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밤 언리미티드 35. 어리석은 권능감

다음 날 비상이 눈을 뜨자, 하늘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단 듯 맑게 개어있었다. 이걸 보면, 오늘은 ‘놀이’가 이뤄질 게 뻔하다고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나다를까, 비상의 핸드폰엔 ‘오늘 경기 있음’이란 말이 보란 듯이 띄워져있었다.
어쩐지 무척 오랜만인 거 같은데.
며칠 지난 것도 아닌데, 비상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에 ‘그런 일’도 있어서일까, 항상 가던 곳에 발걸음을 옮기는 게 묘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놀이를 하는 사람 입장에서 안 간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이 끝난 뒤 저녁에 항상 가던 그 옥상에 다다르자.
“…”
비상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드물게도 먼저 온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였다. 물론 자기가 평소보다 좀 더 일찍 온 탓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정말 ‘한 명도’ 없으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쩐지 오랜만이란 생각에 너무 사로잡혔나.
그런 생각을 하며, 비상은 주위를 둘러봤다. 시간은 저녁 일곱 시 반. 높은 건물 옥상이라서 주위가 탁 트인 덕분에 도시의 어둠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이런 데서 자기가 사는 곳을 둘러보는 건 비상도 드문 일이었기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 멀리 보이는 온갖 불빛들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눈에 익은 곳도 새롭게 보이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비상은 한동안 그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이런 젠장…”
등 뒤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리자, 비상은 그게 누구인지 금방 알아챘다.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이런 젠장’이란 말부터 먼저 꺼내며 이리로 올라올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요즘 초딩들은 글러먹었어. 무슨 라디오 광고를 따라하고 있냐. 앞뒤가 똑같은 어쩌구…”
아니나다를까, 그 사람, 강산은 옥상으로 들어오자마자 이렇게 투덜대기 시작했다. 저 형이 저러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비상은 그저 어이없어하며 이렇게 반박했다.
“그럼 형은 초등학생 때 그런 거 안 했어? 초등학교 때 자기한테 사과나 해.”
“야, 이….”
“이 말을 이런 데서 들을 줄이야. 비상이 너도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뒤따라온 별밤이 그런 말과 함께 킬킬대자, 강산은 마치 죽일 기세로 자기 등뒤를 노려봤다. 사실 별밤은 강산이 당한다면 뭐든 좋아할 사람이었다. 둘 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으니까.
“신발, 어제도 그렇고 운이 하나도 없어. 무슨 카드게임 이름이 바둑이냐?!”
그게 그렇게 분했는지, 강산은 이미 지나간 어제 일을 갑자기 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열받아서 못 견디겠단 모습이었다.
“젠장. 아무튼 도박하는 놈들은 다…”
“강산이 넌 넌 친척집에서 화투 한 번 안 쳐봤냐?”
“뭐라고?!”
별밤이 그렇게 놀려대자, 강산은 또 울컥하는 모습을 보였다. 별밤은 그러거나 말거나, 아까 하던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우리도 놀이에 돈이나 걸어볼까? 물론 적당히…”
“야, 자기도 참가자면서 뭘 해? 불법도박하냐, 이 자식아?!”
말하다 말고 강산한테 멱살이 잡히자, 별밤은 ‘당연히 농담이지. 강산아’라며 열심히 변명하고 있었다. 오늘도 참 그대로구나. 이걸 보면, 오늘 ‘놀이’가 있단 걸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지면서, 슬슬 다른 붉은 밤 팀원들도 옥상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잎새는 나타나자마자 웬 꾸러미를 풀어놓더니, 거기에 있던 컵라면 하나를 꺼냈다. 그러더니 어떻게든 뜨거운 물을 가지고와서 끓인 뒤, 남이 보든가 말든가 자기 맘껏 먹기 시작했다. 이 갑작스런 모습에, 다른 연장자들은 물론 비상조차 할 말을 잃었다. 갓 끓인 라면 냄새가 이미 온갖 곳에 다 퍼져서,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걸 그냥 볼 수 없었던지, 강산이 잎새 쪽을 보면서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야, 배잎새. 대체 여기서 라면은 왜 먹는 거야?!”
