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밤 언리미티드 18. 우리가 사는 이 세상

그 다음 날, 비상은 드물게도 일을 하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상은 오늘 아침, 강산한테서 갑작스러운 말을 들었던 것이다.
-파랑이 생일 내일이란다. 어떻게 니 경기랑 겹칠 수 있냐. 나 참.
자기 경기와 겹치는 건 둘째치더라도, 비상한테 그 말은 정말 당혹스러웠다. 생일이 조만간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다가오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해서였다.
덕택에, 모니터 앞에서 수치를 만지작대면서도 비상은 그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강산은 이런 말도 같이 했다. 이번 파랑이 생일엔 돼지머리 하나를 선물할 거라고.
아주 드립 경연대회가 됐는데, 이거.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비상은 파랑한테 줄 선물을 생각했다. 아무튼 자긴 그 형보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니, 거기에 알맞은 걸 갖고가기 위해서였다. 아직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러고 보니, 생각할 게 하나 더 있었다.
오늘, 비상은 약속이 하나 잡혀있었다. 어제 들었던 대로, 의영이 형과 옥상에서 단둘이 얘기하게 된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의지 누나가 붉은 밤에서 가장 연장자일 테지만, 일단 남성인 비상 입장에선 그 중 최고 연장자인 의영과 단둘이 얘기를 나누는 게 괜히 긴장됐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걸까. 의영이 말한 ‘하고싶은 말’이, 비상은 자꾸만 신경쓰였다.
하지만 항상 그랬던 대로, 비상은 일단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지금, 자기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일이 끝나자, 비상은 평소보다 더 무거운 발걸음으로 연구소를 나왔다. 오늘은 드물게도, 같은 팀원들이 ‘무슨 일 있어요?’라 걱정했던 것이다. 평소라면 이런 일은 없을 것이므로, 비상은 스스로 자기를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오늘 자기가 그렇게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나, 라고.
일단 파랑이 형의 선물을 사야겠단 생각에, 비상은 역 앞 번화가에 들렀다. 물론, 여전히 뭘 살지는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내일이 생일인 사람 선물을 언제까지고 안 고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여기저기 둘러봤지만, 비상 눈에 들어오는 물건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다, 비상은 평소에 파랑이 형이 뭘 좋아했는지를 떠올려봤다. 그 형이라면 틀림없이, 자기가 아까 생각한 드립 경연대회에 나갈만한 물건을 좋아할 터였다. 적어도 지금까지 본 걸로 생각하면.
거기까지 생각한 다음 주위를 둘러보자, 드디어 비상은 그 생각에 알맞은 물건을 찾아낼 수 있었다. 가끔 차에서 볼 수 있는, 빛을 받으면 흔들거리는 새싹모양 장식물이 비상의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강산이 형이 산다는 그 돼지머리와 견주면 참으로 평범한 물건이었지만, 아무튼 파랑이 형이라면 마음에 들어할 터였다.
이렇게 흔들리는 걸 보니까 어쩐지 우스운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그 장식물을 산 뒤 가게를 나왔다. 그런데 가게를 나오자마자, 비상은 아주 눈에 익은 사람이 자기 쪽으로 걸어온다는 걸 알아챘다. 그 사람은 저 너머에서 큰 봉투를 오른손에 든 채, 그 커다란 몸집으로 점점 비상한테 다가오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비상은 이런 데서 강산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아무리 우연이라 해도, 이런 곳에서, 그것도 이런 상황에서 만나게 된 게 하도 어이없어진 나머지,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여기서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강산이 어떻게 나올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러니,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다가가서 말을 거는 것뿐이었다.
“그건 대체 뭐야?”
“말했잖아. 돼지머리다.”
그 말과 함께, 강산은 아무렇지도 않게 킬킬댔다. 어쩐지 봉투에서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아, 비상은 얼른 뒷걸음질로 형과의 거리를 벌렸다.
“이게 무슨 신장개업이야?”
“파랑이 생일인데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 안 그래?”
강산이 또 킬킬대는 걸 보며, 비상은 자기가 생각하던 드립 경연대회가 현실화되어가고 있는 걸 느꼈다. 보나마나 다른 형들도, 강산이 형 못지않은 걸 가져올 게 틀림없었다. 전에 여름에 캐롤 부르겠다는 말도 나왔을 정도니까.
