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깬 비상은,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다. 마치 어릴 적 이불에 실례라도 한 듯한, 묘하기 이를 데 없는 느낌이었다. 어쩐지 보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도, 비상은 천천히 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걸 두 눈으로 본 순간, 비상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를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가 눈길을 둔 이불 아래가 새까맣게 물들어있었던 것이다.
잠시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봤지만, 도무지 이 상황은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았다. 설마 자기가 잘 때 일이라도 저질렀나 생각해봤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아마도 비상이 살면서 처음 겪는 느낌인 것 같았다.
그럼 대체 이건 뭘까.
“왜 그래?”
잠시 가만히 앉아있던 비상은, 현이 건 말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현의 목소리를 볼 때, 아마 원래대로 돌아간 것 같았다. 비상이 답하지 않자, 가까이 다가오던 현은 이윽고 그걸 보곤 ‘아, 그거구나’라 혼자 중얼댔다. 지금 현은 반팔 및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아마 집에선 그 후드티를 입지 않기로 한 듯했다.
아무튼 비상을 가만히 보던 현은, 이윽고 이런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불은 내가 빨게.”
비상이 어쩌면 좋을지 몰라 가만히 앉아있자, 갑자기 아랫배가 아파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엔 체했나, 라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과는 조금 다른 거였다. 설마, 라 생각한 순간, 현이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뭔가 들고 다시 나타났다. 그리곤 이 말과 함께, 자기가 들고온 걸 비상한테 내밀었다.
“내 거 빌려줄게.”
그 말에 안 좋은 느낌을 받으면서도, 비상은 일단 그걸 받아들었다. 그 뒤, 조심스레 눈길을 아래로 옮겼다. 눈앞에 나타난 것을 본 뒤, 비상은 잠시동안 할 말을 잃었다. 어쩌면 아까보다 지금이 더 충격일지도 몰랐다.
자기 손에 들려있는 건, 틀림없이 생리대 및 진통제(로 짐작되는 것)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 위엔, 아마 현의 것으로 짐작되는 속옷까지 있었다. 머릿속이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걸 느끼면서도, 비상은 현한테 조심스레 물었다.
“이걸 나한테 막 줘도 돼?”
“그치만 그러는 게 낫잖아.”
사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비상은, 이 말과 함께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화장실 좀 쓸게.”
아마 오늘도 어제 못지않은 기나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혼자가 된 비상은, 아주 조심스럽게 여기저기를 확인했다. 짐작대로 입고 있던 옷이 피(로 보이는 것)로 얼룩진 걸 보고, 비상은 현의 말이 맞다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현은 ‘나오면 바지도 빌려줄게’라며 아무렇지 않게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옷을 어떻게든 갈아입은 뒤(꽤 고생했지만), 비상은 잠시 변기뚜껑 위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이런 경험은 처음 이전에 비현실적이라서(적어도 비상한테는) 어제만큼이나 머리가 얼른 돌아가지 않았다. 비상도 살면서 여러 일을 겪었지만, 이렇게 ‘어쩌면 좋을지’ 알 수 없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자기와 아무 인연이 없어야 할 일을 갑자기 겪었으니 머리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던 것이다.
조금씩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상은 지금 상황을 대충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진 너무나 현실과 벗어난(‘놀이’를 하기로 한 시점에서 이미 현실을 벗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일이라서, 자기조차 어쩌면 좋을지 얼른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방금 피를 닦은 것 및 아직도 아랫배가 아파오는 건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다만 그 감각이 너무나 있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지금껏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뿐이었다.
비상은 잠시, 지금 자기가 놓인 처지를 생각했다. 일단 이것도 모두 하늘이 알고 있는 일이므로 자기 생각보다 더 커지진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아무튼 정리할 건 정리해야겠다 여겨서였다. 그러니까 지금 자기는 현이 한 달에 한 번쯤 꼬박꼬박 하고 있을 ‘그것’을 하고있는 게 틀림없었다. 전에 있던 일이나 오늘 태도로 볼 때, 현은 이걸 이미 짐작한 듯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낯선 감각만이 아니었다. 아직 골치아픈 일이 더 남아있었다. 물론 감각도 문제였지만, 사실 비상 입장에선 이게 더 중요했다. 그러니까 지금 자기는, 일단 ‘아마도’이긴 하지만, 그러니까 누군가를 밸 수도 있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이건 농담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하면 현도 초경 뒤부터 죽 그랬을 테지만.
이쯤되자, 비상은 몸이 부르르 떨리는 걸 느꼈다. 하늘이 자기한테 알려주고 싶었던 건 이 알 수 없는 두려움인가, 란 생각 때문이었다. 이, 뭐라 할 수 없는 ‘자기자신의 축이 흔들리는’ 듯한 두려움이, 하늘이 자기한테 전하려던 것인가. 비상은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 하늘이 자기네들을 위험에 빠뜨릴 생각이 없다는 건 어쩐지 알 것 같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하면 좋을지는 비상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도 없으므로, 일단 비상은 밖에 나가기로 했다. 현은 아직까지도 화장실 밖에서 자기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괜찮아?”
