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밤 언리미티드 37. 파란의 술자리

 

다음 날 비상이 눈을 뜨자 맨 처음 들려온 건, 귀가 따가울 만큼 사정없이 내리는 빗소리였다.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으로 일기예보를 보니,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내리는 듯했다. 장마철이라서 그런가. 그런 생각을 하던 비상은,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야 비로소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어제 일이 마치 거짓말이라도 되는 듯, 비상의 모습은 원래대로 돌아와있었던 것이다.
혹시나란 생각에 비상은 화장실에도 다녀왔지만, 어제 일이 깨끗하게 사라졌단 건 틀림없었다. 물론 오늘은 어제 다음 날, 즉 내일이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지. 물론 천사가 벌인 일임엔 틀림없지만, 비상은 마치 귀신에라도 씌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일단, 비상한텐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먼저 갈게’란 쪽지를 남긴 채, 비상은 그 자리를 벗어났다. 어제 일은 둘째치고, 비상은 지금 연구소에 가야 했으니까.

그렇게 연구소로 가던 비상한테, 갑자기 이런 메시지가 왔다.
-오늘 술자리있다. 이 놈아.
물론 그걸 누가 보냈는지는 더 알아볼 것도 없었다. 비상은 보낸 사람 이름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바로 이렇게 답했다.
-갑자기 왜?
-비 때문에 놀이도 못하는데 술먹지 뭘 하냐?
그 메시지의 주인공, 강산이 보내온 답을 보고 비상은 참으로 어이없어짐을 느꼈다. 하지만 말을 더 들어보니, 이러자고 먼저 말한 건 의영인 듯했다. 물론 강산이 좋다고 일을 더 벌린 것이겠지만.
그럼 못 갈 것도 없지.
그렇게 답한 뒤, 비상은 다시 연구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우산 위에선 수많은 빗방울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날 저녁.
“어유. 비상이 왔냐?”
비상이 강산의 말대로 모 고깃집에 다다르자, 잎새의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은 저녁 여덟 시. 술집과 함께 고기를 하는 곳이었지만, 딱 봐도 어느 정도는 커 보였다.
저녁이 되었지만 여전히 비가 줄기차게 내리는 탓에, 술을 마시기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아마 강산이라면 틀림없이 그렇다고 믿을 터였다.
하지만 비상이 들어가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강산이 아닌 잎새 및 의영, 그리고 몇몇 연소자들이었다.
“강산이 형은요?”
“가장 좋아하던 놈이 지각하는 건 또 뭐냐?”
그 말을 듣기만 해도 비상은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걱정할 일도 없겠는데. 적당한 데에 자리를 잡은 뒤, 비상은 가볍게 물을 입에 댔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어유. 저 놈 또 취했네…아야!!”
드디어 강산이 나타나자, 곧장 그렇게 말한 잎새는 바로 비명을 질렀다. 그 주인공인 강산은 아주 열받아서 못 견디겠단 표정으로 잎새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자식이. 아직 아무 것도 안 했는데 무슨 헛소리야?!”
“너야 만날 취한 것처럼 보이니까…그만 좀 때려라. 야!”
“그런 게 취한 것처럼 보이는 거 아냐?”
“시, 시꺼. 암튼 다들…”
비상도 한 마디 거들자, 강산은 눈길을 대놓고 다른 데로 돌렸다. 그리곤 자리에 앉은 뒤, 바로 술을 주문했다. 비상의 눈엔 아무리 봐도 저런 행동이 저런 말을 불러오는 것처럼 보였다.
“잠깐 말해도 될까?”
의영의 그 말에, 모두 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의영의 말에 따르면, 요즘 복잡한 일도 많고해서 시간 맞는 사람끼리 얘기했으면 좋겠단 생각에 이런 자리를 만들었다고 했다. 사실 어제나 그저께 일을 생각하면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참고로 오늘 술자리도 의영이 사는 듯했다.
거기까지 이야기가 끝나자, 강산이 어깨를 펴곤 무척 당당한 모습으로 이런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내가 여깄는 거지.”
