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뒤, 형욱은 여자애를 따라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물론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을 리 없지만, 아무튼 지금은 그저 이러는 수밖에 없단 걸 알기에, 형욱은 여자애를 좇을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어떻게 건물 옥상에서 골목으로 내려왔는지조차 이제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자기 정신이 얼마나 없는지는 이것만으로도 잘 알 수 있었다.
하늘엔 둥근 달이 떠서, 지금이 밤중이란 걸 말해주고 있었다. 여자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조금 빠른 발걸음으로 앞서나가는 중이었다. 그 여자애의 뒷모습을 보면 볼수록, 형욱은 이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없어졌다. 이렇게나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인데도, 뭐라 말할 수 없는 ‘존재감’이 있었던 것이다. 살면서 이런 사람을 처음 만났기에, 형욱은 그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긴 대체 지금 어디로 가는 걸까.
가로등 불빛을 따라 걷는 동안, 형욱은 몇몇 사람들을 스쳐지나갔다. 지금 자기가 우스운 꼴이란 건 대충 짐작할 수 있었는데도, 다른 이들은 형욱을 빤히 바라보긴커녕 마치 ‘없는 것처럼’ 스쳐지나가고 말았다. 자긴 혹시 이 세상에 없는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자, 형욱은 무척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게 너무나 실감나지 않아서였다.
그 때, 갑자기 여자애가 발걸음을 딱 멈췄다. 그게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형욱은 순간 고개를 들고 멍한 표정을 했다.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엔, 마치 카페처럼 보이는 조그만 가게가 있었다.
‘카페처럼 보이는’이라 말한 건, 아마 거기가 카페는 아니리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뭐라 말할 순 없지만, 네모나게 생긴 나무로 된 1층짜리 갈색 건물이었다. 일단 네모낳다고 말은 했지만, 마치 묘하게 비뚤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가로등 불빛으로 비치는 큰 창문으로 볼 때, 굳이 말하자면 이것저것 파는 잡화점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형욱은 그런 가게에 많이 안 가 봤기에 잘 모르지만.
“…달이 머무는 집?”
창문 위에 있는 간판을 보며, 형욱은 자기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렸다. 아무리 자기가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나이라 할지라도, 이 가게는 대체 뭘 하는 덴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여자애는 여기랑 관계가 있는 사람인 걸까? 하지만 여자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고 가게로 곧장 들어갈 뿐이었다.
자기도 들어가야겠지.
결국 속으로 한숨을 쉬고, 형욱은 조심스레 가게로 발을 들여놓았다. 어차피 자긴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어서였다.
가게로 들어가자, 처음 마주한 건 그 안을 환하게 비추는 등불이었다.
형광등이 없는 대신 여기저기 자리한 여러 등불들을 보며, 형욱은 조심스레 안쪽으로 걸어갔다. 짐작대로, 안으로 들어와도 이 가게는 뭘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곳이었다. 일단 여기저기 온갖 잡동사니가 있단 건 알 수 있었지만, 다시 말하자면 알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특히 자주 보인 건, 가게를 뒤덮은 것처럼 보일 만큼 많은 봉제인형이었다. 대개 탁자 위에 얹어도 될 만한 크기였는데, 아무리 봐도 대체 뭘 만든 건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모양새였다. 설마 전부 상상 속 동물들은 아니겠지. 개처럼 생긴 날개달린 짐승 봉제인형을 보며, 형욱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밖에 눈에 띄는 건 손바닥만큼 작은 여러 책들, 그리고 대체 어딜 그린 건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지도였다. 이 밖에도 어디에 쓰는지 짐작할 수 없는 묘한 물건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어서, 이걸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다 갈 듯한 느낌이었다. 용케도 이런 물건들이 여기 다 들어가는구나. 좁지도 않지만 넓지도 않은 가게를 둘러보며, 형욱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하나 틀림없는 게 있다면, 저 너머에 있는 탁자 위엔 김이 새어나오는 코코아가 한 잔 놓여있다는 거였다. 어쩐지 그게 반가워서, 형욱은 얼른 탁자 앞에 앉아 그걸 한모금 들었다. 바로 옆에 있는 카운터에 누군가 있단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어머. 새로 알게 된 애니?”
깜짝 놀란 형욱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 여성을 빤히 보고 있었다. 여자애랑 비슷하거나 조금 나이가 많은 걸로 보이는 성인 여성이었다. 여성은 검은색 긴 생머리를 보기좋게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흰 에이프런을 입은 채 다정한 눈빛으로 여자애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옆에 서 있다니.
일단 카운터가 옆에 있는데도, 형욱은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걸 안 들키려고, 형욱은 얼른 바로 앞에 있는 잔을 다시 들었다.
