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설날.
설날이라 하면 대개 가족과 함께 지내는 날. 친척들을 오랜만에 보는 날. 그리고 세뱃돈을 받는 날.
세뱃돈을 받을 수 있는 중요한 날.
하지만 지구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세뱃돈을 받을 수 있는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세상엔 여러 사정을 지닌 아이들이 많으므로, 세뱃돈과 인연이 없는 아이들도 어딘가엔 있는 것이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아이들. 이번엔 갈 수 없게 된 아이들.
오늘 미아네 집에 모인 아이들도 대략 그런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아침부터 삼삼오오 미아네 집 앞에 다다라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설날을 맞아 다른 데로 가는 바람에, 텅 빈 골목을 지키게 된 아이들이.
“너는 이번에 할아버지네 안 가?”
“응. 엄마가 이번엔 일해야 된대.”
“그럼 내년엔 받겠네. 난 앞으로도…”
라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가운데, 드디어 문을 열고 미아가 나타났다. 아이들은 미아가 문을 열자마자, 곧바로 집안에 발을 디디고는 줄을 서서 한 명씩 세배를 하기 시작했다.
“미아야. 새해 복 많이 받아.”
“으, 응.”
아이들이 하나하나씩 모여 아무렇지도 않게 미아 앞에서 절을 하자, 미아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단 표정으로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작년에 한 번 해봐서인지, 아이들은 한복 하나 안 입었는데도 미아 앞에서 세배하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다른 이들 눈으로 보면 일단 20대 중반쯤 되는 성인남성한테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애들이 세배하는 건 그래도 봐줄만한 광경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 아이들이 친구사이란 걸 생각해보면 이 광경은 우습기 짝이 없었다.
물론, 이 친구들이 미아 앞에서 세배를 하는 건 다른 까닭이 아니었다.
“자, 세뱃돈.”
“미아 땡큐!”
여전히 어설픈 자세로 미아가 주머니에서 작은 초콜릿을 하나 꺼내주자,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넙죽 그걸 받아먹었다. 좀 우스울지도 모르지만, 이게 미아와 친구들의 ‘세뱃돈’이었다.
설날이 되면 미아한테 가서 세배를 한다. 그러면 미아가 세뱃돈으로 초콜릿을 준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는 다들 기억하지 못했지만, 이게 겨우 2년만에 만들어진 골목친구들의 새해 습관이었다. 일단 ‘친구사이’이긴 하지만 미아는 일단 어른이며 돈도 있으니까,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미아한테 가서 세배를 했던 것이다. 사실 미아가 줄 수 있는 거라고 한들 편의점에서 파는 천원짜리 조그만 초콜릿일 뿐이었지만, 어차피 좀만 있으면 발렌타인데이이므로 다들 아무렇지 않아하는 눈치였다. 이 아이들한테 발렌타인이란 친구들끼리 좋아하는 초콜릿을 실컷 먹는 날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미아네 집에 모인 아이들이 하나하나씩 초콜릿을 받아갈 때였다.
“미아야!”
아무렇지 않게 문을 벌컥 열고는,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르게 자기네가 큰집이라서 버드내마을에 남아있는 태풍이 들이닥쳤다. 여기서 태풍이라고는 했지만, 물론 이 아이도 미아 또래의 여자애였다. 또래보다 키도 크고 지나치게 밝아서 눈에 띄기 좋은 이 아이는 동생과 함께 얼마 전 버드내마을로 이사온 참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갑자기 찾아온 태풍은, 마침 자리가 빈 미아 앞에서 넙죽 세배를 했다. 그리곤 고개를 들고 나서, 눈을 반짝이며 미아를 보고 이런 말을 꺼냈다.
“미아야. 난 세뱃돈 천만원.”
“…응?”
그 말을 듣자, 미아는 눈조차 동그랗게 뜨지 못한 채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세뱃돈은 작년에 한 번 겪었으므로 이제 대처법을 알지만, 그 말엔 대체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태풍, 그러니까 풍이는 여기로 이사온 뒤 미아한테 이런 말을 할 순간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 듯한 모습이었다. 미아도 그건 알고 있었지만, 이 친구가 설마 이런 마을 꺼내리라곤 전혀 짐작치 못했다.
“처, 천만원…”
여전히 미아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를 기대하는 듯, 풍이는 눈을 한층 더 반짝였다. 다른 아이들도 이런 말을 꺼낸 사람은 처음 봤는지, 무척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런 둘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천만원. 과연 미아는 어떻게 나올까. 이제 미아는 열 명이 넘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난 뒤.
“…자. 처, 천만원.”
잠시 생각하던 미아는, 자기 뒤에 있던 알파벳 초콜릿 한묶음을 살며시 꺼내놓았다. 지금까지 낱개로 주어지던 세뱃돈(용 초콜릿)과 다르게, 이건 몇천원씩 하는 한묶음이었다. 아마 미아 생각엔, 이쯤이면 ‘천만원’이란 말에 걸맞는 세뱃돈이지 않을까, 라 여긴 듯했다.
이걸 보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아 품에서 처음으로 봉투째 초콜릿이 나타났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여전히 미아는 이걸로 될지 어떨지 망설이는 눈빛으로, 마치 뭐라도 살피는 듯 풍이를 가만히 쳐다봤다.
“이, 이거면 어때?”
“이거 내가 먹어도 돼?”
오히려 자기가 이런 반응을 생각지 못한 듯, 풍이는 아까와 달리 조심스런 모습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 풍이는 뭔가 대단한 걸 바라고 그런 말을 꺼낸 게 아니었다. 아마, 정말로 뜬금없이 이런 말을 꺼내면 미아가 어떤 모습을 보일까, 그것만을 기대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미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풍이는 바로 얼굴이 밝아졌다. 그리곤 다른 아이들을 돌아보며, 그 자리에서 곧장 알파벳 초콜릿이 담긴 봉투를 뜯었다.
“그럼 같이 먹자. 다들 초콜릿 먹고 싶지. 그지?”
“응!”
“우리 풍이 진짜 좋은 애다. 설날에 친구들도 챙겨주고.”
그렇게 해서 풍이가 받은 산더미만한 세뱃돈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른 아이들의 입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자기가 혼자 먹으면 될 걸, 풍이는 아무렇지 않게 다른 아이들과 초콜릿을 나눠먹으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런 설날을 보내는 건 우리밖에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미아는 조심스레 방금 자기가 준 세뱃돈 한 알을 손에 쥐었다. 지금은 다른 친구들보다 어른인 자기는 세뱃돈을 주는 입장이지만, 물론 미아도 초콜릿은 무척 좋아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