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 날.
비상은 눈을 뜨자마자, 자기가 낮선 곳에 있단 걸 깨달았다. 여기가 어디였더라. 거기까지 생각하자, 비상은 갑자기 어제 있었던 일이 머리를 스치는 걸 느꼈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단 생각에, 비상은 얼른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자, 비상의 눈에 생각지도 못한 게 들어왔다. 여기가 어딘지 좀 더 빨리 깨달았으면 피할 수도 있었던 모습이었다.
비상이 고개를 돌린 쪽에서, 혜은이 지금 막 옷을 갈아입고 있었던 것이다.
혜은은 물론 그 주위에 너질러진 옷가지들이 보고 싶지 않아도 눈에 들어오는 탓에, 비상은 대체 어디에 눈을 두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헤은도 옷을 갈아입다 이를 알아챘는지, 마치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은 모습으로 비상을 보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지금와서 눈길을 돌리는 것도 이상하단 생각에, 비상은 한동안 혜은과 눈을 마주보게 되었다.
“계, 계속할까요?”
아직 속옷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로, 혜은은 비상한테 그렇게 물어왔다. 마치 이 순간이 민망해서 견딜 수 없단 말투였다. 비상 역시 마찬가지였으므로, 겨우 고개를 돌린 채(너질러진 속옷은 여전히 눈에 들어왔지만) 이렇게 대답했다.
“다른 데로 가시는 게 어떨까요?”
“그래도 거의 다 입어서…”
혜은의 목소리는 점점 모기만큼이나 줄어들고 있었다. 민망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게 틀림없었다. 사실, 지금 혜은은 아무리 봐도 비상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 비상도 본 것이라곤 혜은의 속옷(그것도 조금)이었기 때문에, 아직 큰 문제가 일어난 건 아니었다. 적어도 혜은이 생각하고 있을 것과 대보자면.
그 때, 혜은이 갑자기 엉뚱한 말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제, 제가 오늘 정신이 없어서요.”
“네?”
“사, 사실, 제, 제가 지금 많이 민감해서…아아악!”
“괘, 괜찮아요?!”
아까부터 죽 힘이 없어보이던 혜은이 갑자기 앞으로 넘어지려 하자,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얼른 달려가 그걸 붙잡고 있었다. 아무리 비상이라 한들, 이런 갑작스런 상황 앞에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자기가 아닌 다른 이한테 닥친 일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런 생각으로 비상이 혜은의 오른팔을 덥석 잡았을 때였다.
“건들지 마세요!”
이 말에,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놓고 말았다. 천만다행히도 혜은은 앞으로 넘어지지 않았지만, 방금 자기가 뭘 했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사실 이건 비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은 다시 한 번 도무지 알 수 없단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죽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비상은 잠시 망설인 뒤 먼저 입을 뗐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아, 아니, 괜찮아요. 제가 지금, 그, 민감해서. 아하하…”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혜은은 민망해서 견딜 수 없단 표정으로 눈길을 돌렸다. 자기가 뭘 했는지 이제야 알아챈 모습이었다. 그 미안해하는 모습에 뭐라 할 말이 없어져, 비상은 다시 혜은이 없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죄송해요. 제가 오늘 생리 체질이라서…”
조금 시간이 지난 뒤, 혜은은 다시 천천히 입을 떼어놓았다. 여전히 미안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단 모습이었다. 고개를 돌리고 있던 비상은, 혜은이 옷을 다 입은 걸 알아채자 다시 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전 괜찮아요.”
“그, 제가 생리 초기엔 사람이 아닌 수준이라서…정말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이젠 옷도 다 입었는데, 혜은은 여전히 비상한테서 눈길을 돌린 채였다. 비상도 뭐라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혜은 탓이 아니란 건 전하고 싶었다.
“아프실 텐데 그럴 수도 있죠. 정말 괜찮아요.”
“호, 혹시 겪으셨나요?!”
“아뇨, 저는…”
이야기가 이상한 데로 흘러갔다는 생각을 하면서,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말꼬리를 흐리고 있었다. 혜은도 이런 걸 묻는 건 민망했는지, 목소리가 아까보다도 더 줄어들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 관한 얘길 들은 적이 거의 없었단 걸 비상은 깨달았지만, 지금은 아무튼 그럴 때가 아니었다.
“죄, 죄송해요!”
혜은도 이런 질문은 심했다 여겼는지, 곧바로 그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이럴 땐 어쩌면 좋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비상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둘은 여전히 묘한 표정으로 혜은의 집을 나섰다. 딱히 아까 일 때문은 아닐 터였지만, 둘 다 한참동안 아무 말도 나누지 못한 상황이었다. 뭐라도 말해야 하는 건가. 자기치곤 드물게, 비상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침인데도 하늘이 아직 깜깜한데.
