말도 안 됐다.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한 달 전만 해도 학교에서 교복을 입고 같이 떠들던 자기 친구가, 겨우 몇주일 사이에 어른이 되어 학교 선생님으로 찾아오다니. 그것도 만날 촐랑대기만 해서 맹호가 생각하는 ‘어른’과는 너무나도 달랐던 놈이.
게다가 저 까치의 모습은, 자기 생각보다 훨씬 더 ‘학생이었던’ 모습 그대로였다. 굳이 말하자면 키가 좀 더 크고 몸집이 조금 더 좋아진 정도였다. 시원시원하게 짧게 깎은 머리도, 장난기가 숨어있지만 어느 정도 진지한 표정도, 그리고 무엇보다 더 묘하게 밝고 명랑한 느낌은 맹호가 기억하는 그 까치였다. 단지 원래 입던 교복 대신, 어느 정도 단정한 양복을 입고있을 뿐인 것이다. 물론 얼굴이 좀 더 어른스러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같은 학교에 다닌 애들이라면 ‘알아보는’ 게 무리는 아닐 게 틀림없었다.
“마,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혼자 중얼거려보지만, 반 애들이 들썩이든가 말든가 교과서를 펴고는 태연하게 수업을 하려는 까치의 모습은 결코 헛것이 아니었다. 대체 왜 이런 식으로 돌아왔단 말인가.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돌아와야 할 정도로 자기가 믿음직스럽지 못했던가.
생각 끝에 머리가 지끈지끈대자, 맹호는 익숙한 목소리가 수업을 ‘하려는’ 걸 무시한 채 교과서에만 눈길을 주었다. 얼른 이 현실을 잊어버리기 위해. 그리고 마음속에서 기어나오는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을 구겨넣어버리기 위해.

사실, 까치가 지금 하고 있는 저 모습 자체는 결코 이상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맹호랑 까치가 지금까지 고등학생인 ‘척’을 하고있는 게 훨씬 더 이상했다.
맹호랑 까치는, 둘 다 차이는 있지만 솔이보다 훨씬 더 나이를 많이 먹은 상태였다. 물론 ‘호랑이의 왕’을 기준으로 하면 아직 젊은 편이지만, 그래도 보통 호랑이들과 대보면 원로 소리를 들을 정도로는 오래 살았다. 이건 까치도 마찬가지라서, 적어도 ‘고등학생’으로 있는 게 자연스런 나이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까치가 하고있는 ‘어른’ 모습이 둘한테는 더 잘 어울릴 터였다.
그럼 왜 이 모습을 하고있는가 하니, 동물은 ‘자기가 가장 자연스럽다 생각하는’ 사람 모습으로까지만 둔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아무리 사람 나이로는 어엿한 성인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 모습으로 둔갑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맹호 역시 이 말을 환웅한테 전해들었는데,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는 모습만큼 ‘자기인식’에 달린 것도 없단 말은 지금까지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는 그 모습으로 둔갑해도 된다’고 너무나 당연히 여겨야만 ‘자기가 바라는 나잇대’로 둔갑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그 아래 나잇대로 둔갑할 순 있었지만, 일단 한 번 그 위의 나잇대로 둔갑했다면 절대 아래 나잇대로 돌아갈 수 없다. 당연히 어느 정도 젊은 상태로 둔갑하는 게 만약을 대비할 땐 편했기에, 맹호 역시 솔이랑 만나기 전엔 그렇게 하고 있었다. 솔이랑 만났을 땐 이 모습이었고, 그 뒤로는 죽 그대로지만.
어쨌든, 지금 맹호한테 나이가 훨씬 많이 든 사람으로 둔갑하라고 해도 맹호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자기한테 가장 잘 맞는 모습은 바로 이 고등학생이라는 자각이 있었으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사람과 다른 동물들의 나이감각엔 큰 차이가 있다. 아무리 맹호가 호랑이 입장에선 어른이라 할지라도, 사람 입장에선 고등학생 정도의 정신상태에 더 가까웠다. 맹호 자신도 그걸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애초에 ‘고등학생’ 말고 다른 선택지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지금, 까치는 자기와 다른 나잇대인 ‘어른’이 되었다. 이렇게 자연스레 수업하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전처럼 까불대는 느낌이 남아있는데도 훨씬 더 믿음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겨우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까치는 맹호처럼 고등학생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까치가 저 모습으로 둔갑한 건, ‘자기는 이 모습이라도 괜찮다’는 확신이 있단 뜻이었다. 맹호한텐 전혀 그런 게 없는데.
나보다 저 까치가 훨씬 더 어른스럽기라도 하단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맹호는 정말로 우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살아온 연수로만 따지면 맹호는 까치보다 조금 더 일찍 태어난 편이었다. 그런데, ‘호랑이의 왕’도 아닌 까치가 자기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니. 대체 자기는 뭘까. 이런 자기가 ‘호랑이의 왕’이란 이름에 걸맞은 걸까.
겨우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자기처럼 이 책상에서 수업을 들었던 까치가 ‘오래 전부터 죽 이래온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레 수업을 진행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며, 맹호는 강한 자괴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혹시 쟨 정말 ‘어른’이 아닐까, 란 생각을 애써 숨기고 또 숨기며.
“우아. 태영…아니 까치 정말 대단하다. 그지?”
쉬는 시간이 되자, 솔이는 드물게도 까치를 이름이 아니라 맹호처럼 종족 이름으로 불렀다. 아무리 모든 걸 잘 받아들이는 솔이라 할지라도, 까치의 저 ‘성장’은 남들한테 들킬 게 아니란 건 알아준 모양이었다.
“아, 그, 그래…”
“응. 수업도 무지 잘하잖아. 맹호랑 만나려고 일부러 커줬나 봐. 우아…”
“…”
그저 순수하게 ‘까치가 자랐다’는 사실만으로 입을 크게 벌리는 솔이를 보며, 맹호는 할 말을 잃었다. 이럴 땐 뭐라 대답해줘야 할까. 차마 자기가 까치 때문에 부끄러웠단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치만 다행이다. 또 셋이서 있을 수 있잖아. 맹호도 좋지, 그지?”
“어? 아, 어…”
그래서 맹호는 솔이의 질문에 그런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솔이는 까치가 온 게 그렇게 좋은 걸까. 거야 자기처럼 모자란 놈보단 낫겠지만.
그런 식으로 마음을 진정시켜봤지만, 효과는 그다지 없었다. 오히려 저 잘나디 잘난 ‘일개 까치’ 친구한테, ‘호랑이의 왕’이 품으면 우스울 뿐인 질투심만 더 느껴질 뿐이었다.

“이야. 정말 오랜만에 만났네. 그지, 친구?”
“오랜만같은 소리하네. 이 까치자식아. 여기가 어디라고…아.”