현도 걱정하고 있었는지, 이제야 밖으로 나온 비상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 자기를 정말 걱정하고 있었던 듯한 솔직한 표정을 보자, 비상은 이 아이한테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아닐 거 같은데.”
“정말이래도.”
고개를 갸웃대는 현한테서 눈길을 돌린 채, 비상은 그렇게 대답했다. 이렇게 보면 현도 눈치는 꽤 빠른 것 같았다. 이것도 의외이긴 했지만.
그 때, 현이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왔다.
“안 무서웠어?”
어쩐지 비상은, 이 말엔 거짓으로 답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결국 반쯤 포기한 채, 비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조금.”
“나도 그런데.”
“초경이?”
현이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이렇게 대답하자, 비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이 역시 의외였다. 현이라면 무서움은 그다지 느끼지 않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건 깜짝 놀란 거고, 다른 거.”
“다른 거라면…”
초경을 그저 깜짝 놀란 것으로 여기는 현도 신기했지만, 비상은 그 뒤에 한 말이 더 신경쓰였다. 다른 거라니, 설마 ‘그걸’ 말하는 걸까.
“혹시 그거 말이니?”
“응. 그거.”
그 아무렇지 않은 말에 비상은 다시 놀랐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현이 ‘그걸’ 무서워한 적이 있었다. 그 일로 둘이서 얘기한 적도 있었을 터였다.
“설마, 그 두려웠단 게…”
“응, 그 하얀 거.”
비상이 조심스레 묻자, 현은 그렇게 대답했다.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그게 뭔지쯤은 비상도 잘 알 수 있었다. 처음부터 현이 무서워하는 건 그것이리라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정말이란 말을 듣자, 몸을 움찔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겠구나.”
“응.”
정신을 차린 비상의 말에, 현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비상을 보며 다시 입을 뗐다.
“지금은 좀 나은데, 볼 때마다 겁낼 때도 있었어. 자기가 뭔가 무서운 힘을 지닌 거 같아서, 그래서 어떻게 될 거 같아서 무서웠어.”
어쩌면 그 느낌은, 비상이 방금 받은 것과 비슷한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 비슷한 걸 넘어서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걸 대볼 방법은 없었지만.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건지도 모르겠구나.”
“그러게.”
현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대답했다. 일단 비상은 오늘 연구소를 쉬기로 했다. 뒤에 현이 한 말에 따르면, 이럴 땐 약을 먹고 자는 게 가장 좋다는 듯했다. 경험자가 그렇게 말하다면 그게 맞을 터였다.
내일은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 비상한테는 쉬는 게 더 중요했다. 일단 오늘 놀이엔 나갈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제 그 일 때문에라도, 비상은 모임에 빠질 생각이 없었다.
그 날 저녁, 붉은 밤을 비롯한 모든 밤들이(어제 일로 망설여하면서도) 다시 그 옥상에 모였다. 의영 말에 따르면, 이번엔 천사가 직접 ‘할 말이 있다’고 불러낸 듯했다. 즉, 오늘 놀이는 없지만, 대신 천사와의 만남이 있었다. 다들 어제 그 일을 기억하고 있는지, 민망하단 표정으로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다.
참고로 비상은 여전히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잠을 잔 뒤 현과 같이 여기를 찾아왔다. 어차피 다들 정신도 없는 듯하니, 가만히 있으면 들킬 것같진 않았다. 그만큼 오늘, 놀이를 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동요하고 있었다. 만약 몇몇 연장자 형들이 자길 알아본다 한들, 틀림없이 아무렇지 않은 척해줄 터였다.
잠시 뒤, 갑자기 인기척이 없던 곳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잘 지내셨나요?”
모든 이들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당연하단 듯 천사가 있었다. 천사가 나타난 건 이제 한두 번이 아니지만, 아무리 봐도 그 광경은 비현실에 가깝게 느껴졌다. 어제 일 탓인지 아무도 말을 걸려하지 않자, 천사는 다시 한 번 가만히 입을 뗐다.
“오늘은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이 말에, 이젠 다들 걸릴 게 걸렸단 표정으로 천사를 쳐다봤다. 마치 숙제를 안 한 뒤 선생님한테 그걸 들킨 학생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사실 비상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여기 있는 이들 중, 그런 생각을 안 가진 이가 더 드물 터였다.
아니나다를까, 천사가 꺼낸 말은 다른 이들의 생각과 전혀 빗겨나가지 않았다.
“어제 일에 관해선 잘 들었습니다.”
이 말이 나오자, 여기저기서 이마를 짚는 게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천사는 말을 이었다.
“여러 밤이 관련된 일인 것 같은데, 원래대로라면 패널티로 넘어갈 일이지만 이번엔 범위가 너무 넓네요.”
이젠 다들 무슨 일이 일어날까, 란 표정으로 천사를 보고 있었다. 잠시 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러다 다시, 천사가 입을 뗐다.
