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밤 언리미티드 41. 사람에 대한 예의

다음 날, 비상은 현의 방에서 눈을 떴다. 자기가 왜 여기에 있는지를 생각하던 비상은, 바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어제 그 금빛 밤 연소자까지 떠올리자, 비상은 마음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이번 일로 금빛 밤 연소자가 전에 저지른 걸 뉘우칠지 어떨지를 생각해보는 비상이었지만, 아무튼 지금은 어떻게 잘 됐으니 그냥 넘기기로 했다. 일단 벌써 아침인 듯하므로, 비상은 천천히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현이 어디에 있는지 살폈다.
방 밖으로 나오자, 현이 바로 비상의 눈에 들어왔다. 현은 거실에서 이불을 편 채 바닥에 뒹굴며 자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냥 자고있는 게 아니라, 멀리서 봐도 똑똑히 알 수 있을 만큼 큰 죽부인을 끌어안은 채 자고 있었다. 원통모양 죽부인을 꼭 끌어안은 채 몸을 뒤척여가며 새근새근 자고 있는 현을 보며,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스며나오는 걸 느꼈다.
그 죽부인이 그렇게 좋은지, 현은 정말 거기에 매달리다시피하며 깊이 잠들어있었다. 그 작은 몸집으로 기다란 죽부인에 매달려있는 게 우스워서, 비상은 어떻게든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비상치곤 드문 일이긴 했지만, 어쩐지 지금은 그냥 그러고 싶었다. 괜히 기척을 보였다간 현이 깰까봐 걱정되는 것도 있었지만.
죽부인에 머리를 묻을 기세로 자고 있던 현은, 이윽고 위로 발랑 누운 채 천천히 눈을 떴다. 자기 눈앞에 비상이 있단 걸 깨달았는지, 현은 졸음에 젖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
“벌써 아침이야?”
“그래. 벌써 아침이야.”
비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현은 자기가 끌어안던 죽부인을 옆으로 치운 뒤 자리에서 일어나앉았다. 자는 모습을 남한테 보이고 있다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다. 비상이라면 기겁은 하지 않을지언정 저렇게 태연하진 않을 터였다.
잠시 뒤, 자리에서 일어난 현은 곧장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상이 소파에 앉은 채 기다리고 있자, 조금 시간이 지난 뒤 현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밖으로 나온 현은 비상 옆에 털썩 주저앉아 거실 구석에 있던 미니선풍기를 켠 뒤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비상은 뭔가 말을 걸어야겠단 생각을 했지만 그냥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소파에 앉은 채 손에 들고 있는 선풍기를 여기저기 휘두르는 현의 무심한 표정이 어쩐지 우습기도 했고, 보고 있으면 그냥 재밌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이 아이와 알고지낸 지 이제 두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고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튼 현이 채비를 다 끝내자, 비상은 오늘 어떻게 할지를 생각했다. 자기답지 않게 조금 늦게 일어나서인지, 벌써 해가 머리 위에 떠있었다. 일단 오늘 일은 없으니 여기에 있어도 상관없지만, 뭔가 할 일이 있는 듯한 느낌이 비상을 감싸고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비상은, 그러고 보니 일어났을 때 금빛 밤 연소자를 떠올렸단 걸 깨달았다. 어제 일로 연락하는 게 좋을까 잠시 생각하다, 비상은 그 연소자한테 전화를 걸었다.
“가, 갑자기 뭐야?”
잠시 뒤, 금빛 밤 연소자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이 시간에도 저런 목소리인 걸 보면, 아마 어제 밤을 샌 듯했다.
“어제 내가 그 PC방에 같이 있었던 건 알고 있나? 강산이 형이랑 현이도 같이 있긴 했지만.”
“뭐, 뭐라고? 거깄었어?!”
정말 짐작하지 못했던 것인지, 금빛 밤 연소자는 이 말을 듣자마자 당황한 말투로 이렇게 소리쳤다. 그 목소리로 볼 때, 어쩌면 정말 펄쩍 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말한 건 못 들었나 보지?”
“어, 어제 일 딴 사람한테 말하지 마. 말하기만 해 봐. 그냥 확. 알았지?”
“그러니까 나만 거기 있었던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그 성급하기 이를 데없는 목소리를 들으며, 비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걸 보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든 이 금빛 밤 연소자는 잘 지내는 듯했다.
“그런데 괜찮나?”
“쓰, 쓸데없이 무슨 걱정을 하는 거야?!”
목도 안 아픈지, 금빛 밤 연소자는 쉰 목소리로 몇 번이고 그렇게 외쳐댔다. 생판 남인 비상조차 저 연소자의 목이 걱정될 정도였다.
