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밤 언리미티드 43. ‘숨겨진 카드’의 존재

다음 날 점심쯤 되었을 때.
“이야. 역시 사람은 고기를 먹어야 한다니까.”
비상은 강산 및 잎새와 함께 모 할인마트 푸드코트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만나 같이 밥을 먹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물론 강산이 이런 자리를 꺼려할 리 없었다. 오히려 소풍온 초등학생마냥 기뻐하더니, 당연하단 듯 주로 고기로 된 음식을 보며 뭘 먹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강산은, 이윽고 어떤 먹을것 앞에서 발을 멈췄다.
“이거 맛있어보인다. 내가 보증함.”
“이 사람은 고기 앞에만 있으면…”
비상이 어이없어하거나 말거나 강산은 돈까스나베라는 신기한 요리를 시킨 뒤, 요리가 나오자 그 무지막지한 양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이 놈 사람이냐 뭐냐’며 킬킬대면서도, 잎새 역시 자기 점심인 김치라면을 입에 댔다. 강산은 그런 잎새가 열받는지, 밥을 먹다 말고 갑자기 비상 일행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야, 넌 매운 거 못 먹는다면서 무슨 라면이야?”
“우리나라 사람 중 라면도 못먹는 사람이 그렇게 많진 않잖냐.”
잎새는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하며 라면을 다시 먹었다. 참고로 자기 말에 따르면, 진짜 매운 라면을 만났을 땐 그 자리에서 도망간다는 듯했다.
아무튼 자기 혼자 당할 수 없다 여겼는지, 잎새는 이제 강산한테 낄낄대며 이런 말을 던져댔다.
“그러는 넌 대체 못먹는 게 있긴 하냐? 솔직히 사람도 아닌 거 같은데. 이 놈 진짜 쇠도 씹어먹는 거 아냐?”
“너 진짜 무슨 죄 무슨 죄로 신고할 거야. 이 자식아!”
“뭐, 사실폭행죄?”
“시꺼!!”
하늘에서 빗발치듯 쏟아지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 채 얼른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는 강산은 둘째치고, 비상 일행은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강산은 아까 잎새가 한 말미따나, 아무리 봐도 사람이 아닌 것처럼 돈까스전골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방금 한 말싸움은 벌써 잊어버렸는지, ‘이 국물 무지 좋은데’나 ‘버섯 좋다’나 ‘역시 사람은 육식동물이야. 고기를 먹어야 된다니까’란 말을 자꾸만 덧붙여가면서.

그렇게 점심식사가 끝나고(옆에서 잎새는 ‘푸드코트 침략자라니까. 이 놈도 참’이라며 강산을 놀려댔으며. 오늘 두 그릇이나 먹은 강산은 찔리는 데가 있는지 ‘좀 안 닥칠래?’라며 투덜대고 있었다), 비상 일행이 좀 쉴 겸 자리에 앉아있을 때였다.
“어?”
두 형들의 철딱서니없는 짓을 보고있던 비상은, 문득 누가 자기네들을 빤히 보고있단 걸 알아챘다. 그 사람은 조금 먼발치에서 멈춰선 채, 비상 일행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서 본 적이 있지만 잘 떠오르지 않는, 교복을 입은 남자고등학생이었다. 어디서 봤는지 잠시 생각에 잠긴 비상은, 이내 그 남학생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저 남학생과는 저번 금빛 밤 연소자 사건 때 PC방에서 얼굴을 본 바 있었다. 아니, 그 전에 ‘놀이’를 하면서 본 적이 있었다.
아마 비상의 기억이 맞다면, 파랑과 싸운 그 패널티받은 파란 밤 연소자가 틀림없었다. 이 역시 비상의 기억이 맞다면, 아마 이름은 성종이었을 터였다. 이런 데서 만나는 것도 희한한 일이긴 했지만, 저 나이 고등학생이라면 여름방학 중에 학교에 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타이밍이 좀 희한한 건 사실이었지만.
자기들끼리 투닥대며 싸우던 형들도, 뒤늦게나마 비상이 지금 누굴 보고 있는지 알아챈 듯했다. 강산은 고개만 이 쪽으로 돌린 채, 대충 손을 흔들며 이런 말을 건넸다.
“아, 저번에 파랑이랑 했던 그 놈이냐?”
“무슨 환영이 이따위야?”
비상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성종은 ‘안녕하세요’라며 예의바르게 이리로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비상이 조금 늦게 깨달았지만, 이렇게 가까운 데서 얼굴을 보는 건 아마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에도 한 번 생각한 바 있지만, 비상은 이 친구가 고등학생치고 무척 신중하게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다. 저 나이 또래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다고 누구처럼 고지식해 보인단 말은 아니었지만.
비상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잎새는 성종을 빤히 보면서 이런 걸 묻고 있었다.
“지금 학교서 오는 거냐?”
“고 3이니까요.”
사실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도진과 대보면 참으로 조심스럽기 이를 데없는 답이었다. 잎새는 그게 그렇게나 재밌었는지, 이번엔 이런 말과 함께 낄낄댔다.
“우리 도진이놈도 좀 보고 배웠으면 좋겠다. 진짜로.”
“형은 그냥 자기 입맛에 맞는 놈이 필요한 거 아냐?”
“어, 여기 계셨어요?”
비상이 이렇게 딴죽을 걸 때, 이번엔 뒤편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었다. 적어도 바로 앞에 있는 친구보다는 훨씬 더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거기엔 성종만큼이나 여기 있는 게 이상한 사람, 해원이 이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세 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셈이지만, 그 구성원은 조금 특이했다.