이런 한여름에 드문 모습을 보던 비상은, 문득 자기 연구소가 오늘은 쉰다는 걸 깨달았다. 그 말을 꺼내자, 잠시 눈만 깜박이던 혜은은 곧바로 정신을 차린 듯 이런 말을 꺼냈다.
“그, 그럼 저 먼저 갈게요. 어, 어젠 정말 고맙…아무튼 실례할게요!”
그런 목소리와 함께 사라져가는 혜은을 보며, 비상은 잠시동안 자기가 뭘 하면 좋을지 고민에 빠졌다. 방금 일도 그렇지만, 쉬는 날이 그다지 없다 보니 얼른 할 일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이럴 땐 어떻게 지내는 거였더라. 여전히 새까만 하늘을 보며, 비상은 혼자 빈 골목에 선 채 가만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 현이 집이 있었던가.
어쩐지 주위가 낯설지 않더란 생각과 함께, 비상은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현의 집에 갈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현의 집이 이 근처라면 놀이터 역시 가까울 터였다. 어차피 지금 딱히 갈 곳이 없다면,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전까지 거기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집에 갈 땐 우산이라도 하나 사야겠는데.
비상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기가 기억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저 까만 하늘을 보고 있으면, 오늘은 폭풍우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갈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눈에 익은 놀이터에 다다르자, 비상은 거기에 누가 먼저 와있었단 걸 깨달았다. 그 뒷모습은 이 놀이터만큼이나 비상의 눈에 익었다. 하지만 자기 생각이 맞다면, 비상은 저 사람이 왜 이런 놀이터에 혼자 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뒷모습이 아무리 봐도 쓸쓸해보여서, 비상은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저 사람도 그걸 바라는지 어떤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그 사람도 비상의 기척을 느꼈는지 어깨를 살짝 움찔했다. 그런데 정말 이 사람이 여긴 어떻게 아는 거지. 점점 더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비상은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나라 씨죠?”
“뭐, 뭐뭐뭐, 뭐예요?!”
자기 이름이 불리자, 그 사람, 나라는 더더욱 몸을 움찔하면서도 뒤를 돌아봤다. 비상의 짐작대로, 놀이터 철창에 괜히 몸을 기대고 있던 사람은 나라가 틀림없었다. 비록 바뀐 모습이긴 했지만, 어쩐지 비상은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비상의 바뀐 모습을 처음 보는 나라는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저기, 누구? 어, 아…”
“아셨으면 된 거 같네요.”
그 말과 함께, 비상은 놀이터 안으로 들어가 다시 나라와 마주보았다. 나라도 비상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지, 있는 힘껏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요?”
“남이 어떻게 오든 무슨 상관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라는 민망한 듯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이런 데서 비상을 만나리라곤 생각도 못했단 모습이었다. 비상 역시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아무튼 기분나빠하는 거같진 않은데. 비상은 일단 이렇게 여기기로 했다. 자기와 갑자기 만난 게 반가운 일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거면 됐다 여겨서였다.
그렇게 해서, 둘은 아무 얘기도 주고받지 않았는데 자연스레 옆에 있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잠시동안, 누가 약속이라도 한 듯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비를 뿌릴 것 같은 거센 바람소리만이 거기에 있을 뿐이었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망설여졌다. 나라의 성격이 날카롭다는 건 비상도 이제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여러 모로 의도치 않게 나라를 화내게 한 바 있었기에, 비상은 이 다루기 힘든 사람한테 뭐라 말을 걸면 좋을까 혼자 생각에 잠겼다.
그런 식으로 약 10분쯤이 지났을 때였다.
“뭐, 뭐라도 말 좀 하죠?”
나라가 드디어 못 견디겠단 듯, 비상을 보며 이렇게 쏘아붙였다. 이 어색한 상황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단 모습이었다. 나라가 먼저 이런 말을 걸어올 줄 몰랐기에, 비상은 조금 신기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앉아있는데 말 한 마디도 없으면 뻘쭘하잖아요. 안 그래요?”
“그럼 뭔가 말해보죠. 말씀대로니까요.”
“그 말투는 또 뭐예요?!”
비상이 한숨을 쉬며 대답하자, 나라는 어이없단 표정으로 비상을 쏘아보았다. 이렇게 저 쪽이 키가 더 큰 상태에서 이런 식으로 나오면 괜히 움칫하게 된다는 걸 느끼면서도, 비상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이렇게 말하든 저렇게 말하든, 나라가 화내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 것만 같아서였다.