그리고 점심시간, 맹호는 두말하지 않고 ‘친구’가 있는 교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볼일은 하나밖에 없다. 생뚱맞은 방법으로 찾아온 까치한테 매운 맛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보여주면 좋을지는 맹호도 잘 모르겠지만.
“어디긴. 교무실이지. 어때. 이러고 있으면 나도 좀 멋있어보이지 않냐, 응?”
“헛소리하네. 대체 누가 이렇게 오라고…”
“넌 산골에 있으나 여깄으나 바뀐 게 하나도 없다니까. 아무튼 애가 성질이 급해요.”
“뭐, 뭐라고?!”
고등학생이 되나 선생님이 되나 참으로 바뀐 게 없는 시끄러운 웃음소리를 들으며, 맹호는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왜 내가 저 자식한테 이딴 소리를 듣고 앉아있어야 하는 거지? 속으론 부글부글 끓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갓 전학온 학생이 교무실에서 일을 저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까치의 말이 그다지 틀린 것도 아니었다. 맹호 역시, 그 말을 들으면서 정곡을 찔린 느낌이었던 것이다.
“…”
그렇기에 맹호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그저 바닥만 보는 수밖에 없었다. 왜 내가 겨우 까치한테 이런 굴욕을 당해야 하는 거지, 란 생각을 있는 힘껏 구겨넣으면서.
“아무튼 그런 걸 생각해서 내가 온 거지. 혹시 했는데 운좋게도 국사선생님이 급하게 학교를 그만두게 됐잖니. 그래서 내가 그 분께 속성교육 좀 받고 이리로 왔다 이거야. 호랑이 옆엔 까치가 있어야지. 안 그래?”
“너…”
하고 싶은 말이 몇십 개고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는데도, 맹호는 고작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물론 여기서 ‘그 분’이란 환웅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환웅이라면 짧은 시간동안 교사 면허 하나 까치한테 만들어주는 건 어렵지도 않았겠지. ‘그 정도 힘’이라면 아직도 문제없는 분이니까. 자기보다 몇 배는 더 머리가 잘 돌아가는 까치이니, 원래 성적이 좋았던 국사를 가르치는 것 정도는 누워서 떡먹는 것보다 훨씬 쉬울 것이다. 대체 왜 멀쩡하던 국사선생님이 갑자기 관뒀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살다보면 그런 일도 없진 않겠지.
하지만 지금 맹호한텐 그것보다 더 신경쓰이는 게 있었다. 그래, 까치가 맨 마지막에 했던 그 말 말이다.
“무슨 헛소리야. 그, 호랑이 옆엔 항상 까치라니…”
“야, 맹호 너 이러기냐? 옛날 그림에 얼마나 많니. 까치호랑이 그림.”
“아니, 그, 그건 저기 다른 나라에서 표범이었던 게 호랑이가 된 거고…”
그런 식으로 변명아닌 변명을 해보지만, 맹호도 이 말이 씨알도 안 먹히리란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매번 까치한테 이런 식으로 도움받는 자기가 민망해서 해 본 말일 뿐이었다. 맹호가 처음 사람세상으로 나왔을 때, 이미 사람세상을 오랫동안 봐온 까치한테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그 때도 고개를 들 수 없었는데, 지금 또 이렇게 나오면 맹호 입장에선 까치를 바로볼 면목이 없었다.
그리고 역시나, 까치는 킬킬대며 이 말과 함께 맹호 머리를 살짝 쥐어박았다.
“어쨌든 우리나라선 호랑이야. 인마. 암튼 여기서도 잘 지내자. 입장은 좀 바뀌었지만.”
“아, 그래…”
그렇게 갈굼아닌 갈굼을 당하며, 맹호는 복잡한 마음을 애써 무시하려 했다. 어쨌든 셋이서 같이 있을 수 있게 된 건 좋은 일이다. 어차피 겉모습 차이는 까치랑 호랑이한텐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고.
그래, 여기까진 그래도 괜찮았다.
하지만 이 뒤, 솔이랑 같이 집에 돌아가서 알게 된 현실은…

“니, 니, 니가 왜 여깄어. 엉?!”
비어있던 아파트 아래층에서 이삿짐이랑 같이 나타난 까치였다.
“왜긴 왜야. 이거 너무 서운한데. 그래도 친구한테.”
“너, 너 이 자식. 제정신이야? 왜 여기까지 쫓아와선…”
맹호는 순간 눈앞이 까맣게 된 나머지, 다짜고짜 까치한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이 안 된다. 아무리 우연의 일치라 해도 그렇지. 바로 아래층에 빈 집이 났고, 거기에 까치가 새로 이사오게 되다니. 이게 말이 된단 말인가.
“넌 환웅 선생님을 너무 무시한다니까. 그 정도 우연은 아직 만들 수 있어요. 그 분도.”
“…농담이지. 지금 장난치는 거 맞지, 그지?!”
그렇게 반박하려고 했지만, 어쨌든 이미 일어난 사실을 뒤집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 일을 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모처럼 솔이랑 둘이서 오붓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물론 까치 역시 솔이네 집엔 자주 드나들고 있었다. 셋은 무척 친했고, 솔이네 집이 워낙 산 깊은 곳에 자리잡았기에 날이 너무 어두워지면 자고가는 일은 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근처에서 산 적은 없었다. 그것도 맹호랑 솔이가 둘이서만 살 때엔 절대.
“우아. 그럼 태영이도 바로 아래서 사는 거야? 진짜로?!”
“그럼. 솔이도 좋지? 맹호 쟤야 좀 꺼릴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솔이는 이런 상황이 무척 기뻤는지, 까치랑 전처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맹호는 하늘이 갑자기 무너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긴 하지만, 맹호 역시 까치가 싫단 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절친한 친구가 근처에서 지내게 되었으니 반가워할 일이었다. 단지 솔이랑 같이 지내는 시간을 뺏기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지금껏 솔이네 집에서 지냈을 땐 그다지 들지 않았던 생각이, 신기하게도 바로 지금 맹호를 마구 감싸돌고 있었다.
“너, 자주 오기만 해봐. 가만 안 둔다.”
“예이예이. 가끔 오지요. 가끔.”
“아무튼 이 자식도 참…
결국 맹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엄포를 단단히 놓는 것뿐이었다. 물론 까치는 자기 말을 절대 안 들을 테지만.

그리고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까치, 즉 지금 맹호의 역사선생님을 하고 있는 존재는 무서울 정도로 도시에 매끄럽게 적응했다. 맹호는 도시에 와서 일주일도 넘게 시행착오가 이어졌는데도, 까치는 일주일은 커녕 며칠도 안 돼서 자연스레 이 곳에 녹아든 것이다. 마치 오래 전부터 여기 있었던 것처럼.
