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11월 23일 아침에 이강산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평소처럼 강의시간에 맞추려 일찍 일어난 뒤 아침을 먹으러 부엌으로 나오자,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형 자리에 앉아있어서였다.
대체 저 사람은 어디서 굴러들어온 누구야?!
당연히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막상 식탁에 같이 앉은 부모님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강산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을 걸었다.
“강산이 넌 형한테 인사도 안 하니? 이제 일어나 놓고선.”
“…누구라구요?”
제아무리 부모님 앞에선 안 투덜대려 애쓰는 강산이라 한들, 이 땐 정말이지 이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지금 강산의 엄마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남자한테 ‘형’이라 부르라 말하는 것이다. 마치 자기가 낳은 아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강산은 아무리 봐도 저 사람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당연히 자기가 ‘형’이라 여긴 적도 없었다. 그거야 겉모습만 보면 ‘원래’ 있던 형과 비슷한 나잇대로 보였지만, 아무튼 강산한테 저 사람은 생판 남남이었고, 저기에 앉아있는 게 그저 이상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강산은 속으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일단, 강산한텐 정말로 형이 있었다. 자기보다 두 살 더 많은, 회사에 다니는 형이었다. 그리고 그 형은, 저기 앉아있는 사람과 틀림없이 인상이 달랐다. 애초에 자기 형은, 저 사람만큼 ‘못미덥게’ 보이진 않았던 것이다.
강산의 형은 이강철이라 하는데, 이름만큼(한자는 이름과 다르지만) 성격도 시원시원한 데다가 자신감도 넘치고, 웬만한 일은 그냥 웃어넘길 만큼 배포도 큰 인물이었다. 사실 강산 자신도 한 성질하는 데다가 짜증도 잘 내는 성격이었지만, 형과 대보면 그냥 어린애 수준이었다. 애초에 형은 자기처럼 짜증을 안 내고 성질을 안 내도 호탕하게 보이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강산과 달리 여자친구도 있는 듯했다. 물론 강산도 이런 걸 질투하고 싶진 않았지만.
“넌 오늘도 만날 놀고만 있냐? 그러니까 성적이 안 나오지.”
“아무튼 너도 투덜대는 건 바뀌는 게 하나 없다니까.”
“그래서, 여자친구는 좀 사귀어봤냐? 니 성격으로 좀 힘들 건 알지만…”
그래서 강산은 가끔 형한테 이런 말을 들어도 반박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저 말이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형은 저런 말을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저 말들도 핀잔이긴 했지만, 절대 비웃는 말투는 아니었다. 그저 형은 정말 ‘보이는 대로’ 강산에 관해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만약 상남자란 말에 누가 가장 잘 어울리냐 묻는다면, 강산은(분하지만) 망설임없이 형을 댔을 터였다. 물론 자기 배포도 작은 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형은 자기와 달리, 크게 화를 내는 일도 드물고, 성질을 내는 일도 드물었다. 그저 압도적인 자신감으로 자길 마구 눌러올 뿐이었다. 그리고 강산은 항상, 거기에 이기지 못했다.
강산이 형과 마주보면 항상 투덜대곤 했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배겨내질 못할 것만 같았던 것이다. 어차피 형은 몸집이든(자기 몸집도 퍽 컸지만, 형은 몸집 이상으로 기운 자체가 달랐다) 성격이든 자기가 평생 못 이길 상대였다. 그렇다면 고집이라도 부려서 조금이나마 저항이란 걸 해보고 싶었다. 물론 우스운 짓이긴 하지만.
그런데, 그 형과 대보면 이 눈앞에 있는 ‘자칭 형’은 뭐란 말인가.
솔직히 강산의 진짜 형은, 눈앞에 있는 남자만큼 허약해보이진 않았다. 사실 저 남자도 몸집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으며, 그럭저럭 몸도 듬직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강산의 눈엔 눈앞에 있는 남자가 무척 약해보였다. 자기가 이길 수 있을 것같단 말이 아니라, 정말 몸도 마음도 ‘약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인상이 크게 다른데도, 부모님은 자기가 낳은 자식조차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강산은 다른 무엇보다 이게 가장 큰 충격이었다. 형은 당연히 부모님의 자랑거리였고, 누가 봐도 한눈에 눈치챌 만큼 인상 자체가 강한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과 눈앞에 있는 허약한 남자를 착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강산한테는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숨겨온 자식이라면 또 모를까.