“아니, 형은 자기가 돈을 내더라도 여깄는 거 아냐?”
“부, 불만있냐 이 자식아?!”
비상이 사실을 지적하자, 강산은 곧바로 이렇게 화냈다. 잎새는 옆에서 ‘그 말이 맞네. 그 말이’라며 킬킬대고 있었다.
아무튼 이 뒤로도, 연소자 및 연장자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이런 자리에 빠지지 않는 별밤은 물론, 대한처럼 생각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의영의 말로는 될 수 있는 대로 연소자들도 여럿 불렀다고 했지만, 실제 나타난 연소자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어쩌면 연장자의 참석율이 높은 걸 대단하다 여겨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생각보단 많이 모였구나.”
의영도 그런 생각인지, 이런 말과 함께 술을 입에 댔다. 그러는 사이에도 빗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마치 이야기의 틈새를 노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때, 이번엔 정말 짐작치도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나만 빼놓고 여깄는 거야?”
깜짝 놀라 다들 목소리가 들려온 위쪽을 쳐다보니, 거기엔 의지가 아무렇지 않게 싱긋 웃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만, 특히 강산은 뭐에라도 씌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게?”
“야, 강산아. 너 지금 장난하는 거냐?”
물론 의영이 연락했으므로 여기에 있으리란 생각을 했는지, 잎새가 옆에서 강산의 허리를 꾹꾹 찔렀다. 하지만 워낙 이런 데서 보기 어려운 사람이다 보니, 강산이 놀라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고 비상은 생각했다.
“의영아. 내가 여기 있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아니, 내가 불렀는데 그런 생각도 못한 강산이 잘못이지.”
“자, 잠깐만. 내가 무슨 악당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들 하시는데…”
장난이라니까, 란 말과 함께, 의지는 아직 비어있던 의영 옆자리에 자리잡았다. 사실 의지한테 나쁜 마음이 있을 리 없었다. 저 누나는 사람 놀리는 건 좋아할지 몰라도, 이런 까닭으로 누굴 싫어할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런 놀람이 끝나기도 전에, 이번엔 또 짐작치 못한 목소리가 입구 쪽에서 들려왔다.
“나도 와도 돼?”
이젠 정말 다들 허를 찔렸단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거기엔 아무렇지도 않게, 이 비오는 날에도 검정 야구모자를 눌러쓴 현의 모습이 있었다. 하늘색 우산에 있는 물기를 탁탁 턴 뒤, 현은 이 쪽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른 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강산이었다.
“이미 왔는데 또 무슨 소리야. 일로 와. 물이나 마셔.”
“술은 안 마실 건데 그냥 오고 싶어서. 괜찮아?”
“그래그래. 현이 너 마음대로 해도 돼. 마음대로.”
강산은 얼른 현의 팔을 끌어 비상 옆에 앉힌 뒤, 뭔가 흐뭇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 형은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현과 이런 곳에서 만난 게 기뻤다. 오늘은 더 만날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파랑이 이 놈은 안 올 작정인가?”
잠시동안 흐뭇한 표정을 짓던 강산은, 갑자기 이런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이런 자리에 없으면 이상할 사람이 아직까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쁜 거 아냐?”
“온다 안 온다 똑바로 말을 안 했단 말이야. 열받게시리.”
비상의 말에, 강산은 그렇게 투덜댔다. 이쯤되자 묘하게 어이가 없어져서,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을 입에 담고 있었다.
“파랑이 형이 안 오는 게 그렇게 불만이야?”
“그 놈이 없음 술맛이 안 난단 말야. 같이 놀고 서로 괴롭히니까 술먹는 맛이 두 배지. 혼자면 무슨 맛이냐?!”
마치 비상이 무슨 실례라도 저지른 것처럼, 강산은 비상을 노려보며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둘은 따로 술도 잘 마신다고 했던가. 그럼 강산의 저 불만스런 모습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형도 파랑이 형한테 당한단 말이야?”
“그, 근데 불만있냐?!”
