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밤 언리미티드 44. 못난 아우 이야기

다음 날, 잠에서 깬 비상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자기는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주위를 둘러본 비상은, 이내 그 위화감이 뭔지 깨달았다. 자기 오른쪽에서 이불도 안 덮은 채 어디서 많이 본 남학생이 깊이 잠들어있던 것이다.
그제야 비상은 어제 있었던 그 일을 떠올렸다. 자기도 믿기 어렵지만, 아무튼 어제 있었던 ‘그 일’은 진짜였던 게 틀림없었다. 참고로 왼쪽을 보니, 현이 몸을 웅크린 채 쿨쿨 잠들어있었다. 이건 이제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은 비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씻은 뒤 다시 나오자, 이번엔 또 다른 희한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조그만 여자애가 누워있던 이불 속에서, 마치 디지털 영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현실감이 묘하게 없는 무언가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언가는 비상만큼은 몸집이 있는 성인남성, 즉 아무튼 현이었다.
그 초현실을 빤히 보던 비상은, 문득 오른쪽에서 그 친구도 일어나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잘 잤냐?”
“아, 돌아왔네요.”
비상이 그런 말을 건네자, 저 멀리 있는 친구는 그렇게 답했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그 친구, 즉 성종은, 전혀 보지 못한 남자가 자기 앞에 있는 걸 보고 다시 비상한테로 고개를 돌렸다.
“근데 누구죠?”
“어…”
라고 비상이 제대로 말하기도 전에, 갑자기 현이 성종한테 손을 내밀어왔다. 그리곤 뭐라 대답할 틈새조차 없이, 곧바로 이런 말을 건넸다.
“앞으로 잘 지내자.”
그 갑작스런 말을 듣고 나자 성종은 이제야 뭔가 알겠단 표정을 짓더니, 아무 말도 없이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그걸 옆에서 보는 비상은 그야말로 쓴웃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비상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현은 자기가 방금 한 일(악수)이 그렇게 신기한지, ‘오오’라며 혼자 감탄하고 있었다.
“이런 거 한 번 해보고 싶었어.”
“악수를?”
“응. 이런 모습으로.”
비상의 말에, 현은 그렇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무지 상황을 알 수 없지만, 비상은 일단 저 친구도 당황할 때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됐다 치기로 했다. 현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팔뚝을 보면서 방금 그 악수를 다시 떠올리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날 저녁.
“형, 어, 어젠 죄송해요!”
항상 그렇듯 비상이 옥상에 나타나자, 해원은 갑자기 달려와선 대뜸 이렇게 외쳤다. 이 친구가 대략 왜 이러는지는 알 것 같았지만, 이게 자기 손까지 양손으로 붙들고서 사과할 일인지 어떤지는 비상도 알 수 없었다.
“이미 저질러놓고 또 무슨 소리야. 나 참.”
“그, 그래도…”
“이 놈은 왜 지금와서 이러는 거냐?”
비상이 손을 떼어놓으며 이렇게 말하자, 이번엔 옆에 있던 강산이 끼어들었다. 아무튼 저 표정으로 볼 때 해원 입장에선 여러 모로 민망한 일이었던 듯했다.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인 뒤 물러가는 해원을 보며, 강산은 이런 말과 함께 다시 킬킬댔다.
“아무튼 저 놈도 참 희한하다니까.”
비상도 그 말은 이상하지 않다 생각했다. 사실 비상 눈엔 이 형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 어젠 즐거웠냐?”
이젠 잎새도 옥상 위에 올라와선, 이런 말과 함께 낄낄댔다. 때마침 같이 올라온 도진은 그 말이 영문을 알 수 없었는지, 잎새를 쳐다보며 이렇게 물었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그럼, 어젠 아주 재밌는 일이…”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던 잎새는, 요 놈 봐라? 란 표정으로 도진을 빤히 바라봤다. 마치 미끼를 문 물고기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잎새는 도진의 양쪽 머리를 주먹으로 쥐고는 여기저기 문질러대기 시작했다. 물론 도진이 어떤 느낌인지는 전혀 생각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 놈 봐라. 내가 말을 까라고 그렇게…”
“아, 아, 아니 그러니까 전 지금와서 형들한테 말까는 건 좀…”
“야 인마. 뻥을 깔 꺼면 제대로 까라. 군청이 저 놈은 보고 말하는 거지, 그지?”
