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월 1일의 기적 (본편 없는 번외편) – 01. 12월 25일/비현실의 시작 2

그렇게 해서 성진은, 자기 바람과 달리 낯선 곳에 다다라있었다. 저 여자애(일단 그렇다 생각하기로 했다)와 같이 지내려면, 쟤가 사는 집에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과 달리, 저 여자애는 보통 가정집에 살고 있었다.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는 여자애를 보며, 성진도 천천히 그걸 뒤따랐다.
안 그래도 열받는데, 이 계단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성진은 어떻게든 계단 끝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여자애가 열어준 문 안으로 들어가, 겨우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 때였다.
“뭐, 뭐야, 이건?”
여자애가 불을 켜 안이 환히 보이자, 성진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거실에 놓여있는 긴 소파 위로, 셔츠나 바지처럼 ‘누가 입었는지 뻔히 보이는’ 옷들이 마구 널려있었던 것이다. 여기가 보통 사내자식 집이라면 그거야 별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일단 쟤가 뭐하는 애인지는 아는 이상, 성진은 눈이 동그래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너, 청소는 하고 사냐?”
자기도 모르게 성진이 이렇게 물을 만큼, 거실바닥엔 여러가지가 너질러져 있었다. 예를 들자면 손가락으로 세는 것도 벅찬 양말들이나, 뭔가 찍혀있는 종이 여러 장, 그리고 핸드폰 충전기나 동전지갑 같은 것들이었다. 아마 쟨 집에서 제대로 청소도 안 하는 게 틀림없었다. 발을 디디는 것조차 망설여지는 거실바닥을 보며, 성진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일단, 성진은 그걸 좀 제쳐두기로 했다. 사실 성진은 지금껏 저녁을 제대로 먹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뭘 좀 먹지 않고선 잠도 안 올 것 같았다.
“야. 여기 먹을 거 있냐?”
“하, 한솔아인데요.”
성진의 말에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여자애, 솔아는 부엌 쪽으로 다가가 뭔가 찾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아래쪽 상자에서 뭘 꺼내더니, 주전자에 담긴 물을 붓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건 틀림없는 컵라면이었다. 게다가 물조절 하나 제대로 못하는지, 가득 부은 물이 겉포장지에 닿을락말락하는 게 여기서도 다 보였다.
“…넌 만날 컵라면으로 밥을 먹냐?”
자길 난처한 눈빛으로 보고 있는 솔아를 보며, 성진은 골치가 아파오는 걸 느꼈다. 거실을 보면서 느낀 두려움이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혹시나 해서 냉장고를 열어본 순간, 성진의 몸은 또다시 굳어버리고 말았다. 일단 전원은 들어왔지만, 물이 든 페트병 몇 개를 빼곤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성진은 진지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쟨 대체 뭘 먹는 거지? 라면? 설마?
“너, 라면 먹냐?”
잠깐 생각하다, 솔아는 구석에 있는 다른 골판지상자를 가리켰다. 거기엔 아까와 달리 봉지라면이 여러 개 들어가있었다. 사실 성진도 먹는 데 무척 신경쓰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여기있는 얘보단 나을 거 같았다.
결국, 성진은 귀찮은 걸 무릅쓰고 마음을 굳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천만한 쟤한테 자기 위를 맡기느니, 차라리 자기가 요리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비록 라면이긴 하지만.
“너, 여기 가만히 있어.”
그 말을 끝으로, 성진은 현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다가 본 편의점에 들르기 위해서였다.
잠시 뒤.
“나 참, 이런 일을 이런 시간에…”
성진은 달걀과 김치가 든 봉투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적어도 이거라도 있으면 먹는 데 지장은 없으리라 여겨서였다. 일단 전자레인지가 있는 건 봐놨기에, 찬밥 두 개도 같이 올려놓았다. 여기에 파가 있었으면 더 좋겠지만, 그건 일단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예기치 않게 다른 이와 같이 먹을 라면을 한밤중에 끓이는 성진을, 솔아는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마치 요리하는 아빠라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쟨 저렇게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불안하단 말이야.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성진은 드디어 요리를 끝마쳤다. 라면 특유의 냄새가, 안 그래도 배고픈 성진을 더더욱 배고프게 만들고 있었다.
“자, 먹어.”
있던 그릇에 라면을 덜어주자, 솔아는 어린애처럼 신기한 표정으로 라면을 보더니, 이윽고 젓가락을 들어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맵게 끓이지 않았을 텐데, 솔아는 한 입씩 댈 때마다 몇 번이고 호호 분 뒤 입으로 가져가곤 했다. 게다가 김치를 조심스레 얹어먹을 때도, 그게 어디가 매운지 몇 번이고 켁켁대며 먹곤 했다. 그러면서 자꾸만 김치로 젓가락을 가져가는 게 이상하다면 이상했다.
저 사내자식, 지난 2년 동안 어떻게 살아온 걸까.
가면 갈수록 저 솔아란 애가 불안해진 성진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자기 고생길이 훤하단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였다. 이 어벙한 얘가 과연 자길 제대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성진은 아직도 ‘지금’ 자기 모습을 제대로 볼 용기가 없었기에, 더더욱 그게 불안했다.
어쨌든 배고픈 게 해결되자, 성진은 잠깐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물론 솔아한테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지만, 그건 일단 내일로 미룰 참이었다. 안 그래도 몸이 너무 피곤해서, 제정신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뭐야?”
그 때, 성진은 솔아가 거실에 혼자 멀뚱하게 서있단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 표정으로, 성진은 대체 얘가 왜 이러고 있는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솔아는 지금, 자길 어떻게 재워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이불만 내줘. 소파에서 잘 거니까.”
소파에 걸쳐져있던 옷가지를 대충 치우면서, 성진은 그렇게 말했다. 소파에서 자는 건 평소에도 자주 있는 일이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물론 옷은 교복 그대로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다른 옷’을 입을 여유는 없었으니까.
안 그래도 골치가 아팠기에, 성진은 머리아픈 일을 모두 내일로 미룰 생각이었다. 그 내일이 다른 날도 아닌 크리스마스란 건 어떻게 보면 무척 우스운 일이었지만.
그 때였다.
“야, 너 뭐하는 거야?”
가지고 온 이불을 거실바닥에 깔고 있는 솔아를 보며, 성진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자기가 생각했던 건 이런 게 아니라서였다.
하지만, 솔아는 여전히 남한테 말하는 게 서툰 말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추우니까…”
그렇게 말한 뒤 사라지는 솔아를 보며, 성진은 멍해지는 걸 느꼈다. 아마 자기보고 소파가 아니라 여기서 자라는 말인 건 알겠지만, 여전히 말이 참 서툴러서였다.
쟤도 참 사람 귀찮게 만드는 타입이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이불 속으로 들어가자, 전혀 생각지 못한 따스한 기운이 스며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거실바닥에 큰 전기장판이 깔려있었던 걸 떠올리자, 성진은 솔아가 그렇게 말한 까닭을 알 것 같았다.
나도 다른 사람 대하는 게 특기가 아니지만, 쟨 더한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관해 다시 생각하려다, 성진은 자기도 모르게 눈이 감기는 걸 느꼈다. 아마 아까부터 죽 피곤했던 느낌이 이렇게 되돌아오는 듯했다.
그런 생각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성진은 가만히 잠이 들고 말았다.
당연히 지금껏 만나보지 못한 이불의 낯선 느낌이, 잠들기 직전까지 성진의 마음속에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