참고로 강산의 말에 따르면, 파랑은 이 모든 걸 알고 있으며, 무척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가면 갈수록 뭘 축하하기 위한 자리인지 이해할 수 없지만, 아무튼 당사자가 좋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라 비상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건 파랑이 형 생일이지 자기 생일이 아니니까. 비상은 11월생이니 이런 일은 겪지 않겠지만.
덧붙이자면, 강산은 비상의 선물을 보곤 ‘뭐 이리 평범한 걸 샀어?’라며 불만을 드러냈다. 비상 역시 ‘형이 언제부터 파랑이 형으로 둔갑한 거야?’라고 맞받아쳤지만, 저 돼지머리와 자기 선물을 견주면 절대 못 이기리란 건 알고 있었다.
정말 내일은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쓴웃음을 지었다. 파랑의 생일은 물론, 자기가 그 날 하게 될 ‘혜은과의 경기’를 떠올리며.

아무튼 강산의 집에 돼지머리를 둔 뒤(비상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둘은 항상 그렇듯 경기가 있는 건물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젠 지리도 익숙해져서인지, 수원 안에서라면 어디서든 그 건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비상도 여기에 산 지 그럭저럭 오래 되었으니, 어디에 뭐가 있는지쯤은 어느정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비상은 잠시 생각하다, 이윽고 전에 천사와 나눈 이야기를 강산한테 털어놓았다. 그러고 보면 형한텐 이 이야기를 안 했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이왕하는 거, 강산의 생각도 듣고 싶었다. 좀 더 이런저런 사람들한테 그 말에 관해 자기가 가진 생각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게 뭐라고 숨겼냐?”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즈음, 강산이 대뜸 그런 말을 던졌다. 마치 자기한테 그런 걸 숨겼단 게 서운하단 말투였다.
“굳이 말할 것도 없잖아.”
“근데 숨길 것도 없잖아. 이 자식아.”
그런 말과 함께, 강산은 혼자 투덜댔다. 아마 자기를 못 믿어서 말하지 않은 거라 여긴 듯했다. 비상은 아무 생각도 없었지만.
“그 천사, 우리 시험하는 거 아냐?”
결국 이야기를 다 들은 다음, 강산은 대뜸 그런 말을 꺼냈다. 무척 그 말이 수상쩍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소리야?”
“아무튼 우리 반응이 보고 싶다는 거잖아. 우리가 이런 걸 던져주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해서 그런 거 아냐. 안 그래?”
“그러니까, 그냥 호기심으로 이러고 있다고?”
“그냥 심심해서 그런가 보지. 천사가 사람한테 영향미칠 일이 많진 않잖냐. 아마.”
강산의 말을 들은 뒤, 비상은 전에 천사와 만났던 순간을 되새김질했다. 별밤이 전에 했던 말이, 다시 비상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쩐지 그 둘은 무척 관계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말을 하는 동안, 둘은 어느새 옥상으로 가는 문 앞에 다다라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오늘도 흰색 티를 입은 의영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젠 비상도 전에 입은 흰 옷과 오늘 입은 흰 옷을 분간하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거 안 질려?”
“딱히 입을 옷도 없으니 이게 편해. 걱정 마라.”
“대체 흰색 옷이 얼마나 있는 거야?!”
강산이 또 그렇게 투덜대는 가운데, 비상은 주위를 둘러봤다. 우연히 본 옆 건물 옥상에서, 누가 힘차게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연습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은 전에 비상한테 인사하러 온 바 있는 연소자, 군청이었다.
“오늘은 금빛 밤이에요?”
“그렇지.”
비상이 묻자, 의영이 그렇게 대답했다. 군청이 긴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런 까닭인가.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쇠파이프란 무기 자체가 사람을 겁먹게 하는 데엔 충분했지만, 이건 ‘무기 강화’조차 할 수 있는 ‘놀이’이기 때문에, 어떻게 굴러갈지 알 수 없어서였다. 전에 본인한테 들은 얘기 때문인지, 비상은 군청의 다리가 자꾸만 신경쓰였다.