물론 도진은 도망가려 했지만, 저런 건 기가 막히게 잘 하는 잎새한테 그게 먹힐 리 없었다. 아주 물만난 고기처럼 도진을 가지고 놀던 잎새는, 상황을 몰라 어이없어하는 비상한테 어떻게 된 일인지를 줄줄 늘어놓았다.
잎새 말에 따르면, 이 친구는 지금껏 말까도 된다고 했는데 형들한테 꼬박꼬박 존대해왔다고 했다. 물론 그게 이상한 건 전혀 아니었다. 비슷한 성향으로는 역시 잎새한테 말을 안 까는 군청이 있었으며, 비상의 기억으론 승지도 말을 놓지 않았을 터였다. 물론 잎새도 병적으로 반말을 고집하는 성격은 아니라서 그럴 땐 그냥 냅뒀지만, 도진만은 조금 상황이 다른 듯했다.
“아니, 얘가 안 하겠다는데 형이 왜 그래?”
“이 놈 수상쩍단 말이야. 맨 처음에 반말하다 잽싸게 존대로 고쳤거든. 그런 적이 몇 번이더라…지금 와서 말 바꾸기 민망하니까 반말을 못하는 거지, 실은 입이 근질거리는 거야. 반말하고 싶어서. 너 실은 존대 관두고 싶지, 그지?”
비상이 어이없단 말투로 그렇게 말하자, 잎새는 그 말과 함께 도진의 머리를 다시 문질문질거렸다. 도진은 이제 나 죽겠단 표정으로 이런 말과 함께 눈길을 슬며시 돌렸다.
“그, 그럴 리가 있어요? 저, 저는 지금이 편하니까…”
“이 자식, 괜히 자존심이 있으니까…”
“아, 아니, 아니에, 으아악…”
그런 말과 함께 신나게 당하는 도진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진심을 숨기려는 듯한 수상쩍은 데가 있었다. 대체 저 놈은 무슨 비밀을 숨기고 있을까. 비밀과 아무 상관없어보이는 도진의 순진무구한(어떤 점에선) 표정을 보며, 비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대략 둘러보니, 붉은 밤 연장자들은 거의 모두 옥상에 모여있는 듯했다. 잎새도 이제 도진의 비밀을 캐는 건 관뒀는지, 자기 옆에 있던 강산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
“근데 그거 진짜냐?”
“뭐가?”
강산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묻자, 잎새는 뭔가 건수라도 잡았단 듯 씩 웃어보였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무슨 오늘 날씨 얘기라도 하듯 이런 말을 꺼내놓았다.
“뭐긴 뭐냐, 니가 세탁소집 아들이란 거…”
“정말이야?”
“그야 정말이지. 저 놈이 뭘 잘못먹지 않은 이상은…으아악!”
잎새는 더 이상 말을 끝맺지 못한 채, 그대로 강산한테 쫓기는 몸이 되고 말았다. 저 둘은 내버려두기로 마음먹은 뒤, 비상은 근처에 있던 별밤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
“아무튼 맞는 말이에요?”
“방금 밝혀진 충격과 공포의 사실이지. 잎새 쟤가 왜 늦었냐 물어보니까, 강산이 저 놈이 자기 아버지 가게 도와주다 늦었단 말을 하는 거야. 그래서…”
별밤이 킬킬대며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비상의 등뒤에서는 잎새의 비명과 함께 강산의 ‘이 자식이 진짜 죽어볼래?!’란 외침이 들려오고 있었다. 불쌍하지만 저 형은 강산한테 잡히고 만 게 틀림없었다. 물론 비상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알았다구요?”
비상이 다시 묻자, 별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아까 하던 말을 다시 이어갔다.
