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세기의 대결’이 있은 뒤 토요일.
비상은 어이없단 표정으로 아침부터 모 동네의 PC방에 다다라있었다. 강산하고 전에 한 바로 그 연습경기에서 자기가 졌기 때문이었다. 원래 그 연습경기는 지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의 바람 하나를 들어주기로 한 것이었다. 즉, 강산이 여기에 오라고 해서 비상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비상은 PC방에 자주 오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약속은 약속이므로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비상뿐 아니라, 바뀐 모습인 현도 같이 와있었다. 강산이 같이 오라 말한 건 아니지만, 얘기를 들은 현이 ‘그럼 나도 갈래’라 한 탓에 이렇게 된 것이다. 현은 아침잠도 없는지, 한 시간이나 일찍 PC방 앞에서 비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야구모자를 눌러쓴 현을 보며, 비상은 일단 이렇게 물었다.
“안 덥니?”
“아직 아침이잖아.”
“그것도 그렇구나.”
오늘은 낮 늦게부터 비가 온다고 해서인지 아침부터 습한 느낌이었지만, 비상은 일단 그 말과 함께 넘어갔다. 어차피 반팔에 반바지고, 안은 에어컨이 틀어져있을 테니 그리 덥진 않을 터였다.
“늦었잖아!!”
아무튼 안으로 들어가자, 이런 말과 함께 강산이 친히 문 앞까지 와 반겨주었다. 그 반갑기 그지없는 목소리를 듣자, 참으로 어이가 없어진 비상은 이렇게 물었다.
“정각보다 10분은 더 일찍 왔는데 무슨 소리야?”
“시꺼. 내가 늦었다면 늦은 거야.”
오늘도 어김없이 투덜대며, 강산은 그런 말을 내뱉었다. 항상 그렇지만 이 형은 정말 속을 알 수 없었다. 강산은 참으로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아니, 내가 여기 오는 게 그렇게 보고 싶었어?”
“너같은 놈이 이런 데 있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 아냐? 이 공부밖에 모를 거 같은 놈 같으니라고. 오늘은 내가 쏘는 거니까 감사나 해라. 크하하.”
그런 말을 자랑하듯 하는 강산을 보자, 비상은 점점 더 저 형을 알 수 없어졌다. 물론 이런 관계도 이제 하루이틀은 아니었다. 두 달 남짓 봐왔다고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그렇고, 왜 내가 왜 형도 아니고 쟤들한테 이렇게 당해야되는 거야?!”
아까 그 신나보이는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강산은 이제 뭔가 무척 불만이란 말투로 그런 말을 늘어놓았다. 아마 저번 60계단 때 일을 잎새가 파랑한테 신나게 얘기했던 걸 두고 하는 말인 듯했다. 그 세기의 대결에서 이긴 것까진 좋아지만, 강산은 그 때 일로 연장자(주로 별밤이나 잎새)한테 무척 놀림당했던 것이다.
“어제 이겼으면서 뭘 그래. 형도 참.”
“그거랑 이거랑 같냐?!”
그게 그렇게 열받았는지, 강산은 대뜸 이렇게 화를 냈다. 어제 일이 아직 마음에 무척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비상은 이제 저 형을 이해할 수 없단 사실을 받아들여야겠다 속으로 마음먹었다.
한편, 현은 PC방 안을 신기하단 눈빛으로 둘러보고 있었다.
“오오.”
그런 모습으로 볼 때, 현은 PC방에 오는 일이 드문 듯했다. 사실 여기가 신기한 건 비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데에 오는 건 정말 몇 년만이었던 것이다. 비상한테는 PC방의 시설이 깨끗한 것도 놀라운 점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건 라면을 비롯한 온갖 음식을 같이 파는 것이었다. 게다가 라면을 주문하면 직접 앉아있는 자리까지 가져다주는 듯했다. 강산은 PC방에 자주 와서인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비상한테는 꽤 재미있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야, 니들 이런 데 처음 오냐?”
둘의 그런 표정을 봤는지, 강산은 반쯤 어이없단 말투로 이런 말을 내던졌다. 강산 입장에서 보면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저 사람은 일주일에 몇 번이고 이런 데에 들락날락했을 테니까.
