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밤 언리미티드 17. 예상 밖의 만남

다음 날, 잠에서 깬 비상은 모르는 이한테 메시지가 와있단 걸 깨달았다. 잠이 덜 깬 상황이었지만, 대체 누구지? 란 생각에, 비상은 얼른 핸드폰을 확인했다.
-시간되시면 저녁에 근처 공원에서 만나요.
그 말을 보고도, 비상은 그걸 보낸 이가 누구인지 얼른 알 수 없었다. 자기가 아는 사람 중 이런 메시지를 보낼 이가 있었던가? 예의바르게 적힌 걸 보면, 아마 같은 팀은 아닐 것 같았다.
그런 생각에 빠져있던 비상은, 메시지 아래에 보낸 이의 이름이 적혀있단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걸 보고서야, 비상은 이 정체불명 메시지에 관한 수수께끼가 싹 풀리는 걸 느꼈다.
메시지 아래엔 틀림없이, ‘최나라’라 적혀있었던 것이다.
‘나라’란 이름을 가진 이 중 비상이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사람만큼 연락이 온 게 놀라운 상대도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라란 사람은 현과는 인연이 있을지 몰라도, 비상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체 왜 자기한테 연락을 했는지 비상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알았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결국 이렇게 답했다. 갑작스럽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지만, 자기가 안 나갈 까닭은 없다 여겨서였다. 대체 그 나라란 사람이 자기한테 하려는 말이 뭔지도, 비상은 무척 신경쓰였다.

그렇게 일이 끝난 뒤, 비상은 그 공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젠 자기 다리도 공원이 어딨는지 잘 알고 있어서일까, 걸음걸이가 무척 가볍게 느껴졌다. 전에 현과 만날 때도 여기에 왔으니, 슬슬 익숙해지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제 여름도 깊어져서 그런지, 저녁 여섯 시를 넘겼는데도 하늘은 여전히 밝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그런 생각으로 공원에 들어선 비상은, 벤치에 어떤 여성이 앉아있단 걸 알아챘다. 비상은 그 여성을 전에 본 적이 있었다. 언뜻 보기엔 키나 묘하게 앳된 얼굴 때문에 고등학생처럼 보였지만, 비상은 저 사람이 ‘자기와 동등한’ 어른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낙엽 굴러가는 것만으로도 웃는다는 여고생이라면, 저렇게 비참한 표정은 절대 안 지을 터였다.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세상에 실망한 것도 아니고,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저런 표정만은.
“혹시 나라 씨인가요?”
벤치로 다가가며, 비상은 가만히 물었다. 나라라 불린 그 사람은 비상을 쳐다보더니, 아주 못마땅한 얼굴로 눈길을 돌렸다.
“그럼 누구겠어요?”
쉬운 상대는 아니겠는데.
나라의 저 태도를 보며,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건 현과 한 경기를 볼 때도 했던 생각이었다. 적어도 자존심 하나는 무척 크며, 특히 지는 걸 무엇보다 싫어하는 성격이란 건 그 때 알아챘던 것이다.
하지만, 일단은 자기를 소개하는 게 먼저였다. 비상이 이 나라란 사람과 마주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이야기라면 많이 들었지만.
“붉은 밤의 윤비상이라 합니다.”
“은솔이한테 들었어요. 더 소개하지 않아도 돼요.”
그 말과 함께, 나라는 비상한테 옆에 앉으란 듯 자리를 내주며 또 고개를 돌렸다. 이걸 볼 때, 자기 연락처를 알아낸 것도 은솔한테 도움을 받은 듯했다. 사실 다른 팀인 나라가 비상한테 연락하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면, 나라는 지금처럼 ‘앳된’ 모습과 달리 참으로 차가운 인상이었다. 아마 원래 모습이라 한들, 지금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물론 조금 더 ‘나이에 맞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인상만은 그대로일 게 틀림없었다. 어쩌면, 이 딱 잘라말하는 높은 목소리도.
하지만, 지금 비상한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라가 왜 자기를 불러냈는가, 비상한텐 그게 지금 가장 중요했으니까.
“그래서 용건은…”
“바로 말할게요. 안 보이는 패널티. 그 쪽이죠?”
이 말에, 비상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 정곡을 찔러올 줄은 미처 몰라서였다. 하지만 비상은 되물어야 했다. 언제까지고 숨이 막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까.
“누구한테 들으셨나요?”
