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

‘보통’ 여자애들 이야기라면.
교실을 보면 언제나 만날 수 있고, 길거리에도, 인터넷에도, 어디든 넘쳐나는,
멋부리기 좋아하고, 떠들기 좋아하고, 때로는 험한 말도 입에 담는,
그런 여자애들 이야기라면 굳이 찾을 것도 없을지 모른다.
그런 애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만약에.
그런 곳에서 눈에 안 띄는 여자애들 이야기라면.
사실 ‘보통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아무튼 흔히 보이는 애들하고 묘하게 틀린 데가 있다면.
그런 아이들의 이야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이런 글을 쓰고 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을, 보통과 거리가 먼 내 이야기,
그리고 ‘우리’ 이야기를 하려고.

세진이 상 앞에 앉은 채, 막 거기까지 공책에 써내려갔을 때였다.
툭툭.
“까, 깜짝아!”
누군가 뭉툭한 걸로 자기 등을 쿡쿡 찌르는 그 묘한 느낌에, 세진은 자기도 모르게 공책을 덮은 뒤 고개를 휙 돌렸다. 지금 자기가 쓰는 이런 말이 남한테 들키면 민망하다는 건 세진 자신도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세진이 뒤를 돌아보자,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누런색 막대기였다. 막대기처럼 보이긴 했지만, 보통 막대기와 달리 세진한테 닿은 뭉툭한 데가 동그랗게 말려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동그랗게 말린 데가 무슨 손처럼 느껴지는 듯한…
“세진아 뭐 해? 비밀일기 써?”
그 천진난만하면서도 뚱한 목소리와 막대기에 적힌 효자손이란 글씨를 보고서야, 세진은 지금 자기를 건드린 게 같이 다니는 친구 중 한 명인 봄이란 걸 알아챘다.
봄이는 여전히 뚱한 표정을 지으면서, 호기심넘치는 눈빛으로 세진을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세진이 식은땀을 흘릴 만큼 긴장하자, 더 이상 이러고 있어도 소용없겠단 생각을 한 듯했다.
“보여주기 싫어?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그 말과 함께, 봄이는 자기가 세진을 쿡쿡 찔렀던 효자손을 거두곤 다시 그걸 등으로 가져갔다. 그리곤 눈을 감은 채, 방금 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옷 속에 효자손을 넣고 살살 긁기 시작했다. 그게 그렇게 기분좋은지, 봄이는 이제 방금 전 일은 다 잊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감은 채 기쁨에 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른 사람 눈엔 ‘조금’ 안 뚱한 표정이라고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아, 시원하다.”
마치 나이든 노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봄이는 세상의 진리라도 깨달은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댔다. 솔직히 말해서 저렇게 조그만 얘가 세상 다 산 것처럼 그러고 있는 건 웃기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세진도 이제 저런 광경을 여러 번 봤기에 그렇게 신기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맨 처음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빤히 쳐다보기만 했지만, 오랜 시간을 거친 세진은 원래 봄이가 저런 성격이란 걸 이제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 땐 저러고 있는 것만큼이나 저렇게 앳된 봄이가 자기와 동갑이란 사실에 더 깜짝 놀랐지만, 이젠 그것도 낯선 느낌이 아니었다.
지금 둘은 같은 방에서 제각기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하고 있었다. 세진은 방금 전까지 공책을 쓰고 있었으며, 봄이는 지금 그러는 것처럼 효자손으로 등을 긁으며 바깥을 가만히 구경하고 있었다. 세진이 이렇게 얼마 전쯤 새로 알게 된 친구들과 어울리는 건 이제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략 1년 전쯤만 해도 이건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맨 처음 어울리게 된 건 무슨 까닭이었더라.
세진이 그런 생각을 하며, 오랜만에 자기 기억을 되짚으려 할 때였다.