아무튼 셋은 나란히 자리를 잡은 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만지기 시작했다. 비상 바로 옆에 있던 현은 자리에 앉은 뒤, 잠시 생각하다 윈도 기본게임인 지뢰찾기를 실행했다. 언뜻 봐도 PC방에서 자주 하는 게임과는 인연이 없을 것 같은 현이기에, 비상은 전혀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현은 지뢰찾기를 실행한 뒤, 무모하게도 가장 넓은 지뢰판(즉, 가장 어려운 난이도)을 골랐다. 저것만 오늘 줄창 할 생각인가, 라 여기면서도, 비상은 자기 역시 뭘 할지 생각해보았다.
강산은 이런 데 자주 오기 때문인지(누가 봐도 그런 것 같았지만), 아무렇지 않게 모 유명게임을 실행한 뒤 라면을 주문했다. 그러더니 아주 익숙한 자세로 라면을 먹으며 평소 행동으론 생각할 수도 없는 빠른 손놀림으로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비상은 어이가 없어져, 이제 자기한텐 관심도 없는 강산을 잠시 동안 빤히 쳐다봤다. 자기가 여기로 끌고 왔으면서 비상 일행은 아주 잊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주문한 라면 역시 몇 분만에 국물까지 비워버리고 말았다.
비상은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일단 브라우저를 실행시켰다. 그리곤 집에서 항상 하던 대로, 여러 IT계 사이트들을 다니기 시작했다. PC방과는 어울리지 않는 영문사이트도 가끔 나왔지만, 다들 게임을 하는 데 바빠서인지 누구 하나 비상을 쳐다보지 않았다. 지어 강산조차 게임에 빠져 비상은 본체만체였다. 현은 그저 자기 게임, 즉 지뢰찾기에 열심이였다.
“야, 이 자식아!”
그 때, 갑자기 비상 일행 너머에서 누가 싸우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다가 그 목소리 중 한쪽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바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저 너머를 바라보던 비상은 이윽고 속으로 이마를 짚었다.
거기선 여러 모로 악연이 깊은 금빛 밤 연소자와 20대 전반으로 보이는 어떤 남자가 말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의 뒤로 보이는 화면을 볼 때, 아마 같은 게임을 하다가 싸움으로 번진 듯했다. 강산은 아직 그걸 알아채지 못한 채 자기 게임에 열심이었다. 현은 지뢰찾기에 빠진 나머지 비상조차 안 보이는 것만 같았다.
“뭐야. 한 판 붙기라도 할 거냐?”
대체 왜 저 연소자가 여기에 있는지, 그리고 이렇게 같은 곳에 우연히 있을 수 있었는지 생각하는 비상이었지만, 상황은 더 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왜 싸움이 붙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둘 다 표정이 험악한 걸 보면 보통 일이 아니란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심지어 목소리조차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둘 다 한 성질있단 건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기에, 비상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그다지 반가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 자식이, 보자보자하니까…”
맨 처음엔 그래도 게임으로 비롯된 사소한 시비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주 감정싸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원래라면 모를까, 지금은 패널티 영향인지 금빛 밤 연소자가 불리하게 보였다. 실제로 금빛 밤 연소자는 표정이 아주 좋지 않았다. 그것도 평소보다 훨씬 더.
어쩐지 저 금빛 밤 연소자는 지금 이 상황 자체를 무척 견딜 수 없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야 저 금빛 밤 연소자 성격을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아마 원래 모습이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날뛰었을 게 틀림없었다. 지금 그렇게 할 수 없는 것 자체가 열받는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던 와중, 이 금빛 밤 연소자와 싸우던 남자가 갑자기 이런 소리를 뱉어냈다. 언뜻 듣기엔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무슨 여자가 이렇게 고집이 세? 이런 젠장.”
하지만 금빛 밤 연소자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까까지 그렇게 화난 표정이더니, 지금은 그저 모든 사고가 멎은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금빛 밤 연소자의 얼굴이 더할 나위없이 붉어졌다. 하지만 그건 민망해서나 뭐 그런 까닭이 아니라,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단 모습이었다. 아마 비상이 아니더라도, 이를 분간하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사실 저 남자가 한 말은 보통 사람한테 해도 적절치 않은 말이었지만, 상대가 금빛 밤 연소자이기에 더더욱 좋지 않은 말이었다. 금빛 밤 연소자가 지금 가장 마음에 걸려하는 대목을 제대로 짚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저 남자가 이걸 알고 말했을 리는 없겠지만.
