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늦은 저녁.
“이런 젠장. 나보고 어쩌라고. 엉?!”
강산은 남들이 보거나 말거나(사실 아무도 안 보지만), 머리를 쥐어싼 채 우스운 모습으로 침대 위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몰라서였다.
여자애는 형과 입장이 바뀐 탓인지, 정말 형처럼 회사로 나가버렸다. 과연 괜찮을지 무척 걱정되는 일이긴 하지만, 지금 자기가 어떻게 해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저 애가 형 회사에서 적응할 수 있을지부터 자꾸만 신경쓰였지만, 사실 강산은 자기 앞길 생각만으로도 눈앞이 깜깜할 지경이었다.
솔직히 강산은, 이 일을 혼자 끌어안을 자신이 없었다. 이 상황은 자기가 견딜 수 있는 한계를 일찌감치 넘어섰던 것이다. 물론 당사자인 형한테 이걸 털어놓을 생각은 이만큼도 없었다. 괜히 자존심만 상할 뿐더러, 어쩐지 열받았으니까.
그렇다면, 답은 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바 있는 자기보다 잘난 동생밖에 없었다.
“야, 비상이 너냐?”
결국 자기가 아는 동생한테 전화를 건 뒤, 강산은 지금껏 있었던 일을 줄줄 털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정신이 날아가서인지, 강산의 말은 자기가 생각해도 횡설수설의 극치였다. 솔직히 자기가 들어도 상황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이 상황에서 비롯된 불만을 마구 털어놓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말하는 사람조차 자기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듣는 사람은 어떻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강산은 자기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아무튼 이렇게 됐다고. 젠장. 비상아. 이럴 땐 어쩌면 좋겠냐?”
“좀 진정되면 전화해. 이 형아. 그럼 끊는다.”
“야, 잠깐만. 비…진짜 끊냐?! 윤비상 이 개자식!”
결국 애꿎은 화를 아는 동생한테 내뱉은 뒤(심지어 그 아는 동생은 듣지조차 못하지만), 강산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세게 긁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다고 뭐가 좀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단지 이러지 못하면 정말로 어떻게 될 것만 같아서였다.
그 때였다.
덜컹.
“뭐, 뭐야. 벌써 왔냐?”
현관에서 누가 문을 따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강산은 몸을 움찔했다. 부모님은 맞벌이라 늦게 오니, 지금 이 시간, 즉 저녁 여섯 시에 들어오는 사람은 안 봐도 뻔했다. 일단 나가야겠단 생각에, 강산은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갔다. 짐작대로 추레하게 양복을 걸쳐입은 채 묘한 표정을 한 여자애가 눈앞에 있었다.
저런 몰골론 양복이 안 어울린다니까. 나 참.
강산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비슷한 느낌을 지닌 형을 한 명 알고 있었지만, 그 형은 적어도 어느 정도 다부진 인상이었다. 얘처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진 않았던 것이다. 일단 애도 지금은 어른인데, 강산은 자꾸만 못미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너, 괘, 괜찮, 냐?”
강산이 더듬어가며 묻자, 여자애는 잠깐 몸을 움찔하더니,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아무리 봐도 그럴 리는 없었다. 여기서 더 캐묻는다 한들, 여자애가 대답해줄 리는 없었지만.
“일단 뭐라도 먹자. 너도 어차피 안 먹었을…”
일단 생각나는 걸 입에 담다가, 강산은 순간 움칫했다. 그러고 보니, 강산은 이 시간에 뭘 먹으려고 마련해놓는 일이 드물었던 것이다. 매번 혼자 먹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라면이라면 있었지만, 오늘 사실상 처음 보는 애한테 그런 걸 해주겠다는 건 어쩐지 좀 미안하게 느껴졌다.
이 바보같은 놈. 혼자 자취하던 버릇이 이렇게 나오다니.
사정상 두 달 전부터 집에 다시 돌아오게 된 강산은, 결국 또 속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집에 있는 라면이라도 끓여주는 거였지만.
“자, 일로 와.”
겨우겨우 라면을 끓인 뒤(특별히 계란도 집어넣었다), 강산은 조심스레 여자애를 불렀다. 여자애는 강산이 무섭기라도 한지, 지금 모습에 맞지 않게 조심스런 모습으로 자기한테 다가왔다. 그거야 중학생 여자애 눈으로 보면, 보통 성인남성보다는 몸집이 큰 강산이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기 모습이 어떻든간에.
그래도 자기보다 나이도 있어보이는 남자가 저러고 오는 걸 보고 있으니, 강산은 뭐라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웃을 생각은 이만큼도 없었다. 안 그래도 힘들어하는 얘한테 그런 모습을 보일 순 없지 않은가.
어쨌든 여자애는 자리에 앉은 뒤, 조심스레 젓가락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잠시 뒤, 여자애는 허겁지겁 라면을 먹다 말고 켁켁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라면이 매워서인 것 같았다.
“그, 너, 매운 거 못 먹니?”
이 말에 기침하다 말고 자기를 가만히 보며, 여자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매운 걸 못 먹는지, 눈엔 벌써부터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미, 미안. 내가 좀 맵게 먹어서. 미안하다. 다시 끓여줄까?”
강산이 자기답지 않게 당황하며 말했지만, 여자애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처음 만난 ‘낯선 오빠’한테 그런 걸 시키는 건 많이 미안했던 듯했다. 그래서인지 이젠 김치까지 젓가락으로 집은 뒤, 매운 걸 꾹 참으며 같이 먹으려 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어린애같단 말이야. 겉모습만 보면 일단 형이라 해도 틀림없는 사람인데.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며, 강산은 속이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맛봤다. 이 애의 원래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자꾸만 그게 ‘상상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여자애는, 라면을 먹으면서도 자꾸 자기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마치 화났는지 어떤지를 알아보려는 것처럼.
내가 그렇게 무서운 놈처럼 보이나.
사실 여자애의 행동은, 그 나이 또래 여자애라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그중에서도 특히 앳된 느낌이긴 했지만, 아무튼 특별하게 보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여자애가 지금 지닌 그 모습이 그 행동을 ‘우습게’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여자애를 직접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강산 눈엔 더더욱 그렇게 보였다.
이 애랑 앞으로 잘 지낼 수 있을까.
강산은 점점 더 눈앞이 새까매지는 걸 느끼며, 자기 눈앞에 있는 라면을 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