“저희도 많이 생각한 끝에, 일단 이번엔 패널티 없이 넘어가기로 다짐했습니다. 이번 일은 패널티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들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거기까지 천사가 말하자, 여기저기서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좋아진 건 맞지만, 천사가 앞으로 무슨 말을 할지 다들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때, 천사는 마치 장난꾸러기라도 되는 듯 활짝 웃으며, 대뜸 이런 말을 꺼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예능이에요?!”
다들 반쯤 허탈해하는 중, 강산만 기운이 남아도는지 이렇게 소리지르고 있었다. 이럴 때도 저럴 수 있다니, 참으로 저 형다웠다.
“오늘은 놀이 대신, 조금 특별한 걸 하려 합니다.”
아무튼 천사는 말을 이었다. 다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천사한테 눈길을 돌렸다.
“아마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단 훨씬 더 가벼울 거예요.”
“그걸 누가 믿냐…”
강산이 투덜대자, 여기저기서 피식대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저 형의 반응도 웃기긴 했지만, 덕택에 방금까지 있던 긴장감은 많이 사라진 듯했다.
천사도 그걸 알아챘는지, 다시 환하게 웃으며 이런 말을 꺼냈다.
“오늘은 ‘각 밤을 칭찬하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네?”
이 말에, 비상을 비롯한 많은 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걸 짐작한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건 비상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왜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역시나 강산이 그렇게 되물었다. 천사는 재밌단 표정으로 그 말을 들으며 웃어보였다.
“그러게요. 왜일까요?”
“어제 일 때문이겠지. 다른 까닭이 있겠어?”
이제 반쯤 포기했는지, 의영이 읊조리듯 그렇게 말했다. 아무튼 천사 및 하늘 입장에선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 여긴 듯했다. 사실 단체로 패널티를 받는 것보단 이게 몇 배 더 나은 일이었다.
천사의 말에 따르면, 각 밤에서 한 명씩 나와 제각기 다른 밤의 주장을 칭찬하면 된다고 했다. 물론 대충 하면 이번에야말로 진짜 패널티가 가는 듯했다. 그게 너무나 단순하다 여겼는지, 금빛 밤 주장인 해원이 저만치에서 이렇게 물어왔다.
“그냥 칭찬만 하면 돼요?”
“네. 여러분의 진심을 담아 성의껏 하시면 돼요.”
“잘못 말하면 그 자리에서 패널티 아니냐?”
천사의 말이 그렇게 믿기 어려운지, 강산이 미심쩍단 표정으로 그렇게 묻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되었으므로, 각 밤들은 모여서 누가 대표로 나설지를 정했다.
“야, 이런 건 괜히 원망받기 쉬우니까 제비뽑기나 할까?”
“강산이 넌 패널티가 그렇게 무섭냐?”
“너도 알잖냐. 그 미친 놈…”
잎새가 킬킬대자, 강산은 저 너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잎새도 그 어정쩡하게 서있는 금빛 밤 연소자를 보곤, ‘그건 그렇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제비뽑기는 하지 않았지만, 대신 묵찌빠 대결이 펼쳐졌다. 그럭저럭 길게 벌어진 대전에서 마지막에 남은(즉 진) 사람은 다름아닌 군청이었다. ‘왜 니가 남냐’며 주위에서 킬킬대는 가운데, 당사자인 군청은 항상 그렇듯 진지하게 ‘열심히 하고 오겠습니다’라 대답할 뿐이었다. 참고로 비상은 현과 먼저 대결한 뒤 이겼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현이 자기를 ‘무지 잘한다’는 부럽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지만, 그다지 자랑하고 싶진 않은 일이었다.
잠시 시간이 지난 뒤.
각 밤의 주장 및 대표, 그리고 팀원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여있었다. 물론 천사가 말한 그 칭찬을 하기 위해서였다. 신기하게도 금빛 밤에선 대표 대신 해원 한 명만 나와있었다. 그게 궁금했는지, 옆에 있던 의영이 이렇게 물었다.
“너흰 누구 나올 사람 없냐?”
“솔직히 제가 하는 게 가장 안전하잖아요.”
그 말과 함께 해원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저 말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한편 상록 뒤엔 은솔이 있었는데, 이 역시 무난한 인선이라 보였다.
“그럼, 먼저 의영 씨를 칭찬해주세요.”
그렇게 모두 모이자, 천사는 기다렸단 듯 입을 뗐다. 일단 모이긴 모였지만, 막상 그런 말이 나오자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다. 그것뿐만 아니라, 다들 민망한지 서로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오히려 어제가 더 나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사자인 의영 역시 고개를 숙인 채, 아무하고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열심이었다.
“그럼 저 먼저 할게요.”
결국, 누군가는 먼저 말을 꺼내야 하는 상황에서 해원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이런 건 처음이라서인지, 해원 역시 상당히 민망하단 표정이었다.
하지만 잠시 망설이다가, 해원은 드디어 의영 쪽을 보며 입을 뗐다.
“일단 의영이 형은 무지 좋은 분이세요. 놀이도 잘 하시고…”
의영은 그런 칭찬이 익숙하지 않은지, 해원한테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해원 역시 민망한 듯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죽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학창시절엔 별명도 있으셨잖아요. 그, 미친 개라고…”
여기까지 말하던 해원은,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곤 아뿔싸, 란 표정을 지었다. 의영도 더 이상 눈길을 돌리긴 힘들었는지, 한숨을 쉬며 해원 쪽을 본 뒤 입을 뗐다.