“너, 너 이 자식, 너…”
금빛 밤 연소자는 그렇게 말을 더듬으며 남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킨 채,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분한 나머지 이를 가는 게 여기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면, 지금 금빛 밤 연소자는 진짜 화가 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사실을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때였다.
“뭐, 뭐야?”
남자의 말에, 다들 고개를 들어 그 쪽, 즉 소리가 난 입구로 눈길을 돌렸다. 거기엔 방금 PC방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짐작되는 20대 초반 여성이 한 명 서 있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서인지,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하지만 여성은 이리로 다가오자마자, 곧장 금빛 밤 연소자를 보며 입을 뗐다.
“성준아!!”
“…어?”
여기엔 금빛 밤 연소자도 놀랐는지, 그 여성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건 단지 아는 사이를 보고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저렇게 동요하는 금빛 밤 연소자는 비상도 처음이었다.
“여, 여긴 왜 왔어?!”
당황한 나머지, 금빛 밤 연소자는 그 여성을 보며 이렇게 소리쳤다. 저 모습만 봐도, 여성과 금빛 밤 연소자가 보통 사이가 아니란 건 틀림없었다. 자세한 건 비상도 알 수 없었지만.
“뭐야, 저건 또…어?”
이젠 강산도 견딜 수 없었는지, 그런 말과 함께 저 너머를 보다가 고개가 딱딱하게 굳었다. 옆에서 보면 돌상이라도 된 줄 알 지경이었다. 강산은 비상의 옆구리를 찌르더니, 이런 말과 함께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저건 또 무슨 일이야?!”
“형이 본 대로잖아.”
“내가 그걸 묻냐? 쟤, 쟤는 대체 여기 왜 있어?!”
강산은 목소리를 높이며 비상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지만, 당연히 그걸 자기가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물론 저 형한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란 걸 알고 있기에, 비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현은 주위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지뢰찾기에 열심이었다. 비상이 흘낏 보니, 벌써 그 넓은(PC방 모니터로 2/3) 지뢰판의 절반이 무사히 메꿔져있었다. 비상은 지뢰찾기를 많이 하진 않았지만, 저렇게 넓은 데를 지뢰 한 번 안 밟고 할 수 있단 게 보면 볼수록 믿기지 않았다. 저 덤덤한 표정으로 볼 때, 현은 지뢰찾기를 하루이틀 한 수준이 아닌 듯했다(물론 화면을 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현이 그렇게 지뢰찾기에 빠져있을 때도, 아무튼 아직 상황은 이어지고 있었다.
“하, 한참 찾았잖아. 어디 갔나하고. 또 여기 와있는 거야? 오늘은 나랑 있자고 그렇게 말했는데…”
“내가 여기 오겠다 그랬지?!”
여성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이윽고 금빛 밤 연소자를 보며 다시 입을 뗐다. 금빛 밤 연소자는 뭐라 말하면 좋을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짜증내듯 그렇게 외쳤다. 하지만 그 표정은 저 여성을 싫어하기보다, 아무튼 한없이 분하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저 연소자는 이 상황 자체가 그저 분한 것이다. 물론 뿌리부터 따지고 보면 다 자업자득이었지만.
물론 주위 사람들이 그런 걸 알 리는 없기 때문에, 다들 금빛 밤 연소자 및 따라온 여성한테 흥미진진하단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자기 일이 아니라서인지 다들 재밌단 표정이었다. 뒤에 서있던 남자는 웃긴단 표정으로 그걸 보더니, 이런 말과 함께 킬킬댔다.
“너넨 지금 뭐하는 거냐?”
“이, 이…”
금빛 밤 연소자는 이제 멀리서도 보일 만큼, 손가락 끝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누가 봐도 더 이상 이런 굴욕을 참을 수 없단 모습이란 게 틀림없었다.
그러다 결국, 금빛 밤 연소자는 고개를 든 뒤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비상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어쩐지 눈동자에 눈물이 조금 맺혀있는 것 같았다.
“이런 젠장!!”
그런 외침과 함께, 금빛 밤 연소자는 문 밖으로 곧장 뛰어나가고 말았다. 나가는 모습으로 볼 때, 돈은 이미 낸 듯했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인 탓에, 비상을 비롯한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다들 뭐에라도 홀린 듯한 눈빛으로 금빛 밤 연소자가 있던 곳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자, 잠깐만!!”