강산도 그게 어이가 없었는지, 대뜸 잎새를 보며 이렇게 소리쳤다.
“야, 이거 몰카냐?!”
“넌 텔레비전 좀 그만 봐라. 이 놈아.”
“비상이 형은 여깄단 말을 들었는데 이 친구도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네요. 솔직히 이렇게 빨리 모으긴 어려울 거 같았는데…아무튼, 그…”
“그건 또 무슨 소리지?”
“형하고 이 친구한테 좀 부탁할 게 있거든요.”
비상이 묻자, 해원은 그 말과 함께 비상한테 고개를 숙였다. 강산 눈에도 그게 희한했는지, 마치 놀리듯 해원을 보며 이런 말을 던졌다.
“뭔데 그러냐?”
그 말에 잠시 가만히 있던 해원은, 이윽고 조 심스레 입을 뗐다.
“형이랑 이 친구한테 ‘숨겨진 카드’를 써보려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건 또 뭐냐?”
“아, 그러고 보니 그 말을 안 드렸네.”
당사자도 아닌 강산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렇게 묻자, 해원은 아차, 란 표정을 짓더니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까부터 태도가 묘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다른 분들한텐 하지 마세요. 아셨죠?”
“알았대도. 그래서 뭔데?”
비상이 그렇게 대답하는 동안에도, 해원은 잠시 뭔가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해원 말에 따르면, 지금부터 말하는 얘기는 각 밤의 주장 빼고는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인 듯했다(물론 필요할 땐 이렇게 말해도 되지만). 즉, 각 밤 주장 빼고 이걸 처음 알게 된 건 비상 일행이라는 뜻이었다.
각 밤 주장들한테만 알려진 사실이지만, 주장들한테는 ‘숨겨진 카드’를 쓸 권리가 주어지는 듯했다. 여기서 말하는 숨겨진 카드란 일종의 비밀무기 비슷한 것인데, 자기, 혹은 다른 밤 사람들(즉, ‘놀이’를 하는 사람들)한테 육체적으로 뭔가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늘한테 부탁하는 거라고 했다. 물론 뭐든 다 되는 건 아니고, 당사자한테 동의를 받아야 하며, 누군가한테 마이너스가 되는(한 쪽 팔을 못쓰게 해달라는 것처럼) 부탁은 들어질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즉, 서로한테 어떤 점이든 도움이 되지 않으면 숨겨진 카드를 쓸 수 없다는 말이었다. 해원이 이렇게 비상 일행한테 부탁하는 것 역시, 해원은 물론 비상 일행한테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체 뭘 부탁하려는 거지?”
비상이 묻자, 해원은 잠시 생각하다 다시 입을 뗐다. 비상이 뭔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아까보다 훨씬 더 묘한 표정이었다.
“그, 딱 몇 시간만 저희 밤 일원이 되어주셨으면 하는데요.”
“어떻게?”
그렇게 다시 묻자, 해원은 비상 앞에서 뭐라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마치 큰 용기라도 낸 듯한 모습으로 이런 말을 꺼내들었다.
“그, 두 분이 합쳐져서…”
“어?”
비상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해원의 손가락이 자기 및 바로 옆에 서있던 성종을 가리키고 있단 걸 깨달았다. 설마, 라 비상은 생각했지만, 해원은 여전히 머뭇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어, 그러니까 말이죠. 이 친구랑 형 두 분의 힘이 있어야 한단 말이에요. 이런 건 세 밤이 같이 동의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서…좀 갑작스럽죠?”
“갑작스러운 게 문제가 아니라, 니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가 더 문제인 거 같은데?”
“야, 그러니까 뭘 한다고?!”
이젠 잎새는 물론, 강산까지 어이없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비상이 어떤 느낌인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비상은 어쩐지 짐작이 갔지만, 그다지 반갑진 않은 느낌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등골이 서늘했다.
“저도 솔직히 이런 건 안 될 줄 알았어요. 근데 천사한테 물어보니 된다네요.”
“야, 그러니까 뭐냐고!”
“형도 가만히 좀 있어봐. 사람이 얘기를 하면 들어야지.”
그 말 뒤, 비상은 해원한테 다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해원이 비상 일행한테 부탁하려 하는 건, 두 밤, 즉 붉은 밤인 비상과 파란 밤인 성종이 ‘하나’가 되어서 자기네 금빛 밤에 하루만 끼우게 해달라는 말이었다. 말만 들으면 참 쉽게 느껴지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오히려 어이없기 그지없는 이야기였다.
여기까지 듣자, 잎새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갑자기 이런 말을 툭 꺼냈다.
“아니, 그럼 저 둘은 뭐가 되는 거야?!”
“그, 그…아시잖아요. 말 그대로 하나의 존재가 된다는 그런…”
“야 이 자식아. 너 지금 그게 말이 된다 생각하냐?!”
이렇게 두 형이 난리를 피우는 와중에, 비상은 아까부터 가만히 있는 성종한테로 눈길을 돌렸다. 아니나다를까, 저 친구 역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아마 너무나 갑작스런 소리에 어쩌면 좋을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해원도 어질어질한지 이마를 짚으면서도, 아무튼 비상 일행한테 다시 설명했다.
“아니, 그, 그러니까요. 그런 거 있잖아요. 둘이 하나가 되고 뭐 그런 거. 그런 걸 부탁하려고…”
“이 놈은 생각하는 게 뭐 이래?”
해원이 변명하거나 말거나, 강산은 이런 말과 함께 그 어깨를 꽉 붙잡았다. 해원이 어떻게든 저 망할 형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릴칠 때, 잎새는 그걸 보며 낄낄대고 있었다.