“그건 칭찬이 아니야.”
그 목소리는 조용하기 이를 데없었지만, 딱히 화난 말투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모든 걸 내려놓았다고나 할까, 가라앉은 느낌이 강했다.
“그건 비웃는 거지. 너희들, 미친 개를 진짜로 보면 멋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재수 옴붙었단 생각 들지?”
그 말을 듣자, 다들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의영은 하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거야 무섭긴 무섭겠지. 잘못 건드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하지만 미친 개를 동경한 사람이 있을 거 같아? 나도 마찬가지야. 완전히 무시하는 별명이었어. 저 놈은 잘못 건드리면 미치니까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 뭐 그런 거.”
“형, 저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나도 알아. 해원아.”
그 말과 함께, 의영은 고개를 숙이려던 해원을 막았다. 그리곤 여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뗐다.
“그러니까, 나는 그렇게 너희들한테 존경받을 존재는 못 돼. 학생시절에도 비웃음당하는 게 다였어. 물론 싸워서 이긴 적도 있지만, 그렇다고 누가 칭찬하거나 떠받들어준 건 아니야. 뭐, 너희들이 좋다면 뭐로 부르든 상관은 없지만…”
의영이 그렇게 말꼬리를 흐린 걸 보고서야, 비상은 그 미친 개란 별명이 온갖 밤에 다 퍼져있단 걸 깨달았다. 대체 소문이 어디까지 닿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비상이 생각하던 것보단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알고있었던 듯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우연히 고개를 다른 데로 돌린 비상은, 붉은 밤에서 오직 승지만이 가운데로 모이지 않은 채 겉돌고 있단 걸 알아챘다. 승지는 의영한테서 아주 몸을 돌린 채, 혼자 다른 데를 보고 있었다. 승지는 의영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의영에 관해 얼마나 아는지는 비상도 모르지만, 아무튼 저 말을 듣기 싫다는 건 틀림없어보였다. 어쩌면 의영의 표정이 평소보다 가라앉은 것도 그것 때문일지 몰랐다. 의영은 승지한테 이런 걸 말하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 의영을 달래듯, 해원이 조심스레 이런 말을 꺼냈다.
“아까 말은 죄송합니다. 그치만 형은 참 좋은 분이에요.”
“나도 니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란 건 알아.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마라.”
그 말과 함께, 의영은 하던 걸 마저 하라는 눈빛으로 해원을 쳐다봤다. 해원이 기죽어있다고 느낀 건지, 갑자기 금빛 밤 쪽에선 이런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해원이 잘해라!”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전에도 이야기한 바 있는 금빛 밤 연장자였다. 오늘도 패널티의 영향인지, 원래보다 어린 모습이었다. 그래도 고등학생 무렵부터 꽤 키가 컸는지, 보통 연소자들 사이에 있어도 그다지 밀리진 않는 느낌이었다. 자기 모습이 남한테 보이든 말든, 그 연장자는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르며 해원을 격려했다. 우습게도, 바로 옆에선 여러 모로 불쌍한 그 금빛 밤 연소자가 ‘이러면 난 뭐야…’라며 투덜대고 있었다.
아무튼 이제 기운을 차렸는지, 해원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다시 금빛 밤 쪽에서 격려의 환호성이 들리는 가운데, 해원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 좋은 동생분을 두셨고…”
이 말에, 의영은 물론 멀리서 못 들은 척하던 승지조차 몸을 움찔했다. 해원은 당황했는지, 얼른 이런 말을 꺼냈다.
“이, 이것도 안 되나요? 저는 승지가 정말 좋은 애라 생각하는데.”
“그건 나도 맞다고 생각해. 고마워. 그런데 승지가…”
그 말과 함께, 의영은 저만치로 눈길을 돌렸다. 승지는 당연하단 듯, 여전히 다른 데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보단 조금 낫지만, 그래도 어색한 분위기란 건 틀림없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보며, 비상은 칭찬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참 어려운 일이란 생각을 했다. 특히 이렇게 엉뚱한 데를 건드릴 때가 그랬다. 어쩌면 천사는 이걸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금빛 밤에서 다시 환호가 일자, 해원은 다시 한 번 의영을 쳐다봤다. 그리곤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근데 형은 겉으로 볼 떄랑 달리 무지 믿음직한 분이에요. 아, 물론 그 모습이 믿음직하지 못하단 건 아니고…보통 사람처럼 보이는데 어쩐지 보통하고 조금 다른 거 같아요. 그, 어쩐지 끌리는…”
“야, 이게 뭐야?!”
거기까지 가자, 갑자기 이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물론 그 주인공은 강산이었다. 강산은 정말 어이없단 표정으로 이런 말을 퍼부어댔다.
“지금 우리 의영이 형을 데리고 뭐하는 거야, 이 자식아?!”
“진정하시는 게…”
“방송도 모르면 가만히 좀 있어요. 천사님은.”
“우리가 언제부터 방송을 했더라?”