“어차피 오늘 비가 온단 말도 있는데 빨리 하죠. 바람도 이만큼 불잖아요.”
“절 대충 보시는 거예요?!”
“비를 맞는 것보단 그게 더 나을 거 같은데요. 보아하니 우산도 없으신 것 같고…”
“그, 그럼 진작 말을 꺼내셨어야…”
이제야 비상의 뜻을 알아챘는지, 나라는 그 말과 함께 눈길을 돌렸다. 나라는 나오기 전에 오늘 날씨도 보지 않은 걸까. 비상은 둘쨰치더라도, 나라가 우산을 갖고있지 않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아무래도 갑자기 만난 분하고 바로 얘기가 나오긴 어렵잖아요.”
“그, 그건 그렇지만…”
비상의 말에, 나라는 이제 말꼬리도 흐리고 있었다. 아마 비상의 말이 맞다고 여긴 듯했다. 이러다가 진짜 비가 와도 큰일이란 생각에, 비상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 힘들어요?”
“그걸 왜 대놓고 말하시는 거예요?!”
비상의 말에 나라는 또 화를 냈다. 비상도 이젠 이런 태도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나라의 태도와 상관없이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을 하셔도 그런 말이 나올 거 같아서요.”
“제 성격이 비뚤어졌단 거예요?”
“비뚤어진 건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제게 나라 씨는 그런 이미지란 거죠.”
“뭐, 그런 말 많이 들어요…”
그 말엔 짚이는 게 있었는지, 나라는 그 말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그런 나라를 보자, 비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틀림없이 이건 어른들이 나누는 이야기일 텐데, 겉모습 탓인지 중고등학생들이 나누는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비상은 다시 입을 뗐다.
“힘들면 힘들다고 솔직히 말하지 그래요.”
“대, 댁은 남의 일이라고…아니구나.”
이제야 비상의 상황도 같이 알아챈 듯, 나라는 다시 눈길을 돌렸다. 아까보다 더 민망한 듯한 모습이었다. 드물게도 얼굴까지 붉히는 나라를 보며, 비상은 대답했다.
“제 일까지 신경써주시다니 참 고맙네요.”
“시, 시끄러워요.”
“이렇게 보면 마음씨도 좋으신 거 같은데요.”
“지, 지금 와서 그런 말해봤자…”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나라는 기분나빠하는 것같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민망한지, 고개를 아예 정반대로 돌리고 있었다. 저러면 목은 안 아플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다시 말을 이으려 했다.
“아무튼 제 생각엔…”
“여기서 뭐 해?”
그 갑작스런 목소리에,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사실 돌아보지 않는다 한들, 비상은 그게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목소리가 원래 모습과 달라졌다 한들, 이 목소리를 비상이 잊을 리 없었다.
그 사람, 현은 아무렇지 않게 뒤에 서선 비상 일행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철창 밖에 있기 때문인지, 비상은 현한테서 어쩐지 묘한 위압감이 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현 입장에선 그냥 자기 집 근처를 돌다가, 놀이터에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 있어서 말을 걸러 온 것뿐이겠지만.
하지만 이런 일이 처음인 나라한테는 비상처럼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뭐, 뭐예요?!”
“우리랑 같은 처지니까 너무 그러지 마요. 괜히 현이가 놀라니까.”
“아, 그런 얘길 하고 있었어?”
이제야 상황을 알았는지, 현이 낮은 목소리로 신기하단 듯 그렇게 물어왔다. 나라도 이제야 상황을 알았는지, ‘깜짝이야…’라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무서운 거 약해요?”
“무, 무서운 게 왜 무서워요?!”
자기도 모르게 비상이 그렇게 묻자, 마치 진심이라도 들킨 듯 나라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이 사람도 보기보다 무서움을 잘 타는구나.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지만 방금…”
“아, 안 그렇다 말했잖아요. 나 참.”
“그럼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죄송합니다.”
“벼, 병주고 약주는 것도 아니고…”
“그런 얘기하고 있던 거야?”
나라가 다시 말꼬리를 흐리자, 현이 둘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비상은 아까도 현한테 제대로 답을 해주지 못했다.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건 나라가 아니라 현이었던 것이다.
“그, 근데, 이 사람…아니 얜 또 뭐죠?”
나라도 이제야 그걸 깨달았는지, 현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비상은 현과 잠시 눈을 마주친 뒤, 짧게 현을 소개했다.
“이번에 처음 볼 텐데 소개도 먼저 안 드렸네요. 이 친구는 같은 밤에 있는 현이라 하는데요.”
“응.”
“그, 그 모자는 만날 쓰고 다니는 건가요?”
“쓰고다닐 게 없어서.”
