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이상한 기적 – 03/11월 26일의 진전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지 어느덧 사흘째가 되어있었다.
11월 26일, 강산은 여전히 머리를 싸맨 채 소파에 앉아있었다. 물론 옆에 앉아있는 건 그 여자애였다. 여자애는 소파 구석에 앉은 채, 이틀 전처럼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제대로 된 얘길 나눠봤을 리도 없었다.
진짜 어떡하냐, 이거?
강산은 정말로, 이러다가 한 마디도 못 나누면 어쩌지, 란 생각에 앞길이 막막해졌다. 분명 저 여자애한테도(가정 문제를 빼고) 뭔가 까닭이 있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강산이 직접 그걸 물어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어색해지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이런 상황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형을 만나러 공원으로 가는 일이었다. 일단 형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는 일이니, 오늘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것이다.
제발 부탁이니 어제보다 더 나아지기를.
속으로 그렇게 빌며, 강산은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여자애한테 다녀오겠단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 때도, 여자애는 그저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형을 만나러 공원에 다다른 순간, 강산은 몸이 딱딱하게 굳는 걸 느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기 때문이었다.
저 미친 형이, 멀쩡한 머리를 갑자기 양갈래로 묶고 나타난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강산은 도무지 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안 그래도 자기 머리로는 생각지도 못할 대범함을 보이는 인물이긴 하지만, 저런 짓까지 할 만큼 돌았다고 여긴 적은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강산의 형은 돌았다기보다 ‘닮고 싶은’ 인물이었다. 그 쓸데없이 시원시원한 성격과 자신감있는 모습 때문에, 항상 강산은 형한테 열등감을 느껴온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왜 저런단 말인가.
“이, 이 인간이, 이게 뭐하는 짓거리야?!”
“뭘 뭐하는 짓이야. 형한테 말 참 곱게 쓴다, 너?”
“아니, 댁이 지금 그런 모습으로 그딴 말이 나와?”
이젠 기가 차단 눈빛으로 강산이 자길 노려봤지만, 형이란 작자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이럴 때도 당당하기 이를데없는 저 망할 인간이, 강산은 이제 존경스러워질 지경이었다.
“무슨 욕망이라도 숨겼던 거야? 안 그러면 미치지 않고서야…”
“그래. 안 미쳤다. 웃자고 하는 거야. 그냥.”
“어?!”
강산이 입까지 크게 벌리자, 형은 우습다는 듯 혼자 킬킬대기 시작했다. 분명 모습만 보면 이젠 자기가 연상일 텐데, 강산은 여전히 이 형한테 놀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작정하고 미친 짓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냐? 실제로 바라는 모습이 이렇지 않든.”
“아니 그러니까, 형 진짜 미쳤어? 왜 사서 희한한 짓을 해?!”
“이런 상황이 아니면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볼 수도 없잖냐. 방 한 번 치워보면 느낌이 다른 거 모르냐? 이런 모습으로만 느낄 수 있는 세상이 있을 테니, 한 번 느껴보고 자기도 새롭게 하겠단 말이지.”
“그런 걸 미쳤다고 말하는 건 몰라, 이 사람아?”
솔직히, 강산은 이제 정말 이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 생각했다. 자기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저런 생각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것이다. 애초에 배포가 좀 큰 인물이긴 했지만, 이 정도로 막나가는 사람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술자리에서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기가 다 계산할 때가 많다고 들었는데, 정신머리까지 그럴 줄이야.
“형, 자기가 지금 진짜 웃긴 건 알지? 요즘 중학생도 그렇겐 안 하거든?”
“그래. 알지. 설마 모르겠냐? 내가 딱히 바라는 모습도 아닌데. 그래도 이번 기회에 자기답지 않은 짓 좀 해보려 그런다. 이 동생아.”
“아무튼, 나 참…”
이 형다우면서 참 어이없는 말에 기가 찬 나머지, 강산은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아무튼 저 사람 속은 평범한 소시민한텐 참 짐작하기 어려운 거였다. 저래놓고 결혼까지 생각하는 여자친구가 있으니, 세상일도 참 알기 어렵지.
그런데 잠깐, 그 여자친구는 그럼 지금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강산은 이 상황이 어지러워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옆에 앉아있는 형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를 보며 여느 때처럼 킬킬대고 있었다.
저 망할 강심장 같으니라고.
속으로 투덜대며, 강산은 아주 크게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게 어이없어하며 늦은 저녁 집에 들어오니, 여자애는 여전히 소파 구석에 쭈그린 채 앉아있었다. 이번에도 또 이런 식으로 말을 못 거는 게 너무나 묘한 느낌이었기에, 강산은 오늘이야말로 이 애한테 꼭 말을 걸어야겠다 마음먹었다.
일단 이름이라도 한 번 불러볼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강산은 깜짝 놀랐다. 생각해보면, 자긴 얘한테 이름을 물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이다. 이제 만난 지 사흘이 되어가는데 이건 좀 심한 일이었다. 저 앤 대체 강산을 뭐라 생각하고 있을까.
