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뜨락의 소년소녀 – 1. 서로가 서로를 만난 날

세상엔 왜 이렇게 자기 힘으론 어쩔 수도 없는 부조리가 많단 말인가.
그리고 그런 부조리는 왜 이렇게 자기 눈에만 많이 띈단 말인가.

그 날 늦은 낮에, 최준혁은 무척 우울한 표정으로 난생 처음 보는 골목을 담담하게 걷고 있었다. 계절은 3월. 이렇게 따스한 햇살이 골목을 비추고 있는데도, 준혁은 어두운 느낌이었다.
왜 자기가 이렇게 좋은 날씨에 ‘그런 데’에 가야만 한단 말인가. 그것도 낮 네 시라는 한창 좋은 때에.
하지만 준혁은 지금, 어쩔 수 없이 ‘거기’에 가아만 했다. 오늘이 그 낯선 곳에서 지내는 첫번째 날이라서였다. 이건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준혁은 결코, 자기가 좋아서 그리로 가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준혁이 우울한 느낌인 건, 절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준혁은 지금, 자기 모습이 원래와 달라졌단 걸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지만, 그래도 준혁은 ‘지금’ 모습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다른 이들한테 그렇게 비치리란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가장 열받는 건, 어깨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이었다. 항상 머리를 짧게 하고 다니던(당연한 일이지만) 준혁한테, 이런 느낌은 낯설다 못해 걸리적거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원래대로’ 머리를 짧게 하는 건 더 무서웠다. ‘이런 모습’에서 ‘원래 자기’를 느끼는 것만은 죽어도 하기 싫었던 것이다.
게다가 평소와 달리 훨씬 작게 느껴지는 몸집 역시 큰 불만 중 하나였다. 이래뵈도 준혁은 또래(고등학교 1학년) 중에선 몸집이 그럭저럭 있는 편이었고, 적어도 비슷한 체격끼리 싸워서 쉽게 질 일은 없는 남학생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달랐다. 사실 지금 준혁이 가장 분한 건 바로 이거였다.
온몸을 둘러싼 묘한 느낌 역시, 준혁이 이만큼도 바라지 않는 거였다. 왜 자기는 이런 신세여야 하는 걸까. 지금도 억울하기 그지없었지만, 지금 준혁한텐 틀림없이 힘이 없었다. 자긴 입 닥치고 그 ‘집’에 가서, 자기랑 아무 인연이 없던 여자애들 몇 명과 같이 지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열받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여기에 관해 말하려면, 시간을 조금 이전으로 되돌려야 했다.

준혁은 원래, 그리고 지금도, 다른 이와 말하는 걸 무척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말하는 건 물론, 같이 있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혼자 죽 있었으면 좋겠다 바라고 있었으며, 누군가 필요하단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그게 가장 마음편했던 것이다.
게다가 몸집도 그럭저럭 좋았고 성질도 어느 정도 있었기에, 길거리에서 싸움이 붙으면 그냥 넘어가진 않는 성격이었다. 비록 학교에서는 조용히 지내려 했지만, 그건 그냥 시끄럽게 하기 싫어서였다. 성적은 보통이었으며, 그다지 공부에 관심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데 하필, 준혁은 ‘보통 애들’과 다른 입장에 있었다. 이런 말은 아무도 안 믿겠지만, 사실 준혁은 특이한 힘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부류인 ‘밤의 사람들’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준혁의 엄마는 준혁이 어릴 적부터 거기서 간부 비슷한 역할이었기에, 집에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 일이 흔했다. 결국 이 일로 준혁의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준혁의 엄마는 더더욱 집에 안 오는 일이 잦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준혁이 자기 엄마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나마 딱 하나 좋았던 건, 그 엄마란 사람이 집에 드물게 온다는 거였다. 어차피 준혁은 자기한테 신경도 안 쓰는 엄마한테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가끔 와주는 게 훨씬 마음편했던 것이다. 이제 그런 사람은 자기와 남남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중학교 3학년이 다 끝나갈 즈음,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 일이야말로, 준혁이 ‘이런 모습’으로 그 집이란 데에 가야만 하는 까닭이었다.