“난 엄청 괜찮으니까 더 신경쓰지 마, 알았어?”
그걸 마지막으로, 금빛 밤 연소자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어쩐지 지금껏 들어온 금빛 밤 연소자 목소리와는 다른 느낌이라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자기 느낌일 뿐이었지만.
게다가 비상은 금빛 밤 연소자한테 더 이상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참 갑작스럽게도, 비상과 현은 또 모습이 바뀌고 만 것이다.

그 뒤, 비상은 낮 늦게까지 현 및 현의 친구들과 함께 아주 특이한 시간을 보냈다. 사실 전에도 이 친구들과 같이 지낸 적은 있었지만, 이번엔 대개 바깥에 있었기에 그 때보다 훨씬 더 희한한 느낌이었다.
사실 특별한 일을 했던 건 아니었다. 그냥 근처 슈퍼에서 다같이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계단에 앉아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듣고, 옥상에 올라가서 다같이 스마트폰을 만지작댔을 뿐이었다. 옥상에 올라갈 때 계단 사이의 틈이 커서인지 몇몇 아이들이 부들부들 떨며 올라갔지만, 비상은 그럴 거면 대체 왜 올라가는 건지 알 수 없었기에 묘한 느낌이었다. 지금껏 안 해봤으며 앞으로도 할 일이 없으리란 뜻에선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긴 했다.
이 아이들을 기준으로 요즘 청소년 여자애들을 생각하는 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비상은 생각했지만(사실 초등학교 고학년도 끼어있었다), 요즘 애들 센스엔 도무지 따라갈 수 없단 것만은 똑똑히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치 이 아이들과 자기는 다른 세상에서 사는 듯한 느낌이었다(사실 그렇지만). 현은 ‘바뀐 모습’인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친구들과 진지하게 얘기하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비상은 이 현이란 아이가 보면 볼수록 참 대단한 아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저물어가는 햇살을 등진 채 옥상에서 내려오던 중, 비상은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골목에 서있는 걸 알아챘다. 그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대문까지 다다른 비상은 갑자기 희한한 일을 당하고 말았다. 갑자기 자기 등뒤로 누가 슥 다가서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영문도 모르는 상황에서, 비상은 대문 비스듬히 서있던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와 함께, 비상은 자기 등 뒤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현이 저 너머에서 핸드폰을 거울삼아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슬쩍 보여준 덕분이었다.
거울 속에 비친 건 등 뒤에서 어떤 친구의 손가락 덕분에 토끼귀 두 개가 달리고 만 비상이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이 애들이 장난끼가 흘러넘친다는 건 비상도 잘 알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눈이 마주친 그 사람한테 있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여기 있는 게 가장 희한한 사람, 세림이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저녁에 들어설 무렵.
비상과 세림은 어느 옥상 위에서 가만히 서있었다. 물론 서로 지금 만나자고 해서 여기에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둘 다 등진 채, 서로를 보려고도, 말을 걸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까닭을 비상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기가 아직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은 탓이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세상이 안 그래도 말없는 둘을 더 말없게 만들었다.
물론, 언제까지고 이럴 수는 없었다. 둘은 여기에 이야기를 하러 왔던 것이다. 세림도 그런 생각에서인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뗐다.
“댁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
“그건 또 무슨 소리지?”
비상이 그렇게 묻자, 세림은 또 먼 곳을 바라보며 뜸을 들였다. 그리곤 천천히, 다시 입을 뗐다.
“댁도 자기가 바라는 모습으로 말할 자유는 있을 거 아냐. 안 그래?”
“그 쪽이 남 생각해주리란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이 말을 듣고, 비상은 조금 놀랐다. 이 사람은 비상 걱정이라곤 이만큼도 하지 않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보인 모습을 생각하면 그다지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할 때, 세림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진지했다.
어떻게 할까.
거기까지 생각한 뒤, 비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기가 뭐라고 대답할지에 관해서였다. 이제 해가 정말로 저무려하고 있었지만, 비상은 여전히 바뀐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비상은 세림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비상은 자기 바람을 세림한테 털어놓았다.
지금 자기 모습이 어떻든, 오늘 이 주세림이란 사람과 결판을 지어야겠단 마음은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잠시 뒤.
저녁노을이 보라색으로 짙어지는 가운데, 세림은 난간에 팔을 괸 채 그 하늘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비상한텐 그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세림의 느낌이 어떠한지는 대략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편, 비상은 난간에 등을 기댄 채 세림과 정반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은 난간이 비상보다 약간 더 크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둘의(몸집) 차이가 한눈에 들어올 터였다. 비상은 이렇게 세림을 안 봐도 되는 자세가 무척 편했다. 적어도 지금은.