사실, 가만히 생각하면 이건 무척 자연스러운 이야기였다. 까치는 맹호랑 달리 도심 위도 자주 날아다녔기에 ‘바깥세상’ 역시 어색하지 않았으며, 맹호보다 기억력도 훨씬 좋고 사교성도 무척 뛰어났다. 그런 까치가 맹호처럼 도시생활에 당황해할 까닭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이건 처음부터 맹호한테 엄청 불리한 상황이었다.
…원래 모습으로 치면 분명 자기가 더 대단할 텐데.
아무렇지도 않게 ‘어른’처럼 행동하는 까치를 보며, 맹호는 속이 답답한 걸 참을 수가 없었다. 분명 한 달 전만 해도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만날 시끄럽게 구는 놈이었을 텐데. 왜 이렇게 양복이 잘 어울린단 말인가. 왜 수업은 저렇게 잘 하고. 왜, 왜 저 자식은…

까치가 갑작스레 전근온 지 닷새쯤 되었을까. 여전히 까치한테 알게 모르게 열등감을 느끼던 맹호한테, 갑자기 이런 말이 들렸다.
“동아리?”
“그래. 우리도 하던 거 해야지. 안 그래?”
그런 말을 하며 싱글벙글 웃는 까치를 보면서, 맹호는 자기가 산골에서 하던 일을 떠올렸다. 까치랑, 맹호, 그리고 솔이는 학교에서 전통음악동아리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쯤 모여서 사물놀이를 한 다음, 이번 연습이 얼마나 재밌었는지를 떠들며 집에 돌아가곤 했다.
그 땐 정말 신났는데.
그러고 보면 요즘엔 악기를 제대로 만진 적조차 없었다. 음악을 연주한 건 태어나서 동아리 활동이 처음이었기에, 맹호는 연습하는 날이면 항상 가슴이 쿵쾅대곤 했다. 여기서도 연주할 수 있을까. 설마 도시에서도 그렇게 시끄러운 음악을 즐길 수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도 여기와서 처음 알았는데, 이 학교는 수업이 끝난 다음에도 동아리활동하고 그러더라. 예능계열은 교실도 따로 주고.”
“아. 그랬던가?”
까치가 놀랐단 듯 그렇게 말하자, 맹호는 그저 얼빠진 목소리밖에 낼 수 없었다. 시골에서는 등하교시간도 있어서 그렇게 동아리활동을 자주 하진 못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교실이 있는 4층에선 유난히 음악소리가 자주 들렸던 느낌이 있었다. 물론 맹호는 사물놀이가 무척 즐거웠기 때문에, 자주 연습하는 건 환영이었다. 이번 기회에 실력도 키울 수 있을 거고.
“난 이렇게 된 이상 담당교사로 들어갈 거다. 어차피 어쩔 수가 없잖냐. 암튼, 너도 들어갈 거지?”
“…어.”
그렇게 곧장 대답하고 나서, 맹호는 꿈꾸는 듯한 느낌으로 까치를 따라 동아리 활동을 한다는 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학교에도 그런 곳이 있었구나. 진작 알았음 좋았을 텐데, 란 생각과 함께.
이윽고 까치가 발걸음을 멈추자, 맹호는 조심스레 그 뒤를 따랐다. 노을진 햇살이 갑작스레 교실문을 연 맹호의 눈으로 곧장 쏟아져들어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교실엔, 어떤 학생이 땅바닥에 앉은 채 까치랑 그 뒤로 따라들어오는 맹호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맹호는 그제야 그 애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이 애는 분명, 전학온 첫날에 자길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던…
“아, 유라야. 기다렸니?”
까치가 그 아이를 ‘유라’라 부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맹호를 자기 앞으로 끌고 왔다. 역시나, 그 여자애, 유라는 아주 수상쩍단 눈빛으로 식은땀을 흘리는 맹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깨를 넘어 가슴 언저리까지 늘어뜨려진 긴 갈색 생머리가, 유라가 들어올린 고개를 따라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얼굴이, 마치 맹호라는 존재 자체를 거절하는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키는 아마도 솔이보단 크지만 맹호보단 훨씬 작을 것 같았다. 아무튼 날 좋아하지 않는 건 분명한 거 같은데. 맹호는 지금 당장 이 교실을 뛰쳐나가고 싶단 생각에 몸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이 교실을 나가면 도시에서 음악을 연주할 길은 영영 없어지고 만다.
“전 혼자 있고 싶어서 여길 골랐는데요.”
유라는 잠깐 맹호 및 까치를 보다가, 이윽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번거로워서 견딜 수 없단 말투였다.
“응. 그럴 거 같더라. 하지만 유라 너도 알지? 여기서 한 해동안 혼자 있을 수 있을진 몰라도, 사물놀이는 할 수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
이 사실도 잘 알고 있었는지, 까치의 말에 유라는 더 이상 대답하지 못했다. 그럼 자기가 있어도 되는 걸까. 만약 자기가 폐만 안 끼친다면, 맹호도 이 동아리에 있고 싶었다. 어쩌면 유라랑 조금 가까운 사이가 될지도 모르니까. 정말로 그렇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 때,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리고 거기서 들린 목소리 역시, 이미 맹호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어, 까…선생님은 언제 왔어요? 그리고 맹호도. 아!”
그 인물, 솔이는 모든 걸 알았단 듯 박수까지 치며 교실로 들어왔다. 그리곤 기분이 들떴는지, 이내 맹호 손을 잡고는 아주 세게 흔들었다.
“우리, 다시 여기서 연습할 수 있는 거야? 유라랑 같이? 진짜로?!”
“그래, 그런가 봐. 근데…”
맹호는, 유라는 날 안 반기는 거 같은데, 라고 하려던 말을 얼른 꿀꺽 삼켰다. 어쨌든 유라한테서 허락도 받은 것 같으니, 쓸데없는 말을 삼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유라도 자기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란 까닭이 없었다면, 절대 자길 받아들여줬을 리 없었단 걸 맹호는 잘 알고 있다.
…자긴 여기서 괜찮을까.
이렇게 혼자 길게 생각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맹호는 결국 아주 신난 솔이가 일단 소리를 맞춰보자 말한 것에 찬성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맹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안 맞는데?”
“그거야 당연히 안 맞지. 절반이 서로를 안 보고 있는데.”
겨우 1분쯤 연주하다 어리둥절해진 맹호가 무심코 그런 말을 꺼내자, 셋이 소리를 맞추는 걸 지켜보고 있던 까치가 곧장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말이 나오자마자 솔이가 약간 머쓱한 얼굴로 자기 악기인 장구를 만지는 걸 보면, 솔이도 산골에서 했던 것처럼 다른 악기를 제대로 보진 않은 것 같았다. 물론 고개를 돌린 채 장구에 달린 끈만 만지작대는 유라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럿이서 연주할 때 서로를 똑바로 보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이다. 사물놀이 역시 이건 마찬가지이므로, 북이든 장구이든 상쇠, 즉 꽹과리랑 다른 악기들을 제대로 보고 연주하지 않으면 소리가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솔이는 아마 낯을 가려서 그런 거겠지. 차마 다른 한 명인 유라가 왜 제대로 안 봤는지는 생각하기 싫어서, 맹호는 애써 생각을 딴 데로 돌렸다.