“비상이 니가 오기 직전까지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근데 거짓말일지도 몰라. 애초에 너무 뚱딴지같은 이야기고…”
“이 자식이. 또 그럴 거야, 안 그럴 거야?!”
그렇게 말을 하던 별밤은, 자기 등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이 목소리는 아무리 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강산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같이 들려오는 소리로 볼 때, 저 형은 틀림없이 누굴 패고 있었다.
물론, 그게 누구인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알았으니까 좀 살려 줘 진짜!!”
잎새는 이러다가 정말 자기가 죽으리라 생각했는지, 온 힘을 바쳐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뿜어도 모자람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비상은 물론, 그 주위에 있던 연장자 및 연소자들도 그다지 그럴 생각은 없는 듯했다.
별밤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이런 말과 함께 거기서 눈길을 돌렸다.
“이 얘긴 그냥 나중에 하자. 비상아.”
“그게 낫겠네요.”
물론 비상도 불똥이 옮는 건 바라지 않았기에, 그런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난 뒤, 강산은 잎새를 끌고 다시 돌아왔다. 이제야 좀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다른 연장자들은 거의 다 질렸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파랑은 빼고.
“근데 맞는 말이잖아. 강산이 너희 집이 세탁소하는 거.”
“저 놈들이 내가 무슨 돌연변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잖아. 젠장.”
파랑이 킬킬대자, 강산은 이런 말로 불만을 드러냈다. 즉, 이 사람은 ‘내가 세탁소집 아들이란 게 그렇게 이상하냐. 이 나쁜 놈들아?!’란 말이 하고싶은 듯했다. 강산의 성격이라면 이런 데 화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잎새는 아직 덜 당했는지(몸은 누더기였지만), 여전히 미심쩍단 표정으로 이런 말을 던졌다.
“그런 놈이 이러고 다닌단 말이야?”
“내가 뭐 어때서?!”
그 말을 듣자마자, 강산은 이런 말과 함께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잎새는 이제 무서운 마음도 싹 가셨는지, 아무렇지 않게 신난 목소리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
“니가 사는 집 꼴을 봐라. 누가 널 세탁소 집 아들이라 생각하냐?”
“시, 시꺼…”
이번엔 좀 찔리는 데가 있었는지, 강산은 그렇게 말꼬리를 흐리며 잎새한테서 고개를 돌렸다. 사실 강산의 자취방에 가 본 사람이라면 전혀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적어도 비상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 형의 말에 따르면, 자기가 세탁소집 아들이란 걸 밝히자 눈을 동그랗게 안 뜨는 사람을 찾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당한 일이라서 이젠 화도 안 난다는 듯했다. 물론 방금 잎새가 당한 걸 보고도 저걸 믿는 사람은 없겠지만. 덕택에 집에서 지낼 땐 아버지 대신 세탁물 배달하러 다니느라 바빴단 말도 덧붙였다.
강산은 여전히 분했는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중학교 땐 이런 놈도 있더라. 왜 세탁소집 아들이 깔끔 안 떠냐고. 이 자식아. 넌 날 뭘로 보는 거냐?!”
“뭐, 세탁소집 아들?”
“아 진짜, 이 자식이!!”
이젠 더 이상 못 참겠는지(이미 그랬지만), 강산은 이 말과 함께 잎새한테 덤벼들었다. 물론 잎새는 앓는 소리를 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저 형을 바닥에 쓰러뜨린 채로 강산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강산의 말에 따르면, 그 일은 엉뚱한 데서 엉뚱한 만화를 읽고 온 놈이 저지른 짓이었다고 했다.
“그 놈이 또 뭐라고 하는 줄 아냐? ‘야. 세탁소집 아들인데 ‘니 옷에서 더러운 냄새가 난다’ 이런 말도 안 한단 말이야?’라더라. 이런 젠장. 그건 어디 사는 누구냐?!”
그 때 그 일이 그렇게 분했는지, 강산은 다시 이렇게 외쳐댔다. 이제 연장자들은 모두 난간에 기댄 채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들 강산의 말보다 강산의 태도가 훨씬 더 웃기단 표정이었다.