“딱히 들은 건 아니에요. 그냥 짐작일 뿐이지만…패널티를 받았다는, 그 현이란 아이랑 가장 자주 있지 않나요?”
그 말을 듣고서야, 비상은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패널티를 받은 당사자라면, 당연히 ‘안 보이는 패널티’의 존재도, 다른 팀에 그런 존재가 있단 것도 둘 다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런 생각에 다다르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눈치가 좀 너무 빠르긴 했지만.
“맞아요. 나중에 탐정하셔도 되겠네요.”
“그거 놀리는 거 아니에요?”
“…그건 그렇고, 그게 용건인가요?”
“할 말이 있어서요.”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거죠?”
거기까지 묻자, 아까 눈길을 돌리고 있던 나라는 다시 비상을 똑바로 쳐다봤다. 물론 지금 둘의 키차이는 상당히 벌어져 있었지만, 나라는 그것조차 무시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커다란 한숨과 함께.
“지금 자기가 저보다 잘났다 생각하는 거예요?”
“네?”
너무나 갑작스런 말에, 비상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대체 이 말이 여기서 왜 나온단 말인가. 둘이 서로 마주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그게 무슨 소리죠?”
“아시는 대로, 지금 저는 그 쪽하고 동등하지 않잖아요. 원래 모습이면 모를까. 그런 것 때문에 무시하는 거 아녜요?”
“그럼, 제가 ‘바뀐 모습’이 되면 그 쪽하고 동등해지는 건가요?”
그 말에, 이번엔 나라가 할 말을 잃었다. 뭐라 대답하고 싶지만, 그 말조차 떠올리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날이 어두워지는 지금, 그 정적은 다른 때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이윽고 하늘이 좀 더 어두워지자, 나라는 땅바닥으로 눈길을 떨궜다. 그리고는 자기를 되돌아보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비상한테 입을 떼어놓았다.
“…뭐가 뭔지,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 말 뒤, 나라는 또 한숨을 쉬었다. 비상은 그저 가만히, 점점 어두워지는 공원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나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맨 처음 패널티에 걸렸을 때, ‘왜 나여야 되는데요?’라고 천사란 작자한테 소리쳤어요.”
나라의 말에, 비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심정을 자기도 이해할 수 있어서였다.
“제가 남한테 업신여겨지는 거 정말 싫어하거든요.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에요.”
“그럴 것 같네요.”
“지금 사람 놀리시는 거죠?!”
“그럼 제가 뭐라 대답하면 좋을까요?”
비상이 이렇게 맞받아치자, 나라는 다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런 말과 함께, 또 비상한테서 눈길을 돌렸다.
“그건 그 쪽 말이 맞네요.”
그 뒤, 둘은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점점 더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구름이 전보다 더 빨리 흘러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공원에 하나둘씩 불빛이 늘어갈 때마다, 비상은 시간이 흐르고 있단 걸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젠, 정말 밤이었다.
“그냥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가요?”
잠시 생각하다, 비상은 자기가 먼저 입을 떼어놓기로 했다. 비상 일행도 언제까지나 여기에 있을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라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지, 천천히 비상 쪽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솔직히 저도 모르겠어요, 라 말하면 웃기겠죠?”
비상이 고개를 젓자, 나라는 조금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가만히 비상을 여기로 불러낸 까닭을 입에 담았다. 나라 말에 따르면, 그냥 그 생각이 들자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는 듯했다. 아무 까닭도 없이 그냥.
“어쩌면 이런 모습이라서 말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가면같은 것처럼.”
그 말과 함께, 나라는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세상에 오만가지 정을 다 뗸 고등학생이라 한들, 이렇게 ‘세상물정은 옛날에 다 안 듯한’ 표정은 짓지 않을 터였다. 비상 또래한테서나 볼 수 있는 그 표정을 지으며, 나라는 다시 입을 뗐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제 원래 모습을 찾으려곤 하지 말아주세요. 민망하거든요.”
“제가 알아볼 수 있을리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어차피 나이만 어려진 건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요?”
비상이 그렇게 말하자, 나라는 마치 비상을 노려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해서든 네 ‘다른 모습’은 알아채주마, 란 의지가 참 또렷이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일단, 나이가 어리게 보인다고 무조건 무시당한다는 생각을 버리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러거나 말거나, 비상은 담담하게 입을 뗐다. 사실, 이 말은 나라와 만난 뒤 죽 하고싶었던 것이었다. 말하는 게 좀 늦어지긴 했지만.
