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밤 언리미티드 42. 어른이란 무엇인가(철학)

 

그 다음 날, 자리에서 일어난 비상은 어제 있던 일을 떠올렸다. 물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세림과 얘기했던 일이었다.
여러 모로 생각지 못한 경험이었단 생각을 하며, 비상은 오늘 할 일을 생각해봤다. 일단 오늘부터 휴가를 받았으므로 며칠 동안은 연구소에 안 가도 상관없기 때문이었다. 요즘엔 ‘놀이’ 때문에 좀 무뎌진 바 있지만, 비상도 이런 휴일을 보내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 때, 갑작스레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나라였다. 이 사람이 자기한테 전화를 걸 일이 있나, 란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전화를 받자마자, 나라의 뜬금없는 말이 비상의 귓속을 마구 울려댔다.
“그 이강산이란 사람 전화번호는 대체 뭐예요?!”
“갑자기 왜 그러시죠?”
“오늘은 진짜 뭐라고 한마디 해야겠어요. 아무튼 제가 만나자 했다고 말해주세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라는 그대로 전화를 끊으려 했다. 비상이 가까스로 나라를 불러세워 자기도 갈 수 있겠냐 묻자, 나라는 ‘그러시든가요’라 대답한 뒤 이번에야말로 전화를 끊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 생각하면서도, 비상은 강산한테 대신 전화를 걸기로 했다.
“니가 웬일이냐?”
비상이 먼저 전화를 건 게 그렇게 놀라웠는지, 강산의 첫마디는 바로 이거였다. 일단 이 사람이 오늘 나올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기 위해(아마 나올 수 있겠지만), 비상은 할 말을 입에 담았다.
“형, 오늘 시간 있어?”
“이응이응.”
맨 처음 저게 무슨 말인지 잠시 생각하다, 비상은 강산이 한 말이 대체 무슨 뜻인지 뒤늦게 알아챘다. 이젠 어이가 없어져서, 비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묻고 있었다.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야?”
“야, 이렇게 더워죽을 거 같은 날엔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무슨 사람이 이렇게 성의가 없어?”
“야야, 시끄럽고 그 얘기나 해 봐. 대체 뭔데?”
그렇게 귀찮단 듯 투덜대면서도, 강산은 비상의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들어줬다. 비상의 얘기가 다 끝나자, 강산은 어이없단 듯 이런 말을 내뱉었다.
“그 사람은 나한테 관심이라도 있는 거야 뭐야?!”
“형한테 원한은 있는 거 같던데.”
“그러니까 왜 내가…”
그런 말을 줄줄 늘어놓긴 했지만, 아무튼 강산은 비상의 말에 알았다고 대답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둘이 만나면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했다.
대체 오늘은 또 무슨 일이지.
나라한테 연락을 하며, 비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해서 잠시 뒤, 셋은 모 패스트푸드점 앞에서 만나게 되었다. 나라는 바뀐 모습이었지만, 비상은 절대 그걸 입에 담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미 여러 번 큰일을 겪었던 탓이었다.
오늘은 이 세 사람뿐만 아니라, 비상이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현(오늘도 곰귀모자를 쓰고 있었다)도 같이 있었다. 이런 혼돈스런 데에 현을 끌고오게 된 걸 미안하게 생각하면서도(사실 현이 오고 싶다 말해서 이렇게 된 것이었지만), 비상은 강산과 나라처럼 자기가 먹을 음식을 주문하려 메뉴판을 구경했다. 강산은 메뉴를 보다가 갑자기 뭔가 빤히 보더니, ‘오, 이런 게 새로 나왔냐?’란 말과 함께 초콜릿이 뿌려진 와플프라이를 주문했다.
“형은 단 것도 잘 먹어?”
“내가 싫어하는 게 어딨냐?”