여전히 나라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지만, 현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 있었다. 그 아무렇지 않은 대답에 나라가 벙쪄있을 때쯤, 현이 세 번째로 아까 그 질문을 되풀이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했어?”
“아, 그게…”
그 말에 대답하려 고개를 들다가, 비상은 아까보다 하늘이 더 어둑하단 걸 깨달았다. 지금은 틀림없이 아침이지만, 일기예보라도 보지 않는 이상 그걸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만 같은 날씨였다.
“사실은 이 분이 솔직하지 못해서…저, 왜 남의 어깨를 흔드시는 거죠?”
어쨌든 대답하다 말고, 비상은 자기 몸이 앞뒤로 흔들대는 걸 느꼈다. 물론 그게 누구인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자기 어깨를 꽉 붙들고있는 누군가의 손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 그럼 제가 나쁜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럼, 사실은 내가 못나서…”
“‘아무튼 힘든 게 있어서 얘기하던 거지?”
“그래.”
비상이 말하는 방법을 좀 바꿨다 한들, 현은 무슨 말이 하고 싶었는지 알아채준 듯했다. 나라는 이제 자기 편이 어디에도 없다 여긴 것인지, 현이 벤치 쪽으로 다가오자 바로 고개를 숙여버렸다. 나라의 오른쪽엔 이미 비상이 있었을뿐더러, 현도 남은 자리가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왼쪽에 자리잡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런 모습이 된 뒤 좋은 게 하나도 없어요.”
“너무 그런 생각만 하면 더 힘들 텐데요.”
“대, 댁은 좋겠죠!!”
나라의 불만에 비상이 그렇게 대답하자, 갑자기 더 큰 목소리가 돌아왔다. 비상이 그 쪽을 돌아보니, 나라가 무척 화난 표정으로 자길 보고 있었다. 비상도 반쯤 어이가 없어져서 나라를 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나요?”
나라는 그제야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듯,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아까 혜은만큼이나 모기만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꺼냈다.
“이, 잊어버리세요. 아까 한 말은요.”
“아뇨.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비상이 나라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현은 신기하단 듯 쳐다보고 있었다. 현은 방금 그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알까. 고등학생쯤 되는 나이이니 모를 리가 없었지만, 비상은 묘하게 그게 신경쓰였다.
그 때, 현이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아무튼 모습 때문에 그래?”
“응?”
비상은 잠시 뒤에야, 현이 말한 게 방금 그 이야기라는 걸 알아챘다. 뭐라 대답하면 좋을까. 잠시 생각하다, 비상은 입을 뗐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 게 그렇게 큰 문제야?”
“뭐, 넌 모르겠지만…”
현의 말에, 이번엔 나라가 그렇게 대답하며 눈길을 돌렸다. 현은 그게 의아했는지, 나라 쪽을 보면서 다시 물어왔다.
“왜?”
“지금 넌 모르겠지만, 아무도 날 진지하게 안 대해준단 말이야.”
“똑같이 하는데 다른 사람들 눈엔 다르게 보인단 말이야?”
나라의 말에, 현은 점점 더 의아하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자기가 직접 해보지 않고선 믿기 어렵단 모습이었다. 아마 현은, 지금껏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은 듯했다.
그렇게 가만히 있던 현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철창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철창에 등을 대고는,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뭔가 진지하게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현의 모습에, 나라는 물론 비상조차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현은 아무렇지 않게, 바로 이런 걸 물어왔다.
“이러면 달라보여?”
“어?”
전혀 짐작치 못한 질문에, 비상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굳이 말하자면, 평소보다 더 무게감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특히 원래 모습과 대보자면 대략 그렇다 말할 수 있었다. 아마 현이 묻고 싶었던 것도, 이러한 느낌일 터였다.
“글쎄, 그런 거같기도 하고…”
“그치만 난 항상 이런 식인데.”
나라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동안, 현은 신기하단 듯 그렇게 대답했다. 이런 거 하나 가지고 인상이 바뀔 수 있단 게 믿기지 않는단 말투였다. 사실 비상도 여기엔 상당히 신기해하고 있었다. 고등학생이라기보다 중학생에 더 가까운 모습인 현이, 고작 자기와 비슷한 나잇대의 청년이 되었다고 이렇게나 받는 느낌이 달라질 줄은 몰라서였다.
비상이 그런 생각을 하고있을 때, 현이 그 모습과 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표정으로 이런 말을 꺼냈다.
“지금 우리 어떻게 보일까?”
“응?”
“그냥 궁금해서.”
“글쎄,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이 지어지는 걸 느꼈다. 물론 현한텐 들키지 않으려 애썼지만, 지금 이 상황을 다른 이의 눈으로 보면 우스울 게 뻔해서였다.