강산은 여기까지 말하자 자기도 모르게 입이 풀렸는지(아니면 맺힌 게 많았는지), 아무도 안 물은 다른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강산의 집엔 형도 있었지만, 자기 형은 공부하느라 바쁘니까 만날 자기가 아버지 심부름을 도맡아했다는 말이었다. 이 뒤부터 강산의 얘기는 형의 한탄으로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 내용은 깊이 안 들어도 뻔했다. 자기는 어떻게 해도 형을 이길 수 없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사실 비상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그걸 모르진 않았지만, 이렇게 강산이 그 때 일을 줄줄 털어놓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강산의 말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형 좀 보고 배우라고 닦달한 건 물론이고, 운동을 하든 싸움을 하든 뭘 하든 저 형을 이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공부는 진작에 포기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물론 말로 이겨본 적도 없고, 웬만해서는 다 이기는 몸집으로도 저 형을 이길 수 없었다. 애초에 저 형은 자길 맞수로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건 물론이었다. 즉, 이건 강산 혼자 열받아하는 대목인 것이다.
“뭐, 니들 중 강철이 형 본 사람도 몇몇 있겠지만…”
그 가라앉은 목소리만 들어도 강산의 저 말이 진심이란 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었다. 물론 비상도 그 때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 본 기억에 따르면, 강철은 누가 봐도 강산만큼(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좀 더) 몸집이 있었고, 자신만만했으며, 여유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강산이 그런 열등감을 갖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일단 성인이며 다른 사람이 조금 움칫할 만큼 몸집도 있는 강산이, 집에선 형한테 어린애 취급이나 당하고 지냈으니까.
덕택에 강산은 자기가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을까란 걱정을 철들 무렵부터 지금까지 죽 해왔다고 했다(어쩌면 그 전부터일지도 모르지만). 이 역시 그 때 강산이 보인 주눅든 모습을 생각하면 전혀 이상한 말이 아니었다. 저 형이 의외로 당하기 쉬운 성격인 것도 어쩌면 그런 까닭에서 왔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이런 말이 너무 길어져서인지, 그래도 형이 싫단 건 아니라고 강산은 끝에 가서 덧붙였다.
“그저 내가 못나서 그렇지. 이런 젠장.”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강산은 이제 정말 먼산을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오자, 다른 연장자들도 더 이상 강산을 마구 놀려대진 않았다. 비상도 형제는 없었지만, 뭐든지 잘하는 형한테 이길 데가 하나도 없었단 무력감은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물론 당사자인 강산과 대보면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
그 때였다.
“이제 시작할 건데 강산이 넌 여기 있었냐?”
그런 말과 함께, 오늘도 흰 티를 입은 의영이 옥상에 나타났다. 그 말을 듣자, 강산도 ‘아, 맞다’란 말과 함께 다른 연장자들을 둘러봤다.
“쓸데없는 말하다가 다 까먹었네. 그럼 나 먼저 간다.”
“오늘 나가는 날이에요?”
그렇게 손을 흔드는 강산을 보다가, 비상은 그렇게 물어봤다. 별밤도 이제야 깨달았는지, ‘뭐, 그렇지’란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제대로 말하자면 오늘은 다른 연소자 차례였는데, 그 연소자가 몸이 안 좋단 까닭으로 강산과 순서를 바꿨단 말도 덧붙였다. 강산의 성격과 방금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상대방인 금빛 밤한테는 그야말로 재앙이 떨어진 셈이었다. 물론 저쪽 밤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저 놈 며칠 뒤에 또 있는데 괜찮나…”
별밤이 중얼대는 사이, 어느새 놀이는 시작되어있었다. 비상의 생각과 달리, 처음엔 그래도 평화롭게 놀이가 이뤄졌다. 적어도 나간 사람이 강산 및 금빛 밤 연소자란 걸 생각해보면 그랬다.
문제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일어났다.
“이 자식이 그거밖에 못 하냐?”
“뭐라고?!”