“그, 이, 이름이 뭐지?”
자기답지 않게 더듬으며, 강산은 조심스레 물어봤다. 여자애가 자길 또 무서워하면 어떡하지. 지금은 그런 것조차 자꾸 걱정됐다.
하지만 여자애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강산한테 눈길을 피한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이, 이, 이은솔이요.”
“아, 그렇구나.”
묘한 억양이긴 했지만, 그래도 강산은 이 아이, 은솔이의 이름을 알게 된 게 기뻤다. 이제야 뭔가 저 애랑 의사소통을 했단 보람이 느껴진 것이다. 무척 어설픈 건 맞지만, 그래도 강산은 뭔가 해낸 게 그저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이대로 죽 가면 어색해서 견딜 수 없었을 테니까.
“그, 불편해서 그래?”
다른 이야기도 걸어봐야겠단 생각에, 강산은 다시금 용기를 냈다. 은솔이가 ‘그 일’ 뒤로 죽 소파 구석에 앉아있는 까닭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은솔이는 그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웠는지, 한참 동안 아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용히, 아까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
“제, 제가 결벽증 비슷한 게 있어서…”
“…결벽증?”
강산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은솔이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결벽증은 별 게 아니라, 그냥 남의 집을 불편하게 여기는 증상인 듯했다. 나쁜 뜻은 없지만 그래도 죽 있는 게 꺼려진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강산의 집에서도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저, 저는 솔직히, 이런 모습인 것도 무서워서요.”
“아, 그건 원래부터 그러리라…잠깐, 설마 그거 때문이야? 다른 집안 피가 섞였다고?”
“네. 자기 모습 자체가 너무 불편하게 느껴져서. 나쁜 뜻은 없는데…”
여기까지 듣고서야, 강산은 은솔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하기야, 다른 것도 아닌 여자애라면 그런 게 힘들게 느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여긴 안 그래도 낯선 곳이니까.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자긴 뭘 하면 좋을까.
잠깐 생각해보긴 했지만, 강산 입장에선 뭔가 딱히 해줄 게 없었다. 그나마 하나 꼽자면, 이 앨 좀 편하게 지내게 해 줄 수 있으리란 거였다. 아무래도 강산이 이 아이, 은솔보다 나이가 많으니, 그 정도 배려는 해 줄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한 번에 낯선 아이를 편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은 강산 생각에 딱 하나였다.
“그, 은솔아, 나한테 말 놓을 수 있겠어?”
“네, 네?”
“어차피 지금은 형이니까 반말해도 돼. 이름도 막 불러. 그럼 좀 나을지도 모르니까.”
“하, 하지만…”
강산의 짐작대로, 은솔이는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심지어 아까와 달리 고개조차 들고 있었다. 그렇게 자기 말이 충격이었던가. 강산은 속으로 민망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은솔이는 이내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가, 강산아.”
“그래, 그렇게 부르란 말이야. 괜찮대도.”
은솔이가 민망한 듯 고개를 다시 숙이자, 강산은 될 수 있는 대로 차분하게 그리 대답해주었다.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이렇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뿐이었다. 그게 이 애한테 어떻게 받아들여질진 모르겠지만, 강산 머릿속에 있는 건 이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은솔아, 너 혹시 형 방에서 자는 것도 불편했니?”
“아, 네…응. 조금.”
강산이 혹시나하는 생각에 이렇게 묻자, 은솔이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낯선 곳이 어려운 애한테, ‘낯선 느낌’이 드는 방은 더더욱 무서웠으리라. 그렇다면, 오히려 ‘보통 집’과 마찬가지인 거실에서 자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거실엔 만약을 대비해 장판도 깔려있으니까.
“그럼, 여기에 이불 좀 깔아줄까?”
강산의 말에, 은솔이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생각이 맞았단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강산은 얼른 이부자리를 들고 온 뒤 장판을 틀었다.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을 뿐더러, 이 애도 추울 게 틀림없으리라 여겨서였다. 형 방에 장판 하나 없는 건 잘 알고 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렇게 채비를 해준 뒤, 강산은 자기도 자려 방으로 들어갔다. 두세 시간은 잤을까, 강산은 어두운 밤중에 갑자기 눈이 뜨이는 걸 느꼈다. 아무래도 목이 말라서 그런 것 같기에, 강산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에서 물을 마시다 문득 거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저기서 은솔이가 잔다는 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잘 자고 있는 건가.
거실로 다가가니, 은솔이는 이불 속에서 고개만 내민 채 새근새근 잠들어있었다. 장판 안이 따뜻해서인지, 무척 포근해보이는 표정이었다. 지금 강산보다 더 나이가 있을 겉모습과 다르게, 아무리 봐도 무척 순수하기 짝이 없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분명 원래 모습이었다면 이런 느낌이 무척 잘 어울렸을 터였다. 강산은 그 모습을 전혀 모르지만.
아무튼 얘도 참 희한한 일에 말려들었다니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강산은 다시 자러 방으로 들어갔다. 고즈넉한 달빛만이, 강산이 등진 거실을 가만히 비춰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