그 때였다.
“비상아,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지?”
그 말과 함께, 의영이 저 쪽 구석으로 손가락질을 했다. 저기서 이야기하자는 뜻이란 건, 비상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은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뭔 비밀을 말하려고?”
“이미 약속한 거다. 이거.”
의영은 그 말을 끝으로,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강산한테서 등을 돌렸다. 여러 모로 마음이 복잡해졌지만, 비상 역시 의영 뒤를 따랐다. 참고로 오늘 경기가 판정으로 넘어가면, 강산이 판정단에 들어가게 되는 듯했다. 이것 때문인지 강산은 군청 쪽으로 뛰어가더니, 여기까지 들리는 목소리로 ‘판정으로 넘어가기만 해 봐. 그냥 확’이라며 협박하고 있었다. 아마 판정으로 넘어가면 파란 팀 주장인 상록과 만나게 되기 때문인 듯했다. 뭔가 찔리는 게 없으면 저렇게 절실하게 협박할 리는 없었으니까.
당사자인 군청이 참 우직하게 ‘암요’라고 대답하는 걸 들으며, 비상은 의영과 옥상 구석에 다다랐다. 의영은 이런 상황이 멋쩍은지, 잠시 비상한테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자기가 이렇게 하자고 했는데도.
“단 둘이서 얘기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구나. 미안하다.”
“좀 더 빨리 이런 기회를 만들었어야 했는데요. 제가 더 죄송하죠.”
“아냐, 그건 내 탓이지.”
의영이 손사래를 친 뒤, 잠시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참고로, 옥상엔 붉은 밤 팀원들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저 너머가 시끄럽긴 했지만, 비상은 그게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동성 사이에서 이런 정적은 마음이 편했다.
그 무리들을 보며, 이윽고 의영이 천천히 입을 뗐다.
“이 얘길 미리 했어야 했는데. 비상이 너도 승지하고 내 관계는 알지?”
“네. 어쩌다보니 듣게 됐네요.”
언젠가 올 질문이었단 생각을 하며, 비상은 그렇게 대답했다. 당사자한테서 이런 얘기를 듣는 건 긴장되는 일이었지만, 비상이 속으로 둘의 사정을 궁금해한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은 여기 없는 거 같은데, 걔한텐 못해준 게 많아. 부모님이 재결합하면서 남매가 됐는데, 나이차가 너무 나니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승지는 어머니가 재혼했을 때 생긴 아이거든. 성이 다른 것도 그것 때문이야. 그 애가 바꾸는 걸 무척 싫어해서.”
그런 말을 담담하게 하는 의영을 보며, 비상은 문득 자기와 현의 관계를 떠올렸다. 물론 의영 남매와 상황은 달랐지만, 둘의 나이차는 사실상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애가 날 꺼리는 것도 그런 까닭일 거야. 내가 괜히 자리를 피하니까. 또 내가 성질이 좀 있어서…안 믿기지?”
“첫날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요, 뭘.”
“‘아, 그러고 보니 그 땐 잠시 돌아서 큰소리 좀 질렀구나.”
그 때 일이 떠올랐는지, 의영은 킬킬대며 살짝 웃어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 둘은 의영이 형과 잘 지내는 걸까. 갑자기 비상은 그런 게 신경쓰였다.
“아무튼 그래서 관계가 복잡한 거야. 설마 같은 놀이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 말 뒤, 둘은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상 역시 억지로 말을 걸려 하진 않았다. 동성끼리 이렇게 있는 순간은 오히려 편했으니까.
“이것도 기회니까,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 해보려고 해. 남들은 그깟 놀이라 우습게 볼지도 모르지만, 난 진심이거든. 아무리 우습게 보여도 지지 않을 거야. 그게 내가 승지한테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니까.”
잠시 뒤, 의영은 그렇게 말하며 달이 뜬 하늘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의영은 왼손에 담뱃갑을 들고 있었다. 아마 비상이 없었다면, 의영은 저걸 피우고 있었을 게 틀림없었다.
“피우시지 그러세요.”
“너희들 앞에서 피울 순 없잖니. 강산이처럼 같이 피우는 사이면 모를까.”