갑자기 금빛 밤 연소자가 이렇게 도발하자, 강산은 이렇게 눈을 부라렸다. 그걸 보던 비상은 그다지 좋지 않은 느낌을 받고 그늘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물론 저 자리에 난 불이 크게 번질 느낌도 들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아니나다를까, 그늘진 곳에 다다르자마자 비상은 ‘그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어제 그런 일이 있어서 반쯤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비상은 사실 언제든지 이렇게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정말로 어제와는 아주 딴판인 느낌이 곧장 비상을 감싸기 시작했다. 다른 누군가와 같은 모습을 쓰는 것과 몸이 줄어드는 것 중 어느 게 더 낫냐는 건 아무 의미도 없는 질문이겠지만, 굳이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묘한 느낌이었다. 몸이 슥슥 줄어드는 건 물론 입던 옷이 묘하게 바뀌고, 아무튼 여러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들이 같이 일어나고 있지만 비상은 이제 반쯤 포기했으므로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비상이 그렇게 있을 때, 연장자들이 갑자기 그늘 쪽으로 우루루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비상은 지금 바뀌고 있단 사실도 잊어버린 채 이렇게 물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죠?”
“싸움이 좀 크게 번졌거든.”
비상이 자기 목소리가 희한하단 걸 뒤늦게 깨달았을 때, 파랑이 아무렇지 않게 그런 대답을 했다. 이야기를 듣자하니, 결국 아까 그 시비가 죽 이어져서, 놀이가 판정으로 넘어갔는데도 저 둘은 여전히 말싸움하고 있는 듯했다. 그나마 몸싸움이 아닌 게 다행이긴 하지만, 괜히 옆에 있어봤자 불똥만 튀므로 일단 연장자들은 여기 있기로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다들 이 옥상을 뜨겠단 말을 한 마디도 안 하는 걸 보면 과연 붉은 밤이라고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붉은 밤 연장자들 및 비상, 그리고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는지 알 수 없는 현은 그늘진 곳에서 저 둘을 몰래 훔쳐보게 되었다.
“이 자식이 진짜…”
비상이 저 쪽으로 귀를 기울이자, 강산이 이렇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걸 보면, 비상이 모르는 사이 저 너머에선 많은 일이 있었던 듯했다.
하지만 상대방 금빛 밤 연소자는 그런 강산이 무섭지도 않은지, 킬킬대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니같은 놈을 기른 부모님 얼굴이 보고 싶다. 이 놈아.”
“뭐라고?!”
이렇게 놀려대는 말을 듣자, 강산의 눈빛이 곧바로 바뀌었다. 말을 듣자하니, 저 연소자는 강산과 한 살 차이인 듯했다. 그렇다면 비상과 같은 나이이니 저렇게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상황이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는 건 틀림없었다.
아무튼 강산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바로 이렇게 외쳐댔다.
“우리 엄마 욕하지 마!”
“어유. 그러셔?”
“니가 뭔데 우리 엄마를 욕해. 우리 엄마 욕하지 마. 우리 형을 욕해. 알았냐?”
이 말을 듣자, 그늘 뒤에 숨어있던 붉은 밤 연장자들은 하나같이 숨죽여 킬킬대기 시작했다. 금빛 밤 연소자는 영문을 알 수 없었는지, 그 말을 듣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알지도 못하는 니네 형을 왜 욕하는데?”
“그럼 우리 엄마는 왜 욕하냐. 이 나쁜 놈아?!”
이쯤되자, 붉은 밤 연소자들은 이제 눈물까지 흘리며 낄낄대고 있었다. 그걸 보던 비상은 어이가 없어져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 애들 보기 민망해지는 저차원 싸움을 일단 성인이 된 남자 둘이 저지를 줄은 몰라서였다.
게다가 저 형은, 저걸 진심으로 말하는 듯했다.
“우리 형 욕하는 건 내가 봐줄게. 그러니까 우리 형만 욕하라고. 알았어?”
“이건 대체…”
비상이 어이없어하거나 말거나, 붉은 밤 연장자들은 일단 웃고 보자는 분위기였다. 이런 싸움을 보며 불안해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더더욱 우스운 일이라고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뭐야 이 놈. 아까부터 맛이 가선…니네 형이 그렇게 무섭냐?”
