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아침, 비상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다. 원래 비상은 아침에 시간이 남을 때면 이런 식으로 동영상 사이트에서 관심이 있는 영상을 찾아보곤 했던 것이다.
오늘 비상은 모 유명 전화면 스마트폰 리뷰 영상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런 신문물엔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보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한 사람은 조금 드물게도 잎새였다.
그 잎새는 비상이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이런 말을 꺼냈다.
“비상아. 오늘 하루 비워라.”
“또 왜?”
비상이 묻자, 잎새는 곧장 이렇게 대답했다. 그 대답은 비상의 짐작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강산이가 나라 씨랑 만난단다. 오늘은 돗자리 펴야지. 안 그래?”
“뭐?”
비상이 되묻자, 잎새는 아주 신나 죽겠단 말투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줬다. 그 말에 따르면, 자기가 믿는 엄청 대단한 정보통 덕분에 강산이 나라와 오늘 만나기로 했단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미 강산한테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한 뒤였다(잎새 말에 따르면, 물론 놀리려 전화한 것도 있다고 했다).
그 강산의 말에 따르면, 갑자기 그 사람(나라)이 밑도끝도없이 전화해선 만나자 했다면서, 이건 맞짱이나 다를 게 없다고 투덜댔다는 듯했다. 하지만 잎새는 그 말 뒤, ‘그런 척하는 데이트지 뭘’이라며 낄낄대기 시작했다. 사실 아무리 강산이 뭐라 말한들, 저 형들이 그 말대로 들어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낄낄대는 걸 겨우 멈춘 뒤, 잎새는 이런 말을 꺼냈다.
“아무튼 그러니까 강산이 놀리러 가자. 어때?”
“그러든가.”
만약 비상이 안 간다 말한다 한들, 저 형이 그대로 내버려둘 리는 없었다. 속으로 조금 짚이는 것도 있어서, 비상은 전화를 끊은 뒤 밖으로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그렇게 비상이 약속한 곳으로 가자, 거기엔 강산과 동갑인 붉은 밤 연장자들, 즉 잎새와 별밤이 먼저 다다라있었다. 물론 오늘의 주인공인 강산의 모습만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마치 소풍가기 전날 초등학생이라도 되는 듯한 두 사람의 표정을 보며, 비상은 참으로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물론 오늘 이런 광경을 처음 본 건 아니었지만.
“그 말 진짜예요?”
일단 물어볼 건 물어봐야겠단 생각에, 비상은 그 초등학생 중 한 명인 별밤한테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별밤은 물론, 옆에 있던 잎새까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이런 데 뻥을 쳐봤자 무슨 재미가 있겠냐?”
사실 이 형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 형은 너무 지은 죄가 많았던 것이다. 특히 잎새는 강산한테 당한 게 넉넉잡아 한 보따리는 될 터였다. 물론 강산이 이 말을 들으면 화내겠지만.
참고로 파랑의 모습이 안 보이는 건 사정 때문이라고 했다(잎새의 말에 따르면). 잎새도 파랑과 같이 다니면 좋겠단 생각에 전화로 어떻게든 꼬셔보려 했지만, 파랑 자신도 바빴을뿐더러 ‘내가 그런 자리에서 강산이 쫓아다니면 죄책감이 들거든’이란 말도 나와서 그만뒀다고 한다. 그렇긴 하지만 파랑은 강산과 퍽 친한 사이라서인지, ‘근데 강산이 너무 괴롭히진 말고’란 말을 들었다고 잎새는 덧붙였다. 아마 파랑도 이 형들이 그렇게 해주리라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겠지만.
이런 형들의 모습을 보며 비상이 반쯤 질려있을 때, 누가 옆구리를 탁 치는 느낌이 들었다. 오른쪽을 돌아본 비상은, 그러고 보니 자기가 잊어버리고 있던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걸 깨달았다.
거기엔 목을 비상 쪽으로 숙인 채 현이 가만히 서있었다. 원래 비상보다 몸집이 작아서인지, 만약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죽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었겠단 생각이 들었다.
“네가 찧었니?”
비상의 말에, 현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데서 현과 만날 줄은 생각지 못했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이렇게 이상한 자리엔 현이 매번 나타났던 것같기도 했다. 이런 볼거리는 다시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비상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 연장자 형들은 사리사욕(강산 및 나라 구경)에 정신이 없을 것이므로, 비상이 현을 지켜보고 있는 게 나을 듯했다.
그 때, 비상은 어쩐지 자기 눈에 익지 않은 사람이 여기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틀림없이 항상 보던 연장자들인데, 그 중 낯익지 않은 얼굴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틀림없이 처음보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빤히 쳐다보는 것도 예의가 아니란 생각에, 비상은 일단 눈길을 거뒀다. 자기가 모르던 연장자가 한 명 더 있었던가, 란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요즘 알고지내게 된 사람이 부쩍 늘었으니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애초에 비상은 놀이가 시작된 지 두 달이 지났는데 연소자들도 다 알지 못했던 것이다. 연장자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지만, 자기가 모르는 연장자가 없으리란 장담은 할 수 없었다.
비상이 그런 생각을 했을 때였다.
“어, 강산이다!”
잎새의 말에 그 쪽을 돌아보자, 거기엔 오늘의 주인공, 강산이 뚱한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미 비상 일행이 여기 모여있단 건 알고 있었는지, 강산은 오늘따라 뭐라도 씹은 듯한 모습이었다.
“크, 크, 크하하하하!!”
물론 이 연장자 형들이 그런 걸 생각할 리가 없었다. 강산이 눈앞에 나타나자마자, 잎새는 곧바로 이런 웃음소리와 함께 자지러지기 시작했다. 별밤도 자지러지진 않았지만 킬킬대는 웃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강산이 이성과 따로 만난다. 그것도 나라 씨와. 이 강력한 상황에선 웃음을 참는 게 꽤 어려웠던 듯했다.
“이놈들이 대체 무슨 꿍꿍이야?”
이런 상황에서 기분이 좋을 리 없는 강산은, 비상 일행 가까이 오자마자 대뜸 그런 말부터 내뱉었다. 여전히 잎새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상태였다. 사실 저 형은 강산한테 맞기 전까진 웃는 걸 그만두지 않을 것같은 사람이었다.
잎새는 이제 좋아죽겠단 표정으로 강산을 보며 놀리듯 이런 말을 꺼냈다.
“너 말이야. 나라 씨랑 오늘 어디 간다매?”
“저 놈자식. 아까 물어본 건 누구냐?!”
강산도 화를 내고 있긴 했지만, 이제 반쯤 포기한 듯한 표정이었다. 상대방이 나라인 만큼 강산도 마음의 준비를 하느라 바쁘기 때문일 터였다. 사실 가만히 생각하면 강산한테 가장 많이 당한 사람은 잎새였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어이가 없어질 지경이었지만, 본인은 강산을 놀려먹을 수 있어서 아주 신난 게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만나기로 했나보지, 친구? 이제 슬슬 시간 아닌가?”
“이 놈자식. 허튼 짓만 해봐. 그냥 확.”
“크하하하. 지금 너한테 그럴만한 여유가 있을까. 응?”
잎새가 더더욱 놀리듯 이런 말을 꺼내자, 강산은 정말 열받는다는 듯 주먹을 꽉 쥐면서도 핸드폰을 흘깃 보더니 ‘두고 보자’란 표정으로 비상 일행을 본 뒤 등을 돌렸다. 잎새 말대로 조만간 나라와 약속한 시간인 듯했다. 그건 그렇고 저 형을 이렇게 따라다닐 셈인가. 비상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잎새가 아주 밝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뗐다.
“자, 우리는 오늘 저 놈을 쫓아다니는 거다. 알았지?”
“어떻게?”
비상은 정말로 어이가 없어졌지만, 다른 연장자들은 잎새의 말이 당연하기라도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물론 이런 자리에 그다지 빠지지 않은 현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입이 귀에까지 걸려있는 잎새를 보며, 비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뭘 어떻게야. 쫓아다니는 거지. 물론 들키면 안 되고.”
“나라 씨한테 맞는 건 그렇게 무서워?”
“야, 비상아. 우린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니. 이건 하늘이 바라는 일이래도. 그리고 말인데…”
그렇게 변명을 해대던 잎새는 뭔가 깨달았단 표정을 짓더니, 다시 한 번 비상 일행을 둘러봤다. 그리고는 무슨 비밀결사 회의라도 하는 것처럼, 소리를 죽인 채 이런 말을 꺼냈다.
“야, 우리가 이렇게 중대한 일을 하는데 무슨 이름이라도 지어야 할 거 같지 않냐?”
“이번엔 또 무슨 이름을 짓는데?”
“이건 역사에 남을 일이니까 하나 지어야지. 뭐…너무 큰 것도 재미없고, 연애참견단 어떠냐?”
비상이 어이없단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잎새는 신난 듯 주위를 둘러보며 이렇게 물어왔다. 별밤은 그 말을 듣고 킬킬대더니, 이윽고 터져나오는 웃음을 어떻게든 참으며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야, 앞에 말 하나는 바꾸자. 저 둘은 내가 볼 때 연애로 안 빠져도 재밌는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그냥참견단 어떠냐?”