“제가 좀 그런 데 민감해서…”
나라는 그 말을 듣자, 다시 눈길을 돌렸다. 아마 여기에 트라우마나 억압 비슷한 게 있는 듯했다. 물론, 비상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 놀이를 하려 마음먹은 까닭이 있나요?”
“그런 데 까닭도 필요한가요? 솔직히 우스운 얘기긴 하지만, 이렇게 되고 나서도 후회는 안 해요. 정말 이상하죠?”
“그럴 수도 있죠.”
그 뒤, 둘은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자기들은 다른 이한테 어떻게 보일까. 갑자기 비상은 그런 생각을 했다. 아마 자기가 오빠 비슷하게 보이지 않을까. 사실은 ‘어른끼리’ 진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인데.
그런 생각을 하다, 비상은 먼저 입을 떼어놓았다.
“그 쪽 밤은 요즘 어때요?”
“그 쪽이 알 거 아니에요.”
놀이에 관해 묻자, 나라는 퉁명스럽게 말한 뒤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렸다. 하지만 비상은, 이미 은솔한테서 파란 밤이 전보다 더 나아졌단 말을 들은 바 있었다.
“다행이네요.”
“다른 팀한테 그런 말해도 돼요?”
“이건 ‘놀이’기도 하잖아요.”
그런 말과 함께, 비상은 나라를 가만히 쳐다봤다. 나라는 아주 묘한 표정으로, 여전히 비상한테서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그 쪽은 파란 밤이 이기면 뭐 받고싶은 거라도 있나요?”
“저도 모르겠어요.”
가만히 생각하면, 지금 이 둘의 대화는 조금 우스운 것이었다. 적어도 사정을 아는 사람이 이걸 봤다면 그렇게 여길 터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둘은 그냥 머릿속에 있는 걸 아무렇게나 입에 담고 있었다. 적어도 비상은 그랬다.
“괜히 화낸 거 같네요. 미안해요.”
다시 침묵이 지나간 뒤, 이번엔 나라가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로 볼 때, 이번에 한 말은 틀림없이 진실인 것 같았다.
“괜찮아요. 나라 씨가 힘든 건 알고 있으니까요.”
“저도 이렇게까지 당황할 줄은 몰랐어요.”
그 말 뒤, 또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비상은 이제 이 순간이 어색하지 않았다. 둘이 이야기하기엔, 이 정도 침묵이 딱 맞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은솔이한테 들은 거치곤 제대로 된 분이네요.”
“그건 다른 형이거든요.”
다시 나라가 입에 담은 말에 대답하며, 비상은 속으로 강산이 형한테 미안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맞는 말이긴 했지만.
“붉은 밤 쪽엔 미안하지만, 난 어떻게든 이기고 싶어요. 그 쪽은 금빛 밤하고 싸우죠? 만약 맞붙는 일이 있으면 절대 대충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각오하세요.”
나라는 다시 한 번, 비상을 똑바로 보며 그렇게 말했다. 지금 그 모습 때문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비상은 어쩐지 나라가 지금껏 본 것 중에서도 특히 기가 세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사람은 정말, ‘지는 게’ 싫은 것이다.
“그건 저희도 마찬가지죠.”
그 말과 함께, 비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정말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아무리 비상이라 한들, 여기에 오랫동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비상한테는 비상의 경기가 있었던 것이다.
“저, 제가 그 쪽 패널티 모습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나라가 그렇게 묻자, 비상은 그 표정을 가만히 쳐다봤다. 어쩐지 비슷한 말을 아까도 들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어차피 아주 다른 사람도 아니니 쉽지 않을까요? 그 쪽 원래 모습은 잘 모르겠지만.”
“크게 차이는 없어요. 크게는.”
나라는 그 말과 함께,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런 이야기는 역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참고로 뒤이어 한 말에 따르면, 비상보다 한 살 아래인 듯했다. 이 근처 회사에 다니고 있다 말했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난 뒤, 나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나라도 이야기를 끝맺을 생각인 듯했다. 하지만 나라가 일어선 뒤에도, 둘은 잠시 동안 거기 가만히 있었다. 마치 할 말이 남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고 보니 은솔이가 그 쪽하고 만났다 하던데요.”
“너무 늦게 말하셨네요. 사실 그걸 먼저 말하는 게 좋았을 텐데.”