하지만, 과연 자기가 유라랑 소리를 잘 맞출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 맹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연주하던 북을 손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물론 본인이 직접 자기 얼굴에 대고 말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 아이, 유라는 자기를 탐탁치않게 여기는 게 틀림없었다. 이런 곳에서 자기가 괜히 폐 안 끼치고 잘 할 수 있을까. 산골에서 연주할 땐 한 번도 품은 적 없는 불안이, 지금 맹호의 마음을 천천히 지배하려 했다.
“근데 유라 너, 호랑이하면 무슨 생각 들어?”
“자, 잠깐만, 까…선생님. 지금 무슨 소리하세요?!”
그렇게 암담해하는 맹호를 두 눈으로 똑똑히 봤을 텐데도, 까치는 갑자기 유라한테 그런 질문을 내던지고 있었다. 이 자식아, 지금 그런 걸 물을 때냐? 지금 당장이라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선생님과 제자’ 사이인 지금 그걸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유라는 잠깐 생각하더니, 이윽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체 왜 갑자기 ‘선생님’이 이런 말을 꺼냈는지 알 수 없단 눈치였다.
“용하고 싸울 수 있는 대단한 존재라고…그런데 왜요?”
“오, 그렇단 말이지?”
그 말과 함께, 까치는 슬그머니 맹호를 보며 씩 웃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맹호는 그저 머리가 멍해질 뿐이었다. 이건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하지만 자긴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닌데.
맹호는 아직도, ‘호랑이의 왕’이란 말을 듣기 턱없이 부족한 존재였던 것이다. 물론 유라한테 자기 정체를 떠벌릴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맹호는 자기 생각을 입밖에 낼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자꾸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걸까. 유라는 자길 칭찬한 게 아닌데, 대체 왜.
“저기, 그러니까 왜냐고…”
“그냥 물어본 거야. 그런데 까치는 어떻게 생각하니?”
“야…가 아니라! 잠깐만요.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결국 맹호는 쓸데없이 이럴 때도 촐싹대는 까치한테 그런 말을 갈겨주는 걸로 부끄러움을 냅다 날려버렸다. 아무튼 저 놈은 어떻게 바뀌든 알맹이는 그대로란 말이야. 왜 저런 놈이 자기보다 훨씬 더 잘난 거지. 나보다 살아온 날도 힘도 훨씬 더 밀리는데.
…과연 자기는 동아리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까지 이르자, 맹호는 갑자기 몸에서 힘이 죽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저절로 몸이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자, 유라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맹호를 잠깐 쳐다봤다. 그리고 맹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혹시 꼬리라도 흔들리지 않았나 걱정되어 엉덩이로 눈길을 돌리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조심조심했는데, 결국 또 유라 앞에서 저지르고 만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유라 쪽으로 고개를 돌릴 용기는 지금 맹호한테 없었다.
아직 3월 말밖에 안 됐는데,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자꾸 같은 반 애들한테 하찮은 모습만 보이고, 이렇게 자기한테 자신이 없어서야…

맹호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노을이 빛나고 있는 창가 쪽으로 눈길을 줬을 때였다. 갑자기 방송용 스피커에서 음악이 나오더니, 다급한 목소리가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2학년 6반 김맹호 학생, 얼른 교장실로, 2학년 6반…
“날 왜 찾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맹호 역시 한시바삐 이 교실을 나서고 싶었다. 물론 다 자기 탓이란 건 알지만, 유라랑 이렇게 데면데면한 사이인데도 죽 같은 곳에 있는 걸 버티기 힘들어서였다.
“뭐, 별일없겠지. 다녀와. 우린 우리끼리 즐거운 시간을 보낼 테니까.”
“…댁은 대체 왜 교사가 된 거유?”
이럴 때도 남의 속을 박박 긁는 까치한테 그런 말을 내던지며, 맹호는 솔이의 인사를 등에 진 채 얼른 교실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복도로 나와 교무실로 가는 맹호한테, 이제야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대체 왜 교무실에서 자길 부른단 말인가? ‘호랑이’ 관련으로 뭔가 일이라도 생겼나? 그게 아니라면 자기가 불려나갈 까닭이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교무실 문을 열자, 맹호는 어쩐지 안쪽 분위기가 이상하단 걸 느꼈다. 자기 정체를 아는 몇몇 선생님들이 무슨 골칫거리라도 생긴 표정으로 맹호를 보고있는 것이다. 순간 자기가 뭘 잘못했나 생각하던 맹호였지만, 그런 까닭이라면 다들 이렇게까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할 리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그런 생각에 혼자 가슴을 졸이는데, 갑자기 교장실 깊은 곳에 있던 나라의 높은 분들 중 한 명이 맹호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진정하려는 듯한 말투로, 맹호한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그, 방금 어떤 여자애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고 합니다. 지금 당장 그 학교에 다니는 호랑이를 옥상으로 보내라고요.”
“…네?”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맹호는 좀처럼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자기보고 옥상으로 가라고? 대체 걘 누구란 말인가, 아니, 대체 자기 정체를 어디서 알게 된 거야?
맹호가 혼자서 멍한 표정을 짓자, 나라의 높은 분도 다 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곤 시간이 매우 없다는 듯, 될 수 있는대로 빨리, 그리고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저희도 누구인지 알아보려 했지만 증거조차 남기지 않아서…아무튼 그 여자애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더군요. 당장 호랑이를 안 내놓으면 이 동네 해님을 영원히 뺏겠다고.”
“그건 또 무슨 뜻이죠? 전 잘…”
“저희도 궁금합니다. 대체 무슨 속셈인지 원.”
아무튼 맹호는 지금, 자기 때문에 큰일이 일어났단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그 여자앤 자기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해’를 뺏겠다니, 대체 이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심지어 지금은 환웅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인데.
하지만 그렇게나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다면, 그 말도 거짓은 아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말도 하더군요. 이 학교에 ‘호랑이의 왕’이 있단 건 잘 알고 있다고. 그런데 그건 무슨…?”
“…네?”
게다가 아렇게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나라의 높은 분은 충격적인 말까지 입에 담았다. 이쯤되면 맹호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호랑이의 왕’이라니, 대체 왜 그 여자애가 그걸 알고있단 말인가. 이건 높은 분들한테도 말하지 않은 거였는데. 만약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냥 한 말일 거예요. 그 여자애는 그, 자신만만한 거 같으니까…”
“아, 그런가요?”
높은 분한테 그렇게 둘러대긴 했지만, 맹호의 등에선 온갖 식은땀이 다 흘러내렸다. 정말이지,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만약 지금 아버지와 잠시동안이나마 얘기를 할 수 있다면, 맹호는 자기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호랑이의 왕’의 힘마저도 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절대 그럴 수는 없겠지만.