“야. 그걸로 가자. 어떻게 거기에 그냥이란 말을 넣냐?”
별밤의 말에 다시 웃음보가 터진 잎새는 낄낄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저기의 뭐가 그렇게 재밌다는 걸까. 저 사람들이 왜 웃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으므로, 비상은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 사람들은 지금 강산의 기역자만 나와도 미친 듯이 웃어댈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해서, 그 그냥참견단이란 엉뚱한 비밀결사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비상이 바란 바는 결코 아니었지만.
나라가 올 때까지 저만치에서 기다리는 강산을 보며, 연장자 일행은 심심풀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이야기는 한참 다른 데로 새다가, 대체 왜 나라 씨가 강산을 만나자고 했을지로 바뀌었다.
“그런데 내가 볼 땐 나라 씨가 강산이를 좋아하는 거 같다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신난 사람인 잎새는, 별밤을 보며 진지하게 그런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런 잎새가 웃겼는지, 별밤은 놀리듯 이렇게 말했다.
“야, 그 분이 뭐가 모자라서 강산이를 좋아하냐?”
“니가 사람 속을 어떻게 아냐? 강산이도 좋은 놈이야. 상성이 맞는 사람한테는.”
“자기네들은 무척 여유가 있단 말툰데?”
도무지 그냥 보고있을 수는 없어서, 결국 비상은 그 둘의 말에 끼어들었다. 잎새는 잠시 비상을 쳐다보다가(지금 잎새와 별밤은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말과 함께 다시 강산한테로 눈길을 돌렸다.
“솔직히 우리도 할 말은 없지. 그냥 강산이가 저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재밌어서 그런다.”
그 말을 들은 비상은, 아까 잎새가 강산을 놀릴 때보다 더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만난 지 이제 갓 두 달쯤 지난 사이인데, 저렇게나 강산한테 관심이 있다는 게 신기하게까지 느껴졌던 것이다. 그게 이상하다기보다, 저 둘은 참 상성이 좋아보인다라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말을 꺼내면 둘 다 고개를 휙휙 젓겠지만.
그 말을 가만히 듣던 별밤은, 불쑥 둘을 보며 이런 말을 꺼냈다.
“니가 말한 그런 까닭 때문이 아니라 치더라도, 나라 씨가 뭘 생각하고 있는 건 맞는 거 같다.”
“무슨 생각인데?”
“지금까지 여러 일이 있었잖냐. 저 둘 사이에. 비상이하고도 일이 좀 있었고.”
“야, 다 너 때문이었냐?!”
별밤이 잎새를 보며 그렇게 대답하자, 갑자기 비상은 주위에 있는 연장자 및 현의 눈길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갑자기 왜 또 이렇게 된 거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길 보는 잎새한테 비상은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그럼 니 이름은 왜 나오냐? 이게 다…”
“야, 잎새야. 잠깐만 가만히 좀 있어라. 강산이 움직인다.”
“진짜냐?”
잎새가 되묻자, 별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강산이 저 쪽으로 움직이는 걸 보면, 이제야 뭔가 좀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잎새도 그걸 봤는지, 곧장 자세를 고쳐먹고는 이렇게 당부했다.
“시꺼. 이 놈들아. 지금부터 작전 시작이다. 알았냐?”
아까부터 가장 떠들던 사람이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오늘은 참 어이가 없어지는 날이란 생각을 하며, 비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다시 강산 쪽을 보자, 아니나다를까, 나라가 저만치에서 이리로 걸어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온 다음에 알았지만, 나라는 아까 강산만큼이나 뭘 씹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몸집이 평소보다 작은 걸 보면, 나라는 지금 ‘다른 모습’인 게 틀림없었다. 저럴 때 나라는 평소보다 훨씬 더 기분이 안 좋단 걸 잘 알고 있는 비상은, 갑자기 저 형, 즉 강산이 조금 불쌍하게 느껴졌다. 연장자들도 같은 생각인지, ‘강산이 쟤 오늘 죽었다’라며 안타깝단 말투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물론 나라는 누가 강산을 따라다니고 있단 걸 알 리 없으므로(알았다간 더 큰일날 게 뻔하므로), 나라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자 비상 일행은 얼른 그늘진 데로 몸을 숨겼다. 아무리 재미난 걸 좋아하는 잎새라 한들, 나라한테 들키고 싶진 않을 터였다. 그늘진 곳이긴 했지만, 나라가 강산 앞에 다다랐단 건 여기서도 눈에 잘 들어왔다.
“괘, 괜찮아요?”
“괜찮아요.”
강산도 나라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는지, 이런 말을 먼저 입에 담았다. 나라는 마지못해 대답하면서도, 강산한테서 슬그머니 눈길을 돌렸다.
쉽게 말해서, 지금 분위기는 무척 어색했다. 서로 싫어하는 분위기도 아니었지만(뭐 씹은 표정이라곤 해도, 나라는 그다지 화나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좋은 분위기도 아니었다. 저 쪽 분위기가 저러다 보니, 멀찌감치 떨어져서 이걸 보던 비상 일행도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잠시 아무 말도 없는 시간이 지나간 뒤였다.
“…기다렸어요?”
마치 강산을 살피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라는 슬그머니 그런 말을 꺼냈다. 강산도 민망했는지, 눈길을 돌리면서도 느릿느릿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 그 쪽이 오라면서요.”
“저 놈 또 시작했다. 크하하.”
자기가 숨어있다는 걸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잎새가 그런 강산을 보면서 킬킬대고 있었다. 물론 그건 강산을 놀리는 것만이 아니었다. 이런 짓을 하고있긴 하지만, 잎새는 나름대로 강산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잎새가 그렇게 기뻐하는 가운데, 나라는 하던 말을 이어갔다.
“별 건 아니고, 우리도 지금까지 쓸데없이 말싸움한 거 매듭을 짓잔 생각에서…”
“매듭?”
“근데 그거 그 쪽이 먼저 걸어온 거잖아요.”
별밤이 이상하단 듯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강산은 조금 못마땅하단 말투로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나라는 그 말을 듣고 화가 났는지, 아까보다 조금 더 가시돋친 목소리로 입을 뗐다.
“누, 누가 나만 먼저래요?! 맨 처음에 먼저 그 쪽이 말 걸었잖아요. 가만히 앞에서 걸어가는 사람한테!!”
“내, 내가 언제 그랬다고…”
“잠깐만. 야, 저 둘 따로만난 적이 또 있었어?”
“난 모르겠는데.”
둘이 평소에 그렇듯 서로 싸우는 가운데, 그 말이 그렇게 놀라웠는지 잎새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비상을 돌아봤다. 비상이 그렇게 대답하자, 잎새는 여전히 수상쩍단 표정을 지으면서 다시 강산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사실, 비상도 여기에 관해선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저 둘이 자기가 모르는 동안 따로 만난 적이 있단 건 비상 역시 지금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볼일은 뭔데요?”
이제 싸우는 것도 지쳤는지, 강산은 한숨을 쉬며 그런 말을 꺼냈다. 나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드디어 결심이라도 한 표정으로 그 말에 대답했다.
“아침에 말했잖아요. 그냥 돌아다니자고.”
“갑자기 왜요?”
“저게 이성한테 할 말이냐?”
강산의 말에, 연장자 두 명은 짜고치기라도 한 것처럼 같이 킬킬대기 시작했다. 다른 연장자들이 이렇게 킬킬댈 떄, 이름모를 연장자만 잎새 및 별밤한테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둘을 지켜볼 뿐이었다. 자기가 아는 연장자 중 이런 사람이 있었던가. 비상이 잠시 그런 생각을 할 때, 나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어, 없는 건 아닌데 그런 말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요?”
나라가 어이없어하는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연장자 형들 말대로, 방금 강산이 한 말은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 어울리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비상 눈엔 나라도 만만치 않았다. 갑자기 사이가 안 좋은 강산을 불러내놓고서(전에 만난 적이 몇 번 있는 듯했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는 사람도 드무리라 생각한 것이다.
나라도 비슷한 걸 느꼈는지, 갑자기 ‘에라 모르겠다’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이 말과 함께, 가만히 서있던 강산을 마구잡이로 끌고가기 시작했다.
“아, 아무튼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할 테니까 그냥 가요.”
“자, 잠깐만. 이게 뭐하는…잠깐만!”
이 밑도끝도 없는 상황에서, 강산은 단지 그 말만을 남긴 채 나라한테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강산만큼 몸집이 있는 인물이 지금 나라처럼 몸집이 작은 편인 여성한테 질질질 끌려가는 건 참으로 우스운 광경이었지만, 지금 숨어있는 상황이었기에 연장자들은 크게 웃지도 못했다. 물론 안 웃을 수는 없었으므로 소리를 죽여 킬킬대고 있었지만.
그렇게 소리를 죽여서 웃다 말고, 잎새는 연장자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 무슨 일나는 거 아니냐?”
“그것보다 우리 주머니 걱정부터 해야 할 거 같은데. 친구.”
“지갑?”