“저 놈 이런 거 해보고 싶었구나. 크하하.”
“아니, 그러니까 이 형들이 진짜…”
저 형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당사자인 두 명은 여전히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특히 비상은 지금 어이없기 그지없었다. 저 형들이야 남들 일이겠지만, 비상한텐 그렇지도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강산한테 혼쭐난 해원이 다시 하는 말에 따르면, 이걸로 붉은 밤 및 파란 밤은 금빛 밤의 상태가 어떤지를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했다. 쉽게 말하자면 다른 금빛 밤 팀원 몰래 금빛 밤의 깊은 곳을 살필 수 있단 말이었다. 물론 금빛 밤 입장에서도 좋은 점은 있었다. 해원은 잠시 말을 끊은 뒤, 다시 입을 뗐다.
“지금 저희 밤, 솔직히 말해서 저도 관리하기 어렵거든요.”
“아, 그래?”
즉, 저 둘한테 금빛 밤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해원도 어떤 식으로 이끌어가면 좋을지 도움을 받고싶었던 것이다. 여전히 강산은 어이없단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특히 비상이 형이라면 제 바람하고도 딱 들어맞거든요.”
이 대목까지 오자, 해원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참고로 파란 밤에서 누굴 고를지는 많이 고민했지만, 차마 주장인 상록을 끌고올 수는 없으므로 저 중에서 가장 입이 무거워보이고 성실해보이는 친구를 골랐다고 했다. 그게 파란 밤 최연소(은솔을 비롯해서)란 건 좀 희한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해원의 말대로, 잘만 하면 세 밤 모두한테 도움이 되는 이야기란 건 틀림없었다. 물론 금빛 밤에 갑자기 처음보는 사람이 나타나는 문제는, 하늘의 도움으로 다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된다고 했다. 가면 갈수록 수상쩍기 이를데없는 소리지만, 그렇게 따지면 이 놀이 자체가 이상하므로 지금 와서 할 말은 아니었다. 아마 하늘이 된다고 한다면 될 게 틀림없었다. 물론 해원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 리도 없었다(실제로 해원은 꽤 진지한 표정이었다).
잎새는 여전히 안 믿기는지, 미심쩍은 표정으로 이렇게 물어왔다.
“설마 우리한테 불리한 거 있는데 숨기는 건 아니지?”
“그랬다간 제가 의영이 형한테 죽어요. 형.”
그 말을 하는 해원은 지금까지 봤던 무엇보다 진심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참고로 만약 정말 그런 걸 바란다면 하늘이 들어주지도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즉, 해원의 생각에 무리가 없으니까 하늘도 들어주겠다 했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되면 이젠 하늘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잎새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잠시 뒤 대뜸 비상한테 이런 말을 건네왔다.
“비상아. 정찰이라 생각하면 싼 거 같긴 하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강산 역시 넌지시 이런 말을 건넸다. 물론 죽는다 한들 강산이 책임져주진 않겠지만.
아무튼 어이가 없어진 비상은, 자기와 같은 처지에 놓인 성종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친구의 생각을 한 번 들어보기 위해서였다.
“넌 어떻게 생각하냐?”
비상이 그렇게 묻자, 성종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대뜸, 비상을 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형이 좋으시다면 전 상관없는데요.”
“아, 그래?”
특히 도진과 대보면, 보면 볼수록 저 나이 또래답지 않은 침착한 친구였다. 속내는 어느 정도 또래와 비슷한 듯했지만. 아무튼 여기까지 오자, 더 뜸을 들일 수도 없었다.
“뭐 숨기고 있는 건 아니지?”
“제 이름 걸고 보증할게요.”
“그러니까 니 이름을 걸어봤자…”
강산이 딴죽을 거는 건 둘째치고, 비상은 해원한테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해원의 말에 따르면, 일단 여긴 사람이 많으니까 옥상처럼 좀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긴 뒤, 자기가 하늘한테 들은 방법대로 둘을 하나로 만든 뒤, 금빛 밤이 모이는 옥상으로 데려가서 둘의 생각을 들을 작정이라고 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적응이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해원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모습이었다.
“근데 그거 진짜 괜찮은 거냐?”
“형이 하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 걱정이 많아?”
“뭐라고?!”
강산이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자, 비상은 그렇게 딴죽을 걸었다. 아무튼 둘 다 동의함에 따라, 강산과 잎새를 내버려둔 채 비상은 해원을 따라가게 되었다. 저 형들도 이게 궁금해서 견딜 수 없단 표정이었으므로, 잠시 뒤 옥상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럼 준비되셨어요?”
잠시 뒤, 둘이 옥상에 다다르자 해원은 그런 말과 함께 뒤를 돌아봤다. 그 표정을 보면 마치 해원이 무슨 큰 죄라도 저지른 것만 같았다.
“준비고 뭐고 할 게 있어?”
“형도 참 겁이 없으세요.”
“그렇게 벌벌 떨 거면 처음부터 이러자고 하지 마. 나 참.”
그렇게 쑥스러운 듯 웃던 해원은, 이윽고 마음을 다잡았는지 비상 일행을 다시 쳐다봤다. 저 표정을 보면, 해원은 정말 그 짓을 저지를 생각인 듯했다.
“그럼 저, 지금부터 두 분 다 눈을 감아주세요. 제가 하늘한테 채비가 다 됐단 신호를 보내면 아마 뭐가 일어날 거예요.”