“봄이야. 세진아, 둘이 뭐하고 있었…어?”
그런 목소리와 함께, 갑자기 여러 명이 세진과 봄이가 있던 방에 들이닥쳤다. 사실 방금 전 밖에 나갔다 이제 돌아온 것이므로 들이닥쳤다고 하는 건 묘했지만, 세진도 이 친구들이 지금 돌아올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렇게 문이 열리자, 거기엔 세진과 봄이가 같이 어울리는 친구들, 즉 또래 여자애 한 명과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성 한 명이 서있었다. 여자애 중 한 명은 봄이만큼이나 몸집이 작고 앳됐으며(다만 봄이와 달리, 이 친구는 머리카락도 긴 편이었으며 활기찬 모습이었다), 다른 한 명은 어딘지 모르게 솔직하지 못할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아이였다. 활기찬 아이, 즉 시간은 들어오자마자 함박웃음을 짓더니, 셋이 돌아오거나 말거나 여전히 효자손으로 등을 긁던 봄이 쪽으로 다가가 껴안은 뒤 볼을 대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봄이 잘 있었어? 나 없어서 안 외로웠지? 그지?”
“안 외로웠는데 지금 숨막혀 죽겠어.”
“딱 3초만. 아니 1분만. 응?”
한편, 다른 한 명, 즉 말총머리를 한 여자애인 백설은 그런 둘을 동떨어진 데서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자기도 다가가고는 싶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원래 백설은 그렇게 ‘자기도 시간이처럼 누구한테 달라붙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성격이었기에, 지금같은 모습을 보이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사실 원래 성격으로 보면 시간은 물론 봄이와도 아무렇지 않게 어울릴 만큼 어리광쟁이인데, 자기까지 그렇게 굴면 유치하게 보인다고 여기기라도 하는지, 백설은 만날 이런 식으로 일단은 둘과 거리를 두곤 했다.
그리고 그런 셋을, 가운데에 서있는 성인남성, 홍준이 민망하단 듯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가 이럴 때 아무 것도 못 한다는 걸 스스로 민망해하고 있는 것이다. 홍준, 이라기보다 미아가 그럴 건 전혀 없는데도.
미아는 만날 그랬다. 맨 처음 세진과 만났을 때도 그런 느낌이었다. 대략 1년 전. 크리스마스 다음 날 밤에 만났던 아이. 지금 세진이 여기에 있게 해준 아이. 그 때나 지금이나 남 챙기느라 자기는 제대로 돌아보지도 못하는 아이. 지금은 성인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아이, 미아와 만난 게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뭐 사왔어?”
그런 미아를 더 보기 싫어서, 세진은 얼른 말을 걸었다. 미아의 양손엔 검정봉투가 두둑하게 들려있었다. 이걸 보면, 오늘 저녁도 미아가 만드려는 듯했다. 미아도 세진을 보고는, 이제야 마음을 놓았는지 이런 말과 함께 봉투를 가볍게 내밀었다.
“응. 미역국 만드려고.”
“또 비싼 고기 사왔어?”
미아가 끓이는 미역국은 그야 맛있지만, ‘좋은 고기를 써야 더 맛있어진다’는 미아 뜻에 따라 만날 비싼 한우를 집어넣는다는 문제가 있었다. 물론 맛있으면 됐지만(그리고 세진과 친구들은 맛있게 먹지만), 만날 그 돈이 미아 호주머니에서 나온다는 걸 생각하면 세진은 가끔 무척 미안해질 때가 있었다. 물론 미아는 아무 신경쓰지 말라고 웃어주곤 하지만.
그치만 이번에도 맛있겠다.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군침이 나오자, 세진은 다시 한 번 미아한테 미안해지는 걸 느꼈다. 사실 같이 장을 보러 나간 시간 및 백설은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다. 어쩌면 세진보다 다른 아이들이 정말 미아가 바라는 걸 일찍 깨달은 건지도 몰랐다.
“진짜?!”
방금 전까지 시간의 애정공세에 시달리던 봄이는, 미아의 대답을 듣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를 돌아봤다. 세진과 친구들은 모두 미아가 끓이는 특제 미역국을 무척 좋아했지만, 특히 봄이는 자다가도 깰만큼 미역국을 사랑해 마지않았다.
“나 먹어야지. 제일 먼저 먹어야지. 미아 미역국.”
“응. 많이 할게.”
“아 맞다. 내 춤 보여줄까? 토끼모자 쓰고 추는 춤.”
“그건 또 무슨 춤이래?”
봄이가 신난 듯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귀마개 토끼모자를 꺼내들러 가자, 백설이 민망하단 듯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들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진과 친구들이 보내는 나날은 대략 이랬다.
1년 전쯤이라면 생각지도 못했을 나날.
고도제한 탓에 모든 건물이 낮은, 그래서인지 만날 별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이 버드내마을에서, 세진은 이제야 자기 자리가 마련된 듯한 느낌을 맛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