비상이 그렇게 묻자, 강산은 정곡이라도 찔린 듯 그렇게 소리쳤다. 옆에 있던 연장자들은 물론 너나할 것 없이 그 자리에서 킬킬댔다. 특히 잎새는 아예 탁자에 엎어진 채 끅끅대고 있었다.
“왜 쟨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파냐. 진짜.”
“농담이 아니라, 오늘은 내가 사는 거니까 맘껏 먹어라. 고기든 뭐든.”
아까부터 묘하게 어색한 모습을 보이던 의영도, 이제 마음이 풀렸는지 이런 말을 건넸다. 어쩌면 의영은 이렇게 ‘자기가 주도하는’ 자리가 익숙하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그 때였다.
“다들 기다렸지?”
마치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너무나 절묘한 타이밍에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주인공은 안 봐도 뻔했다. 파랑이 드디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얼마나 타이밍이 좋았는지, 강산은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잎새는 여전히 끅끅대며, 상황을 알지 못하는 파랑한테 이런 말을 건넸다.
“잘 됐네. 마침 다들 니 얘기하고 있었거든.”
“뭐야. 좋은 얘기야?”
“아니. 강산이 쟤가 너한테 잡혀산단 얘기…”
더 이상 웃겨서 참을 수 없었는지, 잎새는 말을 잇지 못했다. 파랑은 잠시 생각하다, 이내 ‘아, 그거?’란 말을 꺼냈다. 마치 별것도 아닌 것처럼.
“말하지 마. 이 자식아. 말하면 죽는다?”
강산은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파랑을 노려보며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하지만 파랑은 아무렇지 않게, 강산을 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혹시 강산이랑 나랑 술마실 때 ‘그나마 외로운데 니가 있어서 다행이다’라며 매달린 거 말하는 거야?”
“진짜냐?!”
이 말에, 술자리는 삽시간에 혼돈으로 바뀌었다. 연장자 대부분이 이렇게 외치는 가운데, 강산은 이 말과 함께 이미 도망가던 파랑을 뒤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딴 걸 왜 나불대냐고, 이 자식아!!”
“지금 비오는 거 아니었어요?”
“그치만 저 둘이면 감기는 안 걸릴 거 같은데, 그지?”
비상이 어이없단 듯 묻자, 그걸 자상한 눈빛으로 지켜보던 의지가 이런 말을 꺼냈다. 저 누나가 뭘 믿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남 일이니 비상도 더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는 가운데, 현은 마치 기인열전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여전히 저 둘이 간 자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뒤, 둘은 물에 젖은 생쥐라도 된 듯한 모습으로 다시 술집에 들어왔다.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파랑은 둘째치고, 강산은 자기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애썼다. 이 자식아.”
“병주고 약주냐. 이 개자식아…”
잎새는 킬킬대더니, 옆에 있던 고기로 쌈을 싸서 둘한테 건넸다. 강산도 그렇게 투덜대긴 했지만, 잎새가 건네준 쌈은 당연하단 듯 입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보면 여긴 틀림없이 ‘고기’를 먹는 술집일 텐데, 고기는커녕 술을 입에 대고 있는 사람도 드물었다. 의영은 아까부터 죽 술잔을 입에 대고 있었지만, 그리 많이 마신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다들 잎새의 쌈을 보고 그걸 떠올린 건지, 너나할 것 없이 다들 고기를 집어서 양념에 찍어먹기 시작했다. 물론 술을 입에 대는 사람도 있었다. 비상도 고기를 마다할 성격은 아니었기에, 현과 같이 젓가락을 손에 들었다. 현도 고기를 좋아하는지, ‘어쩐지 지금 엄청 배고픈 거 같아’란 말과 함께 고기를 한가득 입에 담아넣었다. 저 나이 또래 사내들이 대개 그러는 것처럼.
그런 생각에 빠져있던 비상은, 갑자기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자기를 뺀 주위가 한층 커진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비상이 주위를 둘러본 뒤 마지막으로 자기자신을 보고 나서 ‘그 까닭’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까닭을 알아챈 비상이 반쯤 포기한 채 그대로 앉아있을 때였다.