비상의 말이 민망했던지, 강산은 그렇게 투덜댔다. 아무튼 네 사람 다 주문을 마치자, 비상 일행은 사람이 그다지 없던 2층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음식을 받아온 뒤 2층에 돌아오고 나서, 비상 일행은 자기가 사온 걸 하나둘씩 먹기 시작했다. 강산도 가지고 온 와플프라이를 먹다가, 갑자기 이런 말과 함께 불만을 드러냈다.
“이거 빵이 아니라 감자튀김이잖아!!”
“당연한 거 아냐?”
“와플이면 당연히 빵 아니냐? 신발, 감자튀김을 점심으로 먹으라니 제대로 속았어…”
비상이 자기가 사온 너겟을 손에 대자, 강산은 분하다는 듯 혼자 투덜대다 이윽고 포크를 손에 들었다. 나라는 바로 앞에서 그런 강산을 한심하단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 왜 만나자고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걸 누구 코에 붙이냐. 이런 젠장.”
결국 강산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는지, 잠시 뒤 이 가게 명물인 커다란 햄버거세트를 사들고 다시 올라왔다. 강산이 배고파 죽겠단 모습으로 햄버거를 입에 넣자, 나라는 마치 짐승이라도 보는 눈빛으로(강산을 기분나쁘게 여겼다기보다, 말 그대로 짐승을 보는 것처럼) 강산을 빤히 쳐다봤다. 이 역시 나라가 강산을 어떻게 여기는지 생각하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식사가 이뤄졌을 때였다.
“그래서, 난 왜 찾은 건데요?”
“그 쪽 때문에 제 인생이 꼬인 건 알고 하는 말이에요?!”
드디어 강산이 입을 떼자, 나라는 이런 말과 함께 죽일 기세로 강산을 노려봤다. 나라의 말에 따르면, 강산이 지금껏 자기한테 해온 짓 덕분에 삶의 평온이 두 배는 넘게 깎였다고 했다. 나라가 하는 말이 좀 심하긴 했지만, 아예 없는 걸 지어낸 말은 아니었다.
“아니, 그럼 댁 힘든 것도 다 내 탓이라구요?”
“그 쪽 책임도 있단 건 왜 몰라요?”
강산이 어이없어하든가 말든가, 나라는 무척 당당한 모습이었다. 지금껏 여러가지가 마음에 쌓였던 듯했다. 나라는 여전히 열받는 걸 참을 수 없었는지, 강산을 보며 이런 말을 쏘아붙였다.
“그, 그러고도 댁이 어른이에요?”
“나, 나요?”
이 말에 눈동자가 동그래진 강산은, 잠시 혼자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바로 옆에 앉아있던 비상의 허리를 쿡 찌르며, 다짜고짜 이런 말을 속삭여댔다.
“야, 비상아. 근데 어른의 기준이란 게 뭐냐?”
“성년을 했는지 어떤지 아냐?”
비상이 마지못해 이렇게 대답했지만, 강산은 여전히 속이 시원하지 않단 모습이었다. 다시 비상의 허리를 찌르더니,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이런 말을 속삭였다.
“야, 생각을 좀 해봐라. 내가 요즘 맘에 들어하던 술집이 천막 내걸고 두 달 쉰다했단 말이야. 고등학생 놈들의 성원 덕분에. 고등학생이랑 대학생이란 게 진짜 분간이 안 될 때가 있단 거거든. 근데 그게 무슨 차이일까, 은근히 신경쓰이지 않냐?”
“이 형도 참…”
비상이 어이없어하거나 말거나, 강산은 그 말과 함께 지금 미성년자처럼 보이는 나라를 슬쩍 쳐다봤다. 물론 비상 일행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을 터인 나라는 ‘이게 진짜…’라며 이를 부드득 갈고 있었다.
“근데 형이 어른이 아닐 리는 없잖아.”
“솔직히 내가 살면서 어른이란 걸 느낀 적이 딱히 없거든. 희한한 말이긴 한데.”
“그럼 술은 어떻게 마시는 거야?”