사실 비상도 세림이 자기 말에 따라줄 줄은 몰랐기 때문에 기분이 무척 묘했지만, 아무튼 자기 바람을 들어준 건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세림은 자길 적대시한다고만 여겼기에, 여기까지 신경써주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비상은 세림이 자길 비웃는다 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게 여겼을 터였다.
하늘은 점점 더 밤의 빛깔이 깊어져, 보라색과 분홍색이 뒤섞인 특유의 색이 또렷하게 드러나있었다. 둘은 여전히 말이 없지만, 비상은 세림이 말을 고르고 있단 걸 알고 있었다. 비상도 세림한테 말을 재촉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잠시 지나고 나서, 세림이 드디어 다시 입을 떼어놓았다. 벌써 둘이 옥상으로 올라온 지 한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지만, 비상도 세림도 그건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내가 댁같은 사람 맘에 안 든다 그랬지?”
“그런 말을 했던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비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어쩐지 무척 옛날 일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솔직히 여기 온 까닭은 별 거 아냐.”
그런 비상을 봤는지 안 봤는지, 세림은 죽 말을 이어나갔다.
“댁이 여기 자주 온다기에 뭘 하나 보러 온 거지. 전에 댁의 그 모습을 본 다음 내 생각하고 달라졌는지 아닌지 알아보고 싶었거든. 어쩐지 그 땐 조금 다른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물론 나도 그런 걸 볼 줄은 몰랐고…”
“그런데 난 왜 보러 온 거야? 미워하고 싶으면 죽 미워하는 게 속시원하지 않나?”
“그건 내가 못 하겠거든. 이런 데 대충 넘어가면 뒤끝이 안 좋은 사람이야. 나는. 댁 때문에 그랬던 건 아니고.”
그 말 뒤로, 세림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마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말을 고르는 것만 같았다. 이걸 보면 세림은 지금 진짜로 비상을 생각해주고 있는 듯했다. 물론 전보다 더 그렇단 말이었지만.
그래서 비상은 이렇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 날 보니 어떤 생각이 들던가?”
비상의 그 말에 세림은 잠시 뜸을 들이다, 이윽고 다시 입을 뗐다.
“내가 왜 댁한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는지 알아? 나도 댁을 무시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거든. 내가 댁을 못마땅하게 여긴 건 맞는데, 사람에 대한 예의란 게 있잖아. 그런 생각 안 들어?”
“댁이 생각하는 예의란 게 이런 건가?”
“솔직히 여기서 내가 어떻게 하든 골치아플 거 아냐. 전에 봤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 이런 상황에선. 솔직히 그 모습 처음 봤을 땐 꼴좋단 생각도 있었어. 그 때까진 말이지.”
비상은 가만히 세림이 하는 말을 들었다. 아까보다 한결 어두워진 날씨도 둘의 이야기를 편하게 만드는 데 한몫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식으로 대할 순 없잖아. 나도 사람인데. 누구나 자기가 바라고 싶은 모습으로 얘기할 자유쯤은 있는 거 아냐? 댁은 그런 모습을 나한텐 보이기 싫었을 거고.”
“그 때랑 생각이 그만큼 달라졌나 보지?”
“내가 댁 생각을 모를 줄 알아? 같은 남자끼리 그런 걸 모르고 지낼 수는 없잖아.”
그 말에, 비상은 묘하게 마음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지금껏 일부러 무시하고 있던 대목을 세림이 제대로 짚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비상도 그 전에 이런 모습을 보인 거라면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때와 사정이 달랐다.
고작 그런 일이 있었을 뿐인데, 비상은 세림같은 사람과 얼굴을 마주치는 게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거기에 관해 깊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마 그 까닭은 세림의 말과 같을 터였다. 비상도 그 말이 거짓이라 생각하진 않았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비상은 어쩐지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물론 아까 일은 기억에 남아있었지만, 그 때처럼 이 상황이 복잡하게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내 생각보단 괜찮은 사람이었네. 댁도 참.”
“나도 댁에 관한 생각 조금 고쳐먹었어. 물론 마음에 안 드는 건 그대로지만.”
그 말과 함께, 세림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주위는 천천히 어둠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하지만 둘한텐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는 일이었다. 세림과 비상은 여전히 서로 반대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엔 댁이 참 꼴보기 싫었는데,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줄이야…세상 일 참 몰라.”
“내가 그렇게 안돼보였나 보지?”
세림이 고개를 저으며 그런 말을 내뱉자, 비상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세림은 비상의 반응이야말로 어이가 없었는지, 헛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럼 이러고 있겠냐? 댁이 뺀질뺀질하다 여긴 건 다 내 탓이지 뭐. 댁이 어떻게 지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댁이 여기서 자주 보인단 말을 듣고 안 왔으면 여전히 똑같이 생각했을 거고.”