“누, 누가 무섭대?!”
“저거 보니까 딱 쪼는 거네 뭐. 지도 자기가 못난 건 아나 보지? 엉?”
“이 새끼가 진짜. 바, 밥은 먹고 다니냐?!”
금빛 밤 연소자도 질렸단 듯 이렇게 말하자, 강산이 대뜸 밑도끝도 없는 말을 꺼내놓았다. 이제 벽 뒤에 숨어있던 붉은 밤 연장자들은 뜬금없는 이 말에 ‘풉!’하며 여기저기서 뿜기 시작했다.
금빛 밤 연소자도 어이가 없었는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이렇게 외쳤다.
“…자장면 곱배기 먹었다. 됐냐?!”
“말 좀 곱게 안 해, 이 놈아?”
“니가 먼저 곱게 해. 이 자식아!!”
저 너머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그늘에 있던 붉은 밤 연장자들은 이제 소리를 죽일 생각도 안 한 채 낄낄대고 있었다. 벽 뒤에 있던 비상도 이제 어이가 없어져서, 혼자 이런 말을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저건 무슨 아무말 대잔치야?”
“끄, 끅끅. 크하하하…”
비상이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을 중얼거리자, 갑자기 주위에서 더 못 참겠단 듯 낄낄대는 목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이젠 참는 거고 뭐고 없었다. 지금 붉은 밤 연장자들은 끅끅대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만 가득했다.
“비상아. 너 오늘 진짜 재밌는 거 같애. 크하하하.”
특히 파랑은 비상의 말이 그렇게나 감명깊었던지, 이런 말과 함께 비상을 뒤에서 끌어안기 시작했다. 몸집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비상이 그 품에 그대로 들어간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갑작스런 일에 비상이 잠시 가만히 있거나 말거나, 파랑은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강산이 당하는 걸 무척 좋아하고 있었다. 비상은 더더욱 어이가 없어졌지만, 주위 연소자들은 자기네, 즉 비상을 끌어안고 있는 파랑을 보며 더더욱 끅끅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러다가 이 사람들 웃겨죽는 건 아닐까.
이런 목소리가 저 밖까지 들려오고 있는 게 틀림없는데도, 강산 및 금빛 밤 연소자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사실 이제 와서 이런 소리를 신경써봤자 붉은 밤한텐 더 웃길 따름이었으니, 저렇게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특히 강산은 방금 일이 그렇게 분했는지, 아직도 싸울 힘이 넘쳐나는 듯했다.
이대로 가다간 더 유치한 말이 마구 나오는 건 아닐까. 여전히 파랑한테 감싸안긴 채, 비상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뭐, 뭐, 뭐야?”
금빛 밤 연소자가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리자, 비상은 다시 한 번 저 현장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현이 그늘을 벗어나 저 둘이 싸우는 데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게 비상의 눈에 들어왔다. 아마 이 미친 현장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듯했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현은 둘을 잠시 가만히 보다가, 이윽고 강산의 팔을 끌고 옥상으로 곧장 내려왔다. 그리곤 다들 놀랄 틈도 없이, 이번엔 강산의 어깨를 쥔 채 질질 끌고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건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기에, 다른 연장자들도 끆끅대다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당사자인 강산은 강산대로 자기(쯤되는 몸집)가 이렇게 가볍게 끌려갈 줄 몰랐는지, 이런 말과 함께 몸을 배배 꼬며 난리를 쳤다.
“야, 자, 잠깐. 이건 또 뭐야?!”
“역시 젊은 것들은 다르다니까. 크하하하하.”
아까 당한 게 그렇게 분했는지, 잎새는 이제 쭈그려앉은 채 낄낄대고 있었다. 아마 이 말을 의영이 들었다면 무척 복잡한 표정을 지었겠지만, 지금 저 형한테 그런 생각이 있을 리 없었다.