이 말에 킬킬대는 잎새는 둘째치고, 이런 식으로 금빛 밤의 차례가 끝났다. 붉은 밤 때 하도 시간을 많이 끌어서인지, 파란 밤 쪽 상록은 그나마 짧게 이뤄졌다.
이렇게 해서, 그 다음은 파란 밤, 즉 은솔 차례였다. 여러 모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인 탓에, 파란 밤에서도 걱정하는 눈빛이 보였다. 물론 그나마 낫단 생각에 은솔을 내보낸 것이겠지만.
아무튼 은솔은 의영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갑자기 아무도 생각지 못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오빠 만날 입는 흰 티 무지 멋있어요.”
“응?”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은솔을, 의영은 반쯤 어쩌면 좋을지 모르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이들 역시 상상 밖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있는 가운데, 은솔은 말을 이었다.
“오빠가 입으시는 거 하나만 저 주시면 안 돼요?”
“칭찬이긴 하네. 칭찬이긴.”
이 광경이 그렇게 웃긴지, 잎새는 배꼽까지 잡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술렁대는 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갑자기 붉은 밤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2만원!”
“뭐냐, 강산이 쟨?”
갑자기 강산이 손을 들며 이렇게 소리지르자, 잎새는 이제 코미디라도 보는 듯 킬킬대고 있었다. 여기에 질 수 없었는지, 아니면 분위기에 휘말린 건지, 해원이 의영의 민망해하는 표정을 무시한 채 손을 들고 외쳤다.
“2만 9천원!”
이렇게 해서, 틀림없이 각 밤 주장을 칭찬하는 자리였던 옥상은 순식간에 경매장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거 진짜로 하는 거냐?’란 말도 여기저기서 나왔지만, 끼어드는 사람 입장에선 그저 재밌는 듯했다. 다들 신났는지, 경매가도 생각보다 빨리 올라갔다. 미친 듯이 큰 액수를 부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렇게 보통 흰 옷(그것도 누가 입은 것)이 5만원을 훌쩍 넘어갈 때였다.
“10만원!!”
갑자기 붉은 밤 쪽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리자, 모두 하나같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들 어떤 미친 놈인가란 눈빛이었다. 사실 비상도 마찬가지였지만.
거기엔, 여러모로 연소자답지 않은 몸집을 지닌 대한이 당당하게 손을 들고 있었다. 그것도 좋아죽겠는지, 얼굴에 함박웃음을 띄우면서.
여기에 붉은 밤은 물론, 다른 밤들도 모두 할 말을 잃었다. 당사자인 의영 역시 자기 옷에 10만원이 불렸단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옆에 있던 해원한테 이렇게 묻고 있었다.
“우리 지금 장난하는 거지?”
“진짠 거 같은데요, 형.”
“지금은 진짜랍니다.”
해원조차 반쯤 얼어붙은 듯 이렇게 대답하자, 천사가 항상 그렇듯 싱긋 웃으며 이런 말을 보탰다. 뭐 이런 현실이 다 있어. 다들 놀이라는 비현실을 한 달이 넘게 겪고 있었지만, 이 초현실엔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그런 순간이 이어지다, 갑자기 이제야 떠올랐단 듯 잎새가 이렇게 소리쳤다.
“아니, 근데 돈은 누구한테 가는 거야?!”
“의영이 형이 가지셔야죠.”
대한의 그 당당한 말에, 다들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잠시 가만히 있다가, 이윽고 의영이 천천히 입을 뗐다.
“마, 만약 그렇게 할 거면 같이 밥먹는 데나 쓰자. 알았지?”
이 말을 듣자, 벙쪄있던 붉은 밤 팀원들은 갑자기 축제분위기로 바뀌었다. 같이 밥을 먹자는 그 말에 참 빠르게도 사기충전이 되고 만 것이다. 이젠 ‘대한이 이 자식 그렇게 안 봤는데 대단한데?’부터 시작해서, ‘연소자의 힘 좀 보여줘봐라’란 말까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었다. 물론 다른 밤은 모두 벙찐 표정이었지만.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잠시 뭘 생각하던 대한이 불에 기름을 부었다.
“12만원!”
당연한 말이지만, 이제 막 복학한 연소자치곤 참으로 큰 돈이었다. 의영은 이제 무서워졌는지, 대한 쪽을 보며 반쯤 사정하듯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그, 그 정도면 됐어. 하나 줄게.”
“20까지 올릴 생각 있었는데요. 형.”
“너한테 그만큼 쓰게 하면 내 입장은 뭐가 되니. 나 참.”
아무튼 붉은 밤이 축제분위기로 바뀐 가운데, 여전히 승지는 관심없단 표정으로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비상도 반쯤 어이없어하는 가운데, 파란 밤의 차례도 곧바로 끝났다.
그렇게 해서, 상록이 또 묻힌 가운데 붉은 밤의 차례가 돌아왔다.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군청은 잠시 목을 고르다, 이윽고 천천히 입을 뗐다.
“저희 밤 의영이 형이 너무 인기가 많은 것 같은데…”
“니들만 맛있는 거 먹냐?”