이번엔 잠시 멍하니 있던 여성이 그런 말과 함께 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 역시 순식간이었다. 다들 정말 뭐에라도 홀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비상은 우연히 저쪽 자리에서 고개를 든 채 이 상황을 가만히 보고 있던 남학생이 있단 걸 깨달았다. 이 남학생도 다른 사람들처럼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여길 보고 있었지만, 이걸 흥미진진하게 보는 다른 이들과 달리, 뭔가 생각하는 게 있는 듯했다. 비상은 어쩐지 저 남학생을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대체 어디서 봤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요즘 본 듯도 했고, 그렇지 않은 듯도 했다.
“저, 저건 또 뭐야?”
남자는 가만히 있다가, 아주 어이없단 말투로 이런 말을 뱉어냈다. 마치 폭풍이라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던 와중, 현은 여전히 지뢰찾기가 펼쳐진 자기 모니터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비상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묘하지만, 이렇게 보면 참 대단한 아이였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비상 일행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젠장,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비상은 그렇게 불만을 줄줄 늘어놓는 강산의 팔을 잡고 자리에서 일으켰다. 물론 저 금빛 밤 연소자 일행을 따라잡기 위해서였다. 현도 지뢰찾기를 하다 말고,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상과 강산을 따라갔다. 언뜻 보니, 지뢰찾기는 거의 대부분이 메꿔져있었다. 고작 한두 칸쯤 남은 현의 지뢰찾기를 보며, 비상은 대체 현이 얼마나 지뢰찾기를 많이 했는지 속으로 궁금해졌지만 아무튼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아직 낮 세 시쯤이었지만, 벌써 밖은 믿기지 않을 만큼 어둑했다. 오늘 일기예보대로 거센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빗속을, 비상 일행은 편의점에서 산 비닐우산 하나로 어떻게든 때워가며 달려나갔다. 당연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기에, 가장 가운데에 있던 강산은 또다시 불만을 늘어놓았다.
“아니, 그러니까 우리가 왜 저딴 놈 때문에…”
사실, 어른 둘에 고등학생 한 명이 비닐우산 하나를 같이 써야한다는 건 참으로 불편한 일이었다. 그나마 처음엔 어른 셋이었단 걸 생각하면, 현의 몸집이 준 지금이 훨씬 낫긴 했다. 몸집이 큰 강산 덕분에 비상이 밀려나 어깨는 이미 잔뜩 젖어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던 와중, 비상 일행은 드디어 저 멀리서 금빛 밤 연소자의 뒷모습을 찾아냈다. 비 때문에 눈앞이 흐릿했지만, 저 둘의 모습만은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금빛 밤 연소자는 아까 PC방까지 쫓아온 자기 여자친구와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사방이 빗소리로 따가웠지만, 저 둘의 목소리는 그나마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가 이렇게나 많이 오는데, 둘 다 우산을 쓰지 않은 모습이었다. 저 둘이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란 생각을 하는 비상이었지만, 그 생각이 깊어지기 전에 저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화났어? 그래서 여기까지 뛰어온 거야?”
여성의 목소리를 등진 채, 금빛 밤 연소자는 아직 화가 가시지 않았는지 숨을 고르며 씩씩대고 있었다. 그 차가운 비를 그대로 맞고 있기 때문에 몸을 떨고 있었지만(옷도 여기저기 젖어있었다), 그것보단 화가 나서 몸을 떨고있는 게 더 큰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금빛 밤 연소자가 걱정되는지, 여성은 말을 이었다.
“화났어? 미안. 그런데 어쩌면 좋을지 몰라서…요즘 그렇게 많이 힘들어? 나랑 있을 때도 표정 굳어있고, 만날 뭔가 불만있단 얼굴이고…”
금빛 밤 연소자는 잠시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이내 큰 한숨을 내쉬었다. 비상은 저 연소자와 오래 알고 지낸 적이 없지만, 이렇게 속이 잘 들여다보이는, 그리고 이렇게 지친 표정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모습이 바뀌었다 한들, 그건 금빛 밤 연소자가 어떤 모습이든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더 깊게 만들었다.
금빛 밤 연소자는, 그 미친 듯이 내리는 빗속에서 추운 기색 하나 안 보이며, 천천히 입을 떼어놓았다. 지금까지 들은 것 중 가장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앞으로 하는 말, 믿기 싫으면 믿지 마.”