자기 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힐끗 쳐다보던 별밤을 보며, 잎새가 이상하단 듯 되물었다. 하지만 이내 대략 짐작한 듯, ‘아, 맞다’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즉, 저 둘이 돌아다니는 만큼 비상 일행도 돈을 써야 한다는 말이었던 것이다(몰래 따라다니고 있으므로). 잎새는 ‘젠장. 그 생각을 못 했네…’라 투덜대면서도, 이런 말과 함께 다시 눈빛을 불태웠다.
“그치만 강산이 저 놈 따라다니는 건 그만둘 수 없지. 안 그러냐?”
“뭐가?”
비상은 그런 말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런다고 그만둘 사람도 아니었으니, 지금 비상이 할 수 있는 건 그런 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비상 일행이 몰래(적어도 나라 입장에선) 강산을 따라다니고 있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 그 금빛 밤 사람, 강산이한테 막말한 까닭이 있더라구.”
“뭐죠?”
별밤의 말에, 비상은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 어제 그 금빛 밤 사람이란, 운없게 강산한테 걸린 바로 그 연소자임이 틀림없었다.
“그 친구가 빠른 생일이었나 봐. 그러니까 학창시절 땐 같은 학년에 다녔단 말이지. 금빛 밤에선 연소자라 하고 있는데, 죽었다 깨어나도 강산이한테 존대하긴 싫었나 봐.”
거기까지 말한 뒤, 별밤은 혼자 킬킬댔다. 비상은 그러고 보니 거기, 즉 빠른 생일에 관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단 걸 깨달았다. 만약 그 말대로라면, 강산이 아니꼽게 보였던 게 틀림없는 금빛 밤 연소자의 마음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비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별밤이 이번엔 이런 말을 꺼냈다.
“뭐, 나도 빠른 생일이거든.”
“그래요?”
이건 또 비상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방금 그 이야기는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것이었던가. 별밤은 ‘그럼’이라며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여전히 킬킬대는 웃음을 참지 못한 채.
“강산이 그 놈한테 처음 존대했던 까닭이 대체 뭐였던 거 같니?”
그러고 보니 맨 처음, 저 형은 강산한테 존대를 썼을 터였다. 지금 생각하면 틀림없이 묘했지만, 그 땐 상황도 상황이라서 그냥 넘어갔던 기억이 있었다.
“그 때도 강산이 저 놈이 얘길 들은 다음에 ‘야, 너 말 까’라고 그랬거든. 그래서 지금처럼 된 거지.”
“강산이 형이 그 때도 화냈어요?”
비상이 이렇게 묻자, 간신히 웃는 걸 멈췄던 별밤은 다시 킬킬댔다. 그리고는 마침 잘 물어봤다는 듯, 아까보다 더 신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이렇게 보면, 마치 잎새가 둘로 는 것같은 느낌이었다.
“암. 엄청 화냈지. ‘신발. 나랑 같은 학년이었는데 지금 존대를 한다고? 너 얼른 말 까라. 징그럽게 이게 뭐하는 짓이냐?’라고.”
어쩐지 비상은 그 때 저 둘이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지 그림이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특히 알아먹기 쉬운 성격인 강산의 모습은 두말할 것도 없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강산이 들으면 무척 화내겠지만.
“그래서인진 모르겠는데, 솔직히 연소자 연장자란 개념도 대충이잖냐. 딱히 뭐 잘난 척하려고 만든 게 아니라, 그냥 재밌다고 의영이 형이 만든 게 다른 밤으로 퍼진 거지. 그러니까 누가 연장자든 연소자든 대충 생각해도 되는 거야. 나만해도 원래라면 비상이 너처럼 연소자였는데, 강산이 저 놈이 ‘니가 뭐라고?!’라고 윽박질러서 연장자에 든 거거든.”
그렇게 말을 끝낸 뒤, 별밤은 그 때를 떠올리기라도 하는지 살짝 웃음을 머금었다. 저 표정으로 볼 때, 이 형은 정말 그 때 그 일이 즐거웠던 듯했다.
“비상이 너도 나이같은 건 너무 신경쓰지 마. 나이란 것도 모호하기 짝이 없는 거거든. 아마 다른 연장자들도 그렇게 여길 거다.”
다시 비상을 바라보며, 별밤은 그런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을 들으며, 비상은 바로 옆에 있는 어떤 연장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 식으로 비상이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비상은 아무렇지 않게 앞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을 보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거기엔 어디서 많이 본 여자애 두 명이 길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른 연장자들은 강산 및 나라를 따라다니는 데 정신이 팔려서 아무도 이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물론 그 둘은 강화점에 있는 여자애, 그리고 천사였다. 가만히 생각하면 저 둘이 따로 만나 얘기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천사가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여자애와 같이 있어도 저렇게 자연스럽다는 데 희한하단 생각을 하며,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둘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둘은 조금 멀리 떨어져있었지만, 비상은 흐릿하게나마 저 둘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책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마지막 장면만 그릴 수 있으면 된다’ 같은 말이 있잖아요. 주로 상상을 다룬 책에서.
-그 말이 좀 이상하단 생각…
-그것만으로는 모자라…
물론 ‘알 것 같다’고는 해도, 저 둘이 뭘 말하려 하는지까지 알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저 둘은 저런 식으로 가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구나, 라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둘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건 결코 아니었지만, 일단 이 일은 나중에 생각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걷다보니, 비상은 눈앞에 오늘의 첫번째 목적지가 나타났단 걸 깨달았다. 이럴 때 빠뜨릴 수 없는 곳, 바로 영화관이었다.
“저 둘 진짜 사귀는 거 아니냐?”
지금 개봉한 영화를 확인하는 강산 및 나라를 보며, 잎새는 미심쩍단 듯 그런 말을 입에 담았다. 아마 둘이서 만나 뭘 할지 고민하다 대충 이거라도 하자, 란 생각에 영화를 골랐겠지만, 비상은 그냥 아무 말도 않기로 했다. 모처럼 흥분하는 저 형을 가라앉히는 것도 좋지 않다 여겨서였다.
강산이 여전히 뚱한 표정인 가운데, 나라는 그나마 생기가 좀 있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뭘 볼지 고르고 있었다. 그렇게 영화를 고르던 나라는, 언뜻 봐도 무섭게 생긴 공포영화 앞에 서선 강산을 뒤돌아봤다.
“…이거 볼래요?”
“오, 나라 씨 공포영화 보시나 보다. 난 도무지 못 보겠던데.”
자기가 저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은 이만큼도 안 하고 있는지, 잎새가 혼자서 그렇게 감탄하고 있었다. 그건 둘째치고, 강산은 이 말을 듣자마자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얼굴이 싸해졌다.
“뭐, 뭘 본다구요?”
“이런 거 못 보세요? 그럼 다른 걸로…”
강산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나라가 그런 말과 함께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렸다. 하지만 강산은 자존심이라도 상했는지, 갑자기 이런 말과 함께 손가락으로 방금 그 영화를 가리켰다.
“내, 내가 이런 거 못 볼 거 같아요? 이걸로 해요. 알았죠?”
“아니, 이런 거 못 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저는 딱히…”
“아무튼 이거 봐요. 알았죠?!”
나라가 수상쩍단 듯 그렇게 말하거나 말거나, 강산은 그 말과 함께 표 뽑는 기계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걸 멀찍이서 보던 연장자 일행은, 이 어이없는 상황에 소리를 죽여 낄낄대고 있었다. 잎새는 그렇게 강산이 웃겼던지, ‘저거 설마 못 본단 게 민망해서 그런 거냐?!’라며 별밤한테 말을 거는 중이었다.
사실,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강산이라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이야기인 건 틀림없었다. 물론 그게 바람직하단 건 결코 아니었지만. 아무튼 강산이 고집을 부려 이렇게 된 것이니, 그 책임도 강산이 지면 될 터였다.
이렇게 강산과 나라가 공포영화를 보게 되자, 물론 비상 일행도 그걸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비상은 그다지 문제가 없었지만, 잎새는 예매하기 전 일행들을 둘러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혹시 못보는 사람 있냐?”
“잎새 너?”
“야, 그건 일단 둘째치고. 그럼…”
이제 반쯤 포기한 표정으로 표를 산 뒤, 잎새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마 강산이 저 놈 때문에 공포영화를 스스로 봐야한다는 게 억울한 듯했다. 그런데도 이 그냥참견단을 그만두지 않는 건 참 저 사람다웠지만.
“저 자식. 내일 만나기만 하면…”
그렇게 투덜대는 잎새를 비롯해서, 그냥참견단 일동은 모두 영화관 안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먹을 건 중요했는지, 잎새의 손엔 콜라 및 팝콘이 푸짐하게 들려있었다. 가면 갈수록 이 사람의 속은 알 수 없었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비상은 연장자 대부분의 속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렇게 광고가 지나가고, 드디어 문제의 영화가 시작되려 할 때였다.
“우, 우악!”
갑자기 그런 소리가 옆에서 들려오는 바람에,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그 쪽으로 돌렸다. 이제 영화도 시작될 즈음이라서, 주위는 온통 새까맸다. 그러고 보니 자기 왼쪽에서 뭔가 슥 튀어나오는 듯한 느낌은 들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비상의 눈에 뭐가 보일 리는 없었다. 그렇긴 하지만,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잎새라는 건 비상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비상의 왼쪽엔 현이 자리잡고있었을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비상은 잎새가 왜 비명을 질렀는지 알 것 같았다. 그거야 자기 오른쪽에서 갑자기 뭔가 툭 튀어나오면 기겁하는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앞으로 자기가 공포영화를 볼 거란 사실을 알고 있다면 더더욱.