마치 뭐에 속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도(그렇게 따지면 이 놀이도 마찬가지지만), 비상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런 지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묘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자, 비상은 뭔가 이상하단 느낌이 들었다. 굳이 대자면 패널티를 받는 바로 그 느낌이었지만, 그것과는 뿌리부터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자기 몸인데 자기 몸과 묘하게 다른 것 같았다. 자기 몸을 움직이는 데 누군가의 허가가 필요한 듯한 신기한 느낌이 지금 비상을 감싸고 있었다.
일단 가장 인상에 남는 건 눈앞이 또렷하게 보인다는 거였다. 안경을 걸친 느낌이 없는 걸로 볼 때, 패널티처럼 어떻게 된 듯했다. 여기까진 비상도 이젠 익숙했다. 키는 원래와 다를 바 없었지만, 어쩐지 몸집은 조금 커진 것만 같았다. 어쩐지 회춘한(딱히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음) 느낌도 들었지만, 아마 해원의 말이 맞다면 그 영향일 터였다.
주위를 둘러보자, 뒤늦게 따라온 잎새 및 강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옴. 둘 다 자길 보며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저 둘은 해원과 같이 멀찍이서 자기네들을 봤겠지만, 자기들도 자기 눈을 믿을 수 없는 것만 같았다. 참고로 해원은(자기가 말한 건데도) 그저 멍하니 서있기만 할 뿐이었다.
“너, 너 비상이 맞냐?!”
잎새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뭐에라도 홀린 표정으로 대뜸 그렇게 물어왔다. 자기 모습이 그렇게 바뀌었나, 란 생각에 어이없어하면서도 비상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럼 누군데?”
이렇게 목소리를 낸 뒤 깨달았지만, 보통 때보다 목소리가 좀 더 낮아져있었다. 높아진 적은 있어도 낮아진 적은 없으므로 지금 이 상황이 묘하게 신선하지만, 아무튼 그건 둘째치기로 했다.
“지, 진짜 되네요?”
해원조차 신기했는지, 그런 말과 함께 둘(지금은 하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강산 역시 신기한지, 비상 ‘일행’을 민망하리만치 빤히 쳐다보며 이런 말을 건넸다.
“이거 비상이만 있는 거 아냐?”
“저도 있는데요.”
“엉?!”
비상이 ‘자기도 모르게’ 입을 움직이자, 강산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기를 쳐다봤다. 사실 말하고 있었다곤 하지만, 자연스럽게 그런 말이 나온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묘한 느낌이었지만 무척 어색한 건 아니었다.
강산도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이런 말을 꺼냈다.
“야, 돼, 됐다. 그냥 말 까. 어차피 비상이랑 비슷한 놈이 존대하는 것도 이상하고.”
“그럼 그러지.”
이 비상(이라기보다 성종)의 아무렇지 않은 말에, 붉은 밤 연장자들 및 해원은 다같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산은 어이가 없었는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굳은 채 뿜고 있었다. 한편, 해원은 이제 모든 걸 다 내려놓은 모습으로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재, 재밌네요. 으하하하…”
그 표정으로 볼 때, 아마 해원은 자기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단 게 무척 민망한 듯했다. 물론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거울 없어?”
아무튼 그런 말과 함께, 비상은 드디어 자기 모습을 드디어 제대로 보게 되었다. 막상 이렇게 마주보고 나면, 생각하던 것보다 더 묘한 느낌이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기는 패널티 때 모습하고는 또 달랐다. 이걸 자기가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원래 비상보다 더 평범하게 재미없어진 느낌이었다. 마치 자기 모습에서 각진 데를 빼면 대략 이렇지 않을까싶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아마 자기 안에 있는 애어른친구의 영향인 듯했다. 입고 있는 옷은 둘이 입었던 걸 적절히 섞은 것처럼 보였다. 쉽게 말하자면 흰 셔츠에 검정색 바지였는데, 여러 모로 어울리는 옷차림이었다.
물론, 이런 식으로 멍하니 자기 모습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제 곧 각 밤이 모이기로 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금빛 밤도 이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일단)은 해원과 같이 금빛 밤이 모이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해원은 여전히 민망한지, 비상 쪽은 전혀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비상은 비상대로 거의 평소처럼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게 신기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마치 지금 같이 있는 모 애어른과 텔레파시라도 맞추고 있는 듯한 희한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사실 비상은 마음만 먹으면 이 놈과 얘기도 주고받을 수 있단 걸 짐작하고 있었다. 일단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지만.
그 때, 갑자기 그 친구, 즉 성종의 ‘말’이 느껴졌다.
“근데 괜찮으세요?”
“이제와서 또 무슨 소리냐?”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안 드려서요.”
그 말을 듣자, 비상은 이 친구도 자기만큼 희한한 놈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둘째치고, 비상은 이렇게 대답했다.
“너야말로 괜찮냐?”
“전 괜찮은데요.”
만약 이런 걸 강산이 보고 있었다면 이마를 짚고있었을 게 틀림없었다. 비상은 이제 그런가보다란 생각에 그저 덤덤할 따름이었지만.
해원은 여전히 혼자 어쩔 줄 몰라하다가, 이윽고 비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젠 뭔가 다짐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 그러니까, 아마 이대로 우리 밤에 가도 다들 아무도 모를 거야. 그러기로 했으니까. 어, 그리고, 거기서 이상하게 보이면 안 되니까 반말하려고 하는데, 괘, 괜찮지?”
그렇게 말을 꺼낸 해원은 평소와 달리 목소리가 떨리는 건 물론, 말도 엄청 빨랐다. 누가 봐도 무진장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비상은 물론, 아무렇지 않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든가.”