“이런 밤중에 이렇게 좋은 걸 보면서 라면먹는 게 쉬운 줄 아냐?”
“뭐?”
그 말에, 강산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단 모습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있던 강산은, 이윽고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러고 보니 그렇긴 하다. 야.”
“그지?”
강산의 말에, 잎새는 어깨을 으쓱했다. 사실 이젠 익숙해져서 눈에 안 띌 뻔했지만, 이 주위 야경은 탁 트여서 경치가 아주 좋았던 것이다. 비상도 그건 맞는 말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과 컵라면이 꼭 이어져야만 하는지에 관해선 잘 모르겠다 여기고 있었지만.
“이거 아주 사치라니까. 자자, 거기 가는 양반 한 명. 이거 어떠슈?”
“나도 하나만 끓여줘라. 갑자기 배고파졌는데.”
결국 냄새에 이기지 못한 별밤이 이런 말을 하자, 잎새는 곧바로 컵라면 하나를 내밀었다. 이렇게 해서 옥상엔 뜬금없이 컵라면 냄새가 점점 더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조차 컵라면을 찾게 만들 만한 짙은 냄새였다.
“이런 데서 라면먹고 있으면 무지 특별한 느낌 안 드냐?”
이제 난간에서 컵라면을 먹는 사람이 손가락으로 꼽기 힘들 만큼 늘어나자, 가장 먼저 이런 짓을 한 잎새가 그런 말을 했다. 아까보다 더 신난 말투였다.
“무슨 느낌인데?”
뒤에서 그걸 어이없단 눈빛으로 바라보던 비상은, 바로 자기 앞에서 라면을 먹는 잎새한테 그렇게 물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자기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이 형의 머릿속이.
“우리가 좀 특별한 존재가 된 듯한 느낌 말이지. 여기서 사람들을 죽 내려다보고 있으면 뭔가 딱 오는 게 있지 않냐?”
“신발. 여기서 사람이 보이긴 보이냐?”
“저 개미만큼 보이는 것도 다 사람 아니냐, 강산아.”
“이 개새끼가. 사람을 개미로 봐?!”
그 말을 듣자, 강산은 있는 힘껏 잎새의 멱살을 잡으며 이렇게 소리쳤다. 이젠 하도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당사자인 잎새를 뺀 어느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심지어 바로 옆에서 컵라면을 먹던 도진조차도.
“야, 먼지라고 안 말하는 게 어디야…컥…”
“지금 뭐하는 거야?”
잎새가 켁켁대는 사이, 이제야 나타난 붉은 밤 주장 의영이 이 희한한 모습을 보며 이렇게 물어왔다. 별밤은 당연하단 듯이, 의영 쪽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항상 그렇잖아요. 이상한 짓하는 거죠…으아악!”
“왜 우린 저런 걸 보고 배우질 못하냐. 대체.”
“사람이 다 그렇지 뭘.”
입을 잘못 놀린 뒤 강산한테 쫓기는 별밤을 보며, 잎새와 비상은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이렇게 웃기는 짓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경기 채비는 차근차근 이뤄지고 있었다.
“근데 아까 그건 무슨 말이에요?”
아무튼 상황이 좀 진정되자, 연장자들 속에 섞여 컵라면을 먹던 도진이 그런 말을 꺼냈다. 아마 아까 잎새가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싶은 듯했다.
그 말을 듣자, 잎새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이런 말을 퍼붓기 시작했다.
“야, 너도 지금 고딩 아니냐. 이러고 있음 자기가 특별해진 거 같은 느낌 안 드냐, 응?”
“엄청 유치한 생각 같은데요.”
잠시 생각하던 도진이 이런 말을 꺼내자, 잎새는 마치 어이없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팔짝 뛰었다. 그러더니 도진의 어깨를 양손으로 쥐곤, 이렇게 말하며 마구 흔들어댔다.