이 말에 비상 일행은 금빛 밤 연소자를 빤히 쳐다봤다. ‘놀이’에 관해 얘기하려는 건 아닐 테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하려는 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금빛 밤 연소자는 다시 입을 뗐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겠지만, 내 진짜 모습은 이런 게 아냐. 너도 그, 잊어버린 거라고. 내가 니 그냥 친구인 거 같아? 너랑 나랑은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너랑 나는, 그…”
거기까지 말하다가, 금빛 밤 연소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감정이 목까지 치밀고 올라와 더 참을 수 없단 모습이었다. 하지만 다시 침을 꿀꺽 삼킨 뒤, 금빛 밤 연소자는 말을 이었다.
“사귀는 사이였다고. 기, 기억도 없지? 안 믿기지? 내가 미친 소리한다고 생각해도 돼. 그냥, 그…”
하지만 금빛 밤 연소자는, 그런 말을 하다가 갑자기 벌어진 일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성이 금빛 밤 연소자의 어깨를 세게 껴안았던 것이다.
이 비가 거세게 내리는 날, 우산조차 없는 채로.
금빛 밤 연소자가 당황하는 사이, 여성은 여전히 꼭 껴안은 채로 입을 뗐다. 죽 비를 맞아서인지 몸이 떨리는 게 여기서도 보였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단 말투였다.
“괜찮아. 무슨 말을 하려는진 알겠으니까.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그냥 이러고 싶었어.”
기분 탓일까, 빗줄기는 가면 갈수록 차가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전히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비상 일행한테 퍼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저 둘한테, 지금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닌 듯했다.
“나도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는데, 그 말 듣고 있으면 더 견딜 수가 없더라구. 나도 성준이 너가 그냥 친구로는 안 보여서, 근데 머릿속이 어지러워서, 아무튼 나도…”
그 뒤, 둘은 더 이상 말이 필요없단 듯 그저 서로를 감싸안고 있었다. 이젠 비가 내리든말든 아무 상관없단 모습이었다. 비상 일행은 여전히 먼발치에 그런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강산은 이런 게 아주 마음에 안 드는지, 이렇게 투덜대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저, 저런 놈도 짝이 있는데 난 뭐야?!”
“형은 아직 그 때가 아닌가 보지.”
“젠장. 이런 망할…”
강산이 열받아서 손을 떠는 바람에 쥐고 있던 비닐우산이 뿌리째 흔들렸지만, 비상은 그런 형을 반대방향으로 끌어당기며 그 자리를 떴다. 물론 강산이 얌전히 갈 리 없으므로, 한동안 ‘이런 젠장…’이라는 화가 가득 난 낮은 목소리가 이 골목에서 울려퍼지게 되었다. 물론 현은 어떤 누구와 달리, 아무 말도 없이 비상의 말대로 그 자리를 떠났다.
그 뒤.
비상과 현은 아무 말도 없이 현네 집으로 돌아와있었다. 뭔가 말을 해야겠단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 걸 느꼈다. 여전히 밖에선 비가 시끄러울 만큼 세게 내리고 있었다. 현도 아까 일이 신기했는지, 죽 뭔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둘은 소파에 나란히 앉은 채,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벌써 날은 어두워진 탓에, 불도 안 켜진 거실은 무척 어둑했다. 현과 같이 나란히 앉는 이런 느낌이, 비상은 참 편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 때, 현이 비상을 돌아보며 입을 뗐다.
“아까 그거, 우리랑도 상관있는 거 같다. 그지?”
“같은 처지니까 이상한 말은 아니지.”
그 말과 함께, 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은 뭔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비상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잘 됐을 거야. 아마.”
비상이 그렇게 말하자, 현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자, 비상은 자기들이 무슨 비밀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속닥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너무나 조용히,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하지만 또렷이, 둘은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자기 마음을 드러내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 나지막한, 그러면서도 내밀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느낌이 비상은 낯간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더없이 다정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둘만이 있을 때만 낼 수 있는, 이 아늑하면서 묘한 느낌이 비상은 싫지 않았다. 지금껏 살면서, 비상이 느낀 적이 없는 관계가 여기 있었다.
그렇게 둘은 나란히 앉아서 때로는 이야기를 하고, 때로는 가만히 생각하고, 때로는 서로한테 기댔다. 그다지 한 일이 많았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둘만 있을 때, 어쩐지 비상은 그 어느 때보다 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