“제가 담배 끊었단 걸 누구한테 들으셨어요?”
“너도 참 대단하다. 그걸 끊다니.”
“하다보면 어떻게 되더라구요.”
“나한텐 그게 어렵거든.”
거기까지 말하자, 의영은 그 말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긴 절대 그런 건 못하겠다는 말투였다.
그러다가 둘은 자연스럽게 직장 이야기로 넘어갔다. 의영 역시 비상처럼 IT 쪽에서 일하는 듯했다. 그 말을 듣자, 비상은 묘한 친근감을 느꼈다.
“이렇게 보여도 내가 이공계에 프로그래머란 건 믿기니? 너라면 누구나 믿겠지만.”
“저도 그렇게 대단한 존재는 아닌 걸요. 그저 연구원일 뿐이니까요.”
“그래도 너한텐 나이에 안 맞는 아우라가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다, 의영은 비상 너머를 가만히 쳐다봤다. 마치 거기에 누가 있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더니, ‘미안. 지금 알아서’라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뒤에서 인기척이 있던 거 같은데.
그런 생각에 뒤를 돌아보자, 거기엔 모습이 바뀐 현이 항상 그런 것처럼 검정색 야구모자를 눌러쓴 채, 아무렇지 않게 둘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걸 볼 때, 아마 현은 둘의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었던 듯했다.
“언제부터 있었니?”
“아까 전부터.”
비상의 말에, 현은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대답했다. 아마 의영과의 얘기에 너무 빠진 나머지, 옆에 현이 있다는 것조차 몰라봤던 듯했다.
“이렇게 있으니까 신기하다.”
그 때, 현이 대뜸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이 말이 하고 싶어서 목이 간질거리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내가 여깄는 게 무지 자연스럽게 느껴져. 뭐라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현은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뒤, 아까 의영이 한 것처럼 하늘을 쳐다봤다. 아마 ‘이 모습’으로는 둘고 나란히 있을 때 위화감이 없어지는 걸 말하는 듯했다. 둘과 나이차이가 꽤 나는 현 입장에선, 그런 것조차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얘기는 재밌었니?”
“어른들은 이런 얘기를 하는구나, 란 생각하고 있었어.”
현의 담담한 대답을 듣자, 비상은 어쩐지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결코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일단 지금 ‘어른’처럼 보이는 현이 그런 말을 하니 어쩐지 우스워서였다. 아마 멀리서 아무 것도 모른 채 이걸 보는 사람이라면, 이 대화 자체가 우스꽝스러울 터였다. 지금 현은 겉과 속이 또렷하게 다른 존재였으니까.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현이 너한텐.”
옆에 있던 의영은 그런 말과 함께 쓴웃음지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지금 세 명은 현의 말대로 정말 위화감이 없었다. 너무나 잘 어울려서, 도무지 이상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 큰 성인남성 셋이 나란히 난간에 팔을 기댄 채 이야기를 주고받는 걸, 누가 이상하다 여긴단 말인가.
그렇게 잠시 뜸을 들이다, 의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하지 않니? 우리가 이렇게 놀고있는 게, 천사 눈엔 정말 재밌게 보이는 걸까? 그냥 보통 사람들일 뿐인데.”
의영의 그 말엔, 깊은 진심이 묻어나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비상이 전에 천사와 만난 뒤 죽 생각해오던 것과 묘하게 닮아있었다.
“나도 그저 평범한 회사원이고, 다들 그리 특별한 존재는 아닌 거 같은데, 다른 사람 눈으로 이런 걸 보면 재밌을까?”
거기까지 말한 뒤, 의영은 비상을 쳐다봤다. 아마 그 답을 비상한테 듣고 싶은 듯했다.
“일단 강산이 형 정도면 충분히 웃기잖아요.”
“야, 윤비상. 이 자식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비상이 그렇게 대답하자마자, 어디서 듣고 있었는지 귀신같이 나타난 강산이 그런 말과 함께 투덜댔다. 아마 자기가 그런 취급받는 게 아주 못마땅했던 듯했다.
“어쩌면 노르웨이 기차예능처럼 보고 있을지도 모르죠 뭐. 하늘이니까요.”