“이 자식아. 성인의 날이 안 지나면 술이 목구멍으로 안 넘어가디?”
강산은 그 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이런 말과 함께 햄버거를 한 입 크게 입에 집어넣었다. 아마 강산이 말하는 어른은 나이가 아니라 좀 더 위에 있는 개념인 듯했다. ‘그럼 난 어른이 아닌가 보죠?’라 나라가 작게 투덜댔지만,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진 않을 터였다.
“아무튼 그럼 어른이 뭐냐?”
“바람 하나 이뤄준다 할 때 세계평화라고 곧장 말하는 사람 아냐?”
“그딴 게 어딨냐?”
라고 말하긴 했지만, 강산도 비상의 말이 의외로 맞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가면 갈수록 이 상황이 어이없어짐을 느끼며, 비상은 이렇게 물어봤다.
“그럼, 바람 하나 이뤄준다 하면 형은 뭐라 말할 건데?”
“그걸 몰라서 묻냐? 당연히 세계정복이지.”
이 말을 듣자, 비상은 물론 나라도 어이없단 듯 강산을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강산은 아무렇지 않게 죽 말을 이어나갔다.
“세계정복뿐이냐? 이왕하는 거 처음엔 바람 99개 더 들어달라는 말부터…”
“퍽이나 어른인데.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이 자식이 잘난 척하냐?”
비상이 이렇게 말하자, 강산은 그게 무척 열받았는지 곧바로 목을 조이려들었다. 이제 나라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강산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현은 여전히 알 수 없는지, 비상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
“근데 어른이 아니고 말고가 뭐가 중요해?”
“나도 그런 생각이긴 한데, 저 형이 자꾸…”
“왜 나한테 그래?!”
비상이 이런 말을 하자, 강산은 그 말이 억울한지 또 불만을 드러냈다. 이번 기회에 이 말만은 해야겠단 생각에, 비상은 강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어른이든 말든 왜 그런 걸 따지고 들어? 형만 잘살면 그만이지.”
“야, 어쩐지 궁금해진다는 게 있잖아.”
그 말과 함께, 강산은 더 먹을 것이 없었는지 비상의 감자튀김을 뺏어먹기 시작했다. 가면 갈수록 헛웃음이 나오는 걸 느끼며, 비상은 이렇게 물었다.
“그러니까 뭐가?”
“어쩐지 심오한 주제같지 않냐? 철학이라고 해야 할까, 언젠가 사람이 다다라야 할 거 같은…”
그런 말을 하며 감자튀김을 씹는 강산을 보면서, 비상은 대략 이 형의 머릿속을 짐작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철학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형이 이상한 데에 꽂혔단 것만은 틀림없었던 것이다. 비상 입장에선 골치아픈 일이었지만.
대체 왜 얘기가 이런 데로 빠졌지.
결국 강산이 비상의 감자튀김을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비상 일행이 점심을 먹은 뒤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야, 저건 또 뭐야?”
강산이 손가락질까지 하며 놀라자, 비상도 고개를 들어 그 쪽을 바라봤다. 거기엔 전에 본 그 여성과 같이 지나가던 금빛 밤 연소자(이젠 이름도 알지만 그냥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가 있었다. 둘은 마치 사귀기라도 하는 것처럼(사실 그랬지만) 서로 손을 잡은 채 다정하게 길을 걷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금빛 밤 연소자가 보인 모습으로는 조금 상상하기 힘들 만큼 다정한 느낌이었다.
“저, 저 자식은 여친도 있다고 아주 잘난 척을…”
“저 모습으로 다들 그렇게 볼 거 같아?”
이를 부드득 가는 강산한테 그렇게 말하면서도, 비상은 그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이왕하는 거 저 놈한테도 물어봐야겠다 생각한 것이다. 딱히 까닭은 없었지만.
“뭐, 뭐야?”