아마 다른 이의 눈으로 본다면, 비상 일행은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의 온갖 고민을 짊어진 고등학생 두 명과 세상물정에 관심없는 어른일 터였다. 물론 누가 고등학생이고 누가 어른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게 아무리 사실과 반대라고 해도.
비상이 그런 걸 떠올리며 나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날 봐요?!”
“아니, 그저…”
변명하려고 손을 내저으려던 비상은, 아까와 달리 손이 ‘원래 기억하던 대로’ 커졌단 걸 깨달았다. 아마 나라는 몰라도, 자기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게 틀림없었다. 때마침 잘 됐다고 해야 할까, 저 새까만 하늘에서 드디어 뚝뚝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적어도 전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혹시 힘들면 망설이지 말고 연락하세요. 이야기 들어드릴 테니까.”
자리에서 일어나며, 비상은 그렇게 말했다. 여기 오래 있어서 좋을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상은 물론, 나라나 현도 우산은 갖고있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비가 더 심하게 오면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했다.
“누, 누가 상담해달랬어요?!”
그런 말을 하면서도, 나라는 비상한테서 눈길을 돌렸다. 그걸 보고 있던 현도 비상 일행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저 곰귀모양 후드티로 볼 때, 현도 자기가 모르는 사이 원래대로 돌아온 듯했다.
“오늘 이쯤에 비온다 그랬는데.”
“그래. 안 그래도 지금 비가 오는구나.”
“그, 그럼…”
“아무튼 오늘은 이쯤하죠. 우산도 안 갖고 계신 거 같은데.”
그 말과 함께, 비상은 나라한테서 등을 돌렸다. 여기서 더 이상 있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단 생각에서였다. 나라는 아까 그 말이 그렇게 기억에 남았는지, 비상의 등뒤에서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지, 진짜 연락하면 받아줄 거예요?!”
“당연하죠.”
나라의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단 걸 깨달으며, 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뒤에 있는 듯한 현도 ‘난 집에 갈게’란 말과 함께 비상보다 먼저 놀이터를 떴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 어쩐다. 일단 근처 편의점에서 쓸만한 우산을 산 뒤, 비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때였다.
“뭐야?”
갑자기 강산한테 전화가 오는 바람에, 비상은 핸드폰을 꺼내며 먼저 이런 말을 꺼냈다. 참으로 일찍 전화를 걸어온 강산은, 아침부터 반쯤 지친 목소리로 대뜸 이런 말을 꺼내들었다.
“젠장. 너 수원 지리 잘 아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사정을 들어보니, 강산은 어떤 사정상 모 구청에 다녀오려다 길을 잃고 헤매는 듯했다. 강산 말에 따르면, 거기가 너무 허허벌판이라는 거였다. 그래도 구청인데 허허벌판일 리가 없다고 비상은 생각했지만, ‘젠장, 니가 와서 볼래?!’란 강산의 대답이 짐작되었기 때문에 입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하지만 비상도 이런 말만은 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잖아.”
“신발. 구청이 있을 데가 아니라고. 진짜 큰길밖에 없다니까?!”
비상의 말에, 강산은 어이없단 듯 그렇게 대답했다. 대체 거긴 어디란 말인가. 자기 역시 어이없단 생각을 하며, 비상은 다시 입을 뗐다.
“버스로 갔으면 근처 좀 돌아보면 되겠지. 안 그래?”
“아니 무슨 이런 데에…비까지 오는데…이런 젠장…”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강산은 일단 전화를 끊었다. 비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 큰길밖에 없단 데서 헤매고 있을 강산을 떠올려봤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허허벌판이라니, 거기 사는 사람이 들으면 등짝 몇 대는 맞고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갑자기 떠오른 잎새한테 전화를 걸어보자, 마치 기다렸단 듯 킬킬대는 웃음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강산이 그 놈이지? 길 물은 거?”
“잘 아시네요. 그럼 형도 받으셨어요?”
“그 놈 나한테도 그러던데. 저 놈은 버스도 잘못 타서 반대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 적도 있다더라. 여기 오래 살았으면서 참 길치라니까.”
그 말에 비상은 쓴웃음을 지었다. 더 할 말이 없어서였다. 잎새는 방금 떠오른 듯,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저 놈 우리 집에 온다던데, 잘 찾아올 수 있긴 한가?”
“형 집이 어딘데요?”
“아니, 시청 근처니까 하나도 안 먼데…저 놈은 어쩐지 길을 잃을 거 같아서.”