이게 무서우면 앞으로 나올 영화는 대체 어떻게 볼 생각인지 캐묻고싶어진 비상이었지만, 일단 지금은 그냥 넘기기로 했다. 참고로 당사자인 현은 무척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영화가 끝난 뒤.
“대체 사람들은 왜 이런 걸 돈주고 사서 보냐?!”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잎새는 바로 일행을 돌아보며 그렇게 외쳐댔다. 별밤은 그런 잎새가 재밌는지, 영화가 끝난 뒤부터 지금껏 죽 킬킬대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잎새가 질러댄 비명을 들었으니 그러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니가 모르는 재미가 있으니까 그렇지. 친구.”
“솔직히 무서운 건 진짜 안 되겠다. 어우…”
이젠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잎새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현은 별 생각이 없었는지, 그저 하품만 몇 번 할 뿐이었다. 한편 이름모를 연장자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은지, 아까부터 죽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고 있었다. 잎새는 둘째치더라도 이 분 역시 그리 편한 자리는 아니었던 듯했다.
물론, 처음부터 기겁했던 강산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젠자자아아앙. 으아아아아악!!”
영화가 끝난 뒤부터, 강산은 참 눈에 띄게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남들이 돌아보거나 말거나 그딴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단 모습이었다.
나라는 옆에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강산을 보고 있었다. 대체 그럴 거면서 왜 보자고 했냐는 표정이었다. 그 역시 무척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비상은 바로 근처였던 잎새는 물론, 조금 떨어져있던 강산의 비명 및(조용히) 날뛰는 모습을 어둠 속에서 이미 봤던 것이다. 그 때 그렇게 비명을 질러놓고 아직도 기운이 남아있을 줄은 비상도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엄마…이런 젠장…”
강산은 여전히 무서운 걸 자기 스스로 보자고 한 게 분한지, 그런 말까지 중얼대며 영화관을 나서고 있었다. 나라는 제발 이 사람하고 일행인 걸 들키지 말게 해달라는 표정으로 조금 멀찌감치 강산을 따라갔다.
그렇게 해서, 비상을 비롯한 연장자 일행만이 영화관에 남게 되었다.
“자, 우리도 쫓아가야지?”
잎새의 말을 시작으로, 비상 일행은 영화관을 나와 강산 일행을 다시 쫓아갔다. 강산 일행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윽고 근처에 있던 패스트푸드점으로 발길을 옮겼다. 물론 비상 일행도 조금 늦게 따라들어간 뒤, 강산 일행한테 안 들킬 법한 구석에 자리잡았다. 이젠 숨어봤자 별 소용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나라한텐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특히 잎새는 그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길 때마다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기가 먼저 하자고 해놓고선 대체 이게 무슨 짓인지 비상은 다시 캐묻고 싶어졌지만, 그 역시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마침 사람이 그렇게 많지도 않아서, 둘의 얘기를 엿듣는 데엔 그다지 문제가 없었다. 물론 그건 강산의 목소리가 크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강산은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아까부터 화를 참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나라는 이제 저 사람이 뭘 하든 놀랄 것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득도하셨는데. 벌써.”
그런 말과 함께, 잎새는 대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아까까지 있던 일들을 생각하면 놀랄 것도 아니었다. 아마 다른 연장자들도 비상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아무튼 저만치에 앉은 강산 일행은, 조금 늦긴 했지만 이제야 뭔가 주문하기 시작했다. 나라만 자리에 앉아있는 걸 보면 강산이 대신 주문하기로 한 듯했다. 잎새는 그게 그렇게 희한했는지, ‘강산이 쟤가 산 건가?’라 혼자 중얼대고 있었다.
그 때, 주문하러 다녀왔던 강산이 다시 돌아왔다. 이것저것 담긴 받침을 손에 든 채였다.
“젠장. 왜 가위바위보를 져서…”
“크하하. 그럼 그렇지.”
강산이 이렇게 불만을 드러내자, 잎새가 기다렸단 듯 그렇게 킬킬댔다. 나라는 그 말이 열받았는지, 강산을 반쯤 노려보고 있었다.
“그럼 가위바위보를 잘 하든가요.”
“그게 맘대로 되면 진작 그랬겠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강산은 먼저 나라 몫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참고로 강산이 주문한 건 모든 이의 짐작을 저버리지 않은 모 대형 햄버거세트였다. 이렇게 보면, 이 사람은 누구와 있든 참으로 한결같았다.
그 뒤, 잠시동안 둘은 아무 말도 없이 앞에 있는 걸 먹기만 했다. 몰래 다른 이들의 먹을 걸 사온 잎새도 ‘우린 여기 뭐하러 온 거냐?’라 말하면서 자기 몫인 햄버거를 먹고 있기만 했다. 아무리 강산을 따라다니는 일이 재밌다고 해도, 지금은 배가 고플 때였던 것이다. 물론 비상도 자기 몫인 햄버거를 입에 대고 있었다.
그 때, 저 쪽에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엔 나라의 목소리였다.
“근데 대체 그 영화는 왜 보자고 했어요?”
물론, 왜 나라가 이런 말을 했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즉, 나라는 보지도 못할 거면서 왜 강산이 공포영화를 보겠다고 졸랐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건 나라뿐만 아니라, 여기에 있는 연장자들도 궁금해할 이야기였다.
강산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잠시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다가 이윽고 입을 뗐다.
“내, 내 맘인데 왜요?”
“풉!!”
이 말을 듣자, 잎새는 콜라를 마시다말고 사레에 걸린 나머지 켁켁댔다. 이건 미처 생각지 못했단 표정이었다.
“쟤, 쟨 초딩이냐?!”
그 말 역시 전혀 이상한 건 아니었다. 비상의 귀에도 저 말은 참으로 어이없게 들렸던 것이다. 즉, 비상도 잎새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별밤조차 탁자에 얼굴을 묻고 낄낄대는 가운데, 현은 아무 관심도 없는지 아무도 안 먹는 감자튀김을 슥슥 입에 담기 시작했다.
연장자 일행이 이런 상황인데, 나라의 표정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강산은 뭐라도 다른 이야깃거리가 없나, 란 표정으로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다, 이윽고 뭔가 떠올랐는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이 역시 비상 눈으로 보면 무척 뚱딴지같은 소리였다.
“이래서 공포영화는 안 된다니까. 저런 걸 보여주면 현실감각만 썩어가요. 생각을 좀 해보자고. 이상한 정육면체 속에 갇히고, 텔레비전에서 귀신이 나오고, 무슨 장난감에서 괴물이 튀어나오는 그런 게 현실에서 일어날 거 같아?!”
“뭐라는 거예요?”
이 말에 연장자들은 더더욱 웃음을 참지 못한 채 서로를 붙잡아가면서 낄낄대고 있었다. 아무튼 강산이 공포영화를 못 본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걸 왜 저런 식으로 말하는지는 비상도 모르겠지만. 심지어 강산만큼이나 공포영화를 못 본다는 게 오늘 밝혀진 잎새도, 이런 말과 함께 눈물까지 흘리며 웃고 있었다.
“마, 마지막 저거 무서운 영화였냐?”
그걸 보며, 비상은 속으로 저 형과 공포영화는 같이 안 보는 게 낫겠다 생각했다. 방금 그렇게까지 공포영화를 무서워하던 잎새가 이럴 정도면, 강산은 보통 겁쟁이가 아닌 게 틀림없었던 것이다. 아니면 보통 이들과 다른 감성을 가졌든가. 어쨌든 비상은 그런 생각을 속으로 굳혔다.
그 때였다.
갑자기 비상은, 묘하게 불안한 느낌이 자기를 감싸는 걸 느꼈다. 마치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속이 살짝 어지러웠던 것이다. 어쩐지 그다지 좋지 않은 느낌을 받은 비상은, 연장자 형들한테서 등을 살짝 돌렸다. 그러자 주위가 커짐과 함께, 여전히 감자튀김에 케찹을 바른 뒤 입에 집어넣고 있는 현과 눈빛이 마주쳤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비상은 잠시 그런 생각에 빠졌지만, 현은 꼭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현은 대략 상황을 알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감자튀김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정말 이대로 둬도 괜찮을까. 비상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 역시 일단 넘기기로 했다.
그렇게 비상이 자기 일에 정신이 없을 때, 강산의 목소리가 저만치에서 다시 들려왔다. 비상이 한눈을 판 사이에 저 너머에선 조금 더 많은 이야기가 있었던 듯했다.
“내가,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 모를 거 같아요?”
그 말을 듣자, 연장자들은 킬킬대던 걸 멈추고 하나같이 숨을 죽였다. 연장자들도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짐작치 못했던 것이다. 특히 잎새는 눈까지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강산은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한참 모자란 건 안단 말이에요. 괜히 짜증날 때마다 형만 떠오르고, 그러니까 더 짜증나고. 내가 모자란 놈인 것도 모르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어요?”