비상이 가까이 다가가자, 금빛 밤 연소자도 그걸 알아챘는지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있던 일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옆에 있는 여성은 아직도 비상 일행에 관한 얘길 금빛 밤 연소자한테 못 들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렇게 속닥대고 있었다.
“성준아, 이 사람들은 뭐야?”
“잠깐. 우리가 무슨 범죄자냐?!”
“갑자기 묻게 돼서 미안한데, 넌 어른이 뭐라 생각하냐?”
어이없어진 강산이 큰 목소리를 내든가 말든가, 비상은 얼른 그런 말을 입에 담았다. 금빛 밤 연소자도 그 말에 깜짝 놀랐는지, 이런 말과 함께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 갑자기 또 무슨 소리야?”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금빛 밤 연소자는 자기 여자친구한테 ‘잠깐만 있어봐’란 말과 함께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비상의 생각보다 금빛 밤 연소자는 훨씬 더 진지한 모습이었다. 만약 그 일이 있기 전이라면 생각지도 못했을 모습이긴 했다.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던 금빛 밤 연소자는, 이윽고 천천히 입을 떼어놓았다.
“뭐, 나도 그 일 뒤로 여러 가지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결국 자기를 책임질 수 있냐 없냐, 그거인 거 같더라고. 남의 도움을 전혀 안 받고 살 수 있냐없냐 그런 게 아니라, 그, 자기를 스스로 이끌어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라고 해야 되나. 암튼 그런 느낌이 들었단 말이야. 나도 그 어른이 아니니까 이런 패널티나 받고 자빠진 거지만…”
“그럼 그 때 일은 반성하고 있다 이건가?”
“하, 한 입으로 두 말하게 만들지 말라고. 이 자식들아!!”
비상의 말에 금빛 밤 연소자는 이렇게 큰소리치다가 혼자서 켁켁대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민망해하는 모습을 보면, 이 금빛 밤 연소자도 그 일로 사람이 된 듯했다. 옆에 있던 여성은 당연히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므로, 걱정스런 눈빛으로 금빛 밤 연소자를 보며 이렇게 묻고 있었다.
“근데 패널티가 뭐야?”
“그, 그런 게 있어. 그럼 우린 갈 거다.”
그 말을 남긴 채, 금빛 밤 연소자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 뒤에서 다정하게 여성의 머리를 감싸안는 금빛 밤 연소자를 보면, 둘이 다정한 사이란 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터였다. 지금은 사귀는 사이라 보는 이들도 드물 텐데(다른 모습이므로), 저 둘한테선 연인 특유의 느낌이 깊이 배어있었다. 저런 모습이라도 한 번쯤 부럽단 생각으로 뒤돌아보게 할 수 있을 만큼(강산이 이를 부드득 갈며 그렇게 하고 있었다). 아마 모습이 바뀌기 전이라 한들, 둘은 저렇게 다정한 사이였으리라 비상은 생각했다(그러던 와중, 강산은 여전히 금빛 밤 연소자의 노랗게 물들인 머리카락이 길게 드리워진 등을 노려보며 ‘저 자식은 모습이 바뀐 다음 더 사내자식처럼 보인단 말이야’라며 투덜댔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굴욕이라 여기는 듯했다).
그렇게 금빛 밤 연소자 관련 일이 마무리된 뒤, 다시 길을 걷는 비상 일행의 눈에 또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저 사람은 강화점에 있는 그 여자아이(실제로는 다르다 치더라도)가 틀림없었다. 비상은 잠시 생각하다, 그 여자애가 있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여자애도 그걸 알아챘는지, 걷다말고 비상을 보며 아무렇지 않게 이런 걸 물어왔다.
“아, 오랜만이네요. 요즘은 어떠세요?”
“사실은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 쪽은 어른이 뭐라 생각해요?”
“재밌는 질문이네요.”
그 말과 함께, 여자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아무 말도 없다가, 여자애는 천천히 입을 뗐다.
“비상 씨쯤 되는 분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 딱 잘라말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그렇군요.”