그건 그렇고, 자기는 대체 어쩌면 좋을까.
높은 분들은 자기한테 모든 걸 맡기기라도 했는지, 제발 도와달라는 표정으로 맹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분들도 지금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자기같은 존재가 있단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한술 더 뜨는 맹랑한 여자애까지 나타났으니.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지금 가장 당황한 건 아마 맹호였다. 오히려 자기가 어찌된 영문인지 말해달라고 조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 저, 그 여자애가 이렇게 전했다던데요. 혹시 데려오고 싶은 친구라도 있으면 맘대로 옥상에 데려와보라고. 물론 저희는 갈 수 없지만…”
“…그래요?”
뒤늦게나마 높은 분들이 덧붙인 정보를 듣고, 맹호는 점점 더 옥상으로 올라가는 게 망설여졌다. 저 분들 입장에서 보면, 맹호한테 모든 걸 맡기면 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을 터였다. 사실 이 모든 까닭은 결국 맹호한테 있었다. 자기가 정체만 안 들켰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 때문에 높은 분들이 소란을 피울 까닭조차 없었다.
적어도 폐는 안 끼치는 존재가 되려고 했는데.
눈앞이 새까매지는 것만 같았지만,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분명 현실이었다. 아무리 맹호 역시 불안하고 자신이 없어도,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 역시 자기자신인 것이다. 그 여자애 역시, 대놓고 자기한테 오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맹호는 자꾸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한텐 버거울 것 같아서였다. 왜 그 여자앤 자기를 그렇게 바라는 걸까? ‘호랑이의 왕’이라서?  아니면?
“저, 꼭 제가…”
“니가 가야지. 그 애도 너보고 오라했다매. 안 그래?”
“까…서, 선생님?!”
그렇게 망설이다가 약한 소리를 하려던 찰나, 갑자기 등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맹호는 심장이 멎을 뻔했다. 물론 누군지는 안 봐도 뻔했다. 조금 낮아지긴 했지만 목소리는 그대로인 까치였다.
“어, 언제부터…?”
“호랑이를 안 내놓으면 해를 뺏겠다고 하던 데부터 들었는데. 많이 들은 거 맞냐?”
“…다 들었잖아요. 그럼.”
맹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친구한테 이런 꼴까지 보였으니, 이젠 정말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맹호를 재촉하는 건, 자기 등뒤에 있는 까치뿐만이 아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노을이 지던 하늘이, 갑자기 짙은 먹구름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이게 무슨 뜻인지, 맹호는 안 들어도 알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 앤 날 재촉하고 있는 거구나. 해결할 수 있든 없든, 일단 지금은 가야만 한다.
맹호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아주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쉽게 믿긴 힘들었지만, 아무튼 지금은 여기서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 때.
“저기, 맹호가 지금 옥상으로 간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저도 걱정돼서…”
“소, 솔이야…그리고 유, 라?”
그렇게 맹호가 걱정됐는지, 교장실 밖엔 솔이, 그리고 왜 같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라가 가만히 서 있었다. 특히 솔이는 정말로 맹호가 어떻게 될까봐 겁까지 먹은 것 같았다.
“괘, 괜찮아. 별 것도 아닌데 뭘. 잘 갔다올게. 그러니까…”
“아냐. 나도 같이 갈래. 친구는 같이가도 된다 그랬잖아.”
“맹호 너, 설마 날 잊은 건 아니겠지? 같이 가자. 선생님들한테는 오래 전부터 널 봐왔다고 뻥쳤으니까. 어차피 높은 분들도 내가 따라가면 마음놓을 거고.”
“뻥도 참 미묘한 걸 친다. 너도…”
맹호는 그 말과 함께 고개를 돌리며, 이럴 때도 자길 생각해주는 까치를 고맙게 여겼다. 아무리 촐랑대긴 해도, 역시 까치는 예전과 다를 게 없었다. 자기가 조금만 더 남들한테 부끄럽지 않은 존재였으면 좋았을 텐데. 맹호는 그런 생각을 얼른 목구멍에 쑤셔넣었다.
그리고, 맹호는 남은 한 명, 유라한테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알아서 돌리고 있었다.
“…”
유라는 처음 듣는 얘기에 당황했는지, 어쩌면 좋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유라는 대체 어디까지 듣게 된 걸까.
“그, 맹호야. 유라는 맹호가 옥상에 간다는 거밖에 몰라. 나도 거기서부터 들었거든.”
솔이의 말로 볼 때, 아마 ‘친구가 있으면 데려와도 된다’는 데부터 여기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맹호는 이런 상황에서 안심할 수 있는 게 하나라도 생긴 게 무척 기뻤다. 유라한테는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유라한테는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면, 그나마…
하지만 유라는 드디어 마음을 정했는지, 맹호 쪽을 보며 입을 떼어놓았다.
“알았어. 나도 갈래. 니 친구…는 아니지만, 혼자 괜히 신경쓰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나도 속시원한 게 더 편할 거 같고.”
“…어?”
맹호는 이제, 정말로 눈앞이 새하얗게 바뀌려 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자기 정체를 이 애한테 들키는 건 아닐까. 아니, 옥상에 같이 갔다가 괜히 자기 일에 말려들기라도 하면.
하지만 모처럼 유라가 이렇게까지 말해줬는데, 맹호가 그걸 거절할 순 없었다.
“…어.”
결국 그 말을 끝으로, 맹호랑 동아리 일원들은 다같이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맹호는 자꾸만 가슴이 쿵쾅대는 걸 느꼈지만, 그래도 이젠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옥상에 다다른 맹호가 문을 열자.
“어딨지?”
일단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3월 말답게 참으로 싸늘하기 그지없는 저녁무렵의 옥상이었다. 원래는 학생들이 드나들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일까, 참으로 황량하기 그지없는 풍경은 옥상 한복판에 선 맹호를 괜히 불안하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하늘은 여전히 새까맸고, 땅바닥 아래에선 하나둘씩 도시를 밝히는 불빛들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몸이 오싹한데. 본래 호랑이이기에 사람 모습일 때도 추위에 조금 강한 맹호였지만, 그래도 지금은 어쩐지 피부가 살짝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 애는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럴 때가 아니란 생각에 정신을 차린 맹호가, 조심스레 옥상 주변을 살펴보려 할 때.
“나 찾았어?”
“자, 자…깜짝아!”