“어?”
갑자기 누구한테 ‘들어올려지는’ 느낌을 받고, 비상은 이번에야말로 깜짝 놀랐다. 바로 옆에서 자길 들곤 품에 안아올렸던 것이다. 이건 대체 뭐지. 바로 옆에 앉은 사람이 현이란 걸 깨닫는 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금 뭐하는 거야?”
“그냥 해보고 싶어서.”
현의 담담한 대답을 듣자, 비상은 어쩐지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사실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원래 현은 이런 아이였던 것이다. 아마 친구들과 노는 것처럼 비상을 대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른 비상이 반쯤 포기한 채 그 자리에 앉아있을 때였다.
“뭐죠?”
자길 신기하다 못해 대단하단 눈빛으로 빤히 보는 강산 및 별밤을 보며, 비상은 그렇게 물었다. 둘 다 아무 말도 않다가, 잠시 뒤 별밤이 비로소 입을 뗐다.
“비상이 넌 보면 볼수록 대단하다. 참.”
“제가요?”
“너같은 짓을 지금 아무나 할 수 있는 줄 알아?”
비상의 말에, 강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왜 자기가 한숨을 쉬는 거지. 대략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았으므로, 비상은 이렇게 되물었다.
“내가 지금 현이 위에 앉아있는 거 말이야?”
“그건 말고, 그렇게 하게 만든 전제가 있잖냐. 넌 진짜 대단한 놈이야. 질릴 정도다, 야.”
강산은 그 말과 함께 다시 고개를 저었다. 저 놈한텐 못 당하겠단 표정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 연장자들한텐 비상 그 자체가 대단하게 보이는 듯했다. 현이 안아올린 거라면 이해할 수 있었지만, 왜 자기 자체가 대단하게 느껴지는지 비상은 잘 와닿지 않았다.
“그런가?”
현도 비슷한 생각인지, 지금은 자기 무릎 위에 앉은 비상의 어깨를 뒤에서 껴안고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이런 걸 아무 사정도 모르는 사람이 보는 게 비상한테는 더 무서운 일이었다. 물론 현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비상은 천사가 이런 것도 잘 처리해주길 비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이 일도 지나가자, 강산은 다시 이렇게 투덜대기 시작했다. 아주 억울해서 견디지 못하겠단 말투였다.
“젠장. 외롭다고 말한 거가지고 왜 이런 꼴을 당해야 돼?”
“그렇게 사귄 적이 없냐?”
“신발. 경험있는 놈은 입도 떼지 말라고 했지?!”
잎새가 놀리듯 묻자, 강산은 죽일 기세로 노려보며 이렇게 쏘아붙였다. 자칫하다간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이걸 보면, 잎새는 강산과 달리 ‘그러한 경험’이 있는 듯했다.
“난 진짜 모르겠단 말이야. 어떻게 자연스럽게 다가가느냐, 어떻게 얘길 하느냐…내가 학교에서 당하는 굴욕을 왜 여기서도 당해야 하는 거야?!”
“그럼 주위에 있는 사람부터 시작하지 그래. 친구.”
강산이 여전히 탁자를 탕탕 치며 불만을 털어놓자,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누르며 별밤이 말을 건넸다. 강산은 둘 다 자기를 얕보고 있다 여긴 건지, 여전히 불만 가득한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누구…”
“형. 나라 씨는 어때?”
“야, 그럼 내가 당하고 살잖아!!”
비상이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을 대자, 강산은 더더욱 불만을 터뜨렸다. 저 모습을 보면, 정말 생각해보긴 한 듯했다. 저 형도 참. 역시 누군가와 사귄 적은 드물지만, 아무튼 경험이 있는 비상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때, 갑자기 강산이 고개를 확 들었다. 마치 지금껏 떠올리지 못한 좋은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강산은 싱긋 웃으며 자기네들을 구경하던 의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대뜸 이런 말을 꺼냈다.