“뭐, 그 때 생각하면 되죠. 그건 그렇고…”
아까부터 죽 킬킬대는 잎새한테 비상은 궁금했던 걸 하나 물어봤다. 바라던 답을 들은 뒤, 비상은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보니 그 형 집에 가 본 적이 없는데.
딱히 연장자 집을 다 돌아야 한다는 규칙은 어디에도 없지만, 이렇게 비가 크게 내릴 것 같은 날, 비상은 이 형이 사는 자취방에 가보고 싶어졌다.
“넌 역시 누구랑 달리 길을 안 잃는구나.”
비상이 집에 다다르자, 잎새는 그런 말과 함께 문을 열어줬다. 그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비상이 안쪽으로 들어가자, 강산네 집보단 덜하지만 적당히 어지럽혀진 방이 눈에 들어왔다.
“청소 자주 안 하시나 봐요.”
“너무 깨끗해도 무섭잖냐. 이쯤이 가장 자연스러운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없는 잎새의 이론을 들으며, 비상은 빈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때, 귀신처럼 잎새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물론 누구인지는 안 들어도 뻔했다.
“강산이 놈이네, 보나마나.”
잎새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지, 화면도 제대로 안 보고 전화를 받았다. 잎새가 전화를 받자마자, 핸드폰에선 아주 큰 목소리가 울러퍼졌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비상의 짐작과 전혀 틀리지 않았다.
“이런 젠장. 니네 집 어디야?!”
“지금 어딘데?”
이 말과 함께, 잎새는 자기 핸드폰을 스피커모드로 바꿔놓고선 비상을 보며 킬킬댔다. 비상 역시 쓴웃음을 지으며, 자기 생각과 하나도 안 다른 반응을 보이는 강산의 목소리를 들었다.
“신발. 분간이 안 되잖아, 비슷한 게 자꾸 나오니까. 가뜩이나 비도 오는데.”
“그러니까 뭐가 자꾸 나오는데?”
잎새가 더 킬킬대자, 강산은 더 열받는다는 듯 갑자기 냅다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아주 화났단 말투로 자기 주위에 놓인 상황을 털어놓았다.
“지금 내 주위에 뭐만 보이는 줄 알아?! 죄다 이런 거밖에 없단 말이야. 무슨 도장찍은 거처럼 포커니 바둑이니…이게 다 뭐야?!”
“그, 그러니까, 뭐라고?”
이젠 탁자에 엎어진 채 킬킬대던 잎새가 가까스로 전화기에 대고 그렇게 물었다. 강산은 더더욱 열받는다는 듯, 지금 당장 잎새를 족칠 기세로 이렇게 소리쳤다. 틀림없이 그 주위에 사람이 지나다니고 있을 텐데도.
“어딜 가도 포커나 바둑이 광고밖에 없다고! 나 진짜 소름돋았다. 무슨 똑같은 게 몇 개나 있냐?! 이젠 외우겠다, 젠장.”
“마, 맞고는 없디?”
“그러니까 그거까지 다 기억한다고! 자꾸 똑같은 거만 나오니까 무서워서 전화한 거잖아, 이 자식아!”
“야, 우리 집 찍어줄게, 니가 그거보고 알아서 와라. 그럼 안녕.”
“야! 이 개신발자식이…”
그 말과 함께, 강산의 목소리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젠 바닥을 굴러다는 잎새를 보며, 비상은 다시 한 번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별 건 아니지만, 이건 한번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근처에 게임방이 그렇게 많아요?”
“쟤가 헷갈릴 만큼 많진 않을 텐데…저 놈 의외로 도박같은 건 안 한단 말이야. 맞고가 뭔지도 모를 걸?”
“모르는 게 낫지 않나요?”
“뭐, 그런 데선 순진한 게 낫지. 저 놈 성격을 보면.”
그렇게 30분쯤 지났을 때, 갑자기 잎새 집의 인터폰이 시도때도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한 번만 누르면 괜찮은데도, 이 성질급한 사람은 1초에 다섯 번은 벨을 연달아 눌러대고 있었다.
“이 개자식이…”
아무튼 잎새가 문을 열어주자, 강산은 2층까지 쿵쾅쿵쾅 계단을 올라오며 이렇게 투덜댔다. 잎새는 여전히 웃겼는지, 현관 문고리에 기댄 채 미친 듯이 킬킬대고 있었다.
“비도 퍼붓는데 한참 헤맸잖아. 왜 이런 데 사는 거야, 엉?!”
“넌 왜 엉뚱한 데다 불만이냐?”
다다르자마자 자기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드는 강산을 보며, 잎새는 여전히 킬킬댔다. 저 형도 참 간이 크다니까. 둘의 몸집이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는 걸 느끼며, 비상은 멀찍이서 그렇게 생각했다.