“‘그 애한테 이상한 짓만 해봐요. 절대 가만 안 있을 거니까.”
“전 안 할 테니 걱정 마세요.”
“그럼 다른 사람은 한단 말인가요?!”
비상이 짧게 대답하자, 나라는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걸 보면, 나라는 정말 은솔을 소중히 여기는 듯했다.
“은솔이는 충분히 그런 장난에 견뎌낼 수 있는 애예요.”
“그러니까 무슨 장난이요?!”
“이강산이라고 저희 밤에 유명한 형이 있는데, 그 분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그럼.”
더 이상 나라와 이야기할 수 없겠단 생각이 들자, 비상은 그 말과 함께 자리를 떴다. 화내는 사람을 이렇게 놓고가는 것도 미안한 일이긴 했지만, 비상은 비상 나름의 볼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가만히 생각하면 이건 자기가 아니라 강산이 형 문제였다.
아무튼 형도 뒷일 생각을 잘 안 한다니까.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드디어 공원을 나섰다. 뒤에서 나라가 뭐라 외치는 것 같았지만, 지금 비상한테 그런 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공원을 나서자, 비상은 핸드폰이 진동하는 걸 깨달았다. 얼른 꺼내 화면을 보니, 거기엔 ‘이현’이란 이름이 적혀있었다.
“웬일이니?”
“좀 있다가 경기하니까, 내가 연습 도와줄까?”
여전히 현은 인사고 뭐고 용건부터 시작하는 아이였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비상은 고맙게 느껴졌다.
“그래. 거기에서 만나자.”
마침 오늘은 경기도 없었으므로, 비상은 그렇게 대답했다. 전화를 끊은 뒤, 비상은 자기가 먼저 다른 데로 전화를 걸었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강산이었다.
“진짜?!”
아니나다를까, 비상이 방금 있던 일을 말하자, 강산은 목구멍이 떠나가라 큰소리를 질러댔다. 저 형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비상은 어쩐지 그게 신경쓰였다.
“내가 거짓말을 할 것 같아?”
“왜 쓸데없는 말을 하냐, 넌! 아 진짜…”
“형이 진짜 그랬으니 어쩔 수 없지. 안 그래?”
“이런 젠장…”
그 말과 함께, 강산은 전화를 끊었다. 아마 당황해도 크게 당황한 듯했다. 지금껏 강산이 해온 일을 생각하면, 그 반응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형 일은 형이 알아서 하겠지 뭘.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현과 만나기로 한 건물 앞에 다다랐다. 강산이 형만큼이나, 비상한테도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옥상 문을 열자, 짐작한 대로 현이 먼저 비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원래 모습이라서인지, 곰귀가 달린 후드티를 여전히 눌러쓰고 있었다. 전과 달리 반팔이긴 했지만, 그래도 더워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이렇게 어두운데 안 무서웠어?”
“어둠하고 친하니까 괜찮아.”
비상이 묻자, 현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이 세상에 반팔 후드티란 게 있긴 했단 말인가. 방금 현이 한 대답만큼이나, 비상은 그 사실이 놀라웠다.
아무튼 비상이 연습을 위해 물총을 꺼내들자, 갑자기 현이 목소리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것도 평소와 달리, 조금 더 낮은 목소리였다.
“뭐하는 거니?”
“원래 모습으로도 낮은 목소리가 나는지 보려고.”
비상은 그 말을 듣자, 웃음이 터지려는 걸 겨우 참았다. 하지만 현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지금 현은, 정말로 그게 궁금한 것이다.
“그런 것까진 안 해도 되잖니.”
“그냥 재밌어서.”
“낮은 목소리를 내는 게?”
비상의 말에, 현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마 ‘다른 모습’일 때 목소리가 낮아진 게 무척 신기했던 듯했다. 물론, 지금 모습으로 목소리를 낮게 한다 한들 한계가 있었지만.
하지만 현은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는지, 어떻게든 목소리를 낮게 만들고 있었다. 실제로 현이 내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은 편이었다. 대신 목에 무리가 가서인지, 현은 자꾸만 켁켁대고 있었다. 그게 우습기도 하고 재밌기도 해서, 비상은 연습하려다 말고 한참 현의 그런 모습을 쳐다봤다.
그런 일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비상의 연습은 잘 이뤄지고 있었다. 비상은 물총을 여기저기 쏘며, 물줄기가 잘 반사되는지 살폈다. 다행히 반사엔 별 문제가 없었다. 아마 ‘그 날’도 무리없이 공격할 수 있을 터였다.