비상은 그 말을 듣다가, 아까 강산과 나라가 한 말을 떠올렸다. 그 말에 따르면, 저 둘은 자기가 모르는 사이 몇 번 따로 만난 적이 있었다. 어쩌면 그 때, 뭔가 비상이 모르는 얘길 주고받았을지도 몰랐다.
나라마저 진지해진 상황에서, 강산은 햄버거를 한 입 베어문 다음 다시 입을 뗐다.
“요즘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게 뭔지 알아요? 놀이 연습을 안 하고 있어. 맨 처음엔 혼자서 막 하고 그랬는데. 괜히 걸린단 말이에요. 그런 게.”
“그, 놀이가 그렇게 좋아요?”
“아니면 이러고 있겠어요?”
마치 마음이라도 들춰보려는 듯 나라가 그렇게 묻자, 이번엔 강산이 어이없단 듯 이렇게 대답했다. 비상의 눈엔, 그 역시 참으로 저 형답게 느껴졌다. 강산은 다시 입을 떼며, 눈길을 슬며시 다른 데로 돌렸다.
“재밌단 생각 안 했음 여기 있을 리가 있겠어요. 나도 체면이 있는데.”
“그것도 그렇긴 하네요.”
나라 역시 그 말과 함께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렸다. 치고받고 싸우긴 하지만, 둘 다 자기가 좋아서 여기에 있다는 것만은 같아보였다.
그러고 보니, 저 둘이 따로 만났다는 건 비상도 모르는 사정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비상은 저번에도 나라가 강산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우길 때 뭔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상의 기억대로라면 그다지 만난 적도 없을 텐데 나라는 무척 속이 상해있었던 것이다. 아마 나라 및 강산의 성격상 연락처를 주고받았을 리는 절대 없었고, 놀이가 끝난 뒤나 뭐 그런 때에 따로 만난 적이 조금 있는 걸로 보였다. 자세한 것까진 알 수 없었지만.
비상은 잠시, 저 둘이 어떤 관계를 쌓아왔을지에 관해 생각해봤다. 아마 가던 길에 우연히 만나서, 둘의 성격상 처음엔 무시했을지도 모르지만 어떤 일을 계기로 서로 투덜대기 시작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서로 주거니받거니하던 와중 드디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나라가 비상한테 연락처를 부탁하고, 그 뒤 어쩌다 보니까 지금 이런 상황이 되어있으리란 게 비상의 짐작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있을 때, 저만치에서 나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상이 생각하던 중, 저 둘은 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듯했다.
“설마 오늘 만나자고 한 거갖다가 이상한 생각하는 건 아니죠?”
“무, 무슨 이상한 생각이요?!”
나라의 말에 강산은 펄쩍 뛰었지만, 그 몸짓은 어쩐지 수상쩍게 느껴졌다. 연장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오, 왔다왔다’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나라 역시 ‘암튼 참…’이라며 중얼거린 뒤, 이윽고 다시 입을 뗐다.
“오늘 만나자고 한 건, 그, 그딴 이상한 생각같은 게 아니라…”
“…아니라?”
강산 역시 관심이 있는지, 그런 말과 함께 나라를 조심스런 눈빛으로 바라봤다. 나라는 한숨을 쉰 뒤, 다시 강산한테 눈길을 돌린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대, 댁하고 만나면 많이 싸우고 그러잖아요.”
“자각은 있으셨…아야. 왜 때려요?!”
“그렇게 맞고 싶어요?”
나라의 말에 대답하다 말고, 강산은 머리를 움켜쥔 채 목소리를 높였다. 나라는 무척 어이없다는 듯, 그런 말과 함께 강산을 노려봤다. 저 분한텐 무척 미안한 말이지만, 아마 주위에선 틀림없이 둘을 오빠와 동생으로 볼 것이라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 나는 그게 지겹단 말이에요. 알아요?! 당신하고 상성이 맞든 안 맞든 난 상관없는데, 만나기만 하면 서로 싸우고, 싸우고, 싸우고!!”
“그렇게 많이 싸웠던가?”
“내가 혼자 집에 갈 때, 혼자 다닐 때 만날 때마다 말건 사람이 누군데요?!”
강산의 말에 더 화가 났는지, 나라는 점점 더 목소리를 높였다. 어쩌면 이게 둘 사이의 수수께끼를 알 수 있는 열쇠가 될지도 몰랐다. 강산도 뭔가 짚이는 게 있었는지, 이젠 이런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아, 대, 댁이 자꾸 사람 눈앞에 나타나니까!!”
“저게 어른이 할 말이냐?”
강산의 말이 그렇게 웃겼던지, 잎새는 그런 말과 함께 낄낄댔다. 나라 역시 화가 났는지, 얼굴이 아까보다 훨씬 달아올라있었다.
“댁이 무슨 어린애예요?!”
“그, 그, 그런 소리가 아니라!”
나라의 목소리를 듣고 겁이 났는지, 강산은 얼른 두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는 아까보다 조금 침착한 목소리로 이렇게 변명했다.
“나도 맨 처음엔 그냥 못본 척했단 말이에요. 뭐 괴롭히려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댁이 먼저 우리 밤 욕했잖아요! 이래도 돼?!”
“가, 가볍게 몇마디쯤 한 게 잘못이에요?”
“내가 볼 때, 이건 둘 다 잘못한 거 같은데.”
그 말을 듣던 별밤은 이런 말과 함께 가만히 킬킬댔다. 비상의 생각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저 너머에선 잠시동안 누가 더 잘못했는지를 가리려는 우기기 대잔치가 벌어졌다.
아무튼 저 말로 짐작해보자면, 저 둘은 비상이 없을 때, 즉 따로 다닐 때 가끔 마주칠 일이 있었는데, 처음엔 좀 참고 넘어갔지만, 결국 저 둘의 성격상 서로 부딪친 적이 여러 번 있었던 듯했다. 즉, 그것과 비상이 봤던 일들이 겹쳐 지금 이 상황이 만들어졌단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둘 다 치고받고 싸웠던 얘기네.”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않는 가운데, 잎새가 그렇게 저 둘의 관계를 정리했다. 아무튼 나라의 말에 따르면, 이런 비생산적인 짓을 언제까지고 이어갈 수는 없으니 오늘 매듭을 지으려는 듯했다. 이런 식으로 만날 기회를 가지면 그나마 서로 덜 치고받지 않을까, 란 게 나라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그걸 듣던 별밤이 갑자기 입을 뗐다.
“그러고 보니 강산이 쟤 그런 적 있었는데.”
“뭔데?”
“아니, 내가 전에 요즘 나온 소셜게임 하고 있었거든. 근데 강산이 저 놈이 그걸 보더니 ‘다 큰 여자애가 뭐 이런 옷을 입냐?’ 막 이러는 거야. 그 게임 배경이 판타지였거든. 내가 그래서 ‘판타지작품에 그러는 건 너무하지 않냐?’뭐 그런 말을 했는데 자긴 도저히 못 받아들이겠단 표정이더라.”
“걘 다른 게임 안 하냐?”
“PC방에 가선 하는데 핸드폰으론 많이 안 한다 그러더라.”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안 그래도 진화시킬 생각이라서 그렇게 했지. 그러니까 ‘이제 좀 괜찮네’란 식으로 말하더라구. 강산이 쟨 아빠하면 진짜 잘 할 거야.”
잎새가 자꾸만 말을 부추기자, 별밤은 그런 말과 함께 킬킬댔다. 그 때 기억을 되살리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튼, 저 놈은 왜 여자랑 인연이 없는지 몰라.”
“강산이 저 놈. 솔직히 이성 대하는 거 어려워하지 않냐? 솔직히 지금 나라 씨랑 저러고 있는 것도 엄청 힘들어 보이는데.”
별밤이 다시 입을 떼자, 잎새가 그런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강산이 지금 이 상황을 안다면 연장자들의 쓸데없는 걱정에 감동해 눈물이라도 흘릴 게 틀림없었다.
“강산이 쟤만큼 이성 배려하는 사람도 없을 거 같은데 희한하네.”
“지금 나라 씨랑 저러는 거 보면 알겠다 야.”
잎새는 그렇게 말하며, 남은 콜라를 마저 입에 댔다. 비상은 저 둘의 말(별밤은 이제 그 때 강산과 나눈 얘길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잎새한테 말하는 중이었다)에 끼어드는 대신, 여전히 앞날이 불안한 저 둘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사실 강산이 센 척하면서 그런 걸 신경쓴다는 건 비상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강산 역시 자기가 약하단 걸 알게모르게 눈치채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비상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마침내 강산과 나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참 자리에 앉아있느라 바뀐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연장자 일행은 헐레벌떡 일어나 살며시 그 뒤를 따랐다. 비상 역시 천천히 일어나, 강산과 나라가 가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또 어디냐?’라 잎새가 중얼대는 사이, 비상 일행은 번화가 근처에 있는 강가에 다다라있었다. 강산 일행은 그 쪽으로 내려가더니, 이윽고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산책길을 걷기 시작했다. ‘진짜 데이트 아니냐?’라는 잎새의 말은 또 둘째치고, 비상 일행도 멀찌감치서 그걸 따라가게 되었다.