“누나, 나랑 결혼하자.”
“뭐, 이 자식아?!”
이 말에, 겨우 가라앉았던 자리는 다시 혼돈의 수라장으로 바뀌고 말았다. 옆에 있던 잎새는 이게 그렇게 웃긴지, ‘저렇게까지 하고 싶나…’라며 탁자에 고개를 묻은 채 낄낄대고 있었다.
“의영아. 어쩔까?”
의영이 반쯤 난 모르겠단 듯 고개를 돌리고 있자, 옆에 앉아있던 의지가 장난스런 말투로 이렇게 물어왔다. 어쩌다 보니 자기가 이야깃거리가 되었는데도, 의지는 그저 즐겁단 표정이었다.
“그건 누나 일이잖아.”
의영도 여기에 대답하는 건 민망했는지, 그 말과 함께 아예 반대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잠시 생각하던 의지는, 이내 여전히 재밌단 표정으로 강산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
“강산이는 그렇게 누나가 좋은 거야. 아니면 그냥 누가 필요한 거야?”
“어, 그게…”
당연한 일이지만, 강산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게 잠시 있다가, 결국 강산은 자기가 졌단 표정으로 이런 말과 함께 두 손으로 싹싹 빌었다.
“누나 미안.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수습도 안 될 일을 왜 치냐고. 이 자식아.”
“시꺼!”
잎새한테 화풀이하는 강산을 보며, 비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저 형이 누굴 필요로 하는 건 틀림없다 여겨서였다. 그게 언제 이뤄질지는 비상도 알 수 없었지만.
이 뒤, 연달아 일어난 대소동에 배라도 고파졌는지 다들 고기를 입에 넣는 데 온 정신을 쏟기 시작했다. 모처럼 먹는 고기니까 지금 제대로 안 먹으면 아깝다 여기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비상 눈에 잎새는 그렇게 보였다. 자취하는 삶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의지는 아까 일은 잊어버렸는지, 쌈을 싸서는 바로 옆에 있는 의영한테 건네고 있었다. 어쩌면 의지 눈엔 저 형이 챙겨주고 싶은 동생처럼 보이는지도 몰랐다.
“자, 의영이 너도 먹어 봐. 입 벌리고.”
“누나도 참. 내가 이제 몇 살인데…”
“그럼 나도 의영이보다 나이 많은 걸.”
그런 말을 하면서도 의영이 받아먹자, 의지는 그걸 보며 기쁜 듯 웃었다. 이 드물다면 드문 광경에, 고기를 먹다말고 연장자 및 연소자들이 힐끔힐끔 저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잎새 및 비상과 친한 연장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의영이 형 이런 모습 참 보기 어렵긴 하지. 암.”
“니가 왜 잘난 척이냐. 이 자식아.”
“근데 그건 그래, 강산아.”
강산이 여전히 잎새한테 한 방 먹이자, 파랑이 그런 말과 함께 상황을 정리했다. 이렇게 보면 파랑은 참 귀중한 존재인 게 틀림없었다. 무엇보다 파랑은 저 강산을 막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도 만날 형일 수는 없잖아. 애들아.”
“이렇게 동생들이 많이 생겨서 난 좋기만 한걸. 그지, 의영아?”
의지가 그런 말을 던지자, 의영은 천천히 ‘그럼’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반쯤 민망하단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본 의영의 표정 중에선 가장 편해 보였다. 적어도 저기에 미친 개는 없었으며, 항상 누굴 챙기느라 바빴던 주장으로서의 모습도 없었다. 승지의 오빠는 아직 남아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다시 술자리가 가라앉았을 때였다.
“참 신기하긴 하지?”
다시 술잔을 손에 들던 의영이, 주위를 둘러보며 이런 말을 꺼냈다. 나직하지만 어쩐지 무게가 있는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돌려 의영 쪽을 쳐다봤다. 잠시 멋쩍어하던 의영은, 이윽고 다시 입을 뗐다.
“한 달 전쯤엔 전혀 모르던 사이였는데, 이렇게 술잔을 나눈다는 게 말이야.”