언제 나타났을까. 맹호 앞, 옥상 저 끄트머리엔 거짓말처럼 여자애 한 명이 가만히 서있었다. 아마 맹호 일행과 같은 나이일 것이다. 어깨까지 오는 짧은 생머리가, 마치 보란듯이 바람에 가볍게 나부끼고 있다. 맹호랑 대보면 그렇게 큰 키도 아닌데, 뭐라 말할 수 없는 압박감이 여기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이 애는 혹시 도깨비가 아닐까.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바뀐 가운데, 맹호는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맹호는 어릴 적, 아버지나 환웅한테서 이 땅에 살던 도깨비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거기에 나오는 도깨비 중엔 물론 어리숙한 녀석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장난기가 많고 남 곯려주기 좋아하는 놈들이 훨씬 더 많았다. 적어도 맹호가 기억하고 있는 얘기를 떠올리면 그랬다.
하지만 이제 도깨비는 이 세상에 없을 텐데. 저 애는 대체 어떤 존재일까?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맹호는 자기 멋대로 ‘도깨비 여자애’라 이름붙인 그 아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여자애는 아무리 생각해도 장난치기 위해 태어난 것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렇게 먼 거리인데도 얼마나 감정이 풍부한지, 입꼬리를 크게 올린 게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자기는 엄청 여유로운지, 4대 1이라는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다리까지 가볍게 올렸다내렸다하며 치마를 펄럭이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애의 오른손에 쥐어진 건.
“…부채? 이 초봄에?!”
“어머. 그건 또 어떻게 알았니? 니 시력은 별로 안 좋을 텐데.”
“아, 아니, 지금은 그, 그게 아니라…”
옥구슬이 시끄럽게 굴러가는 목소리로 여자애가 가볍게 묻자, 맹호는 지금 당장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어떻게든 거둬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호랑이는 원래 그다지 시력이 좋지 않지만, 그나마 사람으로 둔갑했을 땐 1.0 정도는 넘는단 반박이라도 하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그걸 들으면 안 되는 아이 한 명이 있단 걸 잘 알기에, 맹호는 그런 욕심을 얼른 꿀꺽 삼켜야만 했다.
그리고 여자애는 처음부터 맹호의 변명은 들을 생각도 없었는지, 눈깜짝할 순간에 부채를 어깨 위로 들어올렸다. 삼색 태극무늬가 그려진 소고만한 부채가, 어둠 속에서 이상할 정도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계절같은 건 이만큼도 상관없단 것처럼.
맹호가 그 부채에 정신이 팔린 사이, 여자애는 전혀 망설임없이.
“그럼 공격 좀 받아봐야지. ‘호랑이의 왕’ 친구?”
마치 바람을 가르는 것처럼, 부채를 아래로 확 찔러넣었다. 그리고 맹호는 여자애의 그 팔동작과 동시에, 자기 몸이 강한 바람에 밀려 옥상 반대편으로 밀려나고 있단 걸 느꼈다.
이 여자앤 결코 보통내기가 아니었구나. 다른 아이들도 영문을 모른 채 자기처럼 바람에 밀려나고 있는 걸 느끼며, 맹호는 자기가 이 애를 아직까지도 허투루 여겼단 걸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이 여자애의 힘을 온몸으로 느낀 지금, 맹호는 과연 여기에 맞서싸울 수 있을 것인가.
그건 미친 짓이지. 맹호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자기는 ‘호랑이의 왕’이었다. 여자애가 거짓말을 한 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자기는 과연 그 이름에 걸맞은 존재일까? 지금 자기가 가진 ‘호랑이의 왕’의 힘으로, 과연 저 여자애를 제압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맹호는 자기가 옥상 끄트머리에 주저앉아있단 걸 느꼈다. 바로 등뒤에서 낭떠러지나 다름없는 오싹함이 전해지는 걸 느끼며, 맹호는 가만히 자기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도깨비 여자애를 올려다봤다.
“그러니까 내가 이 부채를 우습게 보면 안 된다고 했잖아. 표정에서 확 느껴지던데. ‘고작 저런 걸로?’라 생각했지. 그지?”
지금 맹호 눈에, 이 여자애는 마치 거역할 수 없는 무자비한 거인처럼 느껴졌다. 그 말이 맞았다. 맹호는 마음 속 어딘가에서, 고작 조그만 부채를 든 그 여자애를 묘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 부채가 나랑 얼마나 잘 맞는데. 이걸 무시하면 말도 안 되지. 너도 반격해 봐. ‘호랑이의 왕’이잖아. 그지?”
여자애는 언젠가 영화 속에서 본 악마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였지만, 맹호 입장에선 그저 망설여질 뿐이었다. 이런 여자애가 있다니, 대체 이 도시란 존재는 얼마나 수수께끼같은 곳이란 말인가. 안 그래도 산골에서 온 지 얼마 안 돼 도시가 낯설기만 한 맹호는, 가면 갈수록 자기가 살게 된 이 곳이 그저 무섭기만 했다.
“에잇!”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에, 맹호는 용기를 내어 주저앉은 채 팔을 힘있게 휘둘렀다. 그렇지만 역시나, 자기가 만들어낸 ‘바람’은 도깨비 여자애의 그거랑은 댈 수도 없을 정도로 약했다.
차라리 산들바람이 자기 힘으로 만든 바람보다 더 세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맹호는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굴욕감이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걸 똑똑히 느꼈다. 자기보다 몸집이 작을 게 분명한 도깨비 여자애조차 이 정도로 센 바람을 내뿜을 수 있는데, 그것보다 더 힘이 세야 할 자기는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런 생각을 품은 건 비단 맹호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애걔. 호랑이의 왕이 고작 이 정도야? 원래 호랑이의 왕이라면 부채같은 건 없어도 되는데.”
여자애는 반쯤 맥이 빠진 표정으로, 자기가 받은 ‘산들바람보다 못한 무언가’와 맹호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무척 허무하단 것처럼.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지금 당장 불만을 드러내고 싶은 건 여기에 있는 맹호였다. 맹호는 지금 무척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물론 자기가 매우 부족하단 건 알고 있다. ‘진짜 호랑이의 왕’의 힘은, 분명 지금 맹호가 쓴 어이없는 힘보다 훨씬 더 강할 터였다.
하지만 도깨비 여자애는 자기 생각보다 더 실망했는지, 이런 말과 함께 가만히 말꼬리를 흐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호랑이의 왕 정도면 보통 ‘밤에 사는 존재’ 정도는…”
“밤에 사는 존재?”
갑자기 여자애 입에서 나온 낯선 말에, 맹호는 머리가 어질어질대는 걸 느꼈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앤 분명 보통 존재가 아닐 텐데. 이 앤 대체 뭘까? 뭐기에 자기랑 이렇게 대결을 하려하는 거지? 그리고 방금 만들어낸 이 먹구름은…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말에 당황하는 건 맹호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도깨비 여자애가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만난 뒤 처음 보는 벙찐 표정으로 맹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네가 밤의 세상을 모른단 말이야?”
“어, 모, 모르는데?”
그게 그렇게 놀라운 일인가? 맹호는 속으로 놀랐지만, 그래도 지금은 사실대로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도깨비 여자애도 그 말을 듣더니 잠깐 생각에 잠기다가, 이윽고 옥상 주위에 깔리는 어둠만큼이나 낮게 입을 열었다.