“특히 강산 씨같은 분이 이런 걸 생각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다고…”
“뭐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여자애는, 열받은 강산이 어깨를 마구 흔드는 바람에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무자비한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 비상은 문득 우연히 알게 되어 잠깐 만진 모바일게임 하나를 떠올렸다. 그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가 너무나 쉽게 죽는 바람에, 그 말이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남아있던 것이다.
>>갑작스런 죽음<<이었던가.
실제로 여자애는 자기 눈앞에 있는 게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지도 못하는 듯한 강산한테 어깨째 잡혀 흔들리는 바람에 ‘우아아아아악’ 말고 다른 말을 못하고 있었다. 과연 저 팔에서 풀려난다한들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라 생각하면서도,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혼자 생각에 잠겼다.
이 현장을 보면서, 비상은 저 하늘 위의 존재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가 아닐까, 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하늘 위의 존재라 한들, 아랫세상엔 이렇게 위험이 넘쳐나는 것이다. 별 것도 안 했는데 갑작스런 죽음이 닥쳐오는 무서운 아랫세상. 게임 속 주인공보다 하늘 위의 존재가 더 안됐단 생각에 비상은 쓴웃음이 절로 나오는 걸 느꼈다.
“형은 눈앞에 누가 있는진 알고 그러는 거야?”
아무튼 막는 사람은 있어야 하므로, 비상은 그런 말과 함께 둘을 어떻게든 떼어놓았다. 강산은 여전히 분한지, 아직까지도 이런 말을 하며 씩씩대고 있었다.
“야, 하늘 위의 존재인데 그딴 게 뭐가 중요해?!”
“못난 형이라서 참 죄송합니다. 거 참.”
“아뇨. 그럴 수도 있으니까요.”
또 여자애의 어깨를 잡으려드는 강산을 비상이 어떻게든 막자, 여자애는 이런 말과 함께 가던 길로 사라져버렸다. 이건 어디까지나 비상의 생각일 뿐이지만, 어쩐지 저 여자애가 무척 지쳐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로부터 조금 더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진짜 유치해서 같이 못 다니겠어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나라는, 강산을 쏘아보며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사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껏 참은 게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강산은 자기만 당하는 게 그렇게 열받는지, 이런 말과 함께 투덜댔다.
“댁은 안 유치한 줄 아나?”
“이 사람이 진짜…”
나라 역시 자길 노려보자, 강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이를 부드득 갈기만 했다. 사실 저 형이라 한들 짚이는 게 없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짚이기 때문에 더더욱 저렇게 하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라도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대뜸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 한복판에서 강산을 보며 이렇게 소리쳤다. 물론 강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채였다.
“오늘 날씨가 이렇게 더운 것도, 하늘이 저렇게 새파란 것도, 지금 내 다리가 아픈 것도, 저기 새가 날아다니는 것도 다 당신 탓이에요. 알아요?!”
이 말에,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마치 구경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나라 및 강산을 슬쩍 본 뒤 지나갔다. 강산도 넋이 나갔는지, 그 말에 잠시동안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하지만 이윽고 정신을 차린 뒤, 강산은 마치 바람빠진 풍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그만 목소리로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무, 무지개 반사…야, 윤비상. 넌 어디가는 거야?!”
“내가 다른 건 다 알겠어. 형이 교복을 입든 뭘 입든 좋다고 쳐. 그게 뭐야? 민망해서 같이 다닐 수나 있겠어?”
“내, 내가 유치한 게 그렇게 나쁘냐?!”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강산은 먼저 앞으로 나아가려던 비상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도 왜 비상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가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현은 이 광경이 그렇게 재밌는지, 한동안 세 사람한테서 눈길을 떼지 않고 있었다.
“어른이란 것도 별 건 아니구나.”
“그렇지?”
비상 일행한테서 몸을 돌린 채 이마를 짚고 있는 나라를 보며, 비상은 그렇게 대답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늘은 참 묘한 날이 틀림없었다.