“그런 게 인연이잖아, 그지. 의영아?”
“아무튼 어때요. 좋은 사람 만났는데.”
의지 역시 주위를 둘러보며 묻자, 별밤이 웃으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마치 그 때를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잎새가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근데 참 남한테 말하기 그런 우연이긴 하다. 참.”
“야 이 자식아. 날 친구라고 말하는 게 그렇게 쪽팔린단 말이야?!”
“누가 너랬냐 강산아. 이 놈은 만날 이런다니까.”
강산이 죽일 듯 자길 노려보자, 잎새는 이런 말과 함께 킬킬댔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강산과 이런 식으로 말을 주고받는 게 즐겁단 표정이었다. 비상 역시 저 형들의 말싸움을 듣는 게 전혀 싫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별밤이 이런 말을 꺼냈다.
“근데 요즘 생각하는 거지만, 우리도 참 진지하다니까. 그지?”
“그건 좋은 거 아냐. 별밤아?”
“아니, 우리가 이 놀이란 걸 진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단 생각이 들어서.”
파랑의 말에, 별밤은 그렇게 대답했다. 강산은 그 말이 불만인지, 다시 투덜대며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왜, 그렇게 유치한 거 같냐, 엉?”
“멀리서 보면 그렇게 느끼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 나야 좋아서 하는 거지만.”
“그럼, 우리가 놀이를 진지하게 하는 게 웃긴 거란 말이야?!”
“아니. 거꾸로지. 그래서 난 강산이 니가 진짜 좋단 말이야.”
“니한테 좋아한단 말 들어서 어따 써먹냐. 젠장.”
강산이 고개를 돌리자, 이번엔 잎새가 거기에 끼어들었다. 물론 항상 그렇듯 장난치는 느낌이긴 했지만, 잎새치곤 진지한 모습이었다.
“그건 그렇지. 나도 그거 때문에 그냥 붉은 밤 사람들 좋더라.”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는 잎새를 보며, 비상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렇지 않았다면, 잎새든 누구든 처음부터 이런 놀이엔 관심조차 없었을 터였다. 그런 점에선 비상도 저 형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뭐, 굳이 말하자면 패널티까지 받아가며 할 일인가는 생각해 볼만하겠지만…”
“저요?”
갑자기 별밤이 자기한테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비상은 무심코 목소리를 높였다. 별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이겨야 패널티가 풀리고 뭐 그런 것도 아니잖아. 진다고 평생 그 패널티를 짊어지는 것도 아니고. 진지하게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게 이 놀이란 말이지. 남들이 볼 땐 우스울지도 모르지만. 무슨 소린지 알겠어?”
그 말을 듣고서야, 비상은 이 형이 뭘 말하고 싶은지 알아챘다. 사실 그 말은 맞았다. 천사한테 ‘놀이’에서 이기면 뭔가 있단 말을 듣긴 했지만, 꼭 이겨야 한다는 말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지면 자기가 죽는 것도, 평생 패널티를 갖고 사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이건 그저 ‘이겨도 되고 안 이겨도 되는’ 조금 희한한 놀이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언뜻 필요없어보이는 패널티는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으로 나뉘며, 비상 및 현한테 틀림없이 주어져있었다.
왜 하늘은 아무 것도 안 바란다면서 이런 묘한 일을 하는 걸까. 얼마 전에도 했던 생각을, 비상은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강산이 화를 냈다. 그러더니 이 말과 함께, 비어있던 술잔을 다시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젠장, 술을 제대로 안 먹었잖아.”
“무슨 소리야?”
“술한테 예의란 걸 지켜야지. 제대로 안 취했단 말이야. 똑바로 마셔야지.”
잎새의 말에 그렇게 투덜대며, 강산은 금세 술 한 잔을 비웠다. 그러더니 곧바로 빈 잔을 술로 가득 채웠다. 아마 이 사람은 이 술 한 병을 당장 비우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것 같았다.
“저건 또 무슨 논리냐. 대체.”