금빛 밤 연소자는 마치 자기 눈앞에서 멋대로 벌어지는 코미디라도 보는 듯, 한동안 벙찐 표정으로 가만히 서있었다. 그러다 잠시 뒤 이 상황을 대략 알아챈 듯한 표정을 짓고는, 한숨을 쉬며 이런 말을 남긴 채 자리를 떴다.
“이건 뭐하는 짓거리야. 아무튼 다음에 두고 보자.”
“내가 할 말이다. 이 자식…야, 현아! 막 끌고가지 말래도!!”
강산도 그렇게 맞붙다가, 여전히 자길 세게 끌고가는 현한테 그대로 잡혀가고 말았다. 대체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비상도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어른들이 벌이던 유치한 싸움은 이렇게 끝났다.
그런 생각을 누구나 하고있을 때였다.
“야, 잎새 넌 뭐하냐?”
별밤이 그렇게 묻거나 말거나, 잎새는 아직도 눈물을 줄줄 흘리며 누군가한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다들 한두명씩 그 쪽으로 모이는 가운데, 드디어 잎새의 핸드폰에서 ‘여보세요?’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상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이 사람과는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저, 가, 강산이 친군데요. 쟤가 자기 엄마는 욕하면 안 되는데 형은 욕하라길래…”
잎새는 이제 웃겨 죽겠단 표정으로, 그런 말을 전화 너머 상대방, 즉 강철한테 하고 있었다. 즉, 이 사람은 오늘 일을 강철한테 이르기로 작정한 것이다. 잎새가 오늘 일을(말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털어놓는 동안, 주위에서도 흥미진진(이라기보다 뭔가 바라는 표정)한 모습으로 잎새 및 핸드폰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잎새가 말을 다 끝맺은 뒤였다.
“아, 뭔가 했네. 니나 잘하라고 전해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강철은 전화를 끊었다. 그 때를 기다렸단 듯, 지금껏 참고 있던 웃음이 여기저기서 미친 듯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가 연장자 형들을 웃기게 만든 게 틀림없었다. 대체 저게 뭐 그렇게 웃긴지, 연장자들은 숨도 못 쉴 만큼 낄낄대고 있었다.
그 때, 저 너머에서 누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현한테 끌려간 뒤 겨우 풀려난 강산이었다. 강산은 잠시 ‘니들 뭐하는 거야?’란 눈빛으로 주위를 보다가, 이윽고 모든 걸 깨달았는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래서, 누가 먼저 죽고 싶냐?!”
“나, 나 아냐. 아냐. 아니라니까!!”
물론 말과 행동이 다른 잎새는, 그 뒤로 하늘까지 쫓아온 강산한테서 냅다 도망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쟤들은 언제 철이 드냐. 방금 자기들이 한 일은 까먹었는지, 붉은 밤 연장자들은 그런 둘을 아래에서 쳐다보며 낄낄대고 있었다.

아무튼 그 일이 어떻게든 끝난 뒤였다.
“젠장. 뭐가 니나 잘해야. 형도 진짜…”
결국 잡힌 뒤 호되게 맞은 잎새한테 상황을 모두 들은 뒤, 강산은 그런 말과 함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연장자들은 그게 재미있는지, 주위에서 소리를 죽인 채(다시 그랬다간 강산이 어쩔지 모르므로) 여기저기서 킬킬대고 있었다. 지금 강산은 축 늘어져있었기 때문에 살짝 놀려먹는 거라면 별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오늘 강산은, 다른 사람도 아닌 현한테 자기가 빗자루처럼 끌려갔단 데 무척 주눅이 든 것처럼 보였다. 이래뵈도 강산은 힘만은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강산이(바뀌었다곤 해도) 현한테 그렇게 마구 끌려갔으니, 넋이 나가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장자들은 무척 속시원하단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특히 잎새 및 왜 기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파랑이 그랬다). 사실 비상은 현이 별 생각없이 그랬으리라 생각했지만, 지금 현의 어쩐지 달아오른 모습을 보면 그런 것도 아닌 듯했다.
“무슨 생각해?”
비상이 넌지시 그런 말을 건네자, 현은 잠시 뭔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봤다. 그리곤 비상을 다시 내려다보며, 대뜸 이런 말을 꺼냈다.