결국 별다른 성과는 얻지 못한 채, 나라를 보낸 비상 일행은 다같이 오늘 만나기로 한 옥상으로 올라갔다. 오랜만에 경기를 보는 것이라서인지, 비상은 여기에 오는 게 굉장히 색다르게 느껴졌다. 조금 일찍 와서인지 옥상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저 구석에서 혼자 아래를 내려다보는 의지가 비상의 눈에 들어왔다.
“먼저 와 계셨어요?”
“다들 왜 이렇게 지쳐보여. 무슨 일 있었어?”
의지는 눈썰미가 좋은 덕택인지, 꽤 날카로운 질문을 비상한테 던졌다. 강산도 그게 놀라운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누난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거야?”
“그건 그렇고, 누나는 어른이 뭐라 생각하세요?”
“그게 궁금해서 그랬던 거야?”
비상이 묻자, 의지는 그런 말과 함께 잠시 먼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는 그 풍경에 눈길을 둔 채, 천천히 입을 떼어놓았다.
“내가 볼 때 어른은, 별 건 아니지만, 다른 이들을 다정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인 거 같아. 물론 다른 사람도 그렇지만, 자기 자신한테도. 그게 쉬운 건 아니지만 무척 어려운 것도 아니거든. 나만 그런가?”
“꼭 그렇지도 않을 거예요.”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비상은 어느 정도 의지의 말이 맞다 생각했다. 아마 의영이 형이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그러는 동안, 다른 연장자 및 연소자들도 하나둘씩 옥상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젠 누구한테 물어야 할지 망설여야 할 상황이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참 별것도 아닌 질문이었지만, 비상은 이걸 묻고 답을 듣는 게 그리 귀찮지 않았다.
그 때였다.
“혀, 형들 벌써 오셨어요?”
이런 말과 함께, 가방을 등에 멘 도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놈한테도 물을까 잠시 생각했지만, 도진도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니(현과 같은 나이) 비상은 한 번 물어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너 잠깐 일로 와 봐라.”
“아. 네. 왜 그러세요?”
비상이 자길 부르자, 도진은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며 비상 쪽으로 다가온 뒤 등을 죽 폈다. 그렇게 안 하면 비상한테 한 대 맞을 거라 믿기라도 하는 듯했다. 강산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도진을 보며 옆에서 끅끅대기 시작했다.
“저 자식 또 시작이다. 크하하.”
“뭘 그렇게 긴장해. 넌 어른이 뭐인 거 같냐?”
“어른이요?”
“그래. 어른.”
반쯤 멍한 표정을 짓는 도진을 보며, 비상은 그렇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진은 잠시 뒷머리를 긁적대다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뗐다.
“그, 글쎄요. 공부 생각밖에 안 나서…왜, 왜 그러세요?!”
“마음에도 없는 말 좀 하지 마라. 이 놈아.”
갑자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뒤 도진이 눈물을 글썽이자, 그 장본인인 강산이 이런 말과 함께 킬킬댔다. 저 형도 참.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비상은 다시 도진한테 이런 말을 건넸다.
“어차피 너도 몇 살만 더 먹으면 성년 아니냐?”
“근데 형들이 너무 어른이시니까요. 전 아직 멀었다, 뭐 그런 느낌이…”
“저 형을 보면서도 그런 말이 나오던?”
“뭐라고 이 자식아?!”
비상이 말을 끝맺자마자, 강산이 곧장 달려들어서는 목을 조이려들었다. 이젠 이런 일이 하도 많다 보니 어이없어할 겨를도 없었다.
“이 사람은 맞는 말을 해도…”
“아, 근데 솔직히 형은 진짜 어른인 거 같아요…아야!!”
“이 놈이 진짜…”
도진은 그렇게 눈을 반짝이다, 또 강산한테 꿀밤을 한 대 맞곤 머리를 감싸쥐었다. 비록 때리긴 했지만, 강산도 그 말엔 뭐라 할 말이 없는 듯했다.
