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인류 모두 소녀(억지) / 잡탕라면과 새로운 세상

그렇게 정신을 잃은 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
“우물우물.”
“봄이는 진짜 라면 잘 먹는다. 부러워.”
“에헴.”
준용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초등학교 고학년~중학교 1학년쯤 되는 어린아이들과 대체 왜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녁을 같이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저 으리으리한 크기의 라면과 함께.

이 상황이 갑작스러운 건 준용도 마찬가지였지만, 대체 왜 이렇게 됐는지는 기억이 모호했다. 일단 기억나는 데까지 말하자면, 자기는 갑자기 모습이 바뀐 채 정체불명인 무언가한테 쫓기다 누군가한테 부딪쳐서 정신을 잃었을 터였다. 그 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낯선 집에 낯선 아이들(자매인 것같진 않았으므로 아마 친한 친구사이)이 있었다. 자기를 집에 들여놓은 것도 이 낯선 아이들인 듯했다.
상황이 얼른 정리되지 않아 멍하니 있는 준용한테, 갑자기 여자애들 중 가장 조그만 애가 말을 걸어왔다. 지금 눈앞에서 우물우물대며 라면을 먹고 있는 바로 그 아이였다.
“밥 먹었어?”
물론 먹었을 리가 없었다. 고개를 젓자 잠시 뒤, 이런 상황이 펼쳐졌다.