“다, 다행이다…”
비상의 대답에 해원은 그렇게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아마 비상한테 말을 까는 게 그렇게나 겁났던 듯했다. 물론 지금, ‘비상하고만’ 마주보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길을 걸어가며, 비상은 지금 자기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방금 전에도 생각했지만, 이건 일종의 텔레파시와 비슷했다. 이심전심이라 하면 더 알기 쉬울지도 몰랐다. 둘이 ‘이렇게 움직이고 싶다’는 마음이 딱 맞아떨어져, 좀 걸리는 느낌은 있지만 어색하진 않았다. 다른 이와 이런 식으로 반응을 서로 공유하는 건 꽤 시간이 걸릴 일인 것 같은데, 마치 그게 무의식 속 일처럼 자연스러웠다. 이쯤되면 하늘이 못하는 게 뭔지가 더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덧 건물 옥상 앞에 다다라있었다. 해원은 다시 한 번 자기한테 눈길을 준 뒤, 손에 힘을 줘서 문을 열었다. 비상은 이제 반쯤 달관한 듯한 모습으로 해원을 따라갔다.
짐작했던 대로였지만, 사람사는 데는 다 비슷한 고로 금빛 밤이 모이는 곳이라 한들 딱히 다른 건 없었다. 굳이 다른 걸 말하자면, 저 너머에 붉은 밤 팀이 보인다는 것뿐이었다. 래라면 저기에 있어야 할 텐데, 여기에 있는 것만은 묘한 느낌이었다.
주위에 있는 금빛 밤 팀원들은, 너무나 당연하단 듯이 비상한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 역시 해원이 바란 대로인 듯했다. 멀리서 본 대로 험악한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던 비상은, 문득 자기가 여기서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게 어색해졌다. 사실 그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자기는 붉은 밤 팀원이니, 다들 자기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게 훨씬 더 마음이 편했던 것이다. 하지만 금빛 밤 팀원들은 다들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다. 마치 비상이 그네들 무리라도 되는 것처럼.
그런 생각을 하며, 비상은 다시 주위를 찬찬히 살펴봤다. 금빛 밤에 관해선 잘 모르지만, 전 난투사건 때 본 연장자들 몇 명이나 자기한테 시비를 걸어온 연소자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그 뿐만아니라, 저 멀찍이 보이는 데엔 비상과 여러 모로 인연이 깊은 패널티받은 연소자가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뭔가 생각하는 눈빛으로 가만히 있던 연소자는, 문득 그걸 보고 있던 비상과 눈이 마주쳤다.
비상은 얼른 눈길을 돌리려 했지만, 저 연소자는 마치 뭔가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젠 피해도 별 소용이 없겠단 생각에 비상이 다시 그 연소자를 가만히 쳐다보자, 연소자는 마치 지기라도 한 듯 얼른 눈길을 돌리곤 저 쪽으로 걸어갔다. 아마 비상의 눈빛을 피할 생각인 듯했다.
그 때였다.
“이야, 이거 희한한 친구 아냐?”
그런 말과 함께, 누가 비상의 등을 세게 쳤다. 뒤를 돌아보니, 그 사람은 전에 한 번 본 바 있는 고등학생, 이 아니라 금빛 밤 연장자였다. 저 표정을 보면 뭔가 짐작한 게 틀림없었다. 이 사람은 참 눈치도 빠르단 생각을 하면서, 비상은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뭐라도 알 거 같아요?”
“일단 비밀로 하지 뭐. 그게 더 나을 거 같고.”
비상의 말에, 금빛 밤 연장자는 킬킬대며 다시 등을 몇 번 쳤다. 이걸 보면, 왜 비상이 여기에 있는지 대략 짐작한 듯했다(저 멀리서 해원이 당황하는 걸 보고 알아챘을지도 모르지만). 맨 처음 봤을 때부터 어딘지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이 사람도 참 대담한 데가 있다고 비상은 생각했다. 작은 건 신경도 안 쓰는 그 성격이 묘하게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무튼 그 연장자는 재밌단 듯 비상 옆에 자리를 잡았다.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할 텐데도 이런 반응인 걸 보면 어지간히 작은 게 눈에 안 들어오는 성격인 것 같았다. 연장자는 이 상황이 퍽이나 재밌는지, 이런 말과 함께 다시 킬킬댔다.
“해원이 그 놈은 왜 이런 짓을 했나 모르겠네.”
“부탁을 좀 받아서.”
“무슨 부탁…아, 그거?”
비상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던 연장자는, 이윽고 뭔가 알겠다는 듯 손뼉을 탁 쳤다. 그 눈빛이 금빛 밤을 둘러보고 있는 걸 봐선 비상이 하려는 말을 짐작한 듯했다.
“뭐, 그럴 만도 하지. 해원이 쟨 아직 어리기도 하고.”
그 말과 함께, 금빛 밤 연장자는 다시 주위를 휘 돌아봤다. 저 표정을 보면, 이 연장자는 해원을 꽤 진심으로 생각해주고 있는 듯했다. 사실 이 연장자도 겉으로 보기엔 가벼워보이지만, 적어도 다른 금빛 밤 인물들보다는 훨씬 더 믿음직해보였다.
“다들 이리로 좀 와 보세요!”
그러던 와중, 해원은 자기네 밤 구성원들을 한 곳으로 불러모으려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있는 힘껏 크게 외치는 해원이었지만, 연장자는커녕 연소자조차 해원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해원도 이 정도쯤으로 포기하는 인물은 아니라서인지, ‘주목!!”이란 말과 함께 손바닥까지 크게 치며 이리로 오란 뜻을 전하고 있었다.
“자, 부르는데 가야지?”