이 말에, 금빛 밤 쪽에서 억울하단 듯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오늘 주인공이 붉은 밤이 되어버린 게 억울하단 분위기였다. 물론 당사자인 붉은 밤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아무튼 군청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일단 의영이 형도 그렇지만, 세 분 다 통솔력이 있으신 거 같아요.”
“내가?”
“해원이 너도 저 무지막지한 애들 다룰 정도면 대단한 거지.”
해원이 놀란 듯 묻자, 옆에 있던 의영이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에 ‘우리가 무슨 문제아 집단이냐?!’란 목소리가 저 쪽에서 들렸지만, 해원도 이해했단 듯 한숨을 살짝 쉬었다.
“뭐, 그런 점에선 제가 고생이 많죠.”
그 말에, 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사실 금빛 밤도 자기네들이 다루기 어려운 팀이란 건 다들 알고있을 터였다. 몇몇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겠지만.
“상록이 형은 항상 침착한 게 인상깊구요.”
군청이 이어서 말하자, 드디어 주목을 받는다는 생각에 파란 밤 쪽이 들썩대기 시작했다. 군청도 이걸 느꼈는지, 바로 다음 말을 입에 담았다.
“형은 판단력도 좋은 것 같아요.”
“그렇게 우리 경기를 자주 봤어?”
이번엔 상록이 조금 놀랍단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군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보면서 항상 차분하단 생각을 했거든요.”
“아무튼 고맙다.”
그 말과 함께, 상록은 군청한테서 눈길을 돌렸다. 의영도 그렇지만, 상록 역시 자기를 칭찬하는 걸 눈앞에서 듣는 게 많이 멋쩍은 듯했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지만.
상록의 칭찬을 끝냈는지, 군청은 이제 해원 쪽을 돌아보았다. 가만히 생각하면 이 둘은 같이 있는 게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다른 존재였다. 군청도 그렇게 느낀 건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이윽고 입을 뗐다.
“그, 저보다 나이도 더 어린데 정말 대단하신 거 같아요.”
“제가요?”
여전히 해원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군청을 쳐다보고 있었다. 군청도 잠시 고개를 끄덕인 뒤,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아까 의영이 형도 말씀하셨지만, 금빛 밤을 이만큼 다루실 수 있다는 게…”
“그래서 우리가 문제아냐고!!”
이젠 아까와 댈 수 없을 만큼 큰 목소리가 여기까지 쩌렁쩌렁 들려왔다. 이번엔 아까와 다른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번엔 장난이 아니라, 아무리 들어도 진심이란 게 똑똑히 느껴지는 말투였다. 가만히 들어보니, 저건 전에 비상한테 시비를 걸었던 그 연소자가 틀림없었다.
일단 비상도 잘 아는 금빛 밤 연장자가 연소자를 말리려들었지만 몸집이 줄어서인지 아무 소용도 없었다. 저 쪽에서도 유명한 연소자인지, 이젠 금빛 밤에서도 머리를 부여잡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군청은 말을 이었다.
“사실 금빛 밤에서도 문제가 여럿 있을 텐데, 아직 연소자이시면서 그걸 잘 처리할 수 있단 건 정말 대단하다 생각해요.”
“에이, 거기까진…”
“신발. 너 지금 잘난 척하냐? 우리보다 니네 밤이 더 얌전하다고?!”
해원이 머리 뒤를 긁으면서 민망해하는 가운데, 그 연소자의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사실 가만히 들어보면, 아까보다 두 배는 더 커진 것 같았다. 이젠 전의 그 불쌍한 금빛 밤 연소자도 어떻게든 저 놈을 끌어내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또 싸움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를 보며, 비상은 저 놈이 자기한테 자꾸 시비를 거는 것도 그만한 배짱이 있어서란 걸 다시금 깨달았다.
“난 괜찮으니까 우리 좀 가만히 있자. 응?”
당사자인 해원조차 이런 말과 함께 말렸지만, 정작 금빛 밤 연소자는 말을 듣긴커녕 오히려 여기로 뛰쳐나오려 했다. 금빛 밤 쪽에서도 어이가 없었는지, 대체 쟨 왜 저러지란 표정으로 그 연소자를 구경하고 있었다. 저기서 들리는 목소리가 하도 시끄러웠던 탓에, 비상은 만날 자기한테 시비를 걸던 그 연소자가 김진혁이란 이름이란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넌 얼마나 잘났는데 그딴 소리를 하는 거야, 어?”
결국 그 진혁이란 연소자는 깽판을 치고 싶어서 몸이 근질댔는지, 이런 말과 함께 군청 쪽으로 뛰어갔다. 해원이 ‘그만하라고. 이 자식아!’라며 어떻게든 말리는 가운데, 결국 오늘도 어제 못지않은 수라장이 시작되었다. 천사는 그걸 신기하단 눈빛으로 바라보며, ‘다음엔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네요’라 혼자 중얼대고 있었다. 이미 사태는 군청을 반쯤 무시한 채 해원 대 진혁으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어쩌면 의영 대 진혁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늘도 그냥 가자.”