“이 개자식이 낭만을 모른다니까! 니 나이때가 제일 좋을 때야! 책임 안 져도 되지. 떠맡겨도 되지. 여기에 특별한 힘까지 있음 금상첨화 아니냐? 그리고 내가 슬슬 말 까라고 그랬지?!”
“혀, 형. 저 죽어요. 진짜…저 이런 거 때문에 죽으면 쪽팔려서…”
“아무튼 잎새가 하는 말은 잘 모르겠지만, 오늘 일정을 말하자면…”
그런 말과 함께, 의영은 오늘 자기들이 금빛 밤과 붙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이 말을 듣자, 도진의 어깨를 흔들던 잎새는 갑자기 그걸 멈추더니(물론 도진은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이렇게 물어왔다.
“또 걔네예요?”
“앞으로도 한참 남았는데 뭘 그래.”
“이번에도 또 무슨 일 있으면…”
강산이 그렇게 투덜대는 와중에도, 여전히 채비는 천천히 이뤄지고 있었다. 그걸 보던 비상은, 문득 저 너머 금빛 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가까이에서 보고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쩐지 오늘 금빛 밤 쪽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물론 비상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경기가 시작될 즈음, 붉은 밤 팀원들도 차례차례 난간 쪽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물론 컵라면은 치워진 뒤였다. 여전히 냄새가 남아있는 탓에 몇몇 연소자 및 연장자들이 ‘이거 어떻게 안 돼요?’라 불만을 늘어놓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일단 그게 아니었다.
오늘 금빛 밤과 맞붙는 건 사실이었지만, 붉은 밤이 먼저 경기에 나가는 건 아니었다. 일단 오늘은 파란 밤이 금빛 밤과 먼저 맞붙은 뒤, 그 다음 붉은 밤의 경기가 있는 듯했다. 따라서 붉은 밤 입장에선 구경 빼고 할 게 없었다. 이젠 경기를 보는 것도 눈에 익어서인지, 여기저기서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러던 와중, 비상 옆에서 그걸 구경하던 잎새가 이런 말을 꺼냈다.
“어쩐지 파란 밤이 불쌍해보이지 않냐?”
“왜?”
“저 망할 놈들을 먼저 다뤄야 되잖아. 골치아프게시리.”
사실 잎새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지금껏 금빛 밤이 만들어놓은 온갖 소동을 생각하면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물론, 오늘도 그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시작!”
아무튼 파란 밤 및 금빛 밤의 채비가 모두 끝나자, 이런 말과 함께 경기가 막을 올렸다. 오늘도 별 거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저 쪽을 가만히 바라봤다.
처음엔 아무 일도 없이 경기가 흘러갔다. 정말 비상이 생각하던 그대로였다. 잎새는 맥이 빠졌는지, 그걸 죽 보다가 ‘뭐야, 이번엔 좀 얌전한데? 그래도 배운 게 있나?’라 혼자 중얼대고 있었다.
일이 터진 건 그 때였다.
“그만!”
이미 승패는 금빛 밤 쪽으로 넘어가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말도 나왔다. 하지만 문제는 그 뒤부터였다. 이걸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가 뭐라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하는 모습이었다.
금빛 밤 연소자가, 자기가 이겼는데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다들 어이가 없었는지, 한동안 그걸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저 연소자는 마치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것처럼, 자기 무기를 있는 힘껏 사방에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파란 밤 연소자한테 맞추려고 한다기보단, 말 그대로 아무데나 날린다는 느낌이 강했다. 자기 팀인 금빛 밤 쪽으로도 빛이 날아가고 있었으니까.
“그만이란 말 못 들었나?”
어이가 없어하던 의영이 이렇게 외치자, 이제야 다들 정신이 좀 든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금빛 밤 연소자는 이 말에도 아무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자기 무기를 휘두르는 데에만 넋이 팔린 모습이었다.