금빛 밤 연장자는 이런 말과 함께 천천히 자리를 떴다. 비상도 일단 지금 자기 처지를 생각해서 해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원은 오늘도 고생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무튼 오늘은 이런 걸 할 거니까…’라며 하루 일정을 설명했다. 금빛 밤 구성원들이 좀 개성이 세서 고생하고 있단 건 잘 알 수 있었지만, 아무튼 해원의 구성원들을 이끄는 힘도 퍽 괜찮다고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쯤되자, 비상은 해원이 말하는 금빛 밤의 문제점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좀 더 제대로 말하자면 금빛 밤 고유의 뿌리깊은 문제였다. 즉, 구성원들의 자기주장이 너무 강해서 통제하는 게 어렵단 사실이었다. 물론 붉은 밤도 자기주장이 덜한 동네는 아니었지만(모 강산이 형처럼), 그래도 한 가지 목적으로 뭉칠 수 있는 붉은 밤과 달리, 이 금빛 밤은 다들 자기 맘대로인 것처럼 느껴졌다. 연소자 비율이 붉은 밤보다(조금이나마) 높은 데다가, 연장자쯤 되는 사람들도 자기 생각이 전체보다 우선인 이들이 많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장자는 물론 연소자도 해원의 말을 제때 안 듣는 경향이 있는 건 그러한 까닭일 터였다.
비상이 볼 때, 이건 해원의 문제라기보다 금빛 밤이란 팀구성 자체의 문제였다. 물론 구성원들 문제이니, 어떻게 하면 더 좋아질지는 비상도 알 수 없었다. 해원한테 뭐라 말할지에 관해 생각하며, 비상은 집중되지 않는 남의 밤의 경기에서 눈길을 뗐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저 멀리서 긴가민가하단 표정으로 자기한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비상이 모를 리 없는 금빛 밤 연소자 혜은이었다.
설마 이 사람도 뭔가 이상하단 걸 깨달은 건가, 란 생각과 함께, 비상은 혜은을 가만히 쳐다봤다. ‘바뀐 모습’을 비롯해 혜은과 민망한 상황에서 만난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또 다른 데가 민망하게 느껴졌다. 지금은 그래도 비상의 원래 모습과 가장 가까웠는데도, 비상은 이런 모습으로 혜은과 만나는 게 묘한 느낌이었다. 사실 혜은이 지금 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궁금했지만, 그걸 알 도리는 없었다.
혜은은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비상한테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여전히 자기 생각을 확신하진 못하는 눈초리였지만, 그래도 뭔가에 끌리고 있단 건 틀림없었다.
비상이 가만히 있자, 혜은은 드디어 비상 근처까지 다다랐다. 그리곤 비상을 천천히 올려다보며, 머뭇머뭇 입을 뗐다.
“저, 그…”
그런 말을 하면서, 혜은은 비상을 빤히 쳐다보며 뭔가 확신을 얻으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쯤되자 비상도 무슨 나쁜 짓이라도 저지른 듯한 묘한 느낌이 천천히 들기 시작했다. 혜은은 여전히 확신이 덜 드는지, 뭔가 좀 걸린단 표정으로 비상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갈 때였다.
“저, 저, 저저저저저저저…”
혜은은 마치 고장난 라디오라도 되는 것처럼, 비상의 가슴팍에 손을 놓고는 말을 더듬었다. 그 손이 심하게 떨리는 걸 보면, 마치 술이라도 마셨다고 착각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물론 비상은 이제 이 사람의 성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비상이 떠올릴 수 있는 건 쓴웃음밖에 없었다.
이 사람은 항상 조심스럽고, 겁이 많고, 대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길 특별하다고 여겨주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자기도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혜은은, 비상이 지금껏 알고 있던 그 혜은이었다.
“시, 실례할게요!!”
더 이상 이러는 건 민망했는지, 혜은은 그렇게 소리치며 얼른 자리를 떴다. 자기가 엄청 큰 실수라도 저질렀다 생각했는지, 혜은의 얼굴은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비상은 가만히 혜은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이 놀이만큼이나, 지금 상황은 말로 뭐라 말하기 어려웠다.
혜은만큼은 아니지만, 비상 역시 그 뒤론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 멀리서 ‘그만!’이란 소리가 띄엄띄엄 두 번 들려올 때까진.

그렇게 경기가 끝난 뒤였다.
“잠깐만 일로 와 봐.”
해원은 그런 말과 함께, 조심스레 손짓하며 비상을 불렀다. 이제 갈 사람은 다 갔으니 얘기를 듣고싶은 듯했다. 비상도 좀 쉬고 싶었으므로, 옆 난간에 가볍게 몸을 기댔다.
별 상관은 없지만, 지금껏 꽤 이 상태로 오래 있었는데 움직이는 게 불편하지 않은 것만은 꽤 신기했다. 아마 이 친구와 비상은 마음이 퍽 잘 맞는 듯했다. 이런 친구와 마음이 맞는 게 기쁜 일인지 어떤지는 둘째치더라도.
그런 생각을 하며 난간에 어깨를 기대니, 이제야 좀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바뀐 모습’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긴 하지만, 역시 자기는 자기 모습으로 있을 때 가장 편하단 걸 비상은 다시금 깨달았다. 아마 이 친구 역시 같은 생각일 터였다. 모처럼 이야기도 할 수 있는데 그다지 못 한 건 마음에 걸렸지만.
아무튼 옆에 기대자, 해원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어이없어하면서도 비상이 기다려주자, 해원은 잠시 뒤 여전히 민망하단 듯 입을 떼어놓았다.