“이 망할 놈. 오늘 뜯어먹을 수 있는 건 다 뜯어먹어야겠다. 어디 보자…”
강산은 그 말과 함께,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같은 눈빛으로 잎새의 집 안에 들어왔다. 중간에 강산과 눈이 마주친 비상이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자, 갑자기 눈길이 비상한테서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구석에 있는 접이식 소파였다.
그 소파엔 아까까지 잎새가 만지고 있었던 모 패드가 얌전히 놓여있었다.
“이 부르조아 자식. 패드를 갖고 있어?!”
“야 이 인간아. 장학금으로 산 게 그렇게 부럽냐?”
“신발, 나하고 인연이 없는 말을…”
강산이 이를 부득부득 갈자, 잎새는 보란 듯이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게임하고 있었는데 좀 치워야겠다’란 말과 함께 패드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조차도 분한지, 강산은 잎새한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여전히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었다.
잠시 뒤 잎새가 다시 돌아오자, 강산은 아주 못마땅하단 말투로 이런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무슨 게임인데, 이 자식아?”
“과학에 관심없으면 무지 어려운 얘기다, 이 자식아.”
“이게 지금 날 무시하는 거야?!”
“자, 이걸 봐라.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냐?”
지금 당장이라도 미쳐 날뛸 것 같은 강산한테, 잎새는 다시 갖고갔던 패드를 가져오더니 그 화면을 강산한테 내밀었다. 마치 너는 절대 모를 거라는 확신에 가득찬 말투였다.
그리고 정말로, 그 화면을 보자 강산의 표정이 굳어졌다. 믿기 싫지만 잎새의 말이 맞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신발. 순수문과가 이런 걸 어떻게 알아…”
“순수문과는 또 뭐야?”
“문과 빼곤 재능이 없는 거지 뭐야. 지금도 수학하고 과학 생각만 하면…”
시무룩한 강산한테 비상이 묻자, 더더욱 시무룩한 목소리로 이런 답이 돌아왔다. 잎새는 잠시 킬킬대다, 이윽고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들었다.
“그러니까 그 둘이 바닥이었다 이거지?”
“닥쳐!!”
그와 함께, 이번엔 바로 옆에 있던 조그만 방석이 잎새 쪽으로 날아갔다. 저 표정으로 볼 때, 강산은 수학이든 과학이든 이과에 관한 데에 무슨 트라우마라도 있는 게 틀림없었다. 비상은 잘 알 수 없었지만.
“요즘 세상엔 너도 이과를 알아야지. 문과만 알면 못 산다. 순수문과비판이란 건데…”
“그래, 난 그런 거 못한다. 불만있냐?!”
잎새가 자꾸만 자길 놀려대자, 강산은 이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당장이라도 잎새를 덮칠 기세였다. 아까는 방석으로 끝났지만, 저 몸뚱아리가 그대로 날아간다면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비가 오고 있던가.
이 형 때문에 까먹었단 생각을 하며, 비상은 창밖으로 흘러내리는 비와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았다. 오늘 폭풍이 몰아닥치는 듯한데, 사실 여기가 진짜 폭풍의 보금자리가 아닐까. 저 형한테 그런 말을 했다간 자기도 말려들겠지만.
시계를 보니, 벌써 낮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있었다. 이런 날씨에선 알기도 어렵단 생각을 하며, 비상은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진짜 폭풍우가 더 나을까, 아니면 사람이 만드는 폭풍우가 더 나을까.
어렵다면 어려운 문제였지만, 지금 비상한텐 사람이 만드는 바로 이 폭풍우가 더 무섭게 느껴졌다.
“윤비상 씨죠?”
그런 빗속에서 점심을 먹은 뒤 집으로 돌아가려던 비상한테, 갑자기 누가 말을 걸었다. 비상이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자기 또래쯤으로 보이는 낯선 청년이 서있었다.
지금 처음 봤을 텐데 왜 이렇게 낯이 익을까.
그 묘한 느낌을 받고, 비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자기가 하고있던 생각을 입에 담았다.
“혹시 놀이 관련된 분인가요?”
“네. 게다가 천사인 걸요.”
“…제 꿈에 나타난?”
“네.”
비상이 묻자, 그 사람, 즉 천사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 태연한 대답에 비상은 말문이 막혔지만, 원래 천사가 이런 존재란 건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지금 천사는 자기를 불렀으니, 뭔가 까닭이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잘 지내시는지 보고 싶어서요.”
“그런 건 쉽게 알 수 있지 않나요?”
“이렇게 아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요.”