참고로 금빛 밤 연소자가 쓰는 무기는 대걸레였는데, 강화가 되어 있어서 ‘쏠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즉, 이 대걸레에서 뭘 발사하는 식으로 공격하는 것인데, 저 연소자의 무기는 추가강화도 되어있는 듯했다. 대걸레가 아니라, 대걸레 ‘자루’ 쪽에서 빛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저런 게 재밌어서 혼자 조사한 별밤 말에 따르면, 원래는 모두 짐작했던 대로 걸레가 발사되는 무기라고 했다. 하긴 걸레보다 빛이 더 낫겠다 생각하는 비상이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저 연소자의 무기가 아니었다. 저 연소자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이 훨씬 더 중요했다.
금빛 밤 연소자는 이어지는 열대야에 맛이라도 간 건지, 아직까지도 자기 무기를 멋대로 휘두르고 있었다. 빛이 얼마나 사방팔방으로 날아가던지, 다들 몸을 숙일 수밖에 없었을 정도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경기가 끝났는데도 무기를 이런 식으로 쓰는 건반칙이었다. 아무리 상대방한테 ‘공격’하는 게 아니라 한들, 저렇게 무기를 써도 된다고 천사가 말한 적은 없었다. 물론 ‘놀이 참가자’들도 저런 짓을 반칙이라 말하진 않았지만, 그건 누구나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라서였다. 이게 연습이라면 모를까, 저런 짓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애초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저 연소자를 빼고.
“그만 안 해?!”
결국 이런 말과 함께 해원이 끼어들었지만, 금빛 밤 연소자는 무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에 더 작정한 듯, 자기 무기를 있는 힘껏 휘두르고 있었다. 게다가 이젠 사람들 쪽을 돌아보며 이런 소리까지 내질러댔다.
“이 놈들이 어디서 잘난 소리야?”
“뭐?!”
다들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렸지만, 연소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놀이 참가자들을 돌아보며, 아주 의기양양하게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이 위선자 자식들. 지들만 점잖은 척하냐? 니들도 이러고 싶었을 거 아냐. 이런 거 할 수 있게 되면 한 번 저질러보고 싶었던 거 아닌가?”
이젠 붉은 밤은 물론, 다른 밤, 물론 금빛 밤에서조차 기가 막히단 표정으로 그 연소자를 보고 있었다. 개중에선 조금 생각에 잠긴 모습도 있었지만, 대개 저 연소자의 말이 어이없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연소자의 외침은 아직도 멈추지 않았다.
“자기가 모처럼 특별한 힘을 갖게 됐는데, 그걸 겨우 이럴 때만 쓰고 만다고? 장난하냐?! 어차피 다 끝나면 다시 못 쓸 거 아냐. 이렇게 좋은 데서 써야지, 그럼 또 어디다 써?”
이쯤되자, 금빛 밤에서도 머리를 부여잡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비상과 인연이 많은 모 연소자는, 그 쪽을 보면서 ‘미친 놈’이라 중얼대고 있었다. 사실, 비상의 눈에도 지금 이 상황은 그렇게 보였다. 저 친구가 저럴 정도라면 자기 생각보다 더 심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때, 저 연소자가 난리를 친 것보다 더 놀랄 일이 일어났다.
“이 개자식아. 신기한 힘 좀 쓴다고 니가 이제 뭐라도 된 줄 아냐?!”
그런 말과 함께, 다른 사람도 아닌 잎새가 난간을 뛰어넘어 연소자 쪽으로 다가갔다. 이건 붉은 밤 팀원들은 물론, 비상도 깜짝 놀랄 일이었다. 이렇게 말릴 틈새도 없이 재빠르게 앞으로 나가다니, 어지간히 작정하지 않았다면 저렇게 할 리가 없었다.
물론, 그 연소자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제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데까지 다다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 뭐라도 됐지, 이게 보통이냐?”
“지랄을 한다. 이 멍청한 놈아. 그딴 거 하나 가졌다고 니가 뭔가 된 거 같애? 넌 그냥 지나가는 젊은놈 1이야. 알았냐?”