지금 준용이 앉은 탁자 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냄비엔, 충격과 공포라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잡탕’ 라면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왜 ‘잡탕’이란 말을 썼냐면, 마치 먹을 게 아무것도 없을 때 냉장고에 있는 온갖 먹을거리를 꺼내서 만드는 비빔밥만큼이나 고명이 마구잡이로 들어가있었기 때문이었다. 달걀이나 파는 누구나 라면에 넣곤 하는 것이므로 이상하진 않았다. 콩나물이나 집에 굴러다니는(것으로 보이는) 햄도 뭐 그렇다고 넘어갈 수 있었다. 김, 가래떡, 만두. 호화로운 라면이라면 문제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고명이 몽땅 한 냄비에 들어가있는 데다가(6인분이라곤 해도), 이밖에도 반숙계란 한 알(이미 달걀이 들어가있는데도), 치즈, 아마 명절에 먹다남은 걸로 보이는 불고기, 역시 명절에 먹다남은 걸로 보이는 나물과 동그랑땡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틀림없이 눈앞에 있는 건 라면인데, 무슨 찌개나 전골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원래 라면의 주역인 라면사리가 오히려 겉절이 중의 겉절이인 것만 같았다. 이렇게 들어간 게 많은데도 국물이 줄지 않은 건 신기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아마 이 얘들 사이에선 몸에 밴 일이리라 준용은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상 위에 놓인 건 이게 다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덜어간 그릇 옆엔 여기가 자기 자리란 것처럼 배추김치 및 겉절이가 가만히 놓여있었다. 아이들이 그 김치조각을 젓가락으로 가져다 덜어간 면과 같이 먹고있단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구석엔 라면 및 건더기를 다 먹은 뒤 말아먹기 위해서라 짐작되는 찬밥도 산더미만큼 놓여있었다. 이렇게 건더기가 많아서야 국물이 텁텁하지 않을까 자꾸 신경쓰이는 준용이었지만, 어차피 한창 먹을 나이니까 그런 건 아무 상관없을지도 몰랐다.
사실 이 상황은 가만히 생각하면 우습기 그지없었다. 자기가 이런 모습으로 갑자기 바뀌어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자기가 눈을 뜬 이 알 수 없는 집에서 처음 보는 아이들과 함께 다짜고짜 라면을 먹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배가 고픈 것도 사실이었다. 아까 전 갑자기 알지도 못하는 것한테 쫓기던 탓에 몸에 힘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지금 먹는 라면은 무척 맛있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먹어보지 못한 잡탕이란 건 틀림없었지만.
하지만 몸도 마음도 지친 자기는 둘째치더라도,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 ‘또래’의 아이들이 이렇게 잘 먹으리란 건 짐작치 못했다. 심지어 이 아이들 중 한 명 끼어있는 성인남성조차 저렇게 많이 먹지는 않는데도. 여자애들도 무시하면 안 되겠구나, 라고(이런 상황에서 할 생각인가는 둘째치고) 준용은 속으로 가만히 다짐했다.
그러던 중에도 아이들은 상 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냄비에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냄비 안엔 여전히 수북한 라면사리 및 온갖 건더기들이 뒤범벅된 채 담겨있었다. 준용이 대충 봐도, 이건 다섯 명(자기를 넣으면 여섯 명이겠지만)이 달려들어 먹어도 해치울 수 있을지 어떨지 알 수 없는 양이었다. 어떻게 보면 무식하리만치 많았기에, 적어도 이 나잇대 여자애 다섯 명이 먹을 만한 양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특히 땅꼬마만한 저 봄이란 여자애(가장 먼저 이름을 외웠다)는 저 몸집에 믿기 어려울 만큼 잘 먹었다. 준용이 처음 봤는데도 바로 이름을 외울 만큼은.
그 때, 갑자기 그 아이, 봄이가 뜬금없이 이런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까 떠올랐는데 나 라면에 설탕 넣었다.”
“풉!”
그 말이 나오자, 자기들끼리 잡담하던 아이들은 갑자기 입을 딱 다물고 봄이를 멍하니 쳐다봤다. 시끄럽던 젓가락질 소리마저 그치자, 마치 시간이 멎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준용도 자기가 모르는 사이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지만,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봄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잡탕라면을 끓인 건 저 봄이란 여자애였다.
잠시 가만히 있다가, 이윽고 봄이 옆에 앉아있던 성인남성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서, 설탕?”
“응. 넣음 맛있대.”
“라, 라면에 왜…”
“근데 맛있잖아.”
봄이가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입에 담자, 다들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먹은 걸로만 생각하면 결코 이상한 맛은 아니었다. 남성도 그렇게 여겼는지, 봄이의 말을 듣고 잠깐 가만히 있다가 이런 말을 꺼냈다.
“그, 그런가?”
이 말이 나오자, 아이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젓가락을 집었다. 아마 이 봄이란 여자애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닌 듯했다. 방금 전 일이 없기라도 했던 것처럼, 아이들은 아무 말도 없이 아까처럼 식사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이들이 다시 젓가락을 쥔 지 1분도 안 지나서, 갑자기 봄이가 또 이런 말을 꺼냈다.
“아 맞다. 까먹을 뻔했는데 라면끓일 때 스파이 하나 집어넣었어.”
“어?!”
이 말에 아이들은 또 젓가락질을 딱 멈추고 봄이를 빤히 쳐다봤다. 아이들이 젓가락을 다시 쥔 지 1분도 채 안 지나서였다.
“스파이?”
방금 전 봄이가 잘 먹는 걸 부러워하던 순한 인상의 여자애가 그렇게 물어왔다. 그러고 보니 다른 아이들이 이 아이를 시간이라 불렀던 것 같았다. 그게 이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응, 푸라면 속에 산양라면.”
봄이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젓가락으로 쥐던 면을 후루룩 삼켰다. 가만히 생각하면 정말 그런 것도 같았다. 준용도 아무 생각없이 먹던 라면에서 묘한 맛을 느꼈던 것이다. 아까 설탕이 너무 충격에 가까워서인지, 이번 건 별것도 아니게 느껴졌다.

사실, 지금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라면을 먹고 있었지만 이 상황은 묘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른 한 명 보이지 않았으며(시계는 밤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음), 이제 중학생쯤 된 듯한(맨 처음 눈을 뜬 방에 교복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이 시간에 밥을 먹는 것도 묘했다. 게다가 방금 어른이 없다 말하긴 했지만, 사실 여기엔 딱 한 명 ‘어른’이 있었다. 그것도 이 중학생쯤 되는 아이들 속에선 이상하리만치 눈에 띄는 20대 중반쯤의 성인남성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묘한 건, 그런데도 묘하게 어색하진 않았다는 점이었다. 눈에 띄는, 아니 ‘튀지’ 않을 수 없는 풍경인데도, 지금 이 상황만으로 말하자면 어쩐지 무척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이건 정말로 알 수 없는 점이었다. 대체 이 느낌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는 좀 알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느낌이란 것만은 틀림없었다.

이게 자기가 놓인 ‘새로운 세상’인가.
자기도 그 사이에 끼어 라면을 먹으면서, 준용은 그런 생각을 가만히 하고 있었다. 바로 자기 건너편에 앉은 봄이가 건더기 및 사리가 조금 남은 라면국물에 찬밥을 푹 퍼서 말아먹는 걸 빤히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