같이 있었던 듯한 별밤 역시 근처로 오더니, 그런 말과 함께 킬킬댔다. 이걸 볼 때, 둘 다 얘기하다 말고 의영과 비상의 이야기를 엿들은 듯했다. 물론 이런 얘길 엿들어도 별 문제는 없었지만.
“차라리 리얼 버라이어티라고 해라. 이 자식아.”
“그럼 언젠가 레이스도 하고 그러는 거냐?”
“그런 짓을 왜 해?!”
별밤이 농담조로 그렇게 묻자, 강산은 그런 말과 함께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당사자의 말과 상관없이, 비상은 그 말을 듣고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저 형을 보고 있으면, 마치 현실이 예능처럼 느껴지곤 했던 것이다.
“적어도 저 둘을 보고있는 건 재밌으니 됐네. 그렇지?”
의영이 킬킬대며 그렇게 말하자, 비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도 비슷한 마음이라서였다. 당사자인 강산은 그것조차 불만인 듯했지만.
그렇게 비상 일행이 웃고 있는 사이에도, 군청과 금빛 밤 사이의 경기는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바로 옆에서. 비상은 자기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군청을 보며, 저 친구가 정말 진심으로 이 경기를 하고있단 걸 깨달았다. 자기 무기인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군청의 눈빛은, 다리가 조금 불편한 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강렬했다. 지금 ‘놀이’를 하고있는 사람이라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방금 의영이 했던 말을 다시 떠올리며, 비상은 의영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해야할 말을 못 하고 있었구나.”
그 말과 함께, 의영은 자기 기억을 더듬는 모습을 보였다. 비상은 물론, 조금 멀찍이 떨어진 현조차 고개를 내민 채 의영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너도 이제 나이가 꽤 됐으니 알지도 모르지만, 이 나이쯤 되면 누굴 탓하고 깔아내리는 게 참 우스운 일이란 생각이 들더라.”
의영은 천천히, 자기가 하려했던 말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마치 비상한테 들어주길 바라는 것처럼.
“나도 경험만 쌓여서 다 알고 있거든. 저 사람이 하는 실수는 나도 이미 거친 거구나, 란 걸 말이야. 그러니 남을 탓할 수 없지. 다 내가 거쳐온 길인데.”
“전 거기까지 생각진 못했는데요. 형이 대단하신 거예요.”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알 거야. 다른 사람이 하는 실수나 그런 건, 다 자기가 거쳐온 길이구나, 란 걸. 그런 얘길 하고 싶었어. 별 게 아니라 실망했니?”
그 말과 함께, 의영은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현은 가만히 듣다가, ‘호오’란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멀리서 보면 좀 얼빠진 느낌이었지만, 비상은 현을 잘 알고 있기에 그게 전혀 우습게 보이지 않았다. 아마 현한테도 그 말은 인상에 깊었던 듯했다.
“천만에요. 형이 그런 말을 하려는 까닭은 저도 다 아니까요.”
비상이 그렇게 대답하자, 의영은 안심했단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비상 어깨너머로 현을 보고는, 뭔가 생각났는지 급하게 다시 입을 뗐다.
“우리는 그렇지만, 현이 넌…”
“그만!”
그 때, 갑자기 저 너머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결국 군청의 경기가 판정으로 넘어간 것이다. 강산은 무척 기분잡친 듯한 표정으로, 이런 말과 함께 저 너머로 뛰어갔다.
“젠장. 그러니까 몸 좀 사리라고 했는데…”
강산에 뒤이어 저 쪽 건물로 뛰어가는 상록을 보며, 비상은 속으로 강산의 명복을 빌었다. 물론 아무 일도 없겠지만, 저 사람은 괜히 긴장하고 있을 게 틀림없으니까.
비상이 거기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갑자기 의영이 말을 이었다. 아마 아까 하다가 끊긴 말을 이어가려는 듯했다.
“우리는 이렇게 진지하게 말하고 있지만, 현이 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넌 아직 어린 여자애니까.”
“그게 무슨 뜻이야?”
그 말에, 현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무슨 소리인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모습이었다. 의영은 잠시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야. 이런 건 어른들이 고민하는 거지, 현이같은 여자애들은 아무 생각없이 즐기면…”
“나도 앞으로 어떻게 살면 좋을지 많이 생각한단 말이야. 그건 누구나 다 하는 거야. 어른이나 남자만 하는 게 아니라.”