이걸 보던 현이, 갑자기 어제처럼 비상의 손을 잡아끌었다. 오늘 이 모습으로 여기에 오래 있는 것도 안 좋단 생각에, 비상도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오늘은 전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비상은 ‘그게’ 그런 느낌이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묘한 감각을 어떻게든 참으며, 현과 함께 사람무리를 헤쳐나가려 할 때였다.
우연히 비상이 돌아본 곳에, 군청이 서있는 게 보였다.
얼른 눈길을 피하려 했지만, 하필이면 바로 그 때 군청이 비상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다지 좋지 못한 상황인데. 어쩌다 서로 눈이 마주친 상황에서,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비상은 될 수 있는 대로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지만, 고개를 돌린 뒤, 비상은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군청 역시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자기가 누군지 알고 배려라도 한 것처럼. 설마, 란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으로 일단 넘긴 뒤, 현을 따라 더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갑자기 누가 비상을 어깨째 낚아채는 게 느껴졌다. 이건 또 뭐지. 그 힘이 하도 세서, 비상은 어이없단 말투로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이번엔 또 누구야?”
“나다. 불만있냐?”
그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날선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거기엔 비상만큼이나 자길 어이없단 표정으로 바라보는 세림이 있었다.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이었지만, 적어도 이런 상황에서 만나고 싶진 않은 인물이었다. 게다가 상대방은 자기가 누군지 이미 알아챈 것 같았다.
“아무튼 뭐지?”
“나랑 할 얘기가 있지 않던가?”
“대체 무슨 얘긴데?”
자꾸만 귀찮게 굴어오는 세림한테, 비상은 이렇게 되물었다. 이제 정말 반쯤 지쳐있었지만, 뭐라도 말해야 빨리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내가 잘난 척하지 말라고 안 했던가?”
“그러니까 내가 언제 그랬단 거야?”
“지금도 그러고 있는 거 아냐?”
비상이 어이없단 듯 되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이 남자는 대체 뭘 생각하는 거지. 비상이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세림은 말을 이었다.
“전에 말했는데 여전하더군. 자기가 잘났다는 그 태도 말이야. 연소자들은 여전히 꼴보기 싫은가? 내 말이 말같지도 않았나 보지?”
“대체 내가 왜 그 쪽 말을 곧이곧대로 따라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 잘난 태도를 보인 기억조차 없는데 말이야.”
그 말과 함께, 비상은 세림을 똑바로 쳐다봤다. 왜 알아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모습이든 이 남자의 도발엔 대충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 남자와 말싸움할 시간도 없었고, 여길 빨리 빠져나가는 게 훨씬 더 중요했다.
“그럼 댁 정신이 썩어빠진 탓이겠지. 그게 왜 내 탓이겠어?”
“지금은 일단 보내줄 수 없나? 사람한테도 사정이란 게 있는데.”
“어유. 무서워서 도망이라도 가시려고? 등도 못 편단 말을 들었는데…”
“그럼 나중에 보지.”
더 이상 세림과 이야기할 시간이 없어서, 비상은 자기가 현의 손을 끌고 밖으로 나섰다. 세림은 이걸 도망쳤다 여길 수도 있겠지만, 비상은 지금 밖으로 나가는 게 그깟 오해를 푸는 것보다 훨씬 더 급했다. 어쩌다 보니 이번엔 자기가 현을 끌고가는 것처럼 됐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세림과 같은 사람과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비상은 어쩐지, 저 주세림이란 남자가 자꾸만 걸리적거렸다. 그 까닭은 알 수 없었지만, 그 역시 조만간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세림을 따돌린 뒤, 비상과 현이 드디어 계단 층계로 내려갈 때였다.
“나한텐 아무 볼일도 없나 보지?”
“이번엔 또 뭐야?”
오늘 아주 귀에 익은 목소리가, 비상의 등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비상이 그런 말과 함께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지금 가장 만나기 싫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오늘을 수라장으로 만든 금빛 밤 연소자, 진혁이었다. 그 놀리는 듯한 눈빛으로 볼 때, 자기가 누군지 알아챈 게 틀림없었다.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들어놓고 자긴 이러고 있다니. 비상은 어이없단 생각을 숨길 수 없었다.
“볼일이 없는 사람 얼굴도 일일이 봐야 하나?”
“댁은 없을지 모르겠지만, 난 있는데?”
“그게 뭐야?”
“비상이 날선 목소리로(저런 말에 일일이 대답하기 싫었으므로) 묻자, 진혁은 아주 짜증나는 자세로 어꺠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비상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댁이 재수없어서 언젠가 한 번 끝장내주겠단 거 말이지. 기억 안 나?”
“대체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는 거야?”
“니가 재수없으니까. 됐냐?”
그 말과 함께, 진혁은 코웃음을 쳤다. 그 별 것 아닌 움직임조차도, 비상을 열받게 하는 데엔 충분했다.
“그런 모습일 때 도망이나 잘 다니지 그래. 댁같은 놈 무너뜨리는 건 어렵지도 않으니까.”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댁이나 걱정하지 그래. 나 참.”