“그렇게 충격이었던가?”
“그걸 지금 댁 앞에서 말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세림은 그렇게 대답한 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세림이 지금 비상 앞에서 지키고 싶었던 예의 중 하나인 듯했다. 비상도 그 예의가 뭔지쯤은 짐작하고 있었다. 자기 목소리가 여전히 높단 걸 잊어버릴 리 없었던 것이다. 아마 지금껏 비상이 여기서 해온 여러 말들도, 이런 목소리로 하면 우스울 터였다. 비상의 말투는 자기 원래 목소리에 가장 잘 맞으니까.
거기까지 가서, 비상은 벽에 기댄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 상황, 그리고 저 주세림이란 남자에 관해서였다. 사실 비상도 세림의 말은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비상도 이런 모습으로 자기 또래와 진지하게 얘기하는 건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비상도 자기가 바라는 모습으로 누군가와 얘기할 자유쯤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미 말했지만, 비상은 세림이 여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저 사람은 자기를 무턱대고 마음에 안 들어하는 것이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림은 세림 나름대로 비상에 관해 판단하고 있었다. 자기를 판단하러 직접 보러 올 정도로는 비상에 관해 진지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자기 눈으로 보기 전까진 여전히 비상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듯했지만.
그렇게 비상이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세림은 뭘 말하라고 보채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시간이 흐르는 걸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세림 역시 비상이 지금껏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역시 이런 식으로 마음을 터놓고 만나보면 그 사람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는 듯했다. 물론 이럴 기회가 오리라곤 오늘까지 생각도 안 해봤지만. 비상은 그런 생각과 함께 다시 한 번 쓴웃음을 지었다.
점차 날이 어두워지자, 비상은 자기 모습이 눈에 안 띄어도 된다는 데 묘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이 자세가 편했기에, 비상은 그대로 벽에 자기 몸을 기댔다. 자기한테도 이런 자세를 고를 자유쯤은 있을 터였다.
“그래서, 언제까지 날 ‘댁’이라 부를 셈이지?”
“뭐?”
“설마 같은 팀인데 내 이름도 잊어버린 건가?”
“자기도 똑같이 했으면서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젠장.”
비상이 농담하는 것처럼 묻자, 세림은 어이없단 말투로 이렇게 대답했다. 사실 지금까진 이름을 부를 일도 까닭도 없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뭐, 댁이 윤비상이란 이름이란 것도 모를 만큼 내가 바보는 아니거든.”
“나도 전에 댁이 주세림이라 말했던 건 잘 기억하고 있는데.”
“잠깐. 그럼 서로 이름도 아는데 서로 댁댁거렸단 말이야?”
“그랬나 보지.”
세림이 어이없단 듯 이런 말과 함께 웃자, 비상도 같이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지금껏 그래왔던 게 웃겨서였다.
“아무튼 윤비상 댁은 참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이젠 그러든 말든 상관없지만.”
“그럼 난 주세림이란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줄 아나 보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정말로 비상은 이제 세림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대하기 힘들었던 상대가, 지금은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은 편했다.
세상 일도 참 희한하게 되어있단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우습다면 우스운 이야기지만, 아무튼 비상은 어쩐지 저 주세림이란 사람을 대하는 게 한결 편해진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해가 아주 저물었을 무렵, 둘은 별 것도 아닌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자기 학교 다닐 때 이야기나, 가족 이야기나, 주로 하는 거나, 그런 자잘한 것들이 주된 이야깃거리였다.
세림과 말하며, 비상은 오랜만에 자기 또래와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단 느낌을 받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놀이에서 연장자나 연소자는 여럿 봐왔지만 ‘동갑’과 제대로 만난 적은 그다지 없었다. 이런 데서 자기 또래를 만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도 세림과 같은, 자기와 아주 딴판인 사람과.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한 얘기를 주고받은 건 아니었지만, 비상은 이렇게 하면서 마음이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놀이를 하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거였지만, 비상도 왜 그렇게 느끼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자기한테도 이런 관계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란 생각은 들었다. 지금까진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가든 안 돌아가든, 지금은 상관없다고 비상은 생각했다. 마치 자기 동갑내기와 술자리라도 같이 하는 것처럼, 비상은 당분간 이 친구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모처럼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였다. 비상도 이런 기회를 그냥 놓치고 싶진 않았다.
이러다가 밤이라도 새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에 피식 웃으며, 비상은 그 동갑내기와 늦은 밤까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자기 목소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단 건 신경도 쓰지 않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