“이렇게 괜히 민망할 때도 그렇고, 자기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학교에서도 안 알려준다니까. 그런 걸 배워야 되는데.”
“그렇지.”
그 말과 함께, 비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주위는 이상하리만치 잠잠했다. 지금 이 순간이 평소보다 훨씬 ‘비현실적인’ 느낌이라서인지도 몰랐다. 해원 역시 더 이상 말하지 않을 생각은 없겠지만, 뭐라 말하면 좋을지 몰라서 그런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시간이 흘러갈 때였다.
“결국 살다보면 꼭 부딪쳐야 되는 게 있다고나 할까. 솔직히 이런 거가지고 이런 소리하는 것도 우습긴 한데, 아무튼 그런 걸 느낄 때가 많아지더라고. 세상엔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결정해야 할 일이 있구나…란 생각도 들고. 그럴 때 되게 막막하지 않아? 자기 혼자만 뚝 떨어져있는 느낌이라 해야되나, 뭐라 해야되나…”
그런 말을 확 뱉어낸 뒤, 해원은 천천히 말꼬리를 흐렸다. 비상은 잠시 생각하다, 이윽고 다시 입을 뗐다.
“자기한테 정의인 게 다른 사람한테도 당연히 정의일 거란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자기가 판단해서 자기가 움직이는 건 당연한 거야. 그런 걸 학교에서 가르쳐주진 않지만.”
하지만 비상이 입을 다물었는데도, ‘비상’의 입은 다시 한 번 움직였다. 마치 뭐에라도 씌인 듯한 신기한 느낌으로, 비상은 ‘자기’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었다.
“설마 아직도 세상에서 바라는 대로 살면 뭐든 잘 될 거라 믿고있는 건 아니지? 세상에서 바라는 대로 사는 것과 자기가 바라는 대로 사는 건 달라. 세상에서 이렇게 하라고 말하는 것과 자기를 선긋지 않으면 나중에 힘들 걸.”
물론 그렇게 말한 사람이 누군지는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아마 해원은 이걸 모르겠지만, 이 친구도 자기 생각보다 더 어른스러울지 모르겠다고 비상은 생각했다. 그게 우습다고 생각하는 건 전혀 아니었지만.
“그거 말고 또 할 얘기가 있지 않았던가?”
“아, 맞다. 원래 이걸 말하려고 한 건데.”
이런 얘기만 자꾸 할 수는 없으므로, 비상은 이런 말을 꺼냈다. 해원도 이제 그걸 깨달았는지, 살짝 뒷통수를 긁으며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지금 자기 모습이 꽤나 민망했던 듯했다.
“너도 고생하는구나.”
“그래. 내가 고생이 많지…”
비상이 고개를 젓자, 해원은 그런 말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보면 이 놈도 정말 고생이 많았던 듯했다. 아직 어린 놈이 고생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비상은 이야기를 마저 꺼냈다.
“쟤들이 니 말 잘 듣냐?”
“보면 알잖아. 그, 뭐, 어떻게 하고는 있는데…”
해원은 그렇게 말하며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렸다. 이걸 보면 해원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물론 이미 본 비상 입장에선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까닭을 잘 알면 푸는 것도 안 어려운 거 아냐?”
“아무래도 우리 밤 사람들한테만 물어선 답이 안 나올 거 같아서.”
“너희 밤도 못하는 걸 다른 밤인 나보고 알라고?”
“그, 그렇게 이상한 말이냐?”
자세히 보면, 해원은 지금 온 힘을 다해 비상한테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놀이’씩이나 하고 있으면서도 이런 짓이 퍽이나 민망했던 듯했다. 그럴 만한 상황이었지만.
“다른 사람도 이런 말을 했을지 모르겠는데, 자신을 좀 가지지 그래. 니 또래 중에서 그만큼 하는 놈도 없을 걸.”
“‘지, 진짜?”
“그렇대도.”
비상이 그렇게 말하자, 해원은 반쯤 빌기라도 하는 듯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비상은 고개를 끄덕여줬다.
해원은 그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갑자기 자세를 바로하곤 비상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말 들으니까 조금 마음이 편하다. 그,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형!”
그렇게 외친 뒤, 해원은 그대로 잽싸게 아래로 내려갔다. 아마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무척 어려웠던 듯했다. 어쩌면 저 놈의 희한한 구석을 안 거야말로 비상이 얻은 최고의 성과물일지 몰랐다. 물론 쓸데는 전혀 없었지만.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난 뒤, ‘둘’은 아직까지도 사람이 붐비는 큰길 난간에 걸터앉았다. 틀림없이 둘 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였는지, 움직임도 평소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자리에 털썩 걸터앉자, 다른 이들의 존재가 아까보다 훨씬 더 강하게 느껴졌다. 자기 앞을 지나치는 이들이 이렇게 많은데, 비상은 그게 남 일만 같았다. 현실감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저 앞의 사람들은 남이 맞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있자, 이젠 속에서 이런 말이 ‘느껴졌다’.
“오늘 이런 생각을 했는데요.”
“뭐가?”
비상이 이렇게 묻자, 그 친구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꺼냈다.
“지금 상황 말인데요. 갑자기 모르는 사람하고 한 방에서 지내는 거랑 비슷하단 생각 안 드세요? 저는 지금 그런 느낌인데.”
“그러니까 내가 거슬린다 이건가?”
“근데 그렇잖아요.”