갑자기 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둘한테서 등을 돌렸다. 아마 건물 밖으로 나가려는 듯했다. 의영은 물론, 비상도 무척 당황한 표정으로 현을 잡으려 했다.
“현아. 그건 형이 잘못 말한 게 맞아. 그렇지만…”
“내가 이런 모습인 걸 이럴 때 후회할 줄은 몰랐어.”
그 말을 끝으로, 현은 비상의 손을 뿌리쳤다. 둘의 힘은 지금 거의 동등했으니, 현이 비상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도 무척 쉬운 일이었다. 현이 빠른 발걸음으로 옥상에서 나가는 문을 연 뒤 계단을 내려가는 걸 보면서, 비상은 역시 당황스런 표정을 짓는 의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가 말해볼게요. 형.”
“그래. 미안하다고 전해줄 수 있겠니?”
비상은 고개를 끄덕인 뒤, 현이 간 길을 좇았다. 물론 ‘지금’ 현이 어두운 길을 걷는다 한들 위험할 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현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어서였다. 현의 몸이 아무리 안전하다 한들, 그 마음이 걱정되는 비상한테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건물을 나서서 현의 뒤를 쫓을 때, 비상은 문득 자기 모습에 위화감을 느꼈다. 물론 자기 모습이 지금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몸 전체를 위화감이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 느낌을 받자, 비상은 자기 모습이 지금 바뀌어있단 걸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하필 이럴 때에.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은 현을 쫓는 게 먼저였다. 비록 아까보다 발걸음이 느려지긴 했지만, 비상은 현을 찾기 위해 그 흐릿한 뒷모습을 죽 따라갔다.
그렇게 달리다, 비상은 누군가와 몸이 부딪치는 걸 느꼈다. 아마 현한테 정신이 팔린 나머지 앞을 제대로 못 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안경을 쓰고 있었구나. 비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안경집 안에 일단 안경을 집어넣었다. 그제야 방금 전까지 ‘어지러웠던’ 주위가 또렷이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원래 모습이라면, 몸이 아니라 어깨가 부딪치고 있었겠지.
그런 생각과 함께 뒤돌아보니,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남자가 거기에 있었다. 어쩐지 그 뒷모습이 눈에 익었지만, 지금 비상한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비상은 그렇게 외친 뒤, 다시 뛰기 시작했다. 어쩐지 부딪친 남자가 자길 가만히 보는 것 같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기는 지금 현을 쫓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더 시간을 들이면 어떻게 될지 비상도 알 수 없었다. 비상한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현과 다시 한 번 만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뛰다, 드디어 비상은 어떤 편의점 앞에서 익숙한 모습을 찾아냈다. 편의점 앞 의자에, 여전히 ‘바뀐 모습’인 현이 뭔가 마시면서 앉아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은 혼자가 아니었다. 바로 옆에 앉은, 어디서 본 것 같은 여자애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현이, 무슨 일 있었어?”
그렇게 말을 거는 목소리도, 비상은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 비상의 생각이 맞다면, 전에 만난 현의 친구임이 틀림없었다.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비상은 현에게 말을 걸어야겠다 마음먹었다.
“현이 너, 여기 있었니?”
“현아, 얜 누구야?”
비상이 가까이 다가오는 걸 보자, 여자애는 수상쩍단 눈으로 자길 쳐다보며 그렇게 물었다. 이젠 비상도 저 친구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조금 오래 전에 만난 탓일지도 몰랐다.
“친구.”
현은 그 아이한테 짧게 대답한 뒤, 비상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표정엔 묘하게 미안하다는 마음이 담겨있었다. 설마 비상이 여기까지 쫓아올 줄은 몰랐던 듯했다.
“여기까지 안 찾아와도 되는데.”
“우리 현이한테 내가 모르는 친구가 있다니…”
여자애는 그게 불만이었는지, 마치 강산이 형처럼 조용히 투덜댔다. 그런 여자애는 둘째치고, 비상은 자기가 해야 할 말을 바로 입에 담았다. 비상은 지금, 무엇보다 현한테 사과해야 했던 것이다.