잎새는 눈까지 부라려가며, 연소자보다 더 큰 목소리로 이렇게 외쳐댔다. 너같은 놈한텐 절대 안 질 거란 말투였다. 사실, 비상도 잎새가 이렇게 화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방금 전까지 여기서 라면을 먹으며 하던 얘기를 생각하면 더더욱 믿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다들 슬슬 ‘말려야 하는 거 아니냐’는 눈길을 서로한테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다들 일이 커질까봐 쉽게 끼어들진 못하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연소자의 말은 그칠 줄 몰랐다.
“너도 자긴 아닌 척하냐? 맨 처음에 이런 얘기 듣고 강화한 무기 썼을 때 너도 솔직히 짜릿했을 거 아냐. 자기만 그런 걸 쓸 수 있단 게 안 기쁘고 배기겠어? 모처럼 자기가 보통사람하고 다른 힘을 가지게 됐는데, 그거 갖다가 기쁘다 여긴 적 없냐고!”
그 멀리까지 울려퍼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잎새는 어이없단 표정으로 연소자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리곤 조무래기라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러니까, 너 이 개놈자식은, 아무튼 현실에선 내세울 게 하나 없으니까 이런 힘이라도 가져서 신이라도 된 거 같다 그 소리냐?”
“누가 신이 됐대? 다른 사람하고 다른 걸 할 수 있게 됐잖아. 좀 기뻐하면 안 되냐?”
“그딴 걸로 기뻐할 만큼 쪼잔한 삶이었나 보지?”
“신발, 너는 이 세상에서 좀 특별한 존재가 되어보는 걸 꿈꾼 적도 없냐?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엉?!”
이 말에, 잎새를 비롯한 모든 밤의 연장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물론 연소자들도 말 한마디 꺼내지 않았다. 너무나 자기 생각을 넘어서는 상황에 사고가 막히기라도 한 걸까. 사실, 비상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물론 다들 저 말에 동의해서 말문이 막힌 건 아닐 터였다. 아무도 저런 식으로 나올 줄 몰랐기에 말문이 막혔다 하는 게 더 맞았다. 잠시동안 뭐라 말할 수 없는 침묵이 넓은 옥상들을 스쳐갔다. 잎새는 또 가만히 있다가, 이제야 뭔가 할 말이 떠올랐단 듯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떼어놓았다.
“…그러니까, 그게 하고싶은 말이었냐?”
“그럼 어쩔 건데?”
그 말을 듣자, 잎새는 한숨을 크게 푹 쉬었다. 그리고는 반쯤 질린 듯, 이런 말을 꺼내놓았다.
“너도 참 징하다, 야.”
그 뒤, 잠시동안 둘 중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다. 마치 전쟁 직전이라도 보는 듯한 느낌이 옥상을 감싸돌았다. 이런 걸로 전쟁 운운하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지만, 이상하리만치 지금만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잎새가 다시 입을 뗐다. 이젠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겠단 표정이었다.
“그거야 니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세상에 특별해지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어딨겠냐. 자기가 특별해질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은 또 어딨겠어. 그 말은 맞다고 치자. 그치만 말이야.”
잎새가 여기서 말을 끊은 뒤, 다시 침묵이 이 하늘을 감돌았다.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앞으로 어떻게 될까, 란 생각을 누구나 하고 있었을 때쯤.
“그렇게 특별해지고 싶으면 나부터 꺾고 말해. 이 규칙도 모르는 개자식아!!”
그 말 뒤로, 세상에서 가장 변변찮은 전쟁이 시작되었다. 물론 참가자는 잎새와 저 연소자 둘뿐이었다. 이젠 다들 비현실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저 너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아수라장 속에서 제정신을 차릴 수 있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될까. 아무리 놀이에 익숙해졌다 한들, 이런 상황에선 무리였다.
“암튼 둘 다 그만 좀 해라, 진짜!”
이젠 자기가 끼어들어야겠다 여겼는지, 가만히 있던 의영이 저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걸 가만히 보던 해원도, 이윽고 ‘제가 할게요, 제가!!’란 말과 함께 싸움장으로 뛰어들었다. 게다가 이걸 보던 다른 밤 연장자들도 너나할 것 없이 뛰어든 탓에, 저 너머는 이제 난장판으로 바뀌어있었다.