“아, 차가워.”
반사된 물이 그 쪽으로 튀었는지, 구석에 있던 현이 그런 소리를 냈다. 물론 여름이니 찬물 좀 튄다고 문제될 건 없었지만, 비상은 그런 현이 신경쓰였다.
“그 쪽으로 튀었니?”
“응.”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현은 자기 무기인 마술봉을 손에 들었다. 아무래도 자기 연습이 하고 싶어진 듯했다. 잠잠하디 이를데없는 옥상에서, 둘은 아무 말 없이 연습에 몰두했다. 잠시동안 옥상에선 뭔가 튕겨나가는 소리, 그리고 물줄기가 뻗어나가는 소리만이 가만히 들리고 있었다.
그 때, 아무 조짐도 없이 갑자기 옥상 쪽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거기엔, 비상이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둘이나 있었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아까 전화한 강산, 그리고 별밤이었다.
“여긴 어떻게 안 거야?”
“현이가 알려주던데?”
강산의 대답을 듣고, 비상은 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의 말에 따르면, 둘만 있으니 심심해서 아까 비상이 연습에 빠져있을 때 불렀다는 듯했다. 물론 비상은 전혀 몰랐던 이야기였다.
“야, 지금 우리가 갑자기 온 건 하나도 안 중요해.”
“형도 갑자기 왔다는 자각은 있어?”
“신발. 저기 아래 보라고, 아래!”
강산의 손가락이 닿는 곳은, 여기보다 한 층쯤 더 낮은 근처 건물 옥상이었다. 대체 거기에 뭐가 있단 말인가. 비상은 어이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랬더니.
“아, 그렇게 된 거였구나.”
“넌 지금 이 상황에서 그 말밖에 안 나오냐?!”
“그럼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화내려면 형 혼자서 화내.”
“이, 이, 이 엘리트 자식이…”
강산이 화내거나 말거나, 비상은 아래쪽을 가만히 쳐다봤다. 거기엔 강산과 별밤만큼이나 짐작치 못한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한 명은 방금 헤어진 나라, 그리고 또 한 명은 나라와 만나게 된 계기이자 파란 밤 팀원인 은솔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시간에 둘이 저기에 있단 건, 연습하러 왔단 걸 뜻했다. 여기 있는 비상 일행처럼.
“그건 그렇고, 우연이야?”
“나한테 말하지 마. 이거 내 탓 아니니까. 절대로.”
질색하며 그렇게 대답하는 강산을 보자, 비상은 어쩐지 상황을 알 것 같았다. 저 둘은 아마, 여기로 올 때 우연히 마추쳤을 터였다. 그렇지 않으면 저 형이 저렇게까지 정색할 리가 없었다.
은솔도 비상 일행을 알아챘는지, 위를 보고는 손을 크게 흔들었다. 하지만 같이 있는 나라는 기분이라도 잡쳤는지, 아예 비상 일행을 등지고 있었다. 아까 비상과 나눈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무리도 아니었다.
그걸 알아챘는지, 강산은 저 너머에 들릴 만큼 큰 소리로 투덜대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왜 이렇게 째째해?”
나라는 그 말을 들었는지, 잠깐 몸을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구석으로 가서는, 뭔가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걸 ‘펼친’ 다음, 뭐라고 크게 쓰기 시작했다. 언뜻 보기에, 그건 스케치북인 것 같았다.
“뭐하는 거야?”
강산이 궁금해하거나 말거나, 나라는 뭔가 다 쓴 다음 스케치북을 가지고 비상 일행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 스케치북을 크게 들어보였다. 마치 이거나 읽고 떨어지라는 것처럼.
-너나 잘하세요.
스케치북엔 틀림없이 그런 말이 참 크게 적혀있었다. 경기와 관련이 있을 땐 멀리 있는 것도 또렷하게 보이게 되는 것 때문인지, 날이 어두운데도 스케치북은 아주 똑똑히 잘 보였다. 물론, 거기 적혀있는 글자도.
“이게 뭐야?!”
“뭐긴 뭐야, 형. 열받은 글씨체네.”
“신발, 그걸 물었냐?!”
나라가 여전히 들고 있는 스케치북을 보며, 강산은 이를 갈았다. 그 옆에 있는 별밤은 자기 일이 아니라서인지 난간에 몸을 기댄 채 킬킬대고 있었다.