“의영이 형 대신 내가 말할게. 아까는 미안. 형도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을 거야. 미안하단 말도 전해달라 부탁받았어.”
“형?”
옆에셔 여자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지만, 지금 그건 비상한테 중요하지 않았다. 현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떼어놓았다.
“나도 그럴 거라는 생각은 했어. 그렇게 화난 것도 아니고.”
그 말과 함께, 현은 앞에 있는 음료수를 가만히 마셨다. 비상이 보기에, 그건 얼음이 들어간 아이스초코인 듯했다. 현이 너도 단 걸 좋아하는구나.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 얜 그러니까 누구야? 엄청 수상쩍은데?!”
“친구래도.”
여자애가 현한테 답을 재촉했지만, 현은 여전히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어쩌면 비상을 생각해서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니가 이런 모습으로 있으면 막 껴안을 수도 없잖아. 그 놀인가 뭔가하는 거 때문에.”
“그건 그렇네.”
여자애가 이어서 현한테 불만을 드러내자, 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뭔가 떠올린 것처럼, 앉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마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세영아. 잠깐 저 쪽 좀 가 줘.”
현이 여자애한테 그렇게 말한 걸 듣고 나서야, 비상은 이 여자애, 세영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이름이었지. 오랫동안 안 봤더니 아주 잊어버리고 있었다.
“나 몰래 뭐 하려고?”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세영은 얌전히 자리를 비워줬다. 아마 현을 진심으로 아끼는 게 틀림없었다. 비상과 현이 만난 시간보다, 저 세영이란 아이가 현과 만난 시간이 훨씬 더 길 테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편의점 앞엔 비상과 현, 단 둘만이 남게 되었다. 물론 아직 다음 날로 넘어가지 않았으니 지나다니는 사람은 좀 있었지만, 사실상 둘만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왜 그러니?”
비상이 그렇게 묻자, 현은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바로 옆에 앉아있던 비상을 머리째 껴안기 시작했다. 물론 이건 비상이 전혀 짐작치 못한 일이었다. 물론 지금은 몸집차가 또렷했기 때문에, 비상은 현의 품속에 쏙 들어가게 되고 말았다.
“가, 갑자기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와준 게 고마워서.”
그 말과 함께, 현은 비상을 아까보다 더 세게 끌어안았다. 문득, 비상의 머릿속에 전에 있었던 일이 스쳐지나갔다. 지금은 그 때와 상황이 다르지만, 틀림없이 같은 상태이기도 했다.
“나도 참 이상하지. 아까만 해도 이런 모습이 된 걸 처음으로 후회했는데, 이럴 땐 나쁘지 않단 생각도 들어.”
현은 자기도 잘 모르겠단 말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걸 보면, 그 일 뒤로 현도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한 듯했다.
“너도 네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 그대로 하면 되는 거야. 다른 사람 말하곤 상관없이.”
“그렇지?”
비상이 품속에서 그렇게 말하자, 현이 그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기도 큰길이니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는 건 똑똑히 느껴졌지만, 현은 좀처럼 그 팔을 풀려 생각하지 않았다. 비상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그런 상태로 현한테 죽 안겨있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 마음은 참 알 수 없는 건가 봐. 이런 시간에도 밖에 나올 수 있단 생각을 하면, 이런 모습도 편하단 생각이 들어.”
현이 중얼대는 걸 들으며,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자기는 아직도 이 현이란 아이를 잘 알지 못하지만, 이 아이한테는 이 아이 나름의 ‘축’이 있다고. 그런 축은 자기와 동등한 것이니, 절대 가벼이 봐선 안 된다고.
물론 의영이 형도 이걸 모를 리는 없었다. 그저 무심코 잘못 말한 게, 이런 문제로 이어진 것뿐이었다. 그래서 의영이 형은 대신 사과해달라 비상한테 부탁한 것이었다. 지금 현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붉은 밤에선 비상이 틀림없었으니까.
일단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설명해야지.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여전히 현의 품에 안겨있었다. 조금 불편한 데다가 민망하긴 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진 않았으니까. 비록 현이 언제 풀어줄지는 비상도 짐작할 수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