그걸 잠시 보다, 비상은 바로 근처에서 자기네들을 지켜보고 있던 군청에게 이렇게 물어봤다.
“넌 어른이 뭐인 거 같냐?”
군청은 그 말에 무척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다가, 비로소 입을 뗐다.
“자길 책임질 수 있다면 그 때부터 어른 아닐까요?”
“넌 참 진지하기 짝이 없구나.”
“제가 생각해도 그런 걸요.”
“그런 걸 보고 재미없다고 하는 거야. 이 놈아.”
그런 말과 함께, 둘의 말을 가만히 듣고있던 강산이 뒤에서 군청의 목을 조르는 척하기 시작했다. 사실 강산 눈으로 볼 때 군청은 오히려 재미있는 사람일 거라 비상은 생각했다. 군청이 말하는 재미와는 좀 동떨어진 이야기였지만.
그걸 보던 잎새가, 이번엔 재밌겠단 듯 비상을 보며 이렇게 물어왔다.
“비상아. 나한텐 안 묻냐?”
“그러고보니 형은?”
“그럼 나한텐 괜히 묻는 거 같잖아. 이 자식아.”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잎새는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뭔가 떠올랐단 듯, 비상을 보며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솔직히 나는 그 어른이란 말 자체가 맘에 안 든다.”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엉뚱한 소리야?”
“나이가 어리고 말고가 뭐 중요하냐. 친해질 만하면 친구도 되고 그런 거지. 나도 만날 반말까라 그러고 내가 말놓자 그러지만, 솔직히 어른이고 형이고, 그런 거 불편하다 여길 때가 많거든. 사람 사귀는 데 그런 게 꼭 있어야 되냐? 나이가 적든 많든 배울 게 있음 배우는 거지.”
“생각보다 과격한데 그래?”
“싫음 말든가.”
잎새는 그렇게 킬킬대면서도, 그럭저럭 진심이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형이라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대략 다 물어봤나란 생각에 주위를 둘러보던 비상은, 별밤한테 말거는 걸 까먹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정말 별 건 아니었지만, 비상은 별밤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형은 어른이 뭐라 생각하세요?”
“이건 내 생각일 뿐인데 말해도 돼?”
“그러세요.”
그 말에, 별밤은 천천히 입을 떼어놓았다. 이걸 보면, 별밤은 멀찍이서 비상 일행을 가만히 지켜봤던 듯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생각하는 건 다르겠지만, 아마 어른은 자기가 지난 일을 되돌아보면서 ‘이렇게 됐으면 아마 지금보다 지위나 환경이 좋아지지 않았을까’라 생각하면서도 지금 자기가 놓인 처지에 고마워하는 거 아닐까?”
“지난 일을 후회하지 않는 거 말씀이세요?”
“‘그건 좀 묘한데. 나도 딱 집어말하기 어렵지만…만약 그 때로 돌아가서 자기 상황이 나아진다 하더라도, 지금 여기에 있는 걸 다행으로 여기는 그런 게 아닐까? 아무래도 어릴 땐 당장 자기 입장이 높아지는 걸 바라기 마련이니까.”
비상이 잠시 생각한 뒤 이렇게 묻자, 별밤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즉, 만약 지금과 다른 길을 걸어서 부와 명예를 손에 쥘 수 있다 하더라도, 그 길로 가지 않은 지금 자신을 고맙게 여긴다, 는 말인 듯했다. 비상의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다들 뭐하는 거야?”
그 때, 뒤늦게 나타난 의영이 이렇게 물어왔다. 이 형한테도 물어봐야 할까 망설이다, 아까 의지와도 얘기했단 걸 꺠달은 비상은 한 번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형은 어른이 뭐인 거 같으세요?”
“갑자기 그건 또 뭐지?”
“저 형이 하도 어른같지 않으니까…그만 좀 안 해?”