잎새가 그렇게 킬킬대는 가운데, ‘지금’ 술을 마시면 문제가 있는 비상은 안주용 과자로 배를 대신 채웠다. 그러고 보면 저 형은 항상 술을 마실 때마다 쓸데없이 진지했단 느낌이 들었다.
그 때, 이번엔 엉뚱한 데서 엉뚱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형, 그럼 누가 더 먼저 취하나 내기할까요?”
“뭐?!”
그 말을 한 사람, 즉 대한을 보고 잎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잎새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껏 자기들끼리 떠들던 모든 붉은 밤 팀원들이 그 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지막지한 말에, 강산은 눈을 번쩍였다.
“오, 자신있다 이거지?”
“아니,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비상이 넌 시끄러. 늦게 취한 사람이 나중에 술 쏘는 거다. 알았냐?”
그 말과 함께, 강산은 방금 비운 술잔을 또 가득 채웠다. 이전까지 마신 걸로 치면, 벌써 소주 세 병은 넘은 상황이었다. 대한도 질세라 그 뒤를 이어 술잔을 가득 채웠다.
“형님한테 질 만큼 약하진 않습니다. 저.”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린 모르는 거다. 알았지?”
그다지 좋지 못한 기운이라도 느꼈는지, 잎새가 다른 연장자들을 보며 이렇게 속닥댔다. 사실 가만히 생각하면, 저 둘의 주량이 얼마나 되는지, 취하면 어떻게 되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강산의 주량이라면 잘 알 파랑도 대한의 주량까진 알지 못할 터였다.
대체 앞으로 어떻게 될까.
둘이 동시에 한 ‘병’을 비우는 걸 보며,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뒤.
“어유 형님. 벌써 지셨어요?”
비상의 짐작대로, 상황은 불지옥으로 바뀌어있었다. 틀림없이 아직도 빗소리가 따갑게 들리는데, 이상하게도 비상 일행이 있는 자리는 뭐라도 불타오르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뜨거웠다.
“형님도 너무 그러는 거 아닙니다. 나이가 어려도 이만큼 마신다니까요. 진짜로.”
이제 술에 ‘제대로’ 취했는지, 아까부터 대한은 자꾸만 강산한테 시비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강산도 안 취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강산은 코끝이 빨갛게 될 만큼 잔뜩 취해있었다.
“뭐라고. 이 자식아?!”
“솔직히 술은 형님보다 제가 더 잘 먹지 않습니까. 게다가 아마 힘으로 겨뤄도…”
“이 자식이 이러자고 내기한 거냐? 너 오늘 나한테 죽어볼래?!”
대한의 도발에 드디어 참을성이 날아갔는지, 강산은 곧바로 대한의 멱살을 세게 잡았다. 언뜻 보기만 해도 제대로 빡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역시 술에 취해서인지, 대한은 전혀 무서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아무튼 형은 성질이 급하시다니까요. 이럴 때도 바로 화내고. 참…”
“젠장. 우리나라를 짊어질 또라…또라이 자식 같으니라고. 죽을래?”
“대체 왜 상황이 이렇게 된 거지?”
강산이 대한의 어깨를 더 세게 흔드는 걸 보며, 마치 넋이라도 빠져나간 것처럼 의영이 그렇게 중얼댔다. 잎새는 여전히 배꼽이 빠져나갈 만큼 웃어대며 간신히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부, 붉은 밤이거든요. 아 젠장. 웃겨 죽겠네…”
“넌 당분간 웃지도 못하겠다. 오늘 다 써서.”
마치 3년치 웃음을 한꺼번에 터뜨리는 듯한 잎새의 등을 두드리며, 별밤이 킬킬댔다. 아무튼 상황이 엉망진창인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의영이 바란 건 이게 아닐 터였다. 물론 이 사람들이 아무 문제도 안 일으킬 리는 없었지만.