이 어이없는 상황에서 자기답지 않게 반쯤 넋이 빠져있을 때, 비상은 갑자기 강한 압박감이 들었다. 대체 뭐지, 란 생각에 빠질 틈새도 없이, 이제는 자기 몸이 공중에 붕 떴다. 그리고는 어디서 많이 본 누군가의 등에 내려앉아, 아니 업혀있는 게 느껴졌다.
그러더니, 앞에서 그렇게 만든 주인공이 중얼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데는 빨리 나가는 게 낫겠다. 그지?”
현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비상은 자기가 놓인 상황을 어느 정도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기에 관해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일단, 이 옥상을 벗어나는 게 먼저였다. 그게 가장 나을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끼어들지 않고 멀찍이서 저걸 보고 있던 사람 중, 별밤이 옆에 있던 도진한테 고개를 돌렸다. 뭔가 물어볼 거라도 있는 듯했다.
“아까 잎새가 한 말, 지금 보니까 무슨 생각 드냐?”
“저럴 거면 그냥 저답게 지낼래요, 형.”
드물게도 도진이 그렇게 딱 잘라말하는 걸, 비상은 바로 옆에서 들었다. 현이 옥상 밖으로 나가려고 그 쪽을 지나쳐서였다. 여전히 정신이 없어서, 비상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단 걸 느꼈다. 사실 그건 여기에 있는 사람 모두가 그럴 터였다. 어쩌면 비상을 업고있는 현조차도.
그런 상태로 비상은, 현한테 업힌 채 그 아수라장을 가까스로 벗어나게 되었다. 여전히 지금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지금은 저기서 나왔단 게 더 중요했다.
오랜만에 탁 트인 곳(아까만 해도 옥상이 그랬지만, 물론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에 나와서일까, 비상은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지금 자기가 현한테 업혀있다는 걸 생각하면, 잠드는 것도 미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현의 몸이 덜컹댈 때마다, 비상은 자기 눈꺼풀도 같이 내려가고 있단 걸 깨달았다.
오늘 내가 그렇게 피곤했나.
현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을 속으로 하면서도, 비상의 눈꺼풀은 자꾸만 감기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비상의 의식은 천천히 끊겼다. 여전히 상황은 파악하지 못한 채였다.

그렇게 비상이 눈을 뜨자, 거긴 전혀 낯설지 않은 곳이었다.
대충 여기가 어딘지 짐작할 수도 있었기에, 비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핸드폰을 보니 벌써 한 시 반. 아까보다 한두시간쯤 더 지난 것 같았다.
불을 켜지 않아서인지, 현의 방은 주위가 잘 안 보일 만큼 어둑했다. 아직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았단 걸 감으로 깨달은 뒤, 비상은 자리에서 아주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이 방에 자기 혼자만 있단 걸 깨달은 뒤, 현이 어디에 있는지 신경쓰이기 시작해서였다.
그 떄, 갑자기 문 너머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
가만히 들어보니, 그건 화장실 쪽에서 나는 소리인 듯했다. 비상이 조심스레 그 쪽으로 다가가자, 거기엔 대충 씻은 뒤인지 문 밖으로 목만 살짝 내민 현이 있었다. 아마 아까부터 죽 혼자 씻고 있었던 듯했다.
“써도 돼.”
“그럼 좀 빌릴게. 지금 써도 되니?”
현은 고개를 끄덕인 뒤, 아래를 수건으로 동여맨 채 밖으로 나왔다. 비상은 현이 나온 뒤, 방금 썼다는 게 눈에 빤히 보이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참 별의별 일이 다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비상은 일단 옷을 정리한 뒤 샤워기 쪽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때, 비상조차 짐작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바닥이 미끄럽게 느껴진 것이다.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괜찮아?”
아까 지른 소리 때문인지, 갑자기 현이 화장실 문을 벌컥 열고는 비상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지. 비상도 뭔가 말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정말 뭐라고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우와.”