오늘은 그다지 덥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늦은 오후이기 때문인지, 강가 근처엔 산책하는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강산과 나라 역시 조금 멀찌감치 떨어진 채 가만히 그 길을 걷고 있었다. 그 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장자들 역시 ‘이러다가 진짜 아무 말도 안 하고 끝나냐?’란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가만히 그 길을 따라갔다.
현은 마치 물만난 고기라도 되는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위와 같은 까닭으로 조마조마해하는 연장자들과는 달리) 아무 생각이 없단 표정으로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크다는 사실에 묘한 느낌을 받으며, 비상 역시 가만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저 둘, 즉 강산과 나라는 끝까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우리 여기 뭐하러 온 거냐?’란 잎새의 말은 둘째치고, 그런 식으로 강가에서의 시간은 흘러가고 말았다. 뒤늦긴 했지만, 오늘은 참 뭘 짐작하기 어려운 날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저 둘의 강가산책이 끝난 뒤였다.
“저 놈 계획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잎새가 이렇게 중얼대는 가운데, 둘은 아까 있던 번화가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강산은 뭔가 잡아둔 계획이라도 있는지, 아까부터 핸드폰을 꺼낸 뒤 혼자 만지작대고 있었다.
“뭐, 딱히 이렇게까지 할 건 없지만 햄버거만 먹는 것도 그러니까…”
“대체 뭔데요?”
강산이 이렇게 수상쩍은 모습을 보이자, 나라는 어이없단 듯 이런 말을 꺼냈다. 연장자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바로 옆에서 잎새가 ‘내가 아는 강산이는 이렇지 않을 텐데…’라 중얼대는 게 비상의 귀에 들어왔다.
그렇게 해서 비상 일행이 다다른 곳은 사방이 뻥 뚫린(즉, 유리로 되어있는) 특이한 레스토랑이었다. 이런 데를 강산이 골랐다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분위기가 있어보이는 겉모습을 보자, 연장자 일행은 퍽 감동받은 눈치였다. 그런 것치고 그다지 비싸보이지도 않는다는 게 또 특이한 점이었다(오면서 본 메뉴판으로 볼 때, 그렇게 비싼 메뉴는 없었다). 비상도 레스토랑에 처음 온 건 아니었기에, 뭔가 걸리는 게 있었지만 대충 메뉴판만 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거기엔 미처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펼쳐져있었다.
“우아. 최곤데?”
먼저 들어간 연장자 일행의 감탄을 들으며 안으로 들어간 비상은, 곧바로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이 레스토랑은 무척 특이하게도, 거의 사방이 탁 트여있었던 것이다. 즉, 안에서 바깥이 훤히 내다보이는 모습이었다. 마침 레스토랑이 있는 곳이 번화가이기도 해서, 이 동네 번화가의 불빛이 모두 여기에 모인 것처럼 느껴졌다.
미리 와있던 강산도 이 광경에 감탄했는지, 자꾸 ‘이야…’란 말과 함께 주위를 빙빙 둘러보고 있었다. 한편 나라는 강산을 생각해서인지 침착하게 있다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강산만큼이나 나라도 여기가 퍽 마음에 든 듯했다.
아무튼 비상 일행도 될 수 있는 대로 멀찍이 앉자(레스토랑이 넓은 덕분에 안 들킬 수 있었다) 잠시 뒤 주문할 때가 다가왔다. 이렇게 해서 메뉴판을 받아든 잎새는, 잠시 뒤 이상하단 표정으로 이런 말을 중얼댔다.
“…뭐야?”
비상이 슬그머니 그 메뉴판을 보자, 거기엔 왜 강산이 여기를 골랐는지 알 법한 메뉴가 여럿 적혀있었다. ‘고급 라면’, ‘고급 함박스테이크’. ‘고급 비빔밥’, 아무튼 이러한 희한한 메뉴가 메뉴판을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도 틀림없이 메뉴판을 보고 들어왔을 텐데,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비상이 그런 생각에 빠진 동안, 잎새는 이게 무척 재밌었는지(과연 강산의 친구다운 모습이었다) 이렇게 낄낄댔다.
“야야. 우린 다 고급 라면이다. 오케이?”
뒤에 하는 말에 따르면, 강산 및 나라도 이걸 골랐으므로 우린 이걸 먹을 의무가 있다는 듯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저 형의 생각이지만.
그렇게 해서 잠시 뒤 문제의 고급 라면이 나타났다. 자기 앞에 놓인 라면을 본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걸 느꼈다.
그 문제의 ‘고급 라면’이라는 건, 쉽게 말하자면 ‘조리예의 극한 라면’이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라면을 담고 있다곤 믿을 수 없을 만큼 고급스러운 식기와(이건 참으로 레스토랑다웠음), 먹음직스럽게 썰린 배추김치. 그리고 온갖 고명을 다 얹은 탱글탱글한 라면이 비상의 눈에 들어왔다. 비상도 여러 라면을 봐왔지만,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라면은 무척 드물게 느껴졌다. 라면 위에 얹어진 치즈가 부드럽게 녹은 모습이나, 파는 물론 달걀, 버섯, 고기까지 섞인 푸짐한 고명(잎새 라면 위엔 따로 주문했는지 만두도 얹어져있었음. 심지어 반숙계란도 같이 있었음), 적절한 국물양, 정말로 조리예에서나 볼 법한 광택처럼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라면이 비상의 바로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별밤 역시 믿기지 않는지, ‘다 먹은 다음 밥도 준다는데 진짜냐?’라고 잎새한테 묻고 있었다. 심지어 잎새 말에 따르면, 찬밥 및 뜨거운 밥도 따로 주문할 수 있다는 듯했다. 마치 뭐에라도 홀린 느낌을 받으면서, 비상은 젓가락을 손에 들었다.
실제로 먹어보자, 비상이 짐작하던 것과 대략 비슷한 맛이 느껴졌다. 맛 자체는 보통 라면이었지만, 모든 이들이 기대하는 그 ‘보통 라면의 맛’을 고스란히 살린 신기한 라면이었던 것이다. 국물과 면, 그리고 고명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보통 라면의 ‘맛’을 제대로 내고 있었다. 너무 맵지도 달지도 않은 국물맛 역시 인상에 남았다.
이 역시 비상이 지금 뒤늦게 안 것이지만, 여기 라면은 사람에 따라 매운 정도나 고명같은 걸 따로 주문할 수 있다고 했다. 이걸 알려준 잎새는, 떡을 넣은 라면도 먹고 싶었지만 거기까지 했다간 배불러 죽을 거 같아서 그만뒀다고 덧붙였다. 비상은 라면을 먹으면서, 생전 처음으로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걸 느꼈다. 현 및 이름모를 연장자는 그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지 아무렇지 않게 라면을 먹고 있었다. 비상이 할 말은 아니지만, 저 두 사람은 현실적응력이 너무 좋았다.
한편, 저 너머에서는 역시 어이가 없다는 듯 강산한테 말을 거는 나라가 있었다.
“대체 무슨 약을 하고 여기에 오겠단 생각을 했어요?”
“자기도 맛있게 먹고 있으면서…”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강산은 왜 여기를 골랐는지 얘기했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알게 된 곳인데, 이런 데라면 부담도 없고 좋겠단 생각에 여기로 정했다는 말이었다. 나라와 같이 오게 된 건 그냥 우연이고, 결국 강산 자신이 여기에 와보고 싶어서 정했단 말도 덧붙였다. 그 말을 듣고 ‘내가 무슨 실험장이에요?’라면서 라면을 열심히 먹는 나라를 잠시 보다, 별밤이 신기하단 말투로 이런 말을 꺼냈다.
“근데 솔직히 라면은 좀 투박하게 먹는 게 취향인 사람도 있지 않냐? 그럴 땐 어떻게 되는 거지?”
“야,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들보고 오라 만든 데다가 무슨 소릴 하냐? 니 말대로 평범한 라면을 바라면 여기 안 오겠지. 딱 봐도 자기가 좋아서 하는 곳이구만 뭐.”
잎새는 뭘 그런 걸 묻냐, 란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한 뒤 그릇에 밥을 말았다. 그게 진짜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이 깔끔한 모습과 아까 잠시 본 직원(마음씨 좋아보이는 여직원 한 명뿐이었지만)을 볼 때 ‘좋아서’ 한다는 건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답은 알 길이 없었지만.
“내가 생각해도 참 잘했단 말이야. 아무튼.”
아무튼 강산은 자기가 고른 이 레스토랑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렇게 혼자 감탄하기 시작했다. 나라는 이제 벙찐 표정으로 강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비상도 그 마음을 무척 잘 알 것 같았다.
“그 쪽은 여기 주위에 있는 수많은 불빛들한테 민망하지도 않아요?”
“내가 왜요?”
나라가 그렇게 말하는데도, 강산은 아무렇지 않게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비상은 이건 붉은 밤 자체한테도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장 잎새는 ‘야, 우리 쪽팔려서 어떻게 나가냐’라며 별밤한테 하소연하고 있었다. 나머지 둘, 즉 현과 이름모를 연장자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라면을 먹고 있었다.