결국 둘의 싸움은 강산이 숨을 몇 번이고 가다듬고, 대한의 안경이 비뚤어질 때까지 참으로 하찮게 이어졌다. 위의 소란을 더 이상 내버려둘 수 없었는지, 그걸 가만히 보던 의영이 질린 듯 말을 꺼냈다.
“이제 그만 좀 하자. 애들아.”
“암요. 제가 봐드려야죠.”
“뭐?!”
“야, 근데 저 둘 다 술깨면 어떻게 되는 거냐?”
이런 싸움을 아주 즐기는 듯한 잎새는 둘째치고, 별밤 및 파랑이 흐느적대는 대한(그것도 거구)을 끌고 나갔다. 강산은 여전히 분한지, 여전히 비가 줄기차게 내리는 술집 문 밖을 바라보며 이렇게 소리쳤다.
“저 자식이. 어디 한 번 제대로 붙어보자. 넌 이제 죽었어. 왜 저런 놈한테 여자친구가 있는 거야?!”
“그. 그거 때문이었냐? 니들 뭐야?”
거기에 잎새가 다시 탁자에 얼굴을 묻고 끅끅대는 가운데, 비상은 자기가 원래대로 돌아가있단 걸 깨달았다. 대체 언제 이렇게 된 거지. 깜짝 놀라 주위를 보니, 옆에 앉아있던 현 역시 원래대로 돌아가있었다. 현은 안주용 과자 및 사이다를 입에 넣으며, 아주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바깥의 참사를 구경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원래대로 돌아갈 거 같아서 내려놨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랬단 말인가. 아무리 술자리가 수라장이라도 그렇지, 비상은 뭐에라도 씌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튼 이젠 자기도 술을 마실 수 있겠단 생각에, 일단 비상은 ‘적절히’ 한 잔을 입에 머금었다.

아무튼 이 파란만장한 술자리가 끝나고(의영은 반쯤 포기한 표정이었지만), 다같이 밤늦게 집에 돌아갈 때였다.
“야, 강산아. 뭐냐?”
갑자기 공중전화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강산을 보며, 잎새가 희한하단 듯 이렇게 물었다. 강산은 그 말에 대답도 않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공중전화 안으로 쳐들어간 뒤 수화기를 손에 들었다. 물론 비에 쫄딱 맞은 채였다.
다들 어이없어서 입을 딱 벌리고 있자, 강산은 수화기를 든 채 갑자기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술주정은 술주정이었지만, 뭔가 원한이 가득 맺힌 희한한 헛소리였다. 갑자기 온갖 세상에 불만을 털어놓는(물론 혀가 꼬인) 강산을 보며, 잎새는 다시 한 번 배꼽을 쥔 채 끅끅댔다.
“뭐야, 저 놈 취한 거냐. 제대로?”
“아니, 저럴 거면 대체 왜 술을 제대로 마신다는 거야?”
“뭐, 저 놈 아니냐. 저렇게 사는 게 맞나보지. 크하하.”
그 말과 함께, 잎새는 비상의 어깨에 기댄 채 눈물까지 흘리며 웃었다.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지. 눈앞에서 벌어지는 진풍경을 보며, 비상은 정말로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아무튼 강산은 파트너가 없는 자기 불만을 15분이 넘게(혀꼬인 채로) 털어놓다가, 더 이상 이 민망한 걸 두고볼 수 없다는 별밤 일행한테 억지로 끌려나왔다. 끌려나가기 바로 전에도 수화기를 붙들고있는 걸 보면, 자기한테 짝이 없단 게 그렇게 한에 맺힌 듯했다. 물론 사정을 모르는 주위사람들 눈엔 그저 술취한 사람 1일 뿐이겠지만.
“왜 저러면서 술을 마시고 싶어하는 거야?”
하늘색 우산을 쓴 채 이 광경을 지켜보던 현은, 비상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일단 자기보다 나이가 더 나가는 형이긴 했지만, 비상은 어른으로서 더 할 말이 없어졌다.
대체 현이한테 뭘 가르치는 거야. 저 형은.
그 생각과 함께, 비상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형이 자기 마음을 아는 날은 결코 오지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