그 날도 준혁은 학교에서 다른 또래들과 시비가 붙어, 항상 그랬듯 대충 넘기려던 참이었다. 저런 놈들과 싸워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으니 얼른 정리해야겠단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그 날은 놈들이 작정한 듯했다. 특히 준혁과 사이가 안 좋던 또래 한 명이, 대놓고 준혁을 도발한 것이다. 그것도 무척 비웃으며.
-엄마아빠 이혼한 주제에 말도 많네. 이 자식이.
그 말에, 준혁은 자기 머릿속 뭔가 날아가는 걸 느꼈다. 어떻게 해서든 저 놈들을 때려눕혀야만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았다.
결국, 그 날 준혁은 지금껏 살면서 가장 크게 그 자식과 한판 벌이고 말았다. 자기도 정도를 지켜야 한단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저 놈을 가만둘 수 없었던 것이다. 뒤에 무슨 소리를 듣는다 한들, 준혁은 이제 아무 상관이 없었다. 오직 저 놈만 때려부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물론 그렇게 싸움판을 벌여놓고 일이 잘 풀릴 리 없었다. 준혁의 엄마는 이 일로 학교에 불려온 뒤, 아무 말도 없이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뒤에 돌아온 준혁한테 지금껏 없었을 만큼 크게 꾸지람했다. 물론 내용은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부모한테 부끄러운 자식’이라는 말이 그 꾸지람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 날, 준혁은 그 말마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이럴 때나 나타나서 부모노릇하려는 것부터 열받았기 때문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준혁은 크게 대들고 있었다. 왜 이럴 때만 그런 소리를 하냐고. 자식이나 제대로 돌보며 그런 말을 하라고.
그리고 그 말 때문에, 준혁은 이런 모습이 되고 말았다. 더 이상 큰일을 내지 못하도록, 자기 엄마가 자길 이렇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자기 엄마만 풀 수 있는’ 방법으로.
게다가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고등학생이 된 준혁은, 어쩔 수 없이 ‘밤의 사람들’의 규칙에 따라 그 ‘집’이란 곳으로 가야만 했다. ‘밤의 사람들’한테는 청소년기에 들어선 아이들이 얼마동안 한 집에서 지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애들이 얼마 없다 한들, 준혁한테는 그저 괴로운 일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간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이건 ‘규칙’이니까.
“젠장, 젠장, 젠장…”
이런 부조리한 상황에 열받은 나머지, 준혁은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대고 있었다. 평소보다 더 높은 목소리가, 지금 자기 상황이 어떤지를 똑똑히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운명도 무심하지, 준혁은 자기가 그 ‘집’이란 데에 다다랐단 걸 깨달았다. 길을 안 헤매는 자기 체질을 원망하며, 준혁은 천천히 그 대문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준혁은 적혀있는 종이에 있는 대로, 가정집 2층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자기가 듣기로, 여기엔 여자애들만 사는 듯했다. 규칙에 따르면 이러한 ‘집’은 남녀로 나뉘어있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사실, 준혁은 누구랑 같이 지낸다 한들 그다지 기분좋진 않았다. 하지만 둘 중 뭘 고를 거냐 묻는다면, 틀림없이 남자 쪽을 고를 터였다. 자기가 남자일 뿐더러, 적어도 여기보단 나으리라 생각해서였다. 이런 데서 자기가 얼마동안 죽 지낸다는 건 준혁한테 굴욕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 누구세요?”
그런 생각으로 안에 들어가자, 어떤 여자애가 준혁을 보고 수상쩍단 표정을 지었다. 언뜻 보기에 중학생인 것 같았는데, 자기보다 어려보이는데도 묘하게 기가 센 느낌이었다. 이런 여자애를 대하기 껄끄러워하는 편이라서, 준혁은 자기 인상이 묘하게 구겨지는 걸 느꼈다.
“혹시 준혁이 오빠란 사람이에요?”
자기가 대답하지 않자, 여자애는 따지듯 그렇게 물었다. 그 말이 열받기도 해서, 준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쯤이면 저 애도 사정을 다 들었으리라. 저 애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할지란 걸 짐작하기만 해도, 준혁은 머리에 피가 몰리는 걸 느꼈다.
어쨌든 모른 척하고 거실 쪽으로 들어가자, 생각보다 훨씬 ‘보통 집’처럼 보이는 풍경이 펼쳐져있었다. 별 것도 없는 거실을 가만히 둘러보다, 준혁은 소파 옆에 어떤 여자애가 미역마냥 늘어져있는 걸 보게 됐다. 방금 전 여자애랑 달리, 또래보다 조금 몸집이 작아보이는 게 인상에 남았다.
그래서, 쟨 뭐지?
가면 갈수록 저게 신경쓰이는 준혁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안쪽으로 들어가야 자기가 잘 방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걸어가려던 때, 갑자기 안쪽 방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데서 들릴 리 없다 생각했던 남자 목소리였다.
“그 분 왔어?”
맨 처음, 준혁은 머리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 정리하러 온 대학생 형인가? 그런 생각으로 고개를 들자, 눈앞엔 정말 20대 중반쯤 되는 남성이 서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준혁은 거기서 위화감을 느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사실이 다를 수도 있단 생각을 한 것이다.
그 때, 눈앞에 있던 남성이 대뜸 자기한테 말을 걸어왔다. 묘하게 망설이는 듯한, 어딘가 어색한 말투였다.
“아, 형이에요?”
“…어?”
이 말에, 준혁은 자기 몸이 딱딱하게 굳는 걸 느꼈다.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어서였다. 대체 이건 어떻게 된 일일까. 머리가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 성인남성은 마치 여기 있는 중학생 여자애처럼, 잠시 준혁을 빤히 쳐다봤다. 이 이상 어떻게 다가가면 좋을지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물론 그건 준혁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그런 말까지 들었는데, 쉽게 다가갈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때, 남성의 표정이 뭔가 결의에 찬 것으로 바뀌었다. 준혁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사이, 남자는 천천히 입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사, 사실 저도 이 모습이 진짜가 아니에요. 그, 형처럼요.”
이 말을 듣자, 준혁은 올 것이 왔구나, 란 생각 이전에 머릿속이 새까매지는 것만 같았다. 이건 대체 무슨 악몽같은 소리란 말인가. 차라리 이게 꿈이라면 지금보단 훨씬 나았을 터였다. 자긴 물론, 눈앞에 있는 ‘쟤’한테도.
남성은 일단, 자기가 대체 누구인지에 관해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기도 여기 있는 중학생 여자애들과 마찬가지이며, 이름은 최하나라 하는 듯했다. 자기가 중학교 1학년이 되었을 즈음, 멀찍이 떨어진 여기에 버려지다시피한 듯했다. 또한 이 모습은 자기가 아니라 다른 이의 모습인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지금은 일단 ‘어른’으로서, ‘밤의 사람들’을 돕는 일을 가끔 하는 듯했다.
하지만, 준혁의 머릿속엔 그러한 말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알아듣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준혁은 ‘밤의 사람들’과 마음 속에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자기는 저 이들과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아서였다. 그리고 지금, 준혁은 그걸 확신했다. 대체 이 동네는 뭐가 어떻게 되어있는 걸까. 아무리 보통 이들과 다르다 한들, 이건 좀 아닌 것 같았다.
과연 이런 데서 자기가 잘 지낼 수 있을까.
준혁은 지금,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