“뭐 어때. 요즘 본 만화 헤로인 같은데?”
“저딴 건 영화로 나와도 열받는 거야. 이런 젠장.”
강산이 그렇게 이를 갈거나 말거나, 연습은 이어졌다. 강산이나 나라나 둘 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지, 당분간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특히 나라는 정말 화가 난 것 같았는데, 갖고있는 핀을 말 그대로 아무렇게나 던지기 시작했다. 은솔이 옆에서 ‘언니, 진정해!’라 외쳤지만, 정말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나라가 핀을 써서 사격놀이를 하는 와중, 은솔은 ‘오빠들이 이해하세요’란 말을 크게 써서 보여줬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했다. 이걸 알아챈 나라가 목청껏 이렇게 외치며 달려왔던 것이다.
“넌 누구 편인데?!”
“어, 언니. 진정…끄악!”
비상 일행은, 나라한테 실시간으로 목이 졸리는 은솔을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다 똑같구나’란 생각과 함께. 적어도 비상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렇게 떠들썩하게 훈련하고 보니, 어느덧 정말로 밤이 깊어있었다. 더 연습할 수 없겠단 생각이 들자, 비상은 아래쪽을 보며 말을 걸었다. 들릴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먼저 가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나라는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그렇게 적은 스케치북을 들어보였다. 너희들 같은 놈한테 할 말은 없다, 란 투였다. 스케치북으로 의사소통하고 있긴 했지만.
“언니도 오빠들 싫지 않잖아. 이왕하는 거 다음에 둘이서 만날 땐 무릎베개 한 번 해달라고 말씀드려…아야!”
은솔은 또 괜한 소리를 하다가, 나라한테 주먹으로 머리를 한 대 맞곤 울상짓고 있었다. 너도 참 안됐구나. 비상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나라는 이 쪽을 노려보며 크게 소리쳤다.
“내가 그런 걸 왜 하니?”
하지만 그 눈을 부라리는 모습과 달리, 표정은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아마 아주 싫진 않지만, 그걸 긍정하는 건 더 싫은 듯했다. 저 사람은 정말 자존심이 강한 것이다. 저렇게 솔직하지 못할 만큼.
“은솔인가 뭔가, 쟤가 나한테 전화만 안 걸었으면…”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가게 되자, 강산은 가장 먼저 그렇게 투덜댔다. 이를 볼 때, 강산은 모든 걸 다 알고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건 형 잘못이지 뭘.”
“뭐가 어쩌구저째?!”
비상이 한마디 던지자, 강산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아마 비상의 말이 퍽이나 듣기 싫었던 듯했다.
“저 사람은 무슨 고집이 그렇게 세냐? 어유, 아주 그냥…”
“형도 만만치 않잖아.”
“다시 한 번 같은 말해봐. 이 자식아. 얼굴 좀 반반하다고…”
비상의 대답에 정말 열받았는지, 강산은 또 비상의 멱살을 잡았다. 옆에서 그걸 보는 별밤은 자기 일이 아니라서인지, ‘비상이도 표정 하나 안 바뀌는 게 참 신기하다니까’라며 킬킬댔다. 현은 그게 뭐가 재밌는지, 그런 둘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오자, 비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메시지가 하나 와있단 걸 깨달았다. 얼른 보니, 거기엔 아까보다 더 생각지 못한 사람 이름이 있었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의영이 형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그걸 보자마자, 비상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의영이 형과는 전화로 직접 얘기하고 싶었다. 연장자 중에서도 가장 연장자에 가까운 사람이니, 메시지로만 연락하는 게 괜히 꺼려져서였다.
“내일, 시간 있으면 같이 얘기라도 안 할래?”
갑작스러운 이야기이긴 했지만, 비상이 그걸 거절할 리는 없었다. 그러니, 할 대답 역시 이미 정해져 있었다.
“언제든지요.”
“그래, 그럼 내일 보자.”
전화를 끊고 나서, 비상은 홀로 선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요즘엔 생각지도 못한 사람하고 만날 때가 많은 것 같은데. 어쩌면 지금 내가 그런 흐름 속에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파랑이 형 생일이 아마 조만간이었지.
그런 생각을 하며, 비상은 씻은 뒤 침대에 누웠다. 어쩐지 바쁘게 흘러간 것 같은 오늘도, 이제 천천히 끝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