“자, 잠깐만…”
비상은 지금,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현은 자기를 걱정해서인지 근처에 앉으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발이 미끄러져, 어쩌다 보니 비상의 곁에 앉는 게 아니라 위를 덮은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게다가 이번엔 손까지 미끄러졌는지, 허공을 가르던 손이 비상의 가슴팍에 닿아있었다. 덕택에 더 미끄러지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었지만, 지금 상황은 방금 전보다 훨씬 더 뭐라 말하기 어려웠다.
비상은 잠시, 어떻게든 생각을 하려 애썼다. 그러니까 자기는 지금 옷을 다 벗은 상태이며, 현도 여전히 아래에 수건을 걸친 걸 빼곤 아무 것도 입지 않았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서로가 그다지 의식하지 않던 대목, 즉 ‘이성’을 똑똑히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비상 입장에선 가슴팍(이라 할 수 있는 곳)이 잡힌 채.
현 역시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여전히 비상의 가슴팍(이었던 곳)을 짚은 채 자길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실을 다시금 깨닫자, 비상은 온몸이 민망함으로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물론, 현이든 비상이든 서로의 알몸을 보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을 터였다. 어차피 입장이 바뀌었을 뿐이니까. 적어도 비상은 그렇게 여기고 있었으며, 현도 아마 그러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둘의 거리가, 지금까지와는 댈 수도 없을 만큼 ‘가깝게’ 느껴졌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에 미치지 못한 걸까, 현은 여전히 비상한테서 눈을 떼어놓지 않고 있었다. 즉,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였다. 물론 손도 가슴팍에 그대로 얹어져있었다.
비상은 이제야, 다른 사람, 특히 자기보다 더 몸집이 큰 이와 ‘이런 상태’로 마주보면 무서울 수 있단 걸 똑똑히 깨달았다. 물론 저 너머에 있는 사람이 현이란 건 비상도 잘 알지만, 그래도 이 압박감만은 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 자기가(아무리 실수라고 해도) 잡혀있는 데를 생각하면,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도 이젠 한계였다. 하지만 지금 비상이 현의 몸을 박차고 일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그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지금 상황이 안 좋단 걸 뻔히 알면서도, 비상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서로 입장이 바뀐 상황이라 한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비상은 더 민망해짐을 느꼈다. 일단 아무렇지 않은 척은 하고 있지만, 비상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동요하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 비상은 살면서 가장 동요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마 현은 거기까지 의식하고 있지 않을 테지만.
현은 아직도 비상을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잠시 현의 손바닥이 비상의 가슴팍을 또 눌러왔지만, 여전히 현은 돌이라도 된 것처럼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러다 이윽고, 현의 눈에 빛이 다시 돌아왔다. 마치 이제야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깨달은 듯한 모습이었다.
“아, 맞다. 일어나야지. 미안.”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뒤, 현은 화장실 문을 가만히 닫았다. 드디어 혼자 남게 된 비상은, 잠시동안 남의 화장실에 주저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물론 여전히 상황이 이해하기 어려워서였기도 했지만, 그 전에, 비상은 자꾸만 궁금한 게 하나 생겨서 선뜻 일어날 수 없었다.
저 하늘이라는 존재가, ‘이런 거’로 자기들한테 전하려는 건 대체 뭘까.
비상은 지금, 그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어떻게든 씻고 돌아오자, 현은 옷을 갖춰입고 자기 방 벽에 몸을 기댄 채 주저앉아있었다. 비상이 들어온 것도 깨닫지 못했는지, 눈길은 창문 바깥에 가 있었다.