나라는 그런 모습이 더 열받았는지, 아까보다 더 목소리를 높였다.
“저 하늘 위에 별들이 있단 거 몰라요? 댁의 그 민망하기 짝이 없는 모습도 달님은 다 안단 말이에요. 우주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요?!”
나라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 비상의 눈엔 그 말도 강산만큼 민망하게 느껴졌다. 나라는 화가 나서 그걸 판단할 겨를이 없는 듯했지만.
그 때, 강산이 갑자기 혼자 흥분하더니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나라도 갑자기 이렇게 나온 강산한테 기겁했는지, 몸을 뒤쪽으로 젖히고 있었다. 여기서 강산이 가리킨 건 하늘이 아니라 바깥에 펼쳐진 야경이었다.
“신발. 하늘만 우주냐? 지금 여기도 까고 말하면 우주잖아요. 우린 지금 우주 속에 살고있는 거란 말이에요. 알았어요?!”
이제 나라는 반쯤 질린 표정으로 강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편, 이걸 보던 연장자 일행들은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느라 바빴다. 비상은 웃음을 터뜨리진 않았지만, 참으로 뭐라 말할 수 없단 생각으로 강산을 쳐다봤다.
그 때, 비상은 갑자기 자기가 툭 튀어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이 들자마자 비상은 주위가 ‘작아지는’ 듯한 느낌과, 연장자 두 명이 자길 보고 있는(특히 잎새는 무척 노려보고 있었다) 느낌을 같이 받게 되었다.
“아 진짜. 깜짝 놀랐잖아. 어우.”
그렇게 방금 일이 놀라웠는지, 잎새는 이렇게 투덜대곤 다시 강산 쪽으로 몸을 돌렸다. 별밤도 말은 안 했지만 살짝 놀란 눈치였다. 딱히 그러고 싶었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비상은 아무튼 참 겁도 많은 형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별밤이 그렇다고 여긴 건 아니었다.
이렇게 비상이 원래대로 돌아왔을 무렵, 나라가 평소보다 더 진지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그 쪽은 진짜 바보같아요.”
“풉!”
이번엔 정말 한 방 먹었는지, 연장자들도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하고 이런 소리를 내고 말았다. 다행히도 멀리 떨어져있었기에 강산 일행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강산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잠시 뒤 입을 뗐다.
“내 생전 이성한테 그런 말 듣는 거 진짜 처음인데요.”
“우리가 여기 있단 게 정말 민망해지는데.”
이게 또 먹혔는지, 별밤은 그런 말과 함께 고개도 들지 못했다. 사실 강산도 이 형들이 자길 오늘 죽 쫓아다녔단 건 알고 있으니, 별밤의 말도 그렇게 보면 꽤 진심에 가까웠다.
나라는 ‘아니, 그러니까…’라 말을 흐린 뒤,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쪽이 바보같은 건 맞는데, 가만히 생각하면 남일은 아닌 거 같아서요.”
“네?”
강산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단 말투로 되묻자, 나라는 잠시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이런 말을 꺼냈다.
“사실 이걸 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속으로 걱정했어요. 괜히 민망한 모습만 생판 남들한테 보이는 게 아닐까 싶어서. 그런데 다음 날엔 막 이런 모습이 되어있고. 그러니까 나는, 어…”
“천천히 말해도 돼요. 다 들을 거니까.”
나라가 말끝을 흐리자, 강산도 걱정됐는지 이런 말을 건넸다. 잎새 역시 ‘야, 우리 큰일난 거 아니냐?’라 걱정스런 표정으로 별밤과 얘기를 주고받았다. 강산의 말에 잠시 가만히 있던 나라는, 이윽고 다시 입을 뗐다.
“솔직히 난, 그, 정말 울고 싶었단 말이에요. 지금도 그래요. 누가 이렇게 작아지고 싶대요? 겨우 남들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자랐는데 다시 돌아가다니 지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누, 누구는 아주 멀쩡하게 잘 살고있긴 하지만, 나, 나, 나는…”
“…비상이요?”
이제 울먹이기 시작하던 나라는 강산의 그 말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지금 자기 모습이 민망했는지,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린 채였다.
“그, 그 사람은 엄청 멀쩡하단 말이에요. 그럴 리가 없는데.”
“그 쪽은 비상이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지, 지금 장난해요?!”
나라가 화를 내면 이렇게 말하자, 비상은 여러모로 눈길이 자기한테 모여있단 걸 깨달았다. 아까 원래대로 돌아간 게 어떻게 보면 천만다행인데.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라는 그렇게 화낸 뒤, 잠시 가만히 있다가 다시 입을 뗐다. 이번엔 강산과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아, 아무튼,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단 말이에요. 그,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지. 뭐 그런 걸. 왜 사서 고생하는 거지. 왜 스스로 쪽팔린 짓을 하는 거지. 그런…그치만 이상하게 다른 생각도 난단 말이에요. 이, 이런…그러니까 놀이를 하는 게, 어릴 적부터 무의식 속에서 죽 바란 것같다고나 할까…그 쪽도 좋아서 한다고 그랬죠?”
“마, 말했잖아요. 거 참.”
강산도 이 말엔 놀랐는지, 얼른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여, 여깄는 사람들은 다 이상해. 우리 밤이나 붉은 밤이나 어느 정도는 그런 거 같아요. 아니면 이런 이상한 걸 왜 하지? 하겠다고 한 나도 그렇지만. 이걸 재밌다 생각하는 나도 그렇지만…”
그런 말을 하며, 나라는 다시 말꼬리를 흐렸다. 마치 뭔가 깊이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비상은 어쩐지 나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략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산도 나라의 마음을 짐작하는지, 평소답지 않게 가만히 나라의 말을 듣기만 할 뿐이었다.
그걸 가만히 보던 잎새는, 잠시 가만히 있다 일행들을 돌아보며 이런 말을 꺼냈다.
“야, 우리도 각오 좀 해야겠다.”
“무슨 각오를?”
별밤이 묻자, 잎새는 다시 나라 쪽을 돌아봤다. 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몰라서 묻냐. 따라다녔단 거 나라 씨한테도 말해야지. 이런 말까지 들었는데 뻥치고 다닐 수 있겠냐?”
사실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 말은 퍽 무겁게 느껴졌다. 아무튼 비상을 비롯한 일행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강산과 나라가 사라진 뒤, 비상 일행도 그 자리를 떴다.
연장자들이 이제 슬슬 정체를 드러내기로, 즉 오늘 죽 따라다녔단 걸 알려주기로 마음을 모은 가운데, 강산 일행은 또 아까 그 산책길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별밤은 걱정스러운 대목이라도 있는지, 일행을 돌아보며 이렇게 물었다.
“나라 씨가 엄청 화내지 않을까?”
“뭘 지금와서 그래. 이러기로 한 순간 우린 이미 끝났어. 강산이를 위해 지금껏 기다린 거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는 잎새를 보니, 비상은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러니까 대체 왜 이런 짓을 하고있었단 말인가. 물론 지금껏 같이 따라다닌 비상도 한통속이긴 했다. 아무튼 잎새는 강산을 따라다니기로 한 순간부터 이렇게 될 걸 각오한 듯했다. 이럴 때 보면 참 무식한 형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별밤은 그런 대답을 생각지 못했는지, 잎새의 말을 듣자마자 눈이 동그래졌다.
“잠깐. 그럼 날 속였다고?”
별밤이 어이없어하거나 말거나, 현은 이미 득도한 듯한 표정이었다. 다른 연장자도 넋이 빠진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모든 걸 받아들였는지 한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다들 마음을 정리하는 사이, 비상 일행은 아까 그 강가에 다시 와있었다. 강산 일행은 먼저 저만치 간 것인지,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비상 일행은 일단 다리 밑, 즉 산책길로 내려가자 마음먹었다.
그렇게 산책길로 모두 내려왔을 때였다.
“야!!”
어디서 많이 들은 정겨운 목소리에 비상 일행은 하나같이 고개를 그 쪽으로 돌렸다. 마치 니놈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늘진 곳에서 갑자기 어디서 많이 본 덩치가 튀어나왔다.
“자, 잠깐. 나라 씨는?”
“뒤쪽에 있다. 아무튼 이 놈들 진짜…”
식은땀을 흘리는 잎새를 보며, 그 덩치, 강산은 불만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비상 일행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런 말을 꺼냈다.
“이, 이…이 배추김치같은 자식아!!”
“뭐라는 거야?”
비상이 그렇게 대답하자, 뒤에 있던 연장자한테서 낄낄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지어 나라도 웃는 걸 차마 참지 못하고 피식대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굳이 안 웃는 사람을 찾자면, 현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강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동물원 코끼리라도 본 듯한 눈빛이었다.
“우, 우리가 너무 평범하단 말 아냐?”
특히 눈물까지 흘리며 주저앉은 채 웃던 잎새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곤 이런 말을 꺼냈다. 사실 강산이 아무 생각없이 말했든 어쨌든,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어이없는 건 틀림없었다. 강산은 무척 기분이 안 좋겠지만.
그 때, 이번엔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할 사람이 한 명 더 있는 거 아니에요?”