그 말과 함께, 비상은 다시 현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야말로 여길 나서기 위해서였다. 뒤에선 아직도 진혁이 버티고 있는 게 느껴졌지만, 비상은 모두 무시하기로 했다.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나 그래?”
그 목소리를 끝으로, 진혁의 기척은 어느 정도 사라졌다. 비상은 요즘 젊은 놈들(비상보다 어리다는 뜻)이 다 저 모양인가란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그 말이 그냥 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데 묘한 느낌을 받았다. 저 놈이라면 어쩐지 정말 저지를 것 같았던 것이다. 물론 자기 생각이 지나친 건지도 모르지만.
“어유, 고생했네 그래.”
아무튼 그렇게 겨우겨우 건물 밖으로 나오자, 거기엔 생각 밖의 인물이 있었다. 이번엔 자기한테 불만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전에도 만난 금빛 밤 연장자였다. 패널티를 받고 있어서인지, 셋 모두 나란히 있으면 마치 동갑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주위에서 보면 그저 고등학생 세 명으로 비칠 터였다.
“그래, 걔랑은 한바탕했냐?”
금빛 밤 연장자는 킬킬대며 비상 일행한테 다시 그렇게 물어왔다. 아직도 그 때 그 느낌이 남아있어서, 비상은 반쯤 지친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자기 멋대로 할 말만 하고 사라지던데요.”
“그 놈, 니가 보통 싫은 게 아닌가 보다. 각오 한 번 단단히 해라. 자기 밤 연장자도 막 대하는 버릇없는 놈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금빛 밤 연장자는 저 멀리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비상 역시 다시 한 번 마음먹는 수밖에 없었다. 저 연소자는 정말로 비상한테 한 방 먹이고 싶어서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우습게 대했다간 큰코다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현의 집으로 돌아가는 게 더 중요했다.
비상은 지금, 그다지 여기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왜 이렇게 땀범벅이야?!”
그렇게 둘이 현의 집으로 되돌아오자, 갑자기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전에도 만난 현의 친구가 서있었다. 이름을 잊어버리긴 했지만.
“좀 뛰어와서.”
“요즘 만날 이상한 일만…저번에 걔 아냐?”
그 말과 함께, 현의 친구는 손가락으로 비상을 가리켰다. 현은 고개를 끄덕인 뒤, 이런 말과 함께 비상의 손을 잡아끌었다.
“응. 근데 내일 얘기할게.”
“자, 잠깐만! 요즘 진짜 만날 그런 식으로…”
그렇게 말하는 현의 친구 목소리도 점점 멀어져갔다. 드디어 비상과 현은 안전한 곳에 다다른 것이다.
그 뒤, 둘은 펼쳐진 이불 위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오늘은 아무 일도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결국 일이 터졌단 걸 생각하면 비상은 머리가 지끈댔다. 그런 까닭으로 머리를 짚고있던 비상한테, 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근데 궁금한 게 있어.”
“뭔데?”
“아까 그 사람 있잖아.”
“누구?”
“그, 비상이가 잘났다고 하던 그 사람. 우리 밤 사람이던데.”
거기까지 듣고서야, 비상은 현이 말하는 ‘그 사람’이 세림이란 걸 알아챘다. 이 사람도 다른 밤 연소자 못지않게 골치가 아픈 존재였지만, 그런 걸 현한테 들키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왜?”
“싫으면 그냥 안 보면 될 텐데, 굳이 따지고드는 게 신기해서.”
그 말을 듣고, 비상은 현이 무얼 궁금해하는지 깨달았다. 사실 현 입장이라면 궁금해할 만도 한 이야기였다.
“현이 넌 누구한테 할 말이 있으면 가서 안 말하니?”
“나는 그냥 넘기는데. 내 친구들 중에선 직접 안 말하고 아는 친구들끼리 얘기할 때도 있어.”
“나도 그런 말은 들었지만, 남자들 사이에선 그럴 땐 직접 당사자한테 말할 때가 많아. 오히려 뒤에서 뭐라고 말하면 뺀다고 생각할 걸. 그냥 그런 거야.”
“흐음.”
현은 비상의 말을 신기하단 듯 듣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 듣는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이렇게 보면, 비상은 여전히 서로에 관해선 모르는 게 많다는 걸 다시 꺠달았다. 자기가 당연하다 생각하는 것이라 한들, 상대방이 그걸 당연하다 여긴다 장담할 순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세상엔 아직 내가 모르는 게 많구나.”
그 말과 함께, 현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지금이야말로 잠들 생각인 듯했다.
“그런데, 비상이는 무서워?”
“왜 그런 생각을 했어?”
갑작스런 질문에, 비상은 그렇게 되물었다. 현은 그 말을 듣고, 천천히 입을 뗐다.
“자기가 지금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거니까 무서울 거 같아서. 나도 그렇고. 그럼 잘 자.”
비상이 멈칫하던 동안, 현은 정말로 이불 속에서 깊은 잠에 들고 말았다. 너무나 빨리 잠에 든 탓에, 비상은 뭐라 말할 틈새도 없었다.
이러한 두려움과는 어떻게 맞서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비상 역시 잠에 빠졌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