뭐라 건드릴 수 없는 그 분위기에, 비상은 한동안 말을 걸지 못했다. 그 진지한 표정으로 볼 때, 아마 아까 옥상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방금 전 ‘그 일’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비상은 현이 이런 일로 동요할 아이는 아니라 생각했지만, 저 진지한 표정을 보면 꼭 그렇다고 잘라말할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까지 하자, 비상은 함부로 현한테 말을 걸지 못했다. 어쩐지 저기서 가만히 앉아있는 현은, 지금껏 비상이 알던 그 아이가 아닌 것 같았다. 딱히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뭔가 생각하고 있는 것뿐인데도 그랬다. 비상이 한동안 가만히 있을 때, 현이 이제야 비상을 알아챈 듯 ‘끝났어?’란 말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언제 말을 걸까 잠시 생각하던 비상은, 갑작스레 고개를 돌린 현한테 깜짝 놀랐다. 물론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 때, 갑자기 현이 입을 떼어놓았다. 이 역시 갑작스런 일이었다.
“다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을 텐데, 왜 그랬던 걸까?”
“글쎄.”
마치 중얼대는 듯한 그 말에, 비상은 그렇게 대답했다. 자기도 알 수 없는 일이라서였다. 현은 여전히 그게 이상한지, 이런 말과 함께 다시 생각에 잠겼다.
“원래부터 그러려던 건 아니었을 텐데…”
비상 역시 현의 마음만은 알 것 같았으므로,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정말 현 말대로, 다들 이 놀이에서 뭘 바랐던 걸까. 무슨 충동이라도 일었던 걸까. 자긍심이라도 채워줬던 걸까. 비상 역시 그런 생각에 깊이 잠기고 말았다. 굳이 말하자면,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감정이 이제야 드러났단 것만 겨우 짐작해볼 수 있었다. 이 역시 짐작일 뿐이지만.
이제는 비상이 깊은 생각에 잠겨있을 때, 갑자기 현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아까 놀랐어?”
“아, 노, 놀랐지만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것도 그렇게 될 줄 몰라서. 미안.”
“괜찮다니까. 아까도 말했잖아.”
사실 비상 입장에서, 그 일은 정말로 괜찮았다. 일단 비상도 20대 중반쯤 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떠올리고 싶은 건 아니었다. 어쩐지, 그런 건 떠올려선 안 된다는 금기가 비상의 머릿속에 있었다.
하지만 현 입장에선 꼭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난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그게 무서웠어? 손은 실수로 그런 건데…”
“그 때는 그랬지. 아마 사람이니까…”
“그냥 모습이 바뀐 거뿐인데 그렇게 다른 느낌이야? 정말? 이렇게 크게?”
“그건 그 때 어쩔 수 없었잖아. 그렇지?”
자꾸만 이야기를 원점으로 가지고 오는 현을 보며, 비상은 다시 한 번 그렇게 대답했다. 몇 번이고 이야기를 돌리려 했지만, 잘 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둘은 아직도, ‘원래 입장’으로는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 뒤, 방엔 다시 침묵이 일었다. 비상도 현도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물론 현의 생각은 비상이 짐작할 따름이지만, 표정을 볼 때 아마 자기와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았다.
아직도 불을 안 켜 어둑한 밤에, 바깥 불빛만이 살며시 스며들고 있었다. 방금 전 있던 일까지 더해져, 비상은 다시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걸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은 서로 넘으면 안 될 선을 넘은 것만 같았다. 금빛 밤 연소자 일이든, 비상과 현의 일이든. 다행히도 후자는 어떻게든 될 것 같았지만.
“이럴 땐 자는 게 낫겠다. 그지?”
그런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현은, 어느샌가 이부자리를 바닥에 펼쳐놓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미 펼쳐진 이부자리 쪽으로 툭툭 치며 비상을 쳐다봤다. 아마 여기서 같이 자자는 말인 듯했다.
이래도 괜찮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도 오늘 하룻동안 정말 몸이 무거워진 걸 느껴서였다. 그게 오늘 있던 일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까닭 때문인지는 자기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묘한 느낌으로 잠이 드는 것도 오랜만인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현이 펼쳐준 이불 속으로 들어가 가만히 누웠다. 몸이 꽤나 피곤했던 건지, 비상은 눈을 감자마자 졸음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 현은 지금 잠이 들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비상한텐 지금 그걸 확인할 여유조차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이불이 있단 건 참 좋은 일인데.
그런 엉뚱한 생각과 함께, 비상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관해선 아무 생각도 않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