“좋아. 말해주지. 살다보면 여러 가지 생각지도 못한 일이 있으니까 말이야. 바로 지금처럼.”
그 뒤로 맹호가 듣게 된 건 지금껏 살면서 들은 것 중 가장 놀랍고, 믿기 어렵고, 하지만 가장 자기랑 가까운 이상한 이야기였다.

“일단 가장 중요한 걸 먼저 말해줄게. 이 밤은 말이야, ‘무엇이든 다 되는’ 곳이야.”
“…무엇이든?”
도깨비 여자애가 가장 먼저 꺼낸 말에, 맹호는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수밖에 없었다. 그걸 보고 맹호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도깨비 여자애는 아무렇지도 않게 좀 더 자세한 얘기를 시작했다.
여자애 말에 따르면, 이 밤만큼 만능에 가까운 곳, 아니, ‘존재’도 찾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밤’은 항상 많은 이들의 감춰진 마음을 먹고 자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밤에 드러나는 감정들은 너무나도 간절하고 격한 것이기에, 그 힘만 있으면 상식을 뛰어넘은 일이라도 뭐든 이뤄낼 수 있었다. 즉, 많은 이들의 ‘감정’이, 밤이라는 특수한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었다. 비록 자기들은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하겠지만.
그리고 도깨비 여자애는, 그 ‘밤의 세상’을 잘 알고 있으며, 오래 전부터 거기에 사는 사람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온 존재였다. 즉, 도깨비 여자애처럼 ‘밤’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밤에 사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밤에 사는 존재’한테는 보통 사람이 절대 쓸 수 없는 특수한 힘이 있으며, 대개 도시, 혹은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시골 구석에서 보통 사람들 틈에 섞여 지내고 있다 한다. 그리고 도시에 사는 ‘밤에 사는 존재’와 같은 경우, 사람세상 몰래 자기들만의 공동체, 즉 커뮤니티를 이루고 산다고 했다. 즉, 사람세상에서 지내고는 있지만 ‘밤에 사는 존재’들은 자기들 공동체 문화 속에서 사는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었다. 도깨비 여자애 말에 따르면, ‘어떻게 보면 괴짜집단’에 가까운 무리들이었다.
맹호는 자기한텐 익숙지 않은 영단어는 물론, 처음 듣는 얘기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바람에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아무튼 그러한 존재가 이 세상에 있으며, 그들은 사람세상과 떨어져 자기들만의 문화를 일구고 있단 사실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도깨비 여자애가 그 ‘구성원’ 중 하나라는 사실도. 대체 왜 그렇게 되는지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지만.
“물론 누구나 구성원 속에 있는 건 아냐. 일부러 구성원에서 떨어진 ‘밤에 사는 존재’도 있어.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나도 사람이라고 말하긴 좀…거의 비슷하긴 하지만 말이야.”
이걸 보면, 도깨비인지 어떤진 몰라도 이 여자앤 ‘밤에 사는 존재’들 중에서도 이단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실제로 도깨비 여자애 말에 따르면, 자기가 쓰는 힘은 다른 ‘밤에 사는 존재’들이 잘 다루지 못할 때가 많다고 했다. 그 존재들은 도깨비 여자애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 거지. 맹호는 그게 궁금해졌지만, 이런 얘길 길게 해도 머리만 아플 것 같아서 입밖에 내진 않았다.
참고로 다른 밤에 사는 존재들은 적어도 자기보단 훨씬 평범한 가치관을 갖고 있으며, 일단 자긴 상당히 드문 편이라고 도깨비 여자애가 덧붙였다. 물론 사람세상과 사고방식은 상당히 다르지만 말이다. 그래도 자기가 특이하단 건 아나 보네. 맹호는 이 말 역시, 일부러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리고 도깨비 여자애는, 맹호도 자기랑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까닭은 간단했다. 맹호가 ‘호랑이의 왕’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보통 ‘밤에 사는 존재’들과 별격이라 할 순 있겠지만, 어쨌든 본질은 똑같은 거야, 라고 도깨비 여자애는 묘한 표정을 짓고있는 맹호한테 설명했다.
“너한텐 특별한 힘이 있잖아. 나처럼 일개 ‘밤에 사는 존재’가 너처럼 특별한 힘을 지닌 강한 존재랑 맞붙을 기회가 어디 흔하겠니?”
여기까지 와서, 도깨비 여자애는 일이 잘 안 된 게 여전히 마음에 걸렸는지 대놓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게까지 아쉬웠나. 맹호는 도무지 이 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렇게까지 당당한 애랑 싸우면 자기가 질 게 뻔하잖아.
맹호는 그 생각 뒤, 처음 듣는 말들 때문에 머리가 아파지는 걸 느꼈다. 맹호는 지금껏 죽 산골에서 지내왔기에, 도시가 이렇게 자극으로 넘치는 곳인 줄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 그런 거 난 산골에서 들은 적이 없는데…”
“지금 니 눈앞에 있잖아. 당연히 밤에 사는 존재들은 산골보다 도시에 많지. 동료들이 많이 지내는 데가 도심이니까. 그리고 니 정체를 아는 사람이 그렇게 없었음, 설령 거기 살고 있던 ‘밤에 사는 존재’가 있었어도 몰랐겠다 야.”
“그, 그치만 넌 날 아는 거 같은데…?”
도깨비 여자애의 반론에 매우 의기소침해진 맹호가 그렇게 반박해 보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는 모양이었다. 여자애는 여전히 그럴 줄 알았단 말투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거야 이렇게 큰 도시에선 소문이 무지 잘 도니까 그렇지. 시골이야 밤에 사는 존재하고 만나는 거 자체가 어렵겠지만, 도심은 얘기가 다르거든. 네 생각보단 무지 많단다. 물론 그런 대단한 존재하고 맞짱을 뜨고 싶다고 나선 건 나 한 명밖에 없었지만.”
맹호는 이제 어이가 없어진 걸 느꼈다. 그리고 한편으로, 맹호는 자기가 무척 기죽어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대체 도시는 어떤 곳이기에 자길 못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걸까. 자긴 그다지 싸우고 싶지 않은데.
그래서 맹호는 용기를 내어, 마지막으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난 너랑 싸울 생각이 없는데…”
“난 있는데. 호랑이의 왕이 설마 나같은 일개 ‘밤에 사는 존재’한테 겁먹은 건 아니지?”
그리고 도깨비 여자애는, 생각대로 단칼에 맹호의 말을 잘랐다. 아무리 맹호라고 할지라도, 이젠 더 이상 피할 수 없단 건 잘 알 수 있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모든 건 자기 때문이 아닌가. 자기 한 명 때문에 해가 없어진다니, 그건 너무나 큰…
“자, 잠깐만. 대체 넌 어떻게 해를 없앨 수 있는 거야?”