아무튼 그런 건 됐고, 대체 이건 어떻게 된 상황이야?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강산은 머리가 핑글핑글 도는 걸 느꼈다. 부모님이 그 형(이라 자칭하는 사람)을 ‘강인’이라 부른 걸 볼 때, 형과 입장은 바뀌었을지 몰라도 존재는 바뀌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대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어떻게 이뤄진 것인지가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대충 밥을 다 먹은 뒤 자리에서 막 일어났을 때였다.
“까, 깜짝아!”
갑자기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하는 바람에, 강산은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왜 하고많은 순간 중 지금 전화가 울린단 말인가. 마치 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튼 강산은 한숨을 한 번 쉰 다음, 이상한 눈빛으로 자길 보는 부모님한테서 얼른 떨어져 전화를 받았다. 받기 직전에야 깨달았지만,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번호였다.
“…누구세요?”
“이야. 그래도 전화는 받네? 모르는 번호라서 안 받을 줄 알았더니.”
“아니, 그러니까…어?”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받다가, 강산은 순간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다. 분명 너무나 귀에 익은 말투인데, 목소리는 전혀 귀에 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말투로 자기한테 말을 걸 사람은 이 세상에 딱 한 명 뿐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말투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강산은 이 ‘여자애’랑 전혀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아무튼 됐고, 근처 공원으로 나와라. 알았지?”
안 그래도 정신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여자애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것조차 강산이 아주 잘 아는 사람과 닮아있었다. 아니, 닮아있는 게 아니라 그대로였다.
강산은 이 낯선 여자애한테서, 저 자리에 앉아있어야 할 형의 분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 할 말만 하고 딱 끊는 사람은, 강산이 아는 사람 중에선 형밖에 없었다. 게다가 말투며 억양이며 형이 틀림없을 만큼 빼닮았다. 물론 여전히 수수께끼는 남아있지만, 오늘 아침에 맞닥뜨린 ‘가짜 형’을 생각하면 그깟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강산은 아침 수업을 빼먹더라도 지금 당장 공원으로 달려가야겠다 마음먹었다.
어차피 지금 이런 상황에서, 수업같은 게 중요할 리 없으니까.
“어유, 지금 왔냐?”
공원으로 달려가자, 벤치엔 정말 처음 보는 여자애가 앉아있었다. 자기보다 키가 작은 건 물론,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기른 여자애였다. 하지만 그 행동거지며 말투, 무엇보다 그 당당하기 이를데없는 자세는 자기가 아는 형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지금 자기보다 키가 작은데도, 마치 애라도 보는 것처럼 강산을 쳐다보고 있는 걸 보면 더 망설일 것도 없는 일이었다.
이 사람은, 틀림없이 자기 형인 것이다.
“…형이지?”
“아무튼 눈치는 빠르다니까. 그래, 아침엔 많이 놀랐냐?”
“이 망할 인간이. 그걸 말이라고…”
그런 말을 하면서도, 강산은 일단 형 옆에 걸터앉았다. 일단 말은 들어야겠다 여긴 것이다. 대체 왜 이런 상황에서까지 당당할 수 있는지는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아무튼 상황을 알아야 뭔가 말할 수 있을 테니까.
“뭐, 그렇겠지.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인지가 궁금하다 이거냐?”
그 말과 함께, 강산의 형은 천천히 입을 떼어놓았다. 강산이 알 리 없는, ‘어젯밤’ 일을 말하기 위해.
강산의 형은 어젯밤, 일이 끝나 집으로 돌아오던 참이었다. 그 때, 형은 공원 벤치에서 누가 흐느껴우는 걸 우연히 보게 되었다 한다. 가로등 불빛으로만 봐도 여린 애란 걸 알 수 있을 만큼, 몸집도 작고 약해보이는 아이였다. 형의 말에 따르면, ‘지금’ 자기만큼 머리카락도 길었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뭐라도 해줘야겠단 생각에, 형은 벤치 옆에 가서 같이 앉아주었다 했다. 앉아서 들은 말에 따르면, 여자애는 집에 있는 아빠가 무서워서 여기에 있는 거라 했다. 만날 술을 먹은 다음엔 주절주절 불만을 늘어놓는 바람에, 집에 있는 것조차 괴로웠다는 것이다.
당연히 강산의 형이라 한들 해줄 일은 없었기에, 이런 식으로 여자애 곁에 있어줄 수밖에 없었다. 형이 들어도 그다지 좋지 못한 사정이었기에, 자기가 뭔가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란 생각도 했던 모양이었다. 그 생각이 이런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듯하지만.