“내가 강산이같은 사람을 막 끌고다닐 수 있단 게 신기하단 생각.”
“아. 그렇구나.”
그 말을 듣자, 비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말을 강산이 들으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도 실컷 놀림당하고 있으니, 이런 말은 안 하는 게 더 나았다. 강산의 뭐 씹은 듯한 표정을 보면 더더욱 그랬다.
그렇게 걷던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별밤을 뺀 다른 이들과 점점 멀어지고 있단 걸 깨달았다. 아무래도 다들 제정신이 없다 보니 누가 먼저 앞으로 갔는지도 모르고 있는 듯했다. 별밤도 별 상관없어하는 것 같으므로, 둘은 아무 말도 없이 같은 빠르기로 길을 걸어갔다. 비상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희한한 일이지만, 키 차이가 꽤 나는(적어도 지금은) 둘이 나란히 길을 걷고 있단 건 참 묘한 느낌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있을 때였다.
“그런데 비상이 넌 참 신기하다.”
“뭐가요?”
별밤은 가만히 걷다 말고, 갑자기 비상한테 이런 말을 걸어왔다. 비상이 되묻자, 별밤은 잠시 생각하다 다시 입을 뗐다.
“넌 모습이 어떻게 바뀌어도 항상 당당하단 생각이 들어서. 어쩌면 그 아우라란 것도 네 그런 모습에서 나오는 걸지 모르겠다. 뭐 그런 생각을 했거든.”
“그래요?”
비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는 모르겠지만 저 형한텐 그렇게 느껴지나 보다, 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비상한테는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걷다가, 별밤은 다시 입을 뗐다.
“비상아. 너 이런 말 알고 있냐?”
“뭐죠?”
“나도 기억이 좀 모호한데 말이야.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건 그 사람한테서 자기와 닮은 무언가를 찾아내고 미워하는 것이다. 당신 마음속에 없는 건 결코 당신을 괴롭힐 수 없다’. 대략 이런 말이었던 거 같은데.”
비상은 잠시 생각하다, 머릿속에 있는 걸 입에 담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비상도 이 말을 처음 듣는 것같지 않았다.
“어쩐지 심리 관련 책에서 본 거 같은데요.”
“그래? 난 어쩐지 문학 쪽 느낌이 든단 말이야. 아무튼…”
그렇게 말을 흐린 뒤, 별밤은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아직 달이 뜨지 않을 때라서인지, 하늘은 평소보다 훨씬 더 잠잠하게 느껴졌다.
“아무튼 말이야. 요즘 생각하는 건데, 결국 우리는 살면서 자기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더라고. 다른 사람들을 봐도, 다른 세상을 봐도,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밖에 안 보이는 거 같아. 하지만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라면 참 재미없겠지. 그지?”
“그렇죠.”
별밤의 말에, 비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형이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대략 알 것 같아서였다. 그게 비상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면 말이지만.
그렇게 길을 걷던 비상은, 어쩐지 자기가 지금 어둠 속을 걷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거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틀림없이 사람이 있는 어둠을 걷고있던 자기가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듯한 이상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자기 혼자만 있는 어둠 속을 걷고 있으면, 마치 이 곳이 기나긴 터널처럼 여겨졌다. 아무도 없는 긴 길을 걷고 있으니, 마치 여기가 늪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쩐지 이 길은 끝이 없고 어두우며, 더 이상 걸어갔다간 숨이 막힐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세상에서 자기 혼자 외딴 곳에 남겨진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비상은, 자기가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단 걸 깨달았다. 마치 현실감을 잃은 그래픽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상은 그리 크지 않은 몸집에서 원래인 20대 청년의 몸집으로 천천히 바뀌어가고 있었다. 마치 오늘 아침의 현을 보는 것처럼.
이건 또 대체 무슨 느낌일까.
자기를 둘러싸는 세상이 점차 흐릿하게 줄어드는 걸 두 눈으로 보면서,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누군가와 ‘하나’가 되었을 때와는 또 다른, 마치 자기를 받치고 있는 기둥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에 휩싸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