여자애는 그런 형욱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 바로 앞에 자리잡고는 잔을 손에 들었다. 아마 이 둘은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인 듯했다.
“세나야. 오늘은 피곤하니?”
여성의 말을 듣고서야, 형욱은 이 여자애의 이름이 세나란 걸 깨달았다. 사실 워낙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라서, 이름을 알아야겠단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 애, 혹시?”
“사정이 있어서.”
여성이 거기까지 말을 걸고서야, 여자애, 세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 말투가 얼마나 덤덤했던지, 형욱은 여전히 세나의 마음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름이 뭐니?”
“네? 저, 저요?”
그러던 여성이 갑자기 자기한테 말을 거는 바람에, 형욱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으므로, 일단 사실대로 이름을 댔다.
“최, 최형욱이요.”
“…그래?”
어쩔 수 없이 자기 이름을 대자, 여성은 깜짝 놀랐다. 어쩐지 뭔가 잘못한 것 같아서, 형욱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뭔가 까닭이 있구나. 그지?”
여성도 뭔가 깨달았는지, 세나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세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자, 형욱은 자기가 더 민망해지는 걸 느꼈다. 지금 자기가 어떤 모습으로 비칠지는 대충 알고 있어서였다.
“자, 과자 먹을래?”
그런 형욱이 안쓰럽게 보였던지, 여성은 직접 만든 걸로 보이는 과자를 내왔다. 조그맣긴 하지만 칩이 많이 박힌 초콜릿 쿠키였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형욱은 조심스레 과자를 손에 쥐었다. 등불에 비치는 손이 평소보다 가느다란 걸 보며, 형욱은 다시금 자기 처지가 크게 바뀌었단 걸 깨달았다.
“그런데, 이 앤 오늘 여기서 재울 거니?”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세나를 보며, 형욱은 뭔가 크게 잘못됐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코코아와 과자로 조금 멍해졌던 정신이 다시 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사실, 형욱은 사정상 집에 들어가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밖에서 자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일단 세나의 저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면 걱정할 일은 없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형욱은 자꾸만 묘한 느낌이었다.
“괜찮아. 세나 널 믿어. 난 괜찮아.”
여성의 말을 듣자, 형욱은 점점 더 자신이 없어졌다. 과연 자기 앞날엔 뭐가 기다리고 있는 걸까. 겨우 하루밖에 안 됐는데, 형욱은 자길 둘러싼 환경이 너무나 크게 소리를 내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어쨌든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기에, 형욱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세나를 따라 가게 깊숙한 곳으로 발을 내디뎠다. 아까 둘이 이야기를 나눈 걸로 볼 때, 세나는 여기에서 지내는 듯했다. 도무지 ‘보통 생활’하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 세나이기에, 형욱은 아직도 그게 잘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사실, 아무리 봐도 세나는 ‘보통 이들’과 다른 존재였다.
정말 여기에 사람이 사는 흔적이 있긴 한 걸까.
여전히 반신반의에 가까운 느낌을 받으며, 형욱은 세나를 따라 복도 너머로 조심조심 걸어갔다.
그렇게 걸어가니, 보통 집과 별 다름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마치 거실처럼 보이는 큰 방이 가게 바로 뒤에 존재했던 것이다. 이 방뿐만 아니라, 보통 집이었다면 개인 방이었을 조그만 방 역시 딸려있는 듯했다. 일단 큰 방과 붙어있는 모양새이긴 했지만, 바로 옆엔 버젓한 부엌도 있었다.
이런 데서 사람이 살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멀뚱하게 있던 형욱은, 갑자기 세나가 뭔가 가져다주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게 바지와 윗옷이란 걸 알고 나자, ‘이걸로 갈아입으라’는 뜻이란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거야 언제까지고 이런 옷을 입고 있음 좀 민망하긴 한데.
지금 자기한테 큰 교복을 생각하며, 형욱은 일단 그 옷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바로 근처에 있는 빈 방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자기 걸음걸이가 어색하단 걸 깨달으며.
빈 방으로 들어가자, 전신거울 및 1인용 침대가 놓여있는 게 보였다. 너무나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방을 보며, 형욱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누가 자긴 하는 걸까.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틀림없이 그게 아니었다.
침대에 옷가지를 얹은 뒤, 형욱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물론 앞으로 펼쳐질 일이 무서웠기에 눈을 꼭 감고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소와 다른 느낌이 자꾸만 들었지만, 형욱은 될 수 있는 대로 그걸 무시하려 애썼다. 살면서 이렇게 민망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면 무섭기 짝이 없었지만, 아무튼 형욱은 대충 옷을 입고 나서 천천히 거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형욱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거울한테서 눈을 돌리고 싶어졌다.