“이 자식이 진짜…”
등 뒤에서 강산이 자기 어깨를 잡는 걸 느낀 비상은, 의영한테 말하다말고 이렇게 소리질렀다. 강산도 투덜대긴 했지만, 비상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대충 무슨 뜻인진 알겠다. 그런데 내가 이런 걸 말해도 되겠어?”
“남성진 중에선 가장 연장자 아니셨어요?”
“그건 그렇지.”
그런 말을 하면서도, 의영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뭔가를 곰곰히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다른 사람들 눈엔 어른처럼 보일 때가 됐구나. 믿기진 않지만.”
의영은 그 말과 함께, 이번엔 먼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마치 방금 전 의지를 보는 듯한, 아득하면서도 묘한 눈빛이었다.
“솔직히 내가 어른이란 것도 좀 그렇지. 그럼 대체 누가 어른일까? 그 천사라는 존재? 가게에 있던 분? 아니면 뭐지? 아무튼 의지 누나쯤이면 충분히 어른인 거 같다.”
그 말투를 보면 의영은 여기에 관해 좀 더 진지하게 여기는 듯했지만, 비상은 그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이제 경기가 시작될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이번 경기는, 파란 밤 대 금빛 밤의 싸움에서 금빛 밤이 이기는 걸로 끝났다. 오늘의 놀이가 모두 끝나자, 파란 밤 및 금빛 밤 팀원들도 붉은 밤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모처럼 드문 얼굴들이 보이는 이 때, 비상은 근처에 있던 해원한테도 이걸 물어보면 어떨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 쪽은 어른이 뭐라 생각해요?”
“저요?”
마침 옆에 있었기에 물어보자, 해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작스런 말이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생각하던 해원은, 이윽고 이렇게 말하며 웃어보였다.
“솔직히 저는 아직 실감이 안 나는데요. ‘일단 성년이긴 한데 그런 느낌이 안 들어서…이게 어른이긴 할까요?”
“이번엔 무슨 얘기하는 거예요?”
그 때, 이번엔 등 뒤에서 은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왕하는 거란 말도 묘하지만, 비상은 은솔한테도 이걸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물어볼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라 씨는 어떻게 됐니?”
“혼자 엄청 분해하던데 무슨 일 있었어요?”
“그럼 괜찮은가 보구나.”
그 말에 마음이 놓인 비상은, 이젠 정말 나라를 잊고 하고싶었던 걸 물어봤다. 물론 그 자리에 없었던 은솔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이었지만.
“넌 어른이 뭐인 거 같니?”
“엄청 뜬금없는 질문이네요.”
“내가 생각해도 그런데 뭘.”
자길 빤히 쳐다보는 은솔을 마주보며, 비상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낮에 강산이 그런 말만 안 했으면, 비상도 이런 걸 일일이 묻고다니진 않았을 터였다. 잠시 생각하던 은솔은, 이윽고 이렇게 물어왔다.
“근데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응?”
“어른이냐 아니냐는 딱히 안 중요한 거 같은데. 그런 거 몰라도 자기만 좋으면 된 거 아니예요? 나만 그런가?”
“꼭 너만 그렇지도 않을 거야. 나도 그렇거든.”
“근데 왜 묻는 거예요?”
은솔의 말에, 비상은 오늘 있었던 일을 되돌아보았다. 강산의 철없는 짓(?)으로 시작된 ‘어른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이었지만, 사실 방금 말한 대로 비상도 은솔과 비슷한 생각이었다. 자기가 어른인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여긴 것이다. 하지만 오늘 이런 걸 묻고 다닌 건 그런 게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다들 그 ‘어른’이란 걸 어떻게 여기고 있느냐, 그게 궁금해서 지금껏 비상은 이런 질문을 해온 것이다.
자기도 은솔한테는 어른으로 보인다는 점에 쓴웃음을 지으며, 비상은 밤하늘을 가만히 바라봤다. 물론 철학같은 걸 생각하면서 바라본 건 전혀 아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