비상이 반쯤 농담처럼 대답하자 이번엔 이런 말이 돌아왔다. 사실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자기 방이든 자기 모습이든, 정체성을 드러낸단 점에선 모두 같으리라고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예를 들어, 만약 인격교환이란 현상이 있을 수 있다면, 그건 전혀 바라지 않은 상황에서 서로 방을 바꿔써야만 하는 것과 비슷할 터였다. 물론 비상은 둘 다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그런 식으로 시간이 흘러갔지만, 비상은 그다지 자리를 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기가 이런 생각이라면, 아마 그 친구 역시 비슷한 느낌일 터였다. 대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묘한 상황이 자리를 뜨지 못하게 만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어쩄든 상관은 없지만).
이왕하는 거 뭐라도 물어봐야겠단 생각에, 비상은 속으로 입을 뗐다.
“넌 무슨 생각하면서 사냐?”
“진짜 뜬금없는 걸 물으시네요.”
“나도 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거든.”
그 친구의 대답을 듣고, 비상은 솔직하게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그 친구 역시 잠시 생각하다가 이런 답을 내놓았다.
“저도 형이 무슨 생각하고 사는지 모르겠는데요.”
“너도 참 희한한 놈이구나.”
그렇게 대답하며, 비상은 그런 점이 묘하게 자기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런 놈과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단 게 좋은 일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희한한 걸 겪고있단 것만은 틀림없었다. 여러 모로 이 놀이를 하면서 희한한 경험밖에 안 하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어쩌면 그것도 지금 자기한텐 중요할지 모르겠다고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근데 넌 왜 이걸 하겠다고 한 거냐?”
“놀이요?”
“그럼 설마 이런 상황이겠니?”
비상이 그런 말을 건네자, 어린 친구는 잠시동안 뭔가 생각하는 듯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다 이윽고, 천천히 이런 말을 꺼냈다.
“그냥요.”
“그냥?”
“네. 그냥 아무런 까닭도 없이 하고싶어지는 게 세상에 있지 않아요?”
그 말을 듣고, 비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자기가 놀이를 한 것도 이 친구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무런 까닭도 없었다. 이걸 해서 얻는 것도 딱히 없었다(천사는 이긴 팀한텐 뭔가 있다 말했지만, 어차피 아무것도 모르는 지금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비상은 이걸 하겠다고 스스로 나섰다. 아무 까닭도 없이.
둘은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겨있었다. 눈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비상은 ‘자기’들한테만 시간이 딱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 뒤, 둘은 일단 비상의 집에 다다랐다. 저 친구도 뭐라고 하지 않으니 일단 가장 편한 데가 낫겠다고 비상이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문 앞에 다다르자, 놀랍게도 눈앞엔 현의 모습이 있었다.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현을 보며 이렇게 묻고 있었다.
“여긴 웬일이니?”
“그냥 있고 싶어서.”
비상의 말에, 현은 아무렇지 않게 그런 대답을 했다. 용케 자기가 비상이란 걸 알아챘단 생각이 들었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아주 다른 사람이 된 것도 아니니 분위기는 있으리란 생각이 들자 비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현도 사실을 어떻게든 알고 있어서인지 비상을 신기하단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망울이 묘하게 초롱초롱 빛나는 느낌이 들어서, 비상은 오랫만에 어쩐지 민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현은 그런 비상이 그렇게나 신기한지 점점 가까이 다가오더니, 대뜸 이런 말을 꺼냈다.
“안아봐도 돼?”
“응?”
그 말투며 눈빛이 정말 진지해서, 비상은 그 말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비상은 고개를 끄덕인 뒤, 현한테 몸을 맡겼다. 현은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곧바로 비상의 품에 안겼다. 마치 비상이란 존재를 확인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비상은 현과 이런 식으로 마주볼 때마다 가끔 묘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묘하다 여긴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그, 마치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한 태도가 비상을 묘하게, 혹은 낯간지럽게 만들었다. 지금 자기는 아무튼 원래 윤비상과는 다른 존재인데도(‘바뀐 모습’보단 낫지만), 현은 그 속에 있는 비상을 찾기라도 하는 듯 자기 품에 세게 안겨있었다. 반쯤은 호기심, 또 반쯤은 신기함에 가득찬 표정으로 자길 놓아주지 않는 현을 비상은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 때였다.
“그런데 이건 뭐죠?”
속으로 느껴진 그 친구의 말을 듣고서야, 비상은 정신이 돌아온 걸 느꼈다. 그러고 보니 이 친구와 현은 동갑내기였을 터였다. 사실 이 친구, 즉 성종은 현이 누군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비상도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으므로 소개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즉, 이 친구는 지금 자기와 동갑으로 알고 있는 아이(현)한테 영문도 모른 채 끌어안겨진 거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랑 친한 아이거든.”
비상은 속으로 이렇게 말한 뒤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시간을 두고 좀 더 자세히 말할 생각은 있었지만, 비상은 지금 억지로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짧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사이도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현과는 생각해보면 참 여러가지 일이 있었다. 하룻동안 말해도 모자랄 만큼.
어쨌든 시간도 늦었으니 일단 자기로 마음먹고, 비상은 항상 하던 대로 이불을 폈다. 불을 끈 뒤 자리에서 누우려 하자, 모 친구가 말을 걸어오는 게 느껴졌다.
“형은 알고다니는 이성이 많으시네요.”
“부럽냐?”
이 놈이 이런 데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기에,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물어봤다. 잠시 대답이 없다가, 그 친구는 천천히 이런 말을 꺼내왔다.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그러고 보니 이 놈도 이성과는 그다지 인연이 없을 것 같다고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튼 이 놀이를 하겠다 말한 뒤로는 묘한 일만 가득하단 생각을 하며, 비상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신기하게도 잠드는 느낌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쩌면 이 역시 비상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