그 사람은, 강산 덕분에 잊을 뻔했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웃음을 참고 있던 나라였다. 비상은 그러고 보니, 생각해보면 가장 중요한 사람인 나라의 존재를 잠깐 잊어버렸단 걸 깨달았다. 다른 연장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방금 전까지 낄낄대던 잎새가 웃음을 멈춘 뒤 나라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아, 맞다. 죄송해요. 저희는 그냥 강산이 저 놈만 놀리려고…”
“그럼 짜고친 거예요?!”
이제 나라는 무척 어이없단 표정으로 강산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강산은 그 말이 무척 의외였는지, 눈까지 동그랗게 뜨며 이렇게 변명했다.
“아니, 쟤, 쟤들이 멋대로 그런 거라니까요?!”
“이 사람이 진짜!!”
하지만 둘 다 한통속처럼 보이는 나라한테는 아무 소용도 없었는지, 결국 강산은 그대로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몸집이 작아져서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비상의 눈에 지금 나라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기호랑이 비슷하게 보였다. 마구 달려드는 나라가 무서웠는지, 강산도 도망치면서 자꾸만 손을 내저었다.
“나, 난 모른다니까요 진짜!! 으악!!”
“강산이 저 놈도 참 매를 번다니까. 아무튼.”
남은 연장자들은 그렇게 저멀리 도망가는 강산을 보며 그렇게 중얼대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모든 문제를 만든 건 다 이 연장자 형들이었다. 지금 그걸 말해봤자 별 소용은 없겠지만.
잠시 뒤.
“무슨 몰래카메라도 아니고 진짜…”
그 말과 함께, 나라가 이를 갈며 다시 연장자들 앞에 나타났다. 그 한쪽 손엔 강산의 목덜미가 제대로 잡혀있었다.
강산은 ‘난 아무 잘못 없대도…’라 한숨을 쉬면서도 얌전히 나라한테 끌려왔다. 그 몸집차이 때문인지 산책하던 사람들이 지나가다 말고 여길 슬쩍 쳐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자업자득이기도 했다. 어느 정도는.
잎새도 그런 강산이 걱정됐는지, 슬쩍 앞으로 나와선 이런 말을 건넸다.
“넌 평생 나라 씨한테 잡혀살 운명이구나. 친구야.”
“이 자식이 병주고 약주냐?!”
하지만 잎새는 더 이상 강산한테 가까이 갈 수 없었다. 강산이 이 말과 함께 죽일 기세로 잎새를 쫓아갔기 때문이었다. 그걸 알아챈 뒤 곧바로 도망가는 잎새를 보며, 별밤은 코미디라도 보는 듯 ‘저런 게 바로 자업자득이란 거지’라며 킬킬댔다. 아무튼 오늘은 벌받을 사람들이 모두 대가를 치르는 날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비상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이제 잘 해결된 건가?”
상황이 조금 진정된 다음, 갑자기 들려온 이런 목소리에 모두 어?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껏 아무 말도 없던 이름모를 연장자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비상 일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다들 그런 표정으로 연장자를 보고있을 때였다.
“어, 어어, 어어?”
잎새의 그런 목소리와 함께, 갑자기 그 연장자한테서 뭔가가 일어났다. 그걸 가만히 보던 연장자들은 ‘뭔가’를 알아채자 하나같이 기겁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아무렇지 않게 봐왔던 ‘붉은 밤의 이름모를 연장자’가 갑자기 비상도 아주 잘 알고 있는 누군가처럼 보였던 것이다.
비상 역시 이런 광경엔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건 정말 짐작하지 못해서였다. 이걸 무슨 느낌이라 해야 할까. 한밤중에 컴퓨터로 부모님한테 들키면 안 되는 걸 보고있을 때, 지금껏 뒤에 엄마가 죽 서있었단 걸 깨달았다고 해야 할까.
그 사람은 여기에 있는 게 이상한 사람, 파란 밤의 연장자, 아니 주장 상록이었다.
“뭐, 뭐, 뭐야?!”
이 사실이 무척 충격이었는지, 잎새는 방금 전부터 그런 말만 자꾸 외쳐대고 있었다. 한편, 나라는 이제 현실을 뛰어넘은 사실을 눈앞에 둬서인지 입만 딱 벌리고 있었다. 연장자, 그러니까 상록은 잠시 한숨을 크게 쉰 뒤 자기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 일행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저도 처음부터 속일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비상은 속으로 대략 짐작하고 있었지만, 결국 이것도 다 숨겨진 카드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상록은 비상 일행이 모르리라 생각했는지, 그게 무엇인지에 관해서 자기가 아는 대로 자세히 말해줬다. 그리고 자기가 이걸 쓰기로 한 까닭에 관해서도 말했다.
상록의 말에 따르면, 옛날부터(놀이를 할 때부터) 붉은 밤은 수수께끼 그 자체인 팀이었다고 했다. 자기를 비롯해서 대개 얌전한 편인 파란 밤 주장으로서, 원래부터 과격했던 금빛 밤은 둘째치고 붉은 밤의 저 기묘한 분위기는 자꾸만 궁금증이 일게 만들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즉, 이렇게 하기로 한 까닭은 자기도 붉은 밤의 분위기를 직접 겪어보고 싶어서였던 것이다. 상록이 바랐던 건 ‘자기를 아무렇지 않게 붉은 밤 연장자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자 현을 뺀 모든 이들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비상은 거기까지 가진 않았지만, 오랜만에 누군가한테 한 방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썼던 ‘숨겨진 카드’에 자기가 속을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상록한테 모든 이야기를 다 듣자, 나라는 거의 종잇조각이라도 되는 것처럼 온몸이 새하얘지고 말았다. 사실 지금 나라의 모습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다. 붉은 밤 연장자는 둘째치고, 이젠 자기 밤 주장이 나라를 속인 셈이 된 것이다.
나라는 이윽고 이렇게 외친 뒤, 엉뚱하게도 강산 쪽으로 곧장 돌진했다.
“세,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어!!”
“아니, 그러니까, 왜 나한테 그래요?!”
강산도 영문을 모른 채 맞고싶진 않았는지, 부딪치기 바로 전 절묘하게 그 자리를 피했다. 마침 그 뒤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한 현이 서있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나라가 현 쪽으로 뛰어가는 가운데, 현은 무슨 생각인지 자기한테로 달려오는 나라 쪽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더니 현은 나라가 자기 품에 들어오자마자, 양손으로 슥 안아올렸다. 자기가 공중에 뜬 것도 모자라 현한테 안겨있단 걸 깨달은 나라는 ‘뭐, 뭐…?’란 말만 되풀이했다. 이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바로 그 때, 마치 짜고치기라도 한 듯 절묘한 일이 일어났다.
“어, 어, 어?!”
나라가 현의 품에 곧바로 안기자마자, 다들 그 쪽을 보며 그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현이 갑자기 원래 모습대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갑자기 몸이 줄어든 상황에서 나라를 덥석 끌어안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라와 현은(나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바로 옆에 있는 강에 그대로 풍덩 빠지고 말았다.
이 갑작스런 일을 눈앞에 두고, 모든 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둘이 빠진 강가를 가만히 쳐다봤다. 현은 비틀거리면서도 어떻게든 일어난 뒤 몸을 살짝 떨었다. 아직 여름이라곤 해도 저녁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라는 오늘 재수 옴붙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하면, 오늘 나라는 정말로 아무 죄가 없었다.
그렇게 모든 일이 끝난 뒤(물론 나라는 급하게 강산이 사온 수건을 몸에 두른 채 덜덜 떨고 있었다), 비상 일행은 다같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강산은 오늘 나라를 힘들게 한 죄로 집까지 모시라는(연장자들의) 벌을 받았다. 강산도 반쯤 포기했는지, 자기한테 놓인 현실을 가만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무튼 오늘은 참 별일이 다 있었는데.
나라처럼 수건을 등에 두른 채 걸어가는 현을 보며,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튼 이렇게 끝나서 다행이다, 라 비상이 마음을 놓고있을 때였다.
“뭐야, 저, 전화?”
갑자기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진동을 보며, 나라가 그렇게 중얼댔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나라가 전화를 받자, 전화기에선 비상도 귀에 익은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언니언니언니언니언니!! 언니!!!”
“시, 시끄러. 다 들린단 말이야. 민망하게시리…”
그 주인공, 은솔의 목소리에 나라는 어둠 속에서도 보일 만큼 얼굴이 새빨개졌다. 자칫하다간 양손이라도 휙휙 저을 기세였다. 그 마음은 비상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지금 나라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지금 당장 뛰어들어갈 터였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은솔의 말은 이어졌다.
“어떻게 됐어요? 잘 됐어요? 강산 오빠 귀여운 데 있다고 내가 그랬잖아요. 뭐 재밌는 일이라도…”
“으앙. 몰라! 난 아무것도 몰라!!”
결국 은솔의 말이 무척 부담되었는지, 나라는 길거리에서 그렇게 외치고야 말았다. 이번엔 그다지 죄가 없지만, 강산도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돌이라도 된 것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대체 무슨 날이었더라.
이 상황을 눈앞에 둔 채, 결국 비상은 또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