그 엉뚱한 말을 이런 빗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하는 천사를 보며, 비상은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 천사란 존재는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비상은 궁금했던 것 하나를 물어봤다.
“이번에 모습을 바꾼 특별한 까닭이라도 있나요?”
“전 불확정한 존재로 있고 싶거든요. 마치 모호한 존재처럼요.”
“왜죠?”
그 묘한 말에, 비상은 점점 더 궁금해졌다. 천사가 사람한테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란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말은 특히 더더욱 알 수 없어서였다.
하지만 천사는 마치 어제 먹은 저녁이라도 대답하는 것처럼 가볍게 입을 뗐다.
“천사는 그런 존재니까요. 저도 그런 존재로 있고 싶구요천사는 그런 존재니까요. 저도 그런 존재로 있고 싶구요.”
“네?”
“잘 지내시는 걸 보니 마음이 놓이네요. 그럼 이만.”
그 말과 함께, 청년, 아니 천사는 비상한테서 등을 돌렸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조금만 있으면 폭풍우가 휘몰아쳐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에, 천사는 몸 하나 젖지 않고 저 너머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저 천사란 존재는 대체 뭘까.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생각을, 비상은 다시 꺼내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 날 밤, 비상은 자기 방 침대에 기댄 채 가만히 앉아있었다.
창밖에선 거친 천둥번개 및 빗소리가 죽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비상도 이런 날 밖에 나갈 생각은 이만큼도 없었다. 저녁쯤 집에 돌아오자, 비가 더 거세졌던 걸 비상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놀이’를 하는 이라 한들, 이런 날까지 밖에 나가고 싶은 사람은 그다지 없을 터였다.
다들 얌전히 잘 있긴 할까.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갑자기 비상의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보자, 의외라면 의외이며 의외가 아니라면 의외가 아닌 사람의 이름이 나와있었다. 정말 그 말을 들어줬구나. 그 생각과 함께, 비상은 전화를 받았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아침에 만난 바로 그 나라였다.
“지, 진짜 전화해서 어이없어하는 거예요?!”
비상이 잠시 말을 잇지 못하자, 전화기 너머에서 날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나라는 비상이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게 그런 까닭이라 여긴 듯했다.
“아뇨. 이렇게 빨리 하실 줄 몰랐거든요.”
그 말과 함께, 비상은 창가 쪽으로 몸을 기댔다. 아무래도 그게 더 어울리는 이야기이리라 여겨서였다.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단 생각에, 비상은 입을 똈다.
“시간도 많으니 말씀하세요. 전 괜찮으니까요.”
“비, 비도 오고 이런 거 털어놓을 사람도 없어서…”
“전 지금 안 졸리니까 괜찮아요.”
“누, 누가 졸리게 한대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라는 천천히 하려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빗소리가 좀 더 거칠어졌다. 저 멀리에선 여전히 천둥번개소리가 무섭게도 들려오고 있었다.
“워, 원래 이런 거 남한테 잘 안 말해요. 그래도 굳이 들어주겠다면…”
항상 그렇듯, 나라는 이런 식으로 입을 뗐다. 비상은 여전히 창문에 기댄 채,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거센 빗소리와, 나라 특유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라는, 아무튼 지금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많아서 싫다는 말을 줄줄 늘어놓았다. 비상은 그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나라가 이야기를 하다 말고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중학생 때쯤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매일매일 몇 장에 걸쳐서 편지를 썼단 말이에요. 그래서 전하려고 용기를 내서 근처로 갔는데, 주위에 있던 얘들이 뺏어선 그걸 다 읽어버렸어. 이런 걸 갖고 흑역사라 말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단 건 기쁜 일이잖아요.”
“그럼 이게 흑역사가 아니라 백역사예요?!”
그 말에,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이 사람은 나이와 안 맞게 유치한 데가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유치한 것이야말로 나라가 모르는 자기의 매력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오해만 받을 게 뻔하니 이런 말은 절대 입에 담지 않겠지만, 비상은 나라의 그 기센 모습이 싫지 않았다.
“아무튼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지금 저밖에 없단 말씀이시죠?”
“알았으면 가만히 듣기나 해요. 아무튼.”
“뭐, 그러죠.”
저 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의 이야기는 한 시간이 지나도 멈출 줄 몰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거센 비도 어느정도 잦아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나라 씨 목소리가 잘 안 들리는데.
그런 생각에 핸드폰에 귀를 기울이다, 비상은 나라가 잠들었단 걸 깨달았다. 그걸 알아챈 까닭은 별 것도 아니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코를 고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번 일로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졌을까.
자기가 폭풍의 보금자리라도 되어줬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비상은 자기 역시 눈을 감았다. 내일 연구소에 지각할 수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