거울 너머에 있는 건, 어깨까지 머리카락이 자란 채 조금 헐렁한(세나가 준 옷은 ‘지금’ 자기한테 조금 큰 듯했다. 물론 교복보단 나았지만) 옷을 입은 ‘자기자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지금껏 봐온 자기하곤 큰 거리가 있었다. 일단 몸집이나 키가 퍽 줄어들어서, 마치 한 해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형욱도 지난 한 해 동안 자기가 많이 컸단 건 알고 있었다). 게다가 얼굴도 묘하게 앳되진 게, 진짜로 한 해 전 자기를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여기까지라면, 형욱도 그나마 웃고 넘겼을 터였다. 하지만 문제는 아주 다른 데에 있었다.
자기 몸에, ‘있을 리 없는’ 굴곡이 느껴졌던 것이다.
자기한테서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모습을 보고, 형욱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반사적으로 거울에서 몸을 뗐다.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에, 더 이상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이제 옷도 입었으니, 일단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형욱은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그래서 형욱은 일단 다시 거실(처럼 보이는 큰 방)으로 나와 혼자 숨을 가다듬었다. 이제 어쨌든 ‘지금’ 자기 모습도 확인했으니, 더 놀랄 일도 없으리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건 무척 잘못된 생각이었다.
“아, 나왔구나.”
그걸 본 형욱은, 순간 몸이 딱딱하게 굳는 걸 느꼈다. 아까 전까지 있었던 양갈래 여자애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대신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희한한 느낌이 드는 키가 큰 성인남성이 창가 쪽에 서있었던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그 여자애, 세나와 묘하게 비슷한 느낌도 들었지만, 어느 정도 다부져보이는 몸이나 헐렁한 바지 및 흰 티라는 옷차림이 그런 느낌을 약하게 만들었다.
설마 이 사람과 세나가 같은 사람이기라도 한 걸까.
형욱은 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냥 입만 딱 벌리는 수밖에 없었다.
“…모습을 바꿀 수 있는 힘이요?”
“응.”
잠시 뒤, 형욱은 세나(라고 말하는 남자)와 같이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것도 다른 게 아닌, 그냥 평범한 라면을.
이런 데서 라면을 먹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먹고는 있었지만, 형욱은 라면 맛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지금 이 상황을 믿지 못해서였다. 일단 ‘세나’한테서 말은 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웠다.
세나는 원래 보통 사람이었지만, 몇 년 전 부모님이 집을 나간 뒤 혼자 찾으러 떠돌다 어두운 밤중에 교통사고를 당한 듯했다. 자기 말에 따르면, 밤중이라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찾으려 했던 게 문제였던 듯했다.
그 때, 세나는 ‘보통 이들’과 다른 존재가 되었고, 그 결과 이러한 상태가 되었다. 지금은 거기에 별 신경을 쓰지 않지만, 그 때 세나는 몇 번이고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자기가 어두운 밤이라 한들 아무 문제가 없는 모습이었다면, ‘이런’ 상태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라고.
그래서 자기의 ‘특수한 상태’이기에 쓸 수 있는 힘으로, 이런 모습이 되었던 것이다. 즉, 세나는 정말 여자애가 맞았다. 가끔 기분에 따라 ‘이런 모습’이 될 수도 있을 뿐.
“아, 그, 그렇구나…”
당연히 전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형욱이었지만, 일단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지금 자기가 들은 말은 틀림없이 중학교 1학년 남자애의 수준을 뛰어넘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되물어봤자 돌아오는 답은 뻔했다.
그건 그렇고, 이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라면같은 거 먹으니까 이상한데.
비록 원래와 다른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묘하게 현실감이 없는 느낌이 있는 남자가 라면을 몰두해서 먹는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희한했다. 그걸 가만히 보다가, 형욱은 갑자기 자기가 물어야 할 걸 하나 떠올렸다. 세나 이야기는 잘 들었지만, 하나 이상한 게 있었던 것이다.
그럼, 왜 자긴 이런 모습이어야 하는 거지?
물론 그냥 분풀이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걸리적거리는 건 틀림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찰나, 갑자기 세나가 자기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안 말한 게 있었구나. 그냥 경험하게 하고 싶었어.”
“…네?”
“그러니까, 내가 그런 느낌을 오래 받았잖아. 그래서.”
“아, 그러세요…?”
그게 대체 화났단 말인지 좋은 뜻인지 전혀 알 수 없었기에, 형욱은 그런 얼빠진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기에, 일단 그렇게 이야기를 끝맺어야 했다.
이렇게 라면 맛이 안 느껴졌던 때가 있었나?
너무나 묘한 상황 속에서, 형욱이 할 수 있는 생각이란 고작 그것뿐이었다.