그 때, 갑자기 세상이 멈춘 느낌이 들더니 위에서 뭔가 목소리가 들렸다 했다. 강산의 형은 아마 하늘에서 말을 건 거라 여기는 듯했다. 그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으며, 강산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마 이 형은 자기 마음이 왜 복잡한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하늘은 갑자기 자기한테 이런 말을 걸어왔다 했다. ‘만약 입장을 바꿀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는가’라고. 그 말투가 보통이었다면 형도 이렇게까진 하지 않았으리라 했다. 하지만 형이 마음을 움직인 건, 그 말투가 마치 자길 얕보는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너라 한들, 처음 보는 여자애를 위해 그런 짓까진 못 해주겠지?
그런 느낌이 들자, 형은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이건 무조건 걸어야겠단 생각을 했단 것이다. 물론 여자애를 좀 도와주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하늘한테 ‘이런 존재도 있다’는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했다. 당연히 강산 입장에선 알 수 없는 소리였지만.
“근데 형, 하늘이 뭘 할 일이 없어서 형한테 그러겠어?”
“그렇다면 그런 거야. 나 걱정해줄 건 없다. 전혀 후회 안 하니까.”
“아, 그러세요?”
형이 당당하게 자길 보며 웃어보이는 걸 보자, 강산은 더 말할 의욕도 없어지는 걸 느꼈다. 어차피 저건 형이 판단해서 형이 결정한 것이니, 당연히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라 여겨서였다. 게다가 강산도 어쩐지 그 말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일’을 겪은 뒤로, 강산도 그럴 운명이면 그렇게 된다는 걸 직접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산은 지금 하나 꼭 물어야 하는 게 있었다.
“근데, 형은 안 힘들어?”
“형 못 믿냐?”
이런 말조차 당당하게 하는 걸 보자, 강산은 머리를 싸매고 싶어졌다. 대체 저 형은 어떻게 되어있단 말인가. 잘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그럼 맘대로 하든가. 난 간다.”
그 말을 끝으로, 강산은 얼른 자리를 떴다. 아무튼 저 형은 이상하단 생각을 다시금 하면서.
그렇게 머리를 싸맨 채 집에 돌아오자, 강산은 소파에 누가 앉아있는 걸 알아챘다. 물론 그게 누군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부모님은 맞벌이이니, 남은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네가 그 애라고?”
잠깐 생각하다, 강산은 이윽고 천천히 입을 뗐다. 아무튼 이 일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어서였다. 대체 원래 모습은 어땠을까. 강산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모르지만, 형의 말을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짐작할 수 있을 거 같았다.
“…”
여자애는 아무 말도 없이, 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원래 모습을 상상하기도 미안할 만큼 추레한 느낌이었다. 이걸 보면 이 애가 얼마나 여린 느낌일지는 강산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형이 어떻게든 힘이 되어주고 싶었단 것도 이런 까닭이었을 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이 가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리고 강산은, 솔직히 이런 여자애와 인연이 많진 않았다.
-오히려 그런 애들이 꼭 무서워하곤 하던데.
이런 생각을 하자, 강산은 머리가 다시 아파오는 걸 느꼈다. 게다가 지금 저 애한텐(아마) 자기랑 같은 피가 흐른다는 걸 생각하면 더 마음이 복잡해졌다. 저 애는 지금, 아무리 입장이 바뀌었다 한들 자기 형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렇게 민망하고 어이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떠올린 뒤, 강산은 소파 옆에 가만히 주저앉았다. 잠시 동안 둘은 아무 말도 없었다. 사실 강산 입장에선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거야, 이럴 땐?
그 때.
“죄, 죄송해요.”
“엉?”
무심코 그렇게 대답했다가, 강산은 무척 미안해지는 걸 느꼈다. 이 여자애(지금 이런 말을 써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가 자기한테 그런 말과 함께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그것만 봐도, 강산은 이 여자애 마음이 얼마나 여린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미, 미안. 괜찮아. 뭘 그런 걸 갖고.”
그런 말과 함께 머리라도 쓰다듬어주려 팔을 내밀다, 강산은 순간 멈칫했다. 여자애한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도 그렇지만, ‘성인 남성’의 머리를 쓰다듬는 건 자기한테도 여러 모로 어려운 일이라서였다. 물론 그 모습이 진짜가 아니란 건 강산도 알고 있었다. 그저 자기 마음이 복잡할 뿐이었다.
왜 강산이 팔을 멈췄는지 알기라도 하는 듯, 여자애는 고개를 더 숙였다. 강산도 뭐라 할 말이 없었기에, 잠시동안 다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왜 자기한테 말도 없이 만들어놓냐고. 이 망할 형아.
라고 말할 수도 없으므로, 강산은 혼자 골치만 썩히는 수밖에 없었다. 이 어이없는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관해 어울리지 않는 고민이나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