“아, 그거?”
그런 걸 물어야지, 란 말투로 도깨비 여자애가 얼른 맹호의 말을 받았다. 이런 질문에 여유로울 수 있다니, 맹호는 점점 더 이 아이가 알 수 없어졌다.
“난 물론 ‘밤에 사는 존재’지만, 낮에도 어느 정도로는 힘을 쓸 수 있거든. 적어도 자기가 사는 데를 흐리게 만드는 것정돈 할 수 있다 이거야. 일단 한 번만 흐리게 만들면 다음부턴 일사천리고. 밤에 사는 존재가, 설마 흐린 날에 힘이 줄어들 거 같아? 감춰진 마음이 가장 활발할 때 중 하나가 흐린 날인데.”
“…”
맹호가 멍하니 있자, 갑자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럴 때 까치랑 솔이는 끼어들지 않는 주의이니, 지금 움직이는 사람은 분명 한 명밖에 없을 터였다.
“자, 잠깐만. 밤의 힘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왜 너희끼리만 얘기해. 난 무슨 소린지…”
그리고 그 아이, 유라 목소리를 듣자, 맹호는 자기가 하나 까먹은 게 있었단 걸 깨달았다. 당연히 유라는 자기 정체를 까맣게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도깨비 여자애는 몇 번이고 ‘호랑이의 왕’이란 말을 써오지 않았던가.
“아, 맹호가 ‘호랑이의 왕’이란 말을 산골에서 듣고 자랐는데, 그 애가 그걸 알고는 맹호한테 도전장을 내던진 거야. 이제 됐지?”
까치가 일단 이렇게 달랬지만, 유라는 아직도 뭔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맹호는 유라가 그런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단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치만 쟤는 특이한 힘인가 뭔가 쓸 수 있다매요. 아까도 팔을 휘두르니까 뭔가 바람이…”
“맹호한테도 숨기고 싶은 게 하나쯤은 있지 않겠니? 유라 네가 이해하렴. 저 애도 속이 여리니까.”
맹호의 귀엔 이제 까치랑 유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어떻게 된다치더라도, 만약 유라한테 정체를 들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가 너무나 무서웠다. 지금 특이한 힘을 쓴다고 저런 취급을 받으면, 자기 정체를 안 뒤엔 얼마나 자길 피할까.
제발 부탁이니, 도깨비 여자애가 더 이상 허튼소리만 하지 않길.
맹호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생각했다. 이젠 정말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이건 분명 맹호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맹호는, 이상할 정도로 아직까지 결심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 도깨비 여자애 역시, 맹호의 이런 마음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갑자기 맹호 쪽으로 고개를 깊숙이 내밀곤, 어둠 속에서도 알아챌 수 있을만큼 싱긋 웃은 뒤 유라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아, 그래. 넌 본 적이 있네. 여동생이 있지. 그지? 이 근처에서 우연히 같이 있는 거 봤는데. 사이는 별로 안 좋아보이긴 했지만.”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허튼소리하려면 지금 당장…”
지금 맹호가 가장 듣고싶지 않은 폭탄선언을, ‘당사자’인 유라 앞에서 당당하게 내던졌다.
“역시 그랬구나. 근데 만약 내가 이 애 여동생을 건들면, 넌 어떻게 나올 거야? 물론 이걸 그만두게 하려면 날 쓰러뜨려야지. 안 그래?”
“뭐라고?!”
맹호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유라가 옆에서 비명을 지르는 게 느껴졌지만, 마치 그게 생시가 아닌 것만 같았다.
유라 여동생을 건들겠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렇게까지 해서 자기랑 싸우고 싶은 걸까? 대체 자기가 뭐기에 이런 비겁한 짓까지 하는 거지? ‘호랑이의 왕’이란 이름이 그렇게 매력넘치는 거였던가?
게다가 유라가 보이는 반응 역시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물론 갑자기 처음보는 여자애가 자기 동생을 알아보는 건 물론, 그 애를 인질 비슷한 걸로 삼겠다고 말하면 누구나 격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유라는 조금 달랐다. 지금 유라 표정은, 마치 세상의 모든 무서운 것이 다 몰려오는 것처럼 심각했던 것이다.
“도, 동생은 건들면 안 돼. 집안 분위기가 안 좋아서 만날 집에 안 들어가는데, 안 그래도 신경이 날카로운 앤데, 분명히 내색은 안 해도 혼자 많이 외로웠을 텐데…”
“아, 그렇구나?”
유라가 벌벌 떨면서 조심스레 말을 잇는데도, 도깨비 여자애는 고작 그런 말만 돌려줄 뿐이었다. 아무래도 자기 생각을 굽힐 생각은 그다지 없는 모양이었다.
지금 유라는 분명 무척 힘들 텐데. 거기까지 생각하자, 맹호는 속이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지는 것만 같았다. 자기가 조금만 더 믿음직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도깨비 여자애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면, 맹호는 지금 당장이라도 자기를 흠씬 갈겨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절대로 그런 게 아닐 터였다.
“유라야. 괜찮아. 맹호가 꼭 잘해줄 거야. 맹호한텐 그럴 힘이 있으니까.”
“지금은 별로 그렇게 안 보이는데?”
“아냐. 난 알거든. 맹호는 분명 큰 힘이 있어. 그러니까 조금만 시간을 주면 분명 괜찮을 거야. 그지, 맹호야?”
언제 거기로 갔는지, 솔이가 유라를 끌어안은 채 맹호를 가만히 쳐다봤다. 이젠 정말로 날이 많이 어두워졌지만, 솔이의 그 눈빛은 맹호 가슴이 단단히 꽂혀 빠질 줄을 몰랐다.
그래, 지금은 마냥 약한 소리만 할 때가 아니다.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맞서야만 하는 것이다. 솔이 말대로, 조금만 시간을 가지면 분명 도깨비 여자애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 유라도 다시 웃게 될 터였다.
그런 생각 끝에, 맹호는 조심스레, 하지만 분명히 입을 떼어놓았다.
“…도전을 받아들이지. 이렇게 말하면 되나?”
“오호. 그러시겠다?”
도깨비 여자애는 재밌단 말투로 맹호를 봤지만, 맹호는 진심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가치있는 존재가 되어보이지. ‘호랑이의 왕’에 걸맞는 존재 말이야. 그리고 솔이랑 유라 마음을 배신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야 말 거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도깨비 여자애는 한참 그런 맹호의 눈빛을 보다가, 이윽고 근처에 있던 난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 말과 함께,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연기같이 사라져버렸다.
“그럼 그러시든가. 기대해 보지. ‘호랑이의 왕’이기 살짝 모자란 친구.”
맹호는 도깨비 여자애가 사라지고 없는 옥상에서, 한참동안 발을 떼어놓지 못했다. 여자애가 사라진 난간